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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5-28 05:20:16

밀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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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성 (샤토 드 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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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태고지 성당

1. 개요2. 역사

1. 개요

히브리어: מִעִלְיָא‎
아랍어: معليا
영어: Mi'ilya

이스라엘 북부의 도시. 말라야, 미엘야로도 불린다. 아크레에서 동남쪽으로 20km 떨어진 고원에 위치한다. 인구는 3천명으로, 대부분 이스라엘 아랍인이다. 주민들은 99%가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 기독교도로 구성되어 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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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시기의 성채

청동기 시기부터 마을이 있었고, 동로마 제국 시기 모자이크가 발굴되었다. 그러던 1160년, 십자군이 요새와 함께 와인 양조장을 세웠다. 예루살렘 왕국 하의 지명은 요하니 드 차이파 (하이파의 요하네스)였고, 요새는 왕의 성 (샤토 드 루아)이라 불렸다. 1179년 에데사 백국의 후예 조슬랭 3세가 일대를 영지로 얻었으나 1187년 아이유브 왕조 령이 되었다. 13세기 들어 다시 십자군 령이 된 도시의 주인이던 조슬랭 3세의 딸 베아트리스는 1220년 튜튼기사단에게 7천 마르크 은화에 영지를 매각했다. 튜튼기사단은 1243년까지 인근 농지도 구입했다. 다만 일부 토지는 아크레의 대주교에 주어졌다. 도시와 성은 1268년 맘루크 왕조바이바르스에게 정복되었다.

오스만 제국 시기 밀리야는 사페드 산작 산하 악카 (아크레) 나히야에 속했고, 17가구의 무슬림 및 기독교도 주민이 거주했다. 주민들은 매년 1/4 세율로 농축산물로 구성된 2,151 악체의 세금을 납부했다. 1887년 기준 인구는 775명으로 늘었고, 모두 기독교도였다. 1890년에는 레바논의 수녀들이 학교 설립을 도왔다. 영국령 팔레스타인 시기인 1945년 기준 도시에는 기독교도 790명, 무슬림 110명이 거주했다. 1948년 1차 중동전쟁 시에 밀리야는 인근 유대인 정착촌들의 봉쇄로 기근을 겪었고, 그해 10월 짧은 전투 후 이스라엘 군에 점령되었다. 주민들은 농촌으로 도주했다가 다음날 이스라엘 군의 허가 하에 돌아왔다. 다만 25명의 주민들은 첩자 혐의로 추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