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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7 14:48:50

소일본주의

1. 개요

소일본주의(小日本主義, しょうにほんしゅぎ)는, 1910년대부터 1920년대의 일본에서 경제잡지 『동양 경제 신보』에 근거하는 미우라 유타로, 이시바시 히로야마 등이 주장한 사상이다. 당시 국책의 주류였던 ' 대일본주의 '를 비판하는 것으로 제창되어 정치적·경제적 자유주의와 연결되어 있던 점에 특징이 있다. 만한(만주-한반도)포기론 이라고도 하며, 보다 범위를 한정하여 만주포기론 이라고도 불린다. 현대 중국에서 멸칭으로 쓰이는 소일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소일본주의 체계는 19세기 후반부터 영국 에서 활발해진 '소 영국주의'(Little Englandism)[1]를 모범으로 하고 있다. 대식민지제국이었던 대영제국은, 실은 19세기말 에는 인도를 비롯한 식민지가 경영상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공업화가 진전되어 압도적인 생산력을 획득함에 따라, 식민지경영을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제국유지비 부담 및 식민지분쟁에 의한 재정부담 증가를 꺼리는 사고가 팽배해졌다. 그와 마찬가지로(심지어, 국력도 영국보다 미약한)일본은 조선, 대만 등의 식민지 경영을 실시해도 행정비용 등의 면에서 역시 「출초(수출초과의 준말)」가 되어 낭비가 많아, 그들의 영유를 포기해 독립시켜 「주권선」내지 혹은 일본 본토만의 군사 부담도 작은 '통상국가'로서 번영을 구가하자는 사상이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본격적인 자본주의시장으로 진입하며 러일전쟁의 승리로 세계열강의 자리에 올라섰다. 일본 국내에서는 도쿠토미 소호(徳富蘇峰) 및 다카야마 조규(高山樗牛)들에 의해 고취된 제국주의 열기가 식을 줄 모르고 지속되고 있었다. 대일본주의자들은 대륙팽창정책이 군사적, 경제적으로 이익을 확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서구열강의 아시아 식민지화에 대항할 수 있는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미우라 데쓰타로 (三浦銕太郎, 1874-1972)[2]와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 1884-1973)[3]들의 논의가 나왔다.

맨체스터학파 자유 무역주의자들의 주장에 근거하여 글래드스턴(W. E. Gladstone, 1809-1898) 등 자유당이 지지했다. 이에 반대하여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1804-1881)등을 중심으로 영국 보수당이 주장한 제국주의적 영토확장론이 '대영국주의(Large Englandism)'다.

맨체스터학파에서 소영국주의의 기초를 마련한 것은 아담 스미스였다. 그는 자유방임경제론과 반제국주의의 관련성을 명확하게 지적하면서 식민지 포기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스미스의 사상은 J. S. 밀이 계승했는데, 이 밀의 사상을 계승한 사람이 미우라의 스승이자 동양경제신보사의 2번째 주간(主幹) 아마노 다메유키(天野為之, 1861-1038)[4]였다. 즉‘소영국주의’를 모델로 한‘소일본주의가, 동양경제신보사 안에서 아마노를 통해 미우라에게 계승되어 제창되었으며, 단잔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우라는‘소일본주의를 경제자유주의에 의한‘상공업 발전과 식민지포기에 의한‘소군비주의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청일전쟁 및 러일전쟁 이후의 행정비, 군사비, 국채비 합계를 내고 통계수치를 들면서 국가재정의 대부분이 비생산적인 군비에 충당되었으며 그로 인해 국민 부담이 가중되었음을 증명해 보인다. 대일본주의가 초래하는 경제적 손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소일본주의를 주장한 점에 그 특징이 있다.

2. 역사적 전개

'동양경제신보'는 러일전쟁 후 '삼악법 반대운동'(1906년 -1908년) 이후 군확재정에 대한 반대를 주장하며 제3대 주간(1907년 -1912년) 의 우에마츠 고쇼 아래, 보통 선거 의 실시와 노동자의 권리 보장을 앞장서서 주장했다.

우에마츠의 급사 후 주간으로 취임한 미우라 케이타로 아래 '신보'는 신정혁명 으로 동요하는 중국에 대한 내정 비간섭을 주장했다. 또 같은 시기의 다이쇼 정변 에서는 군 확로선의 원흉인 ' 제국주의 '적 국책을 부정하고, 1913년 에 게재된 논설 '대일본주의냐, 소일본주의냐'에서는 군국주의·전제주의·국가 주의로 구성된 '대일본주의'의 안티테제로 산업주의 · 자유주의 · 개인주의 를 3개의 기둥으로 하는 '소일본주의'를 제창했다.

