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 지역에 사는 특정 부족은, 근처 사막의 모래를 가공하여 찬란한 수정을 만들어 내는 신통방통한 재주를 개발했다. 이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수정 조각들은 도시에 거대한 부를 가져다주었고 문명은 화려하게 번창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늘에 거하는 천족의 시선도 잡아끌었다.
아다지오는 동료 천족들과는 달랐다. 인류의 어리석음에 깊이 실망한 그는 미천한 존재들이 몇 죽는다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인정한 위대한 문화유산이 파괴되는 것은 가슴 아파 했으며, 반짝이는 수정 도시는 그런 유산에 포함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다지오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도시의 폐허를 날아다니며 일렁이는 어둠녘의 기운을 바라보았다. 매캐한 연기과 역겨운 야수들의 악취가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이것도 모두 인과의 고리. 인류의 오만함이 어둠녘을 날뛰게 했고, 이곳의 사람들은 당연한 대가를 치른 것이다.
아다지오는 빛바랜 수정 언덕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한때 반짝이는 언덕을 보고 일찍이 고대인들은 '신기루 언덕'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
이드리스는 염소 가죽 천막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무기를 단단히 거머쥐고 발길을 옮기는 그의 눈에 놀라운 광경이 잡혔다. 이젠 그 어떤 생물도 자라날 수 없다는 신기루 언덕의 토양에서, 녹색 떡잎 하나가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게 아닌가. 자그마한 잎사귀는 이드리스가 지켜보는 와중에도 놀라울 속도로 자라나, 아담한 묘목이 되었다. 하지만 경탄의 순간도 잠시, 이드리스는 고개를 흔들며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미 어둠녘이 창궐한 세상이다. 겨우 식물 하나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피난민들의 거주지로부터 약 반 시간 거리에 한때 아름다웠던 그들의 고향이 있다. 황금빛으로 빛났던 거대 도시의 성문은 이제 매캐한 연기와 가시투성이 덤불로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바로 그 순간, 뜬금없이 자라난 식물보다 이드리스를 더 놀라게 한 풍경이 펼쳐졌다. 멀리 건너편 수정 언덕의 꼭대기에 파란 날개의 정령이 서 있었다.
이드리스 두 눈을 깜빡이며 환상이 아닐까 의심했다. 신기루 언덕은 그 이름만큼이나 사막에서 사람들을 홀렸고 때로는 목숨을 앗아가곤 했으니까.
거주지의 천막들 사이로는 아침 모닥불 연기와 갓 구운 빵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목초지로 염소를 치러가는 소년을 지나, 이드리스는 장로의 움막에 도착했다. 서로의 콧등을 대며 전통 방식의 인사를 나눈 둘은 곧 본론으로 들어갔다. 장로는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우울한 소식을 전했다. 사막의 모래 폭풍이 더욱 심해지고 있으며, 도시 쪽에서는 어둠녘이 시시각각 몰려오고 있다는 정보였다. 이젠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전사의 빠른 걸음걸이로 삼십분 거리인 거주지와 파괴된 도시 사이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황폐한 땅이 있다. 이곳을 지나 피를 탐하는 어둠녘의 야수들이 종종 거주지까지 오곤 했는데, 이드리스는 이들은 격퇴하거나 다른 곳으로 유인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야수들은 점점 흉포해져 이드리스 평생 갈고 닦은 창과 차크람 기술을 모두 쏟아부어야 했다.
장로와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움막을 나선 이드리스의 눈은 다시 신기루 언덕을 향했다. 놀랍게도 파란 날개의 정령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이드리스는 정령이 있는 언덕으로 향하기로 마음먹었다. 과연 이 존재가 자신의 부족에게 도움이 될지 해가 될지 파악해야 했기에.
~
아다지오는 긴 세월을 살아오며 진심으로 놀란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마치 환상처럼 그의 앞에 나타난 사막의 전사를 보고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인사를 건네오 정령이여. 혹시 우리를 도우러 왔다면 따뜻한 모닥불과 든든한 아침 식사가 있는 곳으로 초청하겠소." 이드리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놀랍군. 사막의 전사들이 이제 마법도 쓸 줄 아는가." 아다지오는 겉으로 무심한 듯 말했으나 그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흥분이 담겨있었다.
"난 마법은 모르오. 짧은 거리를 단숨에 격하고 이동하는 술법은 사막 전사들 사이에서 전해오던 비전이오. 오직 끊임없는 수련을 한 자만이 사용할 수 있지." 이드리스가 설명했다.
"그게 수련 따위로 가능했다면 세상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거다." 아다지오가 정정했다.
"인류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오. 자신의 앞에 놓인, 가지 않은 길이 얼마나 험하더라도 두려움 없이 매진하면 이루지 못할 게 어디 있겠소." 이드리스가 주장했다.
"아니, 인류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있다. 두려움을 잊는 것은 종종 자만으로 이어지지. 그 결과가 지금 그대 부족이 겪은 재앙이다." 아다지오는 우아한 동작으로 파괴된 도시를 가리켰다.
"잔인한 말이구려. 하지만 사실이기도 하군. 어쨌든 우리의 보금자리는 산산조각이 났고 사람들은 이제 두려워하고 있소. 소문으로 듣기에 위대한 전설의 우물에서 나온 괴물들이 천족과 고대 용족을 멸망시켰다는 데 사실이오? 창공보다도 높고 대양보다도 넓은 능력을 가진 그대들도 우물의 힘을 제어하지 못하였소?"
"그 누구도 대자연을 영원히 억압하고 조정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인과의 순환 고리에 속해있으며, 기존 질서의 멸망에서 새 문명의 불씨가 피어오르지." 아다지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문학자들은 하늘 위의 천체들이 나란히 늘어섰기에, 우물의 불길한 기운이 더 강해졌다고 말하고 있소. 그들의 용어로 삭망이라 하더군. 하지만 워낙 오래된 이야기라 아무도 믿지 않았었는데... 그리고 지금부터 딱 일 년 전, 우물에서 어둠녘 야수들이 몰려나와 우리를 찬란한 유리의 도시에서 내몰았소. 매일 덧없는 희생을 뒤로하고 싸우고 또 싸우지만 후퇴를 거듭할 뿐이오. 여기 거주지의 피난민 대부분은 거친 유목 생활에 익숙하지 않소. 염소를 쳐본 적도, 우유를 짜본 적도, 더 심한 건 무기를 쥐어본 적도 없다오. 하지만 이들은 차라리 잘 된 거요.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도시에 남은 자들은 죽음보다 더한 운명에 빠져버렸소."
"당연한 결과다. 어둠녘은 필멸자들의 목숨을 취하지 않는다. 단지 침식할 뿐이지." 아다지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령, 아니 천족이여. 그대의 조언을 구하오." 이드리스가 간청했다.
"해일처럼 몰려드는 어둠녘의 힘 앞에, 지금으로선 그대 한목숨 보전하기도 힘들 것이다. 이제 일 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이곳은 모두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밀림과 사나운 야수들로 뒤덮일 테지. 사실 어둠녘이 문명을 통째로 갈아버린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대의 말을 듣고 있자니 내 동생들이 떠오르는군. 라나와 아이... 그들도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 어둠녘에 대항하려는 그들에게 난 한가지 임무를 주었지. 뛰어난 천족인 그대들의 지식을 모아 후세에 전할 수 있는 책을 쓰도록 말이야. 먼 미래, 폐허에서 다시 태어난 문명이 운 좋으면 그 책을 얻고, 조금은 대재앙에 대응할 수 있도록." 아다지오가 피식 웃었다.
"정말이오? 어둠녘을 물리칠 방법이 적힌 책이 있다는 게?" 이드리스가 흥분하여 외쳤다.
"그대들은 모르지만 과거 문명 중 일부는 그들 나름의 기술로 어둠녘에 대응하기도 했다." 아다지오가 공기 중에 희미하게 풍기는 어둠녘의 기운에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내 동생들, 라나와 아야는 실패했다. 태양과 달이 수없이 뜨고 지는 동안, 그들은 타락해 버렸지. 찬란한 지식의 상아탑은 그들에게 힘을 주었지만 동시에 크나큰 탐욕도 주었다. 그리고 그 책은... 영원히 사라져 버렸지."
"아니오. 내가 다시 찾아내겠소."
"훗. 뛰어난 사막의 전사여. 이것 하나만은 새겨두어라. 어둠녘은 파괴하지 않는다. 침식할 뿐... "이드리스의 착각인지, 아다지오의 표정에 한순간 따스함이 스쳐 지나갔다.
"천금 같은 조언, 정말 감사하오. 천족이여." 이드리스는 정중히 인사하더니 한 손에는 차크람를, 등에는 창을 맨 채 길을 나섰다.
"난 조언을 하지 않았..." 하지만 아다지오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드리스의 발밑 땅이 요동치더니 신기루가 피어올랐다. 눈 깜짝할 시간이 지나고 그가 있던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다지오는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억겁 년에 한 번. 필멸자 중에서도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거스를 수 있는 자가 나온다는 건가." 아다지오의 중얼거림이 모래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2편 '통찰의 저택'
[ 펼치기 · 접기 ]
부족의 구원을 위해, 이드리스는 어둠녘으로 뛰어드는데...
이드리스는 유리 도시의 중앙에 나타났다. 하지만 매캐한 어둠녘의 기운에 그는 곧 콜록콜록 기침하기 시작했다. 터번을 더욱 동여매어 얼굴과 호흡기를 보호해 보았지만, 어둠녘의 기운은 진정 대단했다. 작렬하는 사막의 땡볕을 막아주던 의복도 소용없었다. 이드리스는 얼마 가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날카로운 그의 감각은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했다. 어슬렁대는 발걸음 소리, 킁킁대며 냄새를 맡는 소리, 낮은 저주파로 으르렁대는 소리가 그의 신경을 거슬렸다. 이드리스는 어떻게든 안전하고 방어할 수 있는 장소로 나아가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사신의 낫이 그의 목덜미에 드리워졌다. 그래 이렇게 죽는 건가... 부족을 구원하지 못한 채...
그러나 이드리스가 자신의 죽음을 깨달았을 때 그에게 평온이 찾아왔다. 인간의 목숨도 심지어 어둠녘의 창궐도 거대한 생태계의 일부일 뿐. 차분해진 마음으로 이드리스는 깊게 심호흡했다. 치명적인 독성이 가득한 공기가 그의 폐를 가득 채웠다. 원래였으면 그의 허파 꽈리를 태우고 장기를 망가뜨렸어야 할 어둠녘은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명상에 들어간 이드리스의 뇌리에 천족의 말이 떠올랐다.
"어둠녘은 필멸자들의 목숨을 취하지 않는다. 단지 침식할 뿐..."
순간 기괴한 감각이 이드리스를 감쌌다. 그건 마치 물고기가 되어 깊은 물 속에서 아가미로 숨을 쉬는 느낌이었다. 모든 것이 편해지고 오감이 돌아오자 이드리스는 자신이 어디까지 왔는지 살펴보았다. 그의 눈에 일렁이는 어둠이 가득한 파괴된 광장이 들어왔다. 부서진 분수대에서는 시커먼 물이 졸졸 새어 나와 사방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놀랍게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책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일부 책은 이제 백골만 남은 시신들의 손에 꼭 쥐어져 있었다. 다시 분수대를 살피는 이드리스. 어둠녘으로 오염된 물이라고 생각한 그의 판단은 틀렸다. 그것은 물이 아니라 책을 쓸 때 사용하는 먹물이었다.
이드리스는 얼굴을 동여맸던 터번을 풀고 차크람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등에서 창을 꺼내 단단히 거머쥐고 전진했다. 그가 향하는 곳에는 형형색색의 유리로 장식된, 그러나 지금은 부서진 문이 있었다. 이드리스는 문 위의 표식에 눈길을 주었다.
선을 행하려는가 악을 벌하려는가 그대, 이곳에서 지식을 구하려는가.
이드리스는 마침내 통찰의 저택에 도착한 것이다. 아다지오의 동생, 라나와 아야가 책을 쓴 장소에.
저택 안의 공기는 바깥보다 더 탁해져, 숫제 매캐한 금속맛이 나기 시작했다. 핏빛과 초록빛을 띄는 기분 나쁜 무언가가 저택 안을 배회하고 있었고, 거친 가시덤불이 천장과 바닥에 가득했다. 덤불의 뾰족한 가시 사이로는 흉물스런 혓바닥이 날름대고 있었다. 이드리스의 접근을 알아챈 혓바닥은 뱀처럼 쉭쉭대며 다가왔으나 그가 창을 내밀자 금세 움츠러들었다. 갈고리 모양의 발톱을 한 거대한 곤충도, 등에 뿔이 달린 끔찍한 파충류도, 모두 이드리스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저택의 방을 하나씩 뒤져나가던 이드리스는 금세 이건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 마법이 걸려있는지, 겉보기엔 아담한 규모였던 저택의 안에는 수 많은 방이 존재했고, 방마다 각종 연구 도구와 끝을 알 수 없을 만한 분량의 책이 쌓여 있었다. 과연 이 엄청난 양의 장서 속에서 천족들이 쓴 책을 찾아낼 수 있을까...
점점 지쳐갈 때 즈음, 이드리스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들어간 한 방 안에서 이때까지와는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 벽면 가득 전시된 수상쩍은 기계와 발명 도구, 강철 톱니바퀴가 달린 물레방아, 부리를 딱딱 퉁기는 기계 공작새, 그리고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시간을 알리는 자명종들이 방문자의 정신을 사납게 했다. 이드리스는 천천히 걸으며 투구와 수리 중인 무기들이 놓여 있는 탁자에 다가섰다. 탁자 옆의 벽면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검게 그을린 자국도 보였다. 이드리스는 뭔가에 홀린 듯, 투구를 들어 올려 머리에 썼다. 그러자 홀로그램 눈가리개가 눈앞에 나타나더니 주변 시야를 밝혀주었다. 그리고 그의 귀에 들려오는 속삭임.
"이 자, 독연에도 죽지 않았어."
"이 자, 첫 번째 시험을 통과했어."
깜짝 놀란 이드리스가 뒤를 돌아보자 눈가리개에 맺힌 상도 지직거리며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드리스는 침착하게 정신을 집중하고 언제든 창과 차크람으로 적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지난 수년간, 이드리스는 어둠녘의 괴이와 싸우며 형용할 수 없는 야수와 기괴하게 변해버린 동식물을 보았다. 하지만 지금 방문을 통해 미끄러지듯 들어온 존재는, 그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한 무언가였다. 거대한 강철 뱀의 몸뚱이 위에는 두 여성의 이어진 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가락은 맹독이 뚝뚝 떨어지는 뱀의 독니를 닮아 있었고, 몸에는 온갖 시험관과 철사가 돋아있어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뱀의 형체와 두 여성의 몸뚱이를 이은 부분에서 사이하게 빛나는 눈알을 보며, 이드리스는 맹세코 이런 끔찍한 야생과 인간과 기술의 혼종은 본적이 없다고 되뇌었다. 그가 받은 충격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 기계 뱀은 거대한 몸체를 말아 꽈리를 틀더니 여성들의 몸으로 이뤄진 머리를 들어 올렸다. 이드리스가 끼고 있는 홀로그램에는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이 비쳤다.
3편 '라나와 아야'
[ 펼치기 · 접기 ]
이드리스의 앞에 전대미문의 어둠녘 야수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아다지오는 팔짱을 낀 채 발밑 가득한 안개를 응시했다. 짙은 안개 속에 파괴된 도시가 있었다. 창궐하는 어둠녘과 강력한 지진은 한때 사막의 보석이라던 문명을 통째로 쓸어버렸고, 사람들이 신기루 언덕이라 찬양했던 지고의 미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태곳적, 아다지오는 이곳에 위대한 힘의 우물이 건설되는 걸 직접 목격했다. 그는 차라리 그게 다행이라 여겼다. 탐욕 가득한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멀리 떨어진 오지에 우물이 만들어져서 안심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끝없는 욕심은 그들을 결국 열사의 불모지까지 이끌었고 사람들은 우물의 힘을 이용해 사막의 진주를 일궈냈다. 그 상황에서도 아다지오는 믿었다. 인간들이 절제와 관용으로 우물의 올바른 활용법을 찾아낼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틀렸다.
고문 중에 가장 잔인한 게 희망 고문이라 했던가. 그럼에도 아다지오는 안개를 바라보며 그가 인정한 사막의 전사가 귀환하길 기다렸다.
~
"오라버니가 우리의 업적을 뺏으려고 보낸 자다." 뱀 머리의 여자 중 하나가 말했다. 소름 끼치게도 그녀의 두 눈동자는 각각 따로 돌아갔는데, 하나는 이드리스를 노려봤고 다른 하나는 유리 진열대에 고이 모셔져 있는 책을 향했다.
"한때 천족의 기술자였던 라나와 아야여. 지금 우리 부족에겐 그대들이 만든 책이 꼭 필요하다. 그대들을 타락시킨 어둠녘을 극복할 비책이 담겨 있는 그 책이 말이다." 이드리스가 창을 다잡으며 말했다.
"뭐 타락?" 라나가 쿡쿡댔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 그것이 불러온 타락." 아야가 노래하듯 읊조렸다.
"그리고 우리가 타락했다면 그대도 마찬가지."
"이미 어둠녘이 그대의 신체를 침식하였음이니." 둘은 미끄러지듯 이드리스에게 다가왔다.
사실 뛰어난 전사인 이드리스는 한참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이질적인 기운을. 그의 뜨거운 심장이 뿜어내는 짙은 혼돈을. 무엇보다 눈가리개에 비친 모습이 확실한 증거였다. 한때 보석 같은 푸른빛으로 빛나던 그의 눈동자에는 사이한 기운이 가득했다. 죽음의 위기에서 어둠녘이 그를 침식하려 들 때 이드리스는 거부하지 않았다. 어둠녘이 부르는 진화의 노래에 그의 신체가 반응한 것이다.
악마의 속삭임을 떨쳐내려는 듯, 이드리스 고개를 크게 흔들고는 진열장으로 도약했다. 강철 뱀도 그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쉬식대며 이드리스와 책 사이를 지켰다. 날카로운 핏빛 손톱이 자라나고 맹독 송곳니가 드러났다. 라나와 아야의 공격을, 이드리스는 차크람을 날리며 피했다. 그가 순보로 뱀의 뒤에 착지하자 대체 무슨 장치가 되어 있는지, 차크람도 기괴한 궤적을 그리며 그를 따라왔다. 차크람은 그의 손아귀에 돌아오기 전에 강철 뱀의 옆구리를 길게 찢어놓았다.
철판을 긁는듯한 비명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이드리스 다시 한번 차크람을 뿌리더니 책이 있는 진열장으로 이동했다. 허공을 가른 차크람은 이번에는 라나의 팔을 잘랐다. 팔이 잘린 부위에서 기분 나쁜 녹색 피가 흘러나오자 강철 뱀은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했다. 그 사이 이드리스는 창대로 진열대를 부수고 책으로 손을 뻗었다. 자매는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 이번에는 뱀 꼬리를 통째로 사용해 공격해왔다. 아예 저택 한쪽 벽면을 박살내며 날아오는 일격을, 이드리스는 공중제비를 넘으며 간발의 차로 피했다. 동시에 아야의 밑으로 들어간 그의 머리 위에 그녀의 등이 보였다. 이드리스는 차크람을 던짐과 동시에 무방비 상태의 등짝에 창을 내질러 척추를 끊어놓더니, 꽂힌 창을 지렛대 삼아 라나의 얼굴에 쪽으로 날아올랐다. 이내 돌아오는 차크람이 그녀의 목을 뎅겅 잘라놓았다.
강철 뱀은 급작스러운 충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발광했다. 이드리스는 재빨리 책을 회수하고는, 부서진 벽을 통해 먹물이 흘러나오는 분수대 광장으로 후퇴했다.
그때, 원하는 것을 얻은 그의 몸이 일순 크게 휘청댔다. 이드리스의 귀에 말벌의 날개짓 같은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파괴된 도시 정중앙의 우물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진화와 침식을 갈구하는 어둠녘의 노래다.
'가지마... 이곳이 니가 있을 곳이야...'
이드리스는 정신을 가다듬고 천족의 위치를 마음속으로 가늠했다. 그가 그곳으로 의지를 투영하자 흔들리는 검은 연기 속에서 그의 인영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신기루처럼 아다지오의 앞에 나타난 남자는, 떠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드리스를 부축하는 아다지오의 감각에, 날뛰는 어둠녘의 기운이 잡혔다.
"어둠녘이 그대를 잠식했나."
"나는... 나다." 힘이 다한 이드리스가 눈을 감자, 그의 손에서 책이 떨어졌다.
아다지오는 크게 한숨 쉬었다. 필멸자들은 언제나 그를 귀찮게 했다. 아다지오가 손을 뻗자 천상의 불꽃이 피어올라 죽어가는 전사를 감쌌다.
"이걸로 그대는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조차도 어둠녘의 기운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 그대는 언제나 어둠녘의 유혹에 타락할 위험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정신을 차린 이드리스는 어둠녘의 기운이 일렁이는 눈으로 아다지오는 힐끗 보더니, 바닥에 떨어진 천족 기술자들의 책을 주웠다.
"하지만 난 책을 구했소. 어둠녘을 극복할 방법이 들어있는 이 보물을. 이게 있다면 우리 부족은 구원받을 수 있소."
"아아 그게 끝이 아니다 전사여." 아다지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일렀다.
"그대 부족은 용감하지만, 이 책에 있는 기계들은 단순히 용기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수많은 과학의 정수가 녹아있는 장치들을 대체 뭐로 만들 텐가. 염소 가죽과 모닥불 땔감으로? 이 책은 기계를 만들 재주가 있는 자들에게 전해져야 한다. 기술 진영에게 말이지."
"한시라도 빨리 내 민족을 이 끔찍한 운명에서 해방시킬 것이오." 이드리스가 고개를 흔들며 분연히 외쳤다.
"그 책을 다룰 줄 아는 자의 협조가 없다면 그대 민족은 살아남을 수 없다." 아다지오는 전사에게서 두 가지 상반된 힘을 느꼈다. 천족의 축복과 어둠녘의 저주를.
"그럼 난 그대를 따라가겠소. 기술 진영에게 인도해 주시오. 하지만 저 변함 없는 사막의 태양에 맹세컨데 난 반드시 돌아올 거요. 강인한 전사들과 위대한 기계장치를 가지고 말이지!" 이드리스가 주먹을 쥐며 외쳤다.
"순진한 건지 우직한 건지 알 수 없구나." 아다지오는 뜻 모를 말을 내뱉더니, 이드리스를 품에 안고 날개를 펼쳐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누구도 파괴된 건물 사이에 마법의 잔향이 짙게 풍기는 저 거대한 옛 도시를 재건하지 않으리라. 겁많은 아이들은 아직도 부서져 내리는 저 건물을 건드려 충격을 줄 엄두도 내지 못하리라. 케스트럴의 기억의 첫 장엔 충격으로 자리잡은 사건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예전엔 케스트럴이 아니었으나, 하지만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은 기밀에 붙여져 있었다.
케스트럴은 태어나기 전이었음에도 전쟁의 참상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저 멀고도 먼 ‘몽릴’에 계시는 ‘폭풍의 여왕’도 익히 알고 있었다. 현지 사람들이 ‘블랑코로조스’라고 부르는 ‘폭풍의 경비대’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케스트럴은 가족들이 쓰던 사투리와 릴 산 사람들이 쓰는 혀를 많이 굴려 목이 잠긴 듯한 소리로 말하는 언어까지 익혔다. 이동네 아이들은 학교에서 여왕의 깃발에 경례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아이들은 모두 여왕의 이름 하에 적성 시험을 치러야 했는데, 선생님과 학부모는 시험 전 몇 주에 걸쳐 수학, 언어, 지리를 아이들에게 철저히 가르쳤다. 시험에 통과하여 선택받은 아이들의 집안엔 세금이 경감되기 때문이었다.
6살이 되던 해, 케스트럴은 유추, 연산, 수수께끼 풀이, 똑같이 나열된 상자 배열 풀기에 걸친 일련의 시험을 치러 좋은 성적을 거뒀다. 케스트럴은 시험관이 입은 붉은색으로 장식된 말쑥한 하얀색 실험용 가운과 연필을 깎을 때 나는 냄새를 무척 좋아했다. 게다가 이 작은 아이는 숫자를 제대로 배열하는 문제를 풀어내는 걸 좋아했고,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억양으로 릴 사람들의 사투리를 구사했다.
마지막 시험이 되었다. 시험관은 검은색 상자와 흰색 상자 총 10개를 내밀었다. 케스트럴은 이 시험에서 달콤한 사탕이 검은 상자 밑에 있을지 흰 상자 밑에 있을지를 맞춰야 했다. 첫 번째 문제는 흰 상자 9개와 검은 상자 1개에서 사탕을 찾는 것이었다. 케스트럴은 흰 상자를 선택하여 그 안에 사탕을 당연하다는 듯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두 번째 문제는 검은 상자 7개와 흰 상자 3개에서 사탕을 찾는 것이었다. 케스트럴은 망설이지 않고 검은 상자를 집어 그 안에 사탕을 또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케스트럴은 불균형 색깔 상자 배열 문제를 몇 번 풀면서 얻은 사탕으로 볼이 빵빵해졌다. 그러다 세 번째 문제에서 자신만만했던 아이에게 잊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6개의 흰 상자와 4개의 검은 상자가 있었는데, 이 작은 아이가 선택한 흰 상자에 사탕이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케스트럴은 머리가 멍해졌다. 오물거리던 입을 멈추고 생각했다. ‘어? 내가 틀렸다고?’
시험관은 다시 상자를 배치했다. 이번엔 검은 상자 5개와 흰 상자 5개였다.
“자, 고르거라.” 시험관이 말했다.
“싫어요.”
“왜? 사탕 먹기 싫은 거니?”
“먹고 싶어요.”
“그럼 골라야지?”
“싫어요.”
“왜 싫은 거니?”
“사탕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시험을 치르려면 골라야 한단다.”
“싫어요.”
시험관은 쭈그리고 앉아 이 작은 소녀와 눈높이를 맞추고 차분하고 상냥하게 말했다. “틀려도 괜찮아. 네가 문제를 맞히면 사탕을 먹을 수 있잖니? 자, 골라보렴.”
“싫어요.”
“이걸 어쩌지? 여왕님께서는 네가 문제를 풀길 바라시는데.”
“싫어요.”
“음, 알았다.” 시험관은 일어나더니 소녀의 팔길이 정도의 나뭇가지를 가져와 케스트럴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네가 고르지 않으면, 이걸로 손바닥을 맞게 될 거다.”
케스트럴은 두 눈을 부릅뜨고 시험관 선생님이 나뭇가지로 자신의 손바닥을 때리는 장면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이곳, 옛 도시에서 어린 나이에 자신이 틀렸기에 겪어야 하는 이 마법과도 같은 충격의 아픔을 마음에 새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아픔이 따끔한 정도로 누그러지는지도 알 수 있었다. 체벌 따위는 그리 아프지 않았다.
아이는 울지도 않았고, 상자를 고르지도 않았다.
다음 날, 폭풍의 경비대원 두 명이 케스트럴의 집에 찾아왔다. 케스트럴은 새총과 새 총알로 무장하고 뒤뜰로 도망쳐 나와 호두나무에 올라가 숨었다. 아이는 저 경비대원 아저씨들이 자신이 마지막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는 걸 아버지에게 고자질하여 혼날 것을 대비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케스트럴의 부모는 아이를 나무에서 내려서는 꼭 안고 눈물을 흘리며 키스해 주며 말했다. “아가야, 아저씨들이 널 데리러 오셨어. 몽릴에 계시는 분들이 널 계속 가르치고 싶다시는구나. 엄마 아빠하고 있을 시간이 한 시간밖에 없단다.”
2편 '캐서린의 임무'
[ 펼치기 · 접기 ]
폭풍 여왕은 캐서린의 안락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망토와 두건 차림을 한 여왕의 어깨엔 까마귀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조명이 모두 꺼진 창문 없는 거실 구석에 앉아 있어 여왕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다. 별도의 통로를 이용하지 않는 캐서린과는 달리, 여왕은 단단하고 굳게 잠긴 정문을 우회하는 자신만의 통로를 만들어 놓았다. 여왕은 다리를 앞으로 꼬며 가까이에 있는 등잔에 불을 밝혔다. 어깨 위의 까마귀는 자세를 고쳤을 뿐,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그들이 근처에 있다 캐서린. 이 방은 안전하다고 봐도 되겠나?" "네, 그럴 겁니다. 이미 폐하께선 여기 계시잖습니까."
캐서린의 말에 여왕은 슬쩍 웃음을 날리며 말했다. "오늘 밤 폭풍경비대를 소집해야 할 거다."
캐서린은 자신의 방에 들어오면서부터 두 손에 쥐고 있던 검을 칼집에 넣으며 말했다. "목표가 누굽니까?"
“하나가 아니라 둘이지. 엄청난 마법 능력을 지닌 쌍둥이야. 그대도 내 동생이자 그들의 엄마인 줄리아를 알고 있겠지.”
“동생분은 5년 전에 죽지 않았나요?”
“줄리아가 그렇게 믿도록 꾸민 거지. 우리 쪽 첩보원이 남부 기디아에서 그녀를 찾았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거긴 지금 기술 진영이지 않습니까?”
"영혼이 없는 기계와 기술자들의 중심지지. 줄리아는 그들과 동맹을 맺고, 내 자리를 빼앗으려 하고 있다. 심지어 기술자 중 한 명과 결혼을 해서 쌍둥이까지 두었지. 정말 대단하지 않나?"
“쌍둥이 아기라고요?”
“그래. 아이들을 네게 데려오라. 내가 왕족으로 키울테니 말이야.”
“왜 배신자를 바로 목표로 삼지 않으시는 겁니까?”
여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희미한 빛이 그녀의 두건 속으로 스며들며 원래 눈이 있었던 자리의 꿰맨 자국을 비췄다. 그녀의 두 눈은 태어나자마자 폭풍마법사의 관례대로 자취를 감췄다. “왕실 인사를 제거하는 법이 따로 있습니다. 그게 얼마나 정당한가는 상관없겠지만 말입니다.” 여왕은 얼음같이 차가운 손등으로 캐서린의 뺨을 쓰다듬으며 자장가를 부르듯이 말을 받았다. “오, 캐서린. 이번 일에 대해 그런 방식으로 처리하고자 제안을 한다면, 그대를 처형할 수밖에 없어.”
여왕의 속삭임은 귓가에 악마가 유혹하는 소리와 같았다. 캐서린은 말할 수도 없는 중압감에 타는 갈증을 어찌할 줄 몰랐다. 그리곤 힘겹게 목소리를 짜내어 말을 이었다. “그러면 그냥 아이들만 데리고 오는 겁니까? 여왕님을 죽이려는 그들의 엄마는 그대로 두고요? 여왕님의 동생은 복수할 겁니다. 여왕님께서 명령하신 일은 기디안 사람들이 줄리아를 돕게 할 게 분명하고요.”
“그대의 말이 맞길 기대하지. 폭풍경비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지 않은가. 게다가 기디안 사람들은 기술자를 양성하며 스멀스멀 기세를 뻗쳐 오고 있어.”
“여왕이시여, 다시 전쟁을 벌이길 바라시는 겁니까?”
“오, 그럴리가, 캐서린. 전쟁을 바라는 게 아니라, 전쟁을 일으킬 거야.” 캐서린의 뺨을 어루만지던 여왕이 손을 거뒀다. “때가 되었어. 아직은 기술자들의 군대가 지리멸렬한 상태고, 기디아는 한 때는 빛났던 값싼 장식물들을 모아놓은 골동품 같은 곳이니까. 그들이 제대로 준비를 갖추려면 10년은 걸릴 거고, 걸음마를 시작한 우리 쌍둥이 천재들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일 뿐이야.”
“뜻대로 하소서, 여왕이시여.” 캐서린은 대답하며 까마귀의 눈을 응시했다.
“줄리아의 가족은 폼피움 북서부에 있는 농장에 거처를 꾸렸네. 여기 빈이 그대와 동행할 거야.” 여왕이 말을 마치자, 여왕의 눈이자 귀인 까마귀는 조용히 날갯짓을 하며 여왕의 어깨에서 캐서린의 어깨로 이동했다.
선술집 안쪽, 탁자 위를 비추는 한 줄기 촛불은 두꺼운 두건을 쓰고 홀로 앉은 여인의 정체를 드러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여인은 따뜻한 찻잔 안을 빙빙 도는 찻잎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릴 때 방랑자 무리와는 어울리지 말라는 주의를 셀 수 없이 받으며 자랐다. 주름 가득한 노파들이 기괴한 팔찌를 차고 어리숙한 고객들을 찻잎 점으로 현혹하는 그런 무리 말이다. 그렇게 점술에 발을 들여놓지 않도록 격리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줄리아는 실제로 점을 썩 잘 쳤다.
캐서린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손님들 모두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붉고 흰 제복은 온데간데없었지만, 그녀가 걸친 칙칙한 두건 달린 망토는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의 차가운 감각을 거둬내진 못했다. 그러한 묵직한 느낌은 탁자를 이리저리 피해 줄리아의 자리로 와 웃음을 건네는 캐서린의 모습에도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캐서린이 망토를 벗자, 이 지방의 복색에 딱 맞는 맵시 있는 원피스가 드러났다.
이윽고 주문을 받으러 어린 소년이 다가왔다. 좌중을 압도하는 그녀들의 모습에 소년의 목소리는 오뉴월의 갈대처럼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어... 어서 오세요... 뭘 좀 드리면... 뭘 도와 드릴..."
캐서린은 소년을 빤히 내려다보면서 소년이 떨리는 목소리로 할 말을 다 끝내길 기다려주었다. "포도주 부탁해." 입가에 미소를 띠며 그녀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는 뭘 드릴까요? 차를 더 내올까요? 어? 줄리아 님 아니..."
캐서린은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소년의 턱을 손가락으로 치켜 들어 억지로 자신에게 고개를 돌리게 하고는 소곤거렸다. "적포도주 부탁한다니까?"
줄리아는 시종이 어리둥절한 상태였던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건 몰랐다는 듯 캐서린의 원피스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캐시, 멋진 위장술인데? 그냥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니지그래. 숨는 건 취향에 맞지 않나 보지?"
캐서린은 상처받은 체하며 코웃음을 쳤다. "너무하는 거 아니야? 난 이 정도 변장이면 꽤 만족스러운데. 여기 달린 단추들 좀 봐!" 그녀는 두 팔을 벌려 단추를 드러내며 윙크를 날렸다.
줄리아는 거슬리는 소리로 웃으며 흐느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단추야말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 듯한걸."
주문한 포도주가 나올 때까지 두 여인은 침묵을 지켰다. 포도주 잔을 앞에 두고 캐서린이 몸을 숙이며 넌지시 말했다. "여왕이 쌍둥일 데려오래, 리아. 애초에 이 전쟁을 이겨놓고 시작하려는 속셈이지."
줄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기디아에서 날 도와줄 거야."
캐서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언젠가 때가 되면 말이야. 하지만 폭풍 경비대가 여기 왔어. 이번 여정 내내 여왕의 까마귀 '빈'이 나와 동행해서 네게 말을 전할 수 없었어. 녀석이 네 가족을 감시하는 동안 겨우 떼어놓고 온 거야." 캐서린은 줄리아의 떨리는 손을 부여잡았다. "경비대는 오늘 밤에 임무를 수행할 거고 네 아이들은 나와 함께 몽릴로 갈 거야."
줄리아는 캐서린의 손을 홱 뿌리치고는 거미줄이 깔린 선술집 구석으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안 돼."
캐서린은 자세를 바로 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여왕의 명령은 거역할 수 없어. 안타깝지만 넌 선택권이 없단 말이야. 리아, 아이들은 내가 잘 보살필게. 약속해."
"안 된다고!" 줄리아가 강한 어투로 말했다. "여왕, 아니 언니는 우리 셀레스트를 자신처럼 폭군으로 만들 거야. 네가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캐서린은 굳은살이 잔뜩 박힌 손바닥을 펴며 말했다. "그래서 뭘 어쩔 작정인데? 설령 내가 합세해도 너랑 아단은 폭풍 경비대를 물리칠 수 없잖아. 농장은 경비병들이 에워싸고 있고, 폼피움 외곽 길가란 길가엔 나머지 녀석들이 방벽을 세웠어. 줄리아, 우린 임무만 끝내면 사라지는 거야. 날 믿어야 해."
"폭풍 여왕과 너의 관계처럼 말이니?"
캐서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줄리아, 우린 어릴 때부터 친구였어."
"우리 셋 모두 어릴 때부터 단짝이었잖아." 두 친구 사이를 깊게 짓누르는 긴 침묵이 다시 찾아왔다. 한참 후에 줄리아가 탄식하더니 긴 침묵을 깨며 말했다. "폭풍 경비대가 가까이 왔으니 아단에게 조심하라고 전할게. 아이들은 언제나처럼 일상을 시작할 거야. 아무것도 이상해 보여선 안 돼. 그리고 네가 임무를 수행할 때, 아단이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칠 거야."
"뭘 들은 거니? 폭풍 경비대의 손아귀에서 도망칠 순 없다고!"
"방법이 있어. 죽음이 목줄을 죄는 순간에 마법사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해지는 법이니까. 네가 내 목숨을 취할 때, 그이에게 내 모든 마력을 전해주겠어. 아단이라면... 그라면 내 모든 것이 담긴 그 '선물'을 자기 걸로 취할 수 있을 테니까."
캐서린은 포도주잔을 꽉 쥐면서 차디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는 못해."
"캐시, 내 죽음을... 최대한 화려하게 해줘. 소란을 피워야 남편과 아이들이 도망갈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캐서린의 눈망울이 가득 고인 눈물로 반짝였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난 못해."
"그런 다음 도망쳐. 몽릴에서 너한테 더 볼 일은 없을 거야. 폭풍 경비대가 아단을 쫓을 테니 넌 기디아에 있는 친구들한테로 몸을 숨겨야 해."
그 순간 탁자에 캐서린의 손아귀에서 산산이 부서진 포도주잔 파편이 와르르 쏟아졌다. 선술집은 일순간에 조용해졌고, 모두가 고통을 감내하는 모습의 캐서린을 응시했다. 캐서린의 손아귀에서 떨어지는 피는 유리 파편과 뒤섞여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너나 네 언니나 내게 얼마나 감당하기 힘든 요구를 하는지 생각조차 못 하는구나." 캐서린은 눈을 질끈 감아 떨어지지 않는 눈물을 털어내며 간신히 말했다.
줄리아는 목구멍에 걸린 슬픔을 삼켜냈다. 줄리아는 아이들의 엄마로 살며 터득한 인내의 손놀림으로 피 흘리는 캐서린의 손을 잡았다. "네가 매사에 얼마나 올곧고 헌신적인지 잘 알아. 하지만 난 왕녀야, 알잖아?" 줄리아는 친구의 손에서 유리 조각을 뽑아내면서 단조로운 말투로 속삭였다. "내 아이들을 언니에게 데려가면, 언니는 내 딸을 괴물로 만들고 내 아들을 전장으로 내몰아 기디아를 자기 손아귀에 넣을 거야." 줄리아가 캐서린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모아 쥐자 핏방울과 포도주 방울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줄리아는 할시온으로부터 마력을 끌어와 치유 마법으로 캐서린의 상처를 감쌌다. 그 은은한 녹색 빛을 바라보며 줄리아는 힘들게 입을 땠다. "끝내야 할 일에 죄책감 따윈 갖지 마. 그리고... 그..." 줄리아는 더듬거리더니 이내 말을 멈췄다.
"고통스럽지 않을 거야." 캐서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줄리아의 어깨가 푹 꺼졌다. 그러더니 상처를 치유한 캐서린의 손을 놓아 주었다. 두 여인은 미끄러지듯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녀들 사이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쉬움과 슬픔이 자리 잡고 말았다.
캐서린은 억지로 미소를 띠며 손을 뻗어 줄리아의 뺨을 어루만졌다.
"안녕, 나의 리아." 캐서린이 마지막인 듯 조용히 말했다.
"안녕, 나의 캐시." 줄리아도 조용히 대답했다. 줄리아는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감정으로 목이 메어왔다.
캐서린은 자세를 곧추세워 단호한 눈빛으로 돌아와 줄리아의 뺨을 만지던 손을 거뒀다. 캐서린은 줄리아에게 인사하고 망토를 집어 들고 자신이 흘린 피를 즈려 밟으며 아직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자신을 응시하는 손님들을 지나쳤다. 그렇게 그녀는 선술집 문을 열고 자신을 기다리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4편 '그녀의 활시위'
[ 펼치기 · 접기 ]
"정말 그녀로군." 케스트럴은 아래 덤불에서 소곤거린 여검사에게 경멸의 눈초리를 날렸다. 폭풍 경비대원이라면 자리를 잡은 후에는 입도 뻥끗하지 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잘 알지 않는가. 그날도 여인네들은 치즈와 젖을 제공해 줄 염소를 낡은 수레에서 내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 지역 농가의 바쁜 일상은 계속되었지만, 오늘 줄리아는 유령이 되어야 했다.
아낙네가 목줄을 끌어당기자 염소는 어린아이 같은 소리를 내며 울었다.
케스트럴은 벌써 뒤얽힌 올리브 나뭇가지에서 몇 시간 째 경비대 대장인 캐서린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다리의 감각이 무뎌진 상태였지만, 그녀는 강철로 된 활시위를 정면에 겨누고 곁눈질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 사이로 할시온의 힘을 조정하면서 신중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오늘 밤은 할시온의 화살을 쏘지 않고 임무를 끝낼지도 모른다. 이 강철 활시위를 최대한 당기면 유리창쯤이야 박살 낼 수 있지 않던가. 멀리에 있는 폭풍 경비대도 이곳으로 넘어온 후로는 마법을 쓰지 않았다. 기디안의 기술자들은 태생적으로 마력을 혐오했다. 연기와 기계로 가득한 이 도시에서 굳이 마법을 사용해 쓸데없는 관심을 끌 필요는 없었으리라.
혀로 볼을 밀어 장난을 치면서 케스트럴은 망원경을 통해 여왕의 동생을 주시했다. 쌍둥이를 보살피느라 줄리아의 몸놀림은 전보다 부드러워졌고, 눈가에 잔주름이 늘었지만 그녀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줄리아가 안으로 들어간 후, 케스트럴은 발가락을 오므렸다 펴며 무뎌진 다리의 감각을 회복시켰다. 오른쪽 어깨를 돌려 나무에 걸터앉아 활시위에 화살을 걸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는 올빼미 소리를 내어 신호를 보냈지만 캐서린은 휘파람으로 대기하라는 신호로 응수했다.
해가 지자 염소는 더 크고 더 구슬프게 울어댔다. 주위 덤불과 나무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집 안에선 줄리아가 기디안 반란군에 속한 것치곤 평범하기 그지없는 남편과 말다툼을 해댔다. 쌍둥이들은 잠옷을 입은 채로 술래잡기를 하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남자아이는 땅을 울리는 고함을 질러댔다. 석양은 밝아졌다가 이내 그 빛을 감췄다. 마법의 아이인 케스트럴은 침묵 속에 골똘히 생각했다. 여왕께서는 쌍둥이들이 다치길 바라지 않을 것이다. 케스트럴은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어 이불을 덮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침실에서 멀리 떨어진 앞 창문의 왼쪽 가장자리를 겨냥했다. 그리고는 준비 완료 신호를 다시 보냈다. 캐서린은 대기하라는 휘파람 소리로 답했다.
밤이 깊어지자 몽릴에서 볼 수 없는 밝은 별빛이 머리 위를 찬란하게 밝혔다. 집 안에 있는 남자가 렌치로 조이는 시늉을 했다. 줄리아는 문을 쾅 닫았다. 염소의 비명은 케스트럴의 신경을 건드렸다. 필요하다면 밤새도록 위치를 사수할 그녀였지만, 기다리는 매 순간이 뭔가 잘못될 것만 같았다.
그 남자는 한쪽 팔에 건틀릿을 꼈다. 작전 개시를 재촉하는 분대장들의 신호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캐서린은 다시금 대기하라는 휘파람 소리를 보냈고 염소는 또다시 울어댔으며 뭔가 이상했다. 원래대로라면 한 시간 전에 공격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도대체 뭘 기다리는 거야?" 근처에서 대기하던 여검사가 투덜거렸다. 케스트럴은 단독 임무 수행에 익숙했다. 이렇게 많은 경비대원과의 공조 임무는 그녀에겐 짐이었다. 평정심을 유지해야 할 궁사에게 염소의 울음과 다른 이들의 투덜거림은 방해가 될 뿐이지 않은가. 그녀는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기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케스트럴은 그렇게 활을 날렸고, 염소는 울음을 멈췄다.
맛있는 간식을 앞에 두고 보채던 아이의 칭얼거림 같이 뒤엉켰던 신호가 잦아들었다. 덤불 숲에 누군가가 숨죽여 조소를 날렸다. 케스트럴은 활시위에 다시 활을 걸었다. 집 안에 남자가 반사적으로 동작을 멈추더니 이상하다는 듯 창문 밖을 살폈다. 그러더니 집 안을 가로질러 줄리아에게 내달렸다.
"쳇, 눈치챘군." 나무 아래 여검사가 나직이 말하더니 검을 앞으로 내밀고 튀어나왔다.
스르륵. 올리브 숲 전역에 검을 뽑아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딘가에서 퍼런 마법 도깨비불이 여기서 번쩍 저기서 번쩍거렸다. 퍼런 방패가 빛을 내며 활기를 찾았다.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 집 안에 남자는 갑옷을 입느라 몸부림쳤고, 그의 아내는 죔쇠를 조이며 남편의 무장을 도왔다. 작전 개시 시간이었다. 공격대 모두가 공격 개시를 알리는 캐서린의 휘파람 소리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리던 휘파람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케스트럴은 물러났다. 그리고는 활시위에 세 손가락을 걸고 관자놀이에 손마디를 얹고 어깨뼈가 척추에 닿도록 신중히 활시위를 당겼다. 극도로 팽팽하게 당겨진 그녀의 활시위 사이로 할시온의 힘이 요동쳤다. 그녀는 심호흡하고는...
활시위를 놓았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앞 창문이 깨지던 그때, 케스트럴은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다리를 관통하는 찌릿함은 따위는 무시하고, 몸을 숙여 귀신처럼 빠르게 그 집으로 접근했다.
한쪽 어깨에 활을 걸고 한 손으로 창틀을 잡은 케스트럴은 뒤를 흘깃 돌아보았다. 마법과 강철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사이로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경비대를 지휘하며 폭풍처럼 몰아쳐야 할 캐서린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고, 캐서린의 손에는 여왕의 감시자인 까마귀 '빈'의 주검이 들려 있었다.
5편 '그날 밤의 선택'
[ 펼치기 · 접기 ]
"아니, 여보. 염소 한 마리 사는데 당신 허락까지 받아야 해요?" 줄리아가 투정을 부렸다. "염소가 있으면 우유도 짤 수 있고 그걸로 치즈도 만들 수 있다구요." 이들은 저녁 내내 부부싸움을 할 판이었다. 아단은 허리를 굽힌 채 파워 아머에서 분리한 철판의 모서리를 사포로 문지르고 있었다. 집 밖 마당에선 이 부부싸움을 초래한 염소가 달빛 한 줌 없는 어둠을 향해 태평스레 울음소리를 냈다. "저놈의 염소 냄새와 울음소리는 정말 지독하단 말이오." 아단이 투덜거렸다. "한 시간이나 저러고 있는데 셀레스트와 복스가 어디 편하게 잠이나 자겠소?"
"그게 아니라 여보. 애들 교육에도 좋단 말이에요. 아이들은 교감할 수 있는 애완동물이 필요... 어맛 당신! 지금 내가 아끼는 의자에 쇳가루 흘린 거예요?"
"그렇다면 그 치즈란 놈은 누가 만들 거요? 고귀하신 분께서 치즈를 만들어 보신 적이나 있으신가?"
"흥, 나도 치즈 만들 수 있거든요!" 줄리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쿵쿵거리며 방을 나서더니 남편 보란 듯이 침실 문을 쾅하고 닫았다.
문 소리에 잠이 깬 셀레스트가 아장아장 걸어나오더니 졸린 눈을 비비며 말했다. "아빵? 엄망 왜 그래요?"
영리한 셀레스트는 엄마가 화났을 때 어떤 어조인지 벌써 알고 있었다. 아단은 미소를 지으며 한쪽 팔로 사랑스러운 딸을 안고는 뺨에 뽀뽀하며 말했다. "엄마가 지금 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더니 삐지셨나 보구나."
"망도 안 되는 소리가 먼데요?"
"엄마가 아빠한테 말도 안 하고 염소를 집으로 데려왔거든. 그래서 그렇단다."
"난 염소 쪼아." 셀레스트에 이어 복스도 깨어나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복스는 비몽사몽에 아단의 다리를 꼬옥 껴안았다. 아단은 아이들을 달래고는 침대에 다시 눕혔다.
"우리 복스, 염소 좋아하는구나. 하지만 우리 가족 중엔 염소를 돌볼 줄 아는 사람이 없는데 어떡하지?"
셀레스트가 반쯤 잠든 상태로 말했다. "아빠, 바께서 아가가 울어요."
"저건 그냥 염소란다, 우리 딸." 아단이 셀레스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때 잠결에 웅얼거리던 복스가 물끄러미 아빠를 쳐다보며 말했다. "염소가 무섭대. 혼자 이써서 그런가 봐."
"하하. 염소는 괜찮단다. 어휴, 녀석이 암컷이면 좋겠는데... 아니면 염소젖으로 치즈를 만들려는 네 엄마의 꿈은..."
그때 불현듯 등 뒤에 서늘함이 감돌았다. 아단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신경을 곤두세우고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염소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단의 몸속에서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둘 다 조용히 있어야 한다. 방문은 절대 열지 말고. 알았지?"
아이들을 단속하고 난 뒤 아단은 침실로 내달렸다. "여보, 줄리아." 그는 심각한 어조로 침실 문 앞에서 말을 이었다. "그들이 왔소."
줄리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침실 문을 열었다. "지, 지금요?"
"이미 포위된 것 같소."
아단의 갑옷은 수리 중인 상태로 거실에 널브러져 있었다. "다리 먼저." 아단이 급하게 강철 발가리개에 발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줄리아는 잠옷 바람으로 무릎을 꿇고는 남편의 무장을 도왔다. 파워 아머의 묵직함 때문에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이윽고 갑옷의 제어판에서 '윙'하는 소리가 나더니 기계음이 들려왔다. "시스템. 오프라인." 그 소리를 들은 아단은 주먹으로 제어판을 세게 쳤다. "제길... 고물단지 같으니라고!"
"쉿! 계속해봐요." 줄리아의 하얀 손은 기름때로 까맣게 변했고,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엔 검은 얼룩이 가득했다. 갑옷과 발전기의 연결 부위를 조심스레 살피며 그녀는 집 주변의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염소 울음소리도, 풀벌레 소리도, 바람 소리도 없는 적막이 흘렀다. "여보, 정말 그들이 여기... "
"시스템. 온라인."
갑옷이 작동하는 그 순간, 거실 창문이 와장창 깨졌다. 아단은 옆으로 몸을 틀어 날아온 강철 화살을 피했다. 그의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간 화살은 반대편 벽 깊숙이 꽂혔다. 아단은 욕지기를 내뱉고는 몸을 가눴다. 거실 나무 바닥이 아단의 갑옷 무게에 삐걱대며 비명 소리를 냈다. "놈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현관을 지키리다."
"무기도 챙겨야죠!"
"여기서 쓰면 집을 날려버릴 거요. 내 뒤에 바짝 붙으시오."
줄리아는 눈을 감고 주문을 외어 마법을 시전했다. 녹색 구체가 그녀의 손바닥 위에 떠올랐다. "난 당신을 지킬게요." 줄리아가 꿈결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줄리아의 마력이 몸속으로 스며들자 아단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력이 주는 그 기묘한 느낌은 기계만을 알고 살아온 그에겐 영 어색했다. “내 몸은 내가 지킬 수 있소, 걱정 마시오.” 그가 굳은 목소리로 아내에게 대답했다.
이윽고 적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궁수 하나가 창문 너머로 슬쩍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내 집 안으로 재빠르게 잠입했다. 장검을 꼬나쥔 검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은밀한 행동 사이로 얼핏 보이는 문장들... 그들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상황은 최악이다.
"뿌드득... 폭풍경비대!" 아단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하지만 줄리아는 무아지경 상태로 마력을 끌어올리느라 남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두껍디두꺼운 파워 아머. 공격력과 방어력은 뛰어나지만 이 녀석에겐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바로 그 무게. 아단은 그래도 경비대의 급습 직전에 고물 같은 갑옷이 작동하다니 다행이라 여겼다. 침입자들은 저마다 가진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아단의 힘, 그리고 줄리아의 마력을 흡수한 갑옷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날아오는 화살을 튕겨낸 아단은 그대로 궁수의 얼굴을 날려버렸다. 끈 떨어진 연처럼 날아가는 궁수의 얼굴엔 화상 자국이 아로새겨졌다.
이를 신호로 아단 부부와 폭풍경비대는 본격적인 전투를 개시했다. 아단은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날뛰었고, 쥴리아의 마법도 경비대원 상당수의 목숨을 앗아갔다. 한때 가족의 따스함이 가득하던 거실엔 침입자들의 피와 부스러진 무기 그리고 찢긴 육편이 날아다녔다. 숫자로는 중과부적이었지만 아단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는 침입자들과 소중한 가족 사이를 막는 단 하나이자 최후의 보루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폭진의 강타가 휘몰아쳤다.
모든 것이 고요해지고 한기가 감돌았다. 아단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충격파가 직격한 그의 속은 뒤집혔다. 비명을 지를 수도, 눈을 깜빡일 수도 없었다. 벽에 걸려 있던 그림과 장식이 사방으로 흩날렸고 아단의 갑옷은 미친듯한 경고성을 내뿜었다. 사방에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폭풍경비대원들이 가득했다. 아단의 부릅뜬 눈동자에 비치는 인영 하나. 박살 난 현관문으로 마치 자신의 집인 양 유유히 걸어들어오는 공포의 존재. 집안으로 발을 들인 그녀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는 그나마 성한 경비대원 두 명에게 셀레스트와 복스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단이 이들을 막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소용없었다.
순간 아단의 시간은 무채색으로, 천천히 흘렀다. 거실 한쪽에서는 명령을 받은 경비대원들이 공포로 시퍼렇게 질린 쌍둥이를 안고 캐서린에게 다가가고 있었고, 충격에 정신을 잃었던 다른 대원들도 하나둘씩 깨어나고 있었다.
