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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5 02:28:00

벤저민 그레이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enjaminGraham.jpg

1. 개요2. 이력
2.1. 어린 시절2.2. 학창시절2.3. 직장2.4. 투자2.5. 극작가 경력2.6. 저작물2.7. 말년
3. 록펠러와의 인연4. 워렌 버핏과의 인연5. 가족 관계
5.1. 부모5.2. 결혼5.3. 자녀

1. 개요

Benjamin Graham
1894년 5월 9일 ~ 1976년 9월 21일

증권분석의 창시자이자 아버지로 불리며 가치투자 이론을 만든 인물이다. 저서로 <현명한 투자자>, <증권분석>이 있다. 제자로 월터 슐로스워렌 버핏이 있는데, 버핏은 그의 저서 <현명한 투자자>를 읽고 격찬하여 저자에게 찾아갈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이 항목은 본인의 회고록을 기초로 작성되었다. 때문에 회고록의 특성상 다소의 자기미화가 담긴 부분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읽을 때 적절한 필터링을 요한다.

2. 이력

2.1. 어린 시절

1894년 영국 런던에서 사업가 아버지 아이작 그로스바움과 어머니 도라 사이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 사업의 확장을 위해 미국으로 이민했다. 영국에 남은 가족들의 사업은 쇠퇴했으나, 그레이엄의 아버지의 사업 수완은 뛰어나서 사업은 번창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췌장암으로 일찍 사망해 집안이 심한 위기를 맞았으나, 어머니 도라의 강한 생활력으로 위기를 헤쳐나갔다. 그러나 그레이엄 본인은 어머니의 허영심이 강했다고 평가한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이, 아래에 서술된 첫 아내는 원래 그레이엄의 친형과 호감을 나누던 사이였는데, 그레이엄이 반하여 가까워졌다는 점이다.

2.2. 학창시절

학창시절 월반을 할 정도로 수재로 인정받았으며 승부욕이 강했다. 테니스도 유달리 잘했다. 또한 언어에 흥미가 있어 각종 언어를 독학하였다. 뉴욕 대학에서 공부하였으나 본인은 만족하지 못한 듯, 자퇴하고 1년을 전화조립 회사에서 일한다. 그레이엄 본인은 이 시기에도 두각을 나타냈다고 회고한다.이후 콜롬비아 대학 총장의 부름을 받고 장학금을 받고 대학을 다시 다닌다.

2.3. 직장

세일즈로 첫 직장을 시작했으나 이내 별다른 재능이 없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가난으로 인해 이미 온갖 일은 다해본다. 그는 회고록에서 직장에서 무능한 직원이 부모를 잘 만나 승승장구하고 성실하고 유능한 이가 망하는 걸 보고 세상 일은 알 수 없다고 회고하였다. 그러다 직장에서 큰 돈을 받게 되는데, 이를 기반으로 나중엔 지금의 사모펀드와 같은 회사를 운영하게 된다. 록펠러 그룹의 스텐다드 오일 회사를 건드려 결국 그 회사의 자본을 모두 투자자들에게 배분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2.4. 투자

처음엔 친한 교수의 자금을 맡아서 모두 날리고 자살까지 생각했다. 그는 오르기 쉬운 우선주엔 매수, 떨어지기 쉬운 보통주엔 공매도를 걸었는데(동시에 한 종목에 이런 두가지 방식을 적용하는 기법을 써서 안전장치를 마련한 듯 하다), 이러한 방식을 현재 제도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그 당시는 법도 허술하여 돈을 벌 틈이 많았는데, 벤저민 그레이엄에게 그 틈들은 바닥에 널린 금화나 마찬가지일 정도였다. 워렌 버핏 뿐만 아니라[1] 벤저민 그레이엄도 시대의 흐름은 어쩔 수 없어서 대공황 때에는 위에 서술한 바와 같이 많은 돈을 잃었고 루즈벨트 대통령 시절부터의 경제부양 때부터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뭔가 록펠러와 성공과 쇠락의 타이밍이 반비례하는 것 같다.

그레이엄은 1925년에 그레이엄-뉴먼 투자회사를 설립후 30여년간 연평균 17% 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그레이엄은 "청산가치" 를 중요시 했는데, 이는 낮은 부채비율, PBR 과 높은 ROA 로 표현될 수 있다. 그레이엄의 투자철학을 계량화 한 투자 전략도 존재한다. 그레이엄의 저평가 종목 투자전략

2.5. 극작가 경력

문학은 거의 자기 돈을 내고 했다. 극작가로 헐리우드에 야심찬 도전을 했으나 망신만 당한다. 인생 마지막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문학에 두려 한 것 같으나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별세하기 몇 년 전쯤 모든 일가 친척이 모인 자리에서 장대하게 자신이 창작한 시를 낭독하기도 하였다.

