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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11:46:52

설지(승려)

1. 개요2. 생애3. 사상
3.1. 무력한 깨달음3.2. 현성공안3.3. 욕망3.4. 수행3.5. 윤회3.6. 의식
4. 비판5. 링크6. 저서

1. 개요

대한민국의 승려, 작가. 조계종 소속으로 2017년 사미계를 받았다. 2021년 구족계를 받았다.

2. 생애

간호학과를 중퇴했다. 친구의 죽음과 외삼촌의 죽음을 겪고, 죽음에 대한 공포, 실존적 불안을 해결하고자 승려가 되었다.

3. 사상

3.1. 무력한 깨달음

초기 선불교의 정신을 강조한다. 현재 승가집단 및 재가불자들은 깨달음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깨달음과 열반을 대상화하여 얻고, 성취하려고한다. 깨달음을 통해 현실을 개혁하고, 내면의 평화를 찾으려고한다. 그러나 깨달음은 언어사유에 가려진 존재의 본질을 간파하여, 실존적 괴로움을 없에는 것이다. 즉 본래부터 무아임을 깨달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를 해소함을 통해 고를 종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을 본질적으로 현실과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성취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전적으로 돈오돈수다. 이런점에서 그의 주장은 루퍼트 스피라족첸과 맥을 같이하며, 철저한 무아론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강병균과 통한다.

참선은 존재의 바탕을 깨닫는 일이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아니다. 테오도르 준 박간화선 수행으로 심신을 수련할 수 있다고 주장했을 때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였다.[1] 자신이 실제 동안거를 나면서 느낀 생각들을 <참선일기>에 정리하였다.

깨달음의 현실적 가치 부정의 측면에서 그는 묵조선을 지지하며 조사선에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여러모로 U. G. 크리슈나무르티와 상통한다. 그 자신도 U. G.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3.2. 현성공안

<인생의 허무함에 관한 논고>에서 그가 속세에서 살아오는 과정에서 느낀 고민과 실존적 절망을 엿볼 수 있다. 인간의 일부는 선천적으로 존재론적 고민을 놓고 괴로워하며 결국 쇼펜하우어나 초기불교의 염세적 세계인식에서 답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삶속에서 삶을 거부하는 것은 모순이다. 설지는 이런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선불교가 탄생했다고 보며 "희망없음 위에서 삶을 절대 긍정"하는 것을 지지한다. 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곧 진리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불이일원론의 가르침이 선불교의 본질과 같다고 본다.[2]

3.3. 욕망

승가집단은 깨달음의 전승을 담당하는 현실속의 의무를 담당해야 하므로 욕망과의 단절을 추구한다. 그러나 본래 선의 정신은 그 어떤 것도 부정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견처를 두지 않는 중립적 입장(혹은 오직 모를뿐)이며 따라서 선불교가 '욕망'을 긍정한다고 본다. 성스캔들을 일으킨 숭산이나 라메쉬 발세카의 사례를 자주 언급하며 이들에 대한 비판이 깨달음과 욕망의 관계에 대한 오해에 근거하고 있다고 본다.

3.4. 수행

깨달은 '나', 마음챙김하는 '나'가 있는 수행은 진정한 불교 수행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심리적 편안함이나 삼매(선정)를 위한 수행은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 고집멸도에서 고는 생각으로서의 자아로 인해 발생되어지는 괴로움이며, 이는 언어사유속의 '나'는 허구라는 것을 간파함을 통해 종식될 수 있다.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싯다르타가 구도의 길에서 2명의 스승으로부터 심원한 선정을 경험했음에도 이를 포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현재 조계종의 수행이 삼매를 위한, 깨달음을 위한 간화선 수행으로 변질되었음을 비판한다. '내'가 화두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화두가 언어사유가 만든 착각인 '나'를 해체하는 것이 되어야한다.

3.5. 윤회

십사무기에 대한 고타마 싯다르타의 대답 거부나, 그가 우파니샤드의 아트만 사상을 정면으로 비판한 점을 고려할 때, 부처가 말한 윤회는 무아윤회라는 입장이다. 물질주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분석한 강병균은 과학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같은 결론을 내린다.[3]

3.6. 의식

의식에 대한 물질주의 관점이 무아론과 조화된다고 본다. "눈, 귀, 코, 혀, 몸, 뇌 여섯 개의 감각기관이 색깔, 소리, 냄새, 맛, 감촉, 개념을 통해 세계를 표상하는 것. 이것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한 인간의 세계"라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의식의 어려운문제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의식의 불가해함은 의식이 근본적으로 본래면목의 핵심적 부분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본래면목, 왜 세상이 무가 아니라 유인가, 물자체에 대한 의문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4. 비판

불교는 의식의 변혁을, 수행의 필요성을 믿는 종교이다. 그의 묵조선에 대한 해석은 대승불교의 인간에 대한 믿음, 인간이 스스로를 바꾸고자 하는 선한 의지를 부정할 것을 암시한다.

5. 링크


6. 저서



[1] https://blog.aladin.co.kr/737089203/11357722[2] 그러나 비이원론에서 말하는 모든 의식 현상의 배후로서의 신의 관념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의식 또한 본래면목의 일부이기 때문이다.[3]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75474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