미우라는 또 만주 포기론·이민불요론을 주장하며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 청도 점령과 21조 요구에 반대했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관해서는 1910년대 초반에는 군국주의 재정비판 및 보호무역주의 측면에서 조선정책을 비판하고, 1910년대 중반 이후에는 식민지를 본위로 한 전면적인 정책비판을 전개했다.

미우라에 의한 「소일본주의」의 주장은 1920년대 에 이르고 그를 계승해 주간이 된 이시바시 히로야마 아래 식민지 전면 포기론으로 발전했다. 1919년 3.1운동에 즈음 하여 야마야마가 집필한 사설 '선인폭동에 대한 이해'는 '선인폭동' 즉 3.1운동을 세계적 규모의 새로운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자리매김하여 '무릇 그 어떠한 민족도, 타민족의 속국인 것을 유쾌하게 여기는 경우는 그 어떤 옛날에도 없다”며 민족자결을 주장했다.

또 3.1운동의 원인을 조선인에 의한 「독립자치의 요구」에 근거하는 것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 그 자체를 문제로 인식해, 그들의 반항을 완화하는 방법은 자치 부여 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 주장은 '소일본주의'를 민족자결주의에 근거한 식민지 정책 비판으로 한 걸음 전진시키는 것이었다.

이시바시는 워싱턴 회의 직전인 1921년에 사설 '일절을 버리는 각오-태평양회의에 대한 우리 태도'를 발표하고, 워싱턴 회의의 주제가 '군비 축소'임과 동시에 '식민지 문제'이기도 하다는 인식을 보여주고, 이 회의에서 일본이 영미에 대해 우위에 서서 회의에서 주도권을 잡는 정책이란, 군비 축소의 제안과 「일절을 버리는 각오」라고 결론지었다. 이는 조선·대만 등에 '자유'를 허용하고 만주· 산동 등 중국에 존재하는 일본의 특수권익을 일체 포기한다는 주장을 포함하여 전면적인 '식민지 포기론'에 도달한 것이다. 그 직후에 쓰여진 사설 '대일본주의의 환상'에서는 동아시아에서의 '대일본주의'의 경제적 '무가치'를 설교하고 일본의 자립에 있어서 식민지가 경제적·군사적으로 필요하다고 하는 주장에 반론하고 있다.

또, 열강이 광대한 영토·식민지를 가지고 있는데 일본만이 그것을 버려야 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영국 의 인도 지배( 영국령 인도 제국 )는 영국에 '대규모 경제적 이익'이 있다고 평가했고, 반면 '조선·대만·참태 내지 만주'는 일본에 있어서 경제적 이익이 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일본의 발전에 필요한 것은 영토보다 오히려 자본이며, 경제 진출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에 중국·대만·조선에 대해 '자유해방' 정책을 실시해 보다 친밀한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이시바시의 소일본주의는 식민지 지배 자체의 부정이 아니었지만 식민지 포기를 공공연히 주장한 임팩트는 작지 않았다.

3. 한계

소국주의가 대국주의라는 현실에 대해 다소 이념적인 입장에서 안티테제를 제시한 것이라면, 소일본주의는 세계열강의 지위에 오른 일본이 자국의 제국주의, 식민지주의정책 추진으로 인한 경제적 로스를 의식하고, 국익을 지키자는 입장에서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근대 일본의 소국주의는 아시아에 대해 때로는 수평적 연대를 일탈해 일본 맹주적 연대 또는 침략적 통합과의 접근이라는 딜레마에 빠지면서도 아시아연대, 세계연대, 세계평화의 이념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내비친다. 반면, 소일본주의는 아시아 식민지주의, 제국주의라는 큰 전제에서 결국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일본의 경제'라는 한 점으로 수렴되는 듯 하다.

미우라와 단잔이 논진을 폈던 <東洋経済新報>의 기조는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이전의 정부 협력적 태도에서 정부 비판적 태도로 바뀌었다. 즉, 이전의 <東洋経済新報>는 대륙진출도 인구과잉을 해소할 방도로 적극적으로 긍정했으며 1900년 의화단진압출병 시에도 제국주의 경쟁을 위해 조기출병을 주장했다. 따라서 러일전쟁도 불가피하다고 시인했으며 조선의 보호국화는 물론 만주의 확보도 당연시했다. 이전의 미우라의 사설은 이러한 논조의 기조에 따르는 것이었다. 러일전쟁 전년인 1903년 「朝鮮解放論」에서는 인구 배출장소 및 식량공급원으로서 “조선을 제국의 식민지로 하자”고 주장했으며[5] 1904년 「満洲問題」에서는 타국간섭을 배척하고 만주를 러일협상을 통해 분할하자는 현실론을 주장했다.[6] 그는 국민소득의 3분의 1을 전쟁으로 소비하고 있다는 경제적 난국을 직시하고 있었다.[7] 여기에는 아시아 침략적 자세가 분명히 드러나 있으며, 식민지 제국주의로 인해 발생한 경제적 손실을 식민지 확보를 통해 메꾸자는 사고를 볼 수 있다.

