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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2-09 00:50:48

비에고/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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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문 배경2. 그녀3. 뭍이 보이는 곳에서4. 헤이븐폴의 약탈자5. 몰락의 근원6. 불협화음의 노래(펜타킬)7. 변함없는 마음(코믹스)8. 패잔병

1. 장문 배경

바다 건너 동쪽 먼 곳의 왕국, 해안을 따라 점점이 남은 폐허들에서나 간간이 들리는 이름을 아는 이는 적다. 그 왕국의 젊고 어리석은 군주, 사랑에 빠져 왕국을 파멸시킬 운명을 타고난 왕자를 아는 이는 더더욱 적다.

그 이름은 비에고, 세상 모두에게 중대한 위협이 된 남자다.

선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비에고는 왕좌를 물려받을 후계자가 아니었다. 그 대신 안락한 삶을 영위하며 자만심과 이기심만 키웠으나,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그는 왕국을 다스릴 적성도, 바람도 없이 얼떨결에 왕관을 쓰게 되었다.

가난한 재봉사 이졸데를 만나기 전까지, 비에고는 왕좌에 관심이 없었다. 이졸데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젊은 왕 비에고는 그녀에게 청혼했고, 그렇게 세계에서 손꼽히는 권력을 가진 왕이 시골 소녀와 맺어졌다.

두 사람의 연애는 매혹적이었다. 타인에게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던 비에고는 자신의 삶을 이졸데에게 바쳤다. 둘은 언제나 함께였다. 비에고는 이졸데를 두고 나다니는 일이 드물었고, 자신의 왕비에게 선물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졸데가 곁에 있을 때는 다른 곳을 쳐다보지 않았다.

비에고의 신하들은 성이 났다. 어떻게 해도 비에고가 정사를 돌보지 않고, 미심쩍은 통치 아래 왕국이 붕괴하기 시작하자, 몇몇이 은밀히 모여 나랏일에 관심이 없는 새 왕을 끌어내리고자 모의했다. 한편, 왕국의 적들은 이를 공격의 기회로 보았다. 독사들이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독 묻은 단검을 지닌 자객이 비에고를 찾아왔다. 하지만 왕을 둘러싼 삼엄한 경비 탓에 단검은 표적을 찌르지 못하고 이졸데를 스쳤다.

독이 빠르게 퍼져서 이졸데는 극심한 무기력증에 빠졌다. 비에고는 아내의 상태가 점점 위중해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분노와 절망에 압도당한 비에고는 아내를 구하고자 나라의 모든 재물을 탕진했다.

하지만 모두 헛된 일이었다. 이졸데는 침대에서 죽어갔고, 광기가 비에고를 집어삼켰다.

비에고는 더 맹렬하고 필사적으로 해독제를 찾았다.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비에고는 그녀를 되찾고자 국고를 모조리 털어 동전 하나 남기지 않았다. 이내 왕국이 혼란에 빠지자, 증오와 분노로 가득한 비에고는 죽은 이졸데와 칩거에 들어갔다.

어느 날 비에고는 축복의 빛 군도에 어떤 병이든 치유하는 물이 있다는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는 강력한 군세를 이끌고 평화로운 군도에 쳐들어가, 길을 가로막는 이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심부의 성소에 도달해 아내의 몸을 축복받은 물속에 담갔다. 이졸데가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가 불러온 파멸 따윈 상관없었다. 치르지 못할 대가는 없었다.

잠시나마, 이졸데가 정말로 돌아왔다.

이졸데는 그림자와 격노의 끔찍한 망령으로 되살아났다. 그녀는 죽음의 품에서 강제로 떨어진 충격, 분노, 고통에 비에고의 마법 검을 들어 그를 찔렀다. 축복받은 물에 담긴 마법과 고대의 검이 격돌하자, 방의 기운이 폭발하며 군도 전역을 찢어놓고 그에 닿은 이들 모두를 의식을 유지한 채 고통받는 언데드로 만들었다.[1]

그런데도 비에고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의 나라가 무너져 폐허가 되었고, 위대한 국가들이 세워지고 멸망했으며, 그의 이름마저 잊혔으나... 죽음 이후 천년이 지난 지금, 비에고가 다시 일어섰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으리라.

생에서 품었던 것과 같은 위험한 집착이 비에고의 정신을 일그러트린다. 괴기하며 흔들리지 않는 사랑이 그의 모든 행동과 소망과 잔악함을 부추긴다. 상처받은 심장에서 치명적인 검은 안개가 쏟아져 지나는 곳마다 생명을 앗아간다. 검은 안개로 세상을 뒤져 이졸데를 되찾을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비에고 앞에 쓰러진 군단들이 그의 종으로 다시 일어날 것이며, 살아있는 어둠이 대륙들을 집어삼키리라. 세상은 사랑의 열병을 앓던 고대 군주의 행복을 앗아간 대가를 남김없이 치를 것이다. 이졸데의 얼굴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그는 어떤 파괴를 불러오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비에고의 통치는 공포다.

비에고의 사랑은 영원하다.

이졸데를 되찾을 때까지, 누구도 몰락한 왕의 길을 막지 못할 것이다.

2.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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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고가 떠올릴 때마다 그녀의 얼굴은 조금씩 달라 보였다.

