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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02:52:56

사일러스/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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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문 배경2. 데마시아의 심장3. 신입 대원4. 혼란5. 믿음의 사슬

1. 장문 배경

데마시아 드레그본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마법사 사일러스의 운명은 시작부터 꼬였는지도 모른다. 사일러스의 부모는 사회적 지위가 낮았지만 데마시아의 이념을 열렬히 신봉했다. 그래서 그들은 아들이 '저주'를 받아 마법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왕국의 마력척결관들에게 자수하도록 설득했다.

마력척결관들은 사일러스에게 마법을 탐지하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사일러스를 이용해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는 마법사들을 색출했다. 생전 처음으로 자신에게 미래가 있음을 느낀 사일러스는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자신의 모습을 꿈꾸며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했다. 사일러스는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외로웠다. 자신의 감독관 외에 다른 사람과는 어울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일러스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마법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자나 유명인 중에서도 마법의 힘을 숨기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개중에는 대표적인 마법 반대론자도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마력을 지녔다는 이유로 처벌받았다. 하지만 데마시아 상류층은 마력을 지녔더라도 법망을 피해갔다. 이런 위선적인 상황 때문에 사일러스의 머릿속에는 의심이 자리 잡았다.

마침내 사일러스의 머릿속에 자리한 의심이 활짝 꽃을 피우게 되는 치명적이고 운명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어느 날 사일러스와 마력척결관 일행은 시골에 숨어있던 마법사를 발견했다. 마법사의 정체가 어린 소녀라는 사실을 안 사일러스는 소녀를 가엾게 여겼고, 마력척결관의 공격으로부터 소녀를 보호하려다 자기도 모르게 소녀를 향해 몸을 던졌다. 사일러스와 소녀가 살짝 닿는 순간, 소녀의 마력이 그의 몸을 타고 흘렀다. 주체할 수 없이 거친 마력이 사일러스를 죽이긴커녕 그의 손에서 맹렬하게 방출되었다. 자신도 모르던 재능이었다. 그러나 손에서 방출된 마력은 마력척결관 스승을 비롯한 세 사람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사일러스는 도망쳤다. 살인자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일러스는 곧 데마시아에서 가장 위험한 마법사로 불렸다. 마침내 사일러스가 체포되었을 때, 마력척결관들은 어떤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사일러스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사일러스는 마력척결관 본부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 수감되었다. 손목에는 마력을 약화시키는 페트리사이트로 만든 무거운 쇠고랑을 찼다. 마법을 보는 눈을 빼앗겨버린 사일러스의 마음은 페트리사이트처럼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리고 자신을 가둔 모든 사람에게 복수할 날을 꿈꿨다.

15년이라는 고된 시간이 지난 후, 빛의 사자 수도회에서 나온 자원봉사자 럭스가 사일러스를 찾아왔다. 페트리사이트 쇠고랑을 차고 있었지만, 사일러스는 럭스에게서 매우 강력한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가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비밀스럽고 기이한 유대감이 형성됐다. 럭스는 사일러스로부터 마법을 통제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 대신 사일러스에게 철창 밖의 세상에 대해서 알려주고, 사일러스가 원하는 책을 모두 갖다 주었다.

사일러스는 교묘하고 조심스럽게 럭스와 가까워졌고, 결국 사일러스에게 설득당한 럭스는 반입이 금지된 책을 감옥 안으로 몰래 가져왔다. 위대한 조각가 듀란드가 자신이 만든 페트리사이트 작품에 관해 쓴 책이었다.

사일러스는 그 책을 통해 페트리사이트의 비밀을 알아냈다. 페트리사이트는 위험한 마법으로부터 데마시아를 지키는 방어 체계의 근간이며, 마법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흡수'한다는 사실을.

사일러스는 생각했다. '페트리사이트가 마력을 흡수한다면, 내가 그 마력을 방출할 수도 있을까?'

이제 사일러스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 바로 마력을 수급할 원천이었다. 그것도 럭스처럼 강력한 원천이 필요했다.

하지만 럭스는 더 이상 사일러스를 찾아오지 않았다. 럭스의 가족이자 막강한 권력을 지닌 크라운가드 가문이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해 알게 되었고, 럭스가 법을 어기고 악질 범죄자를 도와주었다는 사실에 분노했던 것이다. 사일러스는 별다른 설명 없이 교수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럭스는 교수대에서 선처를 애원하며 울부짖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집행인이 올가미를 조이기 위해 럭스 옆을 지나갈 때, 사일러스는 페트리사이트 쇠고랑을 럭스의 몸에 갖다 댔다. 사일러스의 예상대로 럭스의 마력이 페트리사이트 쇠고랑 안으로 흘러들었다.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사일러스는 럭스에게서 훔친 마력으로 사형장을 폭파시키며 탈출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하나, 겁에 질린 럭스뿐이었다.

마력척결관 본부를 탈출한 사일러스는 이제 단순한 추방자가 아니었다. 데마시아의 약하고 핍박받는 자들을 대표하는 새로운 저항의 상징이었다. 사일러스는 정체를 숨기고 왕국을 여행하며 추방된 마법사들을 규합했다. 하지만 왕위를 전복하기 위해서는 더 큰 힘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사일러스는 자신의 심복들과 튼튼한 황소들을 이끌고 북부 산악 지대 너머에 있는 프렐요드의 얼어붙은 벌판으로 향했다.

새로운 동맹과 고대 전설 속 위대한 원소 마법을 찾은 후 데마시아로 돌아가 오랫동안 자신과 동료 마법사들을 괴롭힌 억압적인 사회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였다.

2. 데마시아의 심장

사일러스 공개 전에 유니버스에 공개된 단편 소설.
소년은 얼어붙은 땅 위로 삐져나온 노란 수면꽃을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족히 수백 송이는 되어 보이는 꽃들이 황량한 벌판을 조금이나마 밝혀 주었다. 소년은 쪼그려 앉아 꽃 냄새를 맡았다. 상쾌한 아침 공기와 희미한 향기가 느껴졌다. 소년은 꽃을 따려고 손을 뻗었다.

"그냥 두어라." 바니스가 말했다.

그는 하늘거리는 푸른색 망토를 두르고 있었고 소년보다 훨씬 키가 컸다. 그 옆에는 마르시노가 불 꺼진 등불을 들고 서 있었다. 세 사람은 한참 전부터 그곳에서 뭔가를 기다렸지만,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르시노가 미소 지으며 소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꽃을 뽑아 주머니에 넣었다.

바니스는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랑 지내더니 못된 것만 배웠군."

마르시노는 얼굴을 붉혔다. 그러고는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헛기침하더니 소년에게 물었다. "뭔가 보이니?"

소년은 얼어붙은 벌판 너머로 나란히 늘어선 집들을 관찰했다. 허름한 집들이 산비탈을 끼고 서 있었다. 불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그림자들이 움직였다.

"안에 사람이 있어요." 소년이 말했다.

"그건 우리도 안다. 우리가 찾는 게 있느냐?" 바니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년은 희미한 흔적이라도 찾아보려고 애썼지만 보이는 거라고는 칙칙한 판자들과 돌덩이들뿐이었다.

"안 보여요."

바니스는 못마땅한 듯 숨을 내쉬었다.

"좀 더 가까이 가 볼까요?" 마르시노가 말했다.

바니스가 고개를 저었다. "산골 사람들이 누군지 모르느냐. 가까이 가기도 전에 창에 맞을 게다."

소년은 그 말에 몸서리쳤다. 수도에서도 남부 산골 사람들의 악명은 자자했다. 이들이 사는 곳은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왕국의 변방이자, 분쟁 지역과도 가까웠다. 소년은 뒤를 힐끔 보더니 마르시노 곁으로 한 발짝 다가갔다.

"등불을 켜게." 바니스가 말했다.

마르시노는 부싯돌로 기름에 흠뻑 젖은 끈에 불꽃을 튀겼다. 등불에 불이 붙자 선선한 아침 공기가 물러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사람들은 기척을 느꼈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나왔다. 열댓 명은 되어 보였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창과 도끼를 손에 든 채 세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소년은 허리춤에 있는 단검에 손을 갖다 댔다. 소년은 마르시노를 바라봤지만, 마르시노는 마을 사람들을 계속 주시했다.

"꼬마야, 가만히 있거라." 바니스가 말했다.

마을 사람들은 벌판 끝자락에 멈춰 섰다. 바니스와 마르시노는 감청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마을 사람들이 입은 옷은 넝마나 다름없었다. 소년이 입은 옷보다도 초라해 보였다.

등골이 찌릿함을 느낀 소년은 마르시노의 팔에 손을 갖다 댔다. 마르시노가 쳐다보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시노는 이해했다는 듯이 물러서라고 손짓했다. 그들에게는 따라야 할 절차가 있었다.

한 노파가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마력척결관들이 이젠 마을에 불까지 지르고 다니는 게요?"

"여긴 아무것도 없으니 썩 떠나시오!" 옆에 있던 헝클어진 머리를 한 젊은 남자가 소리쳤다. 그러자 다른 마을 사람들도 큰 소리로 거들었다.

"조용히 해!" 노파가 남자를 팔꿈치로 툭 치며 말했다.

젊은 남자는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고, 다른 사람들도 입을 다물었다.

소년의 눈에 비친 산골 사람들은 수도에서 보던 사람들과 너무나도 달랐다. 전통적인 푸른 망토에 청동 반가면을 쓴 마력척결관들을 보고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맞서고 있었다. 마을 사람 몇이 소년을 노려보며 손에 든 무기를 만지작거렸다. 소년은 시선을 피했다.

마르시노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등불로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엿새 전 수면꽃이 렌월에 무더기로 유입됐습니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물건을 사고판다오. 도시 사람들은 안 그런가 보오?" 노파가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웃었다.

소년도 긴장한 채 따라 웃었다. 마르시노의 입꼬리도 살짝 올라갔지만, 바니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육척봉에 손을 올리며 마을 사람들을 노려볼 뿐이었다.

"그럴 리가요." 마르시노가 대답했다. "다만 이맘때 수면꽃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지요."

노파의 표정이 굳어졌다. "우린 농사를 잘 짓는다오. '사냥'은 말할 것도 없고."

바니스는 노파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런데 땅이 얼어붙어 있잖소. 당신들 중에 밭일을 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노파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아무 데서나 제멋대로 자라는 풀때기들을 우리가 뭐 어쩌겠소?"

"맞는 말이오." 바니스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그러고는 망토에 달려있던 그레이마크를 풀었다. 돌을 깎아 만든 원판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바니스는 쪼그려 앉아 그레이마크를 수면꽃에 갖다 댔다.

그러자 꽃이 쪼그라들며 시들어버렸다.

"하지만 보통 꽃이라면 페트리사이트에 노출된다고 해서 시들지 않소." 바니스가 일어서며 말했다. "이건 마법을 써서 키웠다는 뜻이지."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마르시노가 뒤이어 말했다. "마법을 사용하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우린 모두 데마시아인입니다. 데마시아인은 데마시아의 법을 지킬 의무가—"

"법이 밥 먹여 주는 건 아니잖소." 노파가 마르시노의 말을 끊었다.

"먹여준다고 해도 당신네 성에 안 찰걸."

바니스가 비웃으며 말하자 마을 사람들이 흥분하며 마력척결관들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마르시노가 헛기침을 하고 한쪽 손을 높이 들었다. "예전부터 산골 사람들은 법과 전통을 지키며 데마시아의 방식을 존중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해 주길 바랍니다. 마법을 사용하신 분은 앞으로 나와주세요."

아무 대답도, 움직임도 없었다.

잠시 뜸을 들인 마르시노가 이어 말했다. "이래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군요. 이 아이가 범인을 찾아낼 겁니다."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소년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눈에는 원망이 가득했고, 험한 말도 희미하게 들렸다.

"저 꼬맹이는 마법을 써도 되고, 우린 안 된다는 거요?" 마력척결관들을 향해 소리쳤던 젊은 남자가 말했다.

남자의 말을 들은 소년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데마시아를 위한 일입니다." 마르시노가 대답하고는 소년 쪽으로 돌아봤다. "괜찮아. 시작해."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땀이 흥건한 손을 반바지에 문질렀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 구질구질한 몰골의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빛이 일렁이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오직 소년만 그 빛을 볼 수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소년이 타고난 재능이자, 저주였다.

마을 사람들의 표정에는 경멸이 가득했다. 어딜 가든 똑같은 반응이었다. 사람들은 재능을 타고난 소년을 미워했다. 하지만 노파는 달랐다. 노파는 눈빛으로 소년에게 애원했다. 제발 말하지 말아 달라고.

소년은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봤다.

모두가 숨죽이고 기다렸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년은 바니스의 시선을 느꼈다. 바니스는 실망한 기색이었다.

"괜찮아. 질서를 유지하고 법을 지키는 일이야." 마르시노가 소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독였다.

소년이 고개를 들어 마법사를 가리키려는 순간 노파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 말도 말아라. 내가 벌을 받겠다."

"더는 못 봐주겠군." 바니스가 소년을 밀치며 소리쳤다. 손에는 그레이마크가 들려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다가오자 마법사를 둘러싼 빛이 잠시 흐릿해졌다.

"잠깐만요!"

"시끄럽다. 넌 기회를 놓쳤어."

하지만 노파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소년이 마르시노를 보며 외쳤다. "저 할머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에요!" 소년의 손가락은 노파 옆에 있는 헝클어진 머리를 한 남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르시노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소년의 손을 바라보았다. 마르시노가 소년의 손이 향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릴 새도 없이 마법사는 마력척결관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머니!" 마법사는 바니스에게 손을 뻗으며 외쳤다. 마법사의 손은 에메랄드색으로 빛났고 손끝에는 가시덩굴이 솟아 있었다.

바니스는 마법사의 손을 피하며 지팡이를 크게 휘둘렀다. 커다란 지팡이는 마법사의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마법사는 비틀거리며 마르시노의 팔을 잡았다. 날카로운 가시가 옷을 뚫고 들어왔다. 고통을 느낀 마르시노는 움찔하며 마법사를 밀쳤고, 동시에 등불을 손에서 놓쳤다.

그러자 마법사가 입은 튜닉에 불꽃이 튀어 불길이 일어났다.

노파가 비명을 지르며 아들을 향해 달려갔다.

마을 사람 몇 명이 노파를 붙잡았다. 노파는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쳤다. 나머지 마을 사람들은 마력척결관들을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바니스는 지팡이를 든 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놈의 손에 닿았느냐?"

마르시노는 무기를 찾아 더듬거리다가 마침내 홀을 손에 쥐었다. 게슴츠레하게 뜬 두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마르시노!"

"괜찮습니다!"

"저놈 말고 더 있느냐?" 바니스가 소리쳤다.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불길에 휩싸인 마법사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소년은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억지로 다시 밀어 넣었다.

"대답해!"

소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불길은 들판을 따라 퍼졌고 마을 사람들과 마력척결관 사이를 갈라놓았다. 소년은 화염 너머로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이글거리는 분노가 느껴졌다.

