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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09 10:54:36

미후네 치즈코


御船千鶴子(1886~1911)

1. 개요2. 생애3. 사망4. 기타5. 관련 문서

1. 개요

일본에서 투시 초능력자로 알려진 여성.

2. 생애

1886년 7월 17일 구마모토현 우토군 마츠아이무라(現 우키시 시라누이정[1])에서 한의사 미후네 히데키와 유키 사이에서 출생했다. 치즈코는 선천적으로 진행성 난청을 갖고 태어났으며, 성인이 될 무렵에는 왼쪽 귀의 청력이 거의 소실에 가까운 상태까지 떨어졌다고 한다.

22세에 카와치라는 육군 중좌와 결혼했으나, 남편의 지갑에서 없어진 50엔이 시어머니가 사용하던 불단 서랍에 있음을 알아맞힌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시어머니가 돈을 훔쳤다는 의심을 받고 계속 괴로워하다 자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얼마 못 가 이혼당한 치즈코는 친정으로 돌아오게 된다. 당시 한창 유행이던 최면술에 심취한 형부이자 중학교 체육 교사 겸 사감이던 키요하라 타케오(清原猛雄)가 치즈코의 친정집에 드나들면서 그녀를 최면술 실험 대상으로 삼고 '처제는 투시가 가능한 사람이다'라며 계속 최면을 걸자 우연히도 좋은 결과가 나왔고, 이를 계기로 치즈코는 키요하라와 함께 '수련'을 계속한다.

이후에 치즈코는 '수련'의 성과로 각성한 투시 능력을 선보이면서 점차 화제가 되었다. 나무껍질 밑에 숨어 있던 벌레의 존재를 알아낸다거나 어느 부인이 바다에 빠뜨린 반지의 위치를 정확히 투시하는가 하면, 심지어 미쓰이 합명회사의 의뢰로 후쿠오카현 오무타시에서 투시로 현재 국가 문화재로 지정된 만다 탄광(現 미쓰이 미이케 탄광)을 발견하여 사례금으로 2만 엔을 받기도 했으나, 이 돈을 놓고 친정아버지 히데키와 형부 키요하라가 갈등을 빚었다고도 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키요하라가 치즈코의 능력은 자신이 발굴했으니 자신도 사례금의 절반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으나 히데키가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렇게 치즈코의 능력이 사람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는 가운데 이세리 쿄헤이 구마모토현립 중학 세이세이코(現 세이세이코 고등학교) 교장의 소개로 1909년부터 이듬해 1910년까지 교토제국대학 의과대학의 이마무라 신키치 교수와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의 심리학 조교수 후쿠라이 토모키치 등 여러 연구자들이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 최면술은 일본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대유행 중이었고, 과학계에서도 최면술을 포함한 각종 초자연 현상들을 과학의 일부로 간주하고 '새로운 과학의 한 분야'로까지 인정했기 때문에 관련 연구가 상당히 활발했다.

1910년 4월 10일 형부 키요하라의 자택에서 후쿠라이와 이마무라가 입회한 가운데 치즈코의 '투시' 실험이 개시되었다. 치즈코는 '투시'를 할 때마다 항상 사람들을 등진 채 투시 대상을 손에 들고 행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후쿠라이는 이 습관 때문에 치즈코의 능력이 의심받을 것을 우려해서 투시 대상을 손에 들지 않고 투시하도록 시켰다. 그러나 이 방식으로는 적중하지 못했고, 이번에는 키요하라가 차 항아리 속에 명함을 넣고 항아리를 만져서 투시하도록 하자 명함의 글자를 맞혔다고 한다. 이 실험으로 치즈코의 능력이 진짜라고 확신한 후쿠라이는 심리학회에 결과를 발표, 신문에도 '투시'라는 단어가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이른바 '천리안 사건'으로 불리는 투시 능력에 대한 진위 논쟁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 치즈코에게 투시 의뢰가 쇄도한 것은 물론, 카가와현 마루가메시에서 자연재해 등을 예언했다는 나가오 이쿠코 등을 비롯해 '천리안' 능력을 가졌다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속출하기 시작했다. 나가오 이쿠코는 후에 이른바 염사 능력자로 알려지면서 그녀에 대한 실험은 자연스레 염사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쪽도 후술될 치즈코의 투시 능력 관련 논란과 마찬가지로 염사 능력의 진위 여부를 두고 논란이 빚어졌고, 여기에 더해 이쿠코와 친분이 있었던 한 최면술사와의 불륜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치즈코의 '투시' 능력에 대한 여론은 점차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1910년 9월 15일 치즈코와 후쿠라이는 당시 물리학계의 권위자였던 도쿄제국대학 전 총장 야마카와 켄지로가 참석한 가운데서 투시 능력 실험을 진행했다. 이 때 실험한 방법은 으로 된 납작한 관 여러 개 중 한 개에 글자를 적은 종이를 넣은 뒤 납땜으로 봉인하여 열 수 없도록 한 다음, 글자를 투시하는 것이었다. 치즈코는 투시에 '성공'했으나 여기서 큰 문제가 발생했는데, 치즈코가 투시한 글자는 야마카와가 준비한 것이 아니라 후쿠라이가 사전에 투시 연습용으로 준 것이었다. 야마카와의 지적에 후쿠라이는 곧바로 실수였다고 해명하기는 했으나, 이 석연치 않은 사태로 인해 언론에서는 점차 치즈코의 '투시' 능력에 대해 부정적인 논조가 강해져 갔다.

사실 치즈코의 투시 능력 실험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첫 번째 실험 당시 치즈코는 관찰자들에게 등을 돌리고 10여 분 이상 시간을 들였으며, 투시에 성공한 대상은 봉투 안에 들어 있는 종이의 문자였다. 이 때문에 등 뒤에서는 알아볼 수 없게 손끝에 침을 묻힌 뒤 교묘하게 봉투를 뜯은 다음 체온을 이용해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겠냐는 지적이 있었다. 다른 실험들도 모두 실험으로써 갖춰져야 할 조건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였으며, 일부 실험에서는 아예 치즈코가 다른 방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3. 사망

이렇게 일련의 초능력에 대한 비판 여론이 커지고 나가오 이쿠코의 이른바 '염사' 능력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논조의 기사가 연이어 나가는 가운데 치즈코는 1911년 1월 18일 중크롬산칼륨[2]으로 음독자살을 시도, 다음날 새벽에 2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일반적으로는 치즈코의 자살이 언론과 세간의 심한 비난을 견디지 못한 것이라고 알려졌으나, 그녀의 고향에서는 친정아버지와 금전 문제로 갈등을 빚은 것을 자살 원인으로 보았다고 한다.

4. 기타

5. 관련 문서


[1] 시라누이정 자체는 2005년 1월 15일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우키시에 합병되면서 단독 지자체로써는 소멸했다.[2] 6가 크롬을 포함하는 독성물질로 위험물안전관리법상 제1류 위험물로 분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