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동일 石東一 | |
출생 | 1951년 |
전라남도 광산군(現 광주광역시 광산구) | |
사망 | 2023년 2월 14일 (향년 71~72세) |
서울특별시 은평구 통일로 가톨릭대학교 은평성모병원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가족 | 남동생 석동율 배우자 강송희 슬하 1남 1녀[1] |
학력 | 광주서중학교 (졸업) 광주상업고등학교 (졸업) 조선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
직업 | 탐험가, 환경 운동가, 사진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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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탐험가, 환경 운동가, 작가. 국내의 동굴 탐험가하면 보통 이 인물을 먼저 떠올릴 정도로 유명한 탐험가다.2. 생애
중학생 때부터 등산을 좋아했던 소년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산악부에서 전국고교 등반대회에서 3년 내내 우승을 차지하기도 할 정도로 등반 실력 역시 뛰어났다고 한다.대학을 졸업한 후 광주에서 '샤모니'라는 등산장비점을 운영하면서 1970년 히말라야를 등반할 예정이었지만 집안의 반대로 참가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 원정대에서는 사고로 그의 선배가 사망했기 때문에 그는 이 일로 충격을 받고 높은 산을 등산하는 것 대신 동굴 탐험을 하기 시작했다.
1976년 그가 탐험한 첫 동굴은 충북 단양군의 노동동굴이었다.[2] 이 경험을 시작으로 그는 많은 동굴을 탐험하며 뛰어난 촬영 솜씨로 동굴 내부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여러 서적으로 출간했고, 문화재관리국 동굴자문위원으로서 전국의 동굴 탐사를 통해 '동굴 휴식년제'를 주장하는 등 환경운동에도 앞장섰다. 그의 동생 석동율의 증언에 따르면 대만에서도 그가 찍은 동굴 사진을 35개월간 전시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는 199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환경 운동가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시작은 동강댐 건설이었다. 동강댐이 건설될 예정이었던 백룡동굴 내부에는 마치 사람의 음경처럼 생긴 종유석이 있었는데, 그것을 멋대로 잘라간 사실을 폭로한 것을 계기로 영월댐 반대 운동에 나섰고, 이때 댐 건설시 보상을 기대한 수몰 예정지 주민들에게 2시간 동안 승용차 안에 감금되었다 풀려나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동강댐은 건설되지 않았고, 백룡동굴을 비롯한 소규모 자연동굴 249개가 물에 잠기지 않도록 막아냈다.[3] 이 사건으로 1998년 국내 언론사 환경 담당 기자 모임인 환경기자클럽이 주는 올해의 환경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23년 암 투병 끝에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3. 여담
- 흔히 탐험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민주화 운동을 한 전적도 있는 인물이다. 위의 프로필에서도 알 수 있듯 석동일의 고향은 광주인데, 그가 젊은 시절에 광주는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고,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던 학살을 사진과 비디오로 남겨 세상에 알렸다. 그 사진과 비디오의 판매 수익이 1억이 넘었다고 하는데, 그는 이 수익을 전부 민주화 운동에 사용했다.
- 동굴 탐험을 하면서 사고를 당한 경험이 있다. 동굴의 좁은 틈을 기어가다가 약간 구부러진 바위틈 사이에 몸이 꽉 껴버린 적도 있었고,[4] 동굴 내 폭포를 밧줄을 타고 내려가다가 중간에 한 번 실신하고, 다 내려온 뒤에 기절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깨어나긴 했는데 다시 올라갈 힘이 남아있지 않아 폭포 위에 있던 탐험 일행 동생들이 그를 끌어올려야 했고, 결국 그가 올라온 후에는 동생들이 쓰러졌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