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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0 13:03:51

사카타 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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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타 에이오
坂田栄男 / Sakata Eio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Eio_Sakata.jpg
출생 1920년 2월 15일
도쿄도
사망 2010년 10월 22일 (향년 90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소속 일본기원
입단 1935년
은퇴 2000년
단급 九단
일본기원 사카타 에이오 소개 페이지

1. 개요2. 경력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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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img.47news.jp/PN2010102201000647.-.-.CI0003.jpg

일본바둑 기사.

2. 경력

다카가와 가쿠 이후 1961~1967년 혼인보전 7연패를 달성했다. 혼인보전 7연패의 업적을 인정받아 은퇴 후 혹은 60세 이상부터 명예 혼인보라고 자칭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는데, 해당 칭호가 1998년에 21세(世) 혼인보 슈사이 이후의 대를 잇는 "○○세 혼인보 칭호"로 변경되면서 "23세 혼인보 에이쥬(本因坊栄寿)"라고 자칭할 수 있게 되었다.[1][2] 1963년에는 명인 타이틀을 획득해, 선수권제 최초의 명인 혼인보가 되었다.[3] 그 밖에도 각종 타이틀을 휩쓸며 린하이펑이 등장하기 전까지 일본 바둑계에서 명실상부한 압도적인 1인자로 군림했다.[4][5] 1978년부터 1986년까지는 일본기원 이사장으로 재임하기도 했다. 통산 1117승 16무 654패.

3. 기타



[1] 혼인보 타이틀을 획득한 기사는 혼인보 가문을 계승하는 취지에서 이름에 '秀' 자나 '丈'자, '元'자나 '昭', '寿' 자등의 글자를 넣은 호(号)를 쓸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다. 다만 조치훈은 그냥 본인의 이름을 사용했는데, 이건 조치훈 본인이 자신의 본명 외에 다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2] 1998년에 혼인보전 10연패에 성공한 조치훈이, 그 공적을 인정받아 곧바로 25세 혼인보를 자칭할 수 있게 되면서, 혼인보전의 명예 칭호가 현재의 방식(혼인보전 5연패 이상 혹은 통산 10회 이상 획득한 기사는 은퇴 후 또는 60세 이상부터 "○○세 혼인보"를 자칭할 수 있으며, 9연패를 달성한 기사는 곧바로 "○○세 혼인보"를 자칭할 수 있다.)으로 바뀌게 되었다.[3] 그 이전에 명인 자리에 올랐었던 역대 혼인보들도 혼인보이자 명인이었지만, 그것은 그들이 혼인보 가문의 당주이자 당대 1인자였기 때문이다. 타이틀이 신문 기전화되기 전의 일이었고, 혼인보와 명인 타이틀이 모두 신문 기전화된 이후 혼인보와 명인 타이틀을 동시에 차지한 사람은 사카타 에이오가 최초였다.[4] 사카타 에이오의 전성기 시절은 일본 최고=세계 최고였던 시절이었다. 그런 일본에서 각종 타이틀을 휩쓸고 1964년에는 연간 30승 2패(연간 최고 승률 부문 역대 1위.)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5] 다만, 이후의 실적과는 달리 프로 입단은 굉장히 어렵게 했었는데, 어렸을 때 병약했던 사카타가 입단 시험을 치를 때 상대방들이 체력전으로 밀어붙였기 때문.[6] 정확한 일본어 별명은 カミソリ坂田(면도칼 사카타. 일본어 독음은 카미소리 사카타.)#[7] 유현. 일본어 독음은 유겐.[8] 찬찬. 일본어 독음은 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