다른 한켠에는 그의 아내 줄리아가 캐서린의 칼에 찔리기 직전이었다.
시간이... 없다!
찰나의 순간, 그는 잔인한 선택을 해야 했다. 사랑하는 아내의 목숨을 살릴 것인가? 아니면 소중한 아이들을 구할 것인가?
고민은 짧았고 그는 마지막 힘을 모아 총알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캐서린의 검이 처절하게 줄리아의 가슴을 가르는 그 순간, 그녀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단어는 바로 남편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 담겨있는 마력이 일순 믿을 수 없는 힘을 아단에게 주었다. 사랑하는 남편에게 그녀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 힘으로 아단은 순식간에 경비대원 둘을 제압하고 쌍둥이를 안아 들었다. 부서진 창문으로 탈출하는 그에게는 아내의 마지막을 지켜줄 시간도 없었다.
아단은, 화살에 목이 꿰뚫려 더 이상은 그의 신경을 거슬리는 울음소리를 낼 수 없는 염소를 지나쳐 어둠 속으로 내달렸다. 똑똑한 쌍둥이는 눈앞에서 목격한 충격적인 광경에도 일체의 소리를 내지 않았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엔 스산한 밤공기만이 맴돌았다.
6편 '내가 찾는 건...'
[ 펼치기 · 접기 ]
"어서 해 봐!" 살아남은 괴물이 덤불과 등나무가 반쯤 자란 포탑의 둥근 강철 입구에 고함을 질렀다. "내 몸에 구멍 하나 내보라고! 날 날려버리란 말이야!"
먹히면 좋을 텐데...
포탑에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그는 방금 전에 터진 폭발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누군가 또 장전 중이겠지... 누군가 암석 철옹성이었던 이 난장판을 지나 포탑 아래 관문에 미니언들을 불러들이고 있겠지... 그 너머에 누군가 그가 찾는 걸 가지고 있겠지.
거의 다 됐다...
크럴은 허벅지에서 전해지는 저릿한 마력의 통증을 달래며 왼쪽 다리를 절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이제 세상을 잃었다. 소환의 잔내가 암석을 뒤덮을 정도로 진동해 이가 갈릴 정도였다. 미니언들이 더 오는 것이리라. 더러운 잡종들, 그저 싸울 줄만 아는 것들. 크럴은 찌릿한 다리를 두드리며 통증을 가시게 하면서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이전 존재에게서 비롯된 습관이리라. 공기가 새어나와 차디 찬 강철이 옥죄인 가슴팍 파인 상처 사이로 흘러들어 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고통스러웠지만 크럴은 세차게 달렸다. 멍청한 데다가 거대한 미니언을 덥석 잡아 재빨리 짓눌러 버리고는 고통을 물리쳤다. 또 고통을 물리치고 물리치길 반복했다... 미니언의 뱃대지를 찢어놓는 기분 그 하나만 괜찮았다. 매 순간 두려움을 자극하는 처참함에서 비롯된 혼란스러운 기분이 그를 무너뜨렸다. 미니언들의 어두운 기운이 그의 손에서 미끈거리는 듯했다. 미니언들의 배때기는 거미줄같이 흩어지고, 다리는 파리 날개처럼 떨어져 나갔다. 크럴은 미니언들의 낯짝에 고함을 질렀다. 침이 사방에 튀었다. 그의 광기 어린 조소가 전장에 메아리쳤다. 미니언들의 영혼은 죽어 나자빠진 몸뚱어리에서 빠져나가 크럴의 영혼을 채웠다. 크럴의 유일한 욕구를 채워준 것이다.
그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피가 튀고 처절한 고통의 울부짖음이 사방에 퍼졌다. 크럴의 날카로운 손톱과 이빨에 한때 살아 숨쉬던 생물이 뜯겨 나갔다. 그 순간 크럴은 요새의 폐허 꼭대기에 서 있는 그녀를 보았다. 인간의 형상을 한, 키가 큰 그녀는 아침 햇살처럼 싱그러웠다. 암석 틈 사이에 검 한 자루를 묻어둔 그녀의 눈은 무표정했다. 그의 얼굴엔 어울리지 않는 화색이 돌았다.
"어이, 예쁜이!" 그가 그녀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암석 사이에 끼워 놓은 검 한 자루를 천천히 꺼내들었다. 검신에서 빛이 환하게 퍼져 나왔다.
"그거론 날 못 막을 텐데!" 크럴이 낮게 응수했다. "지금 도망치라고 내가 따라가 줄 테니... 그 검신 박살 내기 전에 말이야."
그녀는 검을 정면으로 겨누고 뛰어올라 크럴을 세차게 밀어붙였다. 마치 벌떼처럼 마력의 울림이 그녀를 감쌌다. 그녀는 고도의 훈련된 전사였다. 한때 크럴은 그녀를 존경했었지 않은가. 그녀는 몇 차례 검을 휘두르며 반쯤 죽은 그의 살덩이를 공격했다. 크럴은 악마의 숨소리를 거칠게 내쉬며 그녀를 공격했지만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그저 그녀의 공격을 열심히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검을 거꾸로 잡더니 검자루로 크럴을 세차게 내리쳤다. 이때다. 크럴은 고통에 고함을 지르며 거리를 좁히려 그녀에게 돌진했다. 크럴의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목덜미를 노렸고 그녀는 용맹의 외침을 내질렀지만 허사였다.
"예쁜 것 같으니." 크럴은 꿈틀대는 그녀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리곤 그는 쨍강 소리를 내고 돌덩이에 떨어진 그녀의 검을 멀리 차 버렸다. 검 맛은 충분히 보지 않았던가. 그는 그녀의 목덜미를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마지막 숨결은 날아가 크럴에게 세어 들어갔다. 크럴은 쓰러진 그녀의 몸뚱어리를 넘어 포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의 다 됐다...
포탑으로 가는 그를 막을 자는 없었다. 포탑에 화약과 마력을 채워줄 누군가도, 두툼한 목덜미를 가진 잡종들을 소환할 누군가도 없었다. 그의 오른쪽 발은 가는 길에 핏 발자국을 남겼고, 그의 왼쪽 다리에 붙은 미니언들의 찌끄레기는 관문을 통해 요새 넘어 우물까지 이어졌다.
생명을 잃은 그 우물까지...
한때 언젠가 이 우물은 수정의 힘을 채워주곤 했었다. 언젠가 영웅들이 이 우물을 지키곤 했었다. 언젠가 크럴도 한때 이곳에서 구원을 찾곤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우물은 비어 있었다. 그저 부서진 수정 조각만이 있을 뿐 우물은 비어 있었다. 지켜낼 가치가 있는 것이라곤 찾기가 힘들 정도로...
희망이 사라진 세계가 그에게 찾아왔다. 곤충들의 찌지직 소리가 음률처럼 들러왔다. 새들이 조잘댔다. 한기가 그의 근육에 스며들어 영겁의 상처 주위로 몰려와 그를 옥죄었다. 그를 숨쉬게 하는 그 무언가가 익숙하지 않은 한기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처절하게 몸부림쳤다. 그 느낌은 고통스럽고 혐오스러웠다.
크럴은 덤불로 성큼 걷기 전에 크게 고통으로 얼룩진 비명을 질렀다. 그곳에 다른 길이, 할시온 협곡으로 가는 길이, 이제 그가 가야 하는 길이 보였다.
한 소녀가 훈련장 중앙에서 나무 방패를 들고 자신의 스승과 마주 서 있었다. 태양이 서쪽 작은 언덕 뒤로 그 빛을 감출 때까지 계속 이어지는 고된 훈련이었지만, 소녀는 입을 굳게 다물고 계속 훈련을 이어나갔다. "마르셀 교수님이시잖아요..."
스승의 무딘 장검의 칼날은 소녀가 스승의 움직임을 눈치채기도 전에 소녀의 왼쪽 뺨에 선명한 빨간 상처를 남겼다.
"실제 전투에서는 교수 따윈 없다. 이름도 없지." 스승은 그녀 주위를 빙빙 돌았고, 소녀는 스승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함께 움직였다. 하지만 소녀의 눈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래도 스승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남편도 형제도 자매도 친구도 없다." 마르셀 교수는 다시 칼을 휘둘렀고 그의 칼날이 뻗어 나간 곳엔 새로 상처가 돋아났다.
"아.. 알겠어요, 교수님." 소녀는 상처를 느끼며 훌쩍거리며 대답했다. 스승이 방향을 바꾸자 발에 힘을 주려고 안간힘을 썼다.
"내가 누구지? "
"교수님은... " 스승과 제자 사이에 검이 휘둘러지고 소녀가 든 나무 방패에 쾅하고 부닥쳐 나무 파편이 사방에 튀었다. "... 검이에요."
"그럼 너는 누구지?"
다시 검이 휘둘러졌다. 스승의 손에 있는 날카로운 칼날이 소녀의 방패를 다시 강타했다. "저는 방패에요."
"다시!"
"저는 방...패에요." 스승의 공격은 더 빨라졌다. 원호를 그리며 부딪혔다. 소녀는 작은 팔로 방패를 들어 올리기가 힘들 정도였음에도 자비란 없었다. 소녀가 느리게 움직일 때면 그 여린 피부엔 쓸린 자국과 멍이 피어올랐다.
"다시!"
"저는 방패라고요!" 방패에 부딪히는 무딘 칼날이 소녀의 팔에 충격을 가했다. 소녀의 눈에는 땀이 흘러내렸고, 촉촉한 눈망울에 맺힌 눈물과 엉켜 뺨을 타고 흘러 목을 지나 옷깃을 적셨다.
"누구라고?"
" 방패입니다!" 소녀는 흐느끼며 나무 방패를 머리에 들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방패요! 저는..."''
"... 방패입니다!"
캐서린은 장군의 천막에서 간신히 쏟아지는 잠을 참아내며 정자세로 앉아 있었다. 찬 공기가 서늘한 밤이었음에도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캐서린 옆 남자의 가슴에 마법 화살이 튀어나오더니 어둠 속에 푸른 빛이 반짝였다.
"케스트럴 너구나." 캐서린은 나지막이 그 이름을 내뱉었다.
그녀가 일어나자 죽은 그녀의 연인이 죽어 넘어진 자리의 모피가 피로 얼룩져 갔다. 소리를 죽인 필요가 없었지만, 그녀는 소리도 없이 옷을 걸쳤다. 그들이 살려두고자 했기에 캐서린은 목숨을 부지한 것이었다.
야영지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에겐 그러한 선택권이 없었다. 어둠 속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는 밖으로 몸을 뺐다. 소복이 쌓인 눈을 밟음에도 그녀는 발소리를 내지 않았다. 소형 보병 천막들은 마법 화살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한기가 죽음의 핏빛 냄새를 감추고 시간을 멈췄다. 마치 태양이 다시는 뜨지도 않을 듯, 죽은 자들이 절대 썩지 않을 듯, 따뜻한 봄이 혹한의 전쟁을 끝내지 않을 듯이 보였다. 그녀의 코와 손가락은 감각이 없고 분홍빛이 되어갔다. 마치 그녀가 자신의 최종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할 듯했다.
야영지 중앙에 친숙한 군복을 갖춘 서른 명의 낯선 여성들이 불 속에 나뭇가지를 쑥 들이밀었다. 그녀들은 군인이라고 하기엔 젊었다. 전쟁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그 자리를 새로운 이들로 메우지 않던가. 여섯 개의 장검, 두 개의 도끼,두 개의 단검, 두 개의 장창, 아홉 명의 마법사, 여덟 개의 방패와 하나의 활이 그 자리에 있었다.
“안녕, 케스트럴." 캐서린이 모습을 드러내며 앞에 있는 눈더미에 방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캐서린!" 활을 든 케스트럴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환한 미소를 피워올리며 반겼다. 케스트럴은 눈밭을 천천히 헤치고 와 캐서린의 손을 꽉 잡았다. 방패 옆에 자신의 활을 내려놓으며 케스트럴이 말했다. "이것 숫제 좌천이나 마찬가지잖아. 널 국경 분쟁 지역에 처박다니 말이야."
"보수는 괜찮아."
케스트럴은 캐서린의 견갑 날개장식에 손가락을 대고 두들겼다. 툭툭툭 "검은 침상에 두고 온 거야?"
"그럴 수 밖에." 캐서린은 모닥불을 지나 위치로 이동하는 폭풍경비대원을 응시하며 말했다. "네가 거의 박살 내놨던데."
케스트럴이 능글맞게 웃었다. "소문엔 네가 죄책감에 검을 버렸다던데."
"내게 검이 필요 없다는 걸 곧 알게 될 거야."
"하긴 뭐... 다들 그냥 서슬이 퍼렇네. 이 주둔지 전체가 성가신 적을 잡아먹으려고 안달이 난 것 같아."
캐서린은 방패 위에 손을 놓으며 말했다. "너답지 않게 말이 많구나."
"그냥 얘기하는 하는 거지 뭐. 우리 이런 지 오래됐잖아." 케스트럴은 왼손으로 활을 살짝 잡았다. 그녀의 오른손엔 네 발의 마법 화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닥불 건너편에선 다른 대원들이 흰 모피 후드를 젖히고 무기를 들었다. 화염과 서리와 마력이 마법사들의 손바닥에서 활활 타올랐다. 캐서린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더미에서 방패를 들어 올렸다. 이 순간 대화를 나누던 캐서린과 케스트럴은 이제 없었다. 자욱한 안개와 같은 여명이 하늘에 피어올랐다.
혼란이 밀려오기 전 그 순간, 산들바람이 죽은 병사들로 가득한 천막 주위에 눈송이를 날려 올렸다. 모닥불 위로 불똥이 터졌다. 방패가 일어섰다. 활시위에 마법 화살을 드리운 활은 화살을 끌어 올렸다. 케스트럴은 활을 겨눴다.
그리고 그녀가 캐서린의 시야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할시온의 힘을 담은 마법의 화살이 얼음과 불꽃을 갈랐다.
8편 '쿠데타'
[ 펼치기 · 접기 ]
케스트럴의 마법 화살은 불의 바다를 유유히 지나 찬란한 불꽃을 피우며 허공을 갈랐다. 허공을 가르던 불꽃 화살은 두 여검사 사이의 좁은 공간을 미끄러지듯 통과하여 까마귀의 몸뚱어리를 관통했다. 폭풍 여왕의 까마귀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에 퍽 떨어지며 하얀 가루눈을 날렸다. "너희들도 하고 싶은 대로 해." 케스트럴이 다른 경비대원들에게 말했다. "내 화살은 우리 편 죽이는 데 쓰는 게 아니라서 말이야."
어이가 없었다. 폭풍 여왕의 최정예 대원들은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피를 갈구하며 전율하는 그들의 무기가 갈 곳은 어디인가. 그들의 시선은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밝힌 케스트럴에게서 멀어져 저기 우뚝 서 있는 캐서린에게로, 죽음의 공포로 눈도 감지 못하고 하얀 눈 밭에 떨어진 검은 까마귀에게 향했다. 케스트럴이 캐서린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나자, 하얀 장갑을 낀 대원들은 경계 태세를 취하며 무기를 든 손을 다시 움켜쥐었다. 방패 뒤로 방어 태세를 취한 캐서린의 반짝이는 눈에는 옛 동료가 보여준 마음에 힘도 났지만, 다른 동료들의 난처한 기색에 마음이 쓰렸다. 아득한 정적의 그 순간, 캐서린의 눈에 흰색과 붉은색 제복 뒤로, 서슬 퍼런 칼날에 그들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한때 자매 지간만큼이나 친했던 동료들이지 않은가.
그때 정적을 깨고 최정예 대원이 보호 마력을 깨뜨리더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퍼런 섬광을 번뜩이며 슉슉 앞으로 돌진해 왔다. 케스트럴의 코앞까지 내달려 온 이 최정예 대원의 칼날이 그녀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거칠게 몰아붙이며 그녀가 말했다. "캐서린은 폭풍경비대가 아니야. 케스트럴, 이제 너도 마찬가지군."
"아니라고, 리비아? " 케스트럴이 아픈 가슴을 누르며 겉으로는 히죽 웃어 보였다. "라이오네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에서 널 측면에서 공격하던 남자의 눈알에 화살을 박아 넣은 게 나 아니었니?" 그때 퍽 튀는 소리가 나더니 케스트럴이 서 있는 자리에 연막이 피어 올랐다. 리비아는 케스트럴이 시전한 은은히 빛나는 연막에서 튀어 올라 연막을 벗어나며 방어 자세로 단검을 말아 쥐었다. "너랑 함께 전장에서 싸우며 네 목숨 얼마나 많이 살렸는지 그새 기억이 안나시나 보네?" 엷게 피어오르는 연막 속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오며 말을 잊는 케스트럴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울렸다.
"우린 명령을 받았다. 명령을 지키는 게 폭풍경비대의 의무야." 최전선을 지키는 방패지기가 말했다.
"그래... 맞아, 마렐데. 우린 명령을 받으면 복종해야 한다고 훈련받았지. 그 명령이 옳던 그르던 생각하지 않고 말이야." 시위에 화살을 다시 장전하고 모습을 드러낸 케스트럴이 말했다.
"여덟," 마렐데가 속삭였다.
"그리고 거기 너, 에이미스." 케스트럴의 화살이 푸른 빛의 터질듯한 마력 구체를 손에 들고 상황을 주시하던 마법사의 이마를 겨눴다. "북부에서 벌어진 반란 이후, 네가 밤마다 악몽에 잠 못 이룰 때, 저기 저 캐서린이 밤새 네 곁을 지킨 거 기억나? 그리고 너 이베트, 캐서린이 너한테 바쁜 시간 쪼개서 릴 언어를 가르쳐 줬었잖아." 이베트는 고기를 끄덕이며 어깨에 걸친 도끼를 내려놓았다. 마치 캐서린에게 도끼를 겨눌 자신이 없는 듯, 이베트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보았다.
"흥, 전 캐서린하고 그런 동료애 나눌 일이 없었으니 다행인 건가요? 이베트한테 말을 가르쳐줬건 말건 지금 무슨 상관이죠?" 대원들 중 가장 어린 엘레나가 조롱하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반역자 따위한테 무슨... 캐서린님은 명령을 어겼어요. 임무를 엉망으로 만들고 폭풍경비대의 명예에 먹칠한 거라고요!" 엘레나는 자세를 낮추고 장창을 거머쥔 손에 분노를 심었다.
"영원한 충성을." 탄식 섞인 목소리로 폭풍경비대 구호를 왼 캐서린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래, 나도 제군처럼 충성을 맹세했지. 하지만 난 전쟁에 나설 때면 명령을 내린 여왕에게 충성한 적은 없다. 난 그저 내 옆을 지키고 나와 함께 싸우는 제군에게 충성을 다 하려 노력했다. 칼에서 피가 흐르고 화살이 날아다니는 전장에서 내겐 몽릴의 안위 따윈, 통일된 이븐타이드 따위는 안중에 없었어. 목숨을 걸고 나와 함께 전장에 나선 제군이 죽어 나자빠지는 일이 없도록 사력을 다해 함께 싸운 것뿐이다. 내겐 제군이 여왕이었다."
캐서린의 말을 들은 리비아가 절규하며 말했다. "그럼 왜 우릴 버리고 겁쟁이처럼 도망친 거죠?"
캐서린은 리비아를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폭풍경비대엔 겁쟁이란 없다, 리비아. 난 내 소중한 친구를 죽이는 명령은 따를 수 없을 뿐이야. 언젠가 이런 상황에 처하면 제군은 나와는 다른 선택을 할 날이 있겠지. 하지만 난... 난 말이야. 너를 위해 사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수치심에 셀 수도 없는 세월을 버텨냈어, 케스트럴."
"그럼 이제 내게 만회하면 되겠네 뭐." 케스트럴이 겨눈 활을 내리며 말했다. "타이젠 관문에서 줄리아의 가족들을 발견했어. 잘살고 있더군. 다행히 그들은 기디안 사람들의 도움으로 탈출했어."
캐서린이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그렇다면 한시도 지체할 시간이 없군. 자, 선택해라 제군. 여왕의 저주받은 까마귀가 우릴 찾아내기 전에 말이다. 어떻게 할 텐가?"
9편 '다리를 건너'
[ 펼치기 · 접기 ]
얼어붙은 툰드라 지대 사이로 울창한 침엽수림이 펼쳐졌다. 하루가 급한 폭풍경비대지만 살인 까마귀들의 매서운 감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밤에만 이동했다. 나라 전체가 전쟁의 업화에 휩싸였고 폭풍 여왕의 군세가 그들을 뒤쫓고 있었다. 하지만 케스트럴과 캐서린은 여왕의 살벌한 추격보다, 눈을 뜰 수 없는 눈보라와 뼈에 사무치는 추위가 더 걱정이었다. 케스트럴은 겨울 제복이 지켜주는 한 줌 온기에 새삼 감사했다. "아직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군." 국경을 넘기 전 마지막 날 밤, 캐서린이 케스트럴 근처로 와 중얼거렸다.
"고마울 거까지야." 케스트럴이 군장 가방을 앞으로 고쳐매고는 야간투시경을 벗으며 대꾸했다.
"어느 누가 왕좌에 오르는지 난 털끝만큼도 관심 없어. 하지만 세 살짜리도 기디아가 폭풍 여왕의 군대과 영토를 공격할 거란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지."
캐서린은 답하지 않았다. 밤하늘에 추위만큼이나 차가운 새파란 달이 떠 있었고, 도망자들의 발걸음 소리와 그들의 입에서 나온 햐얀 숨결이 동토에 퍼졌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케스트럴의 귀에 세차게 흐르는 물살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걸음을 재촉하여 근처 고지대에 올라 조심스레 전방을 정찰했다. 그들 앞에 강을 가로질러 놓여있는 다리. 이 다리야말로 지난 '겨울 전쟁'에서 파괴되지 않은, 국경을 건너는 유일한 통로였다. 바로 폭풍경비대가 나아가야 할 길... 다리를 발견한 케스트럴이 휘파람으로 신호를 보내자 다른 폭풍경비대원들도 모여들었다.
"다리 위는 적들로 가득하다. 얼핏 봐도 강 이쪽과 건너편에 20명씩, 그리고 다리 위에 추가로 경계 서는 인원이 10명에 달해." 케스트럴이 걱정했다.
"뭐, 한 번에 하나씩 차근차근 처치하면 안 될 것도 없지." 캐서린이 말했다.
"방심은 금물이야. 저들은 설인까지 부리고 있어." 케스트럴이 경고했다.
케서린의 미간이 찌푸려졌고, 그녀의 경고를 들은 방패수 이벳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함께 다리를 내려보았다. 곧 그녀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다리 위의 경비병들 사이로 새하얀 털을 한 거대 얼음 괴수가 어림잡아 열 마리는 서 있었다. 설인의 커다란 뿔은 날카로운 가시로 뒤덮여 있었고, 강철 투구 사이로는 뾰족한 어금니가 섬뜩하게 빛났다. 설인들의 어깨 위에는 적 궁수들이 활을 들고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저게 설인이군요. 순진무구한 아이들을 유인해서 잡아먹는다는 북극의 괴물..." 에이미가 그녀의 마법 망토를 단단히 조이며 걱정했다.
"저놈들은 내가 처리하지." 케스트럴이 심호흡하고 신중히 활을 꺼내며 말했다.
"전원 명심하라. 적을 모두 처치할 필요는 없다. 우리 목적은 전투가 아니라 국경을 넘는 것이다." 캐서린이 방패에서 칼을 끄집어내며 환기했다.
"일단 전투에 돌입하면 각자 행동한다. 그대들의 실력과 판단을 믿겠다." 캐서린이 신호를 하자 케스트럴을 필두로 폭풍경비대원들이 이동했다. 그들의 귀에 급류 소리가 크게 들리고, 더욱 가까워지자 설인들이 으르렁대는 괴성도 들려왔다.
모습을 가려주던 짙은 수풀이 자라지자 케스트럴은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른 대원들도 방패병, 전사, 마법사로 조를 짜 신중히 전진했다. 하지만 캐서린은 예외였다. 그녀는 모피 외투를 휘날리며 보무도 당당히 나아갔다. 경비대의 정찰 불빛이 그녀를 비췄고, 곧 시끌벅적한 소란이 다리 위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허겁지겁 출동한 병사들에게 캐서린이 순식간에 둘러싸였다!
케스트럴이 사라진 자리에는 마치 물이 흐르는듯한 잔상이 떠 있었고, 캐서린이 시선을 끄는 동안 그녀는 다리 위의 설인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는 설인의 덩치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그들의 걸음걸이는 다리를 흔들 정도였고, 튼튼한 갑주는 빈틈없이 몸을 감싸고 있었다. 버거워 보이는 적이었으나 이제 와서 물릴 수는 없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제 공격해야 한다! 캐서린이 굳은 표정으로 방패를 들어 올리는 순간, 설인 하나가 케스트럴이 설치해 둔 연막으로 들어갔다.
적들이 캐서린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고 있어, 케스트럴의 화살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쉽게 괴물의 눈알을 꿰뚫었다. 설인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울부짖으며 몸부림쳤고, 어깨 위에 탄 경비병들도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졌다. 당황한 근처 경비들이 다른 설인을 독려하여 케스트럴을 공격하려 했을 때, 이미 그녀는 시야에서 다시 사라지고 없었다.
케스트럴의 공격을 시작으로 모든 폭풍경비대원이 각자 자신이 점찍은 목표로 돌격했다. 칼과 마법이 허공을 갈랐고, 소환된 불사조는 끔찍한 열기로 다리 위의 경비들을 덮쳤다. 겁에 질려 풍비박산인 경비들 사이로 케스트럴은 설인 하나를 다시 연막으로 꾀어내 할시온 화살을 날렸다. 이번에는 설인의 갑주가 거의 유일하게 보호하지 못한 겨드랑이를 노렸다. 화살에 맞은 녀석은 아픔과 분노에 울부짖으며 케스트럴을 찾았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런 공격을 반복하며 케스트럴이 경비대와 설인들의 혼을 빼놓는 사이, 적진 한복판에 있던 캐서린에게서는 빛의 구가 거창하게 차올랐다. 경비대의 긍지를 상징하는 그녀의 보호막에 쏟아진 각종 화살과 마법은 공격자에게 되돌아갔다.
이제는 전투에 종지부를 찍을 차례. 케스트럴은 폭풍경비대원들이 싸우는 틈을 타 내달렸다. 군데군데 얼어붙은 핏물을 피해 다리 반대편에 도착한 그녀는 부대장 앞에 나타났고, 그가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빛나는 화살이 장교의 코끝을 겨냥했다.
"까꿍, 그대도 우리가 누군지 알겠지?" 케스트럴이 윙크했다.
"포, 폭풍경비대." 장교는 케스트럴이 듣기에 생소한 어조로 더듬거렸다.
"길 좀 빌리지." 어느새 다가왔는지 캐서린의 끈적끈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손은 케스트럴의 어깨를 든든하게 감싸 쥐었고, 다른 폭풍경비대원들도 저마다의 목표를 정리하고 뒤에 도열했다.
"순순히 내주면 피차 좋은 일 아니겠어."
부대장이 한숨을 쉬며 무장 해제 명령을 내리자 캐서린의 눈동자에 안도의 눈빛이 서렸다. 경비대가 날뛰는 설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혼란 도가니 사이로 폭풍경비대는 신속히 다리를 지나 국경을 건넜다. 마지막 폭풍경비대원이 다리를 건널 때까지, 케스트럴은 어둠 속에서 화살을 겨누고 엄호했다.
10편 '알파'
[ 펼치기 · 접기 ]
칠흑 같은 방은 으스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수술실처럼 차갑게 밝은 빛이 중앙에 있는 유리 탱크를 비추고 있었다. 유리 탱크 안, 귀신처럼 창백한 얼굴의 한 여성이 물결에 좌우로 흐르면서 활처럼 휜 모습으로 둥둥 떠 있었다. 야윈 배는 가장 높은 위치로 둥둥 떠 있었고, 삭발한 그녀의 머리는 마치 포복절도한 듯 뒤로 젖혀져 있었다. 유리 탱크 내 뱀처럼 구불구불 엮여 있는 여러 개의 관과 관을 잊는 교점이 그녀의 가슴과 관자놀이로 이어져 있었다. 흉부에 깊게 파인 상처는 꿰매져 하얀 붕대로 동여매 있었다. 낮은 음색의 노랫가락은 화학 약품의 냄새와 어우러져 그녀의 가슴에서 느리게 뛰고 있는 심장 박동과 리듬을 타고 있었다. 그리고 눈부신 빛줄기 아래, 방 한쪽 구석에는 여성의 형체를 한 머리 없는 로봇이 놓여 있었다. 이 기괴한 로봇의 옆에는 두꺼운 고글을 쓴 드워프가 의자에 앉아 한창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드워프는 손에 든 전기 천공기를 켰다가 껐다가 하면서 방 안을 굉음과 잔음으로 가득 채웠다.
그러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에 놀라 백색의 방어구를 살짝 흠집 낸 드워프는 긁힌 자국을 문지르면서 욕지기를 퍼부었다. 제길... 누가 왔든 상관없었다. 그저 드워프는 작업을 방해한 자들에게 짜증이 났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눈먼 폭풍 여왕과 그녀를 호위하는 두 명의 경비병들이었다. 여왕은 유리 탱크에 다가와 살며시 손을 댔다. 여왕의 어깨에 자리한 까마귀는 주인이 손을 대고 있는 유리 안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은혜도 모르는 것들 같으니..." 폭풍 여왕이 굳은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내가 없으면 뭐가 되었겠나? 할머니들이 여자아이한테 항상 말하는 그런 여자의 삶을 살았을 주제에...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이나 하고 애들 낳고 평범하게 말이야. 그런 너저분하고 평범한 삶에서 구제해 준 줄도 모르고... 더 강하게 만들어주고, 삶의 목적에 새로운 가족까지 줬건만 내게 돌아온 건 뭐지?"
두 명의 폭풍경비대원들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유리 탱크를 쳐다보았다. "우리가 돌아왔어..." 한 명이 말을 했지만, 폭풍 여왕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중얼거리길 멈추지 않았다.
"배신자들. 소설 같은 생각일 뿐이라니. 제국을 건설하고 다스리는 것은 눈곱만큼도 모르는 아이를 위한 것이라고? 흥, 떠들어보라지. 하지만 아이야, 넌 특별하단 말이다." 폭풍 여왕은 아이에게 볼을 비비는 듯 유리 탱크에 볼을 대며 말했다. "아이야, 넌 그 어느 전사보다도 강해질 거란다. 지치지도 않을 거란다. 절대 날 배신하지도 않을 거란다. 넌 그럴 수가 없으니 말이야."
"그 말인즉슨 이 아이를 조립할 승인을 받은 거로 생각해도 된다는 거요?" 프랭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불쑥 끼어들었다. "내일이면 머리를 잘라 방어구에 연결해 설정을 완료할 수 있을 거요."
"좋아." 폭풍 여왕이 대답했다. 여왕은 수조를 등지고는 냉혹한 얼굴에 소름 끼치는 미소를 띠고는 두 명의 폭풍경비대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의 친애하는 대원들이 아이의 힘을 시험할 수 있도록 그대를 도울 걸세."
11편 '파괴'
[ 펼치기 · 접기 ]
—— 어이, 예쁜이…
프랭키와 베일을 쓴 여왕은 흙먼지가 가득한 훈련장에 펼쳐진 광경을 천천히 돌아보며 자신들의 흔적을 남겼다. 귀환을 선택했던 두 명의 폭풍경비대원, 리비아와 엘레나의 시체는 흙먼지와 피딱지로 얼룩져 있었다. 가면과 갑옷에 흠집 하나 없는 알파는 생명이 없는 것처럼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이거 잔인하군..." 프랭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필요한 실험이었네." 여왕이 대답했다. "게다가 정말 인상적이군. 이 세계의 그 어느 누구도 저들 중 단 한명도 꺾을 수 없을텐데, 그대의 창조물이 순식간에 저들을 끝장내다니 말이야."
"알파를 막을 자는 없을 거요." 프랭키가 알파의 무릎 관절을 점검하며 말했다. "기억 저장 공간에 오류가 있어 작업을 좀 했소이다. 싸우는 기술만 빼고 모든 기억을 날리는 게 쉽진 않더이다. 자동 재시동으로 오류를 잡아내긴 했..."
"그래서 준비는 모두 끝난 건가?"
"크흠... 그렇소이다. 임무도 전송해 두었소."
~
——그거론 날 못 막을 텐데!
연기를 뒤로한 채 화르르 퍼져 버리는 불처럼, 이븐타이드의 빼곡한 도시 전역에 폭풍경비대가 여왕을 배신했으며, 기계 괴물이 불복종한 폭풍경비대원들의 뒤를 쫓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나갔다. 폭풍 여왕에 대항해 반란을 꾀했던 두 옛 귀족 가문엔 이 소식이 너무 늦게 알려져 화를 피할 길이 없었다. 6명의 난도질 당한 전 폭풍경비대원들과 귀족 가문의 일원들은 차가운 거리로 끌려 나와 여왕의 충성스러운 까마귀들의 밥이 되고 말았으니...
~
——예쁜 것 같으니...
타이젠 관문 옛 찻집 밖에는 곡선형 검을 소지하고 복면을 한 경비병들이 나란히 침묵을 지키며 서 있었다. 찻집 안엔 세 명의 사령관들이 6명의 전 폭풍경비대원들과 낮은 탁자에 마주 앉아 있었다. 이들의 손바닥은 이 지역 전통에 따라 탁자 아래로 향해 있었다.
"폭풍경비대가 이 지역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알려졌지 않소." 손과 찻잔을 탁자 위에 걸친 똥배에 올려둔 곰의 모습을 한 2등 사령관이 말했다.
"폭풍경비대는 이제 몽릴의 후계자를 위해 일합니다." 마렐데가 대답했다.
"이제 우린 어떤 여왕이 이븐타이드를 다스리든 상관 없소이다. 우린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이오." 1등 사령관의 홀로그램 영상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렐데가 손가락을 구부려 뚜둑 소리를 내면서 지휘관들의 눈을 응시했다. "여왕의 야망이 자신의 영역을 뛰어넘어 도가 지나친 행보를 보인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공주님'의 행방을 알려주면 가서 죽여버리려는 더러운 수작 아니오? 그대들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어디 밝혀보시지?" 음침한 미소를 띤 채 조용히 있던 3등 사령관이 물었다.
마렐데는 다른 폭풍경비대원들에게 곁눈질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지만, 흘긋 보는 것만으로도 타이젠 관문 대표들에겐 나약하게 보일 수 있었다. 게다가 캐서린도 말하지 않았던가. 최전선을 담당하는 방패지기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고. 그녀는 탁자로 손을 올리더니, 이 지역 전통을 깨고 보란 듯이 손바닥을 위로 했다. "당신들 신임 따위는 필요치 않습니다. 모든 일엔 대가가 따르지요. 최대한 상황을 가늠해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아아악!" 갑자기 밖에서 강철이 부닥치는 소리와 비명이 들려왔다. 이들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폭풍경비대원들은 낮은 탁자를 박차고 일어나 세 명의 마법사를 둘러싸고 방어 태세를 취했다. 2등 사령관이 놀라운 속도로 일어나더니 곰으로 변신했다. 1등 사령관의 홀로그램은 깜빡이다가 이내 사라져 버렸다. 3등 사령관은 전통 의상을 풀더니 작은 단검이 가지런히 꽂혀 있는 조끼에서 무기를 꺼내 들었다.
"무력 행위 금지 좋아하시네." 손가락을 튀겨 푸른 불꽃을 폭발시키던 마법사 한 명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아직이야.” 마렐데가 말을 꺼냈다. 마력이 타이젠 관문 전역에 감지될 것이었다. '제가 서 있는 이곳의 최후의 방어선이라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죠, 캐서린?'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마렐데는 캐서린의 안위를 걱정했다. 하지만 캐서린은 이미 멀리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겐 방패도 없었다.
밖에서 끊임없이 들리던 비명 소리가 뚝 끊겼다. 문이 열리더니 밤을 노래하던 새소리와 무거운 여름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지금이야!" 마렐데가 우렁찬 소리로 명령을 내리자, 육중한 검이 찻집의 천장과 벽지를 내리 가르고, 쏟아져 나가는 마력의 울림이 이 처절한 현장을 가득 채웠다. 그리곤 드디어 미지의 존재, 기계가 찻집 안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반짝이는 푸른 마력이 사방으로 분출하고 2등 사령관의 우레같은 고함이 터져 나갔다. 그 기계는 멈추지 않고 돌진하더니 자신의 전 사령관을 베고, 마력 화살을 튕겨내더니, 3등 지휘관의 검을 자신의 갑옷으로 쳐 내버렸다. 몇 분 새, 알파는 번쩍이는 눈으로 전투 후의 적막 속에서 현장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여섯 명의 대원들은 알파의 발밑에 모두 박살 나 피 흘리고 있었다. 두 명의 사령관은 구석에서 두려움에 몸서리치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리곤 알파는 눈에 들어온 검은 탁자와 마렐데를 두 동강 내 버리고 말았다.
——지령 완수
12편 '내 이름은 데이지'
[ 펼치기 · 접기 ]
''데이지는 훈련장 구석에 처박히고 말았다. 소녀의 맨발은 매트에 깊게 박혀 있었고, 여기저기 멍든 팔에 낀 두꺼운 가죽 복싱 장갑을 들어 얼굴을 가려야만 했다. 이 소녀보다 한 살 많은 15살의 케스트럴은 이리저리 빈틈을 파고들어 데이지를 사각지대로 몰고 있었다. 데이지가 팔을 내려 방어를 조금이라도 풀면, 케스트럴의 공격이 턱과 관자놀이로 들어왔다. 데이지의 부어오른 눈에서 눈물이 흘러 얼굴에 뭍은 피와 섞이고 코에선 콧물이 흘러 내렸다. 복부를 파고든 케스트럴의 주먹으로 데이지의 얼굴을 일그러지고, 입에서는 헉소리가 터져나왔다. 숨이 막히고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케스트럴은 놀라 장갑을 낀 손을 들어올렸다. "여기요! 데이지가 정신을 잃었어요!"
교관은 가만히 다가와 녹초가 되어 쓰러진 소녀를 노려보았다. "움직임이 겨우 그거밖에 안 되는가!" 교관은 차가운 말투로 데이지를 꾸짖었다. "평소의 훈련에서 멍들고, 터지고, 쓰러지는 만큼 실전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늘어난다!"
케스트럴은 시퍼렇게 멍든 눈으로 데이지에게 윙크를 날렸다. "일어나. 다음엔 네 차례니까."
"난... 못하겠어." 데이지가 울먹거렸다. "난 못해."
"네 마음 속 고통을 조절해야 해." 케스트럴은 다른 가죽 장갑으로 코를 닦으며 말했다. "내가 숫자를 세 줄게."
데이지는 움찔하더니 케스트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면 될까?"
케스트럴이 어깨를 으쓱했다. "일어나. 해 보자."''
~
"방금 소리 들었어?"
비행선 격납고 꼭대기에서 폭풍경비대의 마지막 생존자들은 죽음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케스트럴과 캐서린은 착륙장에서, 나머지 네 명은 아래 관제실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
에이미스는 손끝에서 뻗어 나오는 파란 마력으로 귀여운 고양이 형상을 만들며 긴장을 풀었다. 그녀는 왕실 거처의 첨탑 주위에 물아치는 깜빡이는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치는 소리?"
이베트는 창문에 코를 박고는 한숨을 쉬며 콧김으로 창문에 김을 서렸다. "타이잔 관문 사령관들은 멍청하기로 악명이 높았는데 말이야. 우린 여왕의 살인 집단으로 알려진 거네."
거처 중앙에 있는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종소리가 다시 한번 더 크게 울렸다.
경비병들이 엘리베이터를 빼곡히 채우고 첨탑을 올랐다. 여검사는 자신의 날이 넓은 검을 휙 던지더니 탁 받아들곤 말했다. "자, 제군. 우리 앞에 나타나는 자들이 폭풍경비대 잔당들일 수 있다. 조종사나 다른 일꾼들은 죽이지 않도록 한다."
마지막 종소리가 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온다." 에이미스가 속삭였다. 긴장을 푸느라 그녀의 손끝에서 뻗어나오던 마력을 사라지게 하고는 소리쳤다. "캐서린 님!"
"너무 늦었어." 방패지기가 낮게 읍소하고는 엘리베이터로 내달렸다. 그녀의 방패가 화염을 내뿜으며, 눈앞에 나타난 기계를 정면으로 가격하며 건너편 벽으로 밀어붙였다.
"하나." 기계가 외마디를 던졌다.
방패지기는 엘리베이터에서 튀어 나와 바닥을 따라 유리벽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녀의 방패와 몸통은 완벽하게 절단되어 바닥을 피바다로 물들였다.
"이 녀석, 고철로 만들어주마!" 이베트가 결의에 차 말하더니 앞으로 돌진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도끼를 휘둘렀다.
그러나 기계는 이베트의 공격을 금속 팔로 받아냈다. "둘." 기계의 차디찬 목소리가 다시 한 번 흘러나왔다. 그러더니 기계는 이베트를 밀쳐냈다. 이베트는 손잡이가 둘로 갈라진 도끼를 잡고 뒷걸음질 치더니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의 머리에서 선홍색 피가 새어 나왔다.
처참했다. 세 번째 폭풍경비대원이 관제실 제어판과 의자 위로 휘청거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는 날이 넓은 검을 십자 모양으로 해 자신을 방어했다. 하지만 기계는 한 손으로 그녀를 잡아 들더니 창문으로 내던져 버렸다. 유리는 박살이 났고, 그녀는 검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에이미스는 분노로 가득한 마음으로 손가락을 튕겨 마력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그녀는 몰아치는 고통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여길 보라고!” 에이미스는 기계의 주위를 끌고자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손끝에서 파란 마력의 불꽃이 피어오르고, 날개의 모양을 갖추더니 에이미스의 양팔에 거대한 불사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 가라!" 에이미스가 명령하자 불사조는 날개를 펴고 날아올라 발톱으로 기계를 덥석 잡아 엘리베이터로 끌고 갔다.
"셋." 기계가 말하더니 "넷, 다섯, 여섯"을 연달아 외쳤다. 에이미스는 기계를 쫓으며 폭발하는 마력 구체를 연달아 쏘아댔다. 불사조는 기계를 엘리베이터에 쳐넣고는 기계의 머리 방어구를 쪼면서 날카로운 소리를 내질렀다.
~
"에이미스의 불사조야." 케스트럴은 네 발의 마력 화살을 불러일으키며 내달렸다. 캐서린은 계단으로 돌진하더니 방패를 바닥에 쾅 찍었다. 그러자 착륙장의 콘크리트 바닥이 분출하더니 온 사방으로 폭발했다. 기계는 지붕으로 도약하더니, 엘리베이터 전선을 끊어 자신의 검에 동여맸다. 위기였다. 전선이 끊어진 엘리베이터가 에이미스가 있는 첨탑 쪽으로 무서운 속도로 떨어졌다.
기계의 오싹한 가면이 케스트럴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신원 확인 중. 목표 0-2-3. 폭풍경비대. 제거."
케스트럴이 연속으로 발사한 세 발의 마력 화살이 기계의 무릎과 목부위를 관통했다. "일곱. 여덟. 아홉." 기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또 숫자를 읊펐다.
케스트럴은 활시위에 마력 화살을 걸다 잠시 멈칫 했다. 어디선가 들어보던 소리가 아닌가.
그때 뒤에서 캐서린이 전광석화와 같이 튀어나와 둥근 방패로 기계의 후방을 가격했다. 그리고는 숨을 고르더니 옅게 빛나는 둥근 마력 방패를 불러 일으켜 자신의 주위를 감싸고 기계의 움직임을 살폈다. 기계는 캐서린의 공격으로 이상이 온 듯 말을 더듬거렸다. "여...여... 열. 시... 신원 화...확인. 목표 0-0-1. 폭풍경비대. 제... 제거어." 기계의 검이 허공을 가르더니 캐서린을 감싼 마력 방패를 갈라버렸다. 캐서린의 마력 방패는 산산이 조각나 에너지 파편이 쏟아졌다. 마력 방패를 가격한 충격과 파편으로 기계가 비틀거렸다. "오류 발생. 오류 발생."
"캐서린, 기다려!" 케스트럴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케스트럴의 목소리를 들은 캐서린은 옆으로 자리하더니 무릎을 숙이고 방패를 높이 들어 올리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저 앞에서 기계가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케스트럴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케스트럴은 기계의 으스스한 얼굴 뒤에 가려진 눈을 향해 마력 화살을 쏘았다.
"열일곱." 기계가 다시 입을 땠다. 마력 화살이 산산이 부서지는 와중에도 고장난 인형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공격 당한 횟수를 세, 세어야..." 그녀의 기계적인 음색이 사라졌다. "난... 못하겠어. 예쁜 것 같으니. 데이지가... 데이지가 정신을 잃었어요. 난 못하겠어... 케스트럴 언니?" 이 말과 함께 기계의 손에서 검이 툭 떨어졌다.
"도대체... 여왕이 네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케스트럴이 아픈 가슴을 움켜쥐고 처절하게 외쳤다.
캐서린은 방어 태세를 유지한 상태로 케스트럴 앞을 가로 막고 말했다. "함정일 수도 있어."
"아니야. 저건 데이지야, 캐서린." 케스트럴은 기계에 다가가 주먹으로 얼굴을 쳐 가면을 벗겨내고 그 안에 숨겨진 충격적인 얼굴을 확인했다.
"여기 어디야?" 데이지가 주먹을 꽉 쥐며 낮게 말했다. "아파. 너무 아파. 도와줘... 케스트럴 언니. 도... 도... 도와...줘..." 그녀의 눈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더니, 꼭 쥔 주먹이 풀려 늘어지고 말았다.
"데이지, 데이지! 무슨 일이지?" 어쩔 줄 모르는 케스트럴이 소리쳤다. "죽은 거야?"
"시스템 재가동. 대기." 데이지가 평온하고 단조로운 음색으로 말했다. 그리곤 눈을 감았다.
데이지가 눈을 뜨더니 슬프게 입을 땠다. "내... 내가 그들을 죽였어... 내가 다 죽였다고. 내가 왜 그런 거지?"
"네 잘못이 아니야." 케스트럴이 자신의 품으로 기계를 안고 다독였다.
"멈출 수가 없어. 그게 다시 살아나. 느낄 수 있어. 내가 다 죽였어. 어서 도망가. 가라고. 가. 내가 끝낼게. 언닌 도망쳐야 해. 막을 수가 없어요. 대기. 멈춰. 끝낼 수 있어. 도망가요. 도망가라고... 목표 0-2-3. 제, 제발 도망가요... 목표 0-0-1. 예쁜 것 같으니. 말살 목표 지정 완료. 묵시록 가동."
데이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갑자기 딸각 소리가 나더니, 데이지 주위에 에너지 장막이 피어올랐다. 캐서린은 케스트럴의 팔을 잡아 끌어 데이지에게서 떼어놨다.
케스트럴이 애처롭게 말했다. "데이지를 도와야 해, 캐서린." 하지만 데이지의 갑옷에서 눈이 부실 정도의 빛이 새어나오자 캐서린은 케스트럴을 멀리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저기로 가!" 캐서린이 허공에 떠 있는 비행선의 굉음에 맞서 소리를 지르며 저 멀리 하늘의 섬을 가리켰다. 갑판에서 내려온 줄사다리를 잡은 캐서린은 케스트럴을 위로 던져 올렸다. 거대한 폭발 충격이 첨탑을 강타하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폭발 충격이 비행선을 가르며 쏟아졌고 케스트럴은 줄사다리에 매달려 목숨을 부지했다. 케스트럴의 발아래 도시는 파괴되고, 그녀의 머리 위, 저 멀리에 할시온 협곡이 한 줄기 어둠의 섬처럼 눈에 들어왔다.
캐서린은 떨리는 몸을 가눴다. 그녀의 둥근 방패는 그을려서 검게 변해 버렸다. 한숨을 쉬며 방패를 던져 버리고 캐서린은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빙빙 돌며 이 모든 상황을 내려다보고 있던 여왕의 까마귀였다.
친구들. 옛날이야기 하나 들려주지. 때는 만물이 결실을 거두는 가을이었어. 마을 곳곳에는 커다란 축제 천막이 세워지고 다양한 즐길거리와 먹을거리가 가득했지. 파벨과 난 귀리 맥주 노점상에서 한잔 했어. 이후 죽이 맞은 우리는 그 유명한 '여왕의 몰락' 카드 게임을 했고. 이거 다들 즐기는 거잖아? 한 가지 차이점은 난 타짜였고 녀석은 초짜였다는 거지만. 결국 난 녀석을 뼛속까지 홀라당 털어먹었고 파벨은 내가 속임수를 쓴 것이라며 씩씩대더군. 하지만 별수 있나. 증거가 없는데. 우리가 말싸움하자 관중들이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며 몰려들기 시작했어. 물론이건 우리가 다 계획한 것! 소꿉친구인 파벨과 나는 취객과 군중 다루는 방법을 어렸을 때부터 통달했지. 까딱 실수하면 칼 맞을 수 있지만, 제대로 하면 수입이 매우 짭짤하거든! 내가 맡은 역할은 나대는 악당. 파벨은 덩치에 맞지 않게 사슴처럼 순진한 눈망울을 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관중들이 그를 불쌍하게 여기도록 하기 편했어. 우린 즉흥적으로 연극을 시작했고 내가 파벨의 돈을 갈취했다는 연기를 하기 시작했어. 이후 구경꾼들이 모였을 때 파벨이 외쳤어.
"여러분. 이놈 보소.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빠른 총질을 한다는구려. 야 이 사기꾼아. 내 이빨로 네 총알을 잡을 수 있다는 데 10 골드 걸지!"
"이봐 파벨. 벌써 취한 거야? 세상 누구도 나는 총알을 이빨로 잡을 수 없어." 난 짐짓 큰 소리로 꾸짖었지.
그러자 파벨이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허세만 가득한 사기꾼이라고 주장했어. 우리가 떠드는 소란에 사람들이 점점 모여드는 것을 본 파벨은, 목청을 높여 분위기 돋구었어.
"허허. 신사 숙녀 여러분. 제가 이 쓰레기 녀석에게 정의구현을 하는 것에 돈을 걸 사람 있소?"
군중들은 당연히 인간이 이빨로 총알을 잡는다는 걸 안 믿었지만, 이 녀석이 얼굴에 총 맞고 뒈지는 걸 보고 싶어 했을 거야. 뭐... 이 동네 분위기가 좀 험악하긴 하거든.
충분히 돈이 들어왔을 때, 난 내 권총을 떨구고 사람들에게 고백해. '파벨과 난 둘도 없는 친구라 차마 쏘지 못하겠다.'고 말이지. 그럼 흥분한 군중들은 뭔 개소리냐. 내 돈 내놔라 한단 말이지. 이렇게 장내를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어 놓고, 못 이기는 척 한 발을 쏘는 거야. 파벨 옆의 멀찌가니 떨어진 벽으로 말이지.
그럼 관중들은 더 날뛰어. 우릴 싸잡아 비난하며, 욕설에 삿대질까지 아끼지 않아. 점점 달아오르는 분위기에 등 떠밀려, 난 못 이기는 척 다시 방아쇠를 당겨. 겁 먹은 듯 손을 사정없이 떨며 말이야. 파벨도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와 장난을 맞춰.
"빵!"
발포 소리가 들리고 파벨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과연 그가 이빨로 총알을 잡았을까? 실패하고 죽은 걸 아닐까?
관중들은 궁금해하며 너도나도 파벨의 몸에서 눈을 떼지 못해. 그리고 그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그는 미리 준비해 둔 총알을 입에 물고 사슴 같은 순진한 눈망울로 사람들을 보는 거야.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지.
덕분에 '여왕의 몰락'으로 파벨이 나한테 진 빚도 다 갚았고, 관중들도 무척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 그리고 파벨과 나도 화해하고 좋은 친구로 남게 되었지. 참 좋은 시절이었는데... 덩치 큰 사슴 눈망울의 파벨, 다시 보고 싶군. 아마 지금도 어딘가의 공연단에서 열심히 짐을 나르고 공연을 하고 있을 거야. 녀석이 헤어지며 나에게 한 말이 참 마음에 든단 말이지.
"넌 말이야. 인생은 최악, 사격은 최고!"
[ 펼치기 · 접기 ]
흠, 솜씨 좋은 용병을 찾고 있다고? 좋아! 추천할 만한 녀석이 있지. 쉿. 그렇게 목소리를 너무 키우지 말라고! 수풀에서 은밀하게 적을 덮치는 그런 솜씨 좋은 해결사가 필요하지? 아아. 혹시 네가 암살자나, 저기 먼 동방의 수리검을 다룬다는 닌자를 상상했다면 오산이야. 난 그런 놈을 추천하지 않아. 보아하니 넌 큰 거 한 방을 원하는군. 확실하게 튀는 일 처리를 해서 온 사방에 경고할 수 있는 그런 전사 말이야. 어쩌면 유혈이 낭자한 현장을 보고, 녀석이 몸담고 있는 조직이 지레 겁먹어 철수할 수도 있겠지. 그럼 그랑고르의 글레이브가 딱이야.
여기 주점 저쪽 구석을 보라고. 커다란 덩치가 보이나?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농부들 옆에 거대한 제트 엔진 도끼를 세워둔 녀석 말이야. 미리 말해두지만 녀석의 몸값은 싸지 않아. 네 눈동자에 의문이 가득하군. 대체 그랑고르가 뭘 해 먹을려고 여기까지 온 지 말이야. 용병 일이란 솜씨 좋으면 벌이는 짭짭하지만 그만큼 사방에 적을 많이 만드는 법이거든.
알다시피 본디 그랑고르는 용병일은 잘 하지 않... 응 뭐? 저놈의 눈을 가리고 있는 헝겊쪼가리는 뭐냐고? 소문에 그랑고르는 눈이 없다고 해. 아니면 적어도 눈이라 부를 만한 기관은 있지만 작동하지 않는다던가. 저 글레이브라는 그랑고르가 어떻게 앞이 안 보이게 됐는지는 온갖 추측만 무성해. 신기한 건, 저놈은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목표를 놓치는 법이 없다는 거야. 밀림의 맹수들은 하나의 감각을 잃으면 다른 감각들이 예민해져 보완한다고 한다지? 녀석도 그런 부류인가 봐.