두 눈이 너무 멀찍이 떨어져 있기도, 너무 가까이 붙어 있기도 했다. 아니면 뺨이 조금 여위었거나 크기도 했다. 재봉사라면 으레 생기는 굳은살이 없을 때도 있었지만 오랫동안 가위와 바늘을 써 뼈마디 굵은 손이 보일 때가 있었다. 그녀는 가운을 입거나, 간소한 작업복을 입거나,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 항상 달랐지만 같았으며 늘 실체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그곳에 있는 사람이었다. 더는 비에고가 갖지 못한 허깨비 같은 심장이 찢겨 나간 것은...

비에고는 세계의 밑바닥에서 검게 변한 채 산산조각이 난 왕좌에서 왕의 검을 밑에 있는 바위에 깊이 내리꽂았다. 흑요석이 갈라지며 그림자 군도 전체가 무시무시하게 떨렸다.

왼쪽에는 비에고가 도저히 쳐다볼 수 없는 그림이 놓여 있었다. 아름다운 이졸데의 얼굴은 너무나도 완벽하고 사랑스러워 비에고에게 평화나 휴식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비에고는 그녀의 모습을 찢었다. 남은 것은 수 세기 전 어리석게도 세상이 좋은 곳이라 믿었지만 지금은 죽은 것과 다름없는 젊은 왕의 모습뿐이었다.

살아 있다고 해도 이전과는 달랐다.

비에고는 그림자나 고통에 뒤틀리지 않았던 과거의 국가가 어땠는지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 속에서 사암 거리로 나간 비에고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이졸데뿐이었다. 모든 벽을 채운 벽화에 그녀가 있었다. 그곳은 비에고만이 보고 만질 수 있는 그림 세계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다가가면 환상이 깨져 다시 이곳, 그녀를 빼앗아 간 더러운 물에 둘러싸인 곳으로 돌아왔다.

땅에 꽂힌 검을 뽑으며 일어선 비에고는 울부짖으며 육중한 검을 휘둘러 바닥과 벽을 박살 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이라도 본 사람처럼 옛 왕국의 오래된 그림을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둠이 군도를 삼키기 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비에고. 정말 잘생겼구나. 정말 젊어. 어쩌다 이렇게 됐지? 넌 어디로 사라진 거야?" 비에고는 그림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액자에 꼴사나운 금이 가며 아래에 있는 캔버스가 구겨졌다.

"어디 있어, 이졸데? 왜 내게 돌아오지 않지?"

그러나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존재에게 검은 안개는 재앙이었다. 생명을 빨아들이는 무시무시한 망령들이 태양이 죽고 세계에 남은 것이 하나도 없을 때까지 산 자를 공격하며 빼앗아 갈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매개체였다.

비에고에게 검은 안개는 상심으로부터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크나큰 슬픔이었다. 오래전 사라진 행복한 나날 비에고가 사랑했던 증거이자 머나먼 옛날 그가 무엇을 빼앗겼는지 떠올리게 하는 잔혹한 것이었다.

땅을 샅샅이 뒤지며 무서운 힘으로 마수를 뻗쳐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이 안개는 닿는 것의 생명을 닥치는 대로 빼앗았다. 결국 괴사한 생명체에게는 대몰락의 은은한 초록빛만이 남곤 했다. 그러나 이 안개에도 목적은 있었다. 안개는 비에고의 슬픔이 크거나 작아지는 것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며 익숙하고 안전한 예전의 뭔가에 이끌리듯 이곳저곳을 뒤졌다. 그 안에서 함께 이동하며 자신의 일을 충실히 수행하는 망령이나 영혼과 달리 안개 그 자체는 끊임없이 그녀에게 매달릴 뿐이었다.

비에고가 하는 모든 일은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안개가 뭔가를 찾았다. 빌지워터의 부두와 아이오니아 연안 너머, 군도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본토 강기슭에 있는 작은 도시에 뭔가가 숨겨져 있었다. 그 물체는 비에고를 부르며 소리쳤다.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봐 달라고 외쳤다.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집과 들판에 부드럽게 깔리는 죽음의 이불을 피해 도망치는 와중에도, 망령이 비명을 지르며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와중에도, 비에고에게는 단 하나의 목소리만이 들렸다.

"비에고." 목소리가 뭐라고 하는지 명확히 들리진 않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굶주린 그림자처럼 안개에서 튀어나온 몰락한 왕은 검을 높이 들어 처음 눈에 들어온 경비병을 찔렀다. 경비병의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서서히 몸이 사라진 경비병의 영혼이 안개에 흡수됐다. 하지만 비에고는 무심하게 다음 경비병을 내려칠 뿐이었다. 사방에서 악귀가 산 자를 먹어 치우자 영혼들이 끌려 나와 왕의 군단에 합류했다.

타오르는 육체가 날아다니고, 화살이 떨어지고, 검이 맞부딪히며 전사들이 쓰러졌다.

비에고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도시의 거대한 벽 앞에서 한 손을 들어 올리자 안개가 앞으로 돌진했다. 이내 벽이 부패하기 시작하며 돌이 떨어져 나갔다. 문턱을 넘은 비에고는 어느새 벽을 통과해 있었다. 목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조용히 움직이며 두 사람을 더 쓰러뜨린 비에고는 곧이어 또 다른 자를 쓰러뜨렸다. 아무 의미도 없는 자들이었다. 그 어떤 가치도 없으며 전부 하찮기 그지없었다. 뒤에서 죽은 자의 영혼이 비에고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일어났다.

