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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00:49:19

바이샤오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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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바이샤오옌은 누구인가?3. 사건의 전개4. 사건 뒤의 이야기5. 기타

1. 개요

白曉燕命案

1997년 4월 14일 대만 타이베이현(現 신베이시)에서 일어난 납치 살인사건. 대만 범죄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오늘날까지 거론되는 사건이다. 대만에서도 온갖 잔혹한 범죄가 발생하지만 피해자의 연령, 사건이 전개된 상황, 잔혹한 살해 수법 때문에 독보적으로 유명한 사건이다.

2. 바이샤오옌은 누구인가?

파일:attachment/Pai_Hsiao-yen.jpg 파일:Pai_Hsiao-yen.jpg
바이샤오옌(왼쪽), 그녀의 어머니 바이빙빙(오른쪽) 1990년대 중반, 중학생 시절의 바이샤오옌.

바이샤오옌(白曉燕:백효연, 1980년 6월 23일~1997년 4월)은 대만의 배우가수인 바이빙빙(白冰冰:백빙빙, 1955년 5월 17일~)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거인의 별, 내일의 죠 등으로 유명한 일본 만화 스토리 작가 카지와라 잇키였으나, 카지와라의 가정 폭력과 바람기를 견디다 못해 이혼한 바이빙빙은 바이샤오옌을 임신한 상태에서 대만으로 귀국했고, 출산한 뒤 자신의 을 붙여 키워 왔다.

대만의 명배우로 소문이 자자한 어머니 덕에 TV에도 자주 모습을 보였지만, 바이빙빙은 딸을 유명인의 2세로 키우기보단 그냥 일반인처럼 키웠다. 이렇게 평화롭게 지내던 중....

3. 사건의 전개

1997년 4월 14일, 바이샤오옌은 평소처럼 학교로 등교하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길가에서 범인들에 의해 유괴되었다. 범인들은 바이샤오옌을 납치하자마자 폭행윤간하고 그녀의 새끼손가락을 절단했다. 이들은 바이샤오옌의 반나체 사진과 절단한 새끼손가락, 그리고 그녀가 직접 쓴 메시지를 보내 500만 대만 달러(한화 약 60억 원) 가량을 몸값으로 요구하며 협박했다.

4월 15일 범인들은 바이빙빙에게 돈이 준비되었는지 전화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4월 16일 범인들은 돈이 준비되었는지 다시 한 번 전화를 했는데, 당시 바이빙빙은 바이샤오옌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고 몇 분 후에 바이샤오옌이 신문을 읽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사건을 보고받은 리덩후이 총통"여학생을 살려보내냐 살려보내지 못하냐에 따라 너희들이 살지 죽을지가 정해질 것이다."라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4월 17일 범인들은 바이빙빙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돈이 준비되었는지 물었고 범인들은 몸값을 받기로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후 바이빙빙은 어찌어찌 해서 500만 달러를 마련해 범인들에게 건네주고 딸을 되찾으려 했지만, 경찰 측의 누군가가 언론에 바이빙빙의 딸이 납치되었다는 정보를 흘리는 바람에 몸값을 건네주기로 한 장소에 기자들이 먼저 진을 치고 있는 사태가 발생했고 장소를 옮길 때마다 반복되자 범인들은 결국 몸값을 받는 걸 포기했다.
바이빙빙의 기자회견 영상 (1분 44초부터)

결국 마지막 전화가 걸려온 다음날, 바이빙빙은 아침부터 기자회견을 열어서 기자들에게 "우리 아이는 백지의(무력한) 아이입니다. 제발 방해하지 말아주세요"라며 읍소했다. 이 사건의 또 다른 가해자들이라고 볼 수 있는 기레기들에게 울면서 부탁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후 범인들은 매번 몸값을 받는 데 실패하자 분노하였고, 아지트로 돌아와서 바이샤오옌을 윤간하고 집단 폭행한 끝에 잔혹하게 살해했다. 이들은 시신의 손발을 묶어서 타이베이하수도에 유기했다.

바이샤오옌이 사망한 후에도 범인들은 바이샤오옌이 살아 있다고 주장하고 바이빙빙에게 전화로 몸값을 요구했고, 4월 25일 타오위안시에서 거래를 하기로 했으나 범인들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같은 날 4월 25일, 경찰이 범인들의 아지트를 급습해 범인들 중 4명을 체포했고 나머지 3명은 도주했다.