"아니요."

"그럼 말에 올라타!"

소년이 조랑말에 올라타자 마르시노와 바니스도 뒤이어 말에 올랐다. 세 사람은 말을 타고 마을에서 멀어졌다. 소년은 뒤를 돌아봤다. 불길은 더욱 거세졌고 꽃들은 시들고 있었다.


바니스는 두 사람을 이끌고 저녁까지 말을 타고 달렸다. 산골 사람들과 최대한 멀어지려는 의도였다. 렌월성까지는 사흘을 더 달려야 했다. 바니스는 마력척결관들을 더 데리고 그 마을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의 말처럼 법은 반드시 지켜야 하니까.

날이 어두워지자 세 사람은 잠자리를 폈다. 어두울 때 암석이 많은 지대를 달리는 건 위험하기 때문이다. 소년은 다시 땅을 밟을 수 있어 안도했다. 드레그본에서 자란 남자아이들은 말을 훔치지 않는 이상 말을 탈 일이 거의 없다. 그리고 소년은 도둑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년은 우뚝 솟은 참나무 밑동에 앉아 가장 먼저 불침번을 섰다. 오랫동안 말을 타서 엉덩이와 허리가 아팠다. 소년은 편한 자세를 찾으려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잠시 후 소년은 일어서서 나무에 몸을 기댔다. 늑대 한 마리가 언덕 어딘가에서 울부짖자 다른 늑대들도 화답했다. 어쩌면 브래깃 사냥개일지도. 소년은 아직도 그 둘을 구분하지 못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자 멀리서 소나기구름이 번쩍였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인지 천둥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늘 위를 떠다니는 회색빛의 구름 사이로 별빛이 희미하게 비췄고, 저지대에는 짙은 안개가 자욱했다.

소년은 나무토막을 몇 개 집어 모닥불에 던져 넣었다. 불길이 짧게 치솟았다가 다시 잦아들었다.

소년의 머릿속은 고요했다. 하지만 이내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백한 진실을 부정하고 애원하는 목소리였다. 모닥불에선 불길에 몸부림치던 마법사의 모습이 보였다. 소년은 몸서리치더니 고개를 돌렸다.

끔찍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안 좋은 생각이 들 때마다 바니스와 마르시노와 함께했던 좋은 추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소년은 몇 달 전부터 마력척결관들과 함께 여행했다. 사람들로 붐비는 드레그본 거리에서 평생을 보낸 소년은 생전 처음으로 바깥세상을 보았다. 자신이 살던 공동주택 지붕에서 바라만 보던 외딴 언덕과 산을 직접 탐험했다. 소년 앞에는 또 다른 산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년은 더 많은 것을 보고 싶어 했다.

마법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년은 마법을 쓸 줄 안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한때 두려워했다. 하지만 마법이라는 저주는 소년의 재능이 되었다. 덕분에 진정한 데마시아인이 될 수 있었다. 심지어 푸른색 옷을 입었다. 비록 소년은 마법사였지만, 어쩌면 언젠가 반가면을 쓰고 자신만의 그레이마크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에 잠겨있던 소년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마르시노가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마르시노의 옆으로 비어있는 잠자리가 보였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소년은 바니스를 찾으려 숲 쪽을 훑어보는데—

바니스가 근처 참나무 옆에 서서 소년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물쭈물하던 모습이 꼴사납더구나." 바니스가 그림자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무서워서 그랬던 게냐?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던 게냐?"

소년은 바니스의 눈빛을 피했다. 입을 꾹 다물고 변명거리를 찾았다. 어떻게 대답해야 바니스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짜증이 난 바니스는 소년을 노려보았다. "어서, 대답해 봐라."

"모르겠어요... 수면꽃을 키우는 게 왜 잘못된 거죠?"

바니스가 고개를 저으며 으르렁거렸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더니, 전장에서뿐만 아니라 마법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군."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니스는 그런 소년을 잠시 바라보았다.

"네 심장은 어디에 있느냐?"

"데마시아에 있습니다."

마르시노가 다시 몸을 뒤척였다. 잠꼬대는 점점 신음이 되어갔고, 곧 마르시노는 담요 안에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소년은 마르시노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일어나 보세요."

마르시노의 몸이 뒤틀렸다. 신음은 점점 커져서 울부짖는 소리로 변했다. 소년은 마르시노의 몸을 더 세게 흔들었다.

"무슨 일이냐?" 바니스가 다가오며 말했다.

"모르겠어요. 깨워도 안 일어나요."

바니스는 소년을 밀어내고 마르시노의 몸을 돌려 눕혔다. 눈썹과 관자놀이가 땀에 젖어 짙은 머리카락이 엉겨 붙어 있었다. 두 눈을 뜨고 있었지만, 눈빛은 흐리고 공허했다.

바니스는 두꺼운 담요를 걷고 마르시노의 망토를 열어젖혔다. 검은 덩굴줄기가 마르시노의 팔을 휘감고 있었다. 소년은 부패한 피부 속에서 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일행은 해가 뜨기도 전에 출발했다.

바니스와 소년은 힘겹게 마르시노를 말에 올려 안장에 묶었다. 젊은 마력척결관은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바니스는 마르시노의 말을 자신의 말에 묶고 달리기 시작했다.

소년이 탄 조랑말로는 빠르게 달리는 바니스를 따라잡기 힘들었다. 렌월성까지 가려면 아직 하루 넘게 달려야 했다.

소년은 달리면서 마르시노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몇 번이고 떨어질 뻔했지만, 그때마다 바니스는 속도를 늦추고 마르시노를 안장에 다시 바로 세웠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소년을 노려보았다.

일행이 코르보 고갯길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나절이 다 되어서였다. 말들은 산비탈로 이어지는 길을 굽이굽이 올라갔다. 이 지름길을 통하면 시간이 한나절은 단축되지만 길이 험하고 수풀이 우거져 일행은 속도를 줄여야 했다.

아래로는 깊은 골짜기가 위태롭게 펼쳐졌다. 긴장한 소년은 다리를 오므리고 고삐를 움켜쥐었다. 소년의 조랑말 역시 골짜기를 본능적으로 의식하며 터덜터덜 걸어갔다.

일행이 덤불을 헤치고 나오자 평지가 나타났다. 소년은 바니스가 등자를 밟으며 속도를 올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마르시노의 몸이 오른쪽으로 휘청였다.

"바니스 님!"

바니스는 손을 뻗었지만, 말에서 떨어지는 마르시노를 잡기엔 너무 늦었다. 마르시노의 몸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바니스와 소년은 말을 멈추고 내려서 마르시노에게 달려갔다.

마르시노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지혈해야 해." 바니스가 말했다.

바니스는 칼집에서 단검을 꺼내더니 묻지도 않고 소년의 옷을 길게 잘랐다.

"물." 바니스가 말했다.

소년이 가죽 부대를 꺼내 출혈 부위에 물을 붓자 바니스가 상처를 닦아냈다.

마르시노는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뒤척이며 몇 마디 중얼거렸지만, 소년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마시게." 바니스는 메말라버린 마르시노의 입술 위로 물을 조금 부어주었다.

마르시노는 혀로 입술에 묻은 물을 할짝대며 몸을 뒤척였다. 그리고 눈을 떴다. 탁한 눈동자 위로 불그스름한 반점이 보였다.

"도착... 했나요?" 마르시노가 헐떡이며 말했다.

바니스가 소년에게 눈치를 주었다. 대답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소년도 알고 있었다. 치료를 받으려면 한참을 더 가야 했다.

"거의 다 왔네, 형제여." 바니스가 말했다.

"렌월을... 왜 높은 산 위에... 지었을까요."

"그래야 접근하기 힘드니까." 바니스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마르시노는 눈을 감으며 가볍게 웃었다. 웃음은 곧 기침이 되었다.

"진정하게." 바니스는 마르시노를 잠깐 바라보더니 소년에게 물었다. "수면꽃, 아직 가지고 있느냐?"

“응.”

소년은 주머니를 뒤졌다. 짚으로 만든 말, 강에서 주운 반짝이는 돌 다음으로 노란색 꽃이 나왔다. 이 꽃으로 마르시노를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소년은 미소지었다.

바니스가 꽃을 낚아채며 말했다. "네 녀석이 제대로 하는 일도 있구나."

소년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바니스 말이 맞았다. 자신이 머뭇거린 탓에 친구가 다쳤다.

마르시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더 주의했어야 했는데..."

바니스는 아무 말 없이 꽃잎을 뜯었다.

"이걸 씹어보게. 정제하진 않았지만, 통증은 완화될 거야."

"하지만... 마법은 어쩌고요?" 마르시노가 물었다.

"성장을 촉진하고 강하게 만드는 효과는 있지만, 꽃 자체는 오염되지 않았다네." 바니스는 꽃잎을 뜯어 마르시노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리고 몸을 숙이더니 마르시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뭔가를 속삭였다. 마르시노가 미소지었다. 옛 추억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소년은 가죽 부대에 든 물을 마셨다. 순간 오싹함을 느꼈다. 팔에 난 솜털이 곤두섰다.

소년은 평지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푸른 소나무가 우거져 아래쪽 저지대를 덮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바니스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소년은 계곡을 내려다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 전 느꼈던 기이한 느낌도 사라진 상태였다.

"제 생각엔—"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멀리서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풀밭 위에는 새카맣게 타버린 형체가 있었다. 소년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기 타는 냄새에 소년의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요?" 소년이 마르시노를 살펴보며 물었다. 마르시노는 담요와 밧줄로 급하게 만든 들것 위에 누워 있었다.

"나도 모르겠다. 여기서 기다려라. 경계 늦추지 말고." 바니스가 대답했다.

바니스는 소 사체를 살폈다. 두꺼운 가죽 위로 주먹만 한 크기의 상처가 보였다. 바니스는 지팡이 끝을 그을린 상처 안으로 집어넣었다. 상처는 지팡이의 3분의 1이 들어갈 정도로 깊었다.

"출발하는 게 좋겠어요." 소년이 말했다.

바니스가 돌아보았다. "뭔가 느껴지느냐?"

소년은 사체를 살펴보았다. 그을린 살 아래로 마법의 흔적이 느껴졌다. 이렇게 거대한 동물을 한 방에 죽일 정도로 강력하다니.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육척봉을 든 바니스도 불가능했다.

소년은 고개를 돌려 농장 쪽을 바라봤다. 작은 통나무집과 낡은 헛간이 보였고 농장 끝에는 별채가 있었다. 농장 뒤로는 언덕이 있었고 울창한 숲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연기 때문에 여기 오지 않았다면 절대 찾지 못했을 터였다.

순간 발소리가 들려왔다.

바니스는 뒤로 홱 돌며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한 노인이 헛간 모퉁이를 돌며 나타났다. 노인은 예고 없이 찾아온 손님들을 보더니 자리에 멈춰 섰다. 노인은 바지 차림에 헐렁한 튜닉을 입고 있었으며 손에는 도끼창이 들려있었다. 도끼창은 낡았지만 창끝은 날카롭게 빛났다.

노인은 바니스의 육척봉에 닿지 않도록 멀찌감치 서 있었다. "내 농장에서 뭐 하는 건가?" 노인이 도끼창을 고쳐 쥐며 물었다.

"친구가 아파요. 어르신, 도와주세요." 소년이 말했다.

바니스는 소년을 흘겨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인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들것 위에서 몸부림치며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마르시노를 보았다.

"렌월에 가면 치료사가 있다네." 노인이 말했다.

"하루 넘게 달려야 하는데 그때까지 못 버틸 거요." 바니스가 대답했다.

"이 숲엔 야수가 살고 있다네. 어서 떠나는 게 좋을 거야." 노인이 죽은 소를 가리키며 말했다.

소년은 빽빽하게 우거진 숲을 힐끗 쳐다봤다.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하지만 소년은 좀 전에 느꼈던 오싹함을 기억했다. 저렇게 먼 곳에서 느껴질 정도면 아주 큰 야수임이 틀림없다.

"어떤 야수죠? 용인가요?"

"가만히 있거라." 바니스가 노인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당신에겐 데마시아군 병사를 보살필 의무가 있소."

노인도 물러서지 않았다. "푸른 옷을 입고 있군... 하지만 마력척결관이 군인은 아니잖나."

"맞는 말이오. 하지만 나도 예전엔 군인이었지. 당신처럼 말이오."

노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더니 도끼창 끝을 바니스를 향해 겨누었다.

"그 도끼창, 내 기억이 맞는다면 가시 방벽 도끼창 부대가 쓰는 무기지. 무기나 그 주인이나 아직 무뎌지지는 않은 것 같소이다."

노인은 도끼창을 내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오래전 일이라네."

바니스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 형제는 영원한 형제요. 우릴 도와주면 그 야수는 우리가 처리하겠소."

소년은 마르시노를 바라봤다. 마르시노는 눈을 감은 채 얕은 숨을 쉬고 있었다.

노인은 바니스를 보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네. 그 친구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오게."


바니스와 농장 주인은 마르시노를 통나무집 안으로 옮겼다. 화덕에는 불이 작게 피어올랐고, 집 안에서는 삼나무와 흙냄새가 났다. 방 한가운데 놓인 탁자에는 나무 그릇과 과자가 있었다. 소년은 탁자 위에 있는 물건을 치워 바로 옆 침대로 옮겼다. 바니스와 농장 주인은 마르시노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여기 또 누가 있소?" 바니스가 단검으로 마르시노의 튜닉을 잘라내며 물었다.

"혼자 산다네." 노인이 상처를 살펴보며 대답했다. 소년은 상처가 더 넓게 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검은 덩굴줄기는 마르시노의 목과 심장을 향하고 있었다.

"잘라내야겠군." 바니스가 말했다.

갑자기 마르시노가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자칫하면 탁자 아래로 떨어질 기세였다.

"꽉 잡아." 바니스가 말했다. 소년은 체중을 실어서 마르시노의 다리를 눌러서 고정했다. 마르시노가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부츠를 신은 발이 소년의 입을 때렸고 소년은 뒤로 넘어져 턱을 만지작거렸다.

"꽉 잡으라니까!" 바니스가 단검을 닦으면서 소리쳤다.

소년은 다시 마르시노의 다리를 누르려고 했으나 노인이 가로막았다.

"내가 할 테니 가서 말이나 걸어 주려무나."

소년은 탁자 앞으로 걸어가 마르시노를 살폈다. 경련은 잦아들었지만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들썩였다.

"마르시노?"

"손을 잡거라. 네가 곁에 있다는 걸 알 수 있게." 노인이 말했다. "동물이 다쳤을 때 그렇게 하면 도움이 되지. 사람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단다."

소년은 마르시노의 손을 꼭 잡았다. 땀에 젖어 미끄러웠지만 따뜻했다. "이제 괜찮아질 거예요. 도와줄 사람을 만났어요."