저놈은 시체의 산을 쌓고 네 의뢰를 해결해 줄 수도 있어. 원한다면 가서 말을 건네 봐. 하지만 그 자리에서 '눈이 멀었으니까 할인은 어떠한가.' 따위의 흥정을 하려는 순간, 네 머리통이 달아날 거야. 분명 경고했다! 글레이브는 적당히란 걸 모르거든. 그리고 마지막으로 충고 하나만 더 하지. 절대 녀석의 눈을 직시하지 마. 그랑고르 종족에겐 그건 싸움을 건다는 의미거든. 심지어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말이야.
2편 '링고를 만난 글레이브'
[ 펼치기 · 접기 ]
그 커다란 탁자 구석에서 날 모욕하면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나? 네놈이 그렇게 떨어져 있으니 꽁지 빠지게 도망갈 수 있으리라 착각했나? 알량한 머리로 할 수 있는 생각이란 겨우 그 정도겠지. 그 결과, 네놈은 이렇게 내 발치에 버러지처럼 쓰러져 있다. 이게 바로 니가 도박판에서 지는 이유지. 네놈은 멀리서 뽐낼 줄 알지, 마주 보면 아무것도 못 하는 겁쟁이거든. 맞은 부위를 감싸 쥐고 끙끙대는 기분이 어떠냐 패배자야. 다시 한 번 모욕해 보시지? 크흠, 좋아 좋아. 이 상황에서도 내 얼굴에 침을 뱉다니. 겁쟁이 치고는 가상하군.
뭐 네 종족이 우리 그랑고르를 모욕하고 폄하해도 일리는 있다. 우리 종족은 일찍이 나무 위 그리고 동굴 속에서 살아왔고, 우리의 피부는 수풀 속에 숨기 쉽게 보호색을 띠고 있지. 하지만 우린 자연의 법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냥꾼이다. 근데 너희는 어떠한가? 너희가 우리 보금자리를 파 뒤집고, 수정 광산과 금광을 무차별적으로 캐갈 때마다 삶의 터전은 점점 황폐해졌다. 마침내 떠밀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 무자비하게 자연을 파괴하는 너희와 자연을 벗 삼아 사는 우리들. 과연 누가 더 야만적인가?
쉬쉬... 아가야. 떨지 마라. 아직 끝난 게 아니니. 나 글레이브는 아직 결착을 짓지 않았다.
일어나 여기 탁자에 앉아라 겁쟁아. 그리고 주사위를 던져라. 니가 이기면 내가 가진 모든 골드를 주겠다. 하지만 니가 지면 너의 팔 한 짝을 가져가겠다. 링고라 했나? 너 같은 쓰레기에겐 딱 적절한 도박이 아니냐.
행여나 해서 말하는데 사기 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라. 난 비록 앞이 보이지 않지만, 육감은 그 어떤 동물보다 뛰어나니 말이야.
3편 '동전 던지기'
[ 펼치기 · 접기 ]
커다란 천막 안은 각종 공연으로 떠들썩했다. 요란한 날개 장식을 단 남자는 보이지 않는 실에 매달려 검을 휘두르며 공중에서 싸웠고, 구속당한 화염과 얼음의 정령은 흥겨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빼어난 미색과 아름다운 목소리로 마을 청년들을 온종일 홀린 인어는, 거대한 수조 속을 노닐다 가끔 수면 위로 올라와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물을 뿌렸다. 광대들은 서로의 어깨를 짚고 나란히 섰는데, 그 위로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호랑이가 어슬렁어슬렁 지나갔다. 호랑이의 눈은 광대들 건너편의 피가 떨어지는 신선한 살코기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 주인공 링고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한 손엔 '신의' 그리고 다른 손엔 '논리'라 이름 지은 쌍권총을 들고 입장했다. 또한, 그의 공연을 보조해줄 큰 모자를 쓰고 화려한 나팔바지를 입은 광대도 함께 들어왔다. 그녀는 양손에 산더미처럼 쌓은 접시를 들고 있었고, 준비가 끝나자 천막 천장을 향해 힘껏 접시를 던져 올렸다. 링고의 장전 속도는 환상적이었다. 광대가 접시를 던져올리는 족족, 순식간에 그의 총에 부서졌다.
공중에서 칼싸움과 줄타기를 하던 공연인들은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 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재촉했고, 이번에는 근육질의 거대한 덩치를 한 남자가 쉴새 없이 재잘대는 미니언들을 하나씩 머리 위로 던져 올렸다. 만약 링고가 하나라도 놓친다면 미니언들과 공연인들이 부딪혀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물론, 바로 이 점이 관중들이 더 기대하는 부분이지만. 링고는 마치 술에 취해 취권을 쓰는 사람처럼 휘청댔다. 관객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그리고 한쪽 눈을 감고 집중하고는 총알을 발사했다.
빵빵!
덩치가 던져 올리는 미니언, 그리고 광대가 던져 올리는 접시들 모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링고의 총알에 박살 났다.
아이들은 함성을 지르며 무대 앞쪽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자비심 가득한 부모들이 준 동전을 마구마구 내밀며 외쳤다.
"링고 아저씨, 링고 아저씨! 여기요 여기."
광대는 훈훈한 미소 지으며 한 아이의 손에서 동전을 수거해 갔다. 그리고 돌아서서 던져올리면 어김없이 링고의 권총이 불을 뿜었고, 이후 그녀는 떨어지는 동전을 잡아 행운아에게 돌려주었다. 동전 정 중앙에는 총알이 관통한 구멍이 선명하게 뚫려 있었다. 동전 두 개? 링고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확하게 그의 권총이 두 번 불을 뿜었고 광대는 이번에도 중앙에 구멍이 뚫린 동전 두 개를 아이들에게 돌려주었다.
대망의 마무리로 링고는 얼굴에 눈가리개를 쓰고 제자리에서 몇 번 뱅뱅 돌았다. 군중들은 더욱 긴장하여 쥐죽은 듯 조용해졌으며, 심지어 몇몇 마음이 약한 자들은 차마 보지 못하겠다는 듯 천막 밖으로 도망쳤다.
이번에는 무려 세 개의 동전이 하늘을 날았다. 거만하게 팔짱을 낀 링고는 앞이 보이지 않은 채로 순식간에 총알을 세 번 발사했고, 광대는 화려한 몸놀림으로 동전 세 개를 공중에서 낚아채 다시 돌려주었다.
동전 세 개에는 어김없이 총알구멍이 뚫려 있었고, 환한 미소를 짓는 아이들 뒤로 군중들의 우레와 같은 갈채가 울려 퍼졌다.
'대체 어떻게? 앞도 보이지 않잖아? 말도 안 돼!'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소매치기들이 열광하는 관중의 지갑을 은근슬쩍 터는 곳. 화려함과 낭만과 열정이 있던 곳. 그곳이 바로 과거 링고가 있던 공연 천막이었다.
*
주점 밖 을씨년스런 거리에는 찢어진 링고의 선전물이 가득했다. 선전물 속 링고는 두 팔이 온전한 모습이었고, 그림 밑에는 '최고의 사수'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매캐한 담배 냄새와 역겨운 술 냄새가 찌는 탁자 위로, 카드를 노려보는 도박꾼들의 형형한 눈빛이 부서졌다. 링고는 중앙에 구멍이 뚫린 동전을 집어 올리더니 말했다.
"앞면. 그럼 난 도박에서 손 씻지."
링고는 동전을 높이 던져 올렸다 다시 손바닥에 받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탁자에 쾅하고 내리찍었다. 과장되게 슬쩍 동전을 들여다본 링고는 씨익 미소 짓더니 중앙 무더기에 판돈을 추가로 던져 넣으며 외쳤다.
"나도 가지."
그리고 나눠주는 카드를 받고는 재차 동전을 던져 올렸다.
"이번에도 앞면. 그럼 난 술을 끊지."
동전이 다시 날아올랐고 링고는 받아서 슬쩍 보더니 다시 도박에 참가했다.
이날 카드는 확실히 링고의 편이 아니었다. 술병이 점점 비어갈 때 링고는 중얼거렸다.
"또 앞면. 그럼 나 싸움은 그만하고 당당한 직장에 취직하고, 예쁜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을 가질 거야. 그리고 이딴 생활은 완전히 청산하지."
훈련에는 중단이란 게 없습니다. 체육관에 가지 않아도 야전에서 몸을 가꿀 수 있는 쏘우의 훈련법을 소개합니다. 주의: 익숙해지기 전까진 절대 무리하지 마세요!
똑똑히 들어라 제군. 야전에서 건장한 근육을 유지하는 것은 자기관리를 얼마나 엄격하게 하는가와 일맥상통한다. 제군에게 쏘우의 멋진 훈련 비결을 알려주도록 하지. 상체와 하체 운동을 골고루
대구경 탄환의 빈 탄창을 모래로 가득 채워라. 훌륭한 덤벨이 된다. 자비심 없는 등 근육을 키울 때는 포탑 턱걸이를 추천하며, 떡 벌어진 어깨를 만들 때는 밀리터리 프레스를 하라.
물론 바쁘다고 하체 운동을 생략해서는 안 된다. 남자의 힘은 바로 하체에서 나오는 법! 모래를 넣은 탄창을 옆구리에 끼고서 런지를 하거나 앉았다 일어서기를 하라. 아니면 울창한 나무를 하나 꺾어 위에 미녀 둘을 올리고 스쿼트를 하는 것도 추천한다.
포탑 끌기와 밀기
포탑 밑동에 줄을 묶고 그 줄을 자신의 허리에 걸친 뒤 있는 힘껏 끌어라. 먼저 50미터를 끌고 이번엔 허리의 줄을 손에 쥐고 다시 50미터를 끌면 된다. 마무리로 포탑의 반대편으로 가서 앞으로 50미터를 밀어라. 돌아서서 적정 세트를 반복한다.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초심자는 폐타이어로 먼저 연습하는 게 좋다.)
미니언을 활용하기
이 좀생이만 한 버러지들은 들고만 있어도 운동이 된다! 큰놈 하나와 작은놈 둘을 어깨에 메라. 그리고 고강도 인터벌을 실시한다. 내킬 때는 녀석들을 땅에 패대기쳐도 좋다. 팔과 어깨 힘을 기르는 데 더할 나위 없다.
녀석들이 너덜너덜해져서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반복한다. 이후 새 녀석들도 교체한다. 폭발적인 근력을 키우려면 럭비 연습하듯 멀리 던지고 달려가서 다시 받는 것도 좋다.
훈련은 실전처럼! 평소 끊임없는 훈련이 전장에서 제군의 목숨을 구하는 법이다. 명심하도록!
2편 '교량 파괴자 쏘우'
[ 펼치기 · 접기 ]
무시무시한 용병 쏘우를 속이려 들지 마라...
이봐 시장. 당신과 나의 사소한 오해가 사람들의 관심을 끈듯하군. 다시 한 번 친절히, 차.근.차.근. 설명해 주지. 애초에 내 임무는 너희들의 정글 거주지를 털고 다니던 정체불명의 괴물을 처리하는 거였다. 일단 여기서 당신은 거짓말을 했어. 이 임무가 하루 만에 끝날 거라는 얼토당토 않는 거짓말을 말야. 어쨌든 녀석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난 조심해서 놈이 남긴 흔적을 추적했다. 녀석과는 거주지 밖 30킬로미터 지점에서 조우했지. 놈은 근처의 나무를 이용해서 크게 도약하며 무려 10미터 높이에서 날 공격했어. 놈은 마치 인간 여성과 고양이를 섞어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놈의 공격을 가까스로 피했지만 내 자랑스러운 셔츠는 양팔 부분이 찢기고 말았어. 난 총을 쏘며 대응했지만 녀석의 날카로운 손톱을 다 피해낼 수 없었어. 따라서 난 재빠르게 공중제비하며 이 반인반수 녀석이 날 장기자랑 시키기 전에 50미터 밖으로 물러났어. 이후 넓은 지역에 사정없이 제압사격을 갈겼지. 그 결과 사방 100미터 내의 나무란 나무는 모조리 아작 났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어. 어떠한 흔적도, 피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았다. 놈을 놓친 거야.
열 받은 난 드레드노트 포신에 대구경탄을 장착하고 놈의 본거지라 추정되는 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정도의 포격이었으니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이후 72시간을 넘게 기다렸고 그 고양이 인간은 폭발에 휘말려 죽었음이 분명해졌다. 난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이거지. 나도 이해한다 이거야. 도로가 파괴되고 다리가 무너져 너의 시민들이 장사하기 힘들 거란 사실을. 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이게 은밀함을 유지해야 할 임무라고 하지 않았다. 임무 달성 방법에 있어서도 어떠한 금지 사항도 없었어. 그래서 시장. 당신이 이딴 것들을 핑계로 내 보수 지급을 하지 않으려고 수작질을 부린 게, 지금 네가 나한테 멱살을 잡힌 이유다. 냉큼 당장 500골드나 그에 상응하는 할시온 수정을 뱉어내지 않으면, 멱살을 쥔 이 손이 무슨 짓을 할지 나도 몰라.
3편 '쏘우와 거대괴수'
[ 펼치기 · 접기 ]
전역하는 한 병사... 하지만 그의 싸움은 계속된다.
녀석이 수면 위로 나오기 수 시간 전부터 전에 땅이 흔들렸다. 거미줄 같은 균열이 건물의 벽과 도시의 거리를 수놓았다. 갈라진 틈 사이로는 끔찍한 냄새를 풍기는 증기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산처럼 거대한 북을 두드리는 듯한 진동은 해 질 녘까지 이어졌다. 한 병사가 시가지 방벽 밖의 골목에 기대어 서 있었다. 이제는 군대를 은퇴하고 민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그. 병사는 소지품을 모두 커다란 군용 배낭에 넣어 두었는데 거기엔 그의 쥐꼬리만 한 마지막 월급도 들어 있었다. 그가 속했던 분대는 도시로부터 한참 남쪽에서 계속 싸우고 있었다. 병사는 제대 서류를 본부로부터 승인받았고 무기와 갑옷도 반납했다. 병사 어깨 위의 부대 표식은 잦은 전투 속에 빛이 바래 흐릿해진 지 오래였다.
괴물이 끔찍한 모습을 드러내기 직전, 병사는 부두에서 고향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괴물이 집채만 한 파랑을 일으켰고 항구에 정박한 배들은 폭풍 속의 나뭇잎처럼 사정없이 흔들렸다. 정신없이 비명을 내지르는 사람들 속에 거리의 주택과 상점들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잔인한 대지는 무고한 자들을 그 시커먼 균열로 집어삼켰다.
손으로 짚은 벽이 흔들리며 무너지자 병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굉음이 근처에서 들리더니 바로 옆집의 지붕이 주저앉았다. 찬란히 빛나던 별빛은 화마의 열기 앞에 빛을 잃었다. 병사가 아무리 산전수전을 다 겪었어도 이 도시에서 몸 성히 빠져나오려면 상당한 고생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거추장스러운 군용 배낭을 버리고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바닷가에서 벗어나려고 난리도 아니었다. 병사는 날쌔게 민간인 사이로 회피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경계를 서고 시민들의 대피를 도와야 할 군대는 이미 도망가 버린 지 오래였다. 병사가 소동의 진원지로 나아갈수록 건물의 부서진 잔해와 끔찍한 몰골의 시신들이 많이 보였다. 병사는 독한 연기로 목구멍과 눈이 매캐해지자 근처 군인의 시체에서 방독면을 뺏어 썼다.
병사가 방독면을 단단히 장착하는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집채만 한 고래 하나가 담벼락을 넘어서 멀리 날아가는 게 아닌가? 순간 병사는 짐작했다. 이건 지진이 아니라고. 그의 기억 상 어떤 지진도 바다 깊숙이 사는 고래를 하늘 높이 치솟게 할 순 없었다.
병사는 최대한 높은 곳으로 기어 올라가 주변 상황을 살펴보았다. 지진과 해일로 황폐해진 땅... 도시는 한때 번창했지만 남은 것은 불타는 잔해뿐이었다. 항구의 부두는 대나무가 쪼개지듯 반으로 갈라졌고, 거친 파도가 그 틈새로 사정없이 들이닥쳤다. 더는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만큼 항구는 망가져 버렸다. 인상을 찌푸리며 이 광경을 지켜보는 병사의 눈에 특이한 것이 들어왔다. 지독한 연기로 인해 명확히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 거대한 촉수처럼 생긴 것이 정박해 있는 군함의 커다란 대포를 감싸 올리더니 시가지 쪽으로 내던지는 게 아닌가?
그리고 거대한 파도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그 자리, 꾸물거리는 끔찍한 촉수들 사이로 무시무시한 존재가 그 머리를 드러냈다.
슬픈 밤하늘은 매캐한 연무로 가득했다. 괴수를 제압하기 위해 출동한 비행선 편대는 낮게 비행하며 가지고 있는 모든 무기로 괴수를 폭격했다. 무시무시한 폭발의 굉음은 도시 외곽에서도 들릴 정도였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화가 난 괴물은 거대한 촉수들을 일제히 물 밖으로 꺼내어 개구리를 덮치는 뱀처럼,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비행선들을 낚아챘다. 이후 멀리 내팽개치자 균형을 잃어버린 비행선은 추락하는 종이비행기처럼 불타는 건물과 사정없이 충돌했다. 마치 방금 전 불쌍한 고래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추락한 비행선의 대원들은 잔해 속에서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기어 나왔다. 대원들은 부러진 사지를 이끌고 힘겹게 군복에 붙은 불을 꺼 보았지만, 날아오는 파편을 피해 황급히 머리를 숙여야 했다. 추락한 비행선의 프로펠러는 허공에서 안쓰럽게 돌아갔다. 우리의 병사는 이 모든 것을 요리조리 피하며 도시의 방위군이 구축해 놓은 임시 진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부서지지 않은 마지막 중기관총을 들어 올려 어깨에 메고 탄띠를 허리춤에 찼다. 만만의 준비를 한 병사는 도시의 가장 높은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있었다. 거대한 어둠녘 바다 괴물이. 녀석의 희번덕이는 눈알은 크기가 거의 병사의 몸집만 했다. 역겨운 악취가 올라오는 입속에는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했고, 커다란 혓바닥은 징그럽게 꿈틀댔다.
맹세코 병사는 이런 생물과 조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너무나도 끔찍하고 무시무시했지만 병사는 괴물과 당당히 마주했다. 괴물의 공격으로 파괴된 도시. 그리고 이 순간에도 속절없이 추락하는 비행선. 병사가 도망갈 곳은 없었다.
병사는 진지에서 떼 온 중기관총을 괴수의 목구멍에 조준한 뒤 대구경 탄환을 미친 듯이 퍼부었다. 기관총의 반동으로 단련된 병사의 어깨도 거의 빠질 뻔했다. 괴수는 불시의 기습에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괴성과 함께 바닷속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곧 다시 감히 자신에게 도전하는 미개한 생물체를 짓뭉개 버리려고 솟구쳤다. 이에 대항하여 병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 총신이 녹아 없어질 만큼 뜨거워질 때까지 끊임없이 총알의 비를 괴물의 뱃속에 쑤셔 넣는 것뿐이었다.
추락하는 비행선에 붙은 불이 병사의 몸을 뜨겁게 달구고, 탄환이 폭발하는 소음이 온 사방을 울렸다. 대피하던 사람들은 산처럼 거대하고 흉포한 괴수와 그에 비하면 먼지처럼 조그맣기 그지없는 한 남자의 혈투를 입을 벌리고 지켜보았다. 병사의 놀라운 화력에 압도당한 괴수는 더는 앞으로 쇄도하지 못하고 물보라를 일으키며 속절없이 뒤로 밀려났다.
병사는 실없는 미소를 흘리며 생각했다. 자신의 마지막은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다들 하듯, 이제 더는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군대로부터 터덜터덜 힘없이 전역하는 건 본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온 천지에 화재로 인한 열기와 매캐한 연무가 가득했고 괴수를 물리치더라도 이 높은 고지대에서 병사가 무사히 몸을 피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바로 그때 주변을 높게 날던 비행선 중 하나에서 동아줄이 내려왔다.
병사는 크게 웃었다. 그의 인생은 끝난 게 아니었다. 쏘우는 새롭게 얻은 무기를 어깨에 메고 억센 밧줄을 움켜쥐고는 몸을 단단히 고정했다. 비행선이 쏘우를 데리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자 마자 그가 서 있던 발판이 굉음을 내며 까마득한 지상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도시에 재앙을 불러온 괴수도 깊은 해저 깊은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때 내가 햇살의 힘을 모아 펑펑펑! 쏘아붙였지. 그러니 나쁜 녀석들이 으악으악으악! 하는 게 아니겠어? 걔네들 눈도 못 뜨고, 서로 머리 쾅쾅 박아대고 난리도 아니었어. 뒤엉켜서 그 짧달 막한 다리를 버둥대는데 어찌나 우습던지!" 페탈이 통통한 주먹을 꼭 쥐고 열변을 토하자, 뮤니언들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헤 벌린 채 넋을 놓고 그녀의 무용담을 들었다.
페탈과 뮤니언들은 거대한 고대 등나무 밑에 있었다. 이 등나무는 하도 커서 숲의 형제들은 '고대 거인의 지팡이'라 부르기도 했다. 희극의 한 장면처럼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는 페탈의 다음 말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 괴물들은 덩치가 딥따만해! 너희 셋이 물구나무를 타도 더 크단 말야. 고작 이렇게 햇살을 쏘는 것만으로는 녀석들을 모두 소탕할 수 없어."
이곳은 강력한 숲의 군대가 있는 곳. 은밀하게 침을 쏘는 벌레, 맹독 가시를 품은 꽃잎, 한 번 잡으면 놓지 않는 도깨비 풀, 강한 소화액을 내뿜는 끈끈이주걱 등... 바로 숲의순찰대 페탈의 정원이다. 저 멀리서, 숲의 수호자들이 천천히 정원 주위를 순찰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와중에, 뮤니언 세 마리는 페탈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우릴 데려가! 우리가 나쁜 녀석들을 먹어치울게. 숲의 마법으로 우릴 가시덤불 씨앗으로 바꿔. 이후 밤꽃잎 주머니에 넣어가면 되잖아."
"지난번 일을 잊은 거야? 실패했었잖아." 페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녀의 더듬이가 아래로 축 처졌다.
"더 열심히 해보는 거야!"
"그래. 숲의 기운을 모두 모아서!"
뮤니언들의 격려에 페탈은 다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어찌나 진지한지 그녀의 이마에는 '임금 왕'자 모양의 굵은 주름이 새겨졌다. 햇살과 숲의 힘을 모으되, 이번은 더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이윽고 그녀의 양손에 힘이 모이며 소용돌이치기 시작하자 뮤니언들은 큰 소리로 꽥꽥대며 응원했다. 힘이 너무 커져서 더는 버틸 수 없을 때, 페탈은 솜털 날리듯 부드럽게 양팔을 뻗으며 미니언들에게 그 힘을 날렸다. 그리고...
펑! 펑! 펑!
페탈이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자 뮤니언 세 마리는 온데간데없고, 타조 알 만한 가시덤불 씨앗 세 개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꺄하하하! 성공이야 성공!"
기쁨에 넘쳐 씨앗들을 발판 삼아 콩콩 뛰어다니던, 페탈의 뇌리를 스치는 앙큼한 생각.
'뮤니언들을 씨앗으로 만들 때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던 그 폭발력... 이걸로 적을 제압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를 잘 사용하면 괴물들을 일거에 소탕함은 물론, 난 최고의 순찰대원이 되는 거야!'
흥분한 페탈은 씨앗에 다시 햇살을 내리쬐어 뮤니언들을 깨웠다.
퐁! 퐁! 퐁!
씨앗으로부터 다시 태어난 어리둥절한 뮤니언 세 마리.
"무슨 일이 있었지?" "야 너 방귀 꼈지!" "무슨 헛소리야 그건 너잖아 방구똥꾸야!" "뭐래 이 바보가!" "말 다했냐?"
왁자지껄한 뮤니언들의 귀에 페탈의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곧 등나무 귀퉁이에서 그녀의 연꽃 옥좌가 통통 튀며 나타났다.
"후후. 이젠 우린 준비가 되었어. 악당들을 물리치자구. 가자 얘들아!"
[ 펼치기 · 접기 ]
어둠사냥꾼 왕의지시로 이뤄진 2차 탐험 보고서
찬란한 별빛의 군주이자, 두 달의 지배자이며, 깊은 밤의 수호자이신 위대한 노팅엄 파리지옥 3세시여! 이번 숲의순찰대 영역 정탐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총 18종의 다양한 요정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곧 이들의 일생은 - 알부터 유충, 성충에 이를 때까지 - 자세한 연구를 거쳐 서류로 기록될 것입니다. 일반 요정 외에도 뿔이 달린 일꾼 계급 4종도 추가로 사로잡았습니다. 이들은 현재 제 연구소에 보유중인 다른 토착종들과 번식도 가능할 것입니다. (자세한 모습은 동봉한 그림 참조)
일전의 정탐과 달리 이번은 적진 깊숙이 침투하는 것이기에, 매우 강력한 적들을 만날 것이라 긴장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그 이상의 놀라운 물건을 발견했죠. 바로 방사능을 내뿜는 신기한 수정들입니다. 이 수정들의 영향인지, 숲의 생태계는 매우 급격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고작 3년의 세월이 지났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성장 속도와 진화를 보였습니다. 이는 저의 어떠한 연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현상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얍삽한 숲의순찰대 녀석들이 이 수정의 힘을 오용하여 더 강력한 군대를 키워내고 있다는 겁니다. 독침을 쏘는 요정, 부식성 산을 내뿜는 끈끈이, 그리고 지축을 흔드는 폭발을 일으키는 벌레들... 전하께서 거대 쇠똥구리 기마대 육성에 기 백 년이 걸린는 줄로 압니다. 그런데 이 미개한 숲의 버러지들이 편법으로 짧은 시간 내에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겁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쇠똥구리 기마대에 대응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눈알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통통 튀는 기괴한 탈것도 생산하고 있습니다.
감히 건의드리는데 전하, 이 방사능 수정들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합니다. 이번 정탐으로 이를 알아내지 못했다면 큰일 났을 겁니다. 전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아 물론 자금 지원도 넉넉해야 하죠) 제 연구실에서 수정의 비밀과 활용 방안을 더 탐구해 보겠습니다. 숲의순찰대의 급격한 영토 확장을 조사하러 곧 정탐을 다시 나갈 예정이니 견본 확보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정탐 과정에서 전하의 충성스런 병사 일부가 명을 달리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조그마한 희생에 불과합니다. 모름지기 과학의 진보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전하의 아낌없는 지원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보고서를 끝마치겠습니다.
전하의 충복
곤충학자 플리트윅 "플리커" 스팅스플래터 4세 드림
2편 '뮤니언들의 수다'
2편 '어둠사냥꾼과 숲의 순찰대'
[ 펼치기 · 접기 ]
페탈의 뮤니언들이 자신의 폭발 실력을 자랑하는데...
출동! 모두 출동! 드디어 페탈의 명령이 떨어졌어. 아 그런데 너희들, 덩치만 큰 멍청한 숲의 수호자들은 못 와. 너넨 여기 남아서 숲의순찰대 마을을 지켜야 해. 너넨 그렇게 큰 키를 하고서도 마을 밖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지? 숲은 상상보다 훨씬 거대하고, 진귀한 씨앗이랑 새싹이 정말 많아. 그리고 모든 게 숲의순찰대 마을처럼 땅에서 자라나는 게 아냐. 반짝반짝 마법을 쓰는 생명체도 있고, 빛나는 수정 조각들도 있어. 수정 조각을 땅에 심으면, 숲의 형제들이 훨씬 빨리 자라고 힘도 강해진다구!
물론, 악당들도 있지. 근데 얘네 완소야!
웬 줄 알아? 페탈이 이것들 먹어도 된다고 했거든. 냠냠냠 우그적 우그적! 우리가 날카로운 이빨로 깨물깨물하면, 적들은 붉은 물감을 푸슉푸슉 뿌리며 쓰러져. 이후 악당들을 배부르게 먹고 가시덤불에서 꿀잠을 자는 거야. 그리고 페탈이 던지는 햇살도 악당들에게는 치명적이란 말씀!
뭐? 못 믿겠다고? 해님은 저 하늘 높이 있으니까, 페탈이 햇살을 못 쏜다고? 내가 이 눈으로 직접 봤다니까! 페탈의 따끔한 햇살을 맞은 적들은 도망가기 바빴어. 실제로 그녀의 실력을 한 번 보면 너네도 감탄하기 바쁠걸?
그리고 우리는 너네와 달리 팡팡 터질 수도 있다고. 엄청엄청 강력해!
우리가 폭발하면 적은 아주 잘 구워지지. 그리고 페탈이 우릴 씨앗에서 다시 일으켜 세워줘.
페탈은 최고의 숲의순찰대원이야. 여기에 반대하는 녀석은 바보성게해삼말미잘. 그녀는 언젠가 너네보다 더 큰, 위대한 무기도 창조할 수도 있을 거야.
바보 수호자들. 너흰 그냥 여기 있어. 우리가 악당들을 냠냠할 동안 집 잘 지키라구.
[ 펼치기 · 접기 ]
할시온 협곡에서 멀지 않은 한 연구실. 플리트윅 '플리커' 스팅스플레터 박사가 전쟁 무기를 만드는데...
"가만히 좀 있어 에텔! 이 무례한 녀석 같으니라고." 플리커가 복슬복슬한 귀를 쫑긋하며 꾸짖었다. "헤헤. 난 귓속이 마음에 들어. 따뜻하고. 포근하고 말야. 그리고 나 깡다구가 있는 거지 무례한 게 아냐. 당신이 가르쳐 줬는걸." 그의 귀에서 조그만 요정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쫑알댔다.
"예의를 모른다고 했지 근성이 없다고 한 게 아니잖아." 플리커가 실험대에 요정을 또 하나 올려놓으며 투덜댔다.
"지금 네놈이 하는 짓이 딱 그짝이지. 이놈의 귀 간지럽히는 짓거릴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다른 요정들과 함께 유리병에 가둘 거야. 그리고 여기 실험대에 위에 송곳으로 콱 꽂아버릴 테다!" 플리커가 요정들이 갇힌 유리병으로 향하며 야단쳤다.
플리커의 연구실에는 온갖 종류의 요정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장대한 보랏빛 날개를 한 요정과 뾰로통한 삼각형 얼굴을 한 요정이 서로를 노려보는 와중에, 자그마한 체구의 요정은 자신의 발가락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었다. 한쪽에는 성질이 급한 수정 날개의 요정이 유리병의 코르크 마개를 열려고 낑낑대고 있었다.
그리고 유리병보다 더 큰 어항 모양의 전시실에는 바람의 요정 루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유리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었고, 그 외에도 수많은 요정들과 곤충들이 벽에 핀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들 밑에는 플리커가 일일이 조사하고 분류한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통통한 엉덩이가 자랑인 장난꾸러기 요정 에텔은, 갇힌 요정들을 향해 혓바닥을 쏘옥 내밀더니, 딱정벌레 우리 쪽으로 휙 날아갔다. 그녀의 송곳니는 맛난 밀웜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고, 거대한 황금빛 날개는 부드럽게 펄럭였다. 그녀가 엉덩이로 딱정벌레의 등껍질에 털썩 내려앉자 딱정벌레는 신경질적으로 뒤척였다. 우리에는 다양한 크기의 딱정벌레들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중 일부는 숲의정찰대의 탈 것 '뮤글'만큼 컸다. 에텔은 자신이 올라탄 녀석의 뿔과 가시를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이봐. 왠지 딱정벌레들의 알이 지난 몇 개월간 점점 커지는 것 같지 않아?"
"훌륭한 관찰력이군!" 플리커가 감탄했다. 그는 줄무늬 휘파람 요정을 굽어보더니 한쪽 날개를 집게로 펼치고 조심스레 관찰했다. "딱정벌레들은 내가 고안한 새 무기를 위해 꼭 필요한 이동수단이야. 다만, 크기가 좀 작을 뿐이지. 하지만 숲의순찰대 영역에서 발견한 이 기괴한 수정 조각을 이용하면, 훨씬 크게 자라게 만들 수 있어. 듣고 있는 거냐 에텔!"
"이 풍선껌 기계는 뭐하는 거야?" 에텔이 플리커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벽에 그려진 요상한 기계 장치를 보며 말했다.
"이건 풍선껌 기계가 아니고 요정 발사기야." 플리커가 부드러운 솔로 요정의 날개를 조심스레 쓰다듬자 찬란한 요정 가루가 떨어졌다. 하지만 그 순간 화아악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타올랐고 플리커의 두 뺨에 난 털도 그슬렸다.
"너, 너... 루시. 내가 요정 가루 모을 때는 얌전히 있으라고 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하니! 안 그러면 우리 어둠사냥꾼들은 숲의순찰대를 무찌를 무기를 개발할 수 없다고." 그가 줄무늬 요정에게 욕설을 내뱉었지만 요정은 콧방귀를 꼈다.
"그런데 요정들을 발사해서 어디다 쓰려고?" 에텔이 물었다.
"요정들은 매우 강력하지. 따끔한 독침도 있고, 적을 질식시키는 가루, 그리고 빛을 조작하여 최면을 걸 수도 있어. 일단 적 진영에 성공적으로 투입하기만 하면, 저 사악한 숲의순찰대를 쓸어버릴 수 있을 거야. 연놈들을 벌써 몇 마리나 처리했다고!" 플리커가 자랑스럽게 외쳤다.
에텔은 방금 플리커의 무서운 협박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 딱정벌레 등에서 날아올라 다시 플리커의 귓속으로 들어갔다.
"근데 대체 왜 어둠사냥꾼은 숲의순찰대와 싸우는 거야?"
"숲의순찰대는 사악하지 그지없는 식물로부터 유래한 끔찍한 종족이야. 대낮에 주로 활동하는 뼛속까지 타락한 녀석들이지. 이놈들은 광합성의 힘으로 우리처럼 격식 있는 고요한 밤의 생명체들을 말살하려고 한다고! 셋 셀 동안 당장 내 귀에서 튀어나와." 이번에는 타오르지 않게 매우 조심스레 요정 가루를 쓸어담으며 플리커가 성질 냈다.
"그럼 그 싸움을 처음 시작한 건 누구야?" 에텔은 플리커의 짜증은 가볍게 무시하고, 복슬복슬한 두 귀를 마치 담요처럼 끌어안으며 말했다.
"나는 아냐. 사실 아무도 몰라. 그들과 우리 사이에 얽힌 이야기는 깊고, 어둡고, 복잡하지. 이 세상에 태양이 비추고 달이 뜨던 그 태초부터 우린 싸워왔을지도..."
에텔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새근새근 잠자는 숨소리가 연구실에 퍼져나갔다.
"정탐을 한 번 더 나가야 해. 더 많은 수정을 확보해야 위대한 어둠이 빛을 몰아낼 수 있을 거야." 에텔을 깨우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플리커가 말했다.
쯧쯧... 야생에 던져놓으면 하루도 못 갈 녀석들. 야망과 잔꾀로 스스로를 갉아먹는 존재들. 그게 바로 인간이란 족속이지. 수년 전, 인간들이 그랑고르 영토에서 수정을 찾느라 언덕을 허무느니, 땅에 구멍을 파느니 야단법석을 떨었어. 용감한 일족의 전사들이 모두 처단했지만, 아이들은 살려두었지. 비교적 덜 위험한 아이들을 통해 그들을 이해해보려 했거든. 난 인간 암컷을 하나 맡아 이름을 코쉬카라 지었어. 하지만 어찌나 연약한지! 내가 보모처럼 달라붙어 보호해도 얘가 야생에서 살아남는 건 요원해 보였어. 수풀에 숨을 줄도 몰라, 손톱을 세울 줄도 몰라, 이빨로 깨물 줄도 몰라... 어휴, 짐덩이가 따로 없지!
다행히 배우는 건 빠르더라고. 하긴, 지능이라도 높아야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지. 빠른 두뇌 회전으로 먹잇감보다 몇 수 앞을 내다보는 게 코쉬카의 사냥 방식이야. 동선을 예측하고 멀리서 순식간에 덮쳐 숨통을 끊어놓지. 세월이 지나니 파리 한 마리 잡지 못할 것 같던 소녀도 어엿한 사냥꾼으로 성장하더라고. 그리고 그랑고르 장인이 특별 제작한 발톱은, 그녀에게 날개를 달아주었어.
이제 코쉬카는 더 넓은 세상을 탐험하러 날 떠났어. 어쩌면 본인 종족을 찾으러 간 것일 수도... 얘가 여행하며 남긴 이야기가 가끔 그랑고르 마을에도 들려오는데, 우린 그 때마다 배꼽을 잡지. 천방지축 반인반수 고양이의 정글 탐험. 이 얼마나 재밌는 화제야! 코쉬카의 세상에서는 모든 게 놀이지. 하지만 조심하라고. 그녀와 잘못 놀면 날카로운 발톱에 크게 다칠 수 있으니까.
2편 '지뢰를 발견한 코쉬카'
[ 펼치기 · 접기 ]
너클스가 단장의 마차 밖으로 마을 꼬마를 집어 던졌다. 단장의 심기를 거스르는 멍청한 짓 따윈 하지 않는 우리 카니발 꼬마들은 그저 쭈그려 앉아 깔깔거릴 뿐이었다. "저 멍청이 말야, 서커스단에 들어오게 될까?"
"저글링이나 줄타기를 하게 되려나?"
"할 줄 아는 게 있겠어?"
볼품없고 말라비틀어진 마을 소년. 덩치도 조그맣고 대략 여덟 살쯤 되었을까. 흘러내리는 콧물을 훌쩍이며 우리 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도 할 줄 아는 게 있어." 그렇게 내뱉고는 손을 활짝 펼쳐 보였다. 펼친 손바닥 위에 너클스의 손목 시계가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어슴푸레 빛나는 시계... 우리가 저 너클즈의 손목 시계를 가지고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깊게 생각해 보았다.
"좋아." 우리가 말했다. "자랑질은 할 수 있겠네."
우린 고아를 데려다가 변두리로 갔다. 어떤 괴짜가 작은 천막과 마차를 전시해 놓은 그곳으로. 우리 아이들은 오늘 시내에서 코흘리개 애들에게 폭죽을 팔거나 어른들 지갑을 털지 않고, 내일 있을 홍등 축제를 밝힐 홍등이 늘어선 거리에서 여자 아이들과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마을 꼬마들은 이미 새해를 맞이하는 거리에 줄을 죽 서 있었다. 바로 흥분의 도가니, 서커스 장에서 최고의 공연을 선보일 것인데다가 마을 밖에서 불꽃놀이 장비를 가지고 있어도 잡혀가지 않으니 말이다.
"야, 서커스 공연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말이지, 겉보기에 그럴 듯해 보여야 하는 거야." 우린 고아에게 주지시켰다.
"그리고 겉보기에 그럴듯하려면 첫째, 관객을 지루하게 하지 말 것. 둘째, 무대에선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만을 말할 것." 그 신성한 말을 읊으면서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원반이 무대에 등장했다. 우리의 대장은 원반의 중앙에 꼬리를 감고 그 작은 마을 꼬마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우리 아이들은 대장의 도착을,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오조! 오조! 오조!"
"언젠가 내가 배가 고팠을 때 말이지!" 오조는 마을 꼬마의 얼굴에 대고 소리쳤다. "너무 배가 고팠지. 태양마저 먹음직스러운 복숭아같이 보였을 정도니까 말이야. 그래서 난 높이 펄쩍 뛰어올라 하늘에서 태양을 땄지. 그러고 나니 모든 게 어둠에 휩싸였단 말이야. 으스스한 분위기에 놀란 난 태양을 다시 하늘로 던져 버렸지!" 오조는 원반이 바닥에 멈추는 동안 뛰어올라 마을 꼬마 옆으로 와 몸을 수그리며 말했다. "네 차례다."
마을 꼬마는 아랫입술을 물더니 "난... 음... 어... 시계를 훔..."
"지루한데..." 우리 중 하나가 외쳤다. 또 외쳤다. 그러더니 이젠 모두 목소리를 함께하여 외쳤다. 어눌한 더듬거리는 말따위 들을 시간이 있을쏘냐!"지루해!”
"우리 부모님은 거인이셨지." 오조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 아이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조는 최고의 서커스꾼이 아니던가. "큰 봉우리보다 더 거대했지. 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원숭이 새끼였다 이거야. 근데 어느 날 아침 아버지가 방귀를 끼셨는데 마을이 통째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지." 우리 아이들이 피식 웃으니 오조는 잠시 말을 멈췄다. "우린 운이 나빴지. 그 마을에 살던 여마법사가 너무 화가 나서 날 이 정도까지 작아지게 만드는 마법을 부렸거든. 우리 어머니는 이렇게 작아진 날 밟지 않고서는 날 더 돌보지 못하셨어. 그래서 어머니는 날 서커스단에 맡긴 거란다." 우리의 대장, 오조의 곱슬곱슬한 머리가 슬픔에 떨려 보였다. 우리 아이들도 너무 슬펐다. "하지만 어머니는 결혼 반지를 내게 남기셨지. " 오조가 휘파람을 부니 원반이 떠올랐다.
"우와..." 우리 아이들을 박수를 치며 넋을 읽고 쳐다봤다.
"우리 아버지는 꽁무니를 뺐고 우리 엄마는 남의 집이나 치워주고 근근이 살아가고 있지." 마을 고아 녀석이 무심코 말을 던졌다.
"오, 제법인데?" 오조가 길고도 긴 팔 아래로 원반을 뱅그르르 돌리며 고아 주의를 빙빙 돌더니 씨익 웃었다. my 아버지는 국왕의 애완동물이었다. 국왕은 아들을 너무나도 갈망했었지. 그래서 여왕은 우리 아버지의 씨로 아이를 가졌지. 국왕이 알지 못하길 바라면서 말이야."
우린 모두 깜짝 놀랐지만 고아 녀석은 뚱한 표정으로 툭 말을 던졌다. "부모님이 거인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내가 그랬나?" 오조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조의 묘기에 가까운 원반 돌리기에 우리 아이들 모두는 혼이 나간 듯 그 멋진 광경만 바라봤다. "사실은 말이야. 난 부모님이 없어. 난 마법의 바나나에서 태어났거든. 나오면서 그 바나나를 다 먹어버리고는 혼자 나무에서 뛰어내렸지."
"다 거짓말이야." 마을 꼬마가 소리쳤다.
마을 꼬마는 그 말 한마디에 다른 아이들의 손에 밀쳐 넘어졌다. "모두 다 사실이야, 이 멍충아!" 우리 아이들은 소리를 질렀고 들고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바로 그때 오조가 원반을 날리자 겁이 난 아이는 지저분한 얼굴을 바닥에 대고는 엎드렸다. 떨고 있는 아이 곁으로 고개를 기울인 채 다가간 오조는 정말 조용히 무언가를 속삭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우리 중 가장 오조와 가까이에 있던 아이가 귀를 기울였다.
"네 엄마가 걱정하니까 집에 가라."
"그래, 집에 가라니까, 엄마한테 가!" 우리도 따라 말했다. 그리고는 우리 아이들은 팔에 그 마을 아이를 꿰차고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이 모습을 본 오조는 나서지 않았다. 그저 등을 들어 원반 안쪽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는 등을 손가락과 발가락에 걸고 뱅글뱅글 돌렸다. 빙글 빙글... 등불이 빨간 빛을 띈 원으로 그려질 때까지...
[ 펼치기 · 접기 ]
내 거야! 찾는 사람이 임자! 이건 되게 둥글어. 어떻게 알았냐고? 딱 보면 둥그니까! 거기, 꽃을 타고 있는 너. 그 애완동물 엄청 귀엽다! 걔네 사탕 좋아하니? 달콤한 미니언 사탕이 내 주머니에 가득해! 참 근데 이게 뭔 줄 알아? 저기 언덕배기에서 찾았어. 어라, 어디 가는 거야. 돌아와! 아하, 지금 술래잡기하자는 거구나. 짠 잡았지롱! 난 세상에서 제일 빨라. 아얏! 뜨거워, 아프다구. 알았어, 알았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 뭐.
안녕. 그 반짝이는 검 마음에 든다. 난 검 대신 날카로운 손톱이 있는데 보여? 그런데 너 되게 심술궂게 생겼다. 인생은 긍정적으로 살아야 하는 거야. 자 웃어봐. 김치! 참,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이게 뭔 줄 알아? 방금 내가 주웠어. 엄청 무겁고 둥근... 어라 여기 단추가 있네? 눌러볼까.. 앗 어디 가? 돌아오라고!
와 정말 멋진 날개야. 누가 만들어 줬어? 나도 달고 싶어. 하늘 좀 날아보게 벗어주지 않으련? 히익. 뜨거워. 멈춰! 어째서 오늘은 죄다 불타는 녀석만 있는 거야. 난 그저 새 장난감이 뭔지 알고 싶을 뿐인데... 앗, 도망가는 거야? 치사해! 새처럼 날아가면 나보고 어떻게 잡으란 말이야.
"거기 서, 오조!" 오조의 원반에서 파란 불꽃이 미친 듯이 퍽퍽 튀며 할렘가 한복판의 자갈길을 수놓았다. 코쉬카는 나비같이 하늘거리는 아름다운 빨간 옷깃을 날리며 황급히 오조를 뒤쫓았다. 홍등의 매력적인 불빛이 우중충한 거리를 비추고 있었고, 종이로 만든 각양각색의 축제 장식은 허름한 선술집 창틀을 꾸미고 있었다. 뱅글뱅글 돌던 오조는 이윽고 성문 근처의 미니언 우리 앞에 멈췄다. "내가 이겼다!" 오조가 환호했다. 그 모습을 본 미니언들은 박수를 쳤다.
하지만 오조를 따라잡은 코쉬카는 한심하다는 듯 그의 코를 꼬집었다.
"원반 타고 달린 주제에 어디서 유세야?"
코쉬카의 손가락을 가볍게 뿌리친 오조는 꼬리를 흔들며 근처의 감귤 울타리 위에 쭈그리고 앉았다.
"으하하. 원반 핑계는 안 통한다고! 내가 너보다 빠르고 더 멀리 뛴다는 거 그만 인정하시지."
오조의 비아냥에 코쉬카도 울타리로 폴짝 뛰어올랐다
"헛소리. 이 몸보다 더 멀리 뛰는 녀석은 없거든? 원숭이 주제에 어디서 약을 팔아!"
"나도 할 수 있거든? 한 번만 펄쩍하면 이 도시 전체를 가로지를 수 있어. 여기 이 미니언들 다 합쳐도 내가 더 쌔. 내 원반은 두 마리의 코-뀌리도 거뜬히 처치한다고. 어디 한 번 덤벼봐." 오조가 울타리 위에서 호언장담했다.
"코-뀌리 방귀 뀌는 소리하네." 코쉬카가 오조의 자랑을 한 귀로 흘리며 말했다. 어느새 미니언 우리를 빠져나온 미니언들이, 들창코를 벌름이며 코쉬카의 손에 들린 빨간 봉투를 가지려 모여들었다.
"이봐, 싸우지들 말라고. 열어 보는 건 구석에 가서 열어!" 서로 깨물려는 미니언을 말리며 코쉬카가 투덜댔다. 일부 미니언은 봉투 속에서 반짝이는 동전이 나오자 그걸 꿀꺽 삼켜버렸다.
"그것뿐이랴! 난 뭐든 변신할 수 있지롱. 뭐로 변했게!" 오조가 울타리 위를 따라 사뿐사뿐 걸으며 고양이 울음소리를 냈다.
유치한 오조의 모습에 코쉬카가 킥킥댔다.
"뭐 별거 아니네! 난 요조숙녀처럼 걸을 수 있어." 그녀는 두 발로 일어서더니 턱을 치켜 들고는 오만하게 걸음을 옮겼다.
"날 좀 봐. 공주님 같지? 흐응~ 전 땅콩버터를 좋아해요~" 코쉬카가 앵앵거리는 목소리로 다소곳이 말했다.
"난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 오조가 소리치더니 코쉬카에게 큰 숨을 후 내뿜었다.
코쉬카는 마치 돌풍에 당한 듯 휘청거리는 흉내를 냈다.
"우와 멋진데? 그럼 난 비를 내려주겠어!" 준비 동작과 함께 그녀가 혀를 길게 빼더니 오조에게 침을 튀기기 시작했다.
"헷 그럼 난 무지개 반사! 그 무엇도 이 원반을 넘어올 순 없다." 오조가 제때 물러나더니 원반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한때는 나도 모닥불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시원한 밤공기 사이로 모닥불의 뜨거운 불똥이 튀면 깜짝 놀랐던 기억. 베어 물면 풍부한 육즙이 입안 가득 퍼지던 신선한 고기와 달콤한 과일들. 그리고 힘차게 뛰던 내 심장의 고동... 아아, 그 언제적 기억이던가. 참으로 오래되었구나. 한때의 즐거웠던 기억은 죽지 못한 망령처럼 내 썩어 문드러진 머릿속을 괴롭힌다. 누구에게 배웠는지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난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삭아버린 내 육신이 아닌 나의 뼈에 기억하고 있다. 커다란 검을 휘두르는 방법, 치열한 전투를 지휘하는 방법, 파도를 가르며 노를 젓는 방법, 그리고 세찬 바람을 헤치며 닻을 다루는 방법들까지. 하지만 가장 소중한 목숨을 잃어버린 지금,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랴.
형제들과 함께했던 축배의 즐거움. 사랑했던 여인의 부드러운 살결. 그녀의 머리칼에서 나던 향기...
하지만 이제 남은 건 이 지독한 고통뿐이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기나긴 날을 이 저주받은 육신 속에 갇혀 괴로워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갈구하는 구원이 할시온 협곡에 없다면 또 수많은 세월을 고통 속에서 인내해야겠지.
난 영혼의 안식을 원한다. 하지만 그 충만함은 오지 않는다. 이 버러지 같은 삶에 평화가 찾아올까...
내 가슴을 찢어놓은 저주받을 연옥도를 빼내고, 내 영혼을 구원할 한 줄기 희망을 찾아, 그 등불을 향해 말라붙어버린 차가운 손으로 난 노를 젓는다. 세찬 파도를 헤치며...
2편 '크럴, 고문에서 살아남은 자'
[ 펼치기 · 접기 ]
크럴의 잔인함을 목격한 병사의 이야기...
그곳에... 그곳에 가지 말게. 난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 이 세상에 그런 생물은 없다네. 사람의 형체를 하되 단 한 줌의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 괴물... 어마어마하게 큰 칼을 가슴팍에 꽂아놓은 무시무시한 모습! 믿을 수 없게도 녀석은 그 창백한 빛을 내뿜는 검에 꿰뚫리고도 돌아다닐 수 있다네. 난 그놈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 수풀로 도망쳤어. 하지만 말이야, 이후 고통이 스멀스멀 온몸으로 퍼졌다네. 내 피부와 근육을 뚫고 뼈까지... 팔과 다리, 그리고 배를 가리지 않고 내 육신은 비명을 질러댔어. 마치 누가 목구멍을 잡아 뜯는 것 같았다네. 그리고 수풀 속에 엎드린 내 눈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지. 미니언들이 비명을 지르며 녹아내리기 시작했어. 폭발처럼 퍼져나가는 암흑의 기운 앞에 미니언도 실력 있는 전사들도 헛되이 스러져 갔어. 그 무시무시한 광경을 보며 공포와 고통 속에서 난 살려달라고 기도했지. 도살장의 소처럼 벌벌 떨며 말이야.
그리고... 칠흑 같은 어둠, 소름 끼치는 그림자 속에서 녀석이 홀연히 나타났다네. 썩어버린 입으로 죽음의 함성을 내지르면서. 아아. 정말 끔찍한 소리였다네. 녀석의 회백색 눈에는 증오의 불길이 넘실대고 있었어. 자넨 날 믿지 않는군. 하지만 그게 사실이야. 누구든 그 악령과 마주치면 살아남을 수 없다네.
녀석은 고통 속에서 비비적대는 미니언과 전사들을 산채로 찢어버렸어. 한 차례 공포가 휩쓸고 간 자리엔 산산조각이 난 육편과 내장 조각만이 흩어져 있었지. 놈이 사라지고 난 뒤, 난 두려움에 벌벌 떨며 기어서 겨우 이곳까지 도망쳤다네. 경고하지. 조심하게. 그가 자넬 찾아올 거야.
그럼 이제... 그만 날 죽여 주시게.
3편 '내가 찾는 건...'
[ 펼치기 · 접기 ]
희망을 갈구하는 그의 여정을 함께하세요.
"어서 해 봐!" 살아남은 괴물이 덤불과 등나무가 반쯤 자란 포탑의 둥근 강철 입구에 고함을 질렀다. "내 몸에 구멍 하나 내보라고! 날 날려버리란 말이야!" 먹히면 좋을 텐데...
포탑에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그는 방금 전에 터진 폭발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누군가 또 장전 중이겠지... 누군가 암석 철옹성이었던 이 난장판을 지나 포탑 아래 관문에 미니언들을 불러들이고 있겠지... 그 너머에 누군가 그가 찾는 걸 가지고 있겠지.
거의 다 됐다...
크럴은 허벅지에서 전해지는 저릿한 마력의 통증을 달래며 왼쪽 다리를 절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이제 세상을 잃었다. 소환의 잔내가 암석을 뒤덮을 정도로 진동해 이가 갈릴 정도였다. 미니언들이 더 오는 것이리라. 더러운 잡종들, 그저 싸울 줄만 아는 것들. 크럴은 찌릿한 다리를 두드리며 통증을 가시게 하면서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이전 존재에게서 비롯된 습관이리라. 공기가 새어나와 차디 찬 강철이 옥죄인 가슴팍 파인 상처 사이로 흘러들어 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고통스러웠지만 크럴은 세차게 달렸다. 멍청한 데다가 거대한 미니언을 덥석 잡아 재빨리 짓눌러 버리고는 고통을 물리쳤다. 또 고통을 물리치고 물리치길 반복했다... 미니언의 뱃대지를 찢어놓는 기분 그 하나만 괜찮았다. 매 순간 두려움을 자극하는 처참함에서 비롯된 혼란스러운 기분이 그를 무너뜨렸다. 미니언들의 어두운 기운이 그의 손에서 미끈거리는 듯했다. 미니언들의 배때기는 거미줄같이 흩어지고, 다리는 파리 날개처럼 떨어져 나갔다. 크럴은 미니언들의 낯짝에 고함을 질렀다. 침이 사방에 튀었다. 그의 광기 어린 조소가 전장에 메아리쳤다. 미니언들의 영혼은 죽어 나자빠진 몸뚱어리에서 빠져나가 크럴의 영혼을 채웠다. 크럴의 유일한 욕구를 채워준 것이다.
