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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6-27 19:15:13

백향 전투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결과

1. 개요

오대십국시대 시기인 910년 12월부터 911년 1월까지 진왕 이존욱이 조왕 왕용을 구원하여 백향(柏鄉. 지금의 하북성 백향현)에서 후량군을 격파한 전투. 주전충의 후량이 이존욱의 진나라에게 열세에 몰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전투이다.

2. 배경

당나라를 멸하고 후량을 건국한 주전충은 오래 전부터 진왕 이극용과 대립했다. 이극용은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갖췄으나, 주전충의 교활한 책략에 휘말린 데다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당하는 등 운이 따르지 않아 점차 수세에 몰렸고, 908년 1월 노주에서 후량의 대군에게 포위당하던 중 병사했다. 그는 죽기 전에 아들 이존욱에게 화살 3개를 쥐어주며 부탁했다.
"유인공[1] 부자가 나를 배신하고, 거란야율아보기 또한 나와의 맹약을 배신했다. 주전충은 나에겐 원수와도 같은 존재이다. 내가 너에게 주는 3개의 화살 중 첫 번째는 유인공에게, 두 번째는 거란에게, 세 번째는 주전충을 상대할 때 각각 사용하거라. 이것이 내가 희망하는 소원이다!"

이존욱은 부친의 뒤를 이은 뒤 군대를 추스려서 노주로 출격해 협채라는 이름의 요새를 짓고 노주를 계속 공격하던 후량군을 격파했다. 당시 어린[2] 이존욱을 우습게 여기고 있던 주전충은 이 소식을 듣고 몹시 놀라며 다음과같이 탄식했다.
"이극용은 죽었으나 이아자(李兒子: 이존욱의 아명) 같은 아들이 있으니 죽었다고 할 수가 없구나. 아들을 낳으면 마땅히 이아자 같은 아들을 낳아야 한다. 우리 아이들은 개, 돼지와 같을 뿐이다."

그 후 후량과 진나라는 하북의 패권을 놓고 서로 극렬히 대립했다. 그러던 910년 11월경, 주전충은 조왕 왕용이 후량에 귀부해 놓고 진나라에 귀순할 의사가 있다고 의심했다. 그는 업왕 나소위가 죽은 걸 기회 삼아 왕용을 진, 정으로 옮겨 제수하려고 했다.

그러던 중 연왕 유수광이 군사를 발동하여 내수에 주둔하고서 정주를 침략하려 하자, 주전충은 공봉관인 두정은과 정연휘를 파견하여 위박의 군사 3천을 이끌고 심, 기에 나누어 주둔하게 하고, 겉으로는 연의 군사가 남쪽을 노략질하는 걸 막기 위해 조를 도와서 지키고 방어하는 것이며, 군사를 나누어서 먹이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의 장수인 석공립이 심주를 지키면서 조왕 왕용에게 아뢰어 그들을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왕용은 급히 성문을 열라고 명령하고 석공립을 밖으로 이동시켜서 그들을 피했다. 석공립이 문을 나가서 성을 가리키며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주씨가 당의 사직을 멸망시켰으니, 삼척동자도 그의 사람됨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나의 왕은 오히려 혼인을 한 우호관계[3]임을 믿고 어른스러운 사람이기를 그에게 기대하니, 이는 이른바 성문을 열고 도적에게 읍하는 것이다. 애석하도다! 이 성안의 사람들은 포로가 되겠구나!"

얼마 후 후량 사람 하나가 조나라로 도망쳐서 주전충의 속내를 밀고했다. 왕용은 크게 두려워했지만, 감히 먼저 관계를 끊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낙양에 가서 다음과 같이 호소하게 했다.
"연의 군사가 이미 돌아갔고, 정주와 더불어 옛날과 같이 강화하였기에 심, 기의 백성들은 위박의 군사가 들어오는 것을 보면 도주하며 놀라워할 것이니, 빌건대 군사를 소환하여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