마르시노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년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듯했다. 잿빛이었던 눈동자는 이제 짙은 붉은색으로 변해있었다.

"여긴 렌월이니?"

소년이 바니스를 쳐다보자 바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치료사들이 치료하는 중이에요." 소년이 말했다.

마르시노가 소년의 손을 꽉 쥐며 말했다. "수면꽃 덕분에... 시간을 벌었구나... 장하다, 정말 잘했어..."

소년은 이를 악물며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소년은 떠나보내기 싫다는 듯 마르시노의 손을 꽉 쥐었다.

"죄송해요. 제가—"

마르시노는 힘겹고 고통스럽게 말을 뱉었다. "아니, 네 잘못이 아냐..." 마르시노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려 했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바니스?"

"여기 있다네, 형제여."

"자책하지 말라고... 말해줘요..."

바니스는 소년을 빤히 쳐다보더니 대답했다. "그래, 운이 나빴을 뿐이지."

마르시노는 창백한 얼굴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알겠지? 네 잘못이 아니야..."

바니스가 마르시노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는 몸을 기울여 마르시노의 귀에다 대고 말했다. "팔을 잘라내야 할 것 같네."

마르시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에 뭔가 물려 줘야 할 걸세." 노인이 말했다.

소년은 자신의 단검을 꺼냈다. 나무로 된 칼자루면 충분해 보였다. 소년은 칼자루를 마르시노의 입에 물렸다.

"잘했다." 바니스 역시 자신의 단검을 마르시노의 팔 쪽에 대고 있었다.

덩굴줄기는 피부 속에서 뻗어 올라갔다. 오직 소년만이 덩굴줄기에서 빛이 일렁이며 뿜어져 나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잠깐만요." 소년이 말했다.

바니스가 소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왜 그러느냐?"

마르시노는 칼자루를 꽉 깨물었고, 그 사이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소년과 맞잡은 손이 요동치면서 탁자를 때리다가 피부 속 꿈틀거림이 잦아들면서 손도 멈추었다.

어느새 덩굴줄기는 마르시노의 목까지 뻗어있었다.

"너무 깊어. 이젠 잘라낼 수 없어." 바니스가 어찌할 줄 모른 채 물러섰다.

"태우면 안 될까요?" 소년이 물었다.

"안 돼, 동맥과 너무 가까워." 바니스는 노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혹시 약은 있소?"

"저걸 치료할만한 건 없다네."

바니스는 고통스러워하는 마르시노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기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치료사라면 어떻겠소?"

"치료사들에게 가면 약이 있겠지만, 여기서 가장 가까운 치료사라고 해도—"

"그런 치료사를 말하는 게 아니오."

"내가 아는 사람 중엔 없네." 노인이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바니스는 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집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소년은 바니스의 시선을 따라갔다. 한쪽 구석에는 가죽 무더기가 쌓여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그물로 만든 해먹이 있었다. 반대편 벽에 놓인 작업대에는 용 모양으로 깎아 만든 나무 조각 수십 개가 놓여있었다.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아까 그 소 말인데." 바니스가 말했다.

죽은 소 얘기가 나오자 노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소가 어쨌단 말인가?"

"혹시 소가 백선충에 감염된 적이 있소?"

"있다네. 질산은 가루를 써서 태워버렸지."

"덩굴줄기가 시작되는 부분을 잘라내고, 남은 부위는 질산은 가루로 감싸면 조금은 가능성이 있을 거요. 가루는 어디 있소?" 바니스가 물었다.

노인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주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마 어디에 뒀는지 기억하려고 애쓰는 걸지도 모른다.

마르시노의 목구멍에서 낮고 거친 소리가 올라왔다. 그리고 입에 칼자루를 문 채로 격렬히 몸을 떨었다. 잘못하면 탁자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았다.

바니스는 괴로워하는 마르시노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가루는 어딨소?"

노인은 이리저리 움직이는 마르시노의 다리를 붙잡으며 말했다. "헛간에 있긴 하네만—"

마르시노가 울부짖었다.

"제가 가져올게요!" 소년이 소리치더니 밖으로 뛰쳐나갔다.


상쾌한 산 공기가 소년의 얼굴을 스쳤다. 헛간을 향해 달리는 소년의 다리와 폐가 점점 뜨거워졌다. 헛간 문까지 스무 발자국 정도 남았을 때, 갑자기 소년은 오싹함을 느꼈다.

소년은 급하게 미끄러지며 멈춰 섰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숲은 어둡고 고요했다. 소년은 마법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숲을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풀밭에선 아직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소년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분명 근처에 뭔가 있었다.

소년은 바니스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소리 지르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돌아가야 하나?

통나무집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마르시노의 비명이 들려왔다. 마르시노를 구하려면 용기를 내야 했다.

소년은 정신을 다잡으려고 심호흡을 하고 헛간으로 달려갔다. 떨리는 손으로 헛간 자물쇠를 만지작거렸다. 마침내 문이 열리자 소년은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 순간 큰 충격이 소년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소년은 뒤로 나자빠지며 농기구 받침대에 부딪혔다. 삽과 가래가 바닥에 흩어졌다.

헛간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소년은 단검을 꺼내려고 손을 뻗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단검은 마르시노에게 있었다. 순간 마구간에서 은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소년은 일어나려고 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어떤 형체가 마구간을 나와 모퉁이를 돌자 광채가 화려하게 흔들렸다. 소년은 이렇게 밝은 빛은 본 적이 없었다. 빛이 너무 밝은 나머지 공기마저 여러 가지 색깔로 왜곡되어 보였다.

형체가 소년에게 다가왔다.

소년의 귀에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머릿속에 벌떼가 가득 찬 것 같았다. 소년은 뒤로 물러섰다. 한 손으로는 눈을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무기를 찾아 더듬거렸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온 세상이 빛과 색의 장막에 덮여버렸다.

환한 빛을 뚫고 어떤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윙윙거리는 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소년은 그 정체를 알아차리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 한마디 말이 들리기 전까지는...

"아빠?"

이 한마디로 세상은 다시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그 형체의 주인공은 어린 소녀였다.

소녀는 두려움에 커진 두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녀를 감싸고 있는 광채가 다시 밝아졌다. 광채는 소년을 끌어당겼다.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빛에 손을 갖다 댔다.

"너, 넌 누구니?" 소녀가 물었다.

소년이 일어나 손을 앞으로 뻗으며 말했다. "난... 난 사일러스라고 해. 해치지 않을게. 네가 날 해치지 않는다면."

소녀는 주먹을 말더니 자신의 가슴팍에 갖다 댔다. "난 절대 누굴 해치지 않아..." 그리고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뜻대로 안 될 때도 있지만."

소년은 풀밭에서 봤던 소를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을 떨쳐버리고 소녀에게 집중했다. 작은 체구의 금발 머리 소녀는 자신의 집인데도 불구하고 길을 잃은 듯 보였다.

"나도 알아. 쉽지만은 않은 일이지..." 소년이 말했다.

소녀를 둘러싼 빛이 사그라들었다. 소년을 당기던 힘도 약해졌다.

"우리 아빠 봤어?" 소녀가 소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집 안에서 내 친구를 도와주고 계셔."

소녀는 수줍게 손을 뻗어 소년의 손을 잡았다. "아빠한테 데려가 줄래."

소년이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넌 집 안에 들어가면 안 돼."

"아빠한테 무슨 일 생겼어?"

"아니, 너희 아빠는... 마력척결관을 도와주고 있어."

소녀는 마력척결관이라는 말에 움찔했다. 헛간은 다시 빛으로 가득 찼다. 소녀는 위험을 인지했다.

"너도 마력척결관이니?" 소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소녀의 질문에 소년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뒤틀림을 느꼈다.

"아니, 난 너랑 같아."

소녀가 미소지었다. 진심 어린 미소였다. 소년은 가슴이 따뜻해졌다. 마력척결관들에게 칭찬을 들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그 순간 통나무집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아빠?"

"아니, 내 친구야. 빨리 돌아가야 해. 우리가 갈 때까지 숨어 있어. 알겠지?"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혹시 질산은 가루가 어디 있는지 아니?"

소녀는 좁은 선반에 놓인 항아리를 가리켰다.


소년은 항아리를 들고 헛간을 뛰쳐나왔다. 통나무집으로 달려가는 동안 또다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소년은 있는 힘을 다해 뛰어 문을 박차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찾았어요!" 소년은 항아리를 내보이며 말했다.

집 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바니스는 생기를 잃은 마르시노의 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오직 노인만이 문을 향해 돌아섰다.

노인의 눈빛에서 공포와 적대심이 느껴졌다. 마력을 숨기려는 절박한 사람들에게서 봐 왔던 눈빛과 똑같았다.

노인은 천천히 도끼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면서 천천히 바니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바니스는 움직이지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소년이 노인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제발 그만두라는 무언의 애원이었다.

노인은 손을 멈추고 헛간 쪽과 소년을 번갈아 쳐다봤다.

소년은 소녀의 아버지를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지었다.

노인은 소년을 잠시 바라보더니 도끼창을 다시 벽에 세워두었다.

바니스가 정신을 차리고 소년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지?"

"저 애 잘못이 아니라네. 손 쓰기엔 너무 늦었어."

바니스는 뒷걸음질 치더니 침대에 주저앉았다.

"다 저놈 때문이오." 바니스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저 녀석도 마법사거든. 보통 사람인 척하고 있지만."

"자네 동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네. 그걸 기억하게." 노인이 말했다.

바니스는 마르시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해먹 아래 바닥에 흩뿌려진 수십 개의 조각 도구와 나무 모형을 바라봤다.

"저 친구는 바보였소. 어린 데다 감정이 너무 깊었지." 그리고 바니스는 침묵했다. 정신이 팔린 듯한 모습이었다.

노인과 소년도 어찌할 바를 몰라 입을 다물었다.

"그럼 그 야수는 우리 둘이서 잡으면 되겠소?" 바니스가 노인에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네. 자네 친구나 신경 쓰게. 내가 마차를 내어주지." 노인이 대답했다.

"당신을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잖소... 형제를 저버릴 수 있나."

바니스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어서 소년은 불안했다. 바니스의 슬픔은 의심으로 변했다. 마르시노의 죽음을 슬퍼하던 그는 다시 심문관이 되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푸른 옷을 입었을 때부터 늘 그래왔다네." 노인이 대답했다.

"그러시겠지." 바니스가 미소지었다.

순간 바니스가 침대에서 뛰어올라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벽에 밀어붙이고는 단검을 꺼내 노인의 목에 갖다 댔다.

"어디 있지?"

"무슨 소리인가?"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의 그 야수 말이야."

"숲... 숲속에 있다고 했잖나."

"밤에는 여기서 자나 보지?"

"뭐라고?"

바니스는 해먹을 가리켰다. "저 해먹 말이야. 군 생활을 오래 했으니 해먹이 편할 테지."

"그런데 침대는 왜 있는 거지?" 바니스가 칼을 목에 더 가까이 대며 말했다.

노인은 소년을 잠깐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건... 내 딸이 쓰던 거라네. 지난겨울에 세상을 떠났어."

소년은 침대를 살펴보았다. 어린아이 몸에 맞춰 만든 침대였다.

하지만 이상한 건 침대뿐만이 아니었다. 나무 그릇에 숟가락, 그리고 어른이 쓰기에는 너무 작은 연습용 나무칼까지. 만약 바니스가 알아차린다면...

"그럼 무덤으로 가 보자고." 바니스가 말했다.

"무덤은 없다네. 야수에게 잡혀갔어." 노인은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바니스가 비웃었다. "당신 소를 죽인 것처럼? 왠지 농장 어딘 가에 그 야수가 있을 것 같은데."

"여긴 아무것도 없어요. 어서 가요." 소년이 말했다.

"꼬마야, 저 탁자 위에 뭐가 보이느냐?"

소년은 마르시노의 시체를 바라봤다.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있었지만 미동도 없었다. 덩굴줄기는 목덜미를 지나 얼굴까지 덮고 있었다.

"뭐가 보이냔 말이다!"

"마르시노... 마르시노요." 소년은 목멘 소리로 대답했다.

"나와 같은 마력척결관이다, 꼬마야. 그렇담 너에겐 뭐지?" 바니스의 목소리에선 분노와 고통이 느껴졌다.

마르시노는 소년에게 다정했던 유일한 마력척결관이었다. 그리고 마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소년을 진정한 데마시아인으로 받아들였다.

"친구였어요."

"그래... 그런 네 친구가 마법사의 손에 죽었다. 이 자가 숨기고 있는 것도 마법사지. 그것도 아주 위험한 마법사."

소년은 소녀가 내뿜던 강렬한 빛과 새카맣게 타버린 소를 떠올렸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하지?" 바니스가 물었다.

소년이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질서를 유지하고 법을 지켜야 해요."


바니스는 육척봉을 손에 쥔 채 소년과 노인을 집 밖으로 내몰았다. 세 사람은 헛간과 별채가 보이는 풀밭에 서 있었다. 바니스는 육척봉으로 노인의 갈빗대를 쿡 찔렀다.

"딸을 불러."

노인이 움찔하며 대답했다. "이미 떠났다네."

"곧 알게 되겠지."

노인은 소년에게 애원하는 눈빛을 보냈다.

"제가 헛간을 확인할게요." 소년이 말했다.

"아니, 제 발로 나오게 해." 바니스가 지팡이로 노인의 머리를 내리치자 노인이 고꾸라졌다.

"나와! 네 아비는 우리 손에 있다!"

아무런 반응도, 움직임도 없었다. 그 순간 노인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소년이 노인 쪽을 돌아봤다. 노인은 한쪽 무릎을 꿇고 비틀거리며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았다. 손가락 아래로 피가 흘렀다. 바니스가 우뚝 선 채 지팡이를 다시 들어 올렸다.

"뭐 하시는 거예요?"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바니스의 얼굴이 분노와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순간 큰 충격이 소년의 등줄기를 따라 내려갔다. 그리고 아까처럼 소년의 팔과 목에 있는 솜털이 곤두섰다.

헛간 문이 활짝 열렸다.

"그래, 이제야 나타나는군." 바니스가 말했다.

헛간 문 주위는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내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자그마한 소녀가 문을 넘어 밖으로 나왔다. 쓰러져있는 아버지를 발견한 소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빠..."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괜찮아... 아빠는 그냥 이 사람들이랑 얘기하는 중이야." 노인이 대답했다.

세 사람은 소녀가 가까이 오는 모습을 지켜봤다. 하지만 오직 소년만이 소녀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소녀의 몸은 마치 한낮의 태양처럼 빛나고 있었다.

소녀의 몸속에 잠재된 힘이 여러 색으로 변화하며 일렁였다. 너무 강렬한 나머지 빛조차도 굴절될 정도였다. 소녀는 살아있는 무지개였다.

이것이 바로 소년의 저주이자 재능이었다.