그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피가 튀고 처절한 고통의 울부짖음이 사방에 퍼졌다. 크럴의 날카로운 손톱과 이빨에 한때 살아 숨쉬던 생물이 뜯겨 나갔다. 그 순간 크럴은 요새의 폐허 꼭대기에 서 있는 그녀를 보았다. 인간의 형상을 한, 키가 큰 그녀는 아침 햇살처럼 싱그러웠다. 암석 틈 사이에 검 한 자루를 묻어둔 그녀의 눈은 무표정했다. 그의 얼굴엔 어울리지 않는 화색이 돌았다.
"어이, 예쁜이!" 그가 그녀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암석 사이에 끼워 놓은 검 한 자루를 천천히 꺼내들었다. 검신에서 빛이 환하게 퍼져 나왔다.
"그거론 날 못 막을 텐데!" 크럴이 낮게 응수했다. "지금 도망치라고 내가 따라가 줄 테니... 그 검신 박살 내기 전에 말이야."
그녀는 검을 정면으로 겨누고 뛰어올라 크럴을 세차게 밀어붙였다. 마치 벌떼처럼 마력의 울림이 그녀를 감쌌다. 그녀는 고도의 훈련된 전사였다. 한때 크럴은 그녀를 존경했었지 않은가. 그녀는 몇 차례 검을 휘두르며 반쯤 죽은 그의 살덩이를 공격했다. 크럴은 악마의 숨소리를 거칠게 내쉬며 그녀를 공격했지만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그저 그녀의 공격을 열심히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검을 거꾸로 잡더니 검자루로 크럴을 세차게 내리쳤다. 이때다. 크럴은 고통에 고함을 지르며 거리를 좁히려 그녀에게 돌진했다. 크럴의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목덜미를 노렸고 그녀는 용맹의 외침을 내질렀지만 허사였다.
"예쁜 것 같으니." 크럴은 꿈틀대는 그녀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리곤 그는 쨍강 소리를 내고 돌덩이에 떨어진 그녀의 검을 멀리 차 버렸다. 검 맛은 충분히 보지 않았던가. 그는 그녀의 목덜미를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마지막 숨결은 날아가 크럴에게 세어 들어갔다. 크럴은 쓰러진 그녀의 몸뚱어리를 넘어 포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의 다 됐다...
포탑으로 가는 그를 막을 자는 없었다. 포탑에 화약과 마력을 채워줄 누군가도, 두툼한 목덜미를 가진 잡종들을 소환할 누군가도 없었다. 그의 오른쪽 발은 가는 길에 핏 발자국을 남겼고, 그의 왼쪽 다리에 붙은 미니언들의 찌끄레기는 관문을 통해 요새 넘어 우물까지 이어졌다.
생명을 잃은 그 우물까지...
한때 언젠가 이 우물은 수정의 힘을 채워주곤 했었다. 언젠가 영웅들이 이 우물을 지키곤 했었다. 언젠가 크럴도 한때 이곳에서 구원을 찾곤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우물은 비어 있었다. 그저 부서진 수정 조각만이 있을 뿐 우물은 비어 있었다. 지켜낼 가치가 있는 것이라곤 찾기가 힘들 정도로...
희망이 사라진 세계가 그에게 찾아왔다. 곤충들의 찌지직 소리가 음률처럼 들러왔다. 새들이 조잘댔다. 한기가 그의 근육에 스며들어 영겁의 상처 주위로 몰려와 그를 옥죄었다. 그를 숨쉬게 하는 그 무언가가 익숙하지 않은 한기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처절하게 몸부림쳤다. 그 느낌은 고통스럽고 혐오스러웠다.
크럴은 덤불로 성큼 걷기 전에 크게 고통으로 얼룩진 비명을 질렀다. 그곳에 다른 길이, 할시온 협곡으로 가는 길이, 이제 그가 가야 하는 길이 보였다.
"이건 군인한테 받은 건데, 어떻게 하는지 묻지 마. 알았어. 가서 물어봐. 알았어, 왜 그래."
그녀는 파란색 종이를 펼쳐 보지 않았다.
걷는 큰 기계.
"저거 훔친다." 쥴이 말했다.
뭐, 뭐라고? 저걸 훔친다고? 군대 기지로 잠입해야 하는데? 쟤는 무슨 옆집에 놀러 가는 것처럼 말하네.
"계획도 세워놓았어." 쥴이 무언가를 또 꺼내면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툰 솜씨로 그린, 꼬깃꼬깃한 기지 지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세상에, 우리가 뭘 해야 할지 모두 적혀있잖아.
"일단 연막탄이 많이 필요해. 가토가 꽤 가지고 있지? 조명탄도 준비해서 시선을 끌어야지. 그리고 피티, 너 부두에서 가져온 닻 있지? 우린 그걸 기지의 담장에 걸어서 타고 넘어 갈꺼야."
쥴의 설명이 점점 더 열기를 더해가자 굶주린 배를 움켜쥔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흐르는 콧물을 훔치면서, 호기심 가득한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면서.
안돼 이것들아! 이건 미친 짓이라고!
"실패할 게 뻔해. 너무 어려워."
"걱정하지 말라고. 이 몸이 누구시냐! 저번에 트럭 문 따고 시동 건 거 봤잖냐. 이거나 그거나 엎어치나 메치나!"
어련하시겠어요. 니 말을 믿으면 등신이거나 천하에 둘도 없는 대인배지. 하지만 여기서 반대하면 겁쟁이로 찍힐 게 뻔했다. 반대하고 싶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는 내 심정... 자원하는 아이들이 늘어나자 결국 나도 눈을 찔끔 감고 함께하려고 손을 들고 말았다.
'쥴의 큰 그림 2편'
[ 펼치기 · 접기 ]
후후... 모든 건 이 몸의 계획대로!
겁쟁이가 되고픈 자는 없었다. 그럼에도 체스터가 철조망에 구멍을 냈을 때, 자신 있게 나서는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 서로 눈치 보기 바빴지. 체스터는 방금 철조망을 자른 절단기를 들고, 가토는 연막탄이 들어있는 가방을 메고, SDB와 피티는 닻 옆에서, 벨은 급조한 바람총을 들고 죄다 뭉그적대기 바빴다. 오직 쥴만이 날쌘 다람쥐처럼 울타리 안으로 기어들어가 전력 질주할 준비를 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우릴 돌아보고는 말했다. "다들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어젯밤에 지도 펼쳐놓고 외우라고 니가 얼마나 갈궈댔는데.
"옆이나 아래, 뒤는 보지 마. 목적지까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내달리는 거야. 숨이 찬다고 절대 멈추면 안 돼. 도착하면 잠깐 쉴 수 있을 거야."
순찰을 하는 경비병이 지나가자마자 쥴이 신호를 줬다.
"저기 끔찍한 어둠녘 야수가 온다!"
그 말과 함께 쥴이 뛰쳐나갔고,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우리는 그녀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달빛 한 줌 없는 밤이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모두 숨을 헐떡이며 연병장을 죽기 살기로 달렸다. 그리고 겨우 목적지인, 지도에서 "여기"라고 적혀진 문 앞에 도착했을 때는 악다구니들처럼 먼저 들어가려고 난리였다.
다행히 아무도 들키지 않고 들어와 환기구가 있는 화장실로 숨어들었다. 쥴이 변기 위에서 환풍기 뚜껑을 열려고 낑낑대고 있을 때, 체스터가 외쳤다.
"앗. 내 동생 어디갔어?"
모두가 화장실 밖을 내다봤을 때, 눈부신 조명 한가운데 체터가 있었고 경비병들이 그녀를 잡으려고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우리 계획 쟤가 불 텐데." SBD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걱정 마. 내가 다 대비해 뒀지." 속삭이며 쥴이 말했다.
"체터에게는 우리가 엉뚱한 방향으로 간다고 말해 뒀어. 걔가 잡히더라도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 야! 밑에 똑바로 좀 받쳐봐!"
채터를 잡은 경비병들은 자기들끼리 웅성대더니 반대 방향으로 달려갔다.
"서둘러! 다들 환기구로 들어가!" 바람총을 바지에 넣으면서 벨이 다그쳤다.
아... 쥴 저년은 호주머니에 대체 뭘 쳐넣었길래 저리 시끄럽나. 잠입의 핵심은 기도비닉 유지가 아닌가? 쉴 새 없이 재잘대는 체터가 없다고 좋아했는데 줄이 의외의 복병일 줄이야.
좁고 더러운 환풍구를 기어가다 보니 갈림길이 나왔다. 여자애들은 경비실 쪽으로 남자애들은 반대편으로 갔다. 애당초 계획은 남자애들이 연막탄으로 경비의 주의를 끄는 동안 여자애들이 돌격하는 건데 잘할 수 있을까. 이윽고 쥴과 벨이 경비실 천장의 환풍구에 도착했다. 이제 작전을 개시할 시간이다. 쥴이 드라이버로 환풍구 문을 헐렁하게 하는 동안 벨은 바람총으로 조심스럽게 경비의 뒤통수를 겨냥했다. 다행히 경비는 한 명뿐이다.
모든 준비를 마친 벨이 환풍구 벽을 손톱으로 조심스레 세 번 두드렸다. 건너편의 남자애들에게 보내는 신호다. 하지만 돌아오는 소리는 한 번뿐. 남자애들 왜 이렇게 느려 터진 거야!
속으로 투덜대며 벨이 다시 목표를 조준했을 때 그녀는 심장이 멎는줄 알았다. 경비가 긴가민가한 얼굴로 정확히 그녀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닌가! 벨은 욕설을 내뱉으며 재빨리 바람총을 쏘았다. 하지만 너무 서둘렀음일까, 쇠바늘은 아슬아슬하게 경비의 머리 위를 스치고 말았다. 계획이 틀어졌음을 파악한 쥴도 나사를 풀어 헐렁하게 만들어 놓은 환풍구 철문을 발로 강하게 밟았다.
쾅!
육중한 철문은 정확히 경비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이후 벨이 주먹으로 환풍구 벽을 세 번 세게 쳤다. 느려터진 남자애들과 상관없이 여자애들은 이제 작전을 개시해야 한다!
경비실 문을 열고 보니, 복도는 가토가 뿌린 연막탄으로 가득했다. 경비들은 기침하고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악착같이 아이들을 찾고 있었다. 피티는 몸부림치며 끌려 갔으며 날쌔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벨도 잡히고 말았다. 이제 남은 유일한 희망은 쥴. 그녀는 경비들의 가랑이 사이를 민첩한 다람쥐처럼 빠져나가며 격납고로 내달렸다. 훔친 인식 카드를 손에 꼭 쥐고서.
'쥴의 큰 그림 3편'
[ 펼치기 · 접기 ]
이 맥워리어는 이제 내 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귀를 씻고 똑똑히 들어라 군부의 개들! 내가 손에 들고 있는 게 뭔지 알아? 크라켄 암내 농축액이야! 이게 공기 중에 퍼지면 우리 모두 죽은 목숨이라고!" 쥴이 기다란 시험관을 흔들며 외쳤다. 연막탄이 가라앉은 자리, 맥워리어들이 가득한 격납고 정중앙에 쥴이 서 있었다. 경비들의 손에서 겨우 벗어난 벨은 헐떡이며 쥴의 뒤로 기어갔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포위된 상황. 친구들도 경비들의 손에 모두 붙들려 있었다. 땅바닥에 질질 끌려오는 가토의 뒤로 채터의 애달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앙 다 끝났어! 우리는 모두 죽을 거야!"
경비들은 격납고 입구를 단단히 틀어막고, 미친 듯이 외치는 쥴을 기관단총으로 정확히 조준했다. 그 순간,
"아야!" 벨이 충격에 배를 움켜쥐었다. 쥴이 실성한듯이 흔들던 시험관이 벨의 복부를 정확히 가격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깨진 시험관에서 괴상한 색의 액체가 흘러나와 사방을 악취로 가득 채웠다.
액체의 위력은 대단했다. 벨은 신음을 내며 바닥에 쓰러졌고, 페티는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가토는 입에 게거품을 물었고, 체스터는 숨이 넘어갈 듯 캑캑댔다. 쥴도 휘청거리더니 이내 혀를 빼물고 실신했다. 이를 본 경비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 혼비백산했다. 그때 격납고의 모든 강철 문이 쾅 하고 닫히더니 무미건조한 기계 음성이 울려 퍼졌다.
"생화학 경보, 생화학 경보! 이 시간부로 격납고를 완전 폐쇄합니다."
이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저마다 살겠다고 별짓을 다 하는 경비들을 뒤로한 채, 놀랍게도 쓰러졌던 쥴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손으로 턱을 짚은 채, 근처의 맥 워리어들을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마음을 정한 듯 매끈한 검은색 기체를 건너뛰고 화려한 노란 줄무늬 도장을 한 녀석의 위에 올라탔다. 보안 카드를 여기저기 쑤시며 버튼을 이것저것 누르다 보니 굉음과 함께 시동이 켜졌다.
"얘들아! 이거 좀 봐. 정말 멋지다고!"
"나갈 방법이 없어, 바보야!"
벨이 맥의 다리를 찼다.
"우리가 어떻게..."
큰 윙윙거리는 소리와 기계의 이음매가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 기계는 앞으로 나아간다. 거짓말같이 거의 그 일에서 빠져 나와 스스로 권리를 주장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거대한 기계가 주먹을 쥐고 편다. 총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칼을 돌리는 동안 우리 모두는 숨을 거두지 못할 것처럼 비틀거리며 숨어 있었다.
"이것들 중 하나는..."라고 중얼거리며 큰 빨간 버튼을 누른다.
너무 큰 소리는 인간의 귀로는 듣지 못한다 했던가? 멸망의 단추는 사람의 청력을 아득히 초월하며 모든 소리를 흡수해 버렸다. 우리는 목청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지만 그 소리도 묻혔다. 생화학 위험을 알리는 경보음과 기계 목소리도 얄짤없었다. 수백 년 묵은 나무의 거대한 밑동 마냥 굵은 불빛이 사그라들 때야 고막이 째질듯한 폭음이 들려왔다.
'콰콰콰쾅!'
그리고 격납고의 정문에는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렸다.
우리는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뚫린 구멍을 통해 기지 외곽의 울타리로 출행랑을 쳤다. 쥴은 맥워리어의 손에 정신을 잃은 채터를 조심스레 쥔 채 제일 마지막에 나왔다. 철조망 따위는 이제 전혀 문제가 안 됐다. 맥워리어의 강철 다리로 사뿐히 즈려밟자 철조망은 빈대떡이 되어버렸다. 도망치는 일행들의 귀에 맥워리어의 쿵쾅대는 걸음 소리가 파고들었다. 곧 모두는 퇴각 지점인 도시의 외벽에 도착했다. 성벽 밖으론 녹색의 지옥이라 불리는 울창한 밀림이 끝도 없이 퍼져 있었다.
"후훗. 내가 해낼 수 있다고 말했지!" 쥴이 맥워리어를 울창한 수풀 속에 숨기고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래그래 너 잘났다. 근데 대체 저걸로 뭘 할 거야?" 벨이 물었다.
쥴은 거기까지는 생각 못한 듯 입을 다물었고, 땀투성이 일생들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건축물을 짓지 말지어다. 세상에 약속된 종말이 도래할 것이니. 밭을 일구지 말지어다. 업화의 불꽃이 강림할 것이니. 미래에 희망을 품지 말지어다. 용의 재앙이자 하늘의 지배자, 스카펑간디르가 모든 문명을 재로 말들 것이니. 만물은 사신의 낫 아래 모두 잠드리라. 그는 멸망이자 영원한 밤의 전조, 극렬의 스카펑간디르. 죽음의 주인이자 만물의 포식자... - 스카펑단디르 찬가에서 발췌
2편 '스카펑간디르의 생존자들'
[ 펼치기 · 접기 ]
워커의 기록 다인란드 여성의 유해에서 발굴된 두루마리
스카펑간디르는 용의 일종으로 전 세계 여러 문화에서 등장한다. 사실, 화석 등의 증거물을 보면 용족은 이미 고대에 멸종된 것 같다. 하지만 다양한 문화의 신화를 교차 검증한 결과, 그중 한 특별한 용이 매 천 년 기가 도래할 때마다 모습을 드러낸다. 현시대 과학적 그리고 학문적으로 상당히 발전한 문명들은, 스카펑간디르를 단지 케케묵은 전설에 불과하다고 치부한다. 하지만 난 이 무시무시한 용이 실제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각 지방의 벽화, 모자이크, 조각상 그리고 여러 문학 작품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스카펑간디르의 모습은 대체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들 지방이 과거에 전혀 교류가 없었다는 것을 참작하면 이는 중요한 사실을 내포한다. 그리고 지난 수년간, 난 그 의문을 탐구하며 세상을 헤맸다.
뭐, 일부는 고리타분한 역사학이라고 무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목할 만한 건 아래에 나오는 기록들의 작성 시기는, 지금부터 거의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
- 마팀 워커 개인 일지에서 발췌
*
다음 내용은 미지의 문명 기록을 워커가 번역한 것이다. 그가 사라지면서 남긴 소지품 속에서 발견되었다.
난... 강가에서 이미 죽었어야 했어요. 무릎 위에 낚싯대 올려놓고 그렇게 죽었더라면 차라리 편안했을 거예요. 대신 난 구차한 목숨을 연명해보려 근처 절벽 동굴로 도망쳤죠. 휘 번뜩한 거대한 눈알이 동굴 밖에서 데룩데룩 구르고, 녀석의 숨결은 맹독처럼 내 폐부를 태웠어요.
놈이 아가리를 벌리자 목구멍에서부터 불꽃이 튀어나왔어요. 난 아슬아슬하게 피했지만, 그 거대한 몸뚱어리가 동굴 입구를 단단히 틀어막는 걸 멈추진 못했죠. 빛 한 톨도 들어오지 않았어요.
항거할 수 없는 공포 속에서 내 마음에 힘든 밭일을 하는 아빠, 아픈 허리를 짚고 화전을 일구는 엄마가 떠올랐어요. 부모님은 내가 통통한 물고기를 한 아름 잡아 오길 바랬겠죠. 그러나 이제 난 엄마 아빠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거예요. 이, 이런... 큰일이에요. 내 자그마한 몸으로 괴물이 만족해 주면 좋으련만, 왠지 이놈은 그럴 것 같지 않아요. 무리 민족 삶의 터전이 위험해요!
사태를 깨달은 난 오히려 겁이 사라졌어요. 포식자가 먹이를 먹는 건 자연의 마땅한 법칙이에요. 하지만 우리 마을은 안 돼...
죽음을 선사하는 용은 날 천천히 바라봤어요. 머리에는 마을의 장승만 한 커다란 뿔이, 몸에는 강철보다 단단할 것 같은 비늘이 덮혀 있었죠.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날름대는 시뻘건 혀는 내 몸만 했어요. 녀석은 말 그대로 거대한 갑옷 같았어요. 한 치 틈도 보이지 않는...
잔인한 용은 내 마음을 읽은 듯 부드러운 동작으로 동굴 입구에서 물러났어요.
난 황급히 뒤따랐지만 절망감은 내 심장은 무겁게 짓눌렀죠. 그리고... 푸른 창공으로 솟아오른 녀석은 집채만 한 날개를 휘저으며 내 고향을 불태웠어요.
한때 황금 물결이 넘실대던 벌판은 죽음이 가득한 곳으로 변했고, 성벽 너머 찬란한 기념물과 건물은 모조리 파괴되었어요. 우리 마을이 존재했던 흔적, 사람의 따스함은 온데간데없이 철저한 파괴의 현장만이 남아있었죠.
난 내 가족을 모두 잃었어요. 아니, 가족뿐만 아니라 우정을 나누던 소중한 친구들, 나아가 가문과 철천지원수 지간이던 적들까지 모두 사라졌어요. 격렬한 화염 속에서 그들은 뼈 한 마디 남기지 못했죠. 절망에 빠져 망연자실한 나만이 우리 문명의 최후 생존자였어요. 그날 난 고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그의 분노를 목격했어요. 세상의 종말자, 스카펑간디르의 분노를...
이 유물과 이야기 번역본은 마팀 워커 개인 소장품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이 어느 도시나 문명에서 유래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아무도 스카펑간디르의 존재를 믿지 않아. 사람들은 화톳불 주위에서 아이들을 놀래려고 하는 이야기 불과하다 말하겠지. 당시 내 아이들은 아기였고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아이를 낳았지. 그리고 할멈이 들려주는 무서운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말라고 해. 하지만 사실 우리 가문의 고향은 이 도시가 아니야. 한때 우리만의 마을과 농장 있었고 목가적인 멋진 삶을 영유했지. 그런데 어느 날 파멸의 어둠이 찾아왔어.
그날 아침, 해는 회색 하늘에 가려 희미한 햇무리만 보였어. 퍼붓는 재가 굴뚝의 연기를 꺼뜨렸고 마을의 오솔길도 모두 뒤덮었지. 시커멓고 뜨거운 잿가루에 사람들의 피부는 물들고,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목구멍은 타들어 갔어. 창문을 꼭꼭 닫고 현관문을 담요로 빈틈없이 막아도 저주받을 재는 기어코 집 안으로 기어 들어왔지. 식탁 위에도, 음식 위에도, 침대 위에도 모두. 가축의 여물통에도 들어가 그를 마신 가축들은 병들고 죽어 버렸어.
그 재들은 아랫마을에서 바람을 타고 날라온 거야. 당시 남편은 아랫마을의 화재 소식을 듣고 도와주러 갔지만, 영영 돌아오지 못했어. 시간이 흘러 정오쯤 되자 무릎보다 높이 쌓인 재 때문에 말과 마차도 움직일 수 없었지. 마을을 가득 채운 기묘한 열기는 점점 심해졌고 마을 회관의 비상 종은 그때야 날아갈 듯 울려퍼졌어. 나를 포함해 경고를 들은 마을의 모든 주민은 살림살이를 내팽개친 채, 정신없이 피난길에 올랐지. 바람에 휘날리는 재의 파도는 토끼를 쫓는 사냥꾼처럼 우리의 뒤에 따라 붙었어. 아기들을 담요에 싸고 재를 헤치며 전진하는 내 다리는, 화상을 입어 물집투성이가 되었지.
주민들 행렬이 마을 귀퉁이를 돌아나설 때, 녀석이 등장했어. 새카만 하늘을 가르며 스카펑간디르가 말이야. 놈이 날갯짓할 때마다 잿빛 구름이 흩어졌어. 전설에 전해지는 것보다 덩치가 훨씬 크더라고. 녀석이 울부짖는 소리에 마을의 유리창이 모두 깨지고, 피난민들은 새파랗게 질려 엉덩방아를 찍었지.
이윽고 재가 잦아들고 태양 다시 얼굴을 내밀자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왔어. 하지만 마을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 누구도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밀지 않았고, 시원한 물이 가득했던 우물은 바싹 말라 버렸어. 오염된 들과 밭에는 이제 아무것도 재배할 수 없게 되었지. 그야말로 철저한 파괴. 사람들이 살던 흔적도, 문명의 역사도 모두 사라졌어. 이것이 그날 스카펑간디르에 의한 재앙의 진실이야. 하지만 역사는 불운했던 화재 정도로 당시 비극을 기록했고, 내 이야기도 한낱 웃음거리가 될 뿐이지.
마지막 번역본도 마틴 워커의 개인 소장품에서 발견되었다. 이 문서는 특별히, 스카펑간디르의 "다섯 번째 강림"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스카펑간디르의 다섯 번째 강림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충격으로 남아있다. 우리 집으로부터 반나절 거리에 있는 웅덩이에서, 마을 백정 아이가 산 채로 삶아지는 걸 봤기 때문이다. 사실 이 무시무시한 용이 저지른 파괴의 흔적을 보았을 때, 아이의 얼굴에서는 어떤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불탄 나뭇잎도, 검게 그을린 나무도, 쥐죽은 듯 고요한 숲도 아이에겐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아이와 난 죽음만이 가득한 숲을 통과해 담쟁이덩굴과 이끼가 가득한 소로를 지나 웅덩이에 도착했다. 파괴의 화신은 거기에 있었다. 배를 채우려는 듯 커다란 발톱으로 물고기를 찍어 사냥하면서.
"얘야. 이건 말도 안 돼. 너보다 하루라도 더 산 사람 말을 따르거라. 지금이라도 당장 물러나야 해." 난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오. 내 검은 위대한 전사들의 것만큼 날카롭습니다." 아이가 대꾸하며 허리춤에서 커다란 고기 칼을 꺼냈다. 뭐가 그렇게 많이 달려있는지 가죽 허리띠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쩔렁쩔렁 소리를 냈다.
"자고로 백정은 동물 해부학에 대해 누구보다 빠삭합니다. 어디를 공격해야 기절시킬 수 있는지, 어디를 쑤셔야 숨통을 끊을 수 있는지 저에겐 훤합니다. 숲을 통째로 불태운 이 용의 머리를 들고 돌아가면, 이장님이 저를 당당한 전사로 받아줄 거예요." 백정의 아이가 용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칼을 이빨에 물고, 용의 뒤에 서 있는 키 큰 야자수를 타고 올라갔다. 평소 천대를 받던 백정 아이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나, 내 본능은 이건 너무 무모하다고 경고를 보냈다.
커다란 함성과 함께 아이는 야자수에서 도약했다. 용이 물고기를 씹다 잠깐 멈칫한 사이, 아이는 자신만만하게 칼을 휘둘러 용의 정수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공격은 물기에 번들대는 비늘을 파고들지 못하고 빗나가 버렸다. 균형을 잃은 아이는 용의 등에서 미끄러져 호수에 풍덩 빠졌다. 물속에서도 발버둥 치며 허리춤의 톱칼이나 망치 따위를 꺼내려 노력했지만, 스카펑간디르는 식사 시간을 방해한 존재를 용서하지 않았다. 용은 크게 한 번 울부짖고, 호수를 향해 지옥의 화염의 내뿜었다. 백정 아이의 꿈도 거기서 쓰러져버렸다.
3편 '미제 사건들'
[ 펼치기 · 접기 ]
사건 번호: 082649259 담당 수사관: 보안관보 김형사 사건 일시: 비공개 사건 분류: 사유 재산 훼손
북쪽 언덕 농가에서 새벽녘 들판에 큰 화재 발생 신고 접수. 담당자 보고서에 의하면 고추밭에 피어오른 불은 삽시간에 커졌다고. 농가의 주인은 최근 고추 가격과 재배권 관련 다툼 있었던 이웃 농가를 비난. 하지만 조사 결과 이웃 농가는 화재와는 관련 점이 없음. 농가 주인 비공개 왈, "그날 밤, 우리 밭에 어떤 연놈이 고추 서리를 하러 왔소. 놈이 '쩝쩝' 소리를 내며 고추를 따 먹길래 내가 잡으러 쫓아갔지만 늦었소. 그리고 그래... 분명 트림 소리였소. '꺽'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고 깜짝 놀라 불씨를 꺼뜨리려 했지만 순식간에 타올랐소."
땅에서는 발톱 자국과 발자국 흔적 발견. 네발 달린 동물의 소행이라 추정. 또한, 언덕 구릉 동굴에서 부서진 알껍질도 발견됨. (첨부 자료 참조) 추가 수사 필요.
—
사건 번호: 082649265 담당 수사관: 강력계 박형사 사건 일시: 비공개
사건 분류: 사유 재산 훼손
비공개 도시 남쪽 비공개네 가족 집에 밤사이 화재가 발생함. 감식 결과 화재는 7세 아들 비공개 군 침실에서 시작.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음. 부친 비공개세 비공개 씨가 현재 방화 혐의로 구치소 입건. 당월 초 값비싼 화재 보험 가입 이력이 있음.
특이사항. 비공개 군은 화재 감식관에게 미지의 동물이 불을 질렀다 주장. "불 지른 건 강아지예요. 어제 뒷마당에 있었죠. 특이한 건, 몸은 개인데 등에 날개가 달려 있었어요. 절 퍽 잘 따라서 '강아지새'라는 이름도 지어줬어요.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몰라요."
—
사건 번호: 082649276 담당 수사관: 기동대 이형사 사건 일시: 비공개
사건 분류: 소음 공해
비공개 마을 근처 비공개 저녁, 총 13건의 소음 불만 접수됨. 수많은 군중이 거리로 뛰쳐나와 기괴한 노래를 읊조림. 현장 통제를 위한 경찰관과 현장 기록을 위한 감식관 급파. 조사에 의하면 군중은 불신자를 벌하기 위해 '고대의 괴물'이 강림했다고 믿음. 이 마을 장로는, 괴물의 화는 인신 공양으로만 달랠 수 있다 주장. 군중이 신봉하는 고대 괴물의 모습은 첨부 자료 참고. 추가 수사 승인됨.
—
사건 번호: 082649278 담당 수사관: 광역수사대 박경위 사건 일시: 비공개
사건 분류: 살인 폭발물 관리법 위반 가중 처벌 사유재산 손괴
목격자 목록 비공개 비공개 비공개 비공개
비공개 오후, 도심 '예술과 인문' 구역 첨탑이 커다란 폭발과 화재로 소실. 목격자들은 당시 공기 중에 유달리 매캐한 기체가 가득했다고 증언. 결국, 첨탑은 붕괴.
광역수사대 박경위가 용의자 비공개 씨의 신변 확보. 비공개 씨는 화재 직후, 다급히 현장에서 이목을 피해 도망침. 선술집 '나르는 벼룩' 주인 비공개 씨 증언에 의하면, 폭발 전날 비공개 씨가 만취 상태에서 직장을 잃었다며 불평함. "그는 평소에도 직장에 불만이었소. 언젠가 윗대가리들에게 쓴맛을 보여준다고 하더군. 저놈의 오만한 첨탑을 박살 낼 거라고 말이오. 어쩌면 그가 범인일수도..."
"아니, 여보. 염소 한 마리 사는데 당신 허락까지 받아야 해요?" 줄리아가 투정을 부렸다. "염소가 있으면 우유도 짤 수 있고 그걸로 치즈도 만들 수 있다구요." 이들은 저녁 내내 부부싸움을 할 판이었다. 아단은 허리를 굽힌 채 파워 아머에서 분리한 철판의 모서리를 사포로 문지르고 있었다. 집 밖 마당에선 이 부부싸움을 초래한 염소가 달빛 한 줌 없는 어둠을 향해 태평스레 울음소리를 냈다. "저놈의 염소 냄새와 울음소리는 정말 지독하단 말이오." 아단이 투덜거렸다. "한 시간이나 저러고 있는데 셀레스트와 복스가 어디 편하게 잠이나 자겠소?"
"그게 아니라 여보. 애들 교육에도 좋단 말이에요. 아이들은 교감할 수 있는 애완동물이 필요... 어맛 당신! 지금 내가 아끼는 의자에 쇳가루 흘린 거예요?"
"그렇다면 그 치즈란 놈은 누가 만들 거요? 고귀하신 분께서 치즈를 만들어 보신 적이나 있으신가?"
"흥, 나도 치즈 만들 수 있거든요!" 줄리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쿵쿵거리며 방을 나서더니 남편 보란 듯이 침실 문을 쾅하고 닫았다.
문 소리에 잠이 깬 셀레스트가 아장아장 걸어나오더니 졸린 눈을 비비며 말했다. "아빵? 엄망 왜 그래요?"
영리한 셀레스트는 엄마가 화났을 때 어떤 어조인지 벌써 알고 있었다. 아단은 미소를 지으며 한쪽 팔로 사랑스러운 딸을 안고는 뺨에 뽀뽀하며 말했다. "엄마가 지금 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더니 삐지셨나 보구나."
"망도 안 되는 소리가 먼데요?"
"엄마가 아빠한테 말도 안 하고 염소를 집으로 데려왔거든. 그래서 그렇단다."
"난 염소 쪼아." 셀레스트에 이어 복스도 깨어나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복스는 비몽사몽에 아단의 다리를 꼬옥 껴안았다. 아단은 아이들을 달래고는 침대에 다시 눕혔다.
"우리 복스, 염소 좋아하는구나. 하지만 우리 가족 중엔 염소를 돌볼 줄 아는 사람이 없는데 어떡하지?"
셀레스트가 반쯤 잠든 상태로 말했다. "아빠, 바께서 아가가 울어요."
"저건 그냥 염소란다, 우리 딸." 아단이 셀레스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때 잠결에 웅얼거리던 복스가 물끄러미 아빠를 쳐다보며 말했다. "염소가 무섭대. 혼자 이써서 그런가 봐."
"하하. 염소는 괜찮단다. 어휴, 녀석이 암컷이면 좋겠는데... 아니면 염소젖으로 치즈를 만들려는 네 엄마의 꿈은..."
그때 불현듯 등 뒤에 서늘함이 감돌았다. 아단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신경을 곤두세우고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염소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단의 몸속에서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둘 다 조용히 있어야 한다. 방문은 절대 열지 말고. 알았지?"
아이들을 단속하고 난 뒤 아단은 침실로 내달렸다. "여보, 줄리아." 그는 심각한 어조로 침실 문 앞에서 말을 이었다. "그들이 왔소."
줄리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침실 문을 열었다. "지, 지금요?"
"이미 포위된 것 같소."
아단의 갑옷은 수리 중인 상태로 거실에 널브러져 있었다. "다리 먼저." 아단이 급하게 강철 발가리개에 발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줄리아는 잠옷 바람으로 무릎을 꿇고는 남편의 무장을 도왔다. 파워 아머의 묵직함 때문에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이윽고 갑옷의 제어판에서 '윙'하는 소리가 나더니 기계음이 들려왔다. "시스템. 오프라인." 그 소리를 들은 아단은 주먹으로 제어판을 세게 쳤다. "제길... 고물단지 같으니라고!"
"쉿! 계속해봐요." 줄리아의 하얀 손은 기름때로 까맣게 변했고,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엔 검은 얼룩이 가득했다. 갑옷과 발전기의 연결 부위를 조심스레 살피며 그녀는 집 주변의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염소 울음소리도, 풀벌레 소리도, 바람 소리도 없는 적막이 흘렀다. "여보, 정말 그들이 여기... "
"시스템. 온라인."
갑옷이 작동하는 그 순간, 거실 창문이 와장창 깨졌다. 아단은 옆으로 몸을 틀어 날아온 강철 화살을 피했다. 그의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간 화살은 반대편 벽 깊숙이 꽂혔다. 아단은 욕지기를 내뱉고는 몸을 가눴다. 거실 나무 바닥이 아단의 갑옷 무게에 삐걱대며 비명 소리를 냈다. "놈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현관을 지키리다."
"무기도 챙겨야죠!"
"여기서 쓰면 집을 날려버릴 거요. 내 뒤에 바짝 붙으시오."
줄리아는 눈을 감고 주문을 외어 마법을 시전했다. 녹색 구체가 그녀의 손바닥 위에 떠올랐다. "난 당신을 지킬게요." 줄리아가 꿈결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줄리아의 마력이 몸속으로 스며들자 아단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력이 주는 그 기묘한 느낌은 기계만을 알고 살아온 그에겐 영 어색했다. “내 몸은 내가 지킬 수 있소, 걱정 마시오.” 그가 굳은 목소리로 아내에게 대답했다.
이윽고 적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궁수 하나가 창문 너머로 슬쩍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내 집 안으로 재빠르게 잠입했다. 장검을 꼬나쥔 검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은밀한 행동 사이로 얼핏 보이는 문장들... 그들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상황은 최악이다.
"뿌드득... 폭풍경비대!" 아단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하지만 줄리아는 무아지경 상태로 마력을 끌어올리느라 남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두껍디두꺼운 파워 아머. 공격력과 방어력은 뛰어나지만 이 녀석에겐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바로 그 무게. 아단은 그래도 경비대의 급습 직전에 고물 같은 갑옷이 작동하다니 다행이라 여겼다. 침입자들은 저마다 가진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아단의 힘, 그리고 줄리아의 마력을 흡수한 갑옷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날아오는 화살을 튕겨낸 아단은 그대로 궁수의 얼굴을 날려버렸다. 끈 떨어진 연처럼 날아가는 궁수의 얼굴엔 화상 자국이 아로새겨졌다.
이를 신호로 아단 부부와 폭풍경비대는 본격적인 전투를 개시했다. 아단은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날뛰었고, 쥴리아의 마법도 경비대원 상당수의 목숨을 앗아갔다. 한때 가족의 따스함이 가득하던 거실엔 침입자들의 피와 부스러진 무기 그리고 찢긴 육편이 날아다녔다. 숫자로는 중과부적이었지만 아단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는 침입자들과 소중한 가족 사이를 막는 단 하나이자 최후의 보루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폭진의 강타가 휘몰아쳤다.
모든 것이 고요해지고 한기가 감돌았다. 아단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충격파가 직격한 그의 속은 뒤집혔다. 비명을 지를 수도, 눈을 깜빡일 수도 없었다. 벽에 걸려 있던 그림과 장식이 사방으로 흩날렸고 아단의 갑옷은 미친듯한 경고성을 내뿜었다. 사방에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폭풍경비대원들이 가득했다. 아단의 부릅뜬 눈동자에 비치는 인영 하나. 박살 난 현관문으로 마치 자신의 집인 양 유유히 걸어들어오는 공포의 존재. 집안으로 발을 들인 그녀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는 그나마 성한 경비대원 두 명에게 셀레스트와 복스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단이 이들을 막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소용없었다.
순간 아단의 시간은 무채색으로, 천천히 흘렀다. 거실 한쪽에서는 명령을 받은 경비대원들이 공포로 시퍼렇게 질린 쌍둥이를 안고 캐서린에게 다가가고 있었고, 충격에 정신을 잃었던 다른 대원들도 하나둘씩 깨어나고 있었다.
다른 한켠에는 그의 아내 줄리아가 캐서린의 칼에 찔리기 직전이었다.
시간이... 없다!
찰나의 순간, 그는 잔인한 선택을 해야 했다. 사랑하는 아내의 목숨을 살릴 것인가? 아니면 소중한 아이들을 구할 것인가?
고민은 짧았고 그는 마지막 힘을 모아 총알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캐서린의 검이 처절하게 줄리아의 가슴을 가르는 그 순간, 그녀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단어는 바로 남편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 담겨있는 마력이 일순 믿을 수 없는 힘을 아단에게 주었다. 사랑하는 남편에게 그녀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 힘으로 아단은 순식간에 경비대원 둘을 제압하고 쌍둥이를 안아 들었다. 부서진 창문으로 탈출하는 그에게는 아내의 마지막을 지켜줄 시간도 없었다.
아단은, 화살에 목이 꿰뚫려 더 이상은 그의 신경을 거슬리는 울음소리를 낼 수 없는 염소를 지나쳐 어둠 속으로 내달렸다. 똑똑한 쌍둥이는 눈앞에서 목격한 충격적인 광경에도 일체의 소리를 내지 않았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엔 스산한 밤공기만이 맴돌았다.
2편 '불타는 만 위에서'
[ 펼치기 · 접기 ]
“아이 참, 좀 가만히 있어.” 타이젠 관문 옆의 버려진 놀이동산. 녹슨 대관람차의 꼭대기에서 파란색, 녹색, 보라색의 알록달록한 빛이 퍼져나갔다. 이곳은 풍광은 실로 매력적이었다. 셀레스트는 시원하게 펼쳐진 절경을 바라보며, 인파 속에서 동생 복스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가슴 졸였던 순간, 시장 좌판의 생선과 죽은 닭에게서 나던 불쾌한 냄새를 잊어버릴 수 있었다. 심지어 무려 15년 동안이나 그녀를 괴롭히던 아빠 작업실에서 흘러나오던 불빛과 망치 소리도 이 순간 만큼은 뇌리에서 지워버릴 수 있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도시의 노을. 그녀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별들도 하나 둘씩 수줍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복스는 그녀의 투정을 듣고는 빙긋 웃기만 할 뿐, 몸을 앞뒤로 크게 흔드는 걸 멈추지 않았다. “헤헤. 내가 이러니까 떨어질까 봐 무섭지?”
“안 무섭거든!”
“무섭다 그러면 멈출게.”
“하아...”
셀레스트는 한숨을 쉬더니 스커트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곳엔 조막만 한 따뜻한 구슬 하나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무섭다 그러면 멈춘다니까아~"
"그렇게 까불다가 떨어지면 맘껏 웃어줄 테야."
근처 공장 굴뚝에서 피어나는 할시온 매연 위로 태양이 지고 있었다. 도시를 넘어 내륙으로 수 마일이나 길게 드리워진 연무 속에서 거대한 크레인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숨을 쉬려는 듯 모가지만 빼꼼히 내놓은 크레인의 모습에 셀레스트는 실소를 흘렸다. 해 질 녁이 되면 이 버려진 놀이공원의 공터는 방독면을 쓴 타이젠 불량배들로 가득 찬다. 뭐 적어도 이 높디높은 관람차 꼭대기의 공기는 맑아, 쌍둥이는 편히 숨을 쉬고 있었다.
대관람차가 복스의 움직임에 계속 삐걱대는 소리를 냈다. "그들이 우릴 찾아낸 것 같니?" 셀레스트가 말했다. 타이젠 불량배들은 이방인을 금세 알아챈다. 이방인이 아무리 옷차림과 행동거지를 따라 한다 해도, 이 지방 특유의 말투까지 따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이방인이 몸에 룬문자 문신을 새겼거나, 기묘한 마법의 기운을 풍긴다면 순식간에 정체가 탄로 나고 말 것이다.
"흥, 난 오히려 그놈들이 우릴 발견했길 바래." 복스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더 이상 생쥐처럼 숨어다니는 것도 지쳤어. 오라 그래! 한 판 붙어 보는거야!"
"엄마의... 복수를 원하는 거니?"
"그건 누나도 마찬가지잖아?"
"난 우리 가족의 안녕을 원해. 아빠처럼 말야."
"안녕 따윈 어둠녘 야수나 주라지." 복스의 반항기 섞인 몸 흔들기는 더욱 격해졌고, 셀레스트의 염려도 스모그 사이로 더욱 깊어졌다.
3편 '가면 축제'
[ 펼치기 · 접기 ]
축제의 끝
00:00.05
대관람차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떨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5초이다.
소리는 끔찍했다. 대관람차의 금속 막대가 갈리는 소리가 셀레스트의 귀를 먹먹하게 했고,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셀레스트는 살고자 하는 마음에 사지를 허공에서 버둥댔지만,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이런 엄청난 높이에서 떨어지면 그녀의 마법도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약 4초 뒤면 그녀의 몸은 지면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평소 귀찮을 만큼 그녀를 과잉보호하던 아빠가 옳았다.
5초...
절체절명의 순간, 셀레스트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00:00:04
지난 수년간 셀레스트와 복스는 놀이동산의 대관람차 꼭대기에 올랐다. 숨어 살아야 하는 그들에게 이곳은 자신들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안식처였다. "누나. 그거 한 번 해봐." 복스가 졸랐다. 셀레스트는 손을 뻗어 섬세하게 휘둘렀다. 그러자 놀랍게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찬란히 빛나는 별 하나가 생겨났다. 별은 잠시동안 주위를 아름답게 비추더니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좋아, 좋아. 이젠 내 차례!" 복스는 눈을 감더니 무엇을 쏘는 것처럼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질 않았다. 셀레스트의 귀에 들려 오는 건 새들의 지저귐과 복스의 콧노래뿐. 이내 복스는 거기에 가사도 붙였다. "이건 누나 노래~ 누나 노래~ 최고의 음악가 복스가 누나를 위해 노래를 만들었다네." 동생의 귀여운 장난에 셀레스트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00:00:03
그녀와 복스의 18번째 생일이 바로 오늘이다. 지상에서는 방독면을 쓰고 짐승처럼 소리지르는 축제 참가자들로 가득했다.
가면 축제는 밤을 기해 막 시작된 참이었다. 탁한 스모그 사이로 축제에 참여한 이들의 수정 목걸이와 문신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말썽꾸러기 중 일부는 축제 참가자들에게 입장료를 뜯어내고 있었다고, 한켠에서는 불량배들이 안에 뭘 집어넣었는지 모르는 수상한 음료를 파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려." 복스가 속삭였다. 셀레스트의 양손은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고, 복스는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장단에 고개를 끄떡이고 있었다. 그 장단은 공진이 되어 셀레스트를 넘어 지상의 모든 이들에게 퍼져나갔다. 마치 타이젠 관문만큼이나 거대한 북을 두드리는 것처럼 퍼져나가는 공진. 순간 복스는 손가락을 따악 튀겼다. 그 소리에 놀란 새들이 날아오르자 스모그가 갈라지며 쌍둥이의 모습이 축제 참가자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파티를 시작해 볼까!" 복스가 외치자 셀레스트도 그에 맞춰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퍼져나가는
새하얀 빛...
마치 하늘의 별이 지상에 강림한 듯, 뜨거운 열기와 밝은 빛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복스도 이에 질세라 더 빠르게 리듬을 탔고 온 사방이 빛과 음악으로 가득 찼다. 그에 맞춰 축제 참가자들은 정신없이 몸을 흔들어댔다.
셀레스트가 소환한 별들은 온갖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리며 주변을 밝혔다, 음악과 빛 속에서 쌍둥이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00:00:02
순간 축제장 한켠이 무너지며 사방으로 참가자들의 몸이 튕겨 나갔다. 흥겨웠던 축제의 현장은 칼 휘두르는 소리, 방패가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시퍼런 마법의 광선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여행자로 위장했던 수상한 이들이 망토를 벗자 황금빛 문양이 수놓아진 새하얀 군복이 드러났다. 왁자지껄했던 소란은 폭풍경비대에 의해 순식간에 비명으로 변했고, 복스의 음악은 경비대의 진군 소리에 묻혀버렸다.
음악뿐만 아니라 빛도 마찬가지였다. 셀레스트가 내뿜던 격렬하지만 따뜻했던 축제의 빛은 무시무시하게 타오르는 살인 마법 광선에 바랬다. 자비를 모르는 경비대의 마법사들은 검사들 뒤에서 지원 사격을 가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복스가 다급하게 외쳤다.
셀레스트는 동생의 질문에 대답하려 했지만 말문이 막혀 그럴 수 없었다. 대관람차 바로 아래의 지면. 그 지면이 마법으로 인해 넘실대며 무너지고 있었다! 그 형상은 마치 셀레스트가 동생을 위해 흉내 내던 초소형 블랙홀과 닮아 있었다. 다만, 훨씬 크고 훨씬 위험할 뿐...
"누나!" 복스가 손바닥을 부딪치며 소리를 질렀다.
"안 돼!"
셀레스트는 복스를 제지하려 했지만 늦었다. 복스가 양손에서 불러낸 충격파는 이미 흔들리던 대관람차에겐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녹슨 대관람차는 충격파를 견디지 못하고 뒤틀리며 부서졌다. 그리고 남은 건... 거인의 지상으로 향한 추락뿐이었다.
00:00:01
끔찍한 속도로 떨어지며 셀레스트는 증오하는 폭풍경비대의 얼굴을 살폈다. 마지막 가는 길에 엄마를 죽인 그 빌어먹을 놈이 있을까 싶어서 눈을 크게 떴다. 그런 그녀의 눈에 뜻밖의 광경이 들어왔다. 바로 아버지 아단의 붉은 파워 아머였다. 곳곳이 화염에 그슬리고 피딱지가 묻어있었지만, 아단의 내뻗은 손이 향하는 곳은 한결같았다. 바로 셀레스트와 복스가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을 본 셀레스트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아단은 타이젠 관문의 옛집에서 어머니 쥴리아가 죽을 때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때... 그걸로는 부족했나!' 천천히 거체를 쓰러뜨리는 대관람차를 향해 질주하며 아단은 생각했다. 그의 손에는 가면 축제를 알리는 포스터가 들려있었다. 그날 밤 단란했던 한 가정의 평화를 송두리째 짓밟은 것!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가명을 쓰고 숨어 살게 한 것! 무엇보다 핏덩이들에게 자신의 어미가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걸 보여준 것만으로는 부족했냐는 말이다!!
셀레스트와 복스도 마찬가지다. 아비의 명령이 그리도 지키기 어려웠나? 주의를 끌지 마라. 다른 누구에게도 너희의 능력을 보이지 마라. 어디 출신인지 밝히지 마라. 아빠가 파워 아머를 수리하고 개량하는 뒷마당의 창고를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마라. 그래. 어쩌면 혈기 왕성한 아이들에게 그 정도의 규칙과 주의는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대가로 아단의 아이들은 지상으로 추락하고 있다.
그렇게 이목을 끌지 말라 했거늘, 관람차 위에서 소리와 빛으로 저런 짓이나 하고 있다니!
*
방독면 사이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단은 쓰레기 더미 사이로 질주했다. 그가 가는 길에 있던 몇몇 불량배들은 파워 아머에 부딪치고 나가떨어졌다. 아단이 살면서 두 번 다시는 듣고 싶지 않던 전투의 끔찍한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고통에 찬 비명, 날붙이가 육신을 가르는 소리, 마법의 폭발음... 하지만 순간, 그것보다 훨씬 더 큰 소리가 사방을 뒤흔들었다. 거대한 충격파가 관람차로부터 퍼져 나왔다.
빌어먹을... 복스!
아단이 관람차에 다가갈수록 쏟아지는 잔해와 날아다니는 마법도 늘어났다. 살인 광선 하나가 아단을 스쳐 지나며 볼에 깊은 상처를 냈다.
셀레스트!
아단은 울부짖으며, 기디안 반란군 사이로 파고들었다. '폭풍경비대나 이 연놈들이나 똑같아. 그저 죄 없는 셀레스트의 마법 실력을 탐낼 뿐이지.' 아단은 생각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무너지는 대관람차를 서서히 포위하는 폭풍경비대. 이 중 일부는 확실히 관람차 잔해에 휩쓸릴 것이다. 강산이 한 번 바뀔 만큼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폭풍 여왕은 변한 게 없었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병사들의 목숨 따윈 얼마든지 내다 버리는 게 그녀다.
이윽고 적당한 위치에 도착하자 아단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쌍둥이가 빠른 속도로 아단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선봉장 준비 완료." 기계음이 들려왔다.
"제발... 이걸로 충분하길!" 아단이 혼잣말을 내뱉으며 단추를 누르자, 홀로그램 방어막이 그의 머리 위, 허공에 나타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충돌!
보호막은 크게 휘청거렸지만 용케 아이들을 받아냈다.
보호막이 사라지고 쌍둥이가 안전하게 땅에 내려서자 폭풍경비대는 포위망을 좁혀왔다.
"지금은 물러날 때입니다. 전하!" 기디안 전투 마법사가 셀레스트를 향해 외쳤다. 새파란 마법의 광선을 쏘아대며 그가 명령했다. "후퇴하라!"
"누가 누구보고 전하라는 거냐! 내 아이들은 내가 지킨다." 아단이 으르렁댔다. 기디안 반군은 경비대의 포위망을 뚫고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단은 서둘러 셀레스트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녀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셀레스트는 떨리는 목소리로, 하지만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확실하게 말을 이었다. "아빠. 우린 이젠 더는 숨어살 수 없어요." 그리 말하고 그녀는 기디안 반군을 따라갔다.
아단은 자신도 모르게 욕지기를 내뱉었지만 이미 복스도 누나를 따라 도망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들이닥치는 폭풍경비대의 서슬 퍼런 기색에 천하의 아단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단 가족은 반군과 함께 불타는 만으로 달렸다. 이미 반군 중 상당수는 경비대의 무기와 마법 아래 목숨을 잃었고, 이들 뒤로는 무대의 막을 내리듯 대관람차가 꿈결처럼 천천히 거체를 땅에 누이고 있었다.
어느새 노을이 지고 컴컴해진 하늘. 수상한 까마귀 한 마리가 이들을 바라보며 불길한 날갯짓을 했다.
5편 '할시온 협곡으로 1편'
[ 펼치기 · 접기 ]
그래서 우린 불타는 만으로 출행랑을 쳤지. 뒤에서 대관람차가 콰콰쾅 소리 내며 부서지고 있고, 폭풍경비대는 광견병 걸린 개처럼 방패를 세운 채 악착같이 따라붙었어. 그것뿐이랴. 날아오는 마법의 화살과 화염구도 시도 때도 없이 우리 간담을 서늘하게 했어. 아빠의 파워 아머는 이미 과부하 된 지 오래라 미칠듯한 경고음이 들려왔지. 아 근데 이 수다쟁이 기디안 할배 마법사는 도망치는 와중에도, "이보시오 아단 양반. 어서 바지선까지 후퇴해야 하오." 따위의 말을 지껄였고, 아빠는 "네 녀석들의 구시대적 정치 놀음에 내 딸을 희생시킬 소냐!"라며 길길이 날뛰었지. 뭐하는 거냐고 대체? 우리 죽기 일보 직전인데 그런 훈훈한 얘기나 계속 나눠야겠어? 어쨌든 우린 곧 오래되고 지저분한 불타는 만의 항구에 도착했어. 어둠 속에 얼핏 바지선의 모습이 보였지. 그리고 바지선 만큼이나 거대한 거북의 모습도. 기디안 반군 아저씨들이 끙끙대며 거북이에게 묶여있는 밧줄을 당겨 바지선을 항구에 댔어. 그 와중에도 빌어먹을 폭풍경비대는 더 가까이 다가왔지. 음정도 박자도 엉망인 고막테러급의 군가를 부르면서 말야! 그때 화살 하나가 내 옆의 병사 아저씨를 꿰뚫고 지나갔어. 으아... 엄청나게 아프겠다... 이제 남은 기디안 반군은 얼마 안 되는 머릿수로 마지막 발악을 하는 중이야. 그때 누나가 내 손을 꼭 잡더니 내 귀에 속삭였어.
"복스야. 그거 해 봐." 그리고 미소를 지었지. 아아... 누나의 미소는 언제나 아름답단 말이야. 순간, 모든 고민이 사라지고 마치 다시 대관람차의 꼭대기에 있는 기분이 드는 게 아니겠어?
좋아 까짓것 해보는 거야! 난 모을 수 있는 세상의 소리를 모두 모았어. 태평한 거대 거북의 하품 소리, 항만에 부딪히는 잔물결 소리.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은 경비대의 군가 소리. 공중을 날아다니는 화살 소리, 불타오르는 화염구 소리. 이 모두를 모아 내 손안에서 증폭시켰어. 그리고 내 심장의 고동과 소리의 파동이 일치하는 그 순간!
슈욱, 콰콰콰콰쾅!!!
초음파가 먼저 발사된 후 끔찍한 충격파가 사방을 뒤흔들었어. 충격파는 정확히 폭풍 경비대 중앙을 강타하고 걔낼 쓸어버렸지. 후훗. 이 몸의 공격 앞에 방패 따윈 쓸모 없지. 궁지에 몰렸던 기디안 반군 아저씨들은 겨우 다시 정비하고 후퇴하는 폭풍경비대를 척살하러 나섰어.