2.6. 저작물

워렌 버핏이 극찬한 <현명한 투자자 (The Intelligent Investor)>와 세계적으로 유명한 <증권 분석 (Security Analysis)>이 있다. <현명한 투자자>에는 주로 기술적 내용보다는 투자 가치관 등이 담겨 있으며, <증권 분석>에는 보다 세분화 되었지만, 채권 선택 방식 등 역시 전반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현명한 투자자>에서는 자신이 하는 사업을 제대로 파악할 것, 대리인을 감독할 수 없거나 대리인이 유능하나 믿을만하지 않다면 맡기지 말 것, 확실한 기댓값이 숫자로 계산되지 않으면 사업을 시작하지도 말 것, 내 생각이 옳다면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실행할 것, 이 네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증권 분석>에서 또한 채권 구입 요령은 얼마나 좋은지가 아니라 얼마나 결함이 없는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모든 가르침의 궤가 되는 내용은 신중하라는 것이다.

2.7. 말년

저서로 <현명한 투자자>와 <증권 분석>을 출간했다. 상품준비 통화 계획을 창안했고 이를 미국 정책에 반영하려 노력했다. 바루크 형제 중 유명했던 형 바루크가 매우 경멸했으나 동생인 허만 바루크와는 관계를 유지해 그를 통해 루즈벨트에게 정책 반영을 꾀했으나 실패했다. 그레이엄은 유대인이었으나, 기존의 유대인 집단주의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3. 록펠러와의 인연

그레이엄이 본격적으로 성공 궤도를 달리게 된 계기는 록펠러의 스탠다드 오일의 자회사의 잉여 자본을 모든 투자자에게 공평하게 배분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 과정이 가히 전쟁에 가까웠는데, 결국 록펠러는 그레이엄의 행동을 용인해주었다. 혈기왕성했던 그레이엄과 그의 동료들은 록펠러가 우연히 같은 음식점에서 마주쳤을 때 갑자기 의견을 말하고 허락을 구할까 충동적인 생각도 했다고 한다. 결국 대기업의 오너급인 록펠러의 명령에 못이겨 스탠다드 오일 자회사의 경영진들은 이를 갈며 자본을 배분토록 하는 서명을 한다. 이 뿐만이 아니라 경제협회에서 그레이엄 혼자 다른 회원들의 집단적인 의견을 반발하며 발표를 한 일이 있었는데 록펠러가 유일하게 그 의견에 찬성을 했고 그레이엄은 회고록에서 이런 록펠러와의 인연들을 소중히 여긴다는 글을 남긴다.

4. 워렌 버핏과의 인연

그레이엄의 말년 즈음 워렌 버핏은 그레이엄의 콜롬비아 대학 강의를 듣는 학생 중 한 명이었다. 그레이엄이 버핏을 총애했다기보다는 버핏이 애제자를 자청하고 나선 격에 가깝고[2], 그레이엄은 성격상 제자를 기르는 것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늙어서도 연인과 러브 레터를 보내고 개인적인 사색과 집필을 즐기는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인간이었다. 조금 더 서술하자면 그레이엄은 '안전 마진'이라는 개념을 내세워서 수익조차도 너무 많이 내면 안 된다고 한 반면, 버핏은 밑도 끝도 없이 끝까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버핏이 그레이엄을 가치 투자의 원조격으로 내세웠지만 그레이엄은 '가치 투자'란 말을 강조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또 버핏 본인도 부자가 된 계기는 그러한 장기 투자 방식이 아니라는 부분에서 '장기 투자'를 강조하는 것이 본인의 회사에 장기 투자하라는 것인지, 정말 자신의 투자관을 설명한 것인지 진정성에서 의심스럽다[3]. 버핏이 그레이엄의 회사에 소속되어 있을 당시 '과대평가 되었다'라고 평가했다[4]. 그레이엄은 문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사람이고 유대인답게 조용한 사람이다. 그레이엄이 처음에 자기 회사에 들어오겠다는 버핏을 거부한 걸 볼 수 있듯이, 버핏의 경제 활동, 즉 자선 사업가처럼 행세하며 절약을 주장하고 어떤 제스쳐를 취하기 좋아하는 버핏의 성향 자체를 외향적으로 판단하고 자신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5. 가족 관계

