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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27 07:32:08

봉금령


1. 개요2. 상세

1. 개요

봉금령(封禁令)[1](淸) 왕조가 명나라를 정복한 후 청나라의 발흥지인 만주를 보호하기 위하여 한인(漢人)들의 만주 이주를 금지한 법령과 정책이다. 만주족의 풍속(風俗)과 본거지를 지키기 위해 시행되었다. 그럼에도 한족의 만주 지역으로의 이주는 계속되었는데 이를 틈관동이라고 한다.

2. 상세

청나라는 명나라를 정복한 직후, 한인들이 대거 만주로 흘러들어 옴으로 인하여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여진족 고유의 풍습이 사라질까 두려워하였다. 또한 만주 지역은 청의 팔기병(八旗兵)을 먹여 살리는 경제적 기반이었다. 이에 청은 만주 고유의 풍습과 기인(旗人)의 경제적 기반을 보호하기 위하여 한인의 만주 유입을 금지시켰다.

봉금 정책을 실시하기 위하여 청조는 만주에 긴 변장(邊牆)을 설치하였다. 만주족의 원래 거주 지역을 보호하는 장벽이었는데, 버드나무를 심어 지역을 나누었기 때문에 유조변(柳條邊)이라고 불렀다. 유조변으로 나누어진 세 지역은 대체로 지금의 동삼성(東三省)인 흑룡강성·길림성·요녕성과 일치하였다. 청은 이곳에 1644년부터 진수요동등처장군(鎭守遼東等處將軍) 등의 3개 특수 기관을 설치하고 행정상의 특수 지위를 부여한 다음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오랫동안 봉금 정책의 대상 지역이 된 만주는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 지역으로 바뀌어 갔다.

19세기 중엽부터 러시아가 남하 정책을 추진하면서 청의 변경 방어문제가 제기되었다. 또한 화북 지역에서 빈발하고 있던 토비(土匪)의 약탈, 각종 자연재해, 기근 등으로 인하여 살길을 찾아 만주로 몰래 들어오는 빈민들이 늘어갔다. 조선의 북부 지방에서도 기아와 재해에 허덕이던 가난한 농민들이 생존을 위해 봉금령을 어기고 만주 지역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이들을 ‘범월인’이라고 불렀다. 1860년대부터 범월인의 수효가 늘어나 훗날 조선과 청 사이의 중대한 외교 문제로 대두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하여 북방 거점의 필요성을 인식한 청조는, 만주로 몰래 들어가 땅을 개척하고 있던 사람들의 이주와 개간을 합법적으로 용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을 변경 방어를 위한 인적 자원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여 재정난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이 무렵에는 살길을 찾아 만주로 넘어가는 중국인들의 움직임이 이미 대세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이들의 만주 이주를 물리적으로 막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결국 청조에서는 국방·재정·민생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1870년대에 들어 이민실변(移民實邊)의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1881년에 봉금 정책을 공식적으로 폐지하였다. 이를 계기로 중국인의 만주 이주는 물론이고 조선인의 만주 이주도 본격화되었다.
[1] 봉하고 금지하는 '출입 금지령'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