어이 이봐. 그냥 가기야? 갈 땐 가더라도 이 몸의 활약을 보았으면 박수 정도는 쳐 줄 수 있잖아? 아니면 그 시늉이라도 하던가... 너무하네. 내 활약을 축하해 주는 건 저 기디안 관문만 한 거대 거북이 내지르는 트림 소리밖에 없었어. 대신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했는지 할배 마법사 주둥이가 다시 나풀대기 시작했지. 뭐 뻔하지. 할배는 누나를 자꾸 바지선에 태워 데려가려 했고, 아빠는 그걸 또 악착같이 막고 있고...
할배 법사의 장황한 설교가 이어졌어. 누나의 운명이 어쩌구 옥좌에 오르는 것이 저쩌구.... 아빠는 듣고 있자니 너무 짜증 났는지 주먹으로 할배를 때리는 시늉까지 했다니까? 생긴 것과는 달리 비폭력주의자인 우리 아빠가 말야. 아빠 말에 의하면 망할 폭풍 여왕은 누나를 데려가 자신의 압제와 폭정에 대한 물타기를 할 셈이래. 아빤 너네도 똑같은 거 아니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어. 누나랑 난 물타기가 뭔지 정확하게는 몰랐지만 그저 오오 거리며 고개를 끄덕였어. 폭풍 여왕의 독재는 학교에서도 배운 적이 있거든. 그녀의 군대가 어떻게 도시를 밀어버리고 약탈하는지, 어떻게 사람들을 죽이는지, 그리고 재능 있는 아이들을 납치해서 어떻게 폭풍경비대의 병사로 키우는지 말야.
아빠와 할배의 말싸움은 점점 더 격해졌어. 이제 사방의 기디안 아저씨들도 그 언쟁에 참여해서 항만은 오뉴월 시장바닥처럼 시끄러워졌어. 그리고 이젠... 나도 뭔가를 결정해야겠지...
6편 '할시온 협곡으로 2편'
[ 펼치기 · 접기 ]
“내가 폭풍의 여왕의 압제를 끝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어요.” 누나는 특유의 차분한 말투로 아빠한테 말했지만, 이는 아빠의 화를 더 돋울 뿐이었어. "어림없는 소리! 네 엄마도 폭풍 여왕에 맞서려다 결국은 그리되지 않았느냐. 벌써 잊은 게냐!"
아아. 하지만 누나에게 엄마 이야기는 역린이나 다름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누나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빠가 절 아끼는 마음은 알겠어요. 하지만 이번 일에 아빠 허락은 필요 없어요. 내 백성, 내 사람들을 지키는 일이라구요!"
"허튼소리! 갓 사춘기를 지난 소녀의 몸으로 대체 뭘 하겠다는 거냐?" 아빠는 콧방귀를 뀌었다.
"아빠." 보다 못한 내가 아빠의 팔을 잡았다. 흥분한 아빠는 내 팔을 떨쳐내려 했지만 난 꼭 붙잡고 있었다. "들어봐 아빠." 그리고 차분히... 소리를 불러들였다.
잊혀진 과거의 메아리가 애절하게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아이들에겐 애완동물이 필요해요!"
놀란 아빠는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이건?"
"어맛 당신! 지금 내가 아끼는 의자에 쇳가루 흘린 거예요?"
"쥴리아?..." 처음이었다. 그날 밤 이후 아빠가 엄마의 이름을 부른 것은.
그리고 아빠가 엄마에게 소리치던 목소리도 메아리로 흘러나왔다.
아빠는 마치 돌 정승이 된 것처럼 그 자리에서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빠." 아빠의 팔을 잡고 난 다시 말을 건넸다. "누나는 어찌 되었든 갈 거야. 이게 누나를... 가족을 보는 마지막이 될 수 있는데 이렇게 보낼 거야?"
어색한 긴 침묵이 흘렀다. 아... 아빠 고집도 쇠고집이라니까! '그래 네 말이 맞다 복스' 이러면서 누나를 좀 좋게 보내주면 안 되나? 내가 속으로 구시렁대는 그 순간, 아빠는 대답 대신 누나를 꽉 끌어안았다. "내 딸아. 내가 널 보낼 것 같으냐? 그럴 바엔 아빠가 너와 함께하겠다." 그리곤 아빠는 마음을 정한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먼저 바지선에 올랐다. 누나가 바지선에 오르는 걸 돕는 아빠의 얼굴엔 굳은 결심이 보였다.
"이봐~ 나도 있다구!" 마지막으로 나도 가벼운 몸놀림으로 배에 올라탔지만 날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섭섭하네 정말! 그래도 부녀지간에 화해한 것만으로 충분하지 뭐.
불타는 만을 빠져나가는 바지선의 뒤로 아빠도 누나도 그리고 그 누구도 듣지 못한, 과거의 메아리 중 마지막 부분이 흘러나왔다.
"유감이군..."
*
이후 시간은 흘러 호사가들은 우리 일행에 대해 열심히 입방아를 찍어대기 시작했다. 누나가 어떻게 그 강력한 폭풍 여왕에게 대항할지 (이건 솔직히 나도 모르겠어), 그날 밤 불타는 만에서 기디안과 폭풍경비대가 어떻게 격돌을 벌였는지, 그 난장판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사히 빠져나왔는지 말이야. 이제 많은 영웅이, 폭풍 여왕 처단의 기치를 높이 든 누나의 진영에 모여들었어. 그래그래. 다 좋다 이거야. 근데 왜 누나의 샤방샤방한 별의 힘만 언급되고 내 활약에 대해선 아무도 신경을 안 쓰는 거지? 빛 못지않게 소리의 힘도 강력하다고! 내가 두 번이나 멋지게 충격파를 쏘지 않았다면 그날 밤 불타는 만에서 탈출하지 못했을 껄? 뭐 그래도 이 글을 읽는 넌 알고 있겠지. 이 몸의 활약상을 말이야! 그럼 다시 소식 전할 때까지 이만 안녕~
모닥불을 쬐고 있는 늙은 드루이드 옆에 광전사가 쓰러지듯 주저 앉았다. 허리춤의 도끼가 절그덕 소리를 냈고, 손엔 순록의 잘린 다리가 들려있었다. 그들의 뒤로, 사람들이 진흙과 짚을 이용해 오두막의 벽을 바르고 있었고, 그 사이로 얼음장 같은 바람이 휘몰아쳤다. “영감, 이제 설명 좀 해보시지.” 한 입 크게 베어 먹어 힘줄이 덜렁거리는 순록의 앞발로 드루이드를 가리키며 그녀가 말했다. “한 시간만에 지진이 5번이나 일어났다고. 벽에 구멍까지 났잖아. 옛 이야기에 빠삭한 영감이라면 뭔가 이유를 알 것 같은데?”
“만물에 관한 진실이 하나 있지.” 드루이드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받았다. "이곳의 땅속엔 대장로 거드문드가 잠들어 있다네. 그는 태고의 떡갈나무 군나르의 아들이며, 가이미르의 형제이기도 하지. 가이미르와 거드문드는 사이가 무척이나 나쁘다네. 다투기도 많이 다퉜지." 모닥불 사이로 춤을 추듯 드루이드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형제의 전쟁은 너무나 격렬해서 그들의 분노가 휩쓴 자리엔 폐허만이 남았다네. 이를 보다 못한 군나르는 노래를 불러 아들들을 잠재우고는 땅속 깊이 그들을 묻어버렸지. 거드문드는 이 세상의 북반구에, 가이미르는 남반구에 말이야.”
"어이 잠깐, 가이미르가 거드문드의 아빠라고?"
“가이미르는 거드문드의 형제이자, 군나르의 아들이라고!” 늙은 드루이드가 으르렁댔다. “집중하시게나.”
“그러고 있수다.”
“이후 군나르는 세상을 관통하는 위대한 떡갈나무로 변신했지. 그 가지는 온 세상을 감싸 안고, 뿌리는 말썽꾸러기 두 아들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지. 하지만 그들은 죽은 게 아니기에 숨을 쉬고 있는데, 지표면으로 그 숨결이 스며 나오는 곳이 있어. 바로 그곳에 생명의 우물이 있다네. 그 샘은 엄청난 힘을 담고 있지.”
“그 우물 내가 찾아보지.” 입에 고기를 가득 문 채로, 광전사가 외쳤다. "고대 숨결에 깃든 힘을 우리 것으로 할 수 있다면, 국경에서 분탕질하는 못된 서쪽 놈들을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을거야!”
“여기서 가장 가까운 우물은 사원의 중심에 있다네. 인류가 그 힘을 잘못된 곳에 쓰지 않도록 거대한 요새(포트리스)가 우물을 지키고 있지."
광전사는 고기를 씹으며 오만하게 말했다. "하! 일개 요새 따위가 날 막을 수 있을 것 같나."
늙은 드루이드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딴 생각하지 마시게.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둬야 할게야. 그래야 내가 떠난 후 다른 사람에게 또 이 이야기를 해줄테니.”
광전사가 고개를 홱 돌리며 드루이드를 바라보았다. “어디로 갈 생각인가?”
광전사가 늙은 드루이드가 깜빡 잠들었음을 알아차리기 전까지 긴 침묵이 감돌았다. 그녀가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자 늙은 드루이드는 코를 한 번 골더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대장로 거드문드가 꿈틀거리고 있다네. 샘을 통해 스며 나오는 그의 숨결이 강해지고 있어. 얼음도 녹고, 바로 그 숨결이 지표를 뒤흔드는 걸세. 나는 세상의 반대쪽으로 가서 그의 형제 가이미르의 샘을 확인해야만 한다네.”
“영감이 이 세상의 반대편으로 간다고? 800살이나 먹은 그 노구를 이끌고 어디를 간다는 거야!”
늙은 드루이드가 꺽꺽거리며 웃었다. “난 자네가 생각하는 것 만큼 무기력하지 않다네. 강철로만 전투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이 거드문드란 녀석이 악몽을 꾸면서 지진을 일으키고 있는 거라면, 그놈을 영원히 잠들게 해주겠어. 샘 밑으로 가서 도끼를 눈알에 꽂을 거야. 그런 다음 코를 꿰어 낚아 올려서 그 빌어먹을 떡갈나문지 뭔지 하는 것 앞에 효수해 주겠어.” 광전사가 한 손에 도끼를 쥔 채 번쩍 일어나서는 호기롭게 외쳤다. “바보 같은 나무에 붙잡혀 있는 놈 따윈 두렵지 않다고.”
늙은 드루이드가 끙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관절을 삐그덕대며 일어서더니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피에 물든 투구 사이로는 사물을 명확하게 보기 어려운 법이지. 이 전투는 자네의 것도, 내 것도 아니라네. 이건 우리가 피해 달아나야만 하는 두려움일세. 허튼생각 말고 우리 백성들을 저 샘으로부터 가능한한 멀리 대피시키도록 하게. 난 위대한 떡갈나무 군나르의 자궁으로 갈 걸세. 일행을... 데리고 말이지.”
“일행이라니 누구를...”
땅바닥이 이전보다 더 강하게 흔들렸다. 타닥타닥 타오르던 모닥불 안의 장작들이 흩어졌다. 광전사는 중얼대며 굴러나온 나무를 다시 모닥불로 차 넣었다. 그녀가 뒤돌았을 때, 늙은 드루이드는 느릿느릿 오두막 밖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멀리서, 차가운 북녘 공기 사이로 늑대의 울음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2편 '무너진 사원'
[ 펼치기 · 접기 ]
할시온의 힘이 오랜 우물로부터 스며 나오니...
젊은 수컷 늑대 한 마리가 온 힘을 다해 사원의 밖으로 뛰쳐나왔다. 길게 빼문 혀, 거친 숨소리, 피딱지로 엉켜 붙은 털... 늑대의 눈엔 공포가 서려 있었다. 정신없이 내달리던 늑대는 이윽고 흙과 얼음이 만나는 경계선에 다다랐다. 그곳엔 어마어마한 덩치의 존재가 오연히 서 있었다. 젊은 늑대는 사정없이 떨려오는 몸을 가누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눈앞의 우두머리는 감히 자신이 눈을 마주할 수 없는 지고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세상의 종말이 온 것처럼 땅은 비명을 지르며 흔들렸고, 만년의 역사를 담은 빙하는 사정없이 갈라졌다. 우두머리는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멀리,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것은 울음소리라기보다 고통에 찬 비명이었다. 우두머리의 반려, 아들, 딸들의 신음 소리...
처음 땅이 요동친 후, 우두머리는 고대 사원의 내부를 유심히 관찰하였다. 일찍이 그가 접해보지 못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땅의 흔들림은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졌으며, 희미하게 풍기던 냄새는 이제 악취로 변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늑대 무리는 혼란에 빠졌고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우두머리가 직접 나서야 할 정도였다. 또한, 악취에 더해 사원 가장 안쪽의 얼음이 녹기 시작했고, 얼음이 녹은 물은 사방을 질척질척한 진흙 웅덩이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그때 덩굴이 나타났다.
덩굴은 우두머리를 포함한 그 어떤 늑대도 보지 못한 기괴한 모습이었다. 덩굴은 진흙탕 속에서 순식간에 자라나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거치적거리는 것은 무엇이든지 갈아버렸다. 오랜 풍파를 견뎌낸 사원의 기둥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원이 부서지는 것에 분노한 늑대 무리는 덩굴을 날카로운 발톱으로 끊어내려 했지만, 덩굴은 순식간에 다시 자라났다. 이윽고 덩굴이 완전히 파괴해버린 할시온 우물이 있던 자리는, 썩은 내를 풍기는 구멍이 시커먼 아가리를 벌렸다.
덩굴뿐만이 아니었다. 유구한 세월 어둠 속에 잠들어 있던 알들이 진흙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더니 부화하며 괴물들을 쏟아냈다. 소름 끼치는 이빨을 한 괴물들을 상대로 늑대들은 으르렁대며 용감히 맞서 싸웠다. 송곳니로 괴물의 가죽을 찢고 숨통을 끊어 놓았지만, 그것들은 끝이 없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괴물들의 덩치는 점점 커져 이윽고 늑대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진흙 웅덩이 그 자체가 게걸스럽게 늑대들을 집어삼키려 들어 늑대들은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무리의 저항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바로 곤충들.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은 흡혈 모기떼와 살인 말벌떼가 늑대들을 사방에서 덮쳤고, 핏빛 개미떼가 늑대들의 억센 털 사이로 들어가 그들의 가죽을 물어뜯었다. 늑대들은 이 곤충떼에 대항하기 위해 짖어도 보고 입으로 물어도 보았지만 헛된 저항일 뿐이었다.
지금은 잊혀 버린 고대인이 건설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사원. 그리고 이 사원이 지어졌을 때부터 신성한 우물을 지켜온 우두머리. 그에게 우물을 버린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선택해야 했다. 우물을 지키려면 그의 무리가, 그의 핏줄이 모조리 죽는다!
"돌아가라. 가서 무리에게 후퇴하라 일러라." 거친 숨을 내쉬는 젊은 늑대는 우두머리의 명을 충실히 따랐다. 비록 그 길이 죽음으로 이어지더라도 우두머리의 명은 절대적이다. 젊은 늑대가 자리를 뜨자 우두머리는 이 모든 비극은 관심 없다는 듯 찬란히 빛나는 달을 바라보았다.
"오랜 친구여." 그가 나지막이 으르렁댔다. "그대의 도움 필요하다."
그리고 포트리스가 내지른 포효는 차가운 대기를 찢어발기며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3편 '위대한 떡갈나무'
[ 펼치기 · 접기 ]
세상을 가로지르는 통로가 열리나니...
비록 늙었지만 드루이드는 위풍당당한 모습을 자랑했다. 머리 장식에서 우뚝 솟아오른 뿔과 어깨에서 장화까지 늘어진 통짜 가죽은 그의 굳은 심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드루이드의 앞에 서 있는 거대한 떡갈나무... 장대하게 뻗은 가지는 잿빛 하늘을 가렸고, 거대한 밑동은 열 명의 장정이 둘러싸야만 안을 수 있을 정도였다. 드루이드는 위대한 떡갈나무 군나르의 얼굴이 새겨진 밑동 앞에 섰다. "우리 무리가 네 늙은 뼈다귀를 실은 썰매를 끌고 다닌 사실을 잊었는가!" 으르렁대며 포트리스가 말했다. "어서 세상의 반대편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열어라."
"좀 기다리시게 늙은 친구. 위대한 어머니 군나르는 지금 혼란에 빠져있어. 좀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네."
"흥 네 녀석이 언제 여성을 진정시켜 본 적이나 있던가?" 포트리스가 빈정댔다.
드루이드는 얼굴에 인자한 미소를 띠고는 말했다. "우리 북녘인들 사이엔 속담이 하나 있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위대한 군나르께선 그런 정성을 원하는 걸세." 드루이드는 떡갈나무 아래의 눈을 지팡이로 파더니 아직 설익은 녹색 도토리를 한 아름 집어 올렸다. 그리고 꼭지를 따고는 쌉싸름한 과육을 와그작 베어 물었다. "자네도 어서 들게나." 포트리스는 께름칙한 표정으로 드루이드가 내민 도토리를 마지못해 씹어 넘겼다.
둘은 나란히 침묵 속에 기다렸다. 이윽고 신호가 왔다. 드루이드는 허리를 굽히고는 아픈 배를 움켜쥐며 떡갈나무 밑동에 기댔다. 그의 머리는 빙글빙글 돌아갔으며 시야는 흐릿해졌다. 마치 이 세상 자체가 지워지는 듯했다. 이는 포트리스도 마찬가지라 기묘한 느낌에 맞서 대항해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순간,
"나의 아이야. 무엇을 구하러 이곳까지 발걸음을 하였느냐?"
위대한 떡갈나무 군나르의 음성이 둘의 심혼에 울려 퍼졌다. 드루이드는 고개를 겨우 들어 군나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위대한 어머니시여. 세상 저편으로의 통로를 구하기 위해 왔나이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드루이드의 목소리는 높게 갈라졌다. 하지만 이상한 건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드루이드의 위엄을 상징하는 통짜 모피는 우스꽝스럽게 줄어들었고, 당당했던 수사슴 뿔 머리 장식은 쪼그라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가 평소 자랑스러워 하던 수염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늙은 드루이드가 소년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떡갈나무의 밑동으로부터 가지가 뻗어 나와 한때 드루이드였던 소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아. 아들의 온기를 느껴본 지가 언제였던가... 네 동료는 지나가도 되지만. 넌 나와 함께해야 한다."
"어림없는 소리!" 포트리스가 일갈하며 앞으로 뛰쳐나가려 했지만, 마치 물에 빠진 듯 굼뜨기 그지없는 동작으로 허우적댈 뿐이었다.
소년은 양팔을 뻗어 우두머리 늑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늑대의 털에 얼굴을 파묻고는, 콧잔등과 귀를 부드럽게 토닥이며 말했다. "앞으로 나아가게나 늙은 친구. 우리에겐 선택지가 없다네."
포트리스는 신음성을 내뱉으며 오랜 친구에게서 마지못해 물러섰다. 그리고 목을 길게 빼고는 달은 향해 비통한 울음을 내질렀다. 멀리서 우두머리의 명령을 기다리던 다른 늑대들도 이를 따랐다. 늑대 무리의 구슬픈 울음은 떡갈나무의 가지에 둘러싸여 사라져 가는 드루이드를 위로하듯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이윽고 군나르의 얼굴이 사라진 곳엔 통로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공기, 그리고 음습한 냄새... 포트리스는 이를 악물고 조심스레 어둠 속으로 끝도 없이 이어진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차디찬 눈밭. 로나는 늙은 드루이드를 따라잡고자 늑대 썰매 자국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사냥터이자 고향인 마을에서 이제 겨우 하루 남짓 이동했을까… 로나가 떠나온 마을은 어둠녘의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모인 사람들이, 힘든 삶은 이어가는 곳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순백의 세상. 로나의 뇌리에 피난길에서 헤어지고는 두 번 다시 보지 못한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살얼음이 코를 막자 로나는 코를 씰룩거리며 얼음을 털어냈다. 로나는 단 한 번도 늙은 드루이드의 명령을 거역하지 않았다. 드루이드 일족은 로나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이 삭막하기 그지없는 동토에 문명을 선물했다. 그들이 가르쳐 준 수학, 문자, 천체의 비밀이 없었다면 문명은 적어도 수백 년은 뒤처졌으리라. 그런 드루이드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쑤라 해도 따랐던 로나. 그런 그녀가 자신을 쫓지 말라던 선지자의 명을 지금 어기고 있다.
로나가 눈밭에 남은 썰매의 흔적을 찾으려 쭈그리고 앉은 바로 그때, 뿔 달린 스크바더의 공격이 시작됐다.
마치 보호색처럼 하얀 털로 덮인 괴물들이 눈 속에서 마구 튀어나왔다. 로나의 무릎 높이를 조금 웃도는 짤막한 키에 기다란 귀, 그리고 그사이에 우뚝 솟은 뿔. 날개를 활짝 편 스크바더 무리는 로나의 어림짐작으로도 열댓 마리는 되어 보였다.
로나는 욕지기를 내뱉으며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던져버렸다. 그리곤 단련된 솜씨로 허리춤에 찬 도끼를 튕겨 올려 양손에 꼬나쥐었다. “빌어먹을 스크바더 녀석들… ” 스크바더 무리가 자신을 둘러싸자 로나는 이를 갈았다. 이 하얀 악마들은 끔찍하게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질러댔다. “그래 봤자…” 짜릿한 긴장감이 그녀의 척추를 타고 흘렀다. 왼손에 든 도끼를 휘두르자, 로나의 옆구리를 물어뜯으려는 스크바더 한 마리의 목이 날아갔다. 이를 시작으로 온 사방에서 스크바더들이 굶주린 배를 채우려 달려들었다. “… 화톳불에 달려드는 부나방 신세지!” 로나의 쌍도끼가 허공에 미려한 곡선을 그리며 춤을 췄다. “두 놈!” 긴 뿔로 로나를 찌르려던 녀석의 허리가 동강났다. “세 놈!” 날카로운 발톱을 내밀고 쇄도하던 녀석의 다리가 날아갔다. 하지만 역시 숫자에는 장사가 없는지, 하나둘씩 로나의 몸에도 생채기가 나고 있었다.
“제길. 이놈들은 질리지도 않나…” 로나가 스크바더들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게다가 이놈의 늙은이는 날 떼놓고 세상의 저편으로 가려고 한단 말이지?” 로나의 끓어오르는 분노가 도끼를 붉게 달구었다. 이에 질세라 스크바더들도 광기로 눈을 희번덕이며 그녀의 사각을 치고 들어왔다. 로나는 아예 거추장스러운 망토까지 벗어버렸다. 차가운 동토의 공기와 그녀의 등에서 흐르는 뜨거운 땀방울이 만나 아지랑이 같은 수증기를 피워올렸다.
“반드시 찾아낼 거다 늙은이!” 그녀가 고함이 사방을 울렸다. “이 로나를 감히 뭘로 보고!” 발뒤꿈치로 눈밭을 세게 찍은 로나는 체중을 이용해 그대로 도끼를 크게 휘둘렀다. 넓은 호를 그린 도끼날은 스크바더 세 마리의 머리통을 갈아버렸다. “으아아아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로나는 스크바더 무리의 중앙으로 뛰어들며 죽음의 춤을 추었다. 스크바더의 몸에서 솟구치는 피가 마치 핏빛 안개처럼 새하얀 눈을 붉게 물들였다.
“반드시 찾아낼 거라고오!!”
로나의 핏빛 춤은 스크바더 무리가 전멸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윽고 마지막 스크바더가 쓰러지자 로나는 회전하던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고 눈밭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녀의 거친 숨소리와 함께 살갖에 닿은 눈이 순식간에 증발해 사라졌다.
“끄응…” 분노가 가라앉은 로나는 몸 상태를 살펴보았다. 상처 난 뱃가죽은 물론 온몸이 아려왔다. 하지만 사실 광전사인 로나에게 상처와 흉터는 마치 훈장과도 같았다. 치명상만 아니라면 자연히 아무리라. 로나는 다시 망토를 두르고 배낭을 메고는 자신이 도끼로 찍어버린 스크바더 시체 중 일부를 다듬기 시작했다. 이 신선한 고기는 생전의 고약한 성질머리만큼이나 맛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늙은 드루이드를 태운 썰매를 끄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늑대들에게 좋은 조공이 될 것이다.
눈밭의 흔적과 자취가 아직 가시지 않았다. 한 시간 남짓이면 드루이드 늙은이를 앞지를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그녀는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5편 '언제나 북쪽으로...'
[ 펼치기 · 접기 ]
위대한 떡갈나무 안으로 들어간 로나는...
바람에 실려 오는 늑대의 냄새를 추적하던 로나가 멈춰 섰다. 그녀의 앞에는 최근 사용한 게 분명한 빈 썰매가 나뒹굴고 있었고, 떡갈나무 군나르의 장대한 모습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었다. 그런데 떡갈나무의 거대한 밑동에는 그녀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늙은 드루이드가 덩굴에 묶여 있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로나는 허겁지겁 늙은 드루이드를 살펴보았다. 설익은 도토리를 먹지 않은 그녀의 눈에는 그가 제대로 늙은이로 보였다. 공허한 눈동자와 창백한 안색…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오, 이런 안 돼…”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이 그녀에게 밀려왔다. “제길… 안 된다고!” 로나는 배낭을 허겁지겁 내려놓고는 아끼는 도끼, ’전장의 함성’과 ‘핏빛 울음소리’, 두 자루를 손에 쥐었다. 드루이드의 몸을 조이던 나뭇가지를 빠르게 베어내는 로나. 하지만 자르고 또 잘라도, 억센 가지와 덩굴이 다시 자라났다. 로나의 눈에는 뿌연 습막이 피어올랐다. “이 빌어먹을 장작더미야. 드루이드를 돌려놔!” 절규하는 로나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이내 얼어붙어 버렸다.
로나는 망토로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얼굴을 훔치고는, 군나르를 노려보며 숨을 깊게 내뱉었다. “좋아… 항상 답은 북쪽에 있지.” 그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허리춤에 도끼를 찔러 넣고 다시 이동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는 떡갈나무 밑동에 크게 난 구멍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곳에는 소용돌이치는 어둠이 끔찍한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이봐! 거기 누구 없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메아리치는 건 그녀의 목소리뿐… 결국 로나는 구멍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구멍 안은 이끼와 튀어나온 뿌리가 가득했다. 로나는 발을 헛디디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하지만 내려갈수록 산소는 희박해지고 온도는 올라가 로나의 정신은 점점 혼미해졌다. 결국 로나는 비몽사몽간에 몇 번이나 구르면서 끝없는 통로를 힘겹게 나아가야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내리막길이 어느 순간 오르막길로 바뀌었다. 혹자는 말한다. 산을 탈 때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오는 게 더 힘들다고. 하지만 로나는 아니었다. 내려가는 것보다 배는 힘든 오르막길을 그녀는 이를 악물고 걸었다.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얼굴, 물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은 가죽 물통… 로나는 희미해져 가는 정신을 억지로 가다듬으며 나아갔다.
정신줄을 놓기 직전 희미한 불빛이 스러져가는 그녀의 몸뚱어리를 비췄고, 로나는 마침내 통로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세상의 반대편에 첫발을 내딛는 그녀의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앞엔 빽빽한 정글이 펼쳐 졌다. 밀림의 공기는 너무나도 습해, 마치 물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태양은 그녀의 고향인 동토를 비추던 것과는 달리 아름다운 주황빛으로 빚나고 있었고, 사방엔 알록달록한 새싹과 꽃들이 만발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로나는 양손에 도끼를 꼬나쥐고 돌계단을 올랐다. 이제는 잊혀 버린 고대의 돌 조각상과 석상을 지나치자 유적의 안뜰에 도착했다. 뜰의 한가운데엔 우물이 있었고, 우물 위 허공에는 거대한 수정이 반짝이며 떠 있었다. “우와아!” 처음 보는 광경에 로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고, 하마터면 주위로 늑대 무리가 접근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뻔했다.
우두머리 수컷의 덩치는 그가 네 발로 섰음에도 로나보다 훨씬 커 보였다. 로나는 전투태세를 갖추고 노려봤지만, 우두머리는 미동도 하지 않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흐음… 늙은 드루이드가 말하던 이가 바로 그대로군.”
로나는 우두머리의 입에서 튀어나온 드루이드라는 말에 도끼 두 자루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할아범을 알아? 그러는 넌 누구지?”
"난 포트리스라네." 늑대 우두머리가 대답했다.
“네가 그 유명한 사원의 수호자로군.”
“그러는 그댄… 광전사 로나인가.”
"그래, 내가 로나야." 포트리스의 말에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은 양 로나는 어깨를 활짝 폈다.
“스카이! 지금 여기서 무얼 하는 거냐!” 장군의 그림자가 격납고 안으로 길게 드리워졌다. 스카이는 기체의 조종석에서 슬쩍 바깥을 바라보았다. 기체 전면 장갑의 절반은 날아가 있었고, 검게 그을렀으며 충격에 의해 움푹 패어있었다. 드라이버를 이빨로 문 채, 새까맣게 탄 작동기를 땅바닥에 던져놓고서야 스카이는 응대했다. “여기 와 주셔서 고마워요 아빠(Abba). 폐기체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계획을 설명드릴게요.”
“그만두어라. 엄마랑 약속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스카이는 아빠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말을 이었다. “추진 장치는 이상 없어요. 기체의 보호 장갑만 손보면...” 몸을 숙이며 스카이는 말을 이어갔다. “장갑의 문제를 제가 파악했죠. 매번 새로운 세대의 기체가 나올 때마다 우린 장갑을 덧붙였어요. 때문에 중량이 증가했고, 늘어난 무게를 감당하려 엔진도 커지고 수정력도 더 많이 필요...”
“그 때문에 더 많은 수정 광산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를 둘러싸고 전쟁이 빈발하고 있지.” 장군의 얼굴은 딱딱했으나 눈빛과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지금은 이런 토론을 할 때가 아닌 것 같구나.”
“들어보세요 아빠. 기체가 너무 느려서 쉽게 조준 당하는 거라구요.” 스카이가 말을 하며 헐거워진 나사를 풀어내자 나사가 팅팅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여태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던 거예요. 우린 기체의 기동성을 더 높여야 해요.” 헐렁해진 전면 장갑을 스카이가 발로 차자 장갑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화력을 더 늘리는 거예요. 이 녀석에게 25밀리 중기관총을 달았어요. 그리고 후면 날개엔 고출력 추진 장치를 달았고, 마무리로 할시온 로켓 포대도 장착했어요. 예 아빠 알아요. 이 정도의 무장은 위험할 수 있...”
“스카이. 그녀가 오고 있단다.” 듣다 못한 장군이 딸의 말을 끊었다.
“그녀라니요? 설마?”
“음. 벌써 왔군. 자 일들 하시게나.” 문 쪽에서 서두르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일단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남자 두 명이 전신 거울을 안으로 들여다 놓았고 재단사는 입술에 핀을 물고서 옷감을 준비했다. 그 외에도 네일 아티스트, 미용사 그리고 화장 도우미 로봇까지 부산을 떨어댔다. “어허. 기름때 묻히지 않게 조심하라고. 그 실크는 네 월급보다 비싸니까.” 풍성한 올림머리를 한 검은 눈동자의 여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엄마,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스카이가 조종석에서 징징댔다.
“오늘 밤 간택식에서 안 갈 거냐 이 망아지 같은 녀석아. 그딴 것에서 얼른 내려오지 못해!”
“안 간다고 말했잖아요. 지금 간택식이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전쟁이 일어나고 있어요.” 스카이는 도와달라는 듯이 아빠를 향해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장군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광산을 둘러싼 전쟁은 늘 벌어지고 있지. 그리고 너도 이젠 시집을 가야 하지 않겠느냐.”
“난 파일럿이에요 아빠. 그리고 아빠 부하 중 가장 뛰어난 파일러.. 아야!” 메이크업 봇이 핀셋으로 눈썹을 뽑아내자 놀라서 움찔거렸다. 메니큐어리스트는 스카이의 부러진 손톱과 굳은 살을 손질하며 혀를 쯧쯧 차댔다. 헤어디자이너는 머리끈을 벗겨내어 엉킨 머리카락을 풀기 위해 거칠게 빗짓을 해댔다.
“색조 화장에서 검은색은 빼도록.” 스카이의 엄마가 로봇에게 지시했다. “검은색은 눈을 작게 만들지. 그리고 입술은 풍성하게 그려. 입술이 탐스러워야 사랑을 받는 법이야.”
도우미 로봇은 스카이가 씩씩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마님의 지시를 따라 화장을 칠해갔다. “이봐요 엄마. 이렇게 변장수준의 화장에 성공해서 오늘 밤 명문가의 며느리로 간택된다고 쳐요. 그럼 그 댁 아들은 내 쌩얼을 보고 뭐라고 할까?”
“물고기를 잡는 방법과 보관하는 방법은 다르지.”
“하! 그래서 남자는 물고기다?” 스카이가 툴툴댔다.
“머리에는 금빛 고리와 화초를 올리거라.” 스카이의 엄마가 그녀의 말은 무시한 채 말했다. “스카이, 오늘은 정말 중요한 날이란다. 바론의 모친이 며느릿감을 고르는 날이지 않으냐.”
스카이는 머뭇거렸다. “그녀는… 그녀는 절대 날 선택하지 않을 거예요. 오늘 밤 간택식엔 명문가의 영애들이 많이 나올 거란 말이에요.” 미용사가 마님의 지시를 받아 의자 위에 올라서서 스카이의 머리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모름지기 이러한 선택에는 항상 정치가 개입되지. 장군의 딸은 단순히 여성의 미모를 넘어선 특별한 의미를 지닌단다.” 어머니가 답했다.
“군소 가문들이 자신들의 영예를 바론가와 맺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건 무척 큰일이다. 실질적으로 바론의 권위에 대항하는 행위로 해석되어, 전쟁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아.” 근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장군이 말했다.
“흥. 만약 그들이 전쟁을 원한다면 매운맛을 보여줄 거에요. 내 새로운 기체로 박살 내 버릴거라구요.” 스카이의 조종사복이 벗겨지고 재단사가 드레스를 입혔다. 그가 무릎을 꿇고 핀을 꽂아가며 바쁘게 단을 조정하는 사이 스카이의 엄마가 다시 닥달했다.
“똑바로 서봐. 그대로 두었다간 드레스가 미니스커트가 되겠어!!”
2편 '선택'
[ 펼치기 · 접기 ]
테이블 위에 각자의 이름이 적혀 있는 은색 타일이 놓여있다. 스카이는 긴장에 가득찬 채 테이블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소녀들을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다른 쪽에선 결혼적령기의 청년들이 모여 윷놀이를 하며 ‘간택’의 결과엔 관심이 없다는 듯 흥겹게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반면, 젊은 처자들은 서로의 이름을 힐끔거리며 고위 가문의 안방마님이 과연 누구를 며느리로 낙점할까에 대해 수다를 떨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스카이는 한 쪽 눈을 감은 채 호랑이 가문의 장녀이자 이쁘장하기까지 한 ‘나리’란 이름의 소녀를 쏘아보았다. 그녀의 가녀린 손목엔 발톱이 제거된 호랑이를 묶고 있는 벨벳 목줄이 감겨있었다. 호랑이는 약에 취해 모여있는 사람들을 꿈뻑꿈뻑 쳐다보고 있었다. “스카이, 네가 괜찮은 가문에 간택되었으면 좋겠어.” 그녀가 말했다. “안방마님이 깜짝 놀랄만한 간택을 한다면, 이 지루한 분위기가 깨지려나.” 바론 실버를 위해 호랑이 가문의 영애를 선택하는 게 외교적으로 현명한 선택임은 모두에게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올해 호랑이 가문은 실버 가문과 전면전을 벌이고 있다. 군사력의 호랑이 가문답게 실버 가문의 메카닉 부대를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 하지만 스카이의 혁신이라면 …
스카이는 손가락이 쿡 찌르는 느낌이 들어 얼른 자세를 똑바로 했다. 그녀의 지난 밤, 그녀의 엄마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옆구리를 멍이 들도록 찔러대고, 주의사항을 주입시켜 댄 효과가 나타난 것이었다. 스카이는 얼굴에 가면을 두른듯 가식적인 웃음을 띤 채, 나리의 말에 대꾸하기를 거부하곤 고귀한 아가씨가 물러날 때까지 그녀의 지루한 눈빛을 견뎌냈다.
“휴, 숨 좀 돌려야겠어.” 스카이는 두 개의 허니 파이를 외투 소매 속에 숨겨 어두운 정자로 향했다. 저 멀리, 큰 언덕 아래 실버 가문의 저택이 보였다. 외딴 마을과 농지와 미니언 캠프를 지나, 밤 하늘 아래서 고요하고도 섬뜩한 푸른 빛을 내는 수정 광산도 보였다. 그 풍경을 보며 스카이는 파이를 한 입에 털어넣었다.
“너한테서 기름 냄새가 나는군.”
바론이 그녀 뒤로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그의 숨결에 스카이의 목 뒷덜미가 간질거렸다. 바론은 그녀에 손에 들린 남은 파이 하나를 뺐어들어 자기 입에 집어넣었다. 그는 자기 가문을 상징하는 은색 자수가 새겨진 예복을 입고 있었고, 손가락엔 은반지가 가득했다. 옷을 걸쳤다기 보단 부를 걸친 느낌이었다. 그 모든 부는 그의 증조부가 수정 광산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다른 모든 가문이 수정을 얻기 위해 경쟁하고, 싸우고, 죽었다. 실버 가문은 단지 캐기만 하면 되는 그것을 말이다.
“뭘 모르시는구만.” 스카이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몸짓으로 팔짱을 낀 채 말을 이어갔다. “이거 최신 향수라고. 이번 시즌, 모든 여성들이 사용하는 거거든.”
“머리 이쁘네.”
“이제 매일 아침 이렇게 해야겠네.”
바론이 정자의 기둥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아버지들께서 지도를 보며 전략을 짜는 동안, 너와 내가 같이 놀던 어린 시절이 그리 오래 전 같지 않은데 말야…”
“이제 곧 네 아버지 전쟁을 네가 이어받아야겠지.”
“푸른 돌 따위를 차지하기 위해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꼴이 참 우습다.”
스카이가 멀리 있는 광산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광산이 고갈되면 어떻게 될까?”
“전쟁 기계에 수정력이 다 빨려 아무짝에 쓸모없는 수정조각만 남겠지. 그렇게 되면 농지마저 깊게 파들어갈테고, 소수의 사람만 먹고 살 수 있게 되겠고.”
스카이는 바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대신 그의 손의 흉터를 바라보았다. “우리 아버지가 수정력을 충전할 수 있는 강력한 우물들이 어딘가에 있다고 말씀하셨어.” 그녀의 말에 바론은 고개를 저었다.
“그 우물은 우리가 사용하기엔 너무 먼 곳에 있어. 광산이 사라질 날이 오길 바라고 있어. 그 땐 더이상 메카닉과 탱크, 추잡한 미니언들 그리고 이 우스꽝스러운 맞선 세레모니 같은 게 필요하지 않겠지.”
“그러한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려있어.” 스카이가 속삭이며 바론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맞아.” 바론이 손을 뒤집으며 손바닥을 맞잡았다. 그의 손엔 빛나는 은색 타일이 놓여있었다. 스카이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타일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바론의 숨결에서 꿀향이 난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군대는 내것이 될거야. 그리고 니가 내 군대를 이끌어줬으면 좋겠어.” 스카이가 전율을 하는 동안 그는 말을 이어갔다. “그 어떤 상황이 닥쳐도, 남자는 자신을 위해 선택을 해야만 하는 때가 오지.”
3편 '바론을 위하여'
[ 펼치기 · 접기 ]
"실버 가문에 간택된 영광스런 분은..." 스카이는 숨을 고르며 앞으로 나섰다. 바론의 어머니 - 미래의 시어머니가 될 귀부인이 우아한 손짓으로 수많은 귀족 영애의 이름이 적인 타일 중 하나를 선택했다.
"나리 타이거!”
사회자의 목소리는 마치 천둥처럼 스카이의 귓가를 때렸다. 잔인하도록 천천히, 나리의 이름이 적힌 타일은 귀부인의 손에 들려 올라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원에서 스카이와 밀회를 즐기던 바론은, 이제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미래의 신부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선택하지 못하게 손에 스카이의 이름이 적힌 타일을 꼭 쥔채. 잔인한 진실이 스카이의 심장을 비수처럼 후벼 팠다.
"내 군대의 사령관을 맡아줘."
'그래, 그는 아내가 되어달라고는 안 했어.'
스카이는 나리에게 축하하려 다가서는 인파들 사이로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봉황이 양각된 간택장의 문을 열고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를 지나 저택을 뛰쳐나갔다. 오늘을 위해 스카이의 어머니와 시녀들이 공들여 달아준 호박 노리개는 서로 부딪혀 짤랑짤랑 소리를 냈다. 그대로 있다간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아 스카이는 달리고 또 달렸다.
창백한 달빛을 의지하여 달리던 스카이가 도착한 곳에는 거대한 격납고가 마치 어둠녘 야수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여염집 처자라면 슬픔과 좌절을 견디지 못하고 엄마 품에 돌아가 펑펑 울었을 테지. 하지만 스카이에게는 이 격납고가 집이요 안식처고, 가장 마음의 평온을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거추장스러운 한복을 벗어버리고 귀찮은 장신구를 다 떼 버린 스카이는 가장 아끼는, 화약과 기름때로 찌든 외투를 걸치고 맥 워리어의 열린 해치로 기어들어갔다. 조용한 조종석에 걸터앉은 그녀의 머릿속에는 내일 어떻게 다른 동료 파일럿들을 볼까, 집에서 학처럼 머리를 길게 빼고 기다리고 있을 엄마에게는 뭐라 말씀드릴까, 따위의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직 바론이 밀회에서 그녀의 귓가에 속삭인 말만이 망령처럼 그녀의 귀를 맴돌았다.
...'그래 나도 저놈의 수정 광산이 없어졌으면 좋겠어.'...
칠흑 같은 고요한 격납고 속 기계들 틈에서 스카이는 바론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 분쟁도 없어지고 맥 워리어나 탱크, 미니언 그리고 이런 우스꽝스런 간택 행사 따윈 없어도 되겠지.'
“그러한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려있다.” 스카이가 되뇌였다.
바론에게 더이상의 선택지는 없었지만, 바론을 위해 할 수 있는 자신만의 선택지는 남아있었다.
"파일럿 생체 인식 완료. 위상차 엔진 시동. 출격 준비 완료. 맥 워리어 커스텀 기(幾) 화랑 기동합니다." 스카이는 조종간을 꽉 움켜쥐고 맥 워리어를 조종하여 미끄러지듯 격납고를 빠져나왔다.
군법이란 모름지기 엄격하여 무허가 조종은 장군의 딸이라도 용서가 없었기에, 스카이는 조심스레 맥 워리어를 몰아 기지의 후문을 빠져나왔다.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아대는 미니언들이 가득한 주둔지를 지나 빽빽하게 심겨 있는 감귤 나무 사이를 빠져나온 스카이는, 이윽고 끝없이 펼쳐진 논밭으로 힘차게 날아올랐다. 이제는 먼지만이 가득한 논과 밭에는, 과거 바론의 조상들이 벌인 전쟁의 잔해인 살인 기계들이 흉물스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할시온 우물과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가공할 힘을 차지하려는 각 가문의 욕심은, 농기계마저 사람을 죽이는 전쟁 기계로 개조하는데 충분한 동기를 제공했다. 한때 농부들의 콧노래와 황금 물결이 넘실대던 비옥한 평야는 병사들의 피와 화약으로 찌들어 그 풍요로움을 상실한 지 오래다.
이윽고 화랑은 철조망을 넘어 한 마리의 날쌘 수리처럼 베인 광산의 높디높은 벽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공 모양의 경비 드론이 화랑의 인식 번호와 그녀의 홍채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조종사 7-0-5. 경보! 경보! 비인가 맥 워리어 발견. 즉시 기지로 귀한 바란..."
기계음을 내뱉던 드론은 스카이가 난사한 기관단총에 가루가 되어 버렸다.
스카이는 불타는 눈동자로 전면의 거대한 광산을 노려보았다.
"위선자! 니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스카이는 이를 갈며 다짐했다. "목표 고정. 베인 광산. 위상차폭격 준비 완료. 명령 대기 중"
첫 번째 미사일이 광산 깊숙히 박혀들어갔다.
이윽고 화랑이 발사한 무차별적인 폭격에 광산이 무너졌고, 수백 조각으로 깨진 수정은 마치 반짝이는 크리스탈 샹들리에처럼 밤하늘을 수놓았다.
지난 수 세대 동안 문명의 거름이 된 베인 광산이 끔찍한 비명 지르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다. 활공하며 끊임없이 미사일을 퍼붓는 화랑의 노즐 사이로 해방된 것을 즐기기라도 하듯 할시온 연기 한 줄기가 춤을 추며 야공으로 퍼져나갔다.
바론은 격납고의 문을 열었다. 사방에 가득한 푸른 불빛 속에서 긴장한 그의 얼굴이, 기체의 거울처럼 잘 닦인 표면에 비쳤다. 현대 기술의 총체라 할만한 이 맥워리어는 그들 가문의 새로운 동맹을 기념하며 제작되었다. 강화 합금을 덧댄 투구와 관절에는 포효하는 호랑이 장식이 새겨져 있었고, 경량화한 신소재로 믿을 수 없을 만큼 기민한 조작성과 적의 직격탄도 너끈히 버텨내는 튼튼한 방어력도 확보했다.</br></br> "삑-. 생체 신호 감지. 바론. 승인되었습니다."</br> </br>그가 검지를 인식기에 대자 맥워리어의 탑승구가 열렸다. 문득 바론은 자신이 아직도 은빛 새장을 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새장의 문을 열자 성난 거위가 한 마리 튀어나왔다. 거위는 바론을 보고 한 번 시끄럽게 꽥하더니 격납고 밖으로 사라졌다.
~
반도에 있는 여러 가문의 희비가 엇갈릴 간택식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한편에 팔짱을 끼고 선 바론 앞으로 하인 하나가 다가와 은빛 새장을 건넸다. 새장 안에는 무려 살아있는 커다란 암컷 거위가 꽥꽥대고 있었다. 일생에 단 하나의 반려만 두고 살아간다는 거위는 화목한 금슬의 상징이었다. 예로부터 반도에서는 결혼식을 할 때 신랑이 나무로 만든 거위 조각을 미래의 아내에게 바치는 것이 전통이었다. 여기서 소소한 차이점은 모친의 고집으로 인해 바론의 거위는 나무조각보다 지나치게 생기 넘친다는 거였지만.
간택식에 참석한 그 누구도, 바론 가문의 행복한 결혼을 위해 불쌍한 거위가 자신의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는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약혼 상대가 결정된 몇몇 아가씨들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들의 눈동자는 간택장 안을 슬프게 훑으며, 맺어지길 간절히 원했던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뭇 처자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으면서, 호랑이 가문의 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바론의 부모님 앞에서 물러났다. 그녀는 양손 한가득 다산과 행복의 상징인 호두와 대추를 들고 있었다.
"이런, 일꾼들은 뭐하는 게야! 아직 불꽃놀이를 시작할 시간이 아니거늘!" 바론의 모친이 창문 밖을 내다보며 화를 냈다. 사방에 번쩍이는 불빛을 보며 다른 사람들도 술렁댔다. 간택장 밖으로 향하는 인파를 따라 나서며 바론의 부친이 실소를 흘렸다.
"아들아. 난 네 엄마가 불꽃놀이 기술자들을 단두대로 보낼 거라는 데 걸겠다."
"아무렴요. 어머닌 후처들의 자그마한 실수도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는 걸요."
실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던 부자가 현관을 지날 때, 가문의 군대를 통솔하는 장군이 말을 걸어왔다. "가주님. 송구하지만 밖의 불빛은 불꽃놀이가 아닙니다."
세 남자는 발걸음을 재촉해 간택장 바깥으로 나섰다. 불빛은 수정 광산이 위치한 방향에서 가장 밝게 번쩍이고 있었다.
"대체 누가 광산을 공격한 것인가?"
"소관이 판단하기에 이 반도 전체에서 그런 짓을 저지를 가문은 호랑이..." 가주의 속삭임에 장군이 조심스레 답했다.
"아니, 이제 그들과 우리 가문은 하나야."
"또한, 백번 양보해도 호랑이 가문은 아직 그럴만한 힘이 없습니다." 바론도 자기 아버지의 말을 거들었다.
파랗게 일렁이는 할시온 연기가 밤하늘을 수놓았다. 바론 가문의 부와 힘의 원천이 파괴되고 있었다. "빌어먹을." 순간 어찌 된 일인지 깨달은 바론이 욕설을 내뱉었다.
장군이 물어보기도 전에 바론은 급히 몸을 돌려 간택장 안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가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바론은 현관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섰다. 공기 중에는 이제 미세한 수정 파편이 형광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겁에 질린 인파를 헤치고 시들어버린 과수원을 지나 도착한 격납고에서 바론은 보았다. 스카이가 간택식에서 입었던 겉옷이 형편없이 구겨져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는 것을.
...'그래 나도 저놈의 수정 광산이 없어졌으면 좋겠어.'...
~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고 거추장스러운 대례복을 벗어버린 바론은 맥워리어에 올랐다.
'우우우웅-'
기분 좋은 진동과 함께 조종석이 바론의 몸에 밀착되었고 전투 헬멧이 머리 위로 내려왔다. 이윽고 제트 사출기의 시동이 걸리고 활짝 열린 천장의 문으로 바론의 맥워리어가 날아올랐다.
50미터, 100미터, 150미터...
바론은 드높은 창공에서 적외선 카메라로 지상을 굽어보았다. 바글바글한 미니언 우리, 산천초목,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육지의 희미한 윤곽선... 그사이에 불타는 수정 광산이 있었고, 그곳에서 작은 적외선 신호 하나가 잡혔다. 스카이는 마치 바론을 기다리는 듯했다.
바론은 창공에, 스카이는 멀리 지상에 있었지만 그에게는 세상에 자신과 스카이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SKYE(시에라, 킬로, 양키, 에코) 응답하라."
5편 '바론의 선택'
[ 펼치기 · 접기 ]
바론은 오렌지 과수원 위를 지나 항만의 작은 어선들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내려앉았다. 맥워리어의 육중한 무게에 바닥의 돌들이 깨지며 비명을 질렀다. 그곳에는 스카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수 개조한 맥워리어를 타고, 기관단총으로 정확히 바론 기체의 포효하는 호랑이 장식을 겨냥한 채. 대화를 시도해볼 심산으로 바론은 박격포의 포신을 아래로 내리고 그녀의 기체를 탐색했다. 얼굴가리개의 HUD에 스카이의 이름과 계급 그리고 맥워리어 인식 번호가 떴다.
"당신은 날 모욕했어!" 스카이가 통신으로 외쳤다.
"무릇 아무 여자도 한 남자의 아내가 될 수 있지. 하지만 뛰어난 조종사는 아니야! 난 네가 그 길을 걷길 원하는 줄 알았어."
"위선자! 난 당신이 전쟁을 끝낼 거라고 믿었어!" 그녀의 화난 목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맥워리어의 제트 사출기가 굉음을 토해냈고, 스카이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셋을 셀 테니 당장 내려와. 셋..." 바론은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넌 항상 말했잖아. 이대로라면 우리 가문들은 이 좁은 반도를 영영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스카이가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으며 말했다.
"둘."
"이 지긋지긋한 전쟁이 우리들의 시야를 가리고 어지럽힌다고. 그걸 함께 바꿔나가길 희망한 거 아냐?"
"하나."
바론의 박격포가 불을 뿜자 먹물을 뿌려놓은 듯 어두웠던 밤하늘이 환하게 밝아졌다. 스카이가 머물던 자리는 시커먼 구멍만 남아있었다.
검은 연기가 사라진 후 바론은 얼굴가리개를 열었다. 그의 꽉 쥔 주먹에는 스카이의 이름이 적힌 타일이 들려있었다. "원했었는데..." 힘없는 혼잣말과 함께 타일을 든 손을 떨구는 순간,
"그럼 날 선택했어야지!"
바람 소리와 함께 스카이의 맥워리어가 바론의 뒤에서 나타났다. 순식간에 바론의 앞으로 비행한 그녀는 몸을 뻗어 타일을 낚아챘다. 그리고 다시 사각지대를 파고들며 기관단총을 발사했다. 바론의 HUD는 그녀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고, 맥워리어를 선회해 보았지만 스카이가 직접 개조한 개방형 맥워리어의 속도에는 한참 못 미쳤다. 바론은 겨우 얼굴가리개를 내리고 스카이가 쏜 총알을 막았다. 콩을 볶는듯한 소음과 함께 무차별사격이 그의 맥워리어를 강타했다. 피격당한 사출기에서는 경보가 울렸고 깨진 에너지 배터리에서는 파란 할시온이 새어 나왔다.
"대체 그 맥워리어에 어떤 장난을 한 거야?" 바론이 놀라며 물었다.
스카이의 웃음소리와 함께 위상차폭격이 떨어졌고 바론은 아슬아슬하게 제트 사출로 피했다. 그가 있던 자리는 끔찍한 굉음과 함께 모든 게 파괴되었다. 바론은 검은 연기 사이로 박격포를 쏘며 대응해 보았으나 역부족이었다. 출력기관을 이미 피격당한 그의 기체는 결국 제트 사출을 중지하고 땅에 거칠게 내리꽂혔다. 하지만 놀랍게도 승리의 여신이 미소를 지은 건지 스카이의 마지막 사격이 형편없이 빗나갔다. 그녀가 조종하는 맥워리어의 자세제어장치가 과부하로 망가져 버린 것이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는 바론은 미친듯이 울려퍼지는 경보를 무시하고 양성자 대포 가동했다. 목표는 비비적대고 있는 스카이의 맥워리어. 지지직대는 잔상과 함께 HUD에 좌표가 입력되었다. 그때 통신으로 스카이의 침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론, 내가 저지른 일은 내가 수습할게. 힘의 원천이라는 할시온 우물을 찾아낼 테니 날 보내줘. 이 지긋지긋한 사슬을 끊어내는 거야. 우리 함께하자..."
스카이의 말을 들은 순간, 바론은 급히 달려들어 그녀의 기체를 안고 함께 날아올랐다.
"제트 사출 최대 출력!"
바론과 스카이의 기체는 서로 끌어안은 채 아슬아슬하게 궤도 폭격에서 벗어났다. 그들 발밑으로 절벽의 한쪽 귀퉁이가 양성자 포격으로 터져나가는 게 보였다.