주전충은 사자를 파견하여 진정에 가서 왕용을 위로하고 달래게 했다. 그러나 두정은 등이 심, 기로 들어와 성문을 닫고 조나라 수병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왕용은 비로소 석공립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공격하게 했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마침내 사자를 파견하여 연, 진에 구원해 주기를 요청했다. 연왕 유수광은 왕용의 사자가 도착했을 때 수렵을 하고 있었다. 막료 손학이 말을 달려가서 유수광에게 말했다.
"조인이 와서 군사를 구걸하니, 이는 하늘이 왕의 공업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연고요?"
"근래에 그는 항상 주온과 더불어 견고하게 달라붙은 것을 걱정하였습니다. 주온의 뜻은 하삭(河朔, 하북 평원)을 집어삼키는 데에 그칠 뿐 아닌데, 지금은 저들이 스스로 원수이며 적이 되었으니, 왕께서 만약 그와 더불어 힘을 합쳐서 양을 깨뜨리면, 진, 정은 모두 옷깃을 여미며 연에 조현할 것입니다. 왕께서 군사를 출동시키지 않으면 다만 진인들이 우리보다 먼저 조치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유수광은 냉소적으로 답했다.
"왕용은 자주 약속을 저버렸고, 지금 그로 하여금 양과 더불어 스스로 서로 지치게 한다면 나는 앉아서 그 이익을 이을 수 있을 것인데, 또 어떻게 구원하겠는가?"

한편 진왕 이존욱은 왕용의 구원 사자를 만난 뒤 신하들을 모아 이 문제를 논의했다. 신하들 모두가 합심하여 말했다.
"왕용은 오랫동안 주온에게 신하 노릇을 하였으며, 해마다 많은 뇌물을 보내고 혼인으로 관계를 맺어서 그 교분이 깊으니, 이는 반드시 속입수입니다. 마땅히 그들을 찬찬히 관찰해야 합니다."

이존욱이 말했다.
"저사람 역시 이익되는 것과 손해되는 것을 가려서 이것을 하는 것 뿐이오. 왕씨는 당대에서도 혹은 신하를 칭하였다가 혹은 배반도 하였는데, 하물며 끝내 주씨의 신하가 될 수 있겠소? 저 주온의 딸이 어찌하여 수안공주이겠소?[4] 지금 죽음에서 구원하는 것도 넉넉하지 않은데 어찌 혼인관계를 돌아보겠소? 내가 만약 의심을 하여서 구원하지 않으면 바로 주씨의 계책에 떨어지게 되오. 마땅히 군사를 출동시키기를 재촉하여 그곳에 가서 진, 조가 힘을 합치면 양을 깨뜨리는 것은 분명하오."

이후 그는 군대를 출발시키고 주덕위를 파견하여 그들을 거느리게 하니, 정형으로 나가서 조주에 주둔했다. 이후 양의 장수 왕경인 등이 진나라를 공격해오자, 왕용이 다시 진나라에 긴급함을 알렸다. 이에 이존욱은 번한부총관 이존심으로 진양을 지키게 하고,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찬황에서부터 동쪽으로 내려갔다. 11월 25일 조주에 도착하여 주덕위와 더불어 연합한 뒤, 풀을 베고 땕담을 채취하려고 나온 양나라 사람 200명을 붙잡아 물었다.
"처음에 낙양을 출발하면서 양주(주전충)는 어떤 호령을 내렸는가?"

백성들이 답했다.
"양주가 상장(왕경인)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진주(조왕 왕용)에서 이랬다저랬다하니 끝내 자손의 우환이 될 것이다. 지금 모두 정예의 군사를 너에게 줄 것이니, 진주는 비록 철을 가지고 성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나를 위하여 빼앗으라.'고 하였소."

이존욱은 백성들을 조나라로 보내라고 명령하고, 11월 26일 백향에서 30리 떨어진 지점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백향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

백향에 도착한 이존욱은 주덕위 등을 파견하여 호족의 기병으로 양나라군 진영을 압박하며 도전하였지만, 양군은 나오지 않았다. 다음날 다시 나아가 백향과 5리 떨어진 야하의 북쪽에 군영을 갖추고 호족의 기병을 재차 파견하여 양의 군영에 다가가 말을 달려 활을 쏘며 그들을 꾸짖었다. 양의 장수인 한경 등이 보병과 기병 3만을 거느리고 세 길로 나누어 그들을 추격했는데, 갑옷과 투구는 모두 비단을 입히고 금과 은을 장식하여 광채가 빛나니, 진인들이 이것을 바라보고는 압도되었다. 이에 주덕위가 이존장에게 말했다.
"양인들의 뜻은 싸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군사를 빛나게 하려는 데 있을 뿐이오. 그들의 날카로움을 꺾지 못한다면 우리 군사는 떨치지 못할 것이오."