비에고의 앞에는 이 도시의 통치자가 서 있었다. 어떤 보물을 지키고 있는 오만한 남자였다. 하지만 같은 지도자로서, 실력 있는 전사로서, 굶주린 영혼보다 부하로 부리기는 더 좋을지도 몰랐다.

"멈춰라." 비에고가 다시 한번 한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몰락한 왕의 지시에 안개, 망령, 공포, 싸움,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았다.

"네 뒤에 있는 것은 네가 헤아릴 수 없이 중요한 보물이다. 내게 돌려준다면 내 밑에서 따를 수 있게 해 주겠다."

남자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용기가 나지 않는 듯 말을 더듬거리는 것 같았다. 비에고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남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물을 넘기면 이 도시는 무사한 겁니까?"

몰락한 왕은 실망한 듯했다. 남자는 비에고가 대답을 생각할지, 괜히 물었다고 후회할지 알 길이 없었다. 위에서 불쑥 나타난 비에고가 거대한 검으로 이 작고 겁에 질린 전사 왕을 베어 버렸기 때문이다. 거대한 대검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진 남자의 몸을 타고 검은 어둠이 퍼졌다.

비에고는 남자의 뒤에 있는 문을 뜯어냈다. 안에 보물이 놓여 있었다.

낡고 해진 오르골, 비에고의 결혼식 선물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속삭였다. 오르골은 슬픔에, 한없이 큰 비애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였다. 오르골을 눈앞으로 들어 올린 비에고는 다시 만나는 날 이졸데의 얼굴에 떠오를 부드러운 미소를 상상했다.

"내 사랑, 놈들이 대체 무슨 짓을 했지?" 비에고가 달콤히 속삭이는 것과 동시에 쓰러진 남자가 천천히 땅에서 일어났다. 갈라진 피부 틈으로 으스스한 푸른빛이 고동쳤다.

"걱정하지 마." 비에고가 오르골에 대고 말했다. "반드시 당신을 찾겠어. 이건 시간문제일 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비에고는 망령이 집어삼킨 도시에서 사라졌다.

3. 뭍이 보이는 곳에서

칼리스타/배경 참조.

4. 헤이븐폴의 약탈자

헤카림/배경 참조.

5. 몰락의 근원

종말은 한 남자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대몰락의 원흉을 목도하세요.
파일:i16577255144.jpg

6. 불협화음의 노래(펜타킬)

파일:17b7e44c9dbf4a3f.jpg
I: 금지된 신의 전령
"멍청이들!"

사원 벽 너머에서 울려온 그 단어가 멜로디의 귀를 때리며 차분하게 명상 중인 멜로디를 뒤흔들었다.

프레이타르의 현을 따라 춤추던 멜로디의 손가락이 멈췄다. 멜로디가 눈을 깜빡이며 따스한 녹갈색 눈동자를 드러냈다. 사원 내 성소의 아치형 석조물이 보였다. 축복받은 카코포니와의 교감을 가능하게 한 속세의 대상 때문에 경건한 마음으로 악기를 내려놓은 멜로디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사원 입구로 향했다.

얼굴 위를 덮고 있던 옻칠이 된 픽의 베일을 들어 올리자 소용돌이치는 향과 두 개의 태양이 내뿜는 한낮의 햇빛이 잠시 멜로디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멜로디 앞에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신들의 선택을 받은 자에 의해 조화롭게 정제된 돌, 철, 유리가 보였다. 하늘에 떠 있는 거석은 세상의 규칙적인 심장 박동, 템포로노미콘의 울림을 더 강하게 퍼뜨렸다.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사원 계단 위에 있는 화난 목소리의 주인공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호리호리한 몸에 흰 피부를 지닌 젊은 남자였다. 백금색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다. 맹렬한 얼굴에 있는 눈은 타오르는 불신으로 이글거렸다. 누더기를 걸친 그는 홀로 서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병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에게서 뒤로 물러나는 중이었다.

"당신들은 잘못된 길로 가고 말았어." 남자가 자신을 벽처럼 둘러싸고 노려보는 이들을 향해 계속해서 호소했다. "자신만이 진실이라 주장하는 이들에 의해 기만을 당했지."

멜로디는 교정관들을 힐끗 바라봤다. 빛나는 황동 판금 갑옷을 걸친 커다란 전사들은 사원을 수호하는 이들이었지만 자신들이 지키는 석상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보고만 있지?'

젊은 남자는 중앙 뜰을, 그리고 뜰을 가득 메운 '불쾌한 주인'의 잔혹하고 추상적인 묘사를 가리켰다. "스텐토루스, 카코포니, 페르페투움. 이 셋은 숭배할 가치가 있는 진실한 신들이지만, 그 이름으로 일으킨 믿음은 거짓 위에 세워졌어. 그들의 투사는 어떻지?"

그는 신들과 함께 서 있는 아주 약간 더 작은 크기의 기념물을 손가락질했다. 화강암과 금이 박힌 대리석으로 제작된 웅장한 기념물은 신들이 세상의 통치자로 선택했다는 군주들...

바로 펜타킬이었다.

남자가 내뱉듯 말했다. "그들은 당신들의 땀으로 왕좌를 세웠고, 당신들의 희생으로 자신의 갈증을 채웠어. 당신들은 그들에게 그저 노예일 뿐이야. 그 짓거리가 오랫동안 굳건히 유지되는 건 다 당신들이 희생하고 있기 때문이지!"

