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부영화(夫永華) |
자 / 호 | 화종(華鍾) / 설파(雪波) |
본관 | 제주 부씨[2] |
출생 | 1909년 8월 25일 |
전라남도 제주군 신좌면 함덕리 (現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3131번지) | |
사망 | 1936년 6월 29일[3] (향년 26세) |
전라남도 목포부 목포형무소 | |
묘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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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09년 8월 25일 전라남도 제주군 신좌면 함덕리(現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3131번지)에서 아버지 부만천(夫萬千, 1888. 7. 16 ~ 1945. 3. 8)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완희(金完熙, 1888. 7. 17 ~ 1965. 7. 9)[4] 사이의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931년 1월 일본 도쿄에서 유학하던 친구 적광(赤光) 한영섭(韓永燮)이 도쿄에서 급사하자, 그의 유해를 고향 함덕리로 운구해와 김일준(金日準)·고종건(高宗虔)·김두생(金斗生)·김재동(金才童)[5]·양공근(梁共根)[6]·김치홍(金致弘)·한희룡(韓熙龍) 등 7명의 청년들과 함께 장례를 치러준 뒤 그를 애도하는 기념비를 길가에 세웠다. 그러나 장례식 당일에 사상이 불온한 행동이 있었고 만사(輓詞:망자를 애도하는 글)와 묘비문에 독립사상을 드러내는 문구가 있다는 이유로 3월 29일부터 이틀간에 걸쳐 제주도경찰서 조천경찰관주재소 소속 경찰들에 검속되어 3월 30일 오후 제주경찰서에 송치되었고, 이어 책 몇 권과 한영섭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 몰수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출옥 후 1933년 2월 김일준과 함께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향동회(鄕同會)와 민풍진흥회(民風振興會)를 조직했고, 그해 3월에는 농민조합을 조직해 겉으로는 농민운동을 가장해 독립운동을 함께 할 동지 포섭에 주력했다. 1934년 3월에는 김원근(金元根)의 집에서 독서회를 조직해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글과 한국사를 교육하던 중 1934년 8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잔혹한 고문을 받다가 1936년 6월 8일 예심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법원 지청의 공판에 회부되었고, 미결수로 복역을 이어가다가 1936년 6월 29일 목포형무소에서 옥사, 순국했다.[7]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3. 여담
- 장남 부익재(夫益宰, 1934. 11. 16 ~ 2011. 9. 18)[8]는 1970년 7월 1일부터 1974년 9월 10일까지 제15대 함덕리 이장(간선)을 역임했고, 이후 광복회 제주도지부장으로 재임하던 중 2005년 6월 24일 치러진 '2005년 모범국가유공자 정부포상식'에서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훈받았다.
[1] 형사사건부에는 夫[2] 열공계(悅公系) 19세.[3] 음력 5월 11일.[4] 김평민(金平玟)의 딸이다.[5] 1931년 4월 9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김수동(金手童)으로 오기되어 있다.[6] 1931년 4월 9일 동아일보 기사 참조. 1931년 4월 12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梁公根으로 적혀 있다.[7] 사후 1937년 4월 12일 1심이 개정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징역 1년 6개월형(미결 구류 통산 545일)이 선고된 기록이 형사사건부에 남아 있다.[8] 족보명 부덕수(夫德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