오직 소년만이 마법의 근본적인 아름다움과 본질을 볼 수 있었다. 데마시아 내의 모든 마법사, 아니 어쩌면 온 세상 마법사의 몸 안에 존재하듯이, 겁에 질린 이 아이의 몸 안에서도 마법이 존재했다. 어떻게 이를 저버릴 수 있을까? 그러기엔 소년은 지금껏 너무 많은 일을 목격했다.

"저 아이는... 보통 인간이에요."

"확실해? 다시 봐!"

소년은 바니스를 향해 돌아섰다. 데마시아에서 바니스는 마법의 위협으로부터 왕국을 지키는 존경받는 수호자였다. 하지만 소년의 눈에는 그저 관습에 얽매인 평범한 어른일 뿐이었다.

"아니에요. 어서 가요."

바니스는 의심의 눈초리로 소년의 얼굴을 살피더니, 고개를 저으며 소년을 쏘아보았다.

"그럼 시험을 통과하는지 보자." 바니스는 망토에서 그레이마크를 꺼내며 말했다.

페트리사이트 문양을 본 노인의 눈이 커졌다.

"얘야, 도망쳐!" 노인이 바니스에게 달려들며 소리쳤다.

바니스는 재빨리 몸을 피하더니 지팡이로 노인의 복부를 강타했다. 노인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자 바니스는 지팡이를 들어 노인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소녀의 손에서 번개가 번득였다. 이번엔 소년뿐만 아니라 모두가 볼 수 있었다.

바니스는 그레이마크를 들어 번개를 막았다. 하지만 그레이마크가 금세 까맣게 변하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페트리사이트로 소녀의 마력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바니스는 그레이마크를 내려놓고 소녀의 머리를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안 돼!"

소년은 빠르게 앞으로 달려가 지팡이와 타오르는 빛줄기 사이로 몸을 던졌다. 소녀의 몸에 손을 대자 팔에 난 솜털이 그슬렸고, 손가락엔 물집이 생겼다.

번개가 호를 그리며 소년의 손을 관통했다. 맹렬한 전류가 소년의 살을 타고 흐르자 온몸이 뒤틀렸다. 심장이 쪼그라들며 폐 속에 있던 모든 공기가 밖으로 빠져나왔다. 소년은 헐떡거렸지만 숨을 들이쉴 수 없었다.

강렬한 마법이 몸을 잠식하자 소년은 눈앞이 희미해지며 모든 색깔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바니스는 지팡이를 휘두르던 모습 그대로 멈춰 있었다. 마치 고대의 영웅들을 묘사한 조각상처럼. 소녀 역시 눈물을 흘린 채 멈춰 있었다. 그리고 소녀를 둘러싼 빛은 점점 사그라들었다.

그 순간 소년은 다시 숨을 쉬었다.

소년의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하더니, 감각을 마비시킬 듯한 평온함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맹렬한 마력은 아직 소년의 몸 안에 남아 있었지만, 더는 소년의 몸을 잠식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게 몸 전체로 흘러갔다. 그리고 잠깐이지만 소년은 이 마력을 제어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마력은 불꽃을 내며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고, 곧 소년이 잡아둘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소년의 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자 세상이 사라졌다.


사일러스는 눈을 떴다. 그을린 땅 위로 새카맣게 타버린 형체 세 개가 흩어져 있었다. 하나는 휘어지고 쪼개진 지팡이를 손에 쥐고 있었다. 나머지 둘은 서로를 향해 두 팔을 뻗고 있었지만, 닿지 못한 채 영원히 이별했다.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된 소년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후회가 가슴 속에 밀어닥쳤다. 소년은 바닥에 쓰러져 몸을 떨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셀 수도 없이 많은 별이 반짝였다. 소년은 별들이 밤하늘을 지나 호를 그리며 나무 뒤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밤하늘이 자주색으로 변했을 때, 소년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년은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비극의 현장에서 멀어져갔다. 소년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그 광경을 평생토록 잊을 수 없을 테니까. 소년은 머릿속을 비우려고 애쓰면서 지평선 위에 펼쳐진 산등성이를 바라봤다.

소년은 렌월로, 아니 마력척결관들이 있는 어떤 요새로도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용서를 구해도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곧 소년을 찾아 나설 것이고, 소년이 '정의'의 심판을 받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법은 반드시 지켜야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소년은 마력척결관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데마시아는 넓다.

3. 신입 대원

협곡 깊숙이 자리 잡은 추방자들의 야영지에서는 해가 중천까지 솟아야만 빛을 볼 수 있었다. 드레그본 출신의 사일러스는 자신의 숙소 옆으로 드리운 그늘 안에서 정찰병이 돌아오기만을 차분하게 기다렸다. 얼마 후, 협곡 입구의 돌탑을 돌아 야영지 쪽으로 걸어오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뒤에는 놀란 눈을 한 소년이 따라오고 있었다.

"햅이라는 녀석이에요. 받아달라고 하네요." 정찰병이 말했다.

"그래요?" 사일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년을 무심하게 바라봤다.

"지하 활동 때부터 알던 아이예요. 가족들이 마력척결관들에게 잡혀갈 때 혼자 겨우 빠져나왔죠."

사일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햅을 훑어봤다. 소년의 몸에 깃든 강력한 마력이 느껴졌다. 마치 시커먼 먹구름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다.

"착한 아이예요." 정찰병이 덧붙였다. "참, 얘도 드레그본 출신인데."

사일러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치 모르고 살았던 친척을 만난 양 기뻐하는 눈치였다.

햅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 저도... 함께 싸우고 싶습니다... 대장님."

그러자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인지, 햅은 당황한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곳에 '대장' 같은 건 없단다. 여기 사람들 전부 그렇게 부를 생각이 아니라면 그러지 마." 사일러스가 웃으며 말했다.

"네, 대—" 햅이 멈칫했다. "네, 알겠습니다."

신입 대원 햅은 추방자들과 함께하는 게 옳은 결정이었는지 아직 확신이 없어 보였다. 사일러스는 당황해하는 햅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육중한 사슬이 사일러스의 팔을 감싸고 있었다.

"햅, 편하게 있어. 여기에서 널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여긴 드레그본이 아니야."

햅의 몸에서 긴장이 풀렸다.

"그동안 힘들었지? 놈들에게 감시당하고 쫓기느라 말이야. 마치 널 열등한 존재처럼 취급했잖아. 이제 잊어버려. 넌 이제 우리의 '가족'이니까."

햅은 환하게 웃었지만, 이렇게 기뻐해도 되는지 확신이 없는 듯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왜 내가 이 사슬을 차고 있는지 아니?" 사일러스가 물었다.

햅은 자신감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 사슬은 내 무기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사실들을 잊지 않게 해 주는 물건이기도 해.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 그리고 우리의 목표가 무엇인지 말이야. 우리의 목표는 마법사들의 해방이란다, 알겠니?"

"네, 저도 해방되고 싶어요."

"좋아, 넌 오늘 밤 스스로 족쇄에서 벗어나게 될 거야."
땅거미가 질 무렵, 길옆으로 무성하게 난 덤불 뒤에 십여 명의 마법사가 매복하고 있었다. 바로 사일러스와 그의 심복들이었다. 사일러스의 옆에는 신입 대원 햅이 긴장한 채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사일러스가 미소지으며 햅에게 말했다. "나도 처음엔 긴장됐어. 지금은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지만."

햅이 긴장을 풀 새도 없이, 멀리서 말발굽과 마차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마치 다가오는 폭풍처럼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마차는 순식간에 마법사들 앞까지 도달했다.

그 순간 사일러스는 손짓으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지저분한 몰골의 늙은 마법사가 손목을 까딱하자 길 위로 거대한 강철 덩굴이 솟아났다. 놀란 말들은 울부짖으며 바닥에 고꾸라졌고, 그 위로 미처 멈추지 못한 마차가 말들을 덮쳤다.

순간 다른 마법사들도 사방에서 튀어나와 각자의 무기와 마법을 사용해 우왕좌왕하는 마부들과 경비병들을 제압했다. 사일러스는 객실을 확인하려고 무방비상태인 마차 위로 뛰어올랐다.

"신입, 너도 이리 와." 사일러스가 햅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잽싸게 마차 위로 올라간 햅은 사일러스와 함께 지렛대로 객실 문을 열었다. 큰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만신창이가 된 귀족이 보였다. 악의로 가득 찬 사일러스의 눈이 번득였다.

"처지가 바뀌었군. '귀족 나리'께서 이런 꼴을 당하시다니." 사일러스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귀족은 분노에 몸서리쳤다. 비록 심각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지만, 사일러스를 향한 증오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네놈들에게 고개 숙이지 않겠다."

"잘됐네. 보여 주고 싶은 게 있거든." 사일러스가 대답했다.

잠시 후, 경호병들과 마부들은 양손이 묶인 채 길가에 나란히 섰다. 사일러스는 그들의 얼굴을 한 명씩 확인했다.

"자네들을 보면 마음이 아파. 정말이야." 사일러스가 말했다. "그저 놈들의 꼭두각시일 뿐인데 말이지."

사일러스는 잠깐 멈칫하더니 포박된 귀족을 가리키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너희는 귀족을 섬기는 쪽을 택했고, 그건 결국 놈들과 뜻을 같이한다는 의미지."

사일러스는 추방자들을 향해 돌아서며 큰 소리로 물었다.

"형제자매들이여. 돼지 같은 귀족들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이자들을 뭐라고 불러야 하겠습니까?"

"돼지들!" 추방자들이 소리쳤다.

"이자들을 풀어 줘야 할까요?"

"안 됩니다!" 마법사들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만약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한다면?" 사일러스가 음흉한 미소를 띠며 다시 물었다.

"거짓말일 게 뻔합니다!" 너저분한 차림의 늙은 마법사가 수풀 안에서 소리쳤다.

뒤이어 또 다른 마법사가 말했다. "저놈들을 믿으면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사일러스가 물었다.

"죽여야 합니다!" 다른 젊은 마법사가 소리쳤다. 그의 분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곪아있었다.

나머지도 젊은 마법사의 말에 동조했다. "돼지들을 죽여라!"라는 구호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마법사들의 외침에 수긍한다는 듯이 사일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사일러스가 손으로 햅의 어깨를 살짝 만지자 페트리사이트 사슬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사일러스는 눈을 감고 훔친 마력을 음미했다.

그 광경을 본 포로들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대부분 무릎을 꿇고 울며불며 목숨을 애걸했으나, 귀족은 굴복하지 않고 꼿꼿이 서 있었다. 사일러스는 침울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슬프구나. 우리가 만들 아름다운 세상을 못 보고 죽어야 한다니."

사일러스의 말을 듣고 햅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사일러스, 안 돼요." 햅이 애원했다. "전부... 평범한 사람들이잖아요."

사일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쭉 뻗어 장갑에 축적한 마력을 방출했다. 손가락에서 짙고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와 포로들의 머리 위에 응집했다. 그러자 그들은 일제히 목을 할퀴며 숨을 헐떡이다 결국 숨이 끊어진 채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법사들 사이로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귀족은 입을 꽉 다문 채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정적을 깬 것은 햅의 목소리였다.

"대체... 왜죠?" 햅이 주저앉으며 말했다.

사일러스는 자애로운 손길로 햅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햅, 우리와 함께 싸우고 싶다고 했잖아. 이게 바로 그 싸움이야! 해방을 위한 투쟁이라고..."

사일러스는 햅을 이끌고 귀족 앞에 세웠다.

"...하나씩 없애 나가는 거야."

햅은 눈물을 글썽이며 귀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마법으로 귀족의 숨통을 끊으려던 그 순간, 햅은 팔을 내렸다.

"못... 하겠어요."

상냥했던 사일러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이자는 네 친구가 아니야. 너 같은 평민의 고혈을 빨아 배를 불리는 귀족이지. 이자가 친절을 베푸는 것보다 네가 처형당하는 게 더 빠를 거야."

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귀족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괴물이야."

사일러스가 대답했다. "그래. 너희들이 날 감옥에 가뒀을 때도 똑같은 말을 했지."

사일러스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팔을 감싸고 있는 사슬은 아직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일러스가 햅에게서 흡수한 마력을 마지막으로 쥐어짜 내자, 검은 연기가 줄기처럼 흘러나왔다. 작고 새카만 연기는 귀족의 얼굴을 감싸 질식시켰다. 귀족이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동안, 사일러스는 고개를 돌려 햅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에는 분노가 아닌 애통함이 묻어났다.

"햅, 안타깝지만 넌 아직 해방될 준비가 되지 않았어. 돌아가. 돌아가서 다시 족쇄나 차."

햅이 떠나려고 몸을 돌리자 사일러스는 안타까움에 시선을 돌렸다. 햅은 고개를 숙여 아래를 봤다. 망가진 마차 옆으로 수도로 이어지는 길이 보였다. 사일러스는 햅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고난으로 가득했던 예전 삶을 떠올리며 두려워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햅은 몸을 숙여 죽은 마부 손에 쥐어진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숨을 쉬기 위해 몸부림치는 귀족 앞으로 다가갔다.

"할게요."

햅이 단검을 치켜드는 순간, 사일러스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슬픔은 온전한 환희로 변했다. 새로운 마법사를 해방하는 일은 항상 사일러스를 미소짓게 했다.

4. 혼란

"왜 우릴 여기로 보낸 거지?" 초소 벽에 기대고 서 있던 병사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위대한 도시의 거리에선 지금 피가 흐르고 있는데, 우릴 국경으로 보내다니?"

병사의 이름은 배커였다. 항상 모든 일을 삐딱하게 바라봤기 때문에 시트리아는 그가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배커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나머지 병사들도 두 사람 주위에 서 있었다. 모두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다들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보였다.

시트리아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데마시아군에서 가장 젊은 병사였지만, 실력만큼은 검증된 군인이었다. 병사들과 함께 지내면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고 검을 다루는 손도 아주 빨랐다. 하지만 그런 생활을 힘겨워하거나 스스로 확신이 없을 때도 많았다.

다른 병사들처럼 번쩍이는 전신 판금 갑옷을 입고 등에 방패를 멘 시트리아는 새카만 긴 머리를 길게 땋아 뒤로 늘어뜨린 채 겨드랑이에 투구를 끼고 있었다.

병사들은 거대한 '회색 관문' 앞에 서 있었다. 데마시아의 북동쪽 국경을 방어하는 회색 관문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새하얀 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회색 셰일 절벽이 근방에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다들 생각했다. 하지만 관문을 지키는 병사들, 특히 남부나 바닷가 출신 병사들은 항상 북부 지역 하늘을 뒤덮고 있는 잿빛 구름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을 거라며 투덜거렸다.

관문의 탑 양쪽으로는 흰색 돌로 만든 높은 벽이 이어져 있었다. 돌기 모양의 벽 위쪽으로 깃발이 나부꼈고, 보초들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서도 동쪽을 향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우리도 다른 부대와 함께 숲으로 가서 그 반역자 놈과 패거리들을 찾아야 하는데." 다른 병사가 말했다.

