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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운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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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자격 요건3. 직무4. 참고 문헌

1. 개요

운검(雲劍)을 차고 임금의 좌우에 서서 호위하는 2품 이상의 임시 벼슬을 말한다. 나라에 큰 잔치나 연회 또는 이동이 있을 경우 유능한 무장(武將) 중에서 믿을 만한 사람을 골라서 임명하였다. 정식 명칭은 별운검(別雲劍)이나 운검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운검(雲劍)이란 직책의 유래는 용(임금)이 나타날때 함께 있는 구름(雲)을 뜻 한다. 실제로 별운검(別雲劍)들이 착용하는 운검(雲劍)에는 칼집과 칼자루에 구름 모양의 장식으로 꾸며져 있으며, 구름무늬는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용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자격 요건

조선시대 별운검은 현직 또는 퇴직한 무신들 가운데 명망이 높고, 공적이 뛰어난 고위 장군들을 위주로 선발했다. 그렇다고 무반 가운데서만 선발하지 않았다. 세조실록 6년 1월 16일 기사를 통하여 문반 출신인 한명회도 별운검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정조실록 20년 12월 12일 기사에 따르면 정조대에는 그간 별운검을 뽑는 기준이 문란해져 왕의 시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 임명에 자격 제한을 두어 육조의 장관이나 정부의 서반(西班) 및 참판 가운데 일찍이 아전(亞銓)을 지냈던 사람을 뽑아서 추천하도록 하였다.

3. 직무

세종실록 14년 10월 29일 기사에 따르면, '별운검은 입직(入直)과 시위(侍衛)할 때에 왕의 좌우에 서서 국왕의 보검을 상징하는 운검을 항상 착용하는 것을 정해진 법식으로 삼았다.' 라고 적혀있다.

태종이 낙천정에 행차 하였을 때, 2명의 운검과 73명의 호위군사가 왕을 호위했다고 기록되어있다.[1] 이와 같이 왕이 행차할때 운검과 수십명의 호위군사들이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별운검이 사용하는 칼은, 칼집은 물고기 가죽으로 감싸고, 칠은 주홍색을 사용하고, 장식은 백은(白銀)을 사용하며, 붉은 술[紅絛穗兒]을 드리우고, 띠는 말위라는 가죽을 사용하였다.[2]
파일:ungum2.jpg 파일:ungum.jpg
운검 운검을 들고 서 있는 별운검

현재 전해지는 운검은 1자루 뿐이며, 별운검은 2자루가 남아 있다.

그림을 살펴보면 별운검들 중에 사람 키만한 긴 칼을 든 운검 또한 있음을 알 수 있으나, 아쉽게도 남아 있는 유물 중에서 그러한 운검은 발견되지 못하였다.

별운검에 관하여 가장 유명한 일화는 사육신의 배경이 된 병자사화(癸酉, 丙子士禍)이다. 1456년(세조2)에 사육신인 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年) 등이 주동이 되어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成勝)과 유응부(兪應孚)를 별운검으로 선정해 명나라 사신 윤봉(尹鳳)을 영접하는 창덕궁(昌德宮)의 연회장(宴會場)에서 세조를 살해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세조의 모사인 한명회(韓明澮)가 이를 눈치채고 세조에게 아뢰어 연회 당일에 운검을 폐지시킴으로써 결국 이 거사가 실패하고,뒤따라 동모자(同謀者)의 한 사람인 김질(金礩)의 고변으로 사육신이 모두 고문당하고 처형된 사건이 있었다.[3]

4. 참고 문헌


[1] 조선왕조실록[2] 세종실록 오례 군례 서례 병기 창·장검·검[3] 세조실록 2년 6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