그을린 얼굴에 온통 할시온 조각 투성이었지만 그들은 마주 보며 웃었다. 둘의 맥워리어만이 피해입은 상태로 공중에서 힘겹게 버틸 뿐. 이후 절벽 아래로 천천히 착지하며 바론이 말했다.
"그래. 우물을 찾아 나서자. 나도 함께하겠어. 근데... 우리의 맥워리어가 박살나 버렸는데 어떡하지?"
아기의 통통한 볼 같은 새하얀 만월이 머리 위에 걸려 있었다. 흑깃은 만족스런 휘파람을 불며 궁(宮)의 난간 너머로 달을 쳐다보았다. "아아, 핀선생. 멋진 곡조가 필요한 밤이야. 안 그래?"
"유괴와 어울리는 노래 따윈 없어." 핀이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기다란 손톱으로 귀를 팠다. 이 두 하릴없는 군상은 궁의 난간 밑, 오렌지 숲 미로의 막다른 길에 꼼짝 않고 있었다. 키가 워낙 큰 핀의 머리는 미로의 가시덤불 사이로 빼꼼히 솟아났다.
"아무렴 어때!" 흑깃은 언제나 이름처럼 밤에는 새까만 옷으로 자신을 가렸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본인의 찬란한 황금 머릿결을 숨기지 않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발을 숨기는 건 죄를 짓는 거라나 뭐라나. "모름지기 모험가라면 한 나라의 공주 정도는 유괴해 줘야지. 안 그래?"
"불쌍한 소녀를 강제로 집에서 끌어내는 게 올바른 모험가인가."
"불쌍할 것 하나 없어. 곧 온 누리의 사람들이 우리를 찬양하..."
".. 그리고 우린 꽁지 빠지게 도망치고 말이지."
"내 무기와 매력, 그리고 네 불끈불끈한 근육이 합쳐지면 그 무엇이 두려우랴! 솔직히 사람들은 네 모습을 보기만 해도 출행랑치기 바쁜걸. 강에 사는 트롤이라도 본 것처럼 말이지."
"흠... 공주의 부모는 그런대로 괜찮은 왕과 왕비라 들었는데." 솔직히 핀은 이번 모험이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오래 살았으며 방방곡곡을 여행하며 많은 것을 보았다. 핀의 좌우명은 오직 하나. -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자.
흑깃은 핀의 탄탄한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오호 우리 잘나신 나으리. 돈은 필요 없어?"
"돈이야 없는거 보단 낫지."
"바로 그거야! 지난밤 우리가 묵은 선술집에서 들었는데, 이 공주에게 상당한 현상금이 걸려 있다고. 아 그러니까 생각나는데 내가 어제 열심히 공주 방의 경비 시설을 파악하는 동안 넌 잠이나 쳐 자고 있었지?" 흑깃이 날카롭게 꼬집었다.
"현상금이 얼만데?"
"야 말 돌리기냐. 내 고귀한 노동에 대한 대가는? 그리고 니가 잠 쳐 잔 것에 대한 사과는 없어?"
핀은 미로의 덤불 사이로 무심히 손톱을 넣어 오렌지를 하나 꺼냈다. "점심 먹으면 졸리는 게 당연지사지."
"에휴. 뭐, 이번엔 상당해. 서로 반띵하면 인당 3000 이야. 평생 써도 남을 액수라니까!"
"평생 좋아하시네. 한 달이나 가면 모르겠다." 핀이 껍질째 오렌지를 베어 물며 말했다. 상큼한 오랜지향이 사방에 퍼졌다.
"그럼 다시 모험 뛰는 거지."
"납치한 뒤에는 어떡할 건가?"
"뭘?"
"공주말이야. 오늘 밤 우리의 목표."
"뭘 어떡하긴. 현상금 건 사람한테 째깍 넘기는 거지."
"넘기기 쉽지 않을..."
"뭐 그런 사소한 거로 고민하냐 이 친구야. 내일 네가 두 번째 낮잠을 잘 때쯤이면 모든 게 처리되어 있을 거야. 두둑한 동전 주머니는 덤이지. 사람들은 왕에게 '천수를 노리소서'라고 한다지? 우리는 그 왕보다 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거라고."
"좋아." 핀이 동의했다. 매사에 신중한 그는 흑깃의 말에 완전히 동의하진 않았지만, 오랜만에 찾은 이 멋진 동료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진 않았다. "그럼 저기 보이는 난간은 어떻게 올라가나?"
"벽을 타야지 뭐." 흑깃은 손을 허리에 얹고 발코니 쪽을 바라보았다. 까마득한 높이의 난간이 흑깃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내 갈고리로는 턱없이 부족하겠는데..."
"이건 어떤가?" 핀이 등 뒤에서 주섬주섬 거대한 물체를 꺼내며 말했다.
"허? 그건 대체 언제 구했대."
"우리가 턴 배. 거기서 가져왔지. 착착 감기는 손맛이 일품이야."
"잘했어 핀선생! 이제 그 닻에 밧줄을 묶고 저기 난간에 거는 거야. 그럼 신나게 올라가는 일만 남은 거지!"
"밧줄은 있고?"
"당연하지. 바람직한 모험가의 필수품아니냐.”
"그럼 이 사슬은 떼버려야겠군."
그러자 흑깃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냐 그 사슬을 쓰자. 훨씬 튼튼할 것 같아." 수 분 내 모든 준비가 끝나고 무시무시한 사슬 닻이 핀의 손을 떠나 밤 공기를 갈랐다. 하늘로 솟구친 닻은 공주가 머물고 있는 궁의 난간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찰칵!
"아리따운 공주마마 저희가 가옵니다." 핀과 흑깃의 사이좋은 등반의 시작이었다.
3편 '저항은 무의미하다!'
[ 펼치기 · 접기 ]
핀의 거대한 덩치에 비해 한없이 가녀리게만 느껴지는 난간은 핀의 무게가 실리자 불안하게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핀보다 먼저 발코니에 다다른 흑깃은 칼을 꼬나쥐고 공주의 방으로 돌격했다. 이국의 비단으로 수를 놓은 침구와 최고급 가구가 가득한 방에서, 공주는 고품격 마호가니 의자에 드레스를 늘어뜨리고 앉아 있었다. 화장대의 은 거울을 바라보던 공주는 시커먼 침입자가 방에 난입했는데도 그리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오직 그 침입자의 입에 물린 붉은 장미 한 송이에만 새하얀 아미를 살짝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
"공주여. 저항은 무의미하다! 순순히 우리를 따라..."
"응 좋아. 따라갈게. 현상금을 원하는 거지?" 말렌 공주는 흑깃의 말에 즉시 일어서더니 오히려 그를 나무랐다. "기다리고 있었다구."
흑깃이 입에 물고 있던 장미가 벨벳 양탄자에 떨어졌다. "으, 응? 놀라지 않는 거야? 그리고 무슨 공주가 비명도 지르지 않는 거지?"
흑깃의 새된 물음을 무시한 공주는 방을 돌아다니며 침대 시트를 찢고 화장지를 흐트러뜨리는 등, 납치 상황을 만들기에 열심이었다. "물론 비명은 지를 거야. 아마추어도 아니고 말이지. 하지만 내가 너무 일찍 비명을 지르면 근위병들이 들이닥 우으읍...!"
방을 가로지른 흑깃이 잽싸게 말렌 공주의 입을 틀어막음과 동시에, 핀이 자신의 몸집에 비해선 너무나도 왜소한 발코니의 문으로 허리를 굽히며 들어왔다. "무슨 반상회 하나. 납치하는데 분위기가 왜 이런가?" 핀이 투덜댔다.
공주는 흑깃의 손에서 빠져나와 핀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덩치는 뭐야?"
"무고한 공주님을 모실 두 번째 납치범 대령이오."
"그쪽보다 훨씬 미남이시네요." 공주가 중얼거리며 흑깃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자 그가 순간 칼을 들어 공주를 위협했다.
"아이고. 우리 공주님께서 제정신이 아니시구만."
핀은 거대한 덩치를 움직여 방을 천천히 가로질러 금박을 입힌 새장 앞에 섰다. 새장 안에는 새하얀 새 한 마리가 횃대에 앉아 있었다. "이 새는 희귀종이군. 음... 순백의 트로스타니안인가?" 담뱃대 사이로 핀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말렌 공주는 흑깃을 지나쳐 침대 옆의 보석 상자로 다가가며 말했다. "응 안목이 높으시네. 세상에 단 50마리밖에 남지 않은 귀하신 몸이지."
"아름다운 것은 마땅히 아껴야 한다. 이런 고귀한 새를 새장에 가둬두는 것은 옳지 않다. 이름이 뭔가?" 핀이 놀란 만큼 민첩한 동작으로 새장의 문을 열자 새는 핀의 머리 위에 올라탔다.
한쪽에서는 흑깃이 마치 자기도 봐 달라는 듯, 과장된 연극 자세를 취하며 지껄였다. "저항은 무의미하다! 더는 지체할 수 없다. 지금 당장 출발한다!"
공주는 핀과 새롭게 그의 애완동물로 등재된 희귀 새를 지나쳐 서랍을 열고는 소총을 꺼냈다. "쿠크다스."
여전히 혼자서 연극을 하던 흑깃이 놀라 외쳤다. "뭐...?"
"새의 이름이야."
핀은 비늘로 덮인 머리를 휘휘 저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지금부터 얘의 이름은 수지다. 내 옛 삼촌의 이름을 딴 것이지."
"저항은 무의미하다!" 흑깃은 벌써 세 번째 똑같은 대사를 내뱉고 있었다. "더 이상 지체..."
"내 인장이 새겨진 반지 없이는 아무 데도 안 가." 공주가 단호히 잘랐다. "그 반지 없이 내가 공주란 것을 어떻게 현상금을 건 자에게 증명할 거야?"
"무슨 증명?" 핀이 물었다.
"무슨 증명?" 흑깃도 물었다.
공주는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어이 냄새나는 아저씨들. 설마 납치 처음 해보는 거야?"
핀과 흑깃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다시 공주를 응시했다.
"저, 저항은 무의미하다." 흑깃이 이젠 마치 자신의 좌우명인 듯 다시 한 번 지껄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아! 여기 있었구나." 말렌 공주는 반지를 은어 같은 손가락에 끼더니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엄청나게 큰 소리로 비명을 내질렀다. 핀은 인상을 찡그렸으며, 흑깃은 놀라 펄쩍 뛰었고, 핀의 애완동물인 새는 그의 머리에 똥을 싸질렀다. "안 돼, 제발! 원하는 건 다 가져가! 싫어!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야!" 비명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공주는 옆의 유리등도 팔로 쳐 쓰러뜨렸다. 바닥에 떨어진 등은 수백 조각으로 박살 났다. "이 더러운 도둑! 짐승! 당장 풀어줘!"
공주의 비명에 놀란 근위병들은 잠긴 방문을 열려했고 일부는 발코니로 향했다. 우리의 대담한 공주마마는 핀의 목에 매달려 사슬을 타고 내려가는 와중에도 비명을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가시덤불 미로에 내려서자 그녀는 칠흑 같은 어둠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자, 어서 당신들 아지트로 안내해."
"아니 이게 무슨 납치야!" 어이없어하며 흑깃이 투덜댔다.
"아무렴 납치 맞지." 말렌 공주는 콧방귀를 뀌었다. "모름지기 공주는 납치 정도는 당해줘야 하지 않아? 그래야 잘난 공주지."
"일리 있구만." 핀이 중얼거리며 사슬을 잡아채자, 난간이 부서지며 닻이 딸려왔다.
아득히 멀리서 엔진 시동음과 경비견의 짖는 소리가 들려오자 이 기괴한 삼인조는 대화를 중단하고 즉시 미로를 내달렸다.
4편 '악당이다!'
[ 펼치기 · 접기 ]
"조심하시오 공주. 저기 나쁜 놈들이 보인다오!" 흑깃은 꿰뚫기 자세를 취하며 검집에 손을 갖다 댔다. 시커먼 망토를 두른 수상쩍은 삼인조가 미로의 그늘 속에서 스르륵 나타났다.
"하하하. 고생이 많군 제군. 우리 공주마마 납치하느라 말이야." 그들 중 제일 덩치가 큰 녀석이 빠진 앞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가시 박힌 철퇴로 공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부턴 우리가 맡지."
"뭐 하는 짓거린가? 지금 우리 현상금을 뺏어가려 하는 건가?" 핀이 말했다.
"헛소리!" 흑깃이 화를 내며 말했다. "내 검술에 별 모양으로 썰리기 싫으면 당장 꺼져."
"이봐. 일단 인원은 저쪽이 많아." 핀이 별 긴장감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군상들 한 수레 갖다놔도 내 상대가 못되지. 옷 입은 꼬락서니를 봐봐. 저게 뭐냐. 넝마도 아니고." 흑깃이 코웃음 쳤다.
말렌 공주는 팔짱을 끼고 손가락을 두드렸다. "아...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날 납치만 해주면 좋으니까 서둘러. 경비병이 곧 여기에 올 거라고!"
"아. 친애하는 공주마마. 그 경비병들은 오늘 칼퇴근하셨다오." 중간 덩치의 불량배가 땅에 침을 타악 뱉으며 지껄였다. 그리고 어깨너머로 어딘가에서 자고 있을 경비를 가리켰다. "우리가 머리를 탁하고 쳤더니 억하고 기절하더라고. 너네도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똑같이 만들어 줄테다!"
"이 미천한 것들이 어디서 공주님한테! 저놈들 말본새 좀 보래. 몸에 바람구멍 뚫려 봐야 정신을 차리지?" 흑깃이 좀 과하게 챙 소리를 내며 칼을 뽑아 들었다. "어리석은 자들아 보아라. 이것이 바로 천하의 명검 '흑깃'이다."
"웩. 세상에. 칼 이름을 자기 이름 따서 짓다니..." 말렌 공주가 손발이 오그라든다는 듯 말했다.
"이 명검 흑깃과 나는 천하에 둘도 없는 콤비요!" 흑깃이 자랑스레 외쳤다.
"안 물어봤거든요?"
"자. 어서 빨리 나머지는 처리하고 공주를 들고 튀자고." 대화가 산으로 가는 것 같자 불량배 중 가장 작은 녀석이 흑깃 일행의 대화를 끊으며 말했다.
"흐흐흐. 이봐 거기. 그렇게 잘 가꾼 머릿결이 엉망이 되면 억울하지 않겠어?" 가장 큰 녀석이 비웃었다.
"저렇게 깔끔 떨고 다녀봐야 죽으면 다 똑같지." 중간 덩치가 조끼에서 단도 두 자루를 꺼내며 비아냥댔다.
"도저히 참을 수 없군! 핀 선생 여기는 나에게 맡겨!" 흑깃이 화를 내며 말했다.
"알았다." 핀이 대답했다. 그런데 정작 핀은 친애하는 애완조 수지가 저녁 식사로 날벌레를 잡아먹는 걸 보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윽고 시작된 싸움. 하지만 상황은 일방적인 흑깃의 우세로 돌아갔다. 불량배들의 무기 사이로 흑깃은 잽싸게 움직이며 공격을 해댔다. 깡패들의 느린 움직임으로는 도저히 흑깃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흑깃의 미려한 검술이 불량배들의 몸에 상처를 낼 때마다 그들의 무기는 허공을 가르는 데 급급했다. "하하하 어리석도다! 거북이보다도 느린 솜씨야. 너희들 스승이 누구냐? 내가 그 스승한테 잘 말해주마. 네 제자는 최악이라고!"
하지만 흑깃이 제풀에 신나서 덩치 큰 녀석 둘을 쫓고 있을 때 작은 몸짓의 불량배가 그 틈을 노려 공주를 낚아챘다.
"이봐. 네 현상금 꺼리 저기 가는데?" 핀이 태평스레 말했다.
깜짝 놀란 흑깃은 부랴부랴 유괴범의 뒤를 쫓았지만, 결국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돌아오니 거의 다 제압해 놓은 나머지 덩치 둘도 사라지고 없었다.
"도와줘 핀선생!" 흑깃이 비명을 질렀다.
"흐음. 무뢰배들은 네가 다 처리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거 취소야 취소. 어서 빨리 우리의 소중한 현상금을 훔치려는 녀석들을 잡아줘!"
"좋아." 핀은 육중한 쇠사슬을 당겨 닻을 조준하더니 어둠 속으로 휙 던졌다. 그리고 다시 딸려오는 닻. 놀랍게도 거기엔 도망간 불량배 셋이 사이좋게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말렌 공주도 불량배들의 어깨에 얹혀 흑깃의 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녀의 연분홍빛 뺨에는 오렌지 나무 가시에 스친 상처가 나 있었다.
"잘했어 핀성생!" 흑깃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 바보 같은... 아저씨들..." 공주가 힘없이 중얼댔다. "이곳의 오렌지 나무 가시는 공주한텐... 독이... 야..."
그리고 흑깃의 품에서 정신을 놓았다.
상황은 악화 일로라, 머리 위의 발코니에서는 왕궁 경비병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이 녀석들 이쪽으로 도망쳤다! 어서 잡아!"
흑깃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어어어...거, 겁먹지 말고. 이, 이쪽이야. 왼쪽, 왼쪽 그리고 다음엔 오른쪽... 으으... 아닌가. 어, 어디로 가야하지?"
"참으로 답답하구만." 핀은 느긋하게 말하고는 닻을 앞세워 미로의 가시덤불을 마치 불도저처럼 뚫고 나갔다.
5편 '잠자는 연못가의 공주'
[ 펼치기 · 접기 ]
잔잔한 호수 위에 낚시찌 하나가 평화롭게 떠 있었다. 바위에 걸터앉은 핀은 꾸벅꾸벅 졸다가 발에 끼워놓은 낚싯대가 미끄러지면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기를 반복하며 강태공 행세를 하고 있었다.
한편 핀 뒤에 펼쳐진 잔디에선 흑깃이 꺾어온 꽃들로 주위를 장식하며 아직도 의식이 없는 공주를 고이 안고 있었다. 경외로운 눈빛으로 공주의 머리를 쓸어 넘기던 흑깃이 중얼거렸다. "이걸 봐, 살면서 이렇게 매혹적인 여잘 본 적 있어? 삼단 같은 머리며 백옥 같은 얼굴이며, 우아한 손이며... 이렇게 아름다운 게 또 있을까! 이 초승달 같은 눈썹 좀 봐. 마치 말이야, 마치..."
"... 잠 좀 자자." 핀이 투덜거렸다.
"아니, 아니지. 표정에서... 위엄이 느껴진단 말이야. 마치 '그대가 진정 날 깨울 수 있을 것인가?'라고 묻는 거 같아. 물론이죠, 공주마마. 전..."
"후... 잠 좀 자자니까?"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하품을 하던 핀이 말했다. "그 공주마마 보쌈하느라고 밤새도록 뜬눈으로 지새웠잖아."
"이런 와중에 잠잘 궁리나 한단 말이야?" 흑깃은 핀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무릎을 구부리더니 허탈하게 말했다. "이리도 아름다운 공주께서 도움이 필요하시다고요? 걱정 따윈 하지 마십시오. 흑깃이 있잖습니까." 그러면서 흑깃은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비벼댔다.
그 와중에도 핀의 코 고는 소리가 퍼져 나갔다.
핀의 코골이에도 편안하게 걸터앉은 수지는 평화롭게 지저귀었다.
붉은수염 지느러미 잉어가 연못 밖으로 머리를 쑥 내밀더니 의심스러운 눈길로 찌를 바라봤다.
말렌 공주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네." 흑깃이 말했다. 핀이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입맞춤이 통하지 않는걸."
"네 기술이 문제지 뭐." 잉어와 눈이 딱 마주친 핀이 말했다. "입맞춤은 말이야, 예술이라고. 앞니를 어떻게 부딪쳤느냐가 중요하단 말이지."
"저런 인사하고 입맞춤한 트롤 여자들이 안쓰럽군그래."
"아직까진 내 입맞춤이 엉망이란 소리 들어본 적 없거든?" 핀이 낚시찌만 바라보며 나 잡아 잡소 하며 다가오는 잉어를 보며 말했다. "이런 내 아침 식사네? 그래그래, 이리 와서 맛있는 벌레 먹어야지?"
"어휴, 이런 엄청난 순간에도 로맨스라곤 털끝만큼도 없구먼." 흑깃이 투덜거렸다. 그리곤 몸을 숙여 더 긴 입맞춤을 날려 말렌 공주의 입술을 다시 한 번 빼앗았다.
수지는 그 순간에도 핀의 귀 주위를 윙윙거리던 파리를 잡아챘다.
잉어가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러자 핀은 옳거니 하면서 벌떡 일어나 낚싯대를 홱 잡아 올렸다. 입꼬리가 돌돌 말린 모양을 한 선홍색 주둥이의 잉어가 찌에 걸려 올라오며 퍼덕거렸다.
말렌 공주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구먼!" 흑깃이 울부짖으며 말했다. 그는 짜증을 내며 팔을 꼬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그 사이 핀은 잉어 주둥이에서 바늘을 떼어내고 있었다. "공주가 이상한 게 분명해. 난 이 땅에서 최고로 입맞춤을 잘한단 말이야!"
핀이 꿈틀거리는 잉어를 들어 올렸지만, 흑깃은 너무 낙담한 나머지 눈앞의 잉어에 감탄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입맞춤해봤자 공주가 어떻게 알겠어." 핀이 넌지시 말했다.
"입맞춤으론 공주가 깨어나지 않아.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주워들어서는..." 핀은 고개를 저으며 아침 식사가 된 잉어를 머리를 한 입 베어 물고 잘근잘근 씹었다.
"안 된다고?"
"그럼 되겠냐? 세라핌 깃털로 간지럽혀야지 잠자는 공주님이 일어날걸? 이 상황에는 파란색 깃털이 제일 잘 통해."
수지도 동의한다는 듯 조막만 한 머리를 끄덕였다.
"오호... 그러면 되겠는데!" 흑깃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세라핌의 파란 깃털이 필요해. 그래서 내 입맞춤이 통하지 않았던 거군."
"글쎄다. 요즘엔 예전처럼 세라핌이 많지 않아서 말이야. 근데 왜 못 깨워서 안달이야? 우린 공주를 구출한 게 아니라 납치한 거니 그 상태로 데려가도 문제없잖아."
"혼수상태에 빠진 공주 가지고 현상금을 어떻게 제대로 받아!"
"네가 공주를 좋아하는 거 아니고?"
"좋아한다고? 이거 보라고, 핀 선생. 어딜 봐서 내가 공주를 좋아한다는 거야? 공주는 우리 밥줄이라고. 나 이 바닥에서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었어 왜 이래!"
"그럼 빠져들지 않게 조심해." 핀은 아침 식사의 나머지를 삼키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식곤증에 못 이겨 다시 낮잠에 빠졌다. 핀이 낮잠에 빠진 걸 확인하자 흑깃은 말렌 공주의 손을 잡았다.
"공주마마, 그 깃털을 찾아서 잠을 깨워 드리지요."라며 속삭이듯 말했다. "어떻게 되는지 보자고."
'숲의 마녀' 울창한 나무를 헤치며 흑깃과 핀 그리고 수지는 달렸다. 깊은 잠에 빠진 말렌 공주는 장마철에 널어놓은 빨래처럼 힘없이 핀의 어깨에 매달려 있었다. 얼마나 헤맸을까. 일행은 마침내 깊은 숲속에서 마녀의 오두막을 발견했다. 담쟁이덩굴에 둘러싸인 오두막에선 향긋한 냄새가 나는 연기가 퐁퐁 솟아올랐다.
“드디어! 늙은 마녀의 오두막을 찾았다!” 흑깃이 만세를 불렀다.
“마법… 사아?” 핀이 흑깃을 쳐다봤다.
“이렇게 깊은 숲속에 오두막이 있음 뭐겠나. 당근 마녀의 오두막이지!”
“안 좋은 예감 든다. 숲속 마녀. 내버려 두는 게 좋다.” 핀이 흘러내린 말렌 공주의 팔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평소라면 그랬겠지. 하지만 핀선생. 네가 그랬잖아. 공주의 잠을 깨우려면 마법 걸린 천족의 깃털이 필요하다고.”
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공주를 흑깃의 품에 넘겨주고 오두막 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회색 옷을 입은 머리가 하얗게 센 여자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왔다.
“안녕하신가 늙은 마녀여! 부탁이 하나...”
“안돼.” 마녀가 흑깃의 부탁을 단칼에 잘랐다.
“허허. 그댄 아직 내 부탁이 뭔지도 안 들어봤잖소.”
“흥, 그럼 들어나 보지.”
“난 지금 천족의 푸른 날개 깃털이 꼭 필요하오.” 흑깃이 간절히 부탁했다.
“안돼.” 마녀가 흑깃의 부탁을 단칼에 잘랐다.
“이 불쌍한 공주님이 도통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소. 그녀를 업고 가시덤불을 헤치고 오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흑깃이 한숨을 쉬었다.
“옮긴 건 나다.” 핀이 대꾸했다.
“그럴 줄 알았지.” 마녀가 콧방귀를 꼈다.
“크흠, 그건 그렇고. 대체 왜 우리 부탁을 거절하는 거요?” 흑깃이 물었다.
“나보고 할망구 마녀라 한 게 누구더라?”
“허허, 좀 나이 들어 보인다 했지 언제 할망구라 했소.” 흑깃이 항의했다.
“넌 그 잘난 면상을 가지고 여자들 깨나 울리고 다녔겠지?”
“뭐 자랑은 아니오만 그런 편이오.” 흑깃이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네 품에 안겨 있는 죽은 여자처럼 말이야.”
“그럼 그럼... 아니 무슨 소리요! 이 공주님은 단순히 자고는 것뿐이라니까!”
“오렌지 나무 가시에 찔렸구먼. 고놈은 참 못된 독을 가지고 있지.” 마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닐 거요. 제발 도와주시오. 내 일생 이처럼 간절한 사랑을 해본 적이 없소!” 흑깃이 울상을 지었다.
“충고하는 데 젊은 양반. 아예 이 여자를 깨우지 말게. 일어나면 널 차버린다에 내 국자와 냄비를 걸지.”
“당신이 사랑을 해봤다면 이해할 것이오!”
“흥, 그대가 여자와 사랑에 대해 뭘 안다고... 보자, 이런 고귀한 공주님은 그 아름다움 만큼이나 내면엔 날뛰는 어둠이 있기 마련이지.” 마녀가 축 늘어진 말렌의 손에 들린 거울을 조심스레 살폈다.
“헛소리. 이런 미녀가 어둠을 품고 있을 리 없소.” 흑깃 펄쩍 뛰었다.
“그건 자네 생각이고. 이렇게 하지. 거기 여자 손에 들린 거울을 건네다오. 그럼 천족의 깃털을 주마.” 마녀가 제안했다.
“이 거울은 우리 게 아니다.” 핀이 고개를 저었다.
“짹짹.”
어깨 위의 수지도 핀을 따라 했다.
“좋아. 주겠소!” 오랫동안 공주를 들고 있어 팔이 빠질 것 같던 흑깃이 낼름 대답해버렸다.
말렌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녀의 오두막 안이었다. 뭐가 들었는지 요상한 빛깔을 내뿜는 유리병, 벽에 걸린 정체를 알 수 없는 식물, 그리고 벽난로 가엔 늙은 마녀가 앉아 있었다.
“고귀한 레이디. 저 광활한 숲속을 그대를 업고 죽기 살기로 헤쳐왔다오. 갖은 고생 끝에 이 마법의 깃털을 구해 그댈 깨울 수 있었소.” 황금빛 머리카락의 남자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말렌은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 분명 궁전에서 그녀를 납치한 자다.
“거참. 내가 옮겼다. 아까도 말했다.” 너무 큰 덩치 때문에 현관문에 겨우 머리만 들이민 강트롤이 툴툴댔다. 강트롤 위에 저 새, 내가 키우던 쿠크다스였는데 잘 있구나.
말렌은 자세를 바로 하고 그녀 앞에 다소곳이 허리를 굽이고 있는 남자의 뺨을 어루만지며 이름을 떠올리려 애썼다. “나의 왕자님. 이 사례를 어찌 해야 할까요?”
“그대의 입맞춤 한 번이면 충분하오.” 흑깃이 공주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말렌은 흑깃의 품에 녹아들듯 안겼다. 둘의 입술이 포개지고 감미롭고 달콤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잘 됐군. 너희들 결혼식에 나도 꼭 부르게나.” 마녀가 끼어들었다.
“뭐, 뭐시라?” 흑깃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녀는 ‘결혼식’이라 했다.” 핀이 친절하게 다시 말했다.
“결혼식!” 말렌이 꽥꽥댔다.
“대체 무슨 소리요. 우린 이제 겨우 입맞춤한 사이인데! 결혼이라니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아도 유분수지.” 흑깃이 뒤로 물러났다.
“분위기 보아하니 안 봐도 그림이구먼 뭘.” 마녀가 놀렸다.
“결혼식 정말 좋아요! 꼭 내 언니 결혼식보다 더 크고 화려해야 해요! 하도 길어서 왕궁 앞마당을 채우는 멋진 드레스를 입고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을 거라구요.” 말렌이 흥분했다.
“하지만 법으로 왕족은 왕족하고만 결혼할 수 있다지?” 마녀가 초를 쳤다.
“맞소. 난 용기 있고 잘생겼지만 아쉽게도 왕족 혈통이 아니오. 우린 금지된 사랑을 할 처지요.” 흑깃이 비극의 주인공이 된 마냥 대사를 지껄였다.
“하지만 난 크고 화려한 왕가의 결혼식을 원하는 걸요.” 말렌이 칭얼댔다.
“여왕이라면 널 왕족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걸? 마녀가 제안했다.
“양민을 왕자로.” 핀이 말했다.
“도둑을 남작으로.” 수지가 새의 언어로 노래했다.
“몰락 귀족을 대공으로?” 말렌이 눈물을 훔치며 거들었다.
“패배자를…”
“거기까지 하지.” 흑깃이 끊었다.
“한 가지 더 짚을 건, 그렇게 해도 넌 그저 허울뿐인 왕족일 뿐이지. 차라리 아가씨가 에벤타이드의 여왕이었다면...”
“그럼 난 누구랑도 마음대로 결혼할 수 있죠! 됐네요. 우리 폭풍 여왕을 무찌르기만 하면 되는 거죠?” 말렌이 외쳤다.
“말처럼 쉽지 않지.” 마녀가 지적했다.
“왜죠? 우리 일행에 강인한 트롤이랑, 날 구해준 검술의 대가도 있는데!” 말렌이 칭얼댔다.
“그것만으론 부족해. 강력한 마법사 그리고 불을 뿜는 용도 한 두 마리 필요하지.” 마녀가 새로 얻은 거울을 응시했다.
“용 한 두 마리쯤이야 쉽죠 뭐.” 말렌이 어깨를 으쓱했다.
“용, 구하기 힘들다. 상점에도 안 판다.” 핀이 지적했다.
“그 말대로야. 하지만 다행히 마법사는 금방 찾을 수 있겠군.”
“잠깐. 그거 내 거울이잖아욧!” 말렌이 마녀를 쳐다봤다.
“아, 아가씨. 천족의 깃털은 비싸다고. 대가를 지불해야지.” 흑깃이 말렌을 타일렀다.
“후후... 여기 이 남자는 거울의 용도를 몰랐겠지.” 마녀가 거울을 빙글빙글 돌렸다.
“이 도둑! 내 소중한 거울을 당장 돌려줘요.” 말렌이 발을 동동 굴렀다.
“거울은 깃털의 대가로 받은 것. 마땅히 내 것이다. 대신 이건 돌려주마.” 마녀가 손끝으로 거울의 뒷면을 두드리자 놀랍게도 유리에서 말렌의 형상을 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흑깃이 긴장하며 검을 뽑으려 했으나 말렌이 그를 막아섰다. 그리고 천천히 한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말렌의 그림자도 그 동작을 따라 했다.
“그 옛날 이 나라의 왕과 왕비는 아주 예쁜 아기를 낳았지.”
어리둥절한 흑깃과 핀 사이로 마녀가 끼어들었다.
“아이는 고귀하고 아름다웠으나 성깔이 장난 아니었다. 또한,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을 땐 주변을 마법으로 초토화했지. 그렇단다. 그때 태어난 아이는 순수혈통의 마법사였던 게야. 다들 알다시피 제국에서 순수혈통 마법사는 무조건 여왕의 군대에서 복무해야 하지.”
말렌과 거울에서 튀어나온 그림자는 이제 점점 하나로 합쳐졌다.
“숲의 마녀인 나는 보통은 왕가의 일에 끼어들지 않아. 하지만 이 왕과 왕비는 상당히 많은 대가를 바치며 나에게 도움을 청했지. 그래서 난 말렌 공주의 반틈, 강력하지만 어두운 마법사의 자아를 이 거울 속에 가두었다. 그 후로도 공주는 철없고 모자란 흉내를 내어 폭풍 여왕의 마수를 피해갔지. 하지만 이제는...”
마녀가 이야기를 풀어놓는 사이, 두 말렌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아이야, 이젠 그대가 여왕이 될 차례란다.”
“그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핀이 걱정했다.
말렌은 휙 돌아서 핀과 흑깃을 노려보았다. 그들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녀의 몸 가장자리에서 기괴한 검은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난 용을 가질 거야. 세상의 모든 용은 다 내 걸로 할거야. 그리고 에벤타이드의 여왕으로 등극해 당신과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살 거라구. 내가 정했어!”
하나로 합쳐진 말렌은 더 성숙하고 아름다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여 마녀에게 인사한 뒤,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흑깃과 핀을 지나 현관문을 나섰다.
두 모험가는 충격에 빠졌다.
“그래서, 흑깃. 우린 우리만의 길을 간다. 맞나.” 핀이 물었다.
“맞아 흑깃! 바로 그 이름이었어. 이제야 기억이 나.” 말렌은 그 말을 남기고 폴짝폴짝 뛰며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를 보라고 핀. 저렇게 생기발랄하고 즐거워 보이는데 어찌 곁을 떠날 수 있겠나...” 흑깃이 한숨을 쉬었다.
“그럼 공주를 따라가지. 용 구하러.” 핀이 발걸음을 옮겼다.
“잘들 가시게나. 폭풍 여왕에게 진정한 폭풍이 뭔지 똑똑히 보여주라고!” 마녀가 오두막의 문을 닫으며 외쳤다.
그랑고르 가의 일원들은 거대한 빙상 위에서 바람이 몰아치는 트로스탄 첨탑을 집어 삼키는 화마를 하릴 없이 바라보았다. 기디안 무역 중심지였던 도시가 생지옥으로 변해가자 그랑고르 일원들의 얼굴은 연기로 일렁거렸고 그들의 가슴은 콱 막힌 듯 답답해져 옴을 느꼈다. 그들은 눈물과 슬픔을 가득 담은 기디안 금화를 빙하의 갈라진 틈새로 뿌렸다. 먼저 저 세상으로 간 자들이 노잣돈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폐허가 된 지금 금화 따위는 이 일대에서 쓸모 없어 질 것이 아닌가. 쿵쿵... 현자들은 흩날리는 눈송이로 뒤덮인 곳에 모여 손에 든 지팡이로 땅을 구르며 고대 이야기의 리듬을 탔다. 그랑고르의 대장로는 상아를 한 번 훔치고는 세대에 걸쳐 이어 내려오고 되풀이된 첫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 트로스탄이여! 곧 잊힐 그 장엄함이여."
"현자들은 알고 있었느니." 모두 입을 모아 노래를 흥얼거렸다.
"인간들은 거칠게 빙하를 뚫으리라. 인간들은 대지에서 고귀한 수정을 뽑아내리라. 인간들은 우물을 말려버리리라." 그란고르에서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여인이 날카로운 음색으로 노래를 이어갔다.
"현자들은 알고 있었으니."
"전리품 사냥꾼들은 인간을 무기와 바꿔버렸다." 다음 음률이 계속되었다.
"현자들은 알고 있었으니."
"도시는 탐욕의 무덤이 되어버렸고." 노래가 이어졌다.
"현자들은 알고 있었으니."
"아, 멀어라. 조상들의 육신이 여기 있으니 불쌍한 영혼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으니." 그랑고르의 대장로는 고통 속에 절규했다.
"현자들은 알고..."
산봉우리에서 얼음 같은 칼바람이 대지를 진동시키며 그들의 노래를 멈추었다.쉬이익!미친 듯이 옷가지를 끌어모으며 엄마는 절규했다. 그 소리에 화마를 바라보던 모두의 시선이 위로 쏠렸다. 산사태 대신에 살을 에는 바람과 함께 나타나는 건 한 남자였다. 굽은 등에 쭈글쭈글한 양파 껍질과 같이 금방이라도 벗겨질 듯한 검버섯 핀 피부가 남자의 나이를 말해주는 듯 했다. 발톱과도 같은 그의 손에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고, 그의 어깨엔 그랑고르의 가죽이 웅장한 모습으로 둘러 있었다. 그랑고르 일원들은 누구도 그를 본 적이 없었지만, 그들 모두 이 은둔자를 알고 있었다. 얼음의 지배자, 그랑고르 포식자, 칼 봉우리의 공포... 바로 라임이었다. 병력이 압도적으로 많았음에도 무장을 완벽하게 갖췄음에도 그랑고르 일원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며 뒷걸음질 쳤다. 얼음 마법사는 살을 베는 듯한 거대한 서릿발을 내뿜었다.
"꼬마는 어디 있는가?" 라임이 나지막히 물었다.
"그 녀석의 엄마는 알고 있어." 그랑고르의 대장로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그랑고르 사이의 관용적 표현일 뿐이었다. 바로 아무도 모른다는...
냉소를 한껏 품은 라임은 그랑고르 사람들을 차디차게 외면하고 돌아섰다. 그리고는 산비탈로 내려가는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혼잣말로 계속 투덜거렸다. 불타 버린 도시를 둘러싸 흐르는 강물은 잿더미로 뒤덮여 칠흑 빛으로 바뀌었다. 쾅! 라임이 땅에 지팡이를 박으니 칠흑 빛으로 흐르던 강물이 그 자리에서 꽁꽁 얼어붙었다. 콜록콜록... 기침에 헛기침까지 이어가며 라임 영감은 지팡이를 질질 끌고는 도시로 들어섰다. 그가 지나쳐온 거대한 화마에 짜증을 가득 담아 그는 지팡이를 흔들었다. 피시식! 그 거대했던 화마는 자신을 강하게 몰아친 서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꺼져갔다.
"꼬마야!" "야, 꼬마야!" 라임이 불러댔다.
그 날 아침 이 도시엔 무역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여행자들이 바글바글했더랬다. 하지만 지금은 타 버린 울타리를 가로질러 분지 양쪽에 흐르는 강으로 뛰쳐나가는 가축들로 넘쳐났다. 실로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마법사는 마법을 시전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를 반복하면서 당당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손에서 뻗어져 나간 마력 담긴 서리 화살은 화염을 차례대로 잠재우며 화마가 쓸고 간 안가와 상가를 두꺼운 얼음장으로 뒤덮었다. 그는 이윽고 멈춰서서 마법사의 탑을 바라보았다. 찬란하게 빛나는 고대 기디안 첨탑을 기반으로 지어진 이 장대한 탑은 트로스탄 지방 정부의 중심부였다. 하지만 그것도 옛이야기였다. 탑의 상층부는 부서졌으며, 그나마 힘겹게 서 있는 나머지 부분도 화마에 그을려 과거의 영광은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라임은 나머지 부분마저 얼음으로 뒤덮어 버리고 말았다. 그가 지나간 마을 주위에는 그의 목소리로부터 확연히 느낄 수 있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어이 꼬마야, 늦었구나! 어디로 가고 싶니?" 그는 마을 중앙의 불꽃에 삼켜지지 않은 유일한 장소, 할시온 우물에 다다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사방의 부서진 잔해에서 나오던 유독한 연기는 이제 모두 얼음 밑에 잠들었다. 할시온 우물 가장자리, 그곳에 평범한 그랑고르보다 훨씬 큰 덩치를 자랑하는 털로 뒤덮인 어깨에 얼굴을 푹 파묻은 왜소한 여인이 있었다. 여인의 손에는 소용돌이치는 잿더미에 으스스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손전등이 들려 있었다.
"아, 이런!" 짜증이 날대로 난 라임은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여기 대장이 누군가!"
여인은 눈물 자국이 남은 검댕투성이 얼굴을 이방인 쪽으로 돌렸다. 다른 둘보다 훨씬 몸집이 작은 이 여인은 어깨를 축 내리더니 턱을 실룩거렸다. 여인은 부들부들 떨면서 라임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 타고 남은 기디아 고위 마법사의 로브를 들이 밀었다.
"아이는?" 라임이 따져 물었다.
여인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애타는 심정으로 그랑고르의 팔둑을 잡으며 도움을 청했다. "아이가 사라졌어요." 여인은 대답하고는 그랑고르 일원의 퉁퉁한 얼굴을 처절한 심정으로 올려다 보았다. "모든 게 사라졌단 말이에요."
2편 '냉대'
[ 펼치기 · 접기 ]
징 박힌 강철 장화를 신고 장갑 낀 손에는 얼음 도끼를 들고 모피로 온몸을 감싸 중무장한 한 소년이 검은 눈을 부릅뜨고 동굴 입구에 서 있었다. 지난 수십 년 간 누구도 동굴 속 가파른 오르막길을 지나 빙하의 꼭대기에 다다른 적이 없다. 바로 그 차디찬 빙하의 꼭대기에 괴팍한 전설의 얼음 마법사 라임이 살고 있다. 누군가를 조우했던 때보다 긴 세월이었다.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너희 엄마가 날 가만 안 둘 텐데..." 소녀의 친구이자 탄탄한 체격의 그랑고르가 투덜댔다.
"이것보다 더 험한 것도 지나가 봤어."
“저 가파른 곳을 오르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저 꼭대기에 있는 게 무섭단 말이야.”
소년은 통통한 그랑고르 친구의 눈 덮인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리고는 위를 한 번 올려다보고는 천천히 조심조심 올라갔다.
소년이 꼭대기에 올라 숨을 헐떡이면서 머리를 쑥 내밀자, 눈앞에 털이 뒤덮인 장화가 들어왔다. 고개를 위로 올려보니 말로만 듣던 전설의 얼음 마법사가 솔방울을 으적으적 씹어먹고 있는 게 아닌가? 소년은 한 손으로 마법사에게 잡아주길 청하며 "마법사님, 배우고 싶은 게 있습니다!"라며 큰소리로 외쳤다.
"첫 번째," 라임은 소년의 이마 정중앙에 장화 한 짝을 턱 놓더니 투덜거리며 말했다. "날 혼자 둘 것." 라임이 쿡 찌르니 소년은 사정없이 미끄러지며 기껏 올라온 차디찬 동굴 속으로 떨어졌다. 아래 있던 그랑고르 친구 앞에 떨어지기 전까지 소년의 으악 하는 비명과 쿵, 퍽 소리가 마법사의 너털웃음과 함께 섞여 메아리쳤다.
"으음..." 소년의 친구인 그랑고르가 안타까움에 신음 소리를 냈다.
"난 괜찮아." 소년은 헉헉대더니 다시 올라갈 준비를 했다.
다시 꼭대기에 오르자, 소년은 마법사가 천막에 다리를 꼬고 앉아 반쯤 언 순록의 뱃속에 있던 이끼를 잘글잘근 씹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소년은 정상에 발을 디디며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라임님, 마법사님의 마법이 엄청나다고 들었어요."
라임은 들은 체도 안 하고 입을 열고 계속 잘근잘근 씹어댔다.
"저는 마력을 받고 태어났어요. 기디안 마법 학교 상급반에도 다녔고요. 그랑고르 사냥꾼 시험도 통과했어요."
라임의 희끗희끗한 눈썹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소년은 인내심이 바닥에 떨어졌다. "흥, 엄청난 마법사이긴커녕 그냥 할배인 거 아니에요? 아이들 겁이나 주려고 할배 얘길 떠들고 다닌 거로군요."
라임은 콧구멍에 손가락을 쑤셔 넣더니 바짝 얼은 코딱지를 튕겨내 소년의 볼에 명중시켰다.
화가 잔뜩 난 소년은 굴을 통해 다시 내려갔다. 모닥불을 피워놓은 그랑고르 친구가 물끄러미 그런 소년을 바라봤다.
"말도 꺼내지 마." 소년은 대꾸했다.
"또 올라갈 거야?" 그랑고르 친구가 물었다.
"응." 소년은 굳게 대답하더니 또 그 길을 올라갔다.
이번에 소년은 서리 마법사 앞 눈밭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머리에 둘러 추위를 막아주던 모피를 풀고 보송보송한 눈으로 얼굴을 덮었다. "마법사님." 덮인 눈으로 소년은 웅얼거리며 말했다. "마법사님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읽어서 알아요. 제가 같은 운명이 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라임은 소년을 무시하고는 자기 일과를 계속 이어갔다. 마법사는 덫과 함정에서 일용할 양식을 모으고 먹고 낮잠을 자기까지 하며 하루를 보냈다. 어느 덫 해질녘. 라임은 소년의 어깨를 툭툭 걷어찼다. "얼어 죽고 싶은 게야?" 나이가 들어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라임은 쩌렁쩌렁 소리를 질러댔다. "멍청한 녀석, 들어와!"
그가 사냥한 그랑고르의 가죽과 송곳니로 만들어진 천막 안에서 라임은 소년의 재잘거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름이 뭐냐!"
"사무엘입니다."
"추잡한 그랑고르 녀석들과 어울리는 거냐?"
사무엘은 바짝 긴장해 어깨를 움츠렸다. "그랑고르 사람들은..."
"... 사람이 아니지. 그 녀석들의 시험을 통과한 것과 그 녀석들과 진정으로 어울리는 것은 다른 얘기다. 그래, 솔직하게 네놈이 누군지 말해 봐라."
"전 기디안입니다. 마법사 길드에서 전투마법사의 석좌를 맡고 있는 대마법사 로라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이고..."
"기디안 사람이자 그랑고르라..."
"원하신다면 제 조상의 10대손까지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 루시아 거리에서 빵을 최고로 바삭하게 굽는 게 누구더냐?"
사무엘의 기가 팍 죽었다. "네 살 때 트로스탄에 있는 집에 입양돼서 잘..."
"허허, 그럼 산 아랫마을에서 주제도 모르고 짖어대는 거리의 똥개보다도 기디안에 대해서 모르겠군." 라임은 껄껄 웃었다. "마력을 갖고 태어난 아이가 짐승같이 자랐구나. 하지만 기디안의 그 답이 없는 쇠고집에는 약도 없지."
"마법사님 아들도 마력의 자식이잖아요." 사무엘이 소리를 죽여 말했다.
"내 아들 녀석 꼴이 나기 싫으면 말이다." 라임이 눈을 감고 말했다. "기디안 마법 학교 최상급 반은 쳐다도 보지 말아라. 트로스탄의 수정을 싣고 나가는 배 갑판이나 닦으란 말이야. 훈훈한 릴리안 포도밭에나 가라고. 젠장, 괴물의 눈알이나 모으고 마법일랑 잊어라. 기디안도 잊고."
"하지만 제 어머닌..."
"... 널 원하지 않았던 게야. 아니라면 널 키웠겠지."
짙게 깔린 눈과 같은 정적이 천막 안을 가득 채웠다.
라임은 천막 문을 열더니 소년에게 말했다. "집으로 가라."
사무엘은 굳은 모습으로 밖으로 나와 얼굴에 모피를 다시 둘러썼다. 탁한 회색 하늘에 녹색과 붉은색 섬광이 번쩍거렸다.
트로스탄의 진흙 해변, 그랑로그 한 마리가 바람의 흐름을 가늠하고 있었다. 라이라와 라임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이제 유령 도시로 변해버린 트로스탄을 헤집고 다녔다. 푸른빛으로 빛나는 힘의 우물을 지나 빙벽에 난 소로를 따라 걸음을 내디뎠다. 산산 조각이 난 잔해, 죽음의 재를 뒤집어쓴 시체를 열심히 뒤져봐도 사무엘은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늙은 마법사는 라이라 뒤에서 풍성한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다. "라이라. 그대가 돌아가지 않는다 해도 뭐라 할 녀석은 아무도 없네."
라이라는 바로 대꾸했다. "전 기디안입니다.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흠흠..." 라임은 어색하게 말을 흐렸다.
"시간이 되었네요."
라이라의 말에 라임이 손을 앞으로 뻗자 손바닥에서 얼음 구체가 만들어졌다. 안 그래도 낮은 온도는 더욱 내려가 라이라의 팔에는 소름이 돋았다. 라임의 손가락으로부터는 얼음 줄기가 새어 나왔으며 그의 턱수염에는 고드름이 끼었다. 이윽고 지팡이에도 서리가 끼자 라임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가 강하게 내리찍었다. 놀랍게도 그가 지팡이로 찍은 자리에는 거대한 얼음 기둥이 하늘 높이 솟아올라, 힘의 우물을 덮어버렸다.
"자네 차례네." 라임이 라이라를 재촉했다. "마력을 거두시게나."
라이라가 손을 펼치자 주문서가 휘리리릭 넘어갔다. 그녀가 고대의 주문을 외자 놀랍게도 트로스탄 전역에 펼쳐졌던 마법의 결계는 빛으로 화하여 책 속으로 흡수되었고, 멀리 칼 봉우리의 얼음 구름과 눈도 그 여파로 같이 요동쳤다. 몰아치는 눈보라가 슬픈 도시 종말을 새하얗게 채색했다.
모든 게 끝나고 라임과 라이라는 제일 마지막으로 트로스탄을 떠나는 배에 올랐다. 뱃머리에서 라이라는 주문책을 가슴에 꼭 안은 채, 그녀가 평생 일구어 놓은 대업적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일찍이 트로스탄은 일확천금을 노린 광부, 도적들 따위의 베이스캠프로 시작한 도시였다. 이후 라이라의 마법 결계에 보호를 받으며 그 세를 불려 나갔다. 그 후 안전한 정착지를 찾던 기디안들이 속속 도착했고 그들은 힘을 합쳐 탑, 동상, 농지, 그리고 무역로 등을 세우고 가꾸며 찬란하게 번성했다. 그리고 그 중심, 트로스탄의 위대한 마법탑에서 라이라는 이 모든 것을 굽어보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다 지나버린 과거의 영예일 뿐이다.
~
시계를 돌려 20년 전... 라이라는 그때도 쇄빙선의 뱃머리에서 이 도시를 지켜보았다. 당시 트로스탄은 소수의 개척민이 이제 막 정착을 시작한 촌 동네였다. 기디안 이주민들을 태워 나르는 거대한 쇄빙선이 앞장서서 만의 얼음을 육중한 몸체로 부수고 있었다. 잔인하도록 시린 북녘의 하늘과 무섭도록 시퍼런 바다 사이에서 트로스탄은 늑대무리에 둘러싸인 양처럼 언제 그 명을 다할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태였다.
하얀 법복을 걸친 점술사 라이라는 입술을 깨물며 새장에서 예식용 흰 비둘기들을 꺼내 하늘로 날려 보냈다. 쇄빙선 주위를 선회하던 비둘기들이 배의 돛대에 내려앉자 라이라는 바로 이것이 상서로운 징조라고 목성 높여 외쳤다. 이는 대가를 받고 거짓을 고하는 것이기에 그녀의 마음은 심히 편치 않았다. 하지만 이런 짜고 치는 희극이라도 쇄빙선 주위의 조막만한 작은 배에 나눠탄 하층민들에게는 절실했다. 미신에 쉽게 흔들리는 그들은 아마 라이라의 확답이 없었다면 결코 배에서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마력을 가진 베인 수정이 발견되기 전이라, 칼 봉우리 근처는 굶주린 배를 채우려는 그랑고르 몇몇만이 어슬렁거릴 뿐이었다. 하층민들이 다시 기디안으로 돌아가 버리면 트로스탄은 영영 개척되지 못하리라. 이들이 먼저 정착해야 기디안 사회의 기술자들, 이를테면 건축가, 상인, 예술가, 부농, 조선업자, 학자들이 건너올 것이다.
트로스탄만에서 한차례 거짓부렁을 한 라이라는 망토를 여미고 칼 봉우리로 향했다. 붉은색 망토는 멋지긴 했지만 그녀가 눈에 젖는 것까지 막아주진 못했다. 겨울의 막바지, 봄의 초입의 칼 봉우리에는 대규모 진눈깨비가 언제나 찾아왔다. 방금 그녀의 '제국의 영광과 희망찬 미래'에 대한 연설도 흩날리는 진눈깨비 때문에 서둘러 끝마치지 않았던가.
이제껏 그 정도의 인파 앞에 선 적도, 하늘에 대해 거짓을 고한 적도 없었기에 라이라는 일찍 끝난 연설에 오히려 안도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지금부터 할 일이 차라리 실패했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실패를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나의 말을 들어 주길..." 그녀가 혼잣말했다.
"흠, 뭐라 그랬소?" 그랑고르 안내인이 그녀에게 물었다. 안내인은 털가죽으로 온몸을 꽁꽁 싸맨 초라한 행색이었다. 그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눈 폭풍 사이로 번뜩였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라이라가 답했다. "이런 날씨에 피차 고생이 많군."
"으하하! 뭐 하라면 해야지!" 넉넉한 배를 잡고 그랑고르가 통쾌하게 웃었다.
이후 목적지에 다다르자 라이라는 빛나는 빙하를 응시했다. 얼음의 대지에 오로지 그녀만이 서 있는 듯 했다. 라이라는 차디찬 공기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잠시 가슴에 머금었다. 그리고 안개와 같은 마법의 숨결을 내뱉으며 말했다. "암브로시우스" 그러자 그녀의 마법책이 허공으로 날아오르더니 그녀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라이라가 내뱉은 마법의 단어는 룬문자로 바뀌어 마법책에 차곡차곡 새겨졌다. 그리고 그녀가 이를 한 번 더 반복하자 그녀를 괴롭히던 진눈깨비가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증발했다. 눈에 젖어 축축해진 망토도 달아올라 새것처럼 빳빳해졌다. 라이라는 따사롭기 그지없는 훈훈한 기운을 양손에 모아 앞으로 쭉 뻗었다. 그러자 거기서 한 줄기 빛이 폭발처럼 튀어나와 트로스탄 전역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눈보라는 그렇게 생성된 마법 결계를 침범하지 못하고 결계 밖에서 부서져 내렸다. 정착민들은 이 믿을 수 없는 마법의 조화를 휘둥그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결계 한쪽 귀퉁이에서는 할시온의 힘을 간직한 위대한 빙하가 깨져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훗날 이 빙하가 녹은 물은 두 줄기 강으로 변해 트로스탄을 관통하며 도시의 젖줄 역할을 하게 된다.