"마법사들..." 배커는 증오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부 없애 버려야 해."

시트리아는 병사들의 말을 듣고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녀는 마법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기억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마법사들은 두렵고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얘기를 들으며 자랐다. 수도에서 들려온 소식을 생각하면 맞는 얘기 같았다.

추방된 마법사 사일러스가 감옥을 탈출하며 데마시아의 심장부를 찢어놓은 사건은 불과 한 달 전 일이었다. 무시무시한 힘을 지닌 광기 어린 마법사는 온 왕국이 불안에 떨게 했고, 위대한 도시는 아직도 봉쇄된 채 군인들이 거리를 통제하고 있었다.

시트리아는 다른 곳에서 더 활약할 수 있다는 동료들의 말에는 동의했지만, 그들의 독기 서린 목소리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마법사 놈들을 전부 잡아다가..." 배커가 말하려는 순간 시트리아가 가로막았다.

"그만. 수호대장님이 돌아오셨어."

땅딸막한 체격의 수호대장 군타르가 빠른 발걸음으로 병사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양옆에는 두건을 뒤집어쓴 남자 두 명이 함께였다.

"같이 오는 사람들은 누구지?"

"모르겠어." 시트리아가 대답했다.

수호대장과 정체불명의 남자들이 다가오자 병사들은 재빨리 차려 자세를 취했다.

"좋아. 우리가 대체 왜 여기까지 왔는지 다들 궁금하겠지." 군타르가 말했다.

군타르는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아버마크에서 보낸 사절이 곧 여기 도착한다. 우리는 사절을 수도까지 안전하게 호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호위' 임무?

시트리아가 보기에도 시시한 임무 같았지만, 병사들은 입도 뻥끗하지 않은 채 전방만 주시했다.

군타르가 계속 말했다. "우리는 사절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우리가 호위하는 중에 털끝 하나라도 상했다간 데마시아의 명예가 더럽혀질 거다. 아버마크는 오래전부터 데마시아의 동맹이었으니 동맹 관계를 해칠 수 있는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우리는 명예와 품위, 신념을 갖추고 주어진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군타르가 딱딱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비록 그 임무가 내키지 않더라도 말이지."

잘 훈련받은 병사들은 군타르의 마지막 말에도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트리아와 동료 병사들은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느꼈다. 마지막 말은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군타르가 남자들에게 손짓하자, 그들은 앞으로 나오며 머리에 쓰고 있던 두건을 벗었다.

시트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쪽은 근엄한 모습의 중년 남성이었다. 짧게 자른 머리는 희끗희끗했으며 깊이 주름진 얼굴에는 흉터가 적지 않았다. 다른 한쪽은 그보다 젊었지만, 몸집은 더 작았으며 불안해 보이는 얼굴 한쪽으로 검은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얼굴에 딱 맞는 반가면을 쓰고 있었고, 어깨에는 무늬가 새겨진 회색 돌 원반이 망토를 고정하고 있었다.

시트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참고 있었던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그들은 마력척결관이었다.

"이쪽은 마력척결단 선임관인 캐드스톤과 그의 동료 아르노다." 군타르가 소개하자 마력척결관들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들은 우리와 동행하며 사절을 수도까지 호위할 것이다."

그 순간 초소 위에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버마크의 깃발을 단 무리가 말을 타고 접근 중입니다!" 초소 위 경비병이 소리쳤다.

수호대장 군타르가 경비병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육중한 관문이 삐걱거리며 열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사슬이 철컹거리며 쇠창살이 올라가고 거대한 도개교가 내려왔다. 도개교가 바닥에 닿자 천둥 같은 굉음이 났다. 활짝 열린 관문 사이로 이른 아침 햇살이 쏟아졌다.

군타르는 마력척결관들과 함께 앞으로 걸어갔다. "따라와." 군타르의 명령에 시트리아와 다른 병사들은 발맞춰 그 뒤를 따랐다.
시트리아는 사절이 어떤 모습일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검은 피부의 덩치 큰 남자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 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던 남자는 데마시아 병사들이 다가오자 활짝 웃었다.

시트리아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남자를 살펴봤다.

남자는 쇠발굽 위로 털이 빽빽이 덮인 칠흑빛 말을 타고 있었다. 시트리아는 그렇게 큰 말을 본 적이 없었다. 남자의 뒤로 긴 미늘 갑옷을 입고 도끼와 방패로 무장한 기병 20명이 보였다. 그중 한 명이 들고 있는 깃발에는 아버마크의 문장인 엇갈린 도끼 두 자루가 그려져 있었다. 기병들의 방패에도 같은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남자는 말에서 내려 활짝 미소지으며 군타르와 수행단을 향해 걸어갔다. 근육질의 몸으로 미루어 봤을 때 군인이나 대장장이 같았다. 마법사는 절대 아닐 거라고 시트리아는 생각했다. 시트리아가 상상하던 마법사는 음흉하고 교활한 모습이었으며, 근력보다는 속임수나 비열한 책략에 의존할 것 같았다.

남자는 데마시아 병사들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왼쪽 손바닥을 이마에 갖다 대더니 다시 하늘로 뻗었다. 이상한 마법을 부린다고 생각한 시트리아는 칼자루를 손에 쥐었다. 하지만 곧 그 행동이 아버마크식 경례법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바보 같은 자신의 행동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수호대장 군타르도 데마시아식 경례로 화답했다.

"아르옌이라고 합니다. 아버마크의 군주를 대신해 인사드립니다."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잘 오셨습니다. 저는 7대대 수호대장 군타르입니다." 소개를 마친 군타르가 덧붙였다. "이쪽은 마력척결단의 캐드스톤입니다."

"전에도 데마시아를 방문하신 적이 있지요? 그럼 항마석의 규율을 잘 알고 계시겠군요." 캐드스톤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럼요, 처음이 아닙니다." 아르옌이 대답했다. "데마시아의 법과 규율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제가 '재주'를 부려서 항마석의 규율을 어기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약속하죠."

"좋습니다. 사절께서 데마시아 땅을 떠날 때까지 저와 아르노가 함께 할 것입니다. 그 약속을 지키실 수 있도록 말이죠. 법을 어기실 경우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만... 말씀하신 그 '재주'를 안 부리신다면 별일 없을 겁니다."

아르옌은 웃으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군타르가 말했다. "그럼 출발합시다. 물론 호위병들은 국경을 넘어올 수 없습니다."

"그럼요. 물론이죠." 아르옌은 돌아서더니 호위병들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훠이! 가 버려!"

아르옌의 이상한 행동에 시트리아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근엄한 모습의 기마병들은 아르옌의 말을 끌고 아무 대꾸도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럼 출발하시죠!" 아르옌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강가의 작은 마을 멜트리지까지 가려면 북서쪽으로 세 시간은 꼬박 걸어야 했다. 그곳에서 일행은 배를 타고 수도까지 갈 계획이었다. 행군을 시작하자 시트리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마크의 사절이 합류했는데도 일행의 이동 속도는 전혀 느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타르가 살인적인 행군 속도로 일행을 이끌었지만, 아르옌은 지팡이를 짚으며 속도를 맞춰 걸었다.

일행은 강풍이 부는 황야와 계곡을 지나 계속 행군했다. 북쪽에서 불어온 차가운 바람 때문에 시트리아는 뼛속까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데마시아 병사들은 추위를 막으려고 옷깃을 여미었지만, 곰 가죽을 덮어쓴 아르옌은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시트리아의 눈에 아르옌은 친근하고 호감이 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교묘한 술수와 속임수에 능했기 때문에 시트리아는 아르옌을 향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아르옌은 자신의 고향 이야기를 하며 지루함을 달랬지만, 마법사 때문에 긴장한 데마시아 병사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아르옌은 주로 술을 진탕 마신 이야기나 힘자랑을 했고, 그것도 아니면 허무맹랑한 영웅담을 늘어놓았다. 어쨌든 타고난 이야기꾼인 것은 분명해서 행군길이 지겹지는 않았다.

"...순간 그 커다란 야수가 으르렁거렸죠. '솔직히 사냥하러 온 거 아니지?'라고요."

상스러운 농담을 늘어놓은 아르옌이 흥에 겨워 자신의 허벅지를 치며 큰 소리로 웃었다. 아르옌의 옆에서 걷던 시트리아는 저질스러운 이야기에 고개를 저으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아르옌이 시트리아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 남자가..."

"네, 이해했어요." 시트리아는 재빨리 손을 들어 아르옌의 설명을 가로막았다.

여정이 중반쯤 접어들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늘었던 눈발이 점점 굵어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졌다. 곧 땅은 눈으로 뒤덮였고 주위는 고요해졌다. 시트리아와 아르옌은 병사들의 대열 한가운데에서 나란히 걸었다. 뒤를 힐끔 보자 말소리가 닿지 않을 거리에서 마력척결관들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추위 때문에 둘 다 머리에 두건을 쓴 상태였다.

"궁금한 게 있어요." 시트리아는 아르옌만 들을 수 있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호기심이란 참 대단하죠. 가끔 위험할 때도 있지만요." 아르옌이 대답했다.

근처에서 걷던 다른 병사가 조용히 하라는 듯이 시트리아를 쳐다봤다. 시트리아는 잠시 멈춘 채, 하던 말을 끝낼지 말지 고민하다가 결국 호기심에 굴복했다.

"항마석의 규율을 알고 계시잖아요. 그리고 지금 데마시아가 겪고 있는... '문제들'도요." 시트리아가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아르옌이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의 그 경박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래서 주군께서 저를 여기로 보내셨습니다. 지금 데마시아의 모든 동맹이 사절을 보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죠."

"그걸 알면서도 왜 하필 '당신'을 보냈죠?"

아르옌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시트리아를 내려다봤다. "저는 아버마크 의회의 수석 고문입니다. 당연히 제가 와야죠." 시트리아가 놀라자 아르옌은 차갑게 웃었다. "바깥세상은 이곳과 사정이 다릅니다. 대장간에 문제가 생기면 대장장이를 부르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그럼 지금 같은 시기에는 마법사가 아니면 대체 누굴 보내겠습니까?"

시트리아는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냥 수도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면 돼'라고 시트리아는 생각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땅거미가 질 무렵에 일행은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멜트리지 마을에 도착했다. 관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들이 경례했고, 사람들은 일행이 마을을 가로지르자 경의를 표하며 길을 비켰다.

눈발이 잦아들고 있었다. 캐드스톤이 두건을 벗으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다음 교차로에서 북서쪽으로 가야 합니다. 저 언덕 기슭에 선착장이 있어요."

군타르는 병사들에게 캐드스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척결관님께서는 전에 여기 와 보셨나요?" 시트리아가 묻자 캐드스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소녀를 찾아왔었죠. 강력한 마법사였습니다."

"체포... 하셨나요?" 시트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백했습니다." 아르노가 대답했다. "악성 마력이 아니라 명부에만 등록된 아이였죠. 보통은 이런 경우에 체포하지 않았지만 그 이후에..."

"아르노!" 캐드스톤이 아르노의 말을 끊었다.

아르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이 입을 다물었다.

"갑시다. 서두르는 게 좋겠어요." 캐드스톤이 말했다.
선착장으로 향하는 초저녁 길은 사람들로 붐볐다.

일과를 마친 어부들이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개중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고, 술집으로 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이들이 눈 쌓인 길 위에서 술래잡기를 하자 신이 난 개 두 마리가 그 뒤를 따라 달려갔다. 상점 주인들은 가게 입구에 서 있었고, 거리의 행상인들은 목청을 높여 호객했다.

언덕길을 3분의 1도 채 못 내려갔을 무렵, 시트리아는 거리의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처음에는 행인들이 인상을 쓰거나 몇 마디 중얼거리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곧 문과 골목 앞에 마을 사람들이 모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수군거리며 일행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어부 한 명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의 눈에는 분노가 이글거렸다.

"비키시오." 군타르가 으르렁거리자 어부는 마지못해 길을 비켰다.

시트리아는 충격을 받았다. 수도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같은 데마시아인들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대열을 좁혀." 군타르의 지시에 병사들은 신속하게 아르옌과 두 마력척결관 주위로 모이며 간격을 좁혔다.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 한 병사의 투구에 명중했다. 곧이어 다른 방향에서 또 다른 돌멩이가 날아와 캐드스톤의 머리에 명중하자 그의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시트리아는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병사들이 움직이기에는 길이 너무 좁았고,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어떻게든 선착장까지 가야 했다.

"방패 들어!" 군타르가 소리쳤다. 수호대장도 시트리아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보였다. "빠르게 통과한다!"

병사들은 순식간에 속도를 올려 거리를 따라 전진했다.

"국왕 폐하의 이름으로 명합니다. 길을 비키시오!" 군타르가 소리치자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길을 비켰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본 시트리아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마차 두 대가 골목에서 튀어나와 길을 막더니 성난 마을 사람들이 그 앞으로 몰려들었다. 시트리아는 주위를 살폈다. 상점들의 하얀 벽이 양쪽을 마치 협곡처럼 가로막고 있었다. 상점 문에는 전부 빗장이 쳐 있었고, 창문은 덧문으로 막혀 있었다.

"함정입니다!" 시트리아가 소리쳤다.

"그래." 군타르가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정지! 뒤로 돌아!" 군타르가 소리치자 병사들은 즉각 뒤로 돌았다. 모두 방패를 치켜들고 있었지만, 아무도 무기를 꺼내진 않았다.

마력척결관들은 아르옌을 사이에 끼고 바짝 붙었다. 세 사람은 진형 한가운데서 병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소용없습니다! 이쪽도 막혔습니다!" 시트리아가 소리쳤다.

마을 사람들은 일행이 왔던 길도 서둘러 마차로 막아 퇴로를 차단했다.

"그자를 넘기면 아무도 다치지 않을 거요!" 덩치 큰 남자가 마차 위에 서서 소리쳤다. 두꺼운 가죽 앞치마에 망치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마을 대장장이 같았다.

"길을 비키시오!" 군타르가 소리쳤다.

분노한 마을 사람들의 대표인 듯한 대장장이는 군타르의 말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렇게는 못 하지." 대장장이는 말 없이 손에 든 망치를 반대쪽 손바닥에 가볍게 치며 위협했다.

대치 상황이 발생하자 자리를 피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길 양쪽을 가로막은 무리는 점점 숫자를 더해갔다. 대부분 농기구나 벌목용 도끼처럼 변변찮은 무기를 들고 있었으나 개중에 몇몇은 허리춤에 칼을 차고 있었다. 이들은 병사들의 상대가 안 될 것이 분명했지만,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다시 말하겠소. 길을 비키시오." 군타르가 말했다.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 시트리아의 방패를 때렸다. 그 모습을 보고 옆에 있던 배커가 천천히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

"무기는 안 돼!" 시트리아가 배커의 손을 막으며 소리쳤다. "이들은 우리가 지키기로 맹세한 데마시아인들이야!"

