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8-24 16:20:16

사치홍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사치홍
史致弘[1]으로 표기된 문헌도 있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청주 사씨[2]
출생 1864년[3] 12월 20일
경상도 창원대도호부 동면 이신풍리
(현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 용전리)
사망 1929년 4월 21일
종교 기독교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341호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64년 12월 20일 경상도 창원대도호부 동면 이신풍리(현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 용전리)에서 아버지 사상문(史相文, ? ~ ?. 5. 2)과 어머니 경주 최씨(? ~ ?. 11. 2) 최성엽(崔星燁)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창원군 용전리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하던 1919년 3월 중순, 창원군 창원면 중동(현 창원시 의창구 중동)에 있던 청년회관에서 설관수·송석민(宋錫敏)·신경환(申璟煥)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이들은 3월 23일 장날에 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각각 5백여 매씩 만들었는데, 이때 사치홍은 창원군 동면 지역의 군중동원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거사 당일인 3월 23일 그는 창원공립보통학교 내 대수정에 집합한 6, 7천여 명의 군중 앞에서 동지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의 취지를 설명하였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군중들과 함께 시위를 벌였다.

그 뒤 일본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19년 5월 9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29년 4월 21일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사치홍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2006년 10월 20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했다.


[1][2] 21세 환(煥) 항렬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 다만 형 사우환(史羽煥, 초명 사우순史羽淳, ? ~ ?. 1. 4)은 항렬자를 썼다.(족보)[3] 청주사씨대동보 권하 676쪽에는 1863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