2편 '첫 실수'
[ 펼치기 · 접기 ]
'확실히... 대단하군.' 라이라는 생각했다. 정착민들은 기디안어와 그랑고르어를 적절히 섞어, 상당히 그럴듯한 새로운 말을 창조해 냈다. 다양한 인종이 섞이는 트로스탄 항구에서 제대로 일을 하려면 이들의 말을 반드시 할 줄 알아야 했다. '뭐, 음을 내는 과정에서 목을 지나치게 긁는 것 같긴 하지만 말이야.' </br> </br> 고작 5년 전이었다. 라이라가 위대한 마법의 결계를 생성하고 빙하를 녹여서 강을 만든 것은. 그런데 벌써 트로스탄 개척지는 몰라볼 정도로 성장했다. 항구 근처의 여관은 마법 수정의 힘을 노리는 탐험가들로 북새통이었으며, 그들로부터 거둬들이는 세금도 짭짤했다. 짐과 승객을 실어나르는 배들도 항구를 끊임없이 들락거렸다. 그랑고르 안내인을 대동한 채 항구에 서 있는 라이라 앞으로 일단의 장정들이 다가왔다. 고풍스러운 무구, 황금빛 망토. 기디안 정예병들이다. 라이라는 기디안 특유의 손인사를 건네고는 그들 중에서 가장 화려한 복장을 한 자 앞으로 나가았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은 소년을 발견하고는 눈썹을 추켜올렸다. "트로스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장군. 하지만 의외로군요. 제 후임은 당연히 강력한 힘을 가진 마법사인 줄 알았는데요. 트로스탄을 지탱하는 마법의 힘은 노도와 같아서 다루기 쉽지 않답니다."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부인. 부인의 후임은 실제로 마법사입니다." 장군은 잡은 손을 앞으로 뻗어 소년을 라이라 앞으로 살며시 밀었다. "대법사 로라 님이 아이와 함께 이 말을 꼭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라이라는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는 소년을 살펴보았다. 멋들러진 칠흑 망토는 소년의 작은 몸집으로 지탱하기엔 너무 커 보였고,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군요. 그래, 로라가 무슨 말을 하던가요?"
"전투 마법사 라이라에게 고한다." 장군은 목청을 가다듬고 대마법사의 말을 전했다. "기디아의 마법사 길드는 그대에게 대법사이자 순혈인 로라와 학자이자 순혈인 타이터스의 아들, 사무엘을 보낸다. 그대는 사무엘이 성년이 될 때까지 잘 지도 감독하여 트로스탄의 차기 총독으로 키워내도록 하라."
"흠, 이건 뭐 하는 뭔가?" 그랑고르 안내인이 물었다.
"기디아의 정치질이라고 하지." 라이라가 무뚝뚝하게 답했다. "아니면 별 쓸데없는 농담이거나."
그랑고르는 허리를 굽혀 소년에게 인사했다. "안녕 샘. 나이가 얼마인가?"
아이는 조막만 한 손을 들어 손가락 네 개를 폈다.
"네 번의 겨울을 지냈구나. 정말 잘하구먼!" 그랑고르는 미소 지으며 사무엘의 머리를 토닥였다.
"로라... 그녀는 내 능력이 무서워 날 이 오지에 처박았지. 그게 벌써 십 년도 더 되었군." 라이라가 냉소지으며 말했다. "두려움이 아직도 그녈 사로잡고 있구나."
"트로스탄의 중앙에 마법사의 탑이 있어. 꼬마의 짐은 그곳에 푸는 게 좋겠군." 그랑고르가 아이를 들어 올리더니 어깨에 태우고는 말했다. 한 무리가 되어 천천히 걸어가는 병사들과 그랑고르 그리고 사무엘의 뒤를 보며 라이라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
기디아의 마법사 탑. 라이라는 자신의 거처에 있는 침대에 누워 밖을 내다보았다. 칼날 만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창문의 커튼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당시 트로스탄은 오랜 전쟁에 지친 기디아인들에게는 신천지로 받아들여졌다. 생각보다 더 쌀쌀한 바람에 라이라는 추위를 느끼고는 타이터스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나 안아줘." 라이라가 보챘다. "춥단 말이야." 타이터스는 그녀를 안아주는 대신 간질였고 라이라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이거 놔. 자긴 별로 안 춥나 보네. 됐어, 차나 한 잔 내올게."
라이라를 놓아준 타이터스는 침대 옆 간이 탁자에서 봉인된 편지를 슬쩍 집어 들었다. "우리 무서운 마법사님. 빠져나가려면 날 두꺼비 따위로 만들지 그랬어?"
"무슨 소리야." 라이라는 따스한 입맞춤을 하며 말했다. "난 자길 믿는다구."
"그건... 실수하는 거 같은데." 타이터스가 그녀에게 편지를 흔들며 말했다. "대법사에게서 온 거야. 정말 중요한 내용이 담겨있더군."
"대마법사? 무슨 용무일까." 라이라는 타이터스의 몸에서 나는 백단향의 체취를 맡으며 물었다. "그리고 그 편지는 대체 뭐야."
"시종이 아침 식사와 함께 전달해 줬지."
"아 뭐야. 내 꺼면 내가 열어야지."
타이터스는 라이라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편지를 빼며 말했다. "전투 마법사 라이라에게 고한다. 어쩌고 저쩌고... 그리하여 트로스탄 정착지 개척을 위해 그대를 즉시 칼 봉우리로 파견하는 바이다."
"뭐야. 날 칼 봉우리로 보낸다고?" 라이라가 편지를 뺏으려 했지만 타이터스 손에 꼭 쥔 채 내주지 않았다.
"추신. 학자 타이터스와의 혼인 신고는 따라서 기각하는 바이다. 대신 타이터스는..."
타이터스가 한눈판 사이 라이라는 잽싸게 그의 손에서 편지를 낚아채고 읽었다. "순혈 마법사 로라와 평생을 함께하라." 라이라는 순간 자제심을 잃고 떠들어댔다. "이건 분명 누군가의 행정 실수야. 어떤 바보가 내 이름과 로라의 이름을 착각한 게 분명해. 예전에도 이런 적 있었다니까."
"자긴... 순혈이 아니잖아." 타이터스가 라이라를 살포시 안으며 말했다.. "어쩌면 내 결혼은 이렇게 예정된 것일 수도 있어. 마탑이 원하는 건..."
"순수 혈통의 아이지." 그녀가 씹어 뱉듯 말했다. "하지만 그 전에 난 모든 걸 완벽하게 처리했어. 절차상 그 어떤 문제도 없었다고!" 그리고 라이라는 타이터스의 귀에 입술을 대고는 조심스레 속삭였다. "마탑의 결정을 우리가 따를 필요는 없어. 도망치자. 타이젠 관문을 넘어 멀리 도망가서 농사나 짓고 사는 거야."
"라이라... 자긴 어렸을 때부터 마탑의 기대를 한몸에 받은 유망주야. 나와의 결혼 때문에 자기가 쌓아온 모든 걸 잃게 둘 순 없어." 타이터스는 라이라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향기를 맡으며 말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기디아의 안녕과 발전이야."
사무엘은 섬의 구석에 있는 한 방에서, 홀쭉한 뺨에 우울한 차림새를 하고 길을 나섰다. 그의 옆으로 섬의 원주민들이 낮의 땡볕 더위를 피해 휴식을 취하는 해먹이 보였다. 원주민들은 해먹 위에서 삼삼오오 모여 잠을 자거나 칭얼대는 아이들을 어르곤 했다. 저 멀리에는 한가로이 풀을 뜯어 먹는 염소무리도 보였다. 하늘 높이 시원스레 뻗은 야자수 나무나 만발한 꽃들 사이로 부지런히 오가는 꿀벌을 보면, 과연 이곳이 섬이 맞는지 의심이 갔다. 이 섬은 바로 대양의 유람자 아르케론, 거대한 고대 거북의 등껍질인 것이다! 까무잡잡하게 탄 섬의 아이들은 파도가 만든 웅덩이에서 맨발로 뛰어 놀았다. 아이들은 조개, 굴, 말미잘, 불가사리 따위를 가지고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영특해 보이는 꼬마 하나가 능숙하게 성게의 내장과 속살을 빼서 입에 털어넣었다. 그보다 더 나이가 많은 아이들은 자신의 머리보다 더 큰 알이 들어있는 바다새의 둥지를 털어먹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사무엘은 그 사이로 미끄러운 물이끼를 밟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전진했다.
이윽고 섬의 가장 고지대에 가까워지자 사무엘의 굶주린 위장을 사정없이 자극하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났다. 원주민들은 공터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른들은 뜨거운 석탄 위에서 생선을 굽고 있었고, 아이들은 구울 해산물을 가져오거나 해조류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바삭바삭 익어가는 커다란 물고기의 배에는 섬에서 나는 과일과 향료가 듬뿍 들어있었다.
"피할 곳을 찾게나 아가씨들. 비구름이 몰려오는군." 사무엘의 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 누군가 했더니 사무엘이 아닌가. 어서 오시게."
벚꽃이 흩날리는 나무 아래엔 키 큰 남성 하나와 여인 둘이 음식 바구니 앞에 앉아 있었고, 세 명 모두 무릎까지 오는 특이한 긴 옷을 입고 있었다. 남자는 다리를 꼬고 앉은 여인의 손톱에 물을 들이고 있었고, 다른 여자 하나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날카로운 칼로 다듬고 있었다.
사무엘은 그들이 앉아있는 그늘 반 발짝 앞에서 어색하게 멈춰 섰다. "흠. 그쪽이 누구신지 모르겠습니다만..."
"겁낼 것 없어. 나는 랜스라고 한다네." 남자가 말했다. 랜스의 머리카락을 다듬던 여자는 그의 귀 뒷머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꿀과 치즈를 들게. 기분이 한결 나아질 거야."
"오늘은 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사무엘 말했다.
"어디 아픈 건가요?" 머리카락을 다듬던 여자가 날카로운 면도날을 든 채 물었다.
“아닙니다.” 사무엘이 대답했다. “단식일이라 그렇습니다. 단식은 힘을 기르고 정신을 또렷하게 하지요.”
"이 같은 만찬이 앞으로 얼마나 있을 것 같나!" 랜스가 탄식했다. "이런 아리따운 여성의 손가락에 뭍은 꿀을 핥을 수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축복이지!"
놀란 사무엘의 눈에 손톱에 물을 들인 여인이 짓궂은 미소를 지은 채 꿀단지에 손가락을 넣은 게 보였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최대한 숨기며 사무엘은 물었다. "그녀들은... 당신의 아내가 아닙니까?"
"사람은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라네." 랜스가 답했다.
"그럼... 저들도 당신의 아이들이 아니란 말이고요?" 사무엘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이들은 모두가 보듬어야 하는 존재예요. 아이들의 순수함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게 하죠." 여인이 날카로운 면도칼을 집어넣자, 벚나무 가지에서 아이 하나가 내려와 랜스의 어깨에 앉았다. "하하하 샘! 우리의 성의를 거절할 셈이오? 오늘은 당신의 그 단식이란 걸 깨도록 하시오."
"전 샘이 아니라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이 약간은 퉁명스레 대꾸했지만 랜스의 제안을 거절하진 못했다. 그는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바구니에 생선을 조금 덜고는 먹기 시작했다. 잘 익은 생선은 뼈째 씹히며 고소한 맛이 났다. 사방에서 귀여운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고 일부는 사무엘의 다리를 잡고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가 배부르게 먹은 뒤 일행은 섬 가장자리의 오솔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얕은 너울에서 바다 트롤이 물개를 사냥하고 있었다. 트롤의 물개 사냥법은 특이했는데 먼저 튼튼한 팔로 물개의 목을 꽉 조인 채 물에서 한참 동안 두었다. 이후 숨을 못 쉬어 기진맥진한 물개를 물에서 꺼내고는 튼튼하고 거대한 턱으로 숨통을 끊어놓았다.
"아이들이 보기에... 좀 잔인한 장면이지 않습니까?" 사무엘이 걱정하며 물었다.
랜스는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사무엘의 경직된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올리고는 말했다. "바다 트롤은 일 년에 한 번 알을 낳으러 해변으로 오지. 그리고 우리는 이들은 보살펴 준다네. 그 보상으로 바다 트롤은 아르케론의 연약한 복부를 포악한 바다 생물로부터 보호해 주지. 하하. 녀석들 격렬하구먼."
섬의 가장자리, 항구에 늘어선 바지선의 끝자락에 있는 공터에서 원주민 남성들이 바다 트롤들의 머리에 안장을 올렸다. 이들은 대나무 갑옷과 방패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등나무 장창 꼬나쥐고 있었다. 격렬한 마상창시합이 벌어지는 순간이다! 남자들은 바다 트롤의 목에 올라타고 상대방을 향해 돌진했으며, 이내 장창과 방패가 부딪혀 굉장한 소리를 냈다. 부서진 대나무 파편이 뜨거운 햇볕을 수놓았다. 이 격렬한 바다 사나이들 중 으뜸은 랜스였다. 그는 정말 타고난 장창수로, 안장에서 자유자재로 위치를 바꾸며 장창을 사용해 상대방을 족족 떨어뜨렸다. 랜스가 득의양양한 승리의 미소를 지으면, 그가 탄 트롤은 기쁨의 포효를 내질렀다.
이윽고 창시합이 끝난 뒤 사무엘과 랜스는 함께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았다. "이곳이 바로 우리의 고향이라네. 어떤가?" 랜스가 물었다.
"언젠간...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사무엘이 답했다. "거대 거북 아르케론이 언제까지나 살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아르케론의 등껍질에 새겨진 나이테로 볼 때, 이 위대한 거북은 기천 년을 살아왔지. 아직도 대양의 그 어떤 거센 파도도 그의 앞길을 막지 못한다네."
"하지만 살아있는 모든 것은 언제가 죽는 법이고 그것이 그것은 만고의 진리잖습니까."
"믿음을 가지게나 친구여." 랜스가 사무엘의 기운을 북돋워 주며 말했다.
"비록 만물에 정답이란 있을 수 없지만,"
"진실한 믿음은 분명 가치 있는 것이지."
2편 '기디안의 창'
[ 펼치기 · 접기 ]
사무엘이 섬에서 머문 지도 어언 한 달. 그리고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었다. 랜스는, 그가 물속에 뛰어들어 거대 거북 아르케론의 눈을 보려고 하는 모습을 해변에서 지켜보았다. 문득 랜스의 머릿속에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옛날 그도 같은 시험을 치른 적이 있었다. 작디작은 존재인 인간을 응시하는 눈... 사람의 키보다도 더 큰 눈동자... 랜스의 상념은 사무엘이 물 밖으로 나와 내뱉는 기침 소리에 끊겼다. 랜스는 그의 등을 두드리며 물었다. "고생했네. 아르케론의 눈을 보았는가?" "예 보았습니다." 겨우 숨을 진정하며 사무엘이 답했다.
"위대한 거북이 뭐라고 하던가?"
사무엘의 미간이 좁아졌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거북이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저런 아니야. 아르케론의 말은 가슴으로 들어야 한다네."
"다시 말씀드리죠. 가슴으로도 그 거북의 말을 못 알아들었습니다"
"흐음... 알았어. 뭐 그래도 아르케론과 당당히 마주했으니 이제 자네도 자격이 있지." 그리고 랜스는 사무엘을 데리고 해변 주위를 걸었다. 이따금 수면 밖으로 머리를 내민 바다 트롤이 재롱을 부리자 랜스는 트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르케론의 덩치는 너무나도 커서 칼날만을 통과할 수 없네. 따라서 내가 기디안 도시까지 바지선으로 데려다주지." 그리고 랜스는 놀랍게도 다음 문장을 기디안어로 말했다. "우리의 운명은 결국 하나일지니."
"흠. 그 말을 아르케론 인에게서 들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약간 퉁명스럽게 사무엘도 기디안어로 대꾸했다. 바지선이 대 있는 항만 근처에는 섬의 아이들이 잠수하며 진주조개를 낚아 올리고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자맥질을 하는 아이들 손에는 조개를 잡을 그물이 쥐어져 있었다.
랜스는 사무엘을 이끌고 바지선 중 하나의 선실에 도착했다. "오래전 내가 어렸을 때, 자네 같은 기디안 한 명이 이 아르케론에 왔지. 그는 생에 마지막으로 드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 했어. 아무렴.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훌륭한 기사였지."
"그럼 저와는 하늘과 땅 차이군요." 사무엘이 빈정댔다.
"그는 나한테 창과 방패를 다루는 법과 용기, 자비, 규율, 정의, 명예, 충성, 예의. 이런 기사도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쳐 줬어." 랜스의 눈동자가 기쁨으로 빛났다. "그리고 기디안 도시의 유구한 음악과 열정, 나아가 영혼을 취하게 하는 아름다움까지도 말해 줬다네."
"흥. 그 잘난 분께서는 전쟁, 부정, 부패 같은 현실적인 것들은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까?"
"뭐 자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 이 세상엔 바로잡을 게 많긴 해. 그리고 세상을 바로잡으려면 아르케론의 등 위에서만 있으면 안 돼. 여길 보게. 그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날 때 내가 물려받은 거네." 랜스가 선실의 초를 켜자 따뜻한 공기와 함께 은은한 빛이 선실 바닥에서 흘러나왔다. 랜스는 바닥 밑을 뒤져 갑옷과 방패 그리고 장창을 꺼냈다. "그때부터 난 평생 기디안의 유물에 매료되어 살았지."
랜스는 방패를 들어 올려 사무엘에게 보여주려 했지만, 사무엘의 관심사는 무기가 아니었다. 그의 눈은 잘 정돈된 주방 도구, 나뭇가지 모양의 촛대, 고대의 지도, 깃털로 장식된 축제 가면, 사자 머리 모양의 놋쇠 문고리 등을 훑고 있었다. 그는 그중 녹슨 반찬 통 하나를 꺼내 들고는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아름다운 방패군요. 그런데 방패 표면에 상처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 잘나신 기사님은 싸움은 별로 안 하셨나 보군요."
"전투가 기사의 모든 건 아닐세." 랜스가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분명 내 목숨을 바쳐 기디안인을 지키겠다고 맹세했어. 그 고귀한 맹세만으로도 기사의 자격은 충분한 법이야."
"그러니까 전 당신의 보호는 필요 없습니다." 사무엘이 반찬 통을 내던지며 말했다. "전 당신의 꿈속에서나 나오는 그런 멋진 기디안 기사가 아닙니다. 더구나 네 살 이후로는 도시에는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자넨 예전 그 사람의 판박이야. 난 알 수 있다네."
"당신이 저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러십니까? 그리고 기디아에 대해선 뭘 아시죠? 당신이 그렇게 열심히 배운 건 다 의미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보다 루시아 거리에서 어느 가게가 가장 맛난 빵을 굽는가 등이 훨씬 가치 있는 정보입니다." 사무엘은 먼지 쌓인 책을 하나 집어 들더니 책장을 빠르게 넘기며 말했다. "기사도는 그냥 오래된 가문들이 기우는 가세와 재물을 지키려 꾸며낸 거에요. 당신의 그 대단하신 정의, 정직, 예의... 이런 것들 따위와는 저 밤하늘의 별 만큼이나 떨어져 있다고요."
랜스는 부드럽게 아이를 타이르는 아버지처럼 말했다. "사무엘. 그 가치들은 내 모든 것일세. 알겠나?"
그래서 첫 동이 틀 때 즈음 사무엘은 랜스의 바지선에 검은 망토를 눌러쓰고 불편하게 앉아있었다. 완전 무장한 랜스는 과히 기디안의 기사란 말이 아깝지 않을 만큼 멋진 모습이었다. 그는 바다 트롤들을 능숙하게 다루며 도시의 항구로 향했다. 도시가 가까워지자 아침 햇살이 내리쬐며 도시의 분수, 조각상, 첨탑, 물레방아간 등을 장밋빛으로 물들였다. 걷히는 아침 안개 사이로 그 광경을 본 랜스는 말문이 막혔다. 그의 큰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이윽고 바지선은 도시의 항구에 도착했다. 항구는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배들과 인파로 북새통이었다.
사무엘은 랜스의 거대한 갑옷 뒤에 숨어 어색하게 바지선에서 내렸다. 랜스는 손을 들어 항구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으나, 모든 이들의 눈은 랜스 뒤의 젊은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윽고 군중 속에서 손에 반지를 낀 비단옷을 입은 여인이 앞으로 나섰다. 환영의 뜻으로 손바닥을 앞으로 편 그녀의 입에서 인사가 흘러나왔다. "집에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사무엘. 네가 잘못된 건 아닌지 가슴 졸였단다."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사무엘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라이라가 사무엘이 걸어놓은 그랑고르풍 머리 장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무엘은 눈이 녹아 물이 뚝뚝 떨어지는 외투를 바닥에 팽개치고는 정리정돈이 안 된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런. 또 지루한 강의를 하러 오셨나요?" 그는 한쪽 팔로 얼굴을 가리고는 투덜댔다. "이번 주제는 뭐죠? 마력의 안정? 아니면 명령에의 복종?" 라이라는 펼쳐진 책, 지도, 종이 따위로 어질러진 난장판을 지나, 거대한 바다사자의 골격을 피해 사무엘 옆으로 다가왔다. 일찍이 사무엘은 그랑고르 종족의 사냥 의식에서 바다사자를 잡은 적이 있었다. "대체 이 거대한 녀석으로 뭘 한 거니? 설마 잡아먹은 거야?"
"사냥 의식에 참여한 그랑고르 부족과 함께 나눠 먹었어요. 전 오른쪽 지느러미, 족장은 왼쪽 걸 먹었죠."
라이라는 몸서리치며 말을 이었다. "방 청소 좀 해야겠구나 얘야. 침대 위에 거미줄이 그대로 있구나."
"조심하세요. 이 녀석은 특별한 잠거미예요. 꿈을 먹고 그 꿈을 거미줄로 짜는 능력이 있죠. 전 연옥에서 녀석을 가져왔어요."
라이라의 눈이 순간 분노로 타올랐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연옥에 관계하지 말라고. 그곳의 악몽과 악령은..."
"하지만 꿈과 유령과 발키리도 있죠. 라임 할아버지에 의하면..."
"이런, 그 망령든 늙은이와 아직도 어울려 다니느냐? 이번 주 내내 그자와 있었어?"
사무엘은 여전히 한쪽 팔로 눈을 가린 채 큭큭 웃었다. "그래서 뭐 어쨌단 거죠. 저한테 실망이라도 하셨나요. 이미 전 사부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건 포기했다구요. 사부님의 사전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있긴 한지 궁금하군요."
"젊은이의 치기 치곤 말이 심하구나."
"항상 그렇게 또 나에게 강의하시죠." 사무엘이 과장되게 하품하며 비꼬았다.
라이라는 혀를 차고는 지긋이 사무엘을 바라보다 말했다. "아니. 지금 강의를 할 사람은 내가 아니고 기디안의 대마법사란다." 그리고 그녀는 침대 위에 작지만 무거운 보이는 강철 기계를 내려놓았다. 사무엘은 기계를 곁눈질했다.
"이게 뭐하는 장치죠?"
"이건 갓 트로스탄에 도착했단다. 기디안의 마탑에서 드디어 홀로그램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더구나. 모든 게 이곳 트로스타니아에서 출토된 강화 수정 덕분이지. 몽릴에서는 이런 홀로그램 전언을 수년 전부터 이용하곤 했어."
"... 캠페스트리아에서는 더 오래 되었어요." 사무엘은 이제 침대에 바로 앉아 장치를 요리조리 살피기 시작했다.
"이것도 일종의 진보라면 진보라 할 수 있지. 트로스탄에서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던 거야."
"뭐 어쨌든요. 그럼 대마법사께서 내놓은 자식놈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확인해보죠."
"사무엘." 라이라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양쪽 다 이런 감정 표현에 익숙하지 않아 순간 어색함이 흘렀다. "내 생각에 어쩌면 이 전언은..."
"걱정마세요 사부님. 이제 전 예전에 엄마 꽁무니만 따라다니며 한 줌의 애정이라도 갈구하던 애가 아니에요, 14년간이나 나 몰라라 한 여자에게 흔들릴 만큼 전 약하지 않아요" 사무엘이 코웃음 쳤다. "라임 할아버지가 그러더군요. 날 보면 야생의 들개가 떠오른다고요."
라이라는 그 말을 듣고 차마 뭐라 위로하지 못하고 그저 장치를 바라만 보았다. 흘러내린 풍성한 머리칼이 다행히 그녀의 표정을 가려주었다. 사무엘이 장치의 단추를 누르자 장치가 파란색으로 변하고 윙윙 울리더니 이내 여성의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기억에는 특별히 남아있지 않았지만 사무엘은 분위기로 확신할 수 있었다. 바로 기디안 대마법사의 얼굴이었다.
"사무엘." 잡음과 함께 홀로그램으로부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법사 라이라가 너의 진도에 대해 나한테 말해주었다. 아홉 번의 시련을 무사히 통과했다고 하더구나. 네가 자랑스럽다. 기디아의 마법사 길드는 네가 열 번째 시련도 무사히 통과하리라 기대하고 있다. 최종 시련을 마치면 고향으로 돌아와 길드에 정식으로 가입할 수 있을 게다. 마법사 라이라가 잘 이끌어 줄 것이라 믿는다."
홀로그램은 여기서 잠시 쉬더니 곧 말을 이었다.
"길드에서 정식 지위를 받은 뒤, 난 널 트로스탄의 총독에 임명할 예정이다. 그럼 총독의 명으로 그랑로그 종족을 지금보다 더 외곽지대에 살게 하거라. 그 조치로 칼 봉우리에서 우리의 세 확장과 수정 광산 개발이 더 수월해질 거다. 너와 그랑고르 종족의 끈끈한 유대가 그래서 중요하다. 모든 걸 마치면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고향에 돌아올 수 있을 거야."
"아들아. 우리 길드, 우리 제국의 운명이 너의 양어깨에 달려있다. 너의 도움으로 기디아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것이다."
굳은 표정을 마지막으로 홀로그램은 픽하고 사라졌다. 사무엘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으로 기계장치를 바라보았다. "그랑고르인들을 트로스탄의 외각으로 이주시키라고..." 그가 씩씩댔다. "빌어먹을. 어머니는 그랑고르인을 하나라도 만나보고 저런 소리를 하는 건가?"
라이라가 주위를 환기하려 긴 소매 사이로 박수를 쳤다. "뭐 필요하다면 어쩔 수..."
"아뇨. 그랑고르는 트로스탄을 버리지 않을 겁니다. 난 연옥에서 똑똑히 보았어요. 그네들의 영혼은 바로 이 땅과 함께 살아왔고 앞으로도 함께할 거라고요."
"마치 자신이 그랑고르인 것 마냥 말하는구나." 라이라가 지적했다.
사무엘이 침대에서 일어나 방 안을 서성이며 말했다. "이는 사실상 그들 모두를 죽이는 조치입니다. 어머니는 그랑고르 종족 전체의 멸망을 요구하고 있어요.
"넌 기디아인이다."
그 말에 사무엘은 휙 돌아서서 라이라를 노려보았다. "정말 어이가 없군요. 이 말도 안 되는 명령을 제가 따르리라 보나요?" 거칠게 시작한 그의 말은 이윽고 천둥이 되어 방 전체를 울렸다. 놀랍게도 그의 목소리는 어둠의 힘이 넘실대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어둠녘 구체로 변해 그와 라이라를 둘러쌓다.
구체 안에 흐르는 끔찍한 악몽의 기운. 라이라는 맹세코 사무엘에게 이런 사악한 마법을 가르친 적이 없었다. 그녀가 손을 내밀며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라이라는 헉 소리와 함께 악몽에서 깼다. 대체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는 혼란한 정신을 뒤로하고, 그녀는 보호의 성역을 시전하여 어둠의 기운을 몰아냈다.
침대 머리맡에는 잠거미가 거미줄로 집을 짓고 있었고, 그 모양은 불타고 있는 트로스탄의 형상을 묘하게 닮아갔다.
2편 '시험'
[ 펼치기 · 접기 ]
밝은 깃털 장식을 한 거대새들이 가마를 끌고 기디안 거리를 달렸다. 제일 선두의 대마법사의 가마, 두 번째의 라이라와 라임의 가마, 마지막으로 랜스와 사무엘이 탄 가마가 행렬을 이뤘다. 랜스는 굳이 마지막 가마에 사무엘과 함께 타기를 고집했다. 가마의 커튼 사이로 기디아 시내의 풍경이 스쳐지나갔다. 도시를 둘러싼 거대한 흑요석 장벽을 따라 정찰 망루와 병사 훈련소가 산재해 있었다. 그보다 안쪽의 도심 구역에는 어두운색의 행정탑, 온갖 측량 장비가 마당에 놓여 있는 지도제작자탑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법사탑이 서 있었다. 기디아의 상징인 마탑은 다른 탑들보다 적어도 수십 미터는 높게 솟아 도시를 굽어보았다. 탑의 층마다 난간에는 역대 대마법사의 황금 조각상이 장식되어 있었고, 이들은 모두 '선'이라 불리는 고대의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사무엘은 자신을 노려보는듯한 조각상들을 외면하고 마탑의 대강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익숙지 않은 매캐한 마법의 향기가 공기 중에 가득했다. 라이라와 라임은 사무엘을 따라가려는 랜스를 막아섰다. 여기서부터는 그 혼자서 가야한다.
대강당으로 향하는 통로에는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기둥들이 서 있었고, 통로의 끝에는 두 개의 크고 작은 석단이 놓여 있었다. 사무엘은 작은 석단 위에 올라섰다. 높은 쪽 연단에는 마법 길드의 고위 마법사들이 근엄한 표정으로 자리했고 가장 선두에는 대마법사가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어두운색 장식이 수놓아진 법복을 입은 대마법사.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순수 마법사의 혈통을 지닌 사무엘." 끈끈한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대의 열 번째 시험이 이제 시작되었도다. 통과한다면 그대는 마법사 길드에 정식으로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팡이 '선'을 앞으로 내밀었다. "만만의 준비를 하였으리라 믿는다."
사무엘은 허리띠에서 지팡이 '악'을 꺼내며 물었다. "그래서... 제가 당신에게 불복종한 것은 추궁하지 않는 겁니까? 기디아의 희망, 트로스탄을 파괴한 것에 대해서 따져 묻지 않으시나요? 아니면 자신의 그 고귀한 혈통이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겁니까?" 사무엘이 지팡이를 움켜쥐며 쏘아붙였다.
순간, 선에서 한줄기 광선이 사무엘의 뒤로 날아갔고 곧 지독한 고통이 그를 엄습했다. 배를 움켜쥐며 인상을 찌푸린 채 미지의 공격자를 바라보는 사무엘. 그곳에는 자신과 똑 닮은 어둠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딴 것을 두고 시험이라니... 이건 배신이다! 사무엘이 미처 분노하기도 전에 그의 그림자가 다시 공격해왔다.
~
랜스의 돌격은 빛나는 녹색 벽에 막혔다.
"모든 행동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라네." 라이라가 말했다.
옆에서는 라임이 무표정한 얼굴로 싸움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표정과는 다르게 그의 손은 하얘질 정도로 지팡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
급류가 흐르는듯한 소리가 사무엘의 귀를 강타했다. 그가 오른쪽으로 피하자 그림자도 바로 따라붙었다. 그림자가 쏜 섬광이 사무엘의 왼발에 맞았고 그는 이를 악물며 힘의 단어를 읊조렸다. 사무엘의 지팡이에서 튀어나간 마법 광선이 간발의 차로 그림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공격이 실패한 것을 본 사무엘은 힘의 단어을 한 번 더 외쳤다. "우루즈!" 안타깝게도 이번에도 광선은 그림자를 맞추지 못했다. 이제 거꾸로 사무엘이 공격받을 차례. 그림자가 살인 광선을 뿌리자 사무엘은 어둠의 마법으로 응대했다. 대강당은 둘의 싸움으로 뜨겁게 달아올랐고 사무엘은 노력했지만 자신의 그림자를 제압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림자에겐 불가능한 게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임기응변.
사무엘은 우측으로 뛰어나가는 척하다가 잽싸게 뒤로 물러서며 근처의 기둥으로 향했다. 그리고 기둥에 새겨져 있는 사자 머리 조각상의 송곳니를 꽉 움켜쥐고 제비를 넘으며 순식간에 조각상 머리 위로 올라갔다.
"케나즈!" 사무엘이 다시 외치자 일순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고 그 흐름을 타고 수백, 수천의 고대 마법사 영혼들이 대강당을 맴돌았다. 어둠이 사무엘을 삼키는 그 순간 그는 다시 지상으로 뛰어내리며 악을 크게 휘둘렀고 마법의 화살은 그림자를 직격했다.
단말마와 함께 그림자가 사라진 자리. 사무엘은 지옥의 마왕처럼 혼돈을 거느린 채 당당히 섰다. 연단 위에서는 대마법사가 선을 다시 뻗었다.
"쿡쿡. 눈 가리고 아웅이라... 이건 허울뿐인 시험에 불과해. 실제로는 처형이라고." 사무엘이 가쁜 숨을 내쉬며 비꼬았다. "이 방법으로 라임 스승님의 아들도 죽였지? 당신은 그냥 말 잘 듣는 꼭두각시가 필요할 뿐이야!"
"아직 시험은 끝나지 않았다." 대마법사가 말했다. "집중하거라."
두 번째 그림자가 선에서 튀어나오며 사무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빠르게 거리를 벌리는 사무엘의 손에는 악이 칼처럼 쥐어져 있었고, 타오르는 눈동자로 상대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는 곧 화들짝 놀라 탄성을 내질렀다. 그곳에는 공포에 사로잡힌 조그마한 아이가 서 있었고, 그 모습은 그가 14년 전 처음 트로스탄에 도착했을 때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었다. 지팡이 악은 그의 작은 손아귀로 쥐기에는 너무나도 커 보였다.
"이게 뭐하는 수작이야." 사무엘은 분노했다. "나의 현재 그리고 나의 과거. 다음에는 미래의 나이든 나라도 상대하라는 거냐?"
"일단 이번 관문을 통과하고 보지." 대법사가 무심히 말했다. "실패하면 그다음도 없을 거다."
그림자 소년의 지팡이에서 마법의 화살이 날아들었지만 사무엘은 그런 어설픈 공격 따위는 쉽게 피해버렸다. 익숙하지 않은 손놀림으로 지팡이를 휘두르는 소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실패... 실패라. 좋아, 그리해 주지." 그리고 사무엘은 해골 형상의 악령을 소환했다. 소환된 악령은 그림자 소년뿐만 아니라 연단의 마법사들까지도 깊은 잠에 빠뜨렸고 이는 대마법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
녹색으로 빛나던 벽이 사라지고, 일렁이는 차원문이 랜스의 발치에 나타났다.
"뭘 망설이는 거야." 라이라가 재촉했다. "어서 가라고!"
~
사무엘은 높이 뛰어오르며 추락하는 대마법사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지상에 착지한 그는 혼미한 상태의 대마법사의 손에서 지팡이 선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녀를 노려보며 윽박질렀다. "그녀는 어디에 있나!"
"누, 누구를 말하는 거냐?"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대마법사가 더듬댔다.
"기디아의 소녀." 사무엘이 대법사를 내려보며 똑바로 말했다. "트로스탄이 당신의 유일한 무기가 아니었잖아. 폭풍 여왕 조카딸. 그녀를 어디에 숨겼어!"
대마법사는 격통에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그녀는 동맹군을 모으고 있다. 할시온 협..."
사무엘의 코웃음이 대마법사의 말을 끊었다. 그는 선과 악 지팡이 두 개를 그녀의 얼굴에 겨냥했다. "잘했어. 어머니. 이제 그만..."
그때 강철 갑옷이 철컥이는 소리와 함께 건장한 기사 하나가 낙법으로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무기를 높이 뽑아 들고 방패를 단단히 받쳐 든 그 모습에 사무엘은 지팡이를 회수하며 뒤로 물러났다.
"다시 생각해 보시게. 친구여." 랜스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사무엘의 입꼬리가 소름 끼치는 각도를 그리며 올라갔다. "기디아의 연놈들 한 수레 갖다놔도 그대만 못하군요." 사무엘은 그렇게 말하며 랜스 옆의 빛나는 차원문으로 몸을 던졌다.
다시 대강당 밖의 차원문 입구. 라임의 앞으로 뻗은 손바닥에서 살을 에는 냉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라이아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고 고드름이 그녀의 귀와 턱에 달렸다. 그녀의 마법서는 얼음투성이인 상태로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라임은 차원문을 빠져나온 사무엘을 고통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맹그로브 나무가 늘어선 강 길엔 울창한 덩굴과 화려한 들꽃이 가득했다. 번쩍이는 황금 갑주를 걸친 당당한 성기사를 선두로, 십수 명의 전사와 토착민 안내인들이 대열을 이루었다. 행렬의 중간에는 탐험가들이 열심히 주변을 관찰하며 그림을 그리고, 표본을 수집하고, 정보를 기재했다. 성기사의 조그마한 딸은, 그의 강인한 손가락을 조막만 한 손으로 꼭 쥐었다. "섬이 마음에 드니 그레이스?"
이제 갓 6살이 된 그레이스는 이번이 기디아를 벗어나는 첫 여행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아름다운 밀림은 그녀의 흥을 돋웠고, 아이 얼굴만 한 꽃, 깃털을 뽐내는 새, 무엇하나 아름답지 않은 게 없었다. 심지어 본래라면 거추장스러웠어야 할 날파리들도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응. 세상에서 가장 예쁜 곳이야." 애늙은이 같은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아. 그럼 이곳을 '그레이스 섬'으로 하지. 잘 받아적도록." 성기사는 일단의 군도를 모두 껴안듯이 양팔을 크게 벌리며 말했다. 단장의 명령에 지도제작자의 깃펜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레이스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두리번거릴 때, 성기사와 수행원들은 마치 자신들이 세상을 창조한 듯, 만물에 이름 붙이기에 바빴다. 순진무구한 토착민들은 그 모습을 보며 밝은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사이로, 하늘거리는 쪽빛 사롱을 걸친 아이가 그레이스 어깨 위 원숭이에게 자두를 먹였다.
"정말 친절한 사람들이야."
"섬사람들의 문화엔 친절과 평화가 각인되어 있지. 심지어 이들은 어릴 때 뾰족한 송곳니와 앞니를 갈아 폭력성을 줄인다더구나." 성기사가 동의했다.
"윽. 아플 거 같아." 그레이스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물론 괴롭지."
"그럼 그런 짓 그만하라고 해 아빠."
"사랑하는 내 딸아. 사냥꾼은 호랑이보다 사냥을 잘할지도 몰라. 하지만 거꾸로 호랑이에게 어떻게 사냥하는지 가르쳐 주는 건 어리석은 일이란다."
"하지만 이들은 호랑이가 아니라 사람인걸."
"그래. 일종의 사람 같은 존재지." 성기사가 대꾸했다.
그레이스가 인상을 찌푸릴 때, 그녀의 시야가 환하게 밝아졌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레이스가 비틀대자, 어깨에 올라탄 원숭이는 도망갔고 행렬은 그 자리에 멈춰섰다.
"아, 아빠..." 그레이스가 신음했다.
"겁내지 말거라 얘야. 빛이 무엇을 보여주는지 말해다오." 성기사가 그레이스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행렬 앞에는 두 갈래 길이 놓여있었다. 그대로 숲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커다란 얼음벽이, 강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타오르는 화염벽이 나타났다. 그레이스는 열기로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답했다. "얼음과 불... 얼음과 불의 벽이 보여요." 그레이스가 조용히 속삭였다.
"어느 쪽이 불의 벽이니?"
그레이스가 손가락으로 강을 가리키는 순간, 환상처럼 얼음벽과 화염벽이 사라졌다.
성기사는 딸의 말을 듣고 행렬을 일렬종대로 늘어뜨려, 강 위에 나 있는 돌다리로 향했다. 그곳에는 신비한 기운을 간직한 고대의 사원이 있었다.
걸음을 서두르는 그들 앞에 토착민 안내인이 끼어들었다. 그는 미소짓고 있었지만, 목소리엔 긴장이 가득했다. "기사님. 감히 말씀드리건대 외부인이 신전에 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만 돌아가시지요." 안내인이 간청하며 소매를 걷어 올리자, 끔찍하게 그을린 흉터가 나타났다.
"괜찮다. 물러서거라." 성기사는 나지막이 명령하며 안내인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화상 흉터에서 손바닥 모양의 새살이 자라났다.
성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신전을 바라보았다. 집채만 한 바위가 켜켜이 쌓인 신전은 범접할 수 없는 위용을 뽐냈고, 강가를 빼곡히 덮은 맹그로브 나무도 신전 주위는 모두 불타 뼈대만 앙상했다. 성가신 모기떼와 깩깩대는 원숭이 무리도 보이지 않아 기괴한 적막감만이 감돌았다. 행렬의 선두가 신전 입구로 진입하려는 찰나, 그레이스보다 어려 보이는 토착민 소년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허리에 사롱을 동여맨 소년의 몸뚱아리에는, 안타깝게도 안내인의 팔에 난 것과 같은 화상이 전신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이 아이는 레자라 합니다. 저희는 '불을 뿜는 소년'이라 부르며 두려워하죠." 안내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팔에 나있던 흉터는 성기사가 심어놓은 회복의 기운으로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빠. 이 아이 다쳤어요." 그레이스가 걱정했다.
성기사는 그레이스를 소년에게 이끌었다. "가서 배운 대로 행하거라."
그레이스는 돌층계 참을 지나 조심스레 신전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기디아식 인사를 건네자 소년이 움찔했다.
"겁 먹지마. 널 치료해줄게." 그레이스가 부드럽게 말하며 정신을 집중하자, 그녀의 정수리에 눈부신 빛이 강림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힘을 운용하자, 빛은 얼굴을 지나, 목을 거쳐 그녀의 심장으로 이어졌다. 심장의 고동과 함께 빛이 더 커지는 순간, 그레이스는 양손을 소년의 얼굴에 갖다 댔고 성스러운 힘은 손바닥을 통해 소년에게 전해졌다.
새하얀 빛이 자신을 감싸자 소년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앞에 서 있는 소녀에게서 적의가 느껴지지 않음을 깨닫고, 얌전히 그 힘을 받아들였다. 빛이 소년의 몸을 휘감자 끔찍했던 흉터는 사라지고 새살이 자라났다.
"돼, 됐어. 훨씬... 보기 좋구나." 강렬한 힘을 사용한 반동으로 그레이스가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그녀 앞에는 흑진주처럼 매끈한 피부를 가진 잘생긴 소년이 서 있었다.
소년은 입을 열어 뭔가 말하려 했으나, 튀어나오는 것은 타오르는 불과 회색빛 재뿐이었다.
성기사는 불이 그레이스를 덮치기 전, 빛나는 방패로 그들 사이를 막아섰다. 화염이 거칠게 타올랐으나, 성기사가 불러일으킨 신성한 가호를 뚫진 못했다. 은인에게 감사의 표시도 하지 못하는 저주받은 운명에,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흐느끼는 소년 곁으로 성기사가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순혈 마법사로구나. 그 강대한 힘을 제대로 다루려면 체계적인 훈련이 필요하단다. 빛의 힘을 타고난 그레이스가 그랬듯이 말이야. 처음엔 이 아이도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빛의 환상에 고통스러워했지. 그레이스 내 딸아. 마법사의 탑에 이 아이를 맡길 때까지 네가 보살펴 줄 수 있겠니?"
"응! 얘. 넌 지금부터 내 동생이야. 이름은... 그래 타이터스. 타이터스가 좋겠어." 그레이스가 소년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2편 '여명'
[ 펼치기 · 접기 ]
그레이하운드가 다리에 코를 킁킁대는 느낌에 그레이스는 잠에서 깼다. 창밖은 아직 어두컴컴했으며 새벽 여명이 막 비추는 참이었다. 기지개를 쭉 켠 그레이스는 사냥개와 함께 텅 빈 훈련장으로 나갔다. 무기 진열대의 잘 관리된 여러 병기 중에서 그녀는 강철 철퇴를 집어 들고 굳은 몸을 풀기 시작했다. 지난 세월 수없이 반복한 동작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풀려나왔다. 아름다운 춤사위를 펼치는 그레이스의 마음은 명경지수처럼 고요히 잦아들었다. 거듭된 훈련은 그녀를 괴롭히던 빛의 환상을 완벽히 통제했다. 무아지경에 빠진 그레이스의 의식은 점점 떠올라 훈련장 전체를, 그 너머 도시 전체를 관조했다. 처음엔 한 남자가 다급히 외치는 힘의 언령만 들려왔다. 사이한 존재감을 뿜는 일련의 단어들은 허공에 시커먼 어둠을 만들어냈고, 그 사이로 구원을 갈구하는 끔찍한 존재들이 기어 나왔다. 연옥이 현세에 소환된 것이다!
그레이스 계속 정신을 집중하며 환상을 이끌었다.
'연옥을 불러온 자를 보여다오.'
환상은 크게 일렁이더니 도심의 어두컴컴한 골목을 배회하는 기사를 비추었다. 그는 그레이스의 기억에 없는 자로 기디아식 갑옷을 입고 한 손엔 방패, 다른 손엔 장창을 쥐고 있었다. 남자는 차가운 아침 공기를 헤치며 고집불통 청년 하나를 본 적 없냐고 시민들을 수소문했다. 그 와중에 때론 드높은 고대의 탑들을 보며 경의를 표하고, 싱그럽게 흘러내리는 분수에 감탄하고, 빵집 굴뚝에서 새어 나오는 갓 구운 빵의 냄새를 음미했다.
이윽고 그레이스는 명상을 끝내고 환상을 꺼뜨렸다. 아침 수련이 끝난 걸 본 수행자들이 시원한 물과 깨끗한 수건을 땀 흘린 그레이스에게 바쳤다.
"도시 관문에 남자가 하나 배회하고 있을 것이다. 이리 데려오라." 그레이스는 아침 식사가 준비된 강당으로 발을 옮기며 명령했다.
기사단에서 그레이스의 환상과 명령은 절대적. 수행원들은 그녀가 자리에 앉아 첫술을 뜨기도 전에, 환상에 나타났던 남자를 식탁 앞에 대령했다. 그는 기사단의 위용과 그레이스의 고귀함에 압도되어 경건한 모습으로 주변을 살폈다. 수행원들은 그가 가지고 있던 방패와 장창을 그레이스에게 가져다 주었다.
"이 양식과 재질. 잊을 수 없지. 이 방패와 창은 겐나로 경이 평생을 아꼈던 것이다. 그를 아는가?"
남자는 그레이스의 말에 밝은 미소를 지었다. "내 스승이자 은인이오. 그분은 나의 고향 아르케론에서 평화로운 최후를 맞이했지. 그리고 나에게 자신의 무구를 물려주었소."
"저런. 아까운 인재를 잃었군. 미사단에 일러 겐나로 경의 영혼을 축복하라 하겠네. 그는 기디아의 뛰어난 기사이자 내 아비의 둘도 없는 친구였지. 그래... 겐나로 경의 유지를 이었다면 그대도 성기사단에 들어오는 게 어떠한가?" 그레이스가 방패와 창을 돌려주며 권유했다.
"사실 그게 내가 이곳에 온 이유였소. 하지만 예전부터 지키겠다고 맹세한 청년 마법사 하나가 위험에 빠졌소. 그는 마지막 열 번째 마법사 시험을 치르러 이곳 마탑에 들어왔는데, 그 시험은 치졸한 함정이었소! 그리고... 난 맹세를 지키지 못할 위기에 처해있다오." 남자가 근심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 아이는 죽었는가?"
"잘 모르겠소. 분명 죽은 건 아닌 것 같지만, 도처에서 내가 겪어보지 못한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그렇군. 그 아이는 현세에 연옥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그레이스가 나지막히 말했다.
"연옥이라니 지옥을 일컫는 말이오? 사실 시험이 함정임을 알아챈 그는 대마법사를 죽이려 했다오. 바로 자신의 친어머니를."
"뭐라, 친모?" 그레이스의 심장이 요동쳤다.
"그렇소. 두고 볼 수 없었던 난 일단 그를 막았고 자신의 공격이 막히자 도망쳤소. 난 그를 찾아 내 맹세를 지켜야 하오."
그레이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번쩍이는 기사 갑옷이 아닌 평범한 훈련 복장인데도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기품은 사방을 가득 채웠다.
"전사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엄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랜스. 아르케론의 랜스요." 랜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릎을 꿇으라, 아르케론의 랜스."
랜스가 겸허하게 무릎을 꿇자 그레이스는 그의 머리를 짚고 빛의 힘을 불어 넣었다. 성스러운 빛은 랜스의 얼굴을 지나, 척추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드높은 용기와 고귀한 명예로 그대는 기디아 대마법사의 생명을 구했다. 그리고 자신이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기디아 기사단에 들어올 충분한 자격이 될 터! 그대 랜스는 항상 정의와 용기를 추구하며 기사단에 충성하고 약자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랜스의 목소리가 감격에 겨워 떨렸다.
"기사단에 온 것을 환영한다 전사여. 이제부터 그대는 기디아의 기사 랜스이다. 신의 가호가 그대와 함께하길." 그레이스는 미소 지으며 랜스를 일으켜 세웠다. "입단의 나머지 절차는 행정처에서 처리할 것이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하나 있지. 시간 여행은 정작 시간이 중요한 게 아냐. 핵심은 바로 속도지! 자, 잘 잡고 있을 테니 뚜껑 따 봐." 음습한 지하 감옥 안, 작지만 단단한 체구의 난쟁이가 말했다. 난쟁이의 머리 위에는 대체 뭐가 들었는지 움직일 때마다 출렁이는 강철 통이 있었고, 감방의 한 켠에는 무거운 쇠사슬로 구속된 사슬니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가 거대한 엄니를 곧추세우고 강철 통 가까이 움직이자 쇠사슬이 끊어질 듯 출렁였다.
사슬니는 먹을 것을 좋아한다. 아니, 사실 엄청난 대식가다. 위장에 들어가는 건 뭐든 먹어치우는데 도통 배탈이 나지 않는다. 그의 식단에는 어쩌다 감옥 간수들이 던져주는 참새 꼬지, 토끼 구이, 어둠녘 야수 뱃살 튀김뿐만 아니라, 시든 배추나 옥수수 쪼가리 같은 음식물 쓰레기까지 올라가 있다. 심지어 케케묵은 가죽 장화 같은 도저히 먹거리로 볼 수 없는 것도 사슬니는 거뜬하다. 가죽 부분은 쫄깃쫄깃 씹는 맛이 있고 신발 끈은 슥싹슥싹하면 치실로 안성맞춤이란다. 오묘하게 풍기는 구린내도 특유의 풍미가 있다나?
쿵쿵... 바지직.
사슬니가 엄니로 통의 뚜껑을 따자 녹색으로 빛나는 끈적이가 흘러나왔고 모조리 그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끄억' 커다란 트림 소리가 감방 안에 울려 퍼지자 난쟁이는 코를 움켜쥐었다.
"아주 썩은 내가 진동하는구먼." 그가 투덜댔다.
"썩.은.냄.새" 사슬니가 동의했다.
"이놈의 지하감옥은 교정 시설이라 들었는데, 수감자 대우가 너무 심한 거 아냐? 우리도 정당한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너도 말이지 이곳에서 그 빌어먹을 쇠사슬에 묶여 뒹굴다 보니 네 꼴이 어떤 줄 알아? 짓이겨진 떡갈비 같다고."
"난. 엿이. 더. 맛있다." 사슬니가 고개를 흔들었다.
"뭐야 생긴 거 답지 않게 단 걸 좋아하는 거냐. 좋아. 우리 둘 여기서 탈출하기만 하면 내가 엿을 매일 만들어주지!"
"탈출. 엿. 좋다."
"녀석 참 잘 먹는구나. 한 통 더 가자." 난쟁이는 강철 통을 하나 더 들어 올렸다.
이번에도 통 속의 부패한 액체는 남김없이 사슬니의 위장으로 들어갔다.
사슬니가 감옥에서 만난 이 난쟁이는 무척 특이했다. 그가 이제껏 본 '작은 인간'들 중에서는 가장 크고 탄탄한 체구를 가졌으며, 거지 같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도 그를 절망에 빠뜨리지 못했다. 난쟁이는 쉴새 없이 나불대는 주둥이로 자신의 천재성을 과시했는데 - 그래 봤자 듣는 이는 사슬니밖에 없었지만 - 자기가 만든 시대를 앞서간 발명품들이 아니었다면 문명은 수십 년은 뒤쳐졌을 거라 호언장담했다. 그 와중에 어떤 특이한 발명품 하날 둘러싸고 왕실의 오해를 샀고 성질 급한 여왕이 결국 그를 지하 감옥에 가뒀다고 한다. 하지만 난쟁이는 간수들에게도, 독성 가득한 끈적이에도, 감방 동료인 사슬니에게도 겁먹지 않았다. 사실 사슬니는 그 위압적인 외모와 무시무시한 엄니와 달리 부드러운 성격이다. 너무 오래 굶지만 않으면 뜻밖에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들어봐. 시간 여행에서 내 실수는 차원 내에서 움직인 거야. 첫 시도에 사촌 땜장이를 기계에 담아 2분 미래로 보냈다 다시 불렀어. 사라졌던 녀석은 정확히 2분 뒤 꽁꽁 언 동태 같은 꼴이 되었더라고. 다들 모르는 이야기지만 우리가 발을 디디고 선 이 행성은 매우 빠르게 우주 공간을 여행하고 있어. 사라졌던 내 사촌은 그 2분간 아무것도 없는 차가운 우주에 나가 있었던 거야. 인석아. 이해하는 거냐?" 난쟁이가 사슬니의 도톰한 배를 두드리며 물었다.
"쪼.금.이해.한다." 사슬니가 중얼거렸다.
"좋아. 왜냐면 지금부터 할 일은 너와 관련 있거든."
사슬니의 두 귀가 쫑긋 솟았다.
"속도와 중력. 이 두 가지를 통제하면 시간을 다스릴 수 있지. 시간을 다스리면 공간을 조작할 수 있어. 여기서 도출되는 결론은? 언제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거야!"
"오.호.바깥.으로도?" 사슬니가 물었다.
"지직... 어이 난쟁이 계속해봐. 지직..." 감옥 내 확성기로 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무뢰배들아. 난 부모님 지어준 자랑스러운 이름이 있단 말이다!" 난쟁이가 주먹을 흔들며 욕했다.
