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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10:48:09

센다이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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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센다이 번
仙台藩
파일:img-map-sendai.png
중심지
미야기현 센다이시
다이묘 다테 가문
고쿠다카 62만 석(공식)
1. 개요2. 역사3. 역대 번주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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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도 시대 무츠 국 내의 현재의 미야기현 전체와 이와테현 남부, 후쿠시마현 신지마치에 해당하는 지역을 다스린 일본의 .[1] 초대 번주 다테 마사무네 이래 다테 가문이 지배했다.

2. 역사

도쿠가와 가문의 가장 가까운 동맹인 초대 번주 다테 마사무네는 현재 도호쿠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인 센다이를 건설했다. 그는 이곳에 센다이 성을 세우고 본거지로 삼아 센다이 번을 수립했다. 센다이 번은 도호쿠 지방에서 제일 큰 번이 되었고, 다테 마사무네가 받은 당시는 센다이 평야가 개발이 덜 되어 58만석이라는 저평가된 석고를 가지고 있었지만 꾸준히 개간을 장려한 결과 실질 고쿠다카가 100만 석에 달하는, 전국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큰 영지를 가진 번이 되었다. 1869년 기준으로 일본의 모든 번들 중 카가 번에 이어 두번째로 높은 실질 석고를 기록했다. 특히 쌀의 생산량도 많은데다가 입지상으로도 막부의 수도인 에도와 비교적 가까운 도호쿠 지방 중남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전성기에는 에도에서 거래되는 쌀의 1/3이 센다이산일 정도로 에도에 많은 쌀을 공급하는 중요한 번이었다. 센다이 번의 풍흉 여부에 따라 그 해 에도의 쌀값이 결정되었다고 할 정도. 정치적으로도 도자마 번들 중 친(親) 도쿠가와 성향이 강해 우대받은 편이었다.

9대 번주 다테 지카무네는 번주 자리를 물려받을 후손이나 양자를 남기지 못한 채 사망해서 번의 폐지를 막기 위해 그의 이복동생[2]인 다테 나리무네가 대신 다테 지카무네 행세를 하며 3년 동안 다테 지카무네의 죽음을 숨겼다는 야사가 있다. 이렇게 번주를 바꿔치기한 것을 막부에게 숨기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한 센다이번의 가신단이 벌인 은근히 코미디스러운 활약들도 야사로 많이 전해진다. 다만 이 꼼수를 막부 측에서도 어느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센다이 번이 워낙 크고 중요한 지역이어서 함부로 폐번하기엔 막부로서도 부담스러워서 모르는 척 넘어가 주었다는 해석도 있다.

재미있게도, 6대 번주인 다테 무네무라(伊達宗村, 1718 ~ 1756)에게도 상술한 지카무네의 사례와 비슷한 방법으로 다른 가문인 호소카와 가문을 구한 선례가 있다. 당시 구마모토번의 번주인 호소카와 무네타카가 하타모토인 이타쿠라 카츠카네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었는데[3] 아직 자손도 없고 양자를 들이지도 않은 상태에서 뜻하지 않게 젊은 나이에 살해당한 터라 호소카와 가문의 번주 자리를 이을 후사가 없어서 가문이 개역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마침 살인사건 현장 근처를 지나고 있던 센다이번주 다테 무네무라가 재치를 발휘해 무네타카가 '아직 숨이 붙어 있으니 어서 저택으로 옮겨 치료하라' 고 거짓말을 해줬고, 그 말에 따라 얼른 무네타카의 시신을 호소카와 저택으로 옮기고, 무네타카가 동생 나가오카 노리오(長岡紀雄, 1721 ~ 1785)[4]를 양자로 삼은 후에 이튿날 결국 숨을 거뒀다고 상황을 꾸며내는 한 편의 연극을 펼쳐 개역을 막았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다테 무네무라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했다. 만약 호소카와 가의 가신들 중 하나가 그런 아이디어를 내서 연기를 하려고 해도 뻔한 송장을 두고 속아줄 사람도 없고 들이닥칠 막부 관리들을 납득시킬 수도 없었겠지만, 도쿠가와 가와 그 방계 일파들을 제외하면 한손에 꼽힐 정도로 거대한 입지를 가진 센다이번의 번주인 무네무라가 즉석에서 두둔해주니 거기에 감히 딴지 걸 사람은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쿠마모토 번도 센다이번만큼은 아닐지언정 규모가 컸던 터라[5] 무작정 개역시켰다간 실업자 대량 양산의 부작용을 낳을게 뻔한지라 막부 수뇌부가 알면서도 묵인해줬을수도 있다.[6]

막말에는 번정 개혁 실패로 재정난에 시달렸다. 보신 전쟁에서는 아이즈 번이 신정부의 처벌을 피하도록 구명하려다가 오우에쓰 열번동맹의 수장으로 말려들어갔고, 신정부에 맞서 싸우다가 완패했다. 그나마 번 자체가 폐지된 아이즈와는 달리 센다이번은 명목상 반유신 동맹의 수장이긴 했지만 실제 주도자는 아이즈이고 센다이번은 끌려들어간 것에 가깝다는 사정을 감안해주기도 했고 번의 규모가 규모인지라 신정부측에서도 완전히 철번시키기는 부담스러웠는지 28만 석으로 감봉되는 선에서 번의 폐지만은 모면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화족으로서 수여된 작위가 백작위에 머무르거나 신정부의 주요 인사에서 배제되는 등 유무형의 손해를 보았다.

3. 역대 번주

4. 기타


[1] 추가로 현재의 이바라키현 일부 및 시가현 일부 지역에도 월경지를 보유하고 있었다[2] 나이는 동갑인데 생일은 몇 개월 차이 난다. 부친은 동일 인물이지만 모친이 다른 인물인 이복 형제이다.[3] 본래 이타쿠라 카츠카네는 이타쿠라 가문 본가의 번주인 카츠키요가 자신을 폐하려고 한다는 망상에 빠져 그를 살해하고자 했는데 호소카와 가문의 큰 원 하나를 작은 원 8개가 둘러싸고 있는 구요성 문장이 이타쿠라 가문의 문장과 비슷하게 생겨서 호소카와 무네타카를 이타쿠라 카츠키요로 착각하고 살해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건에서 호소카와 가를 도와준 센다이번 다테 가문의 문장 중 하나도 구요문이다. 이것도 센다이번 초대 번주인 다테 마사무네가 호소카와 가문에게서 받은 것이다.[4] 입양되면서 이름을 호소카와 시게카타(細川重賢)로 고쳤다. 그는 통치하면서 번의 재정을 개혁하고, 텐메이 대기근이 일어났을 땐 사재를 털어 구제에 나서는 등 당대에 명군으로 불렸다.[5] 쿠마모토 번의 명목상 고쿠다카는 54만석이었지만 실제로는 6~70만석에 가까웠다.[6] 에도시대의 사회문제 중 하나는 로닌이었다. 근데 이 로닌은 바로 해고된 무사들인데다 그 수가 50만이나 되어서 막부의 큰 골칫거리였다. 그러니 무턱대고 개역시켰다간 로닌 문제가 더 심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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