멜로디는 너무나도 이단적인 주장에 몸을 흠칫 떨었다. 남자의 말이 멜로디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멜로디는 생각을 떨쳐 내려 머리를 흔들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고통스러운 가시와 함께 달라붙는 듯했다. 그러나 멜로디는 다시 사원의 성소로 도망치는 대신 남자를 비난하는 군중을 보며 힘을 얻었다.

"거짓말쟁이!"

"신성 모독자!"

"당신에게 성서의 저주가 내려지길!"

남자는 씁쓸하게 웃었다. "성서? 펜타킬은 그 성서가 온전한 것이라고 믿게 하겠지. 자신들이 겁을 먹고 뜯어낸 후 숨긴 페이지는 없다고, 이 세상의 모든 힘은 오직 불쾌한 주인만이 지니고 있다고 말이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당신들은 속고 있어!"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충격과 의심으로 웅성대는 소리가 퍼지며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당신들이 아는 게 전부가 아니야."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연민하듯 다소 부드러워진 말투였지만 어쩐지 더 힘이 있게 들렸다. "당신들의 앞에 놓여 있는 길이 신들의 의지라고 믿겠지만... 사실 다른—"

"그만해라, 비에고!"

멜로디는 금실로 짠 망토가 판돌에 사락사락 끌리는 소리를 들으며 뒤로 돌았다. 차분한 사원에서 모습을 드러낸 축성자 킬마스터가 문턱을 넘더니 계단을 따라 성큼성큼 내려왔다. 그 움직임에서 고위급 사제 특유의 위엄과 권위가 느껴졌다.

"당신이 언제쯤 달려올까 궁금했지." 비에고가 희미하게 웃었다. "꺼져 가는 빛의 꼭두각시여."

"썩 물러가라." 킬마스터가 차분하고 침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스로 어떠한 독을 내뱉고 있는지 깨닫지 못할 정도로 페르페투움의 은총을 저버린 것이냐? 더는 죄 없는 신자들을 들쑤시지 말아라."

비에고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바닥에 침을 뱉었다. "당신은 더 이상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할 처지가 못 돼, 영감탱이. 난 그 지긋지긋한 성상의 발치에서 허리를 굽히고 몸을 문댈 생각 따위 없어. 난 더 진실한, 숭배할 가치가 있는 힘에만 답하지. 바로 불협화음을 내는 자 말이야!"

킬마스터의 표정이 굳었다. 킬마스터는 아까와 달리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떠나라. 지금 당장."

비에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싫다면?"

킬마스터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엄지와 검지에 작은 심벌즈가 매여 있었다. "그럼 강제로 내보내야겠지."

킬마스터가 손가락을 한 번 부딪쳤다. 심벌즈가 울리는 소리에 교정관들이 마치 한 몸처럼 앞으로 나왔다. 스텐토루스에게 충성을 맹세한 그들은 불꽃으로 벼린 강철나무 망치를 지니고 있었다. 스타카토 같은 발소리를 내며 신속히 비에고를 둘러싼 교정관들은 무기를 들고 내리칠 준비를 마쳤다.

"더 이상의 배교는 용납할 수 없다. 그 혓바닥을 잘 간수하지 않는다면 불쾌한 주인의 이름으로 후회하게 해주마."

하지만 비에고는 비웃을 뿐이었다. "그럼 그 잘나신 분들이나 불러 보지 그래? 내가 내뱉는 '독'에 답해야 할 펜타킬은 어디 있지?" 비에고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금칠한 탑의 높은 곳에서 당신들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잘살고 있겠지. 그들이 직접 와서 내게 떠나라고 한다면 군말 없이 떠나 주겠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비에고는 귀를 기울였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비에고와 멜로디의 눈이 마주쳤다.

비에고는 히죽거렸다. "아무 반응도 없군. 그럴 줄 알았어."

멜로디는 아무 말 없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장면을 지켜봤다. 비에고가 주장하는 진실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다. 불쾌한 주인의 힘을 의심하는 것은 두 개의 태양이 빛나지 않는다거나 격렬한 바다가 요동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펜타킬은 역대 최고의 세력이자 신들의 선택을 받은 투사였다. 왜 이 상황을 가만히 내버려 둔 것일까?

군중 사이에서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높아진 언성과 화난 말이 점점 격해지더니 서로 밀치고 때리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광기나 다름없는 비에고의 헛소리에 선동된 사람들이 서로를 공격하며 사원 뜰에는 폭력과 의심이 스며들었다.

"조용!" 킬마스터가 양팔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형제자매들이여, 모두 진정하십시오! 이런 거짓말에 귀나 마음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킬마스터는 비에고를 흘겨보았다.

"돌이킬 수 없이 타락하고 말았구나, 얘야. 널 더 깊은 심연으로 보내야 하다니 고통스럽기 그지없다. 스텐토루스의 명예로운 아들들이여, 거행하라!"

교정관들이 일제히 발을 구르며 황동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를 세 번 울리더니 비에고를 가차 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망치가 계속해서 올라갔다가 떨어졌다. 멜로디는 그 소리에 움찔하며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비에고는 축 늘어진 몸으로 거리마다 끌려다니며 온갖 모욕과 쓰레기 세례를 받았다. 이 폭력적인 행진이 끝나자 도시 관문이 활짝 열렸다. 비에고는 그 너머에 있는 먼지 더미 속으로 내던져졌다.

