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7-03 18:33:53

배익조

<colcolor=#fff><colbgcolor=#0047a0>
파일:빈 세로 이미지.svg
출생 1898년 2월 14일
경상남도 창원
사망 1989년 8월 15일
묘소
본관
가족
학력
서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 생애

1898년 2월 14일 경상남도 창원군(昌原郡) 웅천면(熊川面) 북부리(北部里, 현 창원시 진해구 북부동)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19년 당시 거주지는 경남 통영군(統營郡) 통영면(統營面) 조일정(朝日町, 현 통영시 태평동)이었으며, 통영군청 고원(雇員)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통영면 읍내 만세운동 준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통영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키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사전 준비에 착수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진평헌(陳平軒)·권남선(權南善)·모치전(牟治田)·김형기(金炯綺)·양재원(梁在元)·강세제(姜世濟)·이학이(李學伊)·허장완(許章完) 등과 함께 3월 9일 비밀리에 송정택(宋正宅)의 사랑방에 모여 통영면 읍내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3월 10일, 진평헌 등 주도자들과 함께 다시 회합하여 독립선언서의 기초, 운동 방법과 선언서 배부 등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를 마쳤다. 이어서 진평헌이 쓴 ‘동포에 격(檄)하노라’라는 제목의 격문 2매를 필사하였다. 3월 13일 저녁 8시경 통영면사무소 서기 이학이가 면사무소에서 등사판을 가지고 나와 산양면사무소로 옮겨 두었다. 산양면사무소 등사판과 합하여 2대의 등사판으로 필사한 격문 600매를 등사하였다. 그러나 3월 14일 오전 1시 30분쯤 강세제·이학이·허장완이 등사판을 돌려놓기 위해 통영면으로 갔다가 잠복 대기 중이던 경찰에 먼저 붙잡혔고, 오전 3시쯤 등사한 인쇄물을 가지고 산양면에서 통영으로 가는 길에 붙잡혔다. 3월 13일 일본인 상점에서 누군가가 종이를 구입한 것이 단서가 되었다.

1919년 5월 8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6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9월 11일 최종 기각되어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이후 1923년에는 창원군 웅천청년단 평의원으로 활동하며 민족운동을 이어나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