시트리아의 고참이자 나이도 많았던 배커는 그녀를 쏘아보더니 손을 뿌리쳤다. 순간 군타르가 단호하게 명령했다.

"맞는 말이다. 내가 명령할 때까지 칼은 안 돼."

병사들을 둘러싼 군중은 더욱더 사나워졌고, 소리치며 점점 거리를 좁혀왔다.

시끄러운 와중에 시트리아는 몇몇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한 여자가 말했다. "돼지 같은 놈, 넌 죗값을 치르게 될 거다!"

"놈을 잡아라!" 또 다른 사람이 소리쳤다. 나이가 지긋한 남자였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퇴역 군인 같았다.

"그냥 넘기는 게 좋겠어." 배커가 중얼거렸다.

시트리아가 배커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우린 사절을 보호하기로 맹세했어! 군인의 명예를 저버릴 작정이야?"

"그냥 마법사잖아." 누군지 모를 다른 병사가 말했다.

순간 무거운 도자기가 병사들 위로 떨어졌다. 도자기는 방패와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다른 곳에서는 돌덩어리가 날아와 다른 병사의 견갑을 강타했다. 충격을 받은 병사가 무릎을 꿇자, 동료들이 곧바로 다시 일으켜 세웠다. 시트리아가 위를 보자 지붕 위에 사람들이 보였다.

시트리아는 두건을 쓴 남자가 지붕에서 무언가를 던지는 모습을 보고 본능적으로 방패를 높이 들어 뒤쪽에 서 있는 아르옌을 보호했다. 녹이 슨 말편자가 방패의 둥근 면에 부딪혔다가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급소에 맞았다면 크게 다칠 수 있었다.

아르옌은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진 상태였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을 겁니다. 맹세하죠." 시트리아가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병사들을 둘러싸고 소리를 질렀다. 아무도 가까이 붙을 엄두를 못 냈지만, 누구라도 한 명 달려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번질 거라는 사실을 시트리아는 알고 있었다.

"여기서 빠져나가야 합니다!" 시트리아가 소리쳤다. 점점 더 많은 벽돌과 돌멩이, 쓰레기가 병사들의 갑옷 위로 쏟아졌다.

"그대로 돌파하면 마을 사람들이 다치게 돼." 수호대장 군타르가 말했다.

"그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 같군요." 캐드스톤이 말했다. 시트리아도 내키진 않았지만 같은 생각이었다. 그 순간...

"저 문을 통해서 가는 건 어떻습니까?" 시트리아가 소리치며 빗장이 걸린 상점 문을 가리켰다.

"해 볼 만하겠어." 군타르가 말했다. "반원 대형으로 집결!"

병사들은 능숙하게 대형을 바꾸면서 상점을 등진 채 반원 형태의 방패 벽을 만들었다.

"시트리아! 배커! 문을 박살 내!" 군타르가 소리쳤다.

두 사람은 대형에서 빠져나왔다. 대형 뒤에 마력척결관들과 아르옌이 서 있었다. 배커는 아르옌을 밀어젖히며 짜증 난 듯 말했다.

"마법사 양반, 비켜."

시트리아는 아르옌이 숨을 고르며 대꾸하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시트리아는 아르옌 옆을 돌아 상점 문 앞으로 갔다. 그리고 배커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배커가 말했다. "셋에 간다. 하나, 둘, 셋!"

두 사람은 힘껏 이중문을 발로 걷어찼다.

"한 번 더!"

두 사람은 체중을 실어 세 번 더 문을 발로 찼다. 그러자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문이 안쪽으로 젖혀졌다.

"사절과 마력척결관들을 데리고 들어가! 여긴 우리가 막고 있을 테니 빠져나갈 곳을 찾아!" 군타르가 소리쳤다.

목표가 빠져나가려고 하자 마을 사람들은 방패 벽을 향해 돌진했다.

시트리아가 방패를 들고 불 꺼진 상점 안으로 들어가며 소리쳤다. "어서! 분명 뒷문이 있을 겁니다."

상점은 양초 가게 같아 보였다. 선반 위에는 수백 개의 양초가 놓여 있었고, 엄청난 꽃향기가 시트리아의 코를 찔렀다.

"이쪽으로!" 배커가 소리치더니 상점 뒤쪽으로 사라졌다.

시트리아가 배커를 따라 상점 안쪽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바짝 붙어요." 아버마크의 사절은 두 마력척결관 사이에 낀 채 시트리아를 뒤따랐다.

배커가 찾은 문은 창고로 이어졌다. 안에는 나무통과 상자, 자루가 가득했다. 창고 안이 너무 어두워서 시트리아는 몇 발짝 앞에 있는 배커를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때 아르옌이 말했다. "양초가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죠?" 시트리아는 코웃음을 쳤지만, 이내 손으로 입을 막아 웃음을 참았다. 지금은 웃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배커가 뒷문을 발로 차자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창고 안으로 빛이 쏟아졌다. 뒷문은 텅 빈 골목으로 이어졌다.

배커는 다른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내며 말했다.

"뒤는 내가 막을 테니 어서 가!"

시트리아는 고개를 끄덕인 후 아르옌과 마력척결관들을 이끌고 앞으로 걸어갔다. 열 발자국도 채 못 갔을 때 옆 골목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와 길을 막았다.

적갈색 머리를 한 여자가 손에 대형 석궁을 든 채 서 있었다. 시트리아가 한 손을 들어 뒤따라오는 일행에게 신호를 보내자 여자는 석궁을 일행 쪽으로 겨누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눈송이가 소리 없이 떨어졌다. 시트리아는 대로 옆 한적한 골목길에서 마을 사람들의 소란과 동료 병사들의 외침이 점차 희미해짐을 느꼈다.

울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눈이 충혈된 여자는 자포자기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쩌다 마을이 이 지경이 됐을까? 데마시아 사람들은 법을 잘 준수하고 절제심도 강했다. 무엇이 이 마을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을까?

"비켜요." 간절한 눈빛의 여자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감정에 북받쳐 힘겹게 덧붙였다. "부탁이에요."

"동맹국에서 보낸 사절입니다." 시트리아가 차분하게 말했다. 마치 겁먹은 말을 달래는 듯한 목소리였다. "이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없어요."

"뭐라고요?" 여자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러지 말아요. 데마시아의 보호를 받는 사람입니다." 시트리아가 말했다.

여자는 갑자기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그 사람 말고 난 '척결관'을 말한 거예요. 저자 말이에요."

그제야 시트리아는 석궁이 캐드스톤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딸은 아무 죄가 없었어!"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카이라는 자기 힘을 마력척결관들에게 알리기로 '스스로' 선택했어. 누구를 해칠 생각도 없었고, 가족들이나 이 마을 사람들을 슬프게 할 생각도 없었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카이라를 사랑했어!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된 건 다 너 때문이야!"

"저 사람의 딸을... 데려갔군요." 시트리아가 캐드스톤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캐드스톤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법이 바뀌었거든요. 이제 악성이든 아니든 마력을 지닌 국민이라면 누구나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왕국 내 모든 마법사에게 해당하죠."

"그저 어린애일 뿐이었어!" 여자가 석궁으로 캐드스톤을 위협하며 소리쳤다. "내 딸을 '범죄자들'과 함께 가뒀겠지! 아니면 추방당해 국경 밖을 혼자 떠돌고 있을지도 모르지! 다 네놈 탓이야!"

석궁이 발사될 줄 알고 시트리아는 숨을 들이마셨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아직은.

"카이라는 누구도 해치지 않았어!" 여자가 울부짖었다. "평범하게 태어나지 못해 매일 밤 울면서 잠들었는데... 네가 우리 딸을 데려갔어. 괴물은 바로 너야."

"법은 법이니까요." 캐드스톤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 법은 틀렸어. 카이라는 내 전부였어. 그런데 네가 빼앗아갔지. 이제 내 차례야."

여자가 방아쇠를 당기려다가 멈칫했다. 시트리아가 캐드스톤과 여자 사이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제발 비켜요." 여자가 울면서 말했다. "다른 사람은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럴 수 없어요. 무기를 내려놓으세요."

"어차피 '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니 '저자'도 죽어야 해요."

"그러면 돌이킬 수 없어요. 카이라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반겨줄 엄마가 있어야 하잖아요."

"마력척결관에게 잡혀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해요. 카이라도 마찬가지예요."

여자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절망감에 시트리아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건 모르는 일이죠." 시트리아가 애원했다. "엄마라면 딸을 기다려 줘야죠. 카이라가 돌아오면 당신이 필요할 거예요."

여자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눈을 감자 고여있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석궁은 내리지 않았다.

시트리아가 손을 뻗으며 여자에게 다가갔다.

"제가 도와 드릴게요. 약속해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따님을 찾을게요."

시트리아는 여자에게 닿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이 거리라면 시트리아의 흉갑도 대형 석궁의 화살을 막지 못할 터였다.

"부탁드려요. 카이라를 위해서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해요." 시트리아가 말했다.

여자는 전의를 상실한 채 주저앉았다. 슬픔과 피로에 굴복하며 쓰러지던 그 순간, 여자의 손가락이 석궁의 방아쇠를 당겼다.

딸깍 소리에 뒤이어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렸다. 석궁이 발사되었다.

화살은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 골목의 하얀 돌벽을 맞고 튕겨 나갔다. 시트리아는 휙 돌아섰다. 화살이 캐드스톤과 아르노를 아슬아슬하게 지나 배커를 향해 날아갔다.

그 순간 시트리아는 아르옌이 손가락을 살짝 뒤트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자 화살이 배커 바로 앞에서 투명한 벽에 부딪히기라도 한 듯이 튀어 오르더니 배커의 어깨 위로 지나갔다.

그 광경을 목격한 시트리아는 목덜미에 난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배커는 어찌나 놀랐는지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화살은 분명 배커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배커도 알고 있는 듯했다. 곰 가죽을 덮어쓴 덩치 큰 사절은 시트리아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아르노는 바닥에 쓰러진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캐드스톤은 골목의 한쪽 벽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여자는 눈 속에서 무릎을 꿇고 몸을 들썩이며 흐느꼈다.

시트리아는 재빨리 달려가 덜덜 떨리는 여자의 손에서 석궁을 천천히 빼냈다. 그리고 여자를 꼭 안아 주었다.

"체포하지 말아요." 시트리아가 캐드스톤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단순한 사고였어요."

캐드스톤은 곤란한 듯이 머뭇거렸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잖아요." 시트리아가 이어 말했다. "이분은 충분히 고통받았어요. 부탁이에요."

캐드스톤이 한숨을 쉬며 눈을 비볐다.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캐드스톤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무도 마법을 쓰지 않았으니까요. 당신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시트리아는 배커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데마시아 병사들의 방패 벽을 향해 계속 달려들었다. 발길질하며 방패와 투구에 병과 돌멩이를 집어 던졌지만, 병사들은 아직 무기를 뽑지 않고 있었다.

시트리아가 양초 가게에서 나오자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마을 사람들은 시트리아가 적갈색 머리의 여자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뒤로 물러섰다.

"로잘린?" 덩치 큰 대장장이가 말했다.

"카이라는 이런 상황을 원치 않을 겁니다." 여자가 소리쳤다. "자기 때문에 누군가 다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예요."

여자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마을 사람들은 멈칫했다. 아직 몇몇 사람들은 방패를 밀어젖히며 싸움을 계속했지만, 대부분 어리둥절한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길을 비키시오! 당장 비키면 아무런 처벌도 없을 것이오!" 군타르가 소리쳤다.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대장장이를 쳐다봤다.

"시키는 대로 합시다. 이제 끝났어요." 마침내 대장장이가 말했다.

마을 사람들의 분노와 증오는 마치 아침 햇살을 받은 안개처럼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원래의 평범한 모습을 되찾았다. 분노와 증오로 일그러진 얼굴을 더는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부끄러움에 투덜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군타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병사들이 대장장이가 지나갈 수 있게 길을 열었다. 대장장이는 여자에게 다가가 두 팔로 꼭 안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시오!" 군타르는 모여있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체포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시트리아는 관대한 결정을 내린 군타르가 고마웠다.

시트리아는 주위를 둘러봤다. 가벼운 찰과상과 타박상을 제외하고는 병사들과 마을 사람들 중에서 심한 상처를 입은 사람은 없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마차를 끌고 병사들에게서 멀어져갔다.

군타르가 안심한 표정으로 시트리아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군타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덕분에 오늘 대참사를 면할 수 있었다, 병사."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낀 시트리아는 대답할 힘도 없어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근처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병사들은 아직 남아있는 마을 사람들을 경계하며 바라보았다. 배커는 멍한 얼굴로 근처에 서 있었다. 시트리아의 시선은 암울한 표정의 마력척결관들을 향했다가 대장장이의 품에서 울고 있는 로잘린에게로 옮겨갔다.

모두가 데마시아인이었다. 비록 최근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가 서로를 등 돌리게 했지만, 전부 선한 사람들이었다.

시트리아는 생각했다. 데마시아는 곧 힘든 시기를 맞이할 것이라고.

아니.

힘든 시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5. 믿음의 사슬

파일:shackles_of_belief.jpg

거대 드류바스크에 올라탄 서리 자매 토르바는 고삐를 당겨 겨울 발톱 부족의 상흔의 어머니 브리나 옆에 섰다. 털이 덥수룩한 드류바스크가 심기가 불편한지 씩씩거리자 코에서 뜨거운 김이 뿜어져 나왔다.

"얼음 이빨, 조용히 해." 토르바가 드류바스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손목에 감긴 뼈 부적과 토템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매서운 바람이 황량한 땅을 휩쓸고 지나갔다. 약탈조 전사들은 모두 두꺼운 털가죽 옷을 입고 있었지만, 토르바는 아니었다. 소용돌이 모양의 남색 문신으로 장식된 팔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지만, 전혀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오래전부터 토르바에게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위풍당당한 풍채를 지닌 상흔의 어머니 브리나 역시 엄니가 솟아난 드류바스크에 올라타 있었다. 토르바의 것보다 몸집이 더욱 거대한 브리나의 드류바스크는 으르렁거리며 거대한 발굽을 크게 구르더니 토르바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브리나가 발길질을 하자 드류바스크는 다시 얌전해졌다.

브리나는 수없이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무자비한 전사였으나, 토르바는 위압되지 않으려고 했다. 비록 상흔의 어머니만큼 이름을 떨치진 못했지만, 토르바는 꿈을 통해 신의 뜻을 읽는 '여주술사'였다. 프렐요드 최강의 여족장들조차 신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없었다.

나머지 겨울 발톱 부족 전사들은 상흔의 어머니와 여주술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쪽에 있는 아바로사 부족의 영토로 행군을 시작한 지 몇 시간 만에 멈춰 선 그들은 안장에서 내려 뻣뻣해진 등허리와 다리를 풀었다.

바람이 거세지면서 눈과 얼음이 토르바를 향해 날아들었다.

"폭풍이 오고 있어요." 토르바가 말했다.