멜로디는 킬마스터가 지나가며 자신의 어깨를 부드럽게 만지는 것을 느꼈다. "가 보려무나, 얘야. 이건 너처럼 독실한 신자가 볼만한 광경이 아니야."

하지만 멜로디는 움직일 수 없었다. 공포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뭔가 다른 게 있었다. 관문 밖에서 무릎을 꿇은 채 덜덜 떨고 있는 비에고를 보고 있으니 새로운 감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의심이었다.

"다, 다가오는... 폭풍을... 막을 순 없어..." 비에고가 부르튼 입술 사이로 헐떡거렸다. "모든 거짓과... 기, 기념물은 쓸려 가고 말 거야! 당신들의... 오만함은... 잿더미 속에 가라앉겠지..."

관문이 서서히 닫히자 비에고는 반항하듯 똑바로 일어섰다.

"난 불협화음의 사도다! 내가 보여 주지! 모두에게 똑똑히 보여 주겠어!"

II: 참회자의 의심
멜로디의 삶에서 음악은 평온함의 샘이었고, 악절과 화음은 그 밖의 모든 근심을 지우는 오아시스였다. 하지만 사원 뜰 밖에서 그 사건이 일어난 후 여러 날이 지났는데도, 멜로디는 아무리 애써도 비에고의 말을 잊을 수 없었다. 멜로디는 프레이타르를 치며, 마음과 손가락을 뺀 전부를 흘려보내고자 했다.

그래도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멜로디의 손가락이 미끄러지자, 연주하던 선율이 뒤틀리고 공기에 불협화음이 응어리졌다. 멜로디는 베일 안에서 작게 욕을 내뱉으며 연주를 멈췄다. 그때, 금실이 부드럽게 땅을 스치는 소리가 다가왔다.

"연주에 괴로움이 묻어나는구나, 현 연주자야."

멜로디는 고개를 들어 축성자 킬마스터를 보았다. 킬마스터는 염려스러운 눈빛으로 멜로디를 내려다보았다. "그날의 사건이 아직도 널 괴롭히느냐?"

멜로디는 킬마스터의 눈길을 피했다. "고백하건대 그렇습니다."

이해한다는 듯 킬마스터의 입술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단은 해악만을 가져온단다. 특히 이단자들 자신에게." 킬마스터가 멜로디 옆에 앉으며 말했다. "우리는 그자들을 가엾게 여기고, 언제나 힘이 닿는 대로 도와야 해. 하지만 그들의 망상은 귀 기울일 가치가 없으며, 마음에 담아둘 가치는 더더욱 없단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였다면 좋겠어요." 멜로디는 자신의 솔직함에 충격받을 뻔했다. "그자의 말이 제 가슴에 새긴 두려움이 지금까지도 절 옥죄고 있습니다."

축성자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나와 함께 걷자꾸나."


멜로디는 킬마스터를 따라 내부 성소에서 나와 나선형 계단을 올랐다. 두 사람은 수많은 층을 지나, 사원에서 가장 높은 탑에서 밖으로 나왔다.

멜로디의 숨이 목에서 턱 막혔다. 이렇게 높은 곳에 올라 도시 전체를 한눈에 담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더 작은 사원들과 비명당이 풍경을 점점이 수놓았다. 그들이 하늘 위 신들께 바치는 곡과 노래가 어찌나 열성적인지, 도시 너머 황야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서쪽 황야에는 펜타킬이 영광스럽게 승천했던 곳에 세워진 웅장한 무대, 잿구덩이가 있었다.

손을 뻗어 머리 위 거석들을 만질 수 있을 듯, 성스러운 템포로노미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을 듯했다. 그런데도, 비에고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멜로디는 자신이 저 구조물을 이전과 같은 경외심을 품고 바라보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보아라, 얘야. 우리가 함께 짓고 이룩한 모든 것을 보아라. 말해 보아라, 이것들이 하루 만에 만들어졌느냐?" 멜로디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축성자가 말했다.

멜로디는 얼굴을 찌푸렸다. "물론 아닙니다, 성스러운 분이시여."

"그렇다면 한 해 만에 만들어졌느냐? 아니면 한 사람의 일생 만에?" 축성자가 재차 물었다.

멜로디는 고개를 저었다.

"미흡하나마 신들께 힘껏 음악과 노래를 바쳤던 최초의 무리들, 원시적인 최초의 모임들을 생각해 보아라. 그들은 두렵지 않았겠느냐?"

"분명히 두려웠을 것입니다." 멜로디가 수긍했다.

"참으로 그랬겠지. 하지만 그들은 진실한 믿음에 의지했기 때문에 그 두려움을 견딜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두려움을 정복했고, 불쾌한 주인께서는 그 승리를 보시고 우리가 당신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셨지. 그 후 우리가 이룬 것은 전부 그분들의 끝없는 은혜 덕이었다." 다시 한번 킬마스터가 도시의 장엄한 풍경을 가로질러 팔을 휘둘렀다. "보아라! 우리가 어떠한 경이를 이룩했는지!"

