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레 안드레올로의 수상 이력 | |
{{{#!folding ▼ |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이름 | 미겔 앙헬 안드리올로 프로데야 (Miguel Ángel Andreilo Frodella) |
생년월일 | 1912년 9월 6일 |
사망년월일 | 1981년 5월 14일 (향년 68세) |
국적 | 우루과이 | 이탈리아 |
출신지 | 우루과이 돌로레스 |
포지션 | 센터 하프백 |
신체조건 | 169cm | 71kg |
소속팀 |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1932~1935) 볼로냐 FC 1909 (1935~1943) SS 라치오 (1943~1944) SSC 나폴리 (1945~1948) 칼초 카타니아 (1948~1949) 포를리 FC (1949~1950) |
국가대표 | 0경기 (우루과이 / 1935) 26경기 1골 (이탈리아 / 1936~1942) |
감독 | SC 마르살라 1912 (1953~1954) 타란토 FC (1957~19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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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루과이와 이탈리아의 전 축구 감독.2. 생애[1]
2.1. 출생
미켈레 안드레올로(Michele Andreolo)는 우루과이의 돌로레스 출신으로 태어날 당시의 이름은 미겔 앙헬 안드리올로 프로데야(Miguel Ángel Andreilo Frodella)였다. 그는 돌로레스 출신이었지만 가족들은 살레르노의 발레 델란젤로(Valle dell'Angelo)에서 살았다. 형제로는 미켈레 외에도 5남 3녀가 더 있었다.2.2. 선수 생활
2.2.1. 클럽
안드레올로의 클럽 경력은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의 강호 나시오날에서 시작되었다. 안드리올로는 나시오날에서 3시즌을 보내며 35경기에 출전, 팬들에게 이름을 알려가기 시작했고 팀도 이 3시즌간 우승 2회, 준우승 1회로 좋은 성적을 거뒀다.1935년 4월, 당시 볼로냐 소속이었던 프란치스코 페둘로(Francisco Fedullo)가 자신의 아버지의 병환으로 인해 소속 구단의 허가 없이 우루과이에 갔다. 그럼에도 시간이 늦어 페둘로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레나토 달라라 회장[2]에게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청원을 했다. 달라라는 보조 코치를 보내 페둘로를 이탈리아에 다시 데려오도록 했고 페둘로는 복귀하면서 우루과이의 젊은 선수 3명을 스카우트해갔는데 그 3명 중 안드리올리가 껴 있었다.[3]
안드레올로는 그렇게 볼로냐에 합류하게 되었고 합류 시즌에 볼로냐는 바로 우승을 했다. 다만 이 시즌에 ACF 피오렌티나와의 시합에서 페널티 킥 실축을 한 것은 흠. 이 페널티 킥이 안드레올로의 이탈리아 선수 생활 내내 유일한 페널티 킥이었다.
볼로냐는 안드레올로가 뛴 8년간 4회의 스쿠데토를 차지하며 최고의 황금기를 보냈고 안드레올로는 이탈리아 국내는 물론 국외 컵대회에서도 마티아스 신델라, 샤로시 죄르지 등을 상대로 좋은 기량을 선보였다.
안드레올로는 1943년 이후로 SS 라치오, SSC 나폴리, 카타니아 칼초, 포를리 FC 등에서 선수 생활을 보냈다.
2.2.2. 국가대표
2.2.2.1. 우루과이
안드리올리가 나시오날에서 괜찮은 모습을 보이자 그는 1935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출전하는 우루과이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하지만 당시 우루과이의 주전 센터 하프백으로 초대 월드컵과 1928년 올림픽 우승 당시 주전이었던 로렌소 페르난데스가 아직 건재해서 안드리올리는 단 한경기도 출전하지 못한 채 벤치에서 우루과이의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우승을 지켜봐야 했다.2.2.2.2. 이탈리아
볼로냐에 이적한 안드레올로는 이탈리아 대표팀을 이끌던 포초 감독의 눈에 띄어 1936년 5월 17일에 있었던 오스트리아전에서 처음 국가대표 경기를 치렀다.안드레올로는 1938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의 4경기에 모두 출전, 루이스 몬티의 뒤를 이을만한 활약을 선보였고 이탈리아의 FIFA 월드컵 2연패에 크게 공헌했다.
그는 1942년까지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26경기를 뛰었고 1골을 넣었다.
2.3. 감독
안드레올로는 SC 마르살라 1912와 타란토 FC에서 짧게 감독 생활을 했다.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수비력과 시야, 중거리 슈팅 능력을 모두 갖춘 하프백. 주로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1934년 월드컵 우승의 주역이자 전임자였던 루이스 몬티와 비교되었다.4. 수상
4.1. 클럽
-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2회: 1933, 1934(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 세리에 A 우승 4회: 1935-36, 1936-37, 1938-39, 1940-41(볼로냐 FC 1909)
-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1회: 1935(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 세리에 A 준우승 1회: 1939-40(볼로냐 FC 1909)
4.2. 국가대표
- FIFA 월드컵 우승 1회: 1938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우승 1회: 1935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볼로냐의 회장으로 현재 볼로냐의 홈구장 스타디오 레나토 달라라로 자신의 이름이 남아있다.[3] 이 스카우트에는 페둘로의 친구이자 나시오날의 레전드 엑토르 스카로네의 추천이 있었다. 페둘로는 안드리올리를 데려가기 위해 경기를 보았고 20분도 안 되어 반드시 데려가야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