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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8-14 16:24:32

박동진

1. 前 국악인2. 前 정치인3. 해설가(前 프로게이머)4. 축구 선수5. 前 건축가6. 웹툰 작가 칰타의 본명7. 6월 항쟁 당시 사망한 작전전경

1. 前 국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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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前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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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해설가(前 프로게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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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축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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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前 건축가

朴東鎭
1899~1981년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아버지가 세운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공업 건축과에 재학했다. 사실 이 사이 3.1 운동에 가담하고 옥고를 치른 후[1] 독립운동하러 만주, 시베리아까지 갔을 정도로 이시기 나름 열정있는 독립운동가였으나, 훗날 본인 왈 만주 등지에 있던 시기를 방랑의 길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뭔가 잘 안풀렸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전문기술을 배우지 못하면 한계가 있다는걸 느끼고 다시 경성으로 귀국하여[2] 1926년 경성공전 입학 9년째인 27세에 건축과 졸업 후 학교 주선으로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사로 입사하여 건축설계 업무를 맡았다.[3] 당시 총독부에 근무하던 조선인 건축 관련 직원들 중에는 낮에는 총독부 근무를 하고 퇴근 후에는 아르바이트로 건물을 설계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 시기에 설계한 건축물들이 오늘날에도 내려오고 있다.

1932년 민족대학도 멋지게 지어보자는 취지에서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본관, 1935년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現 대학원 도서관)을 설계했으며, 1940년 무렵엔 총독부를 그만두고 '태평건물주식회사'라는 민간 건설 회사를 설립했다. 허나 태평양 전쟁 통에 큰 실적은 못내다 해방 이후[4] 기지개를 펴나 싶었지만 또 전쟁으로 남북이 갈라지고 고향땅은 북쪽에 넘어가는 등 고생하다 휴전 이후부터 다시 나머지 고려대학교 건물들 설계도 맡아 1956년 농과대학, 1956년 학생회관, 1957년 신관, 1964년 이공대학 등 고려대학교 캠퍼스 건물들을 설계했고, 그 외에도 1935년 오산중학교, 1937년 중앙고등학교 본관, 1948년 영락교회, 1954년 남대문교회 등 고딕건축양식 건물들을 설계했다.

1960년대 초 유럽과 미국 여행을 다녀온 후 현역 은퇴를 했고, 1980년 자식들이 사는 미국에서 사망하였다.

그가 설계한 건축물은 철근콘크리트 구조에 화강석을 쌓아 붙이는 방법으로 시공했으며 특히 '완자쌓기'라는 그만의 독특한 건축법으로 돌을 쌓아 서양 건축계에선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방법을 창조하였다. 다만 온돌 문화가 전근대 한옥 개량에 방해가 된다고 여겼는지 외래 건축을 맹목적으로 추종해선 안된다고 하면서도, 당시로선 급진적인 재래주택 개혁론을 주장하며 한옥의 핵심인 온돌 폐지론을 언급하기도 했다. 정작 박동진이 좋아했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온돌의 우수성을 인정해 본인이 설치하기도 했던걸 고려하면 묘한 부분. 근데 말년엔 또 일종의 셀프디스 비슷한 말도 했다.[5]

6. 웹툰 작가 칰타의 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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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6월 항쟁 당시 사망한 작전전경

1987년 6월 19일 밤, 대전 삼성네거리에서 흥분한 일부 극렬시위대 6명이 시내버스를 탈취하여 대전역 앞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전경들을 버스로 치어서 충남도경 2중대 소속 박동진 일경(당시 21세)이[6] 사망하였다. 관련 글



[1] 3.1운동에 가담한 또다른 건축가로 강윤이 있다.[2] '이렇게 가다가는 아무것도 안될 것 같아서, 젊었을 적에 무엇이나 배워야겠다며 귀국을 했다'(박동진, 나의 학창시절...그 후, <대한건축학회지>, 1975).[3] '"아무리 일본기관에서 밥을 벌어먹지만 나는 결코 민족의식에 배치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박동진, GRANITE의 변(辯), <고대신문>, 1955)[4] 본인 표현에 의하면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으로 감격했다.'[5] '우리는 우리의 전통이나 우리 고유의 문화에 대한 애착심이 부족한 것 같다. 우리 건축가들은 솔선해서 이런 방면에 앞장서서 애호운동을 벌려봄이 어떠할까.' (박동진, 나의 학창시절...그 후, <대한건축학회지>, 1975).[6] 사망 이후 상경으로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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