멜로디가 미소 지었다. "눈이 아프도록 아름답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편히 해라. 우리 길은 올바르며, 강철만큼 튼튼하니. 그에 비하면 거짓말쟁이, 멍청이 비에고의 말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자의 말은 간사했고 너무나 진실하게 들렸습니다. 의심을 품어서 부끄럽습니다."

"우리는 결코 의심해서는 안 된다. 의심은 오직 파멸에 이르는 길이니. 그놈의 이름을 저주한다. 우리는 비에고를 때리고 내쫓았으나, 그조차 놈에게는 과분한 친절이었다. 더한 벌을 주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구나."

멜로디가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픽으로 이루어진 베일이 짤랑댔다. "지혜로운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성스러운 분이시여."

"따라오너라." 킬마스터가 도로 사원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향해 손짓했다. "네 연주를 들었다, 내 아이야. 카코포니께서 네게 영감을 풍족히 내려 주셨더구나. 너는 연주에 능할 뿐 아니라 마음도 의지도 강건하단다. 내 미약한 말에 기대지 않아도 세상의 시련에 맞설 수 있을 것이야."

"그래도 여전히 감사드립니다."

두 사람은 흡족한 침묵 속에 계단을 걸어 내려와, 멜로디의 작고 단출한 방에 다다랐다. 멜로디는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성서에 사라진 장이 있다니, 다른 신이 있다니—”

"그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두어라!" 이전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이, 킬마스터가 호통쳤다. 멜로디는 털썩 무릎을 꿇고, 프레이타르를 움켜쥐어 몸을 지탱했다. 충격으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침묵이 성소를 채웠다. 베일을 쓴 신자들, 수련자들, 신봉자들이 서로 속닥대고 눈길을 주고받았다. 의도치 않게 축성자의 힐책을 엿들은 그들의 눈길이 사방에서 비수처럼 멜로디를 찔렀다.

"주인 외에 다른 신은 없다." 킬마스터가 우뚝 서서 멜로디를 내려다보았다. "네 의심이 우리를 혼란케 하고 우리 믿음의 신성한 운율을 깨트리는구나. 현 연주자의 지위에 설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냐? 기도로 자비를 구해라, 멜로디. 네 생각 없는 말이 용서받길 기도해라."

멜로디는 자신의 경솔함을 저주하며 고개를 숙였다. "카코포니의 이름으로."

"열두 번의 독주로 죄를 참회할지어다." 킬마스터가 늘씬한 수정 유리병을 건네자 멜로디가 병을 받아 들었다. "곡을 올리면서 불쾌한 주인의 위대함을 묵상하여라."


연주하는 멜로디의 손가락이 현 위를 흐릿하게 오갔다. 머지않아 진동하는 금속 현이 손가락을 찔러 댔지만, 그래도 안도감이 밀려왔다. 멜로디는 한 시간 안에 첫 독주를 끝냈다.

네 번째 독주의 중간을 지나서, 마침내 멜로디 손가락의 굳은살이 벌어졌다.

피가 현을 적시고, 프레이타르 아래쪽 끝 프렛이 박힌 지판까지 흘러내렸다. 멜로디는 핏빛 방울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부 유리병에 담았다. 열두 번째 독주가 끝나자, 멜로디는 떨리는 손을 꽉 쥐어서 유리병을 마저 채웠다.

멜로디는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비에고가 매를 맞고 흙투성이로 처참히 쓰러져 있던 모습을 마음에서 지울 수 없었다.

한때 의심이 남아있던 곳에 분노가 차올랐다.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분노였다.

"참회를 마쳤느냐?" 찾아온 멜로디를 보고 축성자가 물었다. "참회하니 온전한 정신이 돌아왔느냐, 현 연주자?"

"그랬길 기원합니다." 멜로디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그자의 말은 거짓이었습니다. 만일 사실이었다면, 어째서 이곳에 있는 자들이 그 말을 부정하겠습니까?"

"이 이야기는 끝난 줄 알았건만.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냐?" 킬마스터가 으르렁댔다.

멜로디가 움찔했다. "아닙니다, 축성자시여. 단지—”

"참회로도 마음을 비우지 못한 모양이구나! 네가 제정신을 차릴 때까지 이 사원에서 쫓아내야 하겠느냐? 그래야 하겠구나. 아, 아이야. 너는 우리 가운데서 아주 높은 곳까지 올라갈 운명을 타고난 듯 보였다. 너는 성스러운 지혜의 샘이 되리라고, 다른 이들에게 믿음의 교리를 가르칠 자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킬마스터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지금 네 모습을 보아라. 나는 내 실망을 감내할 테니 너는 수치를 감내해라."

멜로디는 고개를 돌려 사원을 빙 둘러보았지만, 그녀를 정죄하는 냉담한 얼굴밖에 찾지 못했다. 심지어 그녀의 곤경에 소리 죽여 웃는 이들마저 있었다. 멜로디는 그들 중에도 그녀처럼 의심과 의문을 품은 자들이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멜로디에게서 등을 돌렸고, 그들의 부인은 마치 물리력을 가진 듯 멜로디를 사원의 빛으로부터 밀어냈다.

이토록 외로운 적은 처음이었다.

"당장 떠나, 네 믿음이 생겼을 때 돌아와라. 그때, 네가 우리 가운데서 어떤 자리라도 맡을 자격이 있는지 판단할 테니."


