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6-23 03:35:19

박영관(독립운동가)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9년 7월 7일
전라북도 무장군 일동면 양곡리
(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무장면 도곡리 시목동마을 284번지)
사망 1975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장성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308호
본관 밀양 박씨
송와(松窩). 종인
이명 박성영
활동분야 독립운동가
소속 대한독립단 통의부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출생3. 생애4. 관련 웹사이트5. 신문자료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 출생

박영관의 자는 영관,호는 송와이며, 본은 밀양으로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도곡리에서 박경삼과 설명일의 셋째 아들로 견우와 직녀가 일년에 한번 만난다는 음력 칠월칠성 날 태어났다. 박영관은 한학을 배웠으며,무예도 출중하였다.

3. 생애

박영관의 태어나기 직전 전봉준 장군은 1894년 1월 고부봉기 이후 관군을 피해 무장으로 왔다. 고창 무장동학농민혁명 기포지가 농민군들이 모여들어 훈련했던 무장기포의 배후지였다. 이후 무장.고창.흥덕 지역의 농민혁명과 의병시대를 거치면서 1만여명이 희생되었다. 이후 청년들은 선배들의 가열찬 항쟁과 애국심을 이어받아 3.1만세 운동의 주역이 되었고, 1920년대 통합 고창군 내 지역별 청년회를 결성하여 항일 정신을 배양해 나갔다. 십대 청소년기를 보낸 박영관은 항일구국과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가 누구보다도 투철했고 3.1만세 호기를 맞이하여 분연히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지역민들을 이끌었다.
박영관의 나이 3살 때 어머니를 여의셨으며, 16세에 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은 남다른 효행과 총명함, 강인한 체력과 인내력을 지닌 장부로 성장하여 정의와 의협심이 남달라 고을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1918년 자택에서 중앙에서 온 예수 선교사 타마자의 제자 송흥진과 그의 제자 송주일씨와 밀회하고, 지역유지 김영환씨로 부터 자료를 받아 1919년 3월 15일 고창군 무장읍내 3.1만세 운동을 전개 참가한다.
박영관의 체포에 혈안이된 일경을 피해 이웃 고울인 장성으로 잠입하여 장성 3.1만세 운동을 펼친다. 장성 3.1만세 운동은 3월3일~4월 4일까지 끈질기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산으로 옮겨 다니며 봉화로 횃불 만세 운동을 전개한다.

군자금마련 위한 지폐위조하다 수감된다.

장성 별기열사 24인들 체포로 박영관은 목포로 잠임하여 가명(성영)을 사용하며, 전라남북도를 오가며 활동하며 군자금 모집 동지규합을 하며, 1923년 상해임시정부 대한독립단 통의부 군사 조인현을 만나 대한독립단 통의부에 가입한다. 박영관은 군자금 마련을 위해 지폐를 위조하다가 발각되고, 오석완 동지는 지폐위조 기초 자금 마련하다 발각되어 함께 8개월 목포형무소 수감된다.

대한독립단 통의부 국내무장단체 비밀결사

출옥 후 조인현과 함께 대한독립단 통의부 국내 무장 단체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상해로 부터 권총과 탄환,폭탄을 지급 받아 군자금 마련과 한국인의 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이리지점' '관공서' '은행'등을 습격 폭파'목적으로 폭탄제조을 위한 폭탄제조기술사를 초빙 폭탄을 제조하며, 기회를 노리던 중 발각되어, 9인(박영관,조인현,오석완,김종철,오오득,정균호,전기환,조순식,송시용) 동지들과 함께 3년의 수감 생활을 하며, 온갖 고문을 당한다.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출옥 후 일상생활이 어려웠다. 출옥 후 박영관은 장성 별기열사 24인들과 함께 세금 불납운동을 전개하며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효행이 깊으신 선생께서는 호남삼강록에 기록되다.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독립운동에 여생을 바치신 박영관은 일찍이 돌아가신 부모님을 너무도 그리워하시다가
부모님 묘역을 명당으로 안장하고자 풍수지리학자와 10여년이 넘도록 불편한 몸을 이끌고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셨다.
이에 감동한 풍수지리학자가 전북 부안 상서면에 산 태극 수 태극의 명당자리를 내주었다. 특히 이곳은 경사각도가 45도 이상이며 산 아래에서 빈 몸으로 올라가는 것만도 한 시간이 걸리는 위치이고 바닥이 바위라서 산 아래에서 돌과 흙을 옮겨 축대를 쌓고 묘를 완성 하는데 수년이 걸렸다. 또한 선생의 충절·효행에 관한 기록은 호남 삼강록에 기록되었다. 유해는 1994년 11월 1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4. 관련 웹사이트

5. 신문자료

박영관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