바이샤오옌이 사망한 지 약 1주일이 지난 4월 28일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은 훼손이 심각해 발견자는 처음에 사람이 아닌 돼지의 사체로 생각했을 정도였다. 법의관의 부검 결과 직접적인 사인은 질식사였으나, 심한 폭행으로 간장이 파열되었고, 복강은 과다출혈로 부풀어 오른 데다 늑골도 대부분 부러져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는지 머리카락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고, 두 눈은 도려낸 데다, 목이 졸려 죽는 과정에서 밖으로 튀어나온 것으로 보이는 혀도 잘려 있었다고 한다. 귀에는 폭죽을 집어넣어 그 폭발 때문인 듯 고막이 파열되어 있었고, 몸 안에는 2개의 쇠파이프가 박혀 있었으며 못도 48개나 나왔다고 한다. 시신을 검시한 베테랑 법의관은 "법의관 생활을 오래 했지만, 이토록 끔찍한 시체는 처음 봤다"고 크게 충격을 받았을 정도였다고 하니 말 다했다.

일부 대만 언론이 시신 발견 시의 사진을 그대로 찍어 보도했고, 이 사진은 일본에까지 넘어가서 일본 언론들에도 보도되었다고 한다. 이런 기자들의 행태에 이전에 피해자의 몸값을 건네려 할 때의 기자들의 기레기 행태까지 더해져, 유족들은 크게 분노해 "기자 유죄"라고 적은 큰 플랜카드를 집 앞에 붙일 정도였다.

이렇게 참혹한 시신이었기 때문에 피해자의 장례식은 가발을 씌우고 생전 얼굴을 본뜬 가면을 붙여 치러질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주범격인 린춘성(林春生:임춘생, 1959년 9월 14일~1997년 8월 19일), 가오톈밍(高天明:고천명, 1960년 6월 18일~1997년 11월 17일)[1], 천진싱(陳進興:진진흥, 1958년 1월 1일~1999년 10월 6일)을 공개수배했다.

당시 격노한 리덩후이 총통은 "당장 모든 수를 총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잡아내라. 범인이 저항하면 발포해 사살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때문에 8월 19일 범인 3명과 경관 800명이 타이베이 시내 한복판에서 총격전을 벌였고, 경관 2명이 목숨을 잃었다. 범인 중 한 명인 린춘성은 6발의 총탄을 맞았고, 극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해 자살했다.

10월 23일에는 다른 한 주범 가오톈밍이 타이베이 성형외과에 난입해 자기 얼굴을 성형하라고 강요했다. 의사가 협박을 받아 수술을 마치고 나자 그 범인은 "내 얼굴을 봤으니 죽어줘야겠다."라면서 의사 부부를 살해하고 간호사는 강간 후 살해했다. 그러나 11월 17일에 다시 경찰에 발각되었고 결국 본인도 자살했다.

마지막 남은 범인 천진싱은 도주를 계속하다가 11월 18일남아프리카 공화국 대사관의 주재무관 관저[2]에 침입해 5명의 인질을 잡고 인질극을 벌였다. 그러나 민진당셰창팅[3]이 범인을 설득해 보겠다고 나서 직접 교섭한 끝에 결국 투항하여 체포되었다.

이후 재판에 넘겨진 천진싱은 1998년 1월 22일 5건의 유괴, 강도, 살인에 대하여 모두 사형, 다른 폭행 사건 등으로 징역 59년 6월형을 선고받았고 이듬해인 1999년 10월 6일, 사건 발생 2년 반 만에 대만 형법 규정상 총살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4. 사건 뒤의 이야기

이 사건의 원인을 두고 '바이빙빙이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자들(외성인)이 중심이 된 폭력단을 규탄, 반대하는 운동을 펼친 것이 원인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이들은 반일 성향을 띠고 있었는데, 바이빙빙이 일본인과 결혼해 딸을 두어 눈엣가시처럼 여기다가 바이빙빙에게 보복하기 위해 피해자를 납치해 끔찍하게 살해했다는 것. 물론 명백한 증거는 없으며, 이를 진술할 범인 셋은 이미 자살 혹은 사형으로 모두 사망했기 때문에 더 이상 추적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바이빙빙이 피해자를 보통 사람의 아이처럼 키운 이유도, 일본인과의 사이에서 난 아이여서 세간의 인식이 별로 좋지 않아서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으로 피해자가 표적이 된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장본인이 당시 리덩후이의 뒤를 이어 차기 총통으로 주목받고 있던 롄잔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언론에 피해자의 납치 사실을 흘린 장본인이 롄잔의 측근이고 평소 반일 성향이었던 롄잔이 바이빙빙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탓이라는 것이다. 물론 롄잔은 이를 부인했다.