멜로디는 아무 목적지 없이 거리를 걸었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릿해서, 기묘한 악기들을 달고 서투른 솜씨로 세 신 모두를 기쁘게 하려 애쓰는 길거리 악사와 부딪혔다. 남자가 바닥에 나동그라지며 값싼 심벌즈가 쩽그렁했고 현악기가 항의하듯 비명을 질렀다.

멜로디는 얼굴을 가리던 베일을 잡아 뜯어, 손에서 흐르는 피가 옻칠을 더럽히는 모습을 내려다보다, 베일을 하수구에 내던졌다.

멜로디는 화가 났다. 자신에게 화났고, 축성자에게 화났고... 무엇보다 비에고의 거짓말이 전혀 거짓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화났다.


III: 불협화음의 폭풍
멜로디는 부드럽고 일정한 리듬으로 사원 계단을 쓸며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의 열기를 무시하려고 애썼다. 일정하게 흔들리는 빗자루의 움직임과 거친 빗자루 끝으로 돌을 쓰는 것에 집중하며 이런 초라한 일에서도 다시 음악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몇 주 동안 도시를 돌아다녔지만 의심이나 마음속에서 새롭게 치밀어 오른 분노를 떨쳐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주변의 모든 것이 모래로 변한 것처럼 느껴질 때면 멜로디는 자신에게 평온을 가져다주는 것에 매달렸다.

바로 음악이었다.

멜로디는 매일 다른 탁발 수도사, 예비 사제들과 함께 관문 앞에 서서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교정관들의 면갑을 올려다보았다. 황동 갑옷에 오후의 빛이 반사되어 번쩍거렸다. 마침내 다시 한번 출입을 허락받았을 때, 멜로디는 자비를 구했다. 다시 받아 줄 가치가 있는지 증명해야 한다며 사원에서 요구하는 정화 의식도 모두 견뎌야 했다.

하지만 사원 안으로 돌아온 멜로디는 어딘가 숨겨져 있다고 확신하게 된 무언가를 찾아다니며 남몰래 은밀히 움직였다. 멜로디가 찾는 것은 바로 성서의 사라진 장. 금지된 신이었다.

멜로디는 반드시 답을 찾아낼 셈이었다.

일은 멜로디가 바라던 대로 흘러갔다. 멜로디를 추궁하며 호되게 혼내던 축성자 킬마스터는 마침내 화를 누그러뜨리고 멜로디를 다시 사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것은 가까운 이에게 베푸는 호의가 아닌 거지에게 보이는 온정과도 같았다. 한때 멜로디의 미래는 유망했다. 언젠가 펜타킬의 신성한 악기를 다루는 축복받은 종, 길을 걷는 자로 선택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그 미래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한때 이곳에서 화려한 모습으로 손가락을 움직이며 불쾌한 주인의 신성한 음악을 연주했던 멜로디는 이제 수수한 예복을 입고 그림자 속에서 이리저리 사원을 청소하며 다른 사람의 프레이타르 현을 갈아 끼웠다.

멜로디는 보이지 않는 존재였지만, 익숙한 성소 내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받았다. 사실 마음속에 품은 진정한 목표를 달성하려면 차라리 이러한 편이 나았다.

이마에 난 땀을 닦으려고 잠시 멈춘 멜로디는 한숨을 쉬었다. 뜨거운 날씨에 지친 상태였지만, 곧 노을이 지기 시작하면 조용한 밤을 틈타 성서의 사라진 장을 찾을 기회가 올 터였다. 어쩌면—

멜로디가 우뚝 멈춰 섰다. 의식에 걸리는 무언가가 귓가에 도달하며 혈관을 선뜩하게 했다. 멜로디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소리가 아니라 소리의 부재였다.

고요했다. 완전한 침묵이었다.

멜로디는 이런 적막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신과 연결되는 노래를 느끼지 못하도록 잔인한 운명의 장난이 자신의 귀를 먹게 한 것일까? 멀리 있는 거대한 템포로노미콘의 신성한 박자에 맞춰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사원 정문으로 달려간 멜로디의 눈이 커졌다.

템포로노미콘이 멈춰 있었다.

무엇이 템포로노미콘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쓰던 멜로디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멜로디 위만이 아니었다.

'모든 것' 위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악의에 차 꿈틀거리는 어둠이 태양들을 집어삼키며 세상에는 불쾌한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짙은 멍 같은 색상을 지닌 마법의 기운이 관통하더니, 하늘을 가르며 고동치는 시뻘건 번갯불이 아래로 내려오며 땅까지 뿌리를 내뻗었다.

그와 함께 소리... 아니, 끔찍한 적막이 템포로노미콘의 한결같은 박자를 파멸의 울음소리로 바꿔 놓았다.

도시 위에 매달려 있는 거대한 형체들이 기울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자리를 견고히 지키게 해 주었던 신성한 리듬이 사라지자 그중 두 개가 무너졌다. 느릿하게 추락하며 박살 나는 모습이 마치 유성이라도 떨어진 것 같았다. 그 충격에 엄청난 충격파가 온 거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먼지와 거친 잔해가 뒤섞인 격렬한 돌풍이 검은 기운을 지닌 폭풍과 만나 사방을 할퀴고 공격하자 소음이 한층 커졌다.