소일본주의는 식민지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론에 입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단잔의 초기 사설에서 이미 유사한 사고가 보였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 단잔은 일본이 식민지를 전면적으로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일본의 모든 화근은 종종 말하는 바와 같이 소욕(小欲)에 사로잡힌 까닭”으로 “대욕(大欲)”을 보지 못한 데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이나 대만, 지나, 만주 또는 시베리아, 사할린 등의 얼마 되지 않는 토지와 재산에 눈이 어두워 그것을 보호하랴 조치하랴 급급하고 있다. 그러하므로 적극적으로 세계 대대적으로 책동할 여유가 없다. 비근한 예를 들자면 왕보다 비차를 아끼는 서툰 장기 꼴이다. 결과는 겨우 빼낸 비차도 빼앗기고 왕도 궁지에 몰리게 될 것이다. 이른바 태평양 및 극동회의는 바로 이 상황에 우리 일본이 떨어지려고 하는 형세를 나타내는 것이다.
-「一切を棄つるの覚悟」(1921年7月23日「社說」[東洋経済新報], 松尾尊兊 [石橋湛山評論集] 岩波書店, 2012, p.95 以下).

단잔의 식민지정책반대론은, 영국은 인도 지배를 통해서 큰 경제적 이익을 얻었지만, 일본은 조선, 대만, 만주 지배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 근거한 것이었다. 일본 경제에 필요한 것은 영토가 아니라 자본이며 따라서 중국, 대만, 조선에게 자유해방을 허락하고 더욱 친밀한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경제 진출의 발판으로 삼자는 사고였다. 단잔의 ‘소일본주의’에 대해서는 위에서 검토한 것과 같이 미우라의 ‘소일본주의’를 넘은 식민지 전폐론, 도덕주의, 평화주의 등의 주장을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주장이 철저한 경제논리에 근거하며 ‘대동아 공영론’에 근접한 ‘아시아주의’적인 것이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1] 19세기 중엽에,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에 반대하고 식민지 지배의 부담을 줄여 작은 영국을 만들자는 사상[2] 미우라 데쓰타로는 도쿄전문학교에서 아마노 다메유키 문하에서 배웠다. 1899년부터 아마노가 주간을 맡고 있던 <東洋経済新報>의 논설을 담당했으며 1910년부터 <東洋時論> 편집장을 지낸 후 1912년에 <東洋経済新報> 주간이 되었다. 1924년과 1925년에 걸쳐 주간과 대표이사를 사임했다(후임은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 이후 상공심의회, 일만경제간담회, 쇼와연구회, 손해배상위원회 위원, 일본경제연구소 이사, 일본관세협회 회장을 거쳤다. 1946년 이시바시 단잔이 대장성 대신에 취임하면서 다시 東洋経済新報社로 돌아와 회장을 맡았다(1947년 퇴임)[3] 와세다 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후, 1908년 毎日新聞社를 거쳐 1911년 동양경제신보사에 입사했다. 미우라가 편집장을 맡고 있던 <東洋時論\>의 편집에 참여했으며, 미우라로부터 동양경제신보의 주간직, 대표이사직을 각각 1924년, 1925년에 물려받았다. 전후 1946년 요시다(吉田) 내각 대장대신(大蔵大臣), 1954년 하토야마(鳩山) 내각 통상산업대신, 1956년 55대 총리대신 등을 거쳤다[4] 경제학자, 언론인, 정치인. J. S. Mill 등 고전파 경제학 및 경제이론의 보급에 힘썼으며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다구치 우키치(田口卯吉) 등과 함께 메이지 초기 3대 경제학자로 언급되기도 한다.[5] 「朝鮮解放論」(1903年11月25日). 이하 <三浦銕太郎論説集ー大日本主義か小日本主義か>(東洋経済, 1995)참조.[6] 「満洲問題」(1904年10月5-25日).[7] 「日露戦争の経済的影響」(1905年1月15-2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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