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뮤얼 라이언 커티스 Samuel Ryan Curtis | |
출생 | 1805년 2월 3일 |
뉴욕주 챔플레인 | |
사망 | 1866년 12월 26일 (향년 61세) |
아이오와주 카운실블러프스 | |
복무 | 미국 육군 |
최종 계급 | 소장 |
복무 기간 | 1831~1832 1846~1847 1861~1865 |
참전 | 미국-멕시코 전쟁 남북 전쟁 |
학력 | 미국육군사관학교 |
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뉴욕주 챔플레인에서 태어났고 1832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포트 깁슨에서 복무했으나 1년만에 그만두고 오하이오주로 이주해 엔지니어직에 종사했다. 그러다가 미국-멕시코 전쟁이 발발하고 대령계급으로 제3오하이오의용연대를 지휘해 멕시코군과 전투를 치렀다.전후 엔지니어직으로 복귀했고 아이오와주 디모인으로 이주해 활동했다. 또한 공화당 당원으로 입당해 정치계에 투신했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열렬한 지지자로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제2아이오와의용보병연대장으로 북군에 참가했다. 이후 준장으로 진급해 남서군 예하 헨리 할렉의 지휘를 받았다.[1]
미주리주 롤라를 본부로 삼고 아칸소 준주로 이동해 피리지 전투 당시 공을 세워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아칸소 준주 헬레나를 점령했고 캔자스, 인디애나 지역사령관이 되었으나 사임했고 그의 아들이자 제임스 G. 블런트의 부관인 헨리 H. 커티스가 백스터스프링스 전투에서 전사하자 미주리로 복귀해 스털링 프라이스와 함께 미주리를 방어했다. 웨스트포트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미네소타, 다코타 준주의 원주민들과 갈등을 빚어 사임했다.
아이오와로 복귀해 유니언 퍼시픽 철도에서 일하다가 1866년 사망했다.
[1] 당시 프란츠 시겔, 알렉산더 애스보스, 제퍼슨 C. 데이비스의 부대가 예하부대에 속해있었다. 이후 시겔이 사임힌고 후임으로 유진 A. 카가 연대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