브리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계속 남쪽을 바라봤다. 브리나의 얼굴에는 오랜 흉터가 가득했다. 시력을 잃은 오른쪽 눈은 흐릿했으며 검은 머리칼 사이로 하얀 흉터가 길게 나 있었다.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몰라도 그 흔적은 여전히 선명했다. 겨울 발톱 부족에게 그런 흉터는 생존자의 징표이자 자부심의 근거, 경외의 대상이었다.

"뭔가 보이나요?" 토르바가 물었다.

브리나는 먼 곳을 계속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토르바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궂은 날씨 탓에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안 보여요."

"두 눈이 멀쩡해도 아무 쓸모 없구나, 꼬마야." 브리나가 쏘아붙였다.

토르바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자 눈동자가 담청색으로 변하고 손가락 주위로 서리가 끼었다. 토르바는 화가 났지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대부분의 겨울 발톱 부족 사람들처럼 브리나는 토르바나 신앙에 관심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토르바는 마음대로 약탈조에 합류하면서 더욱 미운털이 박힌 듯했다. 틀림없이 여주술사가 동행하면 미신을 믿는 전사들이 동요하고, 결국 목적의식과 자신의 권위가 약해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토르바가 브리나의 반대를 무릅쓰고 약탈조에 합류한 것은 막연하지만 강력한 직감 때문이었다. 그런 종류의 직감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을 오래전 깨달았다. 신들이 토르바를 이곳으로 이끌었지만, 어떤 이유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저기, 멀리 남쪽에." 브리나가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바위 근처다, 보이나?"

토르바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눈 위로 드리운 그림자처럼 흐릿한 형체가 보였다. 브리나가 대체 어떻게 발견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토르바는 목덜미가 간질거려 얼굴을 찌푸렸다. 형체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느낌이 이상했다.

바람이 거세지며 정체 미상의 형체는 다시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아바로사 정찰병일까요?"

"아니." 브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눈이 깊어지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어. 프렐요드 출신이라면 어린아이조차도 하지 않을 실수지."

"외지인이군요. 어째서 이렇게 멀리까지 왔을까요?"

브리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바로사 놈들은 전통을 따르지 않아. 그래서 남부 인간들을 약탈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 '거래'를 하지. 아마 저놈도 길을 잃은 무역상 중 하나가 아닐까 싶군."

브리나는 역겨운 듯 침을 뱉더니 드류바스크를 타고 계속 이동했다. 그러자 다른 전사들 역시 산등성이를 따라 다시 동쪽으로 드류바스크를 몰았다. 하지만 토르바는 제자리에 서서 눈보라 너머를 주시했다.

"우릴 봤을 거예요. 아바로사 부족에 알릴지도 몰라요."

"그럴 일은 없어. 저승에 있는 신들에게 알린다면 모를까. 폭풍이 거세지고 있으니 해 질 녘이면 죽을 거야. 가자, 더는 지체할 수 없어."

토르바는 뭔가 마음에 걸렸다. 산마루 끝에 서서 외지인이 있던 쪽을 바라봤지만, 더욱 심해진 눈보라 때문에 겨우 몇 발자국 앞밖에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약탈조에 합류한 이유가 '저 사람' 때문인지 토르바는 궁금했다.

"꼬마! 안 올 거야?" 브리나가 소리쳤다.

토르바는 브리나를 슬쩍 보더니 다시 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

토르바는 고삐를 당겨 드류바스크를 산등성이 아래로 몰았다. 등 뒤로 브리나의 욕지거리가 들렸다. 토르바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따라가실 거죠?"

거대한 몸집을 한 냉기의 화신 전사, 쇠주먹 브록바르가 물었다. 10년 가까이 충직한 투사로서 브리나를 섬기며 가끔은 연인이 되어 주었던 남자였다.

"자매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부족 전체가 신들의 노여움을 살 겁니다."

프렐요드에서 자신과 함께 싸울 단 한 명의 전사를 고르라고 한다면, 브리나는 브록바르를 택했을 것이다. 휘하의 다른 전사들보다 머리 반 개는 더 크고 드류바스크를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센 브록바르는 믿음직한 부하였다. '겨울의 통곡'이라는 대검을 다루는 그는 실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전투를 즐기기까지 했다.

수 세기에 걸쳐 냉기의 화신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온 겨울의 통곡은 겨울 발톱 부족 사이에서 전설적인 무기였다. 칼자루에는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 정수 조각이 박혀 있었으며, 칼날에는 날카로운 서리가 덮여 있었다. 냉기의 화신이 아닌 자는 검을 쥐기만 해도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며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브리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브록바르의 유일한 단점이 있다면 미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까마귀들이 떼 지어 나는 모습부터 눈 위로 흩뿌려진 핏자국까지 모든 것이 브록바르에게는 전조이자 예언이었다. 심지어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여주술사가 딛고 간 땅조차도 그는 신성시했다. 설상가상으로 휘하의 다른 전사들마저 동조하기 시작했는지, 브록바르가 나섰을 때 일부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낮은 목소리로 불평을 내뱉었다.

결국 브리나는 마지못해 전사들에게 서리 자매를 따라갈 것을 지시했다.


브리나의 말 중 하나는 사실이었다. 이 정체불명의 외지인은 어린아이보다도 프렐요드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토르바는 깊은 눈밭을 헤치며 힘겹게 걸어가는 외지인을 바라봤다. 그대로 둔다면 한 시간 내로 죽을 것이 분명했다. 사실 툰드라 지대를 탐험할 준비나 기본적인 이해도 없이 여기까지 온 것도 기적에 가까웠다.

그러나 황량한 대지를 휩쓰는 매서운 바람도 토르바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외지인은 쓰러졌다. 재차 몸을 일으키려고 애썼지만 힘이 다한 듯했다.

외지인은 토르바의 접근을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멀리서부터 시야가 닿지 않는 측면이나 후방에서 거리를 좁혀 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외지인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토르바는 주변을 살폈다. 만약 뒤를 쫓던 서리송곳니나 다른 맹수가 있었다면 지금이 공격할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토르바는 계속해서 접근했다.

거리가 더욱 가까워지자 외지인의 생김새를 더 자세히 확인할 수 있었다. 정체불명의 외지인은 남자였다. 가죽옷과 모피를 입고 있었지만, 프렐요드식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창이나 도끼, 검, 활과 같은 무기를 전혀 지니고 있지 않았다. 토르바는 고개를 저었다. 겨울 발톱 부족은 걸음마를 떼는 순간부터 무기를 손에서 절대 놓지 않는다. '신비로운' 무기를 주로 다루는 토르바조차 언제나 세 자루의 검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게다가 남자 뒤로 두 개의 사슬이 보였다. 사슬은 손목을 감싸고 있는 기이한 모양의 거대한 수갑에 연결돼 있었다.


드레그본의 사일러스는 자신이 프렐요드의 혹독한 환경을 너무도 얕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북부 지대에는 막강한 마법의 힘이 흐르고 있었다. 출발하기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지금 사일러스는 그 힘을 뼛속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직접 선발한 마법사 십여 명과 북쪽의 얼어붙은 땅으로 향했지만, 눈보라와 숨겨진 협곡, 사나운 야수들에 의해 하나둘씩 목숨을 잃었다. 출발 전에는 프렐요드 야만 전사들이 가장 위험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몇 주째 행군을 계속하는 동안 그는 단 한 명의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환경에서 살 수 있는지 사일러스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름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다. 모피와 양털로 만든 옷으로 몸을 둘둘 감싸고 두꺼운 털과 육중한 몸집의 황소에 식량과 땔감, 무기, 그리고 물물교환에 쓸 주화까지 챙겼다. 자신의 고향, 데마시아의 세금 징수원과 귀족들의 금고에서 훔친 주화였다.

하지만 황소 역시 모조리 죽고 말았다. 남은 건 오직 사일러스뿐이었다.

강철 같은 의지와 데마시아 왕가와 귀족 가문의 몰락을 바라는 불타는 욕망 때문에 지금껏 버틸 수 있었다.

이미 사일러스는 데마시아 내부에서 상당한 저항을 조성하고 반란에 불을 지피기도 했지만, 불길이 계속 타오르려면 다른 연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데마시아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사일러스는 구할 수 있는 연대기와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덕분에 북방의 강력하면서도 끔찍한 고대 마법에 대해 알게 되었다. 사일러스가 찾던 바로 그 '연료'였다. 죽음이 임박한 지금도 그는 자신이 찾던 마법의 힘이 가까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고집만으로는 프렐요드의 가혹한 추위를 이길 수 없었다. 손과 발은 이미 검게 변해 감각이 없어진 지 오래였고, 극심한 무력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아까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서 기수 한 무리를 본 것 같았지만, 그것이 진짜였는지 아니면 피로와 혹한으로 인한 환각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움직이지 않으면 죽을 것이 뻔했다. 살기 위해서는 북방의 마법을 찾아야 했다.

사일러스는 온 힘을 다해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눈밭에 얼굴을 파묻고 쓰러지고 말았다.


토르바는 쓰러진 외지인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얼음 이빨을 앞으로 몰았다. 남자는 더 이상 일어나려고 발버둥 치지 않았다. 죽은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은 느낄 수 없는 추위에 마침내 굴복한 것이다.

남자와 가까워진 토르바는 안장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무릎 높이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쓰러진 남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토르바는 수갑과 사슬을 다시 유심히 살펴봤다.

만약 포로라면 대체 '어디서' 탈출한 것일까?

겨울 발톱 부족은 적을 생포하는 법이 없었다. 회유나 폭력에도 뜻을 굽히지 않는 자들은 식량만 축낼 뿐이니까. 다만 이따금 노예로 거두는 경우는 있었다. 수갑이나 사슬로 봤을 때 아바로사 부족의 포로는 아니었다. 혹시 산맥 너머의 남쪽 나라에서 탈출한 것일까?

토르바는 양손으로 지팡이를 쥐고 남자를 쿡 찔렀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지팡이 끝을 눈 아래로 집어넣어 남자를 뒤집으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팔뚝 대부분을 덮고 있는 거대한 수갑의 무게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안간힘을 쓴 끝에, 토르바는 결국 남자를 뒤집는 데 성공했다.

생기가 없는 남자의 몸이 뒤집어지면서 털 달린 모자가 벗겨졌다. 퀭한 눈은 굳게 감겨 있었으며, 입술은 푸른색을 띠었다. 수염이 덥수룩한 뺨과 눈썹에는 서리가 끼었고, 느슨하게 묶은 검은 머리는 얼어붙어 있었다.

토르바는 손목의 수갑으로 시선을 옮겼다. 서리 자매는 여주술사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수년 동안 많은 부족을 방문했지만, 수수께끼의 허연 돌로 만들어진 그 수갑은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토르바는 불안했다. 절대로 풀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듯한 그 수갑은 바라보기만 해도 막연한 불쾌감이 느껴졌다. 이런 꼴을 당할 정도라면 아주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 분명하다고 토르바는 생각했다.

남자 옆에 무릎을 꿇으며 토르바는 왜 자신이 이곳으로 이끌렸는지 궁금했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이는 신들의 뜻이 분명했지만, 이유는 알지 못했다. 남자는 의식이 없었다. 혹시 이자를 구하길 바라는 것일까? 아니면 남자가 가지고 온 무언가 때문에 이곳으로 이끌린 것일까?

토르바는 다시 수갑을 바라보다가 결심한 듯이 손을 뻗었다.

허연 돌로 된 수갑에 손이 닿기도 전에 손가락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남자가 번쩍 눈을 떴다.

놀란 토르바는 뒤로 물러섰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남자는 장갑을 찢어 벗기고 토르바의 팔을 움켜쥐었다. 신성한 힘을 소환하려고 했지만,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수년 만에 처음으로 몸을 옥죄어 오는 추위를 느꼈다. 토르바는 그대로 쓰러진 채 숨을 쉴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추위에 사로잡힌 토르바의 눈에 남자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마치 난로에 몸을 녹인 것처럼 남자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살짝,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고맙군."

남자가 손을 놓자 힘을 빼앗긴 토르바는 거친 숨을 뱉으며 눈밭에 쓰러졌다.


여주술사가 쓰러지는 모습을 본 브리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드류바스크를 앞으로 몰았다.

"나를 따르라!" 브리나의 호령에 약탈조 전사들이 돌진하자 땅이 흔들리고 눈사태와 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겨울 발톱 부족 전사들이 눈을 헤치며 질주하는 동안, 남자는 서리 자매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모피 외투를 벗어 바닥에 쓰러진 토르바에게 다정하게 덮어 주었다.

남자는 일어서서 지축을 흔들며 돌진하는 겨울 발톱 부족 전사들을 바라봤다. 남자의 뒤로 사슬이 보였다. 브리나는 창을 단단히 쥐었다.

병력의 규모를 확인한 남자는 바닥에 쓰러진 여주술사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손을 들어 무기가 없음을 보였다. 하지만 무장하지 않은 적을 수없이 죽여온 브리나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동작이었다.

별다른 명령 없이도 전사들은 도망가지 못하도록 남자를 둥글게 포위했다. 남자 역시 현명하게도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도망칠 곳도 없었다.

무리에서 떨어져 늑대들에게 둘러싸인 먹잇감 신세가 된 남자는 자신을 포위한 프렐요드 전사들을 둘러봤다.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두려워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브리나는 남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투가 없어 근육질의 팔이 노출되었음에도 남자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희한하군.' 브리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남자는 키가 컸지만 몸이 약간 구부정했다. 팔에 달린 거대한 수갑의 무게 때문이었다.

"자매의 상태를 확인해." 브리나는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명령했다.

남자 역시 브리나를 바라봤다. 기수 한 명이 드류바스크에서 내려 여주술사를 살피러 갔다.

"난 브리나다. 겨울 발톱 부족의 상흔의 어머니이자 방패를 부수는 자, 슬픔을 부르는 자이며 드류바스크의 포효다. 넌 누구냐? 이곳에 온 목적은 뭐지?"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알 수 없는 언어로 대답했다. 브리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건가?"

남자는 또다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치며 대답했다. "사일러스."

"사일러스? 그것이 네 이름인가?"

남자는 한 번 더 가슴을 치며 했던 말을 반복했다. 미소를 띤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브리나는 작은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죽은 듯이 눈밭에 누워 있는 토르바를 바라봤다. 전사 한 명이 무릎을 꿇은 채 토르바의 가슴에 귀를 대고 호흡을 확인했다.

"죽었나?" 브리나가 물었다.

"반쯤 얼었지만 아직 살아 있긴 합니다."

'반쯤 얼었다고?' 프렐요드 전사들이 동요했다. 서리 자매는 고대 신들의 축복을 받아 추위를 타지 않는다고 했건만 토르바는 반쯤 언 채로 누워 있고, 사일러스라는 이름의 외지인은 맨살을 드러내 놓고 서 있었다.

브리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강철과 불, 피 외에는 어떤 것도 믿지 않았던 브리나였으나 휘하의 전사들, 특히 브록바르는 이 상황을 불길한 징조로 볼 것이 뻔했다.

