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빅토르 프랑클[1] Viktor Frankl | |
본명 | 빅토르 에밀 프랑클 Viktor Emil Frankl |
출생 | 1905년 3월 26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빈 | |
사망 | 1997년 9월 26일 (향년 92세) |
오스트리아 빈 | |
국적 | [[오스트리아|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의사, 철학자, 작가 |
분야 | 신경과, 정신과 |
모교 | 빈 대학교 (1931년 의학박사, 1948년 철학박사) |
배우자 | 틸리 그로서 (1941년 ~ 1944년, 사별) 엘리노어 카타리나 슈빈트 (1947년 결혼) |
자녀 | 딸 가브리엘 |
종교 | 유대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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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삶이 의미가 있는지 묻는 대신, 매 순간 의미를 부여하는 건 우리 자신이다."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정신과 의사로, 초기엔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알프레드 아들러의 심리학을 따르다가 후에 독창적인 길로 가게 된다. 심리치료 기법 중 하나인 의미치료의 창안자이기도 하다.
2. 생애
빈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레지던트를 마친 후 1937년 개인병원을 냈지만, 1938년 나치의 오스트리아 인수가 시작되자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아리안"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을 금지당한다. 유대인을 받던 로스차일드 병원으로 간 그는 의도적으로 잘못된 진단을 하여, 나치 안락사 프로그램에 의해 몇몇 환자들이 안락사되는 것을 막았다.이후 1941년에 틸리 그로서와 결혼하였다. 아이를 하나 임신하지만 부부는 이 아이를 낙태하도록 강요당했다. 그렇지만 1944년 10월 19일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고, 1945년 4월 27일 미군에 의해 풀려났으나, 안타깝게도 여동생을 제외한 아내, 가족 모두가 사망하고 말았다. 포로수용소 경험은 그의 일생을 바꾸었다.
1946년 자신의 경험담을 책으로 출판하였다. 처음 제목은 Trotzdem Ja Zum Leben Sagen: Ein Psychologe erlebt das Konzentrationslager('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살 만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심리학자의 강제수용소 체험에서')라는 제목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Man's Search for Meaning('죽음의 수용소에서')로 제목이 바뀌어 출판되었다. 이후 빅터 프랭클은 나치의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심리학자로서 사람들의 대처와 반응을 관찰한 것을 토대로 의미치료(Logotherapy)를 확립하기 위해 일생 동안 노력한다.
1947년에 엘레노어 카타리나 슈빈트와 재혼해 딸 가브리엘을 두었고 이 딸은 아동 심리학자가 된다.
1955년 빈 대학교에서 신경정신과 교수직을 맡았고, 일생 동안 49개 언어로 된 32권의 책을 썼다. 미국정신과협회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는 종교와 정신과에 대한 중요한 공헌을 인정해 빅터 프랭클에게 1985년 오스카 피스터상을 수여했다. 1997년 심부전으로 사망했고, 비엔나 중앙 묘지 (Zentralfriedhof)의 유대인 구역에 영면했다.[2]
3. 사상
자세한 내용은 의미치료 문서 참고하십시오.4. 저서
- 죽음의 수용소에서
- 무의미의 의미
- 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답할 때
[1] 우리나라에서는 영어 발음인 '빅터 프랭클'로 더 잘 알려져 있다.[2] 빅토르 프랑클 (위키백과 영어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