"프.랭.키." 사슬니가 끼어들었다.
"그래 맞아 친구." 난쟁이가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하지만 사슬니는 구석의 강철 통을 하나 더 따고 끈적이를 들이키느라 프랭키를 보지 못했다.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너 이름이 사슬니인 거냐 아님 너네 종족이 사슬니인 거냐?"
"맞.아."
"허 참. 어쨌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속도를 엄청나게 빠르게 하기 위해선 중력으로 빛을 가둬야 해. 시간의 팽창이라 불리는 현상이지. 그리고 이 천재님이 그걸 해냈다는 말씀! 특별히 고안한 이 정육방체라는 녀석으로 말이야."
"정.육.점...체?" 눈앞에서 시뻘건 고기가 아른거리는지 사슬니가 침을 뚝뚝 흘렸다.
"근데 문제는 이 녀석이 아직 시험 단계라 탑승자는 모두 작살이 난다는 거야." 프랭키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었다. "그래서 요는 니가 일단 날 삼켜야 해."
"싫.다."
"아 영원히는 아니야. 시공간의 이동이 끝날 때까지만." 프랭키가 재빨리 정정했다.
그리고 프랭키의 목소리가 속삭임으로 변했다. "우리가 해야 할 건 저 스크바더의 똥구멍 같은 간수에게서 내 육방체를 되찾고 니가 날 삼키는 거야. 그럼 우린 안전하게 이곳에서 탈출하는 거지. 이동이 끝나면 넌 날 다시 토해내면 돼. 성공하면 상으로 엿 열 개를 주지."
"이런 깜빡 했군. 보자, 압연강철에... 서른 번 단조한 녀석인가. 딱 봐도 불량품이군. 감방에서까지 기가 막힌 원가절감을 볼 줄은 몰랐는데... 네 몸무게가 2톤이 조금 넘으니까 관성 이론에 대입해 보면..." 프랭키의 입이 수식을 중얼거리는 와중에 그의 손가락은 허공을 빠르게 노닐었다.
"밀리미터 제곱에, 위에 상수 하나 얹고. 그렇지. 거의 다 되었어..."
멍하게 프랭키의 짓거리를 바라보던 사슬니. 순간 그가 기지개를 크게 한 번 켜자 벽 한쪽이 부서지며 쇠사슬이 맥없이 딸려나왔다. 잠깐 난쟁이와 괴수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크, 크흠. 좋아. 장애물도 없어졌으니 가 보자고." 프랭키가 감옥의 철문을 가리켰다.
사슬니가 쇠사슬을 질질 끌며 돌진하자 쾅 소리와 함께 경첩이 부서지고 문이 떨어져 나갔다. 관성이 붙은 사슬니가 반대편 벽까지 가서 처박히는 걸 보며 프랭키는 산책하듯 느긋이 감방에서 걸어 나왔다. 문 근처에 있던 경비는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사슬니는 어쩔 줄 모르는 경비를 통째로 꿀꺽 삼켰다. 경비의 허리춤에 달린 열쇠가 사슬니의 뱃속에서 짤랑짤랑 소리를 냈다. 프랭키는 거대한 덩치를 앞세우고 위풍당당히 간수의 집무실로 향했고, 복도의 확성기에선 한발 늦게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모든 죄수는 즉시 감방으로 돌아갈 것. 사슬니가 탈출했다. 반복한다. 사슬니가 탈출했다.'
사슬니는 간수 집무실 출입문을 엄니로 찍어 멀리 던져버렸다. 일견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둘은 곧 책상 밑에 숨어 비루먹을 강아지처럼 떨고 있는 간수를 발견했다.
"내 꺼야. 정육방체 냉큼 토해내." 프랭키가 여유롭게 말했다.
"정.육.점.체." 사슬니의 입에서 다시 침이 떨어졌다.
"알았어, 알았다고! 뭐 우린 사용도 못 했어. 별 거지 같은 장치 다 보겠네. 그리고 이 반동분자들! 이 짓거릴 하고 감히 살아나가길 바라는 거냐. 이곳은 벌써 지원병들이 물샐 틈 없이 포위 중이다!" 분위기에 떠밀려 구석의 금고를 열면서도 간수의 주둥아리는 끊임없이 나풀댔다.
"흐흐. 그리고 거기 그 냄새 나는 짐승 놈부터 사살하라는 명령도 내렸지!"
"뭬야? 감히 내 친구에게 그런 험한 말을! 얘도 엄연히 이름이 있다고." 프랭키가 간수의 손에서 장치를 홱 빼앗으며 화를 냈다.
"사.슬.니"
"그래 맞아 친구. 자, 이제 배 속에 있는 그 녀석 뱉어내. 잘못하다 소화될라."
구토 소리와 함께 점액에 뒤덮인 채로 경비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 끔찍한 모습을 본 간수의 얼굴은 더러움과 공포에 새파랗게 질렸다. 프랭키는 그를 가볍게 무시하고 정육방체를 찬찬히 살폈다.
"후후 내 귀염둥이 잘 있었나. 이놈을 작동시키면 여기 여섯 면이 거의 이 방 만큼 커지지. 그리고 그 공간에 빛을 가두는 거야. 이후 육방체는 초고속으로 회전하며 빛을 가속해. 시공간 여행에 충분한 속도에 다다를 때까지"
"6837.33 킬로미터 북쪽... 아니 북동이군. 위도는 37.56, 경도는... -122.32쯤이려나. 공전 주기는 182.6일이고 자전까지 고려해야 하니..." 프랭키가 부산을 떨자 정육방체가 웅웅 소리를 내며 빛을 모으기 시작했다.
찬란히 쏟아지는 빛살에 사슬니는 눈을 찡그린 채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염려 붙들어 매 친구. 내 머릿속에 완벽한 이론을 세워 두었어. 이 몸의 계산은 틀린 적이 없다고!"
"못. 믿겠.다." 사슬니가 투덜댔다.
"설정 완료! 자, 이게 날 꿀꺽 삼켜!" 프랭키가 잽싸게 사슬니의 엄니를 잡고 외쳤다.
사슬니는 이빨로 난쟁이의 살점을 뚫어버리지 않게 조심하며 그를 삼켰다. 정육방체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이제 너무 밝아져 마치 태양이 지상에 떨어진 것 같았다. 빛과 소음의 도가니에 사슬니는 귀를 접고 눈도 감은 채 조용히 기다렸다.
사슬니의 생체 갑주가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갈라지려 할 때, 환하던 빛도 감옥을 무너뜨릴 기세로 울리던 소리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간수의 집무실은 온데간데없었고 대신 확장된 정육방체의 벽에 사슬니의 모습이 비쳤다. 놀랍게도 그 모양새는 각기 달랐는데 어떤 사슬니는 아기였고 또 다른 녀석은 갓 허물을 벗은 청년이었다. 그 반대편에는 멋들어진 분위기를 풍기는 미중년의 사슬니도 있었다.
"사슬...니?" 모든 사슬니의 입이 일제히 열렸다 닫혔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사슬니를 뒤로하고, 정육방체는 언제 자기가 날뛰었냐는 듯 얌전해졌다. 시커먼 어둠 속, 사슬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파악하려 애썼다.
댕!
그때 사슬니가 있는 공간 전체가 위로 움직이며 평온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일종의. 승강기. 인가.'
하지만 곧 기계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상승이 멈추더니 승강기는 바닥을 향해 사정없이 곤두박질 쳤다.
"쾅!"
사슬니는 내동댕이쳐지며 뭔가 자신의 위장에서 날뛰는 걸 느꼈다.
"어.맞아. 깜빡.했군." 그는 서둘러 프랭키를 토해냈다.
"콜록, 콜록. 대체 왜 이렇게 늦은 거야!" 난쟁이가 기침하며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소화액을 닦아냈다.
"어... 미.안."
프랭키는 자랑스러운 수염의 각도를 세우는 걸 마지막으로 손질을 끝내고, 뚜껑이 날아간 승강기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끊어진 전선의 불똥이 튀고 있었고, 그 너머로 거대한 동물이 울부짖는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때는 날이 가장 짧다는 동지. 지평선을 넘어 불타는 태양이 낭만적인 노을을 하늘에 새기는 와중에, 순찰 대장은 휘파람을 불며 길을 나섰다. 초승달 도시에서도 손꼽히는 부유층이 사는 동네는 고소한 올리브 향과 달콤한 자스민 향이 가득했고, 잘 정돈된 뜰과 저택이 그의 눈을 즐겁게 했다. 최연소 순찰 대장이라는 영광을 누리는 남자는 당당했다. 다림질로 날 세운 제복과 빳빳이 풀 먹인 정모, 단단한 체구의 군마는 대장의 위엄을 드러냈다. 무엇보다 허리에 걸린 마검이 그의 위세에 정점을 찍었다. 대장은 초승달 도시 주민들이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는 모습을 뿌듯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길은 곧 구도심으로 이어졌고, 섬사람들 영역에 다다르자 부촌의 상큼한 향기와 달리 썩은 나무 냄새, 주민의 쉰내, 상한 고기의 악취 따위가 났다.
구도심 중앙 광장에 다다랐을 때 시끌벅적한 노랫소리 와 고함이 들렸다. 순찰 대장은 혀를 끌끌 차며 광장을 바라보았다. 섬사람들은 형형색색의 의복을 입고 동지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꽹과리 소리와 북소리는 점점 격해졌고 사람들의 노랫소리도 널리 울려 퍼졌다.
참을 수 없는 일탈의 중심에는 섬사람이 신봉하는 무녀가 있었다. 이미 관청에 열 번도 넘게 체포된 적이 있는 이 골칫덩이는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기괴한 주문을 주절댔다. 그녀의 눈동자는 홱 돌아가 흰자위만 보였고, 정신 사납게 움직이는 맨발 사이에는 연기 나는 솥이 놓여 있었다.
바티스트 교주, 강림하소서! 바티스트 교주, 강림하소서!
광기의 현장을 본 순찰 대장은 소름이 돋았다. 일단 말을 다시 끌고 근처 한적한 거리에서 안전히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제국은 법으로 토착민의 자주권을 보장했고, 특히 수도 몽릴에서 상당히 떨어진 초승달 도시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파견 온 순찰 대장의 눈에는 집단 광기와 다름없었기에, 그의 마음엔 걱정이 가득했다.
"... 겁 먹은 건가..."
순찰 대장은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잽싸게 뒤를 바라보았지만 어두운 거리엔 아무도 없었다.
"거기 누군가?" 목소리의 위엄을 유지하려 애쓰며 물어보았지만, 웃음소리만 들려왔다.
강림하소서, 바티스트! 강림하소서, 바티스트!
다시 울려 퍼지는 인파의 악다구니에 광장을 바라보니, 무당이 양손을 끓는 솥에 집어넣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작은 비명도 지르지 않았고, 솥에서 쌀과 검은콩을 꺼내는 손도 멀쩡했다. 무당의 손에서 쏟아지는 곡식을 받아먹으려 섬사람들이 달려들었다.
"이것들은 미쳤어. 정신이 나갔다고!" 기병대장은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저들의 여왕이 자신의 백성을 챙기는 것이다." 속삭이는 목소리는 순찰 대장의 어깨 바로 너머에서 들렸다. 대장은 마법의 검을 뽑아 들고 다시 두리번거렸지만 거리엔 역시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너희 여왕은 대체 뭘 하느냐."
이번 목소리는 광장 한복판에서 흘러나왔다. 순찰 대장의 척추를 타고 전율이 흘렀다. 하지만 곧 용기를 내어 마음을 다잡고 마검을 앞세운 채 광장으로 나아갔다. "그만! 난 순찰 대장이다. 그대들은 집회법을 위반하고 있다!"
악기를 두드리는 소리도, 빙글빙글 돌아가던 춤도,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도, 흩날리는 상의와 치마도 모두 멈췄다. 군중들이 그의 말을 따르자 순찰 대장은 더욱 용기를 냈다.
"좋아. 그래. 축제는 끝났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
"이곳이... 우리의 집이다."
순찰 대장은 이번엔 참지 않고 아예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칼을 겨눴다. 하지만 목소리의 출처를 본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광장 중앙에 있는 폭풍 여왕의 동상에서 끊임없이 속삭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약 일 년 전 이곳에 세워진 여왕의 동상에는, 무엄하게도 섬사람들이 저질러 놓은 낙서와 장난질이 가득했다.
"오히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는 너다. 안식을 찾아야지."
순간 동상 밑의 땅이 격하게 흔들리고. 뼈만 남은 손들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앙상한 팔과 툭 붉어진 핏발 선 눈, 째진 입을 한 끔찍한 망령들이 쏟아져 나왔다.
순찰 대장이 마검을 휘두르자 푸른 마법이 펼쳐졌다.
"며, 명백한 질서 위반이다! 그대를 현장범으로 체포한다. 버, 법에 금지된 주술 사용과 지역 평화를 깨트린 죄목이다." 순찰 대장은 강하게 질책하려 했으나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목소리로는 쉽지 않았다.
"후후후, 지금 평화라고 했느냐."
흔들리는 순찰 대장의 눈동자에 교주의 모습이 비쳤다. 멋진 중절모를 쏘고, 맵시 있는 조끼를 입고, 한 손에는 거대한 낫을 든 채. 동상 옆에 우아하게 앉은 그의 곁에서 망령들이 시중을 들었다.
"네가 말하는 거짓된 평화는 하등 쓸모가 없느니." 바티스트는 영혼을 뒤흔드는 미소를 지으며 순찰 대장을 바라보았다.
"그, 그대는 대체 누군가. 신분을 밝혀라!" 대장이 윽박질렀다.
"난 전설이자 수많은 이들의 믿음에서 탄생한 초월적인 존재." 바티스트가 망자들이 바치는 포도주잔 들며 말했다.
순찰 대장은 잠시 머뭇거리다 뒤돌아서 도망쳤다. 마치만 곧 강력한 통증이 그를 엄습했고,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듯 나동댕이 쳐졌다.
"제, 제발, 목숨만은..."
"크하하하, 죽음을 피하고 싶은 건가." 바티스트가 웃으며 물었다. 칠판을 긁는듯한 끔찍한 소리가 순찰대장의 귀를 후벼팠다. "대체 왜 죽음을 피하려 하는가. 인생은 고통이며 지루할 뿐이다. 언젠간 모두 죽음이란 안식에 들지. 죽음이야말로 위대한 서사시. 모든 생명의 지향점이자 구원이다."
쓰러진 순찰 대장은 흐느끼며 기어서라도 바티스트에게서 도망치려 했다. 그렇게 깔끔하게 관리하던 제복이 진흙으로 엉망진창이 되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아끼는 말도 부르려 했으나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섬사람들은 그를 둘러싸고 나지막한 장송곡을 불렀다.
"사술로 네 영혼은 이곳에 묶여있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소용없으니. 망령이 되어 나와 함께하는 것은 축복. 함께 우리는 여왕의 통치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망령들이 에워싸고 마검을 가져가는데도 순찰 대장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죽음의 기운이 서리자 마법의 검도 빛이 바랬다.
그날, 난 일곱섬 군도(群島)에 있는 어둠녘이 창궐한 활화산으로 향했다. 이곳의 화산 환경은 가혹하기 짝이 없는데, 돈을 아낌없이 퍼부어 특수 제작한 탐험복 덕분에 약간의 멍과 생채기를 제외하면 난 멀쩡했다. 난 마치 휴식을 모르는 광인(狂人)처럼 나아갔고, 내 마음은 곧 속살을 드러낼 비밀스러운 광경에 흥분했다.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면 난 두렵다. 뭐가 있을지 모르는 어둠의 심연으로 혼자 나아가는데 무섭지 않다면 그게 인간일까? 끈적한 핏물처럼 대지를 흐르는 용암은 내가 지나갈 만한 암석의 길을 닦았다. 섬 중앙에 가까워지자 놀랍게도 식생(植生)이 나타났다. 척박한 토양에 뿌리를 내리는 은침(銀針)류 식물과 적녹색 이끼가 화강암을 덮었고, 퍼석퍼석한 대지 위에는 잡목과 고사리 따위가 자랐다. 화산재를 육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지자, 만물이 점점 거대해졌다.
그때 놈이 날 발견했다. 어둠녘 말이다. 놈은 사냥감의 공포를 탐지한 포식자처럼 내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이제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언어를 속삭였다. 난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안도하는 순간 놀랍게도 그 목소리는 내 마음속에서 다시 울렸다.
“Ebbet ikro ido?”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단어였다. 그런데도 정신을 차려보니 난 멍하게 내 이름을 읊조리고 있었다.
화덕 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마치 그 빵처럼 모든 생물체가 컸다. 어른 팔뚝만 한 전갈과 딱정벌레가 서로 드잡이질했고, 저녁 식탁의 접시만한 민달팽이가 가시나무를 기어올랐다. 두꺼비를 네 마리쯤 붙여놓은 듯한 독개구리는 바위 위에서 나를 노려보았다. 동물뿐 아니라 식물도 마찬가지였다. 비오는 날 우산으로 써도 될 만큼 커다란 잎사귀가 흩날렸고, 덩굴과 나무줄기는 한줌의 햇살이라도 더 받으려 서로를 휘감고 악다구니를 썼다. 누군가 그랬지 밀림은 녹색의 지옥이라고. 그보다 더 들어맞는 표현이 있을까!
나도 모르게 바위 가장자리에 핀 꽃 하나를 꺾었다. 지저분한 화산재 속에서도 영롱히 빛나는 꽃을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다. 그러자 환상인지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지, 꽃송이가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그리고 꺾인 줄기에서는, 순식간에 새 봉우리가 맺히고 꽃이 피어나 오만한 자태를 뽐냈다.
“Astek givav ikri edu buvad bebu…”
때마침 불어온 폭풍이 아니었다면 난 이 불가사의 속에서 영원히 헤맸을 것이다. 어둠과 화산재 때문에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난 계속 나아갔다. 그와 더불어 오싹한 속삭임도 거세졌고 머리가 지끈거려 잠시 걸음을 멈춘 순간 발밑 땅이 흔들렸다. 균형을 잃은 나는 불어닥친 강풍에 휩쓸렸다. 두꺼운 야자수 가지를 잡고 자세를 가다듬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불타는 만의 놀이동산 기구(機構)에 탄 것처럼 정신없이 이리저리 부딪히던 그때, 난 어둠녘의 폭풍 속에서 신기한 현상을 체험했다. 안개와 먼지 사이로 나 자신의 무수한 환영(幻影)이 나타난 것이다! 환영은 내 몸을 투영한 것이지만 분명 나 자신과는 달랐다. 또한, 너무나도 기괴한 분위기를 풍겨 근처에도 가기 싫었다. 사방을 둘러싼 환상은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내가 느끼는 알수없는 통증은 강해졌다.
폭풍이 화산의 심연으로 날 끌어당겨 더 위험해지자, 난 무언가에 홀린 듯이 스스로 환상을 받아들였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환상이 되었다. 환상처럼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아니, 나도 내가 어떻게 폭풍을 뚫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어둠녘의 폭풍에서 빠져나오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머릿속에는 알 수 없는 속삭임이 울려 퍼졌다.
“Ikro vli ve shavod.”
날 구출한 남자의 말에 따르면 당시 난 알 수 없는 단어를 웅얼대고 있었다 한다. “Oeda vli stishad!” 물론, 난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동료 탐험가들은 겁을 먹고 내가 죽을 거라 짐작했다. 그리고 마치 날 역병 걸린 인간처럼 취급하고 탐험도 당장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헛소리! 겁쟁이들! 어둠녘의 심연을 겪지도 않은 주제에 이 무슨 꼴불견인가. 난 당장 일기에 사슬고리 밑그림을 그렸다. 탐험복 어깨에 사슬고리를 달면 어둠녘의 폭풍 속에서도 단단히 자세를 고정할 수 있으리라.
결국 이 일곱섬 군도에서 벌어지는 기현상도 내가 밝혀낼 것이다.
모든 비밀이 밝혀질 때까지
''마르팀 워커''
2편
[ 펼치기 · 접기 ]
마르팀 워커 서신(書信) 회수본 발췌 조합장 이외의 자는 열람 엄금
어둠녘을 탐험한 지 몇 주 아니 몇 달이나 지났을까. 시간의 흐름은 어둠녘 속에서 뒤틀리기에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하기 쉽지 않소. 어쨌든 끓어오르는 어둠녘을 뒤로하고 오염되지 않은 '순수의 땅'에 발을 디디니 새삼 모든 게 신기하더군. 시끌벅적하기만 할 뿐 무의미한 마을과 도시들, 덧없는 정부와 기관에 둘러싸여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주민들. 그간 '환영 도약'으로 어둠녘을 헤치는 도중, 난 그 사이사이에서 조막만 한 순수의 땅을 봐왔소. 인간들은 채 한 뼘도 되지 않을 영토 안에서 자신들을 격리하고 만족하며 살아가더군. 사실 그들로서는 내가 괴물처럼 보일 것이오. 소용돌이치는 어둠녘 속에서 시커먼 복장과 사슬고리를 달고 나타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니 오해받아도 할 말 없지. 문헌을 곱씹어보면 예로부터 이런 과정으로 설화, 전설, 민담 따위가 퍼져나가기 마련이니.
그대의 편지는 초승달 도시에서 받아보았소. 내 탐험을 더는 후원할 수 없으니 그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적혀있더군. 가장 큰 이유는 에벤타이드 조약이 만료되었다는 거고, 그 밑으로 내가 다칠 걸 걱정하는 내용이 주저리주저리 달려있었지. 실제로 힘의 우물 근처에서는 어둠녘의 폭풍이 강해지지만, 튼튼한 사슬고리 덕분에 몸을 지탱하는 데는 전혀 문제 없소. 또한, 흉포한 어둠녘 야수도 사슬고리를 걸고 흔들어주면 거짓말처럼 얌전해지지.
그러나 내 정신 상태에 대한 그대의 걱정은 유효하오. 이제 난 어둠녘이 근처에 있으면 끊임없는 환청을 듣소. 내가 환영 도약으로 놈의 심부(深部)를 헤집고 다니는 것에 대한 복수일 수도... 어둠녘은 나조차도 몰랐던 나에 대한 것을 말한다오. 이런 거대한 고독에 빠져보지 않았을 땐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실들을 말이오. 누군가 커다란 창으로 내 가슴에 구멍을 뚫어놓은 것 같소. 백번 양보해 긍정적으로 보자면 인류의 삶과 이 세상에 대한 통찰력이 더 깊어졌을 수도 있겠지.
지역 군도민(群島民)과 충만한 밤을 보낸 뒤 올리브 해변으로 나아가는 중이오. 그대의 염려는 잘 알겠소. 하지만 그대도 내가 발견한 것과 지도를 보면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거요.
모든 비밀이 밝혀질 때까지 마르팀 워커
~
마르팀 워커 서신(書信) 회수본 발췌
조합장 이외의 자는 열람 엄금
편지에 두 대륙에 있는 힘의 우물 위치를 동봉하오. 어둠녘이 창궐한 기디아의 통치주(州) 아우릴리엄과 르나이아, 타이젠 관문 둘러싼 시퍼런 바다 밑, 어둠녘의 영향을 받아 생태계의 야만성이 극대화된 올리브 해안, 호랑이 반도의 일곱섬 군도와 호랑이 반도, 고대의 장벽과 잊힌 대륙을 관통하여 건널 수 없는 신기루 사막의 깊숙한 곳까지. 그대는 분명 봐야 하오. 그리고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되오. 나의 탐험의 중요성과 그대의 후원이 하는 이 엄청난 역할을 말이오.
조합에서 나와 내 업적을 폄하하고 내 가족까지 연좌제로 엮었다 들었소. 고향의 내 가족은 이제 생활비도 떨어지고 아이들은 직장도 구할 수 없게 되었소. 심지어 기디아에서는 이 마르팀 워커가 죽었다고 하고, 내 서적들을 불온 도서로 지정하여 폐기처분 했다던데 사실이오? 분명 이는 날 증오하는 어떤 이가 지어낸 헛소리요! 어쨌든 내 개인소장품은 안전을 위해 유리 도시에 있는 통찰의 저택(邸宅)에 보관해 두었소.
실은 내가 유리 도시에 잠시 머물 때 의사들이 날 검진했다오. 진찰실 거울 앞에서 난 정말 오랜만에 탐험복을 벗은 내 모습을 봤소. 피부 색깔이 거무튀튀한 색으로 바뀌었더군. 거금을 들인 탐험복도 어둠녘의 영향을 완전히 막진 못한 것이오. 그리고 이는 내 '어둠녘의 침식(浸蝕)' 가설을 뒷받침할 중요 증거가 될 거요. 신기루 사막의 내로라 하는 과학자들도 여기에 동의했다오.
마르팀 워커 일지(日誌) 회수본 발췌 새로 취임한 조합장이란 녀석이 내 업적을 출판하길 거부했다. 심지어 날 광증에 빠진 머저리로 취급했다 한다. Stida evibez! 아내가 오래전 보냈던, 이젠 나이가 들어버린 내 아이들 대한 편지도 읽어보았다. 겨우 몇 달 전 고향을 떠나며 아이들의 뺨에 입맞춤했는데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다니... 시간의 흐름은 어둠녘 속에서 무척 변덕스럽다. 해와 달의 움직임 그리고 별자리까지 세심히 관찰한 결과, 내가 집을 떠나온 지 무려 90년이 지났다는 걸 알아챘다. 놀라운 일이다. 내 허약한 육신(肉身)은 애초에 바스러져야 하는데 강화제를 먹은 것처럼 팔팔하다. 이 괴현상에 대해 상세히 적어두자. 지도기록자들이 이단이라 욕해도 날 막을 수 없다. 세상을 뒤흔들 이런 귀중한 정보를 알아보지 못하다니 쯧쯧쯧.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도 유분수지!
나는 이제 인간의 언어를 말하지 못한다. ida gekra ivi beu idat daxdaz. 오로지 수화를 통해서 매우 천천히, 순수의 땅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다. 물론, 그때도 어둠녘의 환청은 끊임없이 들려온다.
또한, 난 어둠녘의 야수들과 소통하는 법도 배웠다. bast! Ikra dabdaz vis. 아, 소통을 하는 거지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놈들은 식초보다 톡톡 쏘는 리옹의 여름 여왕만큼이나 까탈스러우니까. 허... 그 고지식한 여자의 치세가 계속되길! 내가 발견한 것들을 그녀에게 보내야겠다. 듣자니 여왕의 군대는 산속 깊숙한 힘의 우물에서 자원을 추출한다고 한다. 내가 기록한 힘의 우물 지도가 있다면 여왕의 군대는 이를 발판삼아 더 강력해질 것이다. 곧 에벤타이드를 평정하고 쇠락하는 기디아 제국에 탐욕의 이빨을 들이밀겠지. 뭐, 날 광인 취급한 기디아에의 사소한 복수라고 해 두자.
모든 비밀이 밝혀질 때까지 마르팀 워커
~
내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기록이 모든 역사서에서 사라졌다. 기록말살형(記錄抹殺刑)이 내려진 것이다. Ide velshibe ebbat ide vli gekre. 그래도 상관없다. ide vl’oede idam bastad. 지도제작자들이 기디아의 정치놀음에 정신 못 차릴 때, 오직 나만이 야만의 세상을 탐험하고 미지의 세계를 기록했다. Ide f’ijbre jid idam. 어둠녘의 힘이 점점 강해져 토양을 좀먹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을 테지. Ikri ust edu beu idum. 그것은 살아있는 생물과 같다. 물에 조금씩 젖어 드는 종이처럼 우리의 마음에 침투해 공포를 심는다. hehva… ov hehva... 그 엄청난 어둠! 과연 이 대자연의 현상을 거부하는 것만이 능사인가? 인류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어둠녘을 받아들여 우리 혈관을 가득 채워야 한다. 우리의 심장은 어둠의 힘으로 힘차게 뛰어야 한다. 현재 인간이 알고 있는 세상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다. 바로 지근(至近)에 무한한 힘이 넘치는 어둠녘이 있는데 어찌 이를 이용하지 않는 것인가! 받아들이고 동화(同化)하면 더는 사회 제도의 비천한 노예로 기어 다니거나, 하루살이처럼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된다. 어둠녘 안에서는 오늘도 jid’hok도, 죽음의 공포도 없다. 나에게 진정한 멸망이 찾아오는 날 내 시체는 웃으며 썩어갈 것이다. 역사의 한 장을 멋지게 장식했다고 자평하며.
모든 비밀이 밝혀질 때까지 마르팀 워커
~
어둠녘은 무엇이고 세상은 무엇인가... givav… 모든 것이 뒤섞여 혼란스럽다. 속삭임이 끊임없이 들려오는 이유는 오직 나만이 진정으로 어둠녘을 이해해서 그런 게 아닐까. 오늘 아침, 부칠 지도와 일기 꾸러미를 들고 순수의 땅으로 향했다. 항구로 가는 도중 난 오직 어둠녘의 언어만 듣고 중얼거렸다. buvo exi stex? 그리고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마침내 깨달았다. 어둠녘은 세상이다! 인간들이 순수의 땅에 살아가는 것처럼 나도 어둠녘의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Ve dlibu... 양자는 동전의 앞뒤, 현실과 꿈의 관계와 같을지니... 꿈을 꿀 때 꿈속의 존재에 얼마나 가치를 두는가? 무의미하다. 그리고 그건 어둠녘의 야수들도 마찬가지. 그들이 순수의 땅의 존재들을 사냥하고 죽이는 건 당연하다. 그렇게 허무한, 약해빠진 생명체는 공기를 들이마실 자격이 없다.
어둠녘으로 돌아가기 전 생각을 정리하자. 내 머릿속에서 인간의 언어가 점점 사라지고 있음이니. 언제부턴가 난 순수의 땅에 거할 때도 어둠녘의 속삭임을 듣는다. 속삭임만이 나의 유일한 동반자. ikri ust beu idam. 어찌 되었든 이제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하나뿐. 내가 어둠녘이고 어둠녘이 나다! 그 누구도 날 막지 못한다. Ikri idat, e voda vl’ebbut.
모든 비밀이 밝혀질 때까지 마르팀 워커
~
세상 사람들은 날 보고 괴물이라 한다. ide ikre kiovebraka 아내의 달콤한 목소리, 흩어지는 아이들의 웃음, 어머니가 구운 구수한 빵과 버터의 냄새, 심지어 내 이름까지 모든 것들이 아침 안개처럼 바스러져 간다. 이제 난 전래동화에 나오는 공포의 존재가 되었다. '착한 어린이는 절대 순수의 땅을 벗어나면 안 돼. 어둠녘의 추적자가 널 잡아먹을 테니...'
그동안 잡다한 소식의 편린을 들었다. 기디아에서 발발한 내전, 호랑이 반도에서 발굴된 수정 광산, 통찰의 저택이 일궈낸 기술 혁명, 그리고 갓 즉위한 새파란 폭풍 여왕이라는 자가 몽릴에 있는 힘의 우물 위에 새로운 도읍을 세웠다는 사실도. 그렇다. 난 때를 기다리고 있다. 그때가 오면 날 멸시한, 내 삶을 망치고 내 이름을 진흙탕에 처박고 내 가족을 파멸로 이끈 제국에게 복수할 것이다. 어둠녘의 추적자...Ikra ov... 그래 나보고 괴물이라 했겠다? ikri v’ahskad f’ave.
아다지오의 아름다운 노래를 듣기 전,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그녀는 물고기떼와 춤추고, 산호 정원을 가꾸고, 진주조개와 대화를 나누고, 해파리와 말미잘 사이를 헤엄쳤다. 그리고 매년, 위대한 거북 아르케론이 머리 위를 지나갈 때마다 장난스럽게 거북의 배를 두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수면 위에서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참으로 아름다운 곡조이자 그녀가 처음으로 들어보는 노래였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수면 위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자, 천족 하나가 장엄한 날개를 고이 접고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안녕. 로렐라이."
그렇게 그가 불러주었을 때, 그녀에게 처음으로 이름이 생겼다.
"나는 아다지오. 그대에게 줄 선물을 가져왔다."
아다지오가 손을 펼치자 탐스러운 오렌지 하나가 보였다.
놀란 로렐라이의 입에서 심심풀이 삼아 물고 있던 해마가 떨어졌다.
"와 정말 예쁘네요. 이게 말로만 듣던 태양인가요?" 로렐라이의 눈이 반짝였다.
"이건 오렌지라고 하지. 먹는 거야."
로렐라이가 오렌지에 코를 내고 냄새를 맡자 과일 특유의 상큼한 향이 났다. 맹세코 바닷속에서는 단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신선한 향기였다.
"용의 몰락 깊숙이 파묻힌 알을 내게 가져와. 그럼 이 오렌지를 그대에게 주지." 아다지오가 오렌지를 다시 감췄다.
로렐라이는 시커먼 바닷속으로 끊임없이 잠수했다. 산호초를 지나, 물고기 떼들을 뚫고 마침내 심해 아귀의 반짝이는 낚싯불만 보일 때, 로렐라이는 바다 밑바닥에 도착했다. 적막함만이 가득한 이곳엔 현재의 바다가 육지였을 때 멸망한 용의 뼈들이 가득했다. 로렐라이는 용의 몰락 진흙 속을 뒤져 거대한 알 하나를 들고 수면으로 올라왔다.
밝은 햇살을 비추자 알은 금빛으로 빛났다. 아다지오는 로렐라이를 칭찬하며 오렌지를 건넸다. 허겁지겁 받아들고 깨무는 로렐라이에게, 아다지오는 웃으며 먼저 껍질을 벗기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로렐라이는 껍질 채 씹었다. 바닷속에서만 산 그녀는, 태양을 닮은 싱그러움을 뿜어내는 이 과일의 작은 한 조각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다지오가 알을 들고 날아오르자 로렐라이는 바다로 돌아갔다. 그리고 또다시 물고기들과 춤추고 산호 정원을 가꾸며 오랜 세월을 보냈다. 로렐라이는 아다지오의 노래와 오렌지의 맛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그녀가 아르케론의 배를 다시 천 번 간지럽혔을 때, 잊은 지 오래된 노래곡조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도 아다지오와 인사를 나눈 로렐라이는 해저에서 알을 꺼내왔다. 노란색 소용돌이 문양이 새겨진 알을 건넨 로렐라이는 어김없이 아다지오에게 오렌지를 대가로 받았다.
그리고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아르케론의 배를 천 번 간지럽혔을 때, 로렐라이는 점박이 알을 아다지오에게 주고 그와 함께 파도치는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왜 아르케론이 천 번 지나갈 때마다 알을 구하는 거죠?" 로렐라이가 손가락에 묻은 끈적한 오렌지즙을 핥으며 물었다.
"그게 인류의 멸망 주기이기 때문이지." 아다지오가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용들이... 멸망했던 것처럼요?" 로렐라이가 꼬리를 파닥였다.
아다지오는 따스한 눈빛으로 로렐라이를 바라보았다.
"인류는 다른 생물보다 빠르게 지식을 배우고 환경에 적응하지. 하지만 그만큼 빠르게 문명을 만들고 탐욕이라는 함정에 빠진다. 태곳적 용들이 그랬던 것처럼 멸망을 부르는 탐욕 말이야. 이 알은 인류에 대한 구원이다."
"흐음... 꽤 어려운 말이군요." 로렐라이가 인상을 찡그렸다.
"때론 모르는 게 약이 될 때도 있는 법."
그리고 다시 아르케론의 천 번 주기가 돌아오기 직전, 로렐라이가 정확히 구백구십 다섯 번 아르케론의 배를 간지럽혔을 때 노랫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녀는 기쁨에 넘쳐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었으나 어디에도 아다지오는 없었다.
"안녕 로렐라이." 목소리로 판단하건대, 이 여자가 노래를 부른 게 맞았다. 검은 외투를 입은 여인은 머리에 왕관을 쓰고, 앞이 보이지 않는 듯 두 눈을 가리고 있었다. 불길해 보이는 까마귀 떼들이 여자의 머리 위를 빙빙 돌았고, 그녀는 한 손에 오렌지가 가득 든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로렐라이는 여태껏 이리 많은 오렌지를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호기심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당신은 사람인가요?"
"나는... 여왕이다."
"그대도 알을 원하나요?"
"그래. 알 중에서도 특별한 녀석이 필요하지." 여왕이 미소지었다.
그 말을 들은 로렐라이가 용의 몰락을 뒤져 알 하나를 가지고 올라왔다. 보라색과 분홍색이 섞인 아름다운 알이었다.
"당신이 말하는 알이 이건가요?" 로렐라이가 알을 내밀었다.
"고맙구나 로렐라이.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이 알이 아니란다. 다른 알을 더 가져다주면 오렌지를 또 주마." 여왕이 알을 경비대원에게 넘기고 로렐라이에게 먹음직스러운 오렌지를 주었다.
로렐라이는 오렌지를 우물거리다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오렌지를 더 준다고? 한 번에 하나만 받을 수 있는 거 아니었어? 수 천 년이 지났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다! 그녀가 허겁지겁 잠수해 이번엔 푸른 줄무늬 알을 가져오자 여왕의 경비대가 나와서 알을 받았다. 로렐라이의 기대 대로 여왕은 이번에도 오렌지를 상으로 주었다. 행복한 표정으로 오렌지를 먹으며 로렐라이가 물었다.
"이 알인가요?" 내심 아니길 바라는 눈빛이었다.
"아니. 하지만 아직 오렌지는 많이 남았단다." 여왕이 오렌지 바구니를 흔들었다.
그렇게 로렐라이는 몇 번이나 바닷속을 들락거리며 알을 날랐다. 이윽고 경비대원들의 팔이 알들로 가득 찼을 때, 로렐라이는 너무나도 어두워 바라보는 것만으로 두려운 알을 가져왔다.
"잘했구나. 그래 바로 그 알이다." 여왕이 속삭였다.
"다행이네요. 그럼 이 알이 인류를 구원해 주나요?" 로렐라이가 손뼉을 쳤다.
여왕은 잠시 멈춘 채 로렐라이가 뱉은 말의 의미를 생각했다. 상공을 맴돌던 까마귀 한 마리가 로렐라이에게 다가가 고개를 까딱이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구원이라... 적어도 이번은 아니다." 그리고 여왕은 로렐라이에게, 아직도 오렌지가 절반이나 남은 바구니를 건네고 길을 떠났다. 그녀와 경비대가 저 멀리 사라지자 맑았던 하늘에 먹장구름이 일기 시작했다. 로렐라이는 불청객들이 떠나간 자리에 남아 멍하니 자리를 지켰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로렐라이는 바위 위에 하염없이 앉아 배가 아파올 때까지 오렌지를 먹어치우고 바다로 돌아갔다.
이후 아르케론의 배를 고작 다섯 번만 긁었을 때, 노랫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엔 여왕이 아닌 아다지오가 언제나처럼 한 손에 오렌지를 하나 들고 로렐라이를 찾았다. 그녀가 붉은색 알을 건네주자 아다지오가 오렌지를 내밀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로렐라이는 오렌지를 거절했다.
"오렌지는 괜찮아요. 대신 내게 진실을 말해줘요." 그녀가 요구했다.
"이 용들이 인류를 구원하는 건 사실이다. 안식의 밤이 타오르는 낮을 덮어야만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천지조화와 자연의 섭리이지. 마치 죽음이 삶의 구원인 것처럼..." 아다지오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가 떠나간 뒤, 로렐라이는 태양이 하늘 가로지르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활활 타오르다가 노란색으로 그리고 핏빛으로 빛나다 마침내 아스라이 수평선으로 넘어가는 것을. 천지가 무채색의 흑야로 뒤덮였을 때, 로렐라이는 소름 끼치는 진실을 깨달았다.
높디높아 생명이 살아가는 데 필수인 대기마저 희박한 곳. 찬란한 공중 도시 앤빌은, 물결을 헤치는 범선처럼 푸른 하늘을 가로질렀다. 신이 빚어낸 듯한 이 기적의 도시 가장자리를 어둠녘에 물든 까마귀 한 마리가 선회했다. 까마귀의 광기 어린 눈빛은, 엔빌의 중심지에 있는 세간의 지식을 집대성한 대도서관을 향했다. 그리고 곧 날개를 접고 급강하하는 매처럼 도서관의 유리창을 깨고 침입했다. 흩날리는 유리 파편이 까마귀의 깃털을 뚫고 박혔고, 피가 차가운 바닥을 수놓았다.
책장에 빽빽이 꽂힌 수많은 책들. 그리고 표지에 박혀있는 기괴한 외눈박이 눈알들. 그 눈알들이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바라보았다. 까마귀는 책들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는 듯, 도서관 중앙의 커다란 파란 수정을 맴돌았다. 억겁의 세월을 살아온 고대인. 앤빌의 왕이자 두 얼굴을 한, 세상의 관찰자가 수정 안에 있었다. 관찰자는 까마귀가 침입했는데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신 까마득한 책장의 한구석에서 마법서 하나가 떠올랐다. 그리고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한 것처럼, 책장이 정신없이 넘어가더니 마법서의 빈 쪽이 드러났다. 관찰자가 입술을 움직이자 고풍스러운 서체로 말이 책에 적혔다.
"몽릴 깊숙한 곳... 힘의 우물이 다시 차오를 때, 에벤타이드에서는 폭풍 여왕이 일어나 어둠녘에 대항해 순수의 땅을 지켰다. 여왕은 어둠녘의 거대한 힘을 꺾기 위해, 정예 군을 조련하고 백성들의 철저한 통합을 명했다."
미쳐버린 까마귀는 머리통이 까지는 건 아랑곳하지 않고, 일생일대의 적수를 만난 것처럼 수정에 머리를 부딪쳤다. 까마귀가 머리를 박을 때마다 수정을 밝은 녹색으로 빛났다 다시 파란색으로 돌아갔으나, 두 얼굴로 과거와 미래를 내다보는 관찰자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기록을 이어갔다.
"그러나 가진 힘만으론 어둠녘에 대응하기 버거워지자, 여왕은 도움을 청했다. 생명이 발을 딛고 선 지상의 세상이 아니라 연옥과 천상에서... 두 곳 모두 어둠녘의 힘이 감히 미치지 못하는 곳. 여왕은 타락한 까마귀 둘을 각각 보내 그녀의 뜻을 전했다."
어느덧 힘이 다한 까마귀는, 피 섞인 녹색 안개를 토하며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연옥에서처럼 천상에서도! 연옥에서처럼 천상에서도!"
"이에, 앤빌의 왕이자 세상의 관찰자는, 천둥의 지배자 바리야를 소환해 에벤타이드를 구하고자 하는 여왕의 부름에 응하노라."
관찰자의 말이 끝나자 책이 덮이더니 허공에서 변하기 시작했다. 찢기고 뜯어지고 접히던 책은 까마귀가 지켜보는 와중에 바리야로 변했다. 관찰자의 의지가 세상에 현현한 것이다.
바리야가 양손을 들어 올리자 앤빌을 둘러싼 온 하늘이 울렸다. 무시무시한 전하가 도서관을 가득 채웠고, 응축되고 응축되어 그녀의 손에서 무시무시한 천둥창으로 변했다. 바리야가 손을 뻗자, 천둥창은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가 까마귀의 심장을 꿰뚫었다.
여왕의 전령을 처리한 바리야는 무심히 지켜보고 있는 관찰자를 바라보았으나, 관찰자는 더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이후 바리야는 도서관을 빠져나와 까마득한 절벽이 내리꽂히는 공중 도시의 가장자리로 걸었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곳, 사랑과 전쟁의 줄다리기가 벌어지는 곳, 어둠녘과 순수의 땅의 혈투가 펼쳐지는 곳, 바로 지상으로 떨어졌다. 그녀 머리 위에서 전하가 모여 번개 구름을 형성했고, 수천 마리의 말벌 떼가 우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신이 팔에 낀 핵주먹으로, 몽릴 중심부로 통하는 마지막 바위를 부순지 여러 달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난쟁이들은 출입을 금하는 노란띠를 구멍에 친 채, 함부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당신은 곰팡내 가득한 어두운 구멍으로 머리를 내밀어 봅니다.
"안돼요. 토니." 단장이 당신의 목덜미를 잡아챕니다.
"이봐요 필리파. 저 안에 대체 뭐가 있는지 난 확인하고 싶다고요." 당신이 투덜댑니다.
"그대의 능력은 잘 알아요. 하지만 여긴 전문가에게 맡기세요. 당신은 폭발 전문이지 탐험가가 아니잖아요. 참, 지상의 '왕관 오름'에 굴을 뚫어줄 난쟁이가 필요하다는 소식이 들어왔어요. 제가 볼 땐, 토니 당신이 딱 맞네요." 단장이 말아쥔 도안으로 당신의 가슴을 쿡쿡 찌릅니다.
"좋아!" 당신은 단장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대부분 난쟁이는 지상을 무서워하지만 당신은 다릅니다. 탐험심이 넘치거든요! 당신은 단장이 건넨 도안을 옆구리에 끼고 지상으로 나가, 기나긴 산길을 따라 왕관 오름으로 향합니다.
왕관 오름까지의 여정은 온종일 걸립니다. 당신은 다리가 너무 아파 잠시 '성역'에서 휴식합니다. 저 멀리 폭풍 여왕의 궁전과 수도의 모습이 보입니다.
좋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일할 시간입니다. 당신의 눈앞에 왕관 오름으로 가는 길이 세 갈래로 나뉘어 있습니다.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타이젠 관문 부두는 비릿한 바다내음이 가득했다. 켄세이는 하역 작업을 서두르는 인부들의 고함을 헤치며 화려한 도시의 중심부로 향했다.
그의 손엔 만물상에서 산 지도 칩이 들려있었다. 타이젠 관문은 중계 무역과 교역으로 번창한 곳. 무분별하게 개발된 도심 뒷골목은 지도 없이 들어가기엔 너무 벅찬 곳이었다. 켄세이가 지도 칩을 홀로그램 기계에 꽂으니 허공에 오밀조밀한 타이젠 관문의 지도가 나타났다. 그의 손가락이 홀로그램을 스치듯 지나가자 평화의 신전과 그곳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이 반짝였다.
가만, 분명 켄세이는 과거에 이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후 무엇이 일어날지도...데자뷰...
번쩍!
순간 도시의 모든 물체가 정지했다. 반짝이는 눈으로 아름다운 정원을 둘러보던 관광객도, 거드름을 피우며 가마 위에서 고개를 끄덕이던 아우레리엄 귀족도, 모두 석상이 된 듯 그 자리에 멈췄다.
~
삡...
삡...
대체 무슨 일이?
경계심을 거두세요. 그대는 심하게 다쳤답니다. 꽤 오랜 시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요.
~
켄세이가 놀라서 돌아보자 호리호리한 체구의 여인이 당당하게 서 있었다.
~
그대는 누구요?
키네틱. 제 이름은 키네틱입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당신은 지금 실타래를 풀고 있습니다. 기억의 실타래를...
~
켄세이가 홀로그램 장치를 끄자 목석같았던 거리의 사람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켄세이는 자신의 장검이 행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주의하며, 음침한 하수구와 쓰레기 더미 가득한 뒷거리를 뚫고 평화의 신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신전에 방문해 봉헌함에 동전을 넣으며 기도를 외었다.
저의 정신과 육신을 단련할 시련을 내리소서...
타이젠 관문의 학교 지구는 비행선을 타고 들어가야 했다. 속속들이 들어오는 비행선을 타고 내리는 어린 학생들은, 배낭에 각자 좋아하는 타이젠 두목의 캐리커처를 새겨두었다.
비행선 탑승장 뒷골목에는 기모노를 입은 아름다운 마담들이, 저마다의 도박장에서 즐기고 가라며 켄세이를 유혹했다. 얼핏 설핏 보이는 도박장 내부에는 왁자지껄한 소음과 매캐한 담배 연기가 가득했다. 어른들은 바쁘게 손을 놀리며 마작 패를 쌓는 데 여념이 없었고, 아이들은 그사이를 오가며 각종 심부름과 허드렛일을 도왔다.
켄세이는 온갖 인간군상의 욕망이 뒤엉킨 그곳을 지나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행여나 실수로 불타는 만으로 이어지는 매캐한 골목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조심하며...
~
삡...
삡...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이것들은 대체 뭔가?
전자기 최면이라는 치료법입니다. 현실에서 돌이킬 수 없는 큰일을 겪었을 때 발생하는 충격을 완화해주죠.
으윽... 맞아... 그때 분명 폭발이 있었고...
서두르지 마세요 검의 달인이여. 천천히. 천천히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세요.
~
타이젠 관문 밖, 매캐한 도시의 공해가 잦아들고 맑은 공기가 심신을 쓰다듬는 곳. 평화로운 오솔길이 과수원 사이로 이어지고, 고즈넉한 저택 사이의 논에 황금빛 물결이 일렁이는 곳.
켄세이는 그곳에 있는 세 번째 두목의 도장(道場)을 방문했다. 그가 정문에서 검을 휘두르자 도장의 결계가 찢어졌다.
'삐잉삐잉'
즉시 요란한 경보음이 울려 퍼지고 각종 날붙이와 총기류를 꼬나쥔 도장 생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생도들 뒤에서, 무예복을 입은 단단한 체구의 사내 하나가 천천히 켄세이에게 다가왔다. 그의 상의엔 "배"라는 자수가 수놓아져 있었고 호랑이처럼 부리부리한 눈은 켄세이를 꿰뚫듯 노려보았다.
"무인의 대결을 원하는가?"
"그렇소."
켄세이가 정중히 두목에게 인사를 건넸다.
"후후. 명성이 자자한 검성과 칼을 섞을 수 있다니 영광이군. 그럼 차나 한잔하며 대결을 논해볼까?"
"좋소."
"경보 해제."
두목이 명령하자 경보음이 잦아들고 생도들도 켄세이에게 겨눴던 저마다의 무기를 내렸다.
~
"내 기억으로... 그때 분명 새하얀 눈이 내렸소."
"타이젠 관문에 눈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
고즈넉한 다방(茶房)의 고풍스러운 탁자를 앞에 두고 두 사내가 마주 앉았다. 도장 생도들은 신경을 곧추세운 채 둘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타이젠 관문은 본토와 분리된 지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났소. 대륙의 무사들이 떠받드는 무사도 따위 여기서는 한낱 공염불에 불과하지."
두목이 향기로운 차를 다기에 가득 따르며 켄세이를 바라보았다.
"안타깝군."
"그렇게 생각하는 그대도 마찬가지라오. 당신은 케케묵은 구시대의 유물. 이제 무사들의 세계는 힘이 지배하지. 뜬구름 잡는 명예 따위가 아니라."
"각설하고, 단 일격에 승부를 가리지."
켄세이는 인상을 찡그리며 두목의 말을 끊었다.
“아니. 승부는 어느 한쪽이 죽어야 나는 법이오.”
"죽음이라. 대체 나의 죽음으로 그대가 얻는 게 무엇인가?"
"구태의연한 명예에 눈이 먼 켄세이를 격파하고 진정한 검성이 되는 것이지."
두목이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어쩔 수 없군. 진정 어느 한쪽이 죽어야 승부가 나겠구려. 서로의 무기는 오로지 검으로만?"
"그렇지. 오직 검으로만!"
"알겠소. 그럼 연무장으로 가시겠소?"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켄세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때 두목의 단검이 날아들었다. 첫 번째 단검은 켄세이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고, 두 번째 단검은 그의 뺨에 옅은 상처를 냈다.
켄세이도 빛살처럼 장검을 뽑아 반격에 나섰다. 두목의 손에서 단검이 추가로 날았으나 켄세이의 검술에 막혔고, 튕겨 나간 단도는 주변의 애꿎은 생도의 목숨만 앗아갔다.
"내 생각보다 훨씬 민첩하구려."
"암습이라니. 이게 대체 뭐 하는 짓거린가!"
켄세이가 움직임에 방해되는 외투를 벗으며 꾸짖었다. "말했지 않소. 무사도? 명예? 모두 다 쓸데없는 것. 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적의 목숨을 취할 뿐이라오. 비열하다? 후후 죽은 자는 말이 없지."
"개소리. 모두 개소리다. 내 검이 너를 벌하리라!"
두목과 켄세이는 본격적으로 대결을 시작했다. 두목의 단검이 재차 허공을 가르며 켄세이를 노렸고 켄세이의 검은 미려한 궤적을 그리며 두목의 목을 찔렀다. 두 고수의 격렬한 대결에 한지로 세워놓은 다방의 벽면이 사정없이 찢어지며 흰 눈처럼 사방에 흩날렸다.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친 뒤, 켄세이는 한 발짝 물러나며 장검을 눞이며 중단세를 취했다. 두목의 눈이 커지고 방어하려는 순간, 엄청난 위력의 참격이 켄세이의 검에서 뻗어 나와 두목의 몸을 갈랐다. 누가 봐도 승부가 갈린 그 순간,
정오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는 기디아의 보급로를 따라, 어둠녘공업의 맥워리어들이 힘차게 행진했다. 보급로 옆으로는 맥워리어들에게 막혀 더 나아가지 못하는 행상들이 넘쳐났다. 집채만 한 팡고무스가 끄는 무거운 짐마차 안에는 시들어버린 곡물과 채소가 가득했고, 불안해하는 상인들 사이로 오토바이를 탄 타이젠 조직원들이 골드와 수정, 무기 따위를 압수했다.
이를 본 키네틱이 켄세이에게 다가서며 지적했다.
“계약 위반이에요. 난 기디아의 보급로를 끊으라고 했지, 약탈하라고 하진 않았어요.”
무표정한 켄세이가 말을 받았다.
“내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 않았나. 난 도움을 줄 뿐이다.”
“백성의 재산을 훔치는 거라고요.”
“정확히는 너의 백성이지.”
켄세이가 반박하자 키네틱이 차갑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원격 장치를 꺼냈다. 그녀가 장치에 검지를 올리며 사납게 외쳤다.
“당장 당신 부하들에게 중단하라 하세요.”
“그럴 순 없지.”
켄세이의 부하들이 키네틱과 그녀의 호위를 둘러싸고 총과 검을 겨눴다. 켄세이는 키네틱을 지긋이 바라보더니, 돌아서서 자신의 목 뒤에 새로 생긴 흉터를 보여주었다.
키네틱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녀는 당황하며 조종 장치를 누르고 또 눌러보았지만 어떤 반응도 없었다. 그 장면을 보며 켄세이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1] 이 이야기에서 겨울 전쟁 캐서린 스킨이 나왔다.[2] 이 이야기에서 나비춤 코쉬카 스킨이 나왔다.[3] 이 이야기에서 살인 토끼 로나 한정판과 특별판 스킨이 나왔다.[4] Sierra Kilo Yankee Echo. NATO 음성 문자다.[5] 영웅 이야기 출시 당시에는 이름이 말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