그는 군대를 순회하며 다음과 같이 훈계했다.
"저들은 모두 변주의 천무군인데 백정이나 술주정뱅이, 품팔이 꾼, 그리고 장사꾼의 무리일 뿐이니, 옷과 갑옷이 비록 곱다고는 하나 열이 너희 한 사람을 당할 수 없을 것이다. 한 사나이를 사로잡으면 스스로 부자가 되기에 충분하며, 이는 기이한 재화이니 기회를 잃어서는 아니 된다."

주덕위는 스스로 1천여 정예 기병을 이끌고 적군의 양쪽 측면을 치고, 좌우에서 말을 돌진하며 나가고 들어가기를 서너 번 해 100여 명을 사로잡았다. 또 싸우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면서 야하에서 떨어져서 멈추자, 양군 역시 퇴각했다. 이후 주덕위가 이존욱에게 간언했다.
"적의 기세가 심히 왕성하니 의당 군사를 정비하고서 그들의 쇠약해지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존욱이 물었다.
"우리는 외로운 군대이고 멀리서 왔고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시급하며, 삼진(三晉: 진주와 정주, 그리고 하동을 말한다.)의 군대는 까마기가 무인 것 같으니 속전하는 것이 유리한데도, 공은 군사를 누르며 신중을 기하려 하니 왜 그렇소?"

주덕위가 답했다.
"진, 정의 군사는 성을 지키는 데는 뛰어나지만 야전에는 부족합니다. 또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기병인데, 평원인 광야에서는 유리하여 말을 달려 적진에 돌입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적의 보루의 문을 막아버리면 기병은 그 발을 펼칠 곳이 없어지고, 또 중과부적이고, 저들에게 우리의 허실만 알게 된다면 사태가 위험해집니다."

이존욱은 기뻐하지 않고 물러나 장막 속에 누웠고, 제장은 감히 그를 말리지 못했다. 이에 주덕위는 장승업을 찾아가 말했다.
"대왕께서 자주 승리하자 적을 가벼이 여기며 힘을 헤아리지 않고 속전하기에만 힘쓰고 있소. 지금 적과의 거리가 지척인데 경계하는 것은 하나의 물 뿐이어서, 저들이 만약 다리를 만들어 우리에게 다가오면 우리 무리는 즉각 모조리 없어질 것이오. 물러나서 고읍에 진을 치고 도적을 유인하여 군영을 떨어지게 하고, 저들이 나오면 돌아오고, 저들이 돌아가면 나가며, 별도로 경무장한 기병으로 그들의 양식을 노략질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 1개월이 지나지 않아서 그들을 깨뜨리는 것은 분명하오."

장승업이 들어가서 휘장을 걷어 올리고 이존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 어찌 왕께서 편안히 잠을 잘 때입니까? 주덕위는 노장이며 군사를 아는 사람이니, 그의 말은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이존욱이 비스듬히 일어나 말했다.
"나도 바야흐로 그것을 생각하였소."

이때 양군은 성채의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는데, 한 병사가 진군에게 귀순하여 왕경인이 부교를 많이 건조하였다는 사실을 진술했다. 이존욱은 주덕위에게 "과연 공의 말과 같소."라고 말하고는 곧장 군영을 뽑아가지고 물러나 고읍으로 이동했다. 이후 양측은 백향 일대에서 계속 대치하였는데, 백향에서는 근래에 꼴을 저장하지 않아서 양의 군사들이 꼴을 베어 자급하였다. 이에 진나라 병사들이 매일 유격군으로서 그곳을 노략질하였는데도, 양군은 나오지 않았다.

주덕위가 호족 기병으로 하여금 군영을 에워싸고 말을 달리며 활을 쏘고 욕하자, 양군은 매복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여 더욱 감히 나오지 않았으며, 가옥의 띠와 좌석을 잘라서 말을 먹이니 말들이 많이 죽었다. 911년 1월 2일 주덕위가 별장인 사건당, 이사원과 더불어 정예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양의 보루의 문을 압박하며 그들에게 욕하니, 왕경인과 한경이 화가 나 모든 무리를 거느리고 나왔다.

주덕위 등은 이들과 한편으로는 교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퇴하며 고읍 남쪽에 이르렀는데, 이존장이 보병을 이끌고 야하의 상류에 진을 쳤다. 이에 양군은 가로로 수리에 걸쳐서 앞을 다투며 다리를 빼앗으려 했다. 진, 정의 보병이 이들을 막으려 했으나 전력이 부족하여 거의 밀렸다. 이 광경을 지켜본 이존욱은 광위도지휘사 이건급에게 말했다.
"도적이 다리를 지난다면 다시는 통제하지 못한다."