5.1. 부모

원래 가족 사업을 하는 집안이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 온 후, 영국에 남겨진 원래의 친척들은 약간 가세가 기울었다. 조부는 그런 상황 속에서 강도를 당했고, 그에 대한 심리적 충격으로 얼마가지 않아 사망했다고 자신의 회고록에 서술한다. 아버지는 유능한 사업가였으나 벤저민이 어렸을 때에 일찍이 사망한다. 위로는 두 명의 형이 있는데 벤저민의 청년기에 형들의 레코드 가게 창업을 도와준 적도 있으나 형들의 사업수완이 별로 좋지 않아 망했고, 그 후로도 벤저민 외에 가족 내에 별다른 경제적 능력을 갖춘 사람은 없는 듯 하다. 그런 부모의 경제난과 궁핍한 형편 때문에 눈치를 보며 친척집에 얹혀 사는가 하면 농장에 일을 하러 가기도 하고 성격에 맞지 않는 외판원 일을 하면서 좌절을 겪는 등 산전수전을 겪으면서도 자신을 보호해줄 존재가 없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성인이 되고 부자가 된 이후에도 소비 습관과 인생관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5.2. 결혼

여자 관계는 별 실속이 없었다. 버핏에 의하면 생긴 것도 볼품 없는데 첫 결혼은 기가 굉장히 센 여자와 결혼 했다가 이혼하고 그 뒤로도 두번의 이혼을 했다. 어머니의 냉소적이고 괴팍한 성격이 영향을 미첬을 것이다.

5.3. 자녀

자녀로 아이작 뉴턴, 마저리, 일레인, 뉴턴, 벤저민 주니어를 두었다. 첫째였고 자신을 빼닮은 아이 같지 않은 영특함을 보인 아이가 급사한 후 둘째를 낳아 같은 이름을 붙였으나 그 아이도 한국전 참전 후 자살한다. 셋째 아들은 의학박사가 된다. 두 딸은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맺고 즐겁도록 여러 재능을 보이며 성장했다. 딸의 교육에 관해서는 보수적인 편이었다. 한번은 딸이 음란 서적을 읽는다는 것을 알고 격분하여 그 책을 내던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말년에 이르러서는 그런 강박 관념을 허물고 딸이 읽던 음란 서적을 읽으며 자신의 사고관을 고치는 재미에 대해서도 회고록에 서술하였다.


[1] 워렌 버핏이 투자를 할 당시에도 미국 기업의 주가는 오랜 기간에 걸쳐 순조롭게 상승했다. 벤저민 그레이엄이 겪은 대공황 등을 워렌 버핏은 세대가 다르기 때문에 겪지 않았다.[2] 그러나 버핏은 그레이엄의 투자과목에서 유일하게 A+를 받은 학생이었다. 또한 그레이엄은 1956년 은퇴를 위해 자신의 투자회사 Graham-Newman Corporation을 청산하였는데, 그 전에 버핏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려 하였다. 다만 버핏은 고향 오마하에서의 생활이 그리워 제안을 거절했다.[3] 버핏은 단 한 종목의 주식을 1968년부터 현재까지 보유함으로써 수십 조에 달하는 재산의 99%을 일궈냈다. 바로 버크셔 해서웨이이다.[4] 잘못된 서술로 보인다. 그레이엄은 1956년 은퇴를 위해 자신의 투자운용회사인 Graham-Newman Corporation을 청산하였는데, 이때 그레이엄에게 투자하고 있던 Homer Dodge가 대체투자처의 추천을 부탁하자 갓 독립한 버핏을 추천하였다 (Homer는 즉시 오마하로 내려가 버핏에게 10만불을 투자하였고, 1983년 그가 죽었을 때 그 투자수익은 수천만 불로 불어나 있었다). 또한, 그레이엄은 1970년에 버핏에게 현명한 투자자의 개정작업을 의뢰하였다 (버핏은 개선이 필요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위와 같은 사실을 미루어 볼 때, 그레이엄은 버핏을 상당히 높게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버핏이 그레이엄 밑에서 일하고 있을 때는 대학을 졸업한 지 몇년 지나지 않은 애송이였을 뿐, 외부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을 만한 건덕지가 없었다. 버핏을 처음으로 대중에게 알린 Supermoney (George Goodman著)가 1972년 발간되었을 때까지도 버핏은 오마하 인근에만 알려진 지역사업가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