"시간 낭비야." 브리나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창을 고쳐 쥐며 드류바스크를 앞으로 몰았다. 사일러스라는 남자는 손을 들어 올리며 남부의 언어로 뭐라고 소리쳤지만, 브리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이 얼간이를 죽이고 가던 길을 계속 갈 생각이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때 브록바르가 옆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브리나는 눈썹을 추켜세웠다.

"자매님을 해친 놈입니다." 브록바르가 두꺼운 손가락으로 토르바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신들이 보는 앞에서 놈을 벌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남자는 브리나와 브록바르를 번갈아 바라봤다. 자신이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지 과연 이자는 알고 있을까?

브리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마음대로 해."

브록바르가 드류바스크에서 내리자 그의 당당한 풍채가 드러났다. 사일러스라는 남자도 작은 덩치는 아니었지만, 브록바르에 비하면 초라해 보였다. 브록바르는 등에 멘 칼집에서 겨울의 통곡을 꺼내고는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토르바가 마지막으로 추위를 느꼈던 건 여섯 살도 안 됐을 때였다.

그녀는 깔깔 웃으며 눈토끼를 쫓아 얼어붙은 호수 위를 달렸다.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토르바는 얼음이 두껍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결국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차갑고 어두운 물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뼈까지 시려 오는 냉기가 순식간에 온몸을 감쌌고, 폐 속에 있던 공기가 모조리 빠져나갔다. 뻣뻣해진 팔다리에는 고통스러운 경련이 일었다.

그렇게 토르바는 한참을 죽은 채로 있다가 얼음 아래에서 꺼내져 부족의 주술사에 의해 소생되었다. 그날 밤 토르바는 처음으로 신들이 내린 능력을 발휘했다.

"사람이 죽음을 경험하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아오기도 한단다." 주술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 뜻을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넌 신들의 축복을 받은 거야."

그날 이후로 토르바는 추위를 타지 않게 되었고, 맨몸으로 눈보라 속을 멀쩡하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토르바는 또다시 겁에 질린 소녀가 되어 얼어붙은 호수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다만 이번에는 눈을 부릅뜬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토르바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고 숨도 쉴 수 없었다. 냉기가 그녀를 가득 채웠다. 냉기가 '곧' 그녀였다.

이러기 위해서 이곳으로 이끌렸던 것일까? 외지인에게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그를 통해 신들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그러나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가 망각으로 향하는 토르바를 주저하게 했다.

신들의 뜻에 따라 목숨 바쳐 외지인을 살린다고 해도 브리나의 손에 죽을 것이 뻔했기에... 토르바는 수면을 향해 헤엄쳐 올라가기 시작했다.


쇠주먹 브록바르는 돌진하며 검을 휘둘렀다. 남자를 일격에 끝장낼 생각이었다. 겨울의 통곡이 쇳소리를 내며 바람을 가르자 칼날이 지나간 자리에 얼음 안개가 나부꼈다.

얼음 트롤마저 반으로 갈라 버릴 강력한 일격이었지만, 외지인은 무거운 수갑을 찼음에도 빠른 몸놀림으로 공격을 피하며 사슬을 휘둘렀다. 사슬이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가자 브록바르는 분노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외지인의 예상과 달리 브록바르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태산과 같이 강인하면서도 몸집에 맞지 않게 날렵한 그는 손등으로 옆통수를 강타해 외지인을 날려 버렸다. 브리나조차 놀라 움찔할 정도였다.

브록바르가 다가가는 동안 외지인은 겨우 몸을 일으켰다. 브리나는 남자가 정신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시간을 조금 벌었을 뿐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브록바르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상대를 마무리하기 위해 접근했다.


사일러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야만 전사의 무기를 주시했다.

칼자루에 박힌 얼음 조각은 밝게 빛나고 있었고, 서리로 뒤덮인 칼날에서는 지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얼음 조각은 사일러스가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마력을 내뿜었다. 그 마력은 원시적이고 위험하면서도 속박되어 있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강력한 그 위력에 사일러스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여자로부터 흡수한 힘은 사일러스를 소생시켰다. 추위를 물리치고 팔다리의 동상을 치유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보다 훨씬 오래된 힘이었다. 이 힘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사일러스는 기합을 지르며 프렐요드인 앞에 섰다.


외지인이 호를 그리며 브록바르를 향해 사슬을 휘둘렀다. 양쪽에서 날아든 사슬은 브록바르의 머리를 강타한 뒤 투구를 휘감았다. 외지인이 사슬을 비틀자 투구가 산산이 조각났다.

브록바르는 눈밭에 피를 뱉고, 긴 머리를 흩날리며 계속 전진했다.

사슬이 또다시 날아들었지만, 육중한 체구의 브록바르는 첫 번째 사슬을 회피한 다음 앞으로 접근하며 한쪽 팔을 들어 올려 자신의 두꺼운 팔뚝에 사슬이 감기도록 두었다. 그런 다음 사슬을 단단히 쥐고 외지인을 자신 쪽으로 잡아당기며 팔꿈치를 휘둘렀다.

공격이 적중하자 남자가 비틀거렸다. 브록바르는 자신의 발치에 쓰러진 외지인을 끝장내기 위해 겨울의 통곡을 들어 올렸다.

"잠깐만요! 죽이면 안 돼요!" 누군가의 외침에 브록바르는 대검을 쥔 손을 멈췄다.

브리나가 험악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돌리자 위태롭게 서 있는 서리 자매 토르바가 보였다. 피부는 시체처럼 창백하고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토르바는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앞으로 걸어왔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브리나가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니라 신들의 뜻이에요."


거대한 몸집의 야만 전사가 당황하며 한눈을 파는 순간 사일러스는 빈틈을 포착했다.

사일러스는 무릎을 꿇고 일어서며 사슬을 휘둘렀다. 그리고 검날에 감긴 사슬을 강하게 잡아당겨 대검을 야만 전사의 손아귀에서 뽑아냈다.

눈밭에 떨어진 대검을 향해 사일러스는 몸을 날렸다.

그리고 씩 웃으며 대검을 집어 드는 순간... 그는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외지인의 어리석은 행동에 브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직 냉기의 화신만이 얼음 정수 무기를 다룰 수 있었다. 냉기의 화신이 아닌 자가 무기를 만지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냉기가 팔을 타고 올라가자 외지인은 비명을 지르며 겨울의 통곡을 쥔 손을 풀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으며 얼어붙기 시작한 팔을 감싸 쥐었다. 손에서부터 출발한 얼음 정수의 치명적인 힘은 팔을 거쳐 심장으로 향했다.

"'이게' 신들의 뜻이라고?" 브리나가 외지인을 가리키며 코웃음을 쳤다.

토르바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신들은 변덕스럽고 잔혹하기 그지없군." 브리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아니면 이자가 더 고통받길 원한 건가?"

브록바르가 아무렇지 않게 겨울의 통곡을 집어 들자 외지인은 비통하고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얼음 정수의 치명적인 힘이 그를 잠식해 가고 있었다.

"고통을 끝내 줘." 브리나가 명령했다.

브록바르는 단호한 얼굴로 토르바를 바라보며 허락을 구했다. 그 모습에 브리나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신들이 정말로 저놈을 살리려 한다면 '직접' 끼어들겠지."


토르바는 프렐요드의 고대 신들을 모시고 숭배했지만, 신들의 뜻을 알지 못했을뿐더러 신들이 인간사에 직접 개입하는 모습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놀라운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외지인은 눈밭에 누운 채 경련을 일으켰다. 얼음 정수에 몸을 거의 다 장악당한 상태에서도 저항을 멈추지 않으며 한쪽 손을 브록바르 쪽으로 뻗었다.

토르바는 이 데마시아인의 능력이 무엇인지, 어떻게 한 번의 접촉만으로 자신의 능력을 빼앗았는지 알고 있었다. 브록바르에게 경고할 수도 있었지만... 토르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죽어 가는 상황에서도 사일러스의 저항 의지는 여전히 강고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는 거대한 몸집의 야만 전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전사의 군화에 손을 갖다 댔지만, 그는 사일러스의 손을 걷어찼다.

수염이 덥수룩한 야만 전사는 마치 사일러스가 길거리에서 죽어 가는 개라도 되는 것처럼 가련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데마시아의 귀족들이 천민들을 바라보는 눈빛과 다를 바 없었다. 사일러스는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분노에 자극을 받은 사일러스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프렐요드 전사의 목을 꽉 움켜쥐었다. 그 순간 고대의 순수한 원소 마법의 힘이 사일러스의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비록 프렐요드 전사의 얼음 무기를 직접 다룰 순 없어도... 전사의 몸을 통해 그 힘을 흡수하는 것은 가능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일러스는 무기의 힘을 흡수했다.

전사는 영문도 모른 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사일러스는 미소 지었다. 두 눈은 얼음같이 차가운 빛으로 이글거렸다.

그는 자신의 얼어붙은 팔을 바라봤다. 그리고 새롭게 얻은 힘을 사용해 얼음을 걷어 냈다. 팔을 타고 내려간 얼음이 완전히 사라지자 멀쩡한 피부가 드러났다.

그런 다음 사일러스는 겁에 질린 채 서 있는 전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우리 어디까지 했더라?"


브록바르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외지인에게서 뒷걸음쳤다.

"정체가 뭐지? 냉기의 화신인가?" 브리나가 사나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뇨." 토르바가 믿음이 가득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보다 더 특별한 존재예요..."

더 두고 볼 수 없었던 브리나는 능숙한 동작으로 창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안장에 올라선 다음 온 힘을 실어 외지인을 향해 창을 던졌다.

창은 곧장 날아갔지만, 외지인이 손가락을 펼친 채 손을 뻗자 앞쪽의 땅이 갈라지며 거대한 얼음 기둥들이 마치 방패처럼 솟아올랐다. 브리나의 창은 얼음 기둥을 파고들었으나 관통하지는 못했다. 약 두 뼘 깊이로 박힌 창은 계속해서 흔들렸지만, 외지인에게 상처 하나도 내지 못했다.

브리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순식간에 솟아오른 마법의 장벽은 또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외지인은 웃으며 서리로 뒤덮인 자신의 손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다. 마치 바다에 잠긴 빙산과 같이 연한 푸른빛이 손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는 냉기가 서린 눈을 들어 브리나를 올려다보더니 다시 한번 고대의 마력을 끌어모았다. 그러자 두 손 사이에서 눈보라를 품은 듯한 마법 구체가 생겨났다.

겨울 발톱 부족 전사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무기를 만지작거렸다. 외지인이 끌어낸 힘은 프렐요드의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토르바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소리쳤다. 브리나는 놀란 표정으로 여주술사를 바라봤다.

외지인의 언어로 이야기한 것일까?

아직 토르바에 관해 모르는 것이 많은 듯했다. 그녀를 향한 브리나의 불신은 더욱더 깊어졌다.


토르바가 외지인과 한참을 이야기하는 동안 브리나는 이를 갈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뭐라고 하는가?" 마침내 인내심이 바닥난 브리나가 쏘아붙였다.

"자신과 우리 부족은 같은 적과 싸우고 있으니, 서로 도울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브리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누구? 아바로사 부족? 우린 놈들을 약탈해 왔지, 전쟁 중이 아닌데."

"산맥 너머에 있는 자신의 동족, 데마시아인들을 말하는 듯합니다."

"반역자로군. 동족마저 배신하는 인간을 왜 믿어야 하지?"

"상흔의 어머니는 네가 우리 부족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아실 것이다." 토르바가 외지인의 언어로 말했다. "네 제안은 무엇인가? 밝히지 않으면 네 영혼은 저승을 떠돌게 되리라."

사일러스가 브리나에게 직접 대답하는 동안, 토르바는 이해되지 않는 단어를 몇 번이고 확인해 가며 주의 깊게 들었다.

"오직 자신만이 아는 숨겨진 길을 통해 데마시아로 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막대한 부가 주인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으며 눈이 내리지 않는 땅에는 잘 먹은 가축들이 가득하고 길거리에는 금은보화가 넘쳐난다고 합니다."

겨울 발톱 부족 전사들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심지어 브리나조차 눈을 번득였다. 힘겹고 고된 삶을 살아가는 그들로서는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함정이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하나? 믿을 수 없는 자다. 거짓말에 혹하느니 당장 죽여 버리는 편이 낫지."

"이자는..." 토르바는 신중하게 거짓말을 지어냈다.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꿈에서 프렐요드의 세 자매가 나타나 자신을 이곳으로 보냈다네요."

"세 자매!" 브록바르가 놀라서 외쳤다. "아바로사와 세릴다, 리산드라입니다!"


다른 겨울 발톱 부족 전사들도 놀라서 목에 걸린 신성한 토템을 어루만지며 웅성거렸다.

세 자매는 프렐요드의 전설이자 가장 위대하고 영예로운 전사였다. 오래전 영웅의 시대를 살았던 최초의 냉기의 화신이자 선택받은 자들로서, 많은 프렐요드인들은 갈등이 있거나 전투를 치를 때 세 자매의 지혜와 가호를 기원했다.

브리나가 토르바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거짓말을 알아차린 것일까?

알아차려도 상관없었다. 열광하는 브록바르의 모습에 다른 전사들도 동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거짓말이 브록바르의 신앙심을 자극하리라는 사실을 토르바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전사들에 대한 브록바르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이제 이들은 브리나가 어떤 명령을 내리더라도 외지인을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토르바는 승리감을 만끽했다. 그리고 외지인을 주시하고 있는 브리나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살짝 미소 지었다.

신들의 뜻에 따라 이자가 살아남았다고 토르바는 확신했다. 그 과정에서 거짓말을 했지만,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신뢰할 수 있는 자인지 먼저 확인해야 한다."

"현명하십니다, 상흔의 어머니시여.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약탈조에 합류시키겠다. 잘 싸우고 능력을 증명하면 제안을 들어보도록 하지. 데마시아로 향하는 숨겨진 길에 대해서도 말이야. 하지만 이자를 관리하는 일은 네 몫이다. 만약 이자가 우리를 배신하면 네 목도 달아날 줄 알아."

토르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외지인을 향해 돌아섰다.

"우리와 함께 싸워라. 그리고 상흔의 어머니께 네 능력을 증명해라. 그럼 네가 원하는 동맹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토르바의 마지막 말에 외지인은 활짝 웃었다.

토르바는 외지인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남부 출신치고는 잘생긴 얼굴이었다. 덩치가 더 컸다면 좋았겠지만, 대신 그는 영리하고 강했다.

토르바는 외지인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다시는 내 몸에 손대지 마."

외지인은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허락 없이는 만지지 않을게." 토르바는 남자가 보지 못하게 뒤돌아서며 미소 지었다.

"뭐라고 했지?" 브리나가 물었다.

"당신의 말에 따르겠다고 합니다, 상흔의 어머니시여."

"좋아, 그럼 이동한다. 약탈을 시작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