움찔한 멜로디는 기둥을 꽉 잡고 버티며 거리에서 다가오는 공포를 피해 달아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운이 좋은 사람은 피할 곳을 찾았지만, 그런 사람은 많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이 폭풍에 휘말렸다. 그리고 그 말로를 본 멜로디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포식자처럼 솟아올라 사냥감을 휩쌌다. 사람들의 팔다리를 뱀처럼 휘감으며 입속으로 돌진하자 도저히 사람이 내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게도 그것은 일종의 노래였다. 끔찍하게 울부짖는 불협화음으로 완성된 노래였다. 꺽꺽거리는 사람들의 얼굴이 축 무너져 내렸다. 울부짖는 입술 사이로는 미끈한 나뭇가지 같은 것들이 빠져나와 위로 향하고 있었다.

도시 곳곳에 새로 들어선 이 끔찍한 숲은 웅장한 파괴의 장송곡을 키워나가며 불협화음으로 몸을 떨었다. 그 소리는 새로운 목소리가 더해질 때마다 점점 더 커지고, 커지고, 커졌다.

목이 나가서 더는 비명이 나오지 않았다. 뜰에서 대기하며 서 있는 교정관들 위로 넘실거리는 폭풍이 보였다. 교정관들은 움찔거리며 허우적거렸다. 황동 갑옷이 녹은 밀랍처럼 흘러내리자 대열이 흐트러졌다. 손에 쥔 강철나무 망치에는 불이 붙었다. 부글부글 끓는 악취와 액체 금속이 점점 더 그 영역을 넓혀 가자 교정관들이 비틀거리며 땅으로 쓰러졌다.

형체가 사라진 교정관들에게서 나온 연기와 증기가 나선형을 그리며 공기에 뒤섞이자 헛구역질을 한 멜로디는 시선을 들어 대로를 바라보았다. 언뜻 먼지와 어둠 사이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정복자처럼 당당히 도시 관문을 걸어 들어오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비에고?" 멜로디가 속삭이듯 내뱉었다. 확실하진 않았다.

비에고가 맞다면, 누더기를 걸친 미치광이 같았던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저 남자는 초월적인 존재였다. 그의 몸에 대중의 분노 때문에 생긴 상처 따위는 없었다.

결국 비에고의 말이 맞았던 것일까? 이것은 '불협화음을 내는 자'의 축복일까? 거짓과 무지를 향한 비에고의 분노일까? 멜로디는 알아야 했다.

"사원으로!" 첫걸음을 내딛는 멜로디의 뒤에서 킬마스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절박한 시민들이 안전한 곳을 찾아 멜로디를 밀치며 미친 듯이 지나갔다.

하지만 멜로디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군요." 눈 앞에 펼쳐지는 파괴의 광경에 여전히 얼어붙은 멜로디가 외쳤다. 그들이 일군 위대한 도시가 모두 폐허로 변했다. 멜로디는 축성자를 돌아봤다. "펜타킬은 어디 있죠?"

"이쪽으로 와라, 얘야! 이제 이 이단이 얼마나 사악한지 알겠지! 위험하니 어서 몸을 피해야 한다!"

"이건 신만이 내릴 수 있는 힘이에요." 멜로디가 도시를 뒤덮은 광기를 가리키며 답했다. "그리고 이건 불쾌한 주인이 한 게 아니죠. 정말 다른 신이 있는 거군요?"

축성자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펜타킬은 올 거야. 와서 신실한 추종자들을 지켜 줄 거다."

"대체 어디 있는데요...?" 멜로디가 가시 돋친 목소리로 말했다. 위를 올려다보자 카서스의 황금상이 올려진 사원의 종탑이 무너지고 있었다. "펜타킬은 오지 않아요. 아시잖아요."

축성자가 멜로디에게 다가갔다. "멜로디 자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늙고 쇠약해 보였다.

"우린 모두 거짓된 삶을 살았어요." 멜로디가 등을 돌렸다. "전 거짓된 삶을 살았죠. 사람들이 하찮은 두려움이나 외면 때문에 답을 숨긴 줄 알았어요. 하지만 이제 알겠네요."

멜로디가 폭풍을 가리켰다.

"답은 저기 있어요."

멜로디는 밀려드는 인파를 거스르며 계단을 내려갔다. 비에고가 저기 어딘가에서 자신이 하겠다고 맹세했던 것을 그대로 실현하고 있었다. 누구도 감히 자신의 신, 불협화음을 내는 자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도록 폭력과 재앙을 통해 세상을 눈뜨게 하고 있었다.

도시가 유린당하는 가운데 멜로디의 귀에 어떤 단어, 이름이 들리는 듯했다. 주변이 워낙 혼란스러워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무우우타아아리스으으..."

멜로디는 공포를 이겨 내고 붉게 아가리를 벌린 폭풍을 향해 나아갔다. 진실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든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로써 자신의 존재가 사라진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멜로디는 무지한 삶을 살아왔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어둡고 구불구불한 새로운 길이 나타나자 놀랍게도 설레는 감정이 차오르며 모든 의심과 분노가 씻겨 내려갔다.

어쩌면 비에고가 그 길을 알려 줄지도 몰랐다.

7. 변함없는 마음(코믹스)

8. 패잔병

판테온(리그 오브 레전드)/배경 참고.

[1] 비에고 출시 전에는, 왕이 정신을 차리고 자신과 왕비를 함께 영면에 취하게 해주기 위해 시전을 명령한 죽음의 마법이 오염된 생명의 물을 통해 증폭되어 대몰락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