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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28 17:19:33

성 이사악 대성당

러시아어 : Исаакиевский Собор (이사악키이예프스키 사보르)
영어 : Saint Isaac's Cathed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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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과거의 대성당2.2. 네 번째 대성당2.3. 박물관
3. 건물

1. 개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정교회 성당으로, 창세기이사악이 아니라 정교회의 성인인 달마티아의 이사악에게 봉헌되었다. 달마티아의 이사악의 축일은 율리우스력으로 5월 30일인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창건자인 표트르 대제가 바로 이날에 태어났기에 그를 자신의 수호성인으로 삼았던 것에서 성당의 이름이 비롯되었다. 19세기 중반까지 겨울궁전보다 높은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했기 때문에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 어디에서나 성당의 빛나는 금빛 을 바라볼 수 있다. 주철로 건축된 성 이사악 대성당의 미국 국회의사당의 돔 건축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소련 시대에 정교회가 탄압받으면서 그 때부터는 성당이 아니라 박물관으로 사용되지만 1990년부터 일정한 날에는 정교회 행사를 다시 열고 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의 흔적이 남아있어 기둥과 벽에서 총알자국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2. 역사

2.1. 과거의 대성당

첫 번째 성 이사악 대성당은 1707년 표트르 대제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바실리예프스키 섬에 세워졌다. 길이 18m, 폭 9m, 높이 4~4.5m의 목조 건물로 된 소박한 규모였으며 표트르 대제가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황후와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으나 강가에 너무 가까이 지은 탓에 건설된 지 10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 건물에 사용된 자재가 썩기 시작했다. 이에 1717년 원로원 광장으로 부지를 옮겨 공사에 들어가 1727년 두 번째 대성당을 지었고, 바로크풍의 종탑도 추가했다. 하지만 벽면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1735년에 벼락을 맞아 불타면서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러시아 정부는 다시금 성당을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세 번째 대성당은 예카테리나 2세 때인 1761년 건설을 시작해 약 40년 후 파벨 1세 때인 1802년 5월 30일에 축성되었다.

2.2. 네 번째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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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드 몽페랑(Auguste de Montferrand)
1786년 1월 23일 ~ 1858년 7월 10일
세 번째 성 이사악 대성당이 완성된 뒤 겨우 6년밖에 지나지 않은 1808년, 알렉산드르 1세 황제는 더욱 크고 아름다운 성당을 짓고자 설계 공모를 몇 차례 했지만 만족스런 결과를 얻지 못하자, 아구스틴 드 베탕쿠르(Agustín de Betancourt, 1758-1824)에게 새로운 성당을 설계할 건축가를 찾으라고 명령했다. 베탕쿠르는 프랑스 출신으로 당시까지 무명인 20대 후반 젊은 건축가 오귀스트 드 몽페랑을 공사 책임자로 선정했다. 알렉산드르 1세가 황제의 권위를 과시할 수 있는 장려한 건물을 원함을 파악하자 몽페랑은 신고전주의를 바탕으로 삼아 성당의 평면구조를 그리스 십자가로 설정하고 코린트식 열주와 박공지붕으로 된 파사드를 네 면에 두며, 높게 세운 드럼 위에 43 m 높이 을 얹는 대담한 설계도를 작성했다.

본격적인 공사는 1818년 2월 20일에 황제의 승인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는데 몽페랑이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바로 성당의 토대를 다지는 작업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습지대를 매립해 세운 도시기 때문에, 공사현장의 지반을 충분히 다지지 않으면 건물이 완성되기도 전에 스스로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붕괴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땅을 파서 물을 퍼내고 길이 6.5 m, 두께 26~28 cm인 나무 말뚝 10,762개를 수직으로 박는 기초 공사에는 5년이 소요되었다.

한편 성당의 파사드에 세울 원기중 48개는 핀란드에서 채석한 화강암 원석을 바지선에 실어 운송했는데, 기둥 하나의 무게가 125톤에 달했다. 기둥들을 제자리에 세우는 데에만 3년 가까이 걸렸고(1828~1830) 매끄럽게 연마하는 데 다시 4년여가 더 걸렸다. 각 파사드마다 12개씩 원기둥을 세웠고, 그 위를 덮은 박공지붕은 12사도의 청동상으로 장식했다. 그동안 벽돌공들은 성당의 주요 벽체와 볼트 천장을 마무리 지었다.

40년간 계속된 공사 끝에 마침내 1858년 5월 31일 네 번째 대성당이 완공되었는데, 신성한 건물에 동물의 힘을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공사 기간 내내 40만 명 넘는 사람들이 동원되어 오로지 인력으로만 건물을 지었다.(…) 공사 책임자인 몽페랑은 그로부터 한달 남짓 지난 7월 10일에 72세를 일기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인트 폴 대성당 건설을 담당한 크리스토퍼 렌처럼 몽페랑 역시 자신이 설계한 대성당이 완공되는 것을 지켜본, 유럽에서 보기 드문 기록을 세운 건축가였지만 사후에 받은 대우는 렌보다 못했다. 몽페랑은 평생을 바쳐 지은 성 이사악 대성당에 묻히기를 바랐고 그의 아내도 남편의 마지막 소망을 들어줄 것을 러시아 정부에 청원했지만 황제는 몽페랑이 정교회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성당 내의 매장을 거부했다. 결국 몽페랑의 유해는 아내가 프랑스로 운구해 그의 어머니 무덤 곁에 묻혔다.

2.3. 박물관

관람 파트는 두 부분으로 나눠지며 매표소에서 각각 따로 표를 판매한다. ISIC 카드 소지자 기준으로 두 곳 모두 입장하는데 300루블을 지불해야 한다. 한 곳은 콜로네이드. 즉 성당 돔 지붕 테두리에 올라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며 나머지 한 곳이 성당 내부 겸 박물관을 둘러 볼 수 있는 곳이다. 성당 내부에서는 200루블에 오디오 가이드를 제공한다.[1] 성당 한쪽 구석에서 200루블에 기념 주화를 판매하는 자판기가 있다.

내부관람 시 특정구역을 제외하고는 사진 촬영이 허용되어 있다. 여느 정교회 성당이 그러하듯[2] 오후 6시에 매표소가 문을 닫은 뒤로는 저녁기도 예식인 만과가 시작되고, 관광객 또한 무료로 입장이 가능하다. 단 이때부터는 기도예식을 진행하므로 사진 촬영이 전면 금지되고, 최대한 조용히 둘러보다가 나감을 추천한다. [3] 이때에는 당연하게도 여성 관광객들은 러시아 정교회 규칙에 따라 머리 부분에 스카프를 둘러야 한다.

3. 건물


[1]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모스크바와는 다르게 대부분의 유명 관광지에서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지원한다. 홉앤 홉아웃 투어 관광 버스에서도 지원해준다. 유람선은 개인이 운영하는 게 많아서 한국어 서비스를 못 받는다. 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제일 많이 홍보하는 게 유람선인걸[2] 피의 성당도 이런 식으로 무료 입장이 가능하다.[3] 단 콜로네이드가 오후 6시 이후에도 유료로 표를 사야 한다. 여름에는 야간 개장을 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