사건에 대한 정부의 미숙한 대처는 국민적인 분노를 일으켰고, 1997년 5월 초에 전국적인 시위로 번져 리덩후이 총통이 이끄는 중국국민당 정부에도 타격을 주었다. 5월 15일에 리덩후이 총통이 직접 나서서 사건에 대해 사과했고, 행정원장 롄잔, 무임소장관 마잉주, 내정부장 린펑정을 비롯한 내각 요인들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특히 롄잔은 사건 관련 루머와 겹쳐서 정치 커리어에 타격을 입어서 행정원장뿐만 아니라 당시 겸직하던 부총통직을 사임하는 것도 고려했을 정도였다. 그는 결국 2000년 총통선거에서 천수이볜에게 패해 민진당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말았다. 물론 그의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은 쑹추위친민당을 만들어 나가는 바람에 보수표가 나뉜 것이었다.

바이빙빙은 딸의 죽음을 계기로 사형제 폐지 반대 운동의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하며, 대만 정부는 이러한 흉악범죄를 이유로 사형제를 유지하고 현재에도 사형을 집행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난징에서도 잔혹도에서 쌍벽을 이룬 댜오아이칭 사건이 일어났으나 해결되지 못하고 미제로 남아 있다.

일각에서는 이 사건의 원인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바이빙빙의 과오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 주장에 의하면 바이빙빙은 일본에서 카지와라 잇키를 통해서 야쿠자와 연관되게 되었고 대만에 돌아온 뒤에도 야쿠자와 관계를 유지했으며, 바이빙빙은 야쿠자가 소개한 대만의 어떤 그룹과 함께 대만에서 파칭코 사업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그룹이 파칭코 사업에 실패하자 바이빙빙에게 투자금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바이빙빙이 이를 거부하자 이 그룹은 바이샤오엔을 납치해 투자금을 받아내려다 실패하고 바이샤오엔을 잔혹하게 살해했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이다. 2015년, 바이빙빙은 1973년 대만 가오슝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던 다이쭝칭의 살인미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이 일기도 했다. 다이쭝칭에 의하면 73년 가오슝의 자택에서 누군가에게 총을 맞았지만 겨우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다이쭝칭을 살해하려 한 범인을 잡는 데는 실패하고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는데, 공소시효가 끝난 이후 다이쭝칭은 누군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이 사람은 자신이 다이쭝칭을 살해하려 한 범인이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고용한 사람이 바이빙빙이었고 300만 대만 달러(한화로 약 1억 5천여만원)를 받았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이에 바이빙빙은 터무니없는 말이라며 반박하기도 했다. 관련 기사 다이쭝칭의 발언이 사실일 가능성은 없는데, 왜냐하면 이 당시는 바이빙빙이 일본에서 임신한 채로 대만으로 돌아왔고 바이샤오옌을 낳은 후 15일만에 일을 했다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300만 대만 달러가 있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한편 이와 별개로 이 사건이 (댜오아이칭 사건과 더불어) 상술한 반일 성향과 연관지어서 삼합회와도 연관이 있을 거라는 가설도 등장했다.

범인들이 도주 당시 인질극을 벌였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주재무관 맥길 알렉산더와 그의 가족의 2020년 인터뷰 영상. 당시 상황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싱가포르 국영매체 CNA에서 촬영한 다큐멘터리이다.



주범 3명 중 유일하게 체포된 천진싱은 자식으로 두 아들이 있었는데, 체포 후 어느 목사의 주선으로 미국에 입양 보내졌다고 한다.[4]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가 나라에서 가장 잔혹한 살인사건의 주범들 중 하나였기에 대만에서 자랐다면 그 사실이 얼마 안가 밝혀질 것이고 살인자의 자식이라는 비난을 평생 들어야 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참고로 한국역시 이와 비슷한 박초롱초롱빛나리 살인사건이 있었다. 살인자였던 전현주도 뱃속에 딸이 있었는데, 형 집행중 출산을 하였고 남편이 곧바로 아이를 데리고가 미국으로 입양을 보냈다고 한다.

5. 기타


[1] 처음 공개수배될 당시 가오톈민(高天民)으로 표기되었으나, 린춘성이 사망한 이후 새로 나온 수배지에는 가오톈밍(高天明)으로 표기되었다.[2] 남아프리카는 대만과 1996년 11월에 단교 선언을 했다. 그러나 중국과 남아프리카 간 협상 지연으로 실제 단교는 1998년에 이루어졌다.[3] 범인 천진싱은 셰창팅과 그 외 거물급 인사가 협상에 나오면 인질을 풀어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셰창팅 외에도 여럿이 협상에 나섰으며, 범인이 지목한 협상 상대로는 당시 타이베이시의 경찰이었던 정치인 허우유이도 있었고 그 역시 협상에 나섰다.[4] 사실 대만에서는 정상적으로 살기 힘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