이건급은 사졸 200명을 뽑아서 창을 잡고 큰 함성을 지르며 힘써 싸워서 다리를 탈취하려던 적군을 물리쳤다. 이존욱은 높은 언덕에 올라가 전황을 살펴보며 말했다.
"양의 군사는 나아가기를 다투며 왁자지껄한데, 우리의 군사는 정돈되어 조용하니 우리가 반드시 이길 것이다."

양측의 접전은 사시에서 오시까지 승패가 나지 않았다. 이에 이존욱은 주덕위에게 말했다.
"양군이 이미 맞붙었고 형세를 보아 떨어질 수 없으니, 나의 흥망은 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려있다. 내가 공을 위하여 먼저 오를 것이니, 공은 뒤를 따르라."

주덕위가 고삐를 잡아당기며 간했다.
"양 군사의 형세를 보니 수고로움과 평안함으로 그들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이나, 힘을 가지고서는 이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들은 군영에서 30여 리 떨어져 있어서 비록 마른 양식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역시 먹을 겨를이 없으며, 해가 기울어진 다음에는 굶주림과 목마름은 속에서 압박하고 화살과 칼날은 밖에서 엇갈려 사졸들은 피로에 지쳐서 반드시 물러날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우리는 정예의 기병을 가지고 그들을 올라타면 반드시 크게 승리할 것입니다. 지금은 아직 아니됩니다."

이존욱은 이 말에 따라 상황을 더 지켜봤다. 얼마 후 신시(오후 3시~5시)가 되자, 아직 밥을 먹지 못했던 양나라 병사들은 전의를 잃었다. 이에 왕경인 등은 군사를 이끌고 진영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자 주덕위 급히 외쳤다.
"양의 군사가 달아난다!"

진나라 병사들이 크게 소리지르며 다투어 돌격하였고, 동쪽 진영의 양나라 군사들이 삽시간에 무너졌다. 이후 이사원이 무리를 인솔하여 서쪽 진영에 아직 버티고 있던 적군에게 말했다.
"동쪽 진영은 이미 도주하였는데, 너희는 어찌 오래 머물러 있느냐?"

양군은 서로 놀라며 두려워하다가 결국 크게 무너졌다. 이존장은 보병을 이끌고 그들을 추격하며 외쳤다.
"양인들도 우리의 사람들이니, 부형과 자제들 가운데 군량을 운송하는 사람은 죽이지 말라."

이에 양나라 장병들은 모두 갑옷을 벗고 병기를 던져 버렸고, 진나라 병사들의 함성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이때 조나라 장병들은 심, 기에서 양군이 성 안에 들어가 수졸들을 도륙냈던 일에 깊은 원한을 품고 있어서, 약탈은 생각하지도 않고 도주하는 적을 추격해 모조리 도륙했다. 이로 인해 양의 정예군이 거의 다 없어졌고, 야하에서부터 백향에 이르기까지 쓰러진 시체가 땅을 덮었다.

왕경인, 한경, 이사안은 수십 명의 기병만 데리고 도주하였고, 진나라군이 밤에 백향에 도착하니 양의 군사는 이미 떠나가고 양식, 자재, 병기를 버린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 전투에서 참수된 병사가 2만 급에 달했다. 보의절도사 왕단은 성문을 열어 패잔병들을 받아들인 뒤 방비를 강화하여 진나라군이 더 추격하지 못하게 하였고, 심, 기를 장악하고 있던 두정은은 아군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하면서 두 주의 정장들을 모두 몰아서 노비로 삼고, 노약자들을 파묻어 버렸다. 이리하여 백향 전투는 막을 내렸다.

4. 결과

911년 정월에 벌어진 백향 전투는 후량에게 있어 치명적인 패전이었다. 후량은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해 하북의 영향력을 거의 상실하였다. 주전충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여러 번 대군을 일으켜 진나라를 쳤으나, 적의 선봉대가 나타난 걸 본 병사들이 "진나라 대군이 왔다!"고 호들갑 떨자 겁을 집어 먹고 도망치는 등 추태를 일삼아 별다른 실익을 거두지 못했다. 반면 이존욱은 이 전투를 계기로 하북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여, 후량과의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했다.


[1] 본래 노주절도사로, 이 시기에 연왕을 자칭했다.[2] 당시 이존욱은 23세로 주전충에겐 어린애라 할만했다.[3] 왕용의 아들인 왕소조가 900년 9월 주전충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4] 왕용의 증조부인 왕원규가 당의 강왕 이오의 딸인 수안공주를 모시고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