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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9:55:09

박삼일

성명 박삼일(朴三一)
이명 박윤무(朴允茂)
본관 밀양 박씨
생몰 1892년 4월 16일 ~ ?
출생지 평안도 강계부 여연면 중상동[1]
(현 자강도 중강군 중상리)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삼일은 1892년 4월 16일 평안도 강계부 여연면 중상동(현 자강도 중강군 중상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당시 신성학교(信聖學校) 교사인 이재명(李才明)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3월 초 이재명이 만주 임강현에 살던 정단(鄭丹)을 길에서 우연히 만나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고, 김종하(金宗河)·김종선(金宗先) 형제에게 이를 등사하게 하고 태극기도 만들도록 지시하였다. 이때 박삼일은 이재명 등과 다시 만나서 기독교인들을 동원하기 쉽게 하기 위해 거사일을 일요일인 3월 23일로 결정했다.

이윽고 3월 23일 아침, 김종하가 자전거 뒤에 대형 태극기를 달고 시가지를 한바퀴 돌아 주민들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이후 거사 에정시각인 오후 1시 중강 다리 밑에 수많은 기독교인과 주민들이 모이자, 박삼일 등은 이들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눠주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가두로 나와 행진을 시작했다. 시위대가 중상동과 헌병대를 거쳐 건하동 일대를 두바퀴 시위행진하고 세바퀴째 행진하던 중,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이후 체포된 그는 7월 21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엔 군자금 모금과 독립신문 배부 등을 통하여 계속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10여차례에 걸쳐 검속당하기도 했으며,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박삼일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인근의 건하동·만흥동·중평동과 함께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