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북한의 정치인, 농업 테크노크라트.2. 생애
1930년 12월 7일, 평안남도 안주군 입석면 용북리에서 어부의 딸로 태어났다. 9살에 부잣집 보모를 하다가 광복 후에 성인중학교를 졸업, 6.25 전쟁 이후 평안남도 당간부학교 및 농업성 중앙간부학교를 졸업했다.1955년 문덕군 발중농업협동조합 관리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옥수수 농사와 농촌 기계화에 큰 공을 세웠으며 특히 문덕식 랭상 모기르기 방법을 창안해서 전국에 퍼뜨렸다 카더라. 이후 문덕군 룡담협동농장위원장을 거쳐 룡오협동농장관리위원장이 되었다. 1963년 3월, 인민경제대학을 졸업하면서 농업 관료로 일하였다. 1968년 4월, 문정숙의 후임으로 청산협동농장 관리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일을 잘하였는지 1971년, 로력영웅 칭호를 받았고 1972년에 김일성훈장도 받았다.
농업혁신자로 선정되어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1974년 11월,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 1975년 2중 로력영웅이 되었다. 1976년 3월, 청산협동농장 관리위원장에서 해임되어 개성시 인민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법안심의위원 및 대의원자격심사위원에 선출되었다. 조선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중앙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고 하는데 변창복 본인의 회고에 다르면 중앙인민위원회 경제위원회 부위원장이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당중앙위원회 부장까지 승진했다고 한다. 농업부장을 맡았던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1982년 4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대의원자격심사위원에 재선되었으며 1984년 1월, 김이훈이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사무장으로 이동하면서 후임 농근맹 중앙위원장에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1984년 11월, 김만금 장의위원, 1985년 2월, 량광일 장의위원을 지냈다. 평안북도 농촌경리위원장을 거쳐 1985년 8월, 남포시 농촌경리위원장에 임명되었고 이때 농근맹 중앙위원장 자리를 박수동에게 물려준 것으로 보인다. 1986년 12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대의원자격심사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이후 문응조에게 남포시 농촌경리위원장 자리를 물려준 이후 중앙인민위원회 참사로 일하였고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김정일 장의위원을 지냈다. 묘비 직함을 보면 1998년 이후 잠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장으로 일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북한 언론에서 동정이 거의 보도되지 않았고 이미 2003년이면 과거의 농업혁신자로 언급되면서 잊혀진 인물로 간주되었고 이미 죽었거나 비정치적 인물만 수록되는 조선대백과사전에 수록될 정도였다.
말년인 2012년 2월, 김정일훈장의 1차 수훈자로 선정되었다. 2018년 5월 28일에 사망, 애국렬사릉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장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조선중앙통신은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어엿한 녀성혁명가로 성장한 2중로력영웅 변창복동지는 당의 농업정책을 충직하게 받들어 보답의 한길만을 변함없이 걸어왔다."이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3. 참고문헌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
- 조선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