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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05 09:10:57

미야자키 마사히로

파일:external/www.snukumdo.org/%EB%AF%B8%EC%95%BC%EC%9E%90%EB%81%BC%EB%A7%88%EC%82%AC%ED%9E%88%EB%A1%9C.jpg
이름 미야자키 마사히로([ruby(宮崎正裕, ruby=みやざき まさひろ)])
Masahiro Miyazaki
국적 일본파일:일본 국기.svg
출생 1963년 2월 5일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츠루미구
학력 토카이대학 부속 사가미고등학교
직업 카나가와현 경찰 경시[1]
단수 범사 8단[2]
1. 개요2. 생애3. 선수 경력4. 특징5. 평가6. 전적 및 영상7. 수상 기록8. 인물9. 기타

1. 개요

헤이세이의 초인
전일본검도선수권 대회 6회 우승. 역사상 최다 최고의 전적.
전적만 감안한다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역대 최강의 검사.
파일:external/www.genbukan.jp/yusho.jpg
오른쪽이 미야자키 마사히로, 왼쪽은 동생 후미히로
일본의 전직 검사이며, 검도 일본 국가대표 경력을 지녔다. 현재는 가나가와현 경찰 교양과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경부&특별방법과 훈련 검도 사범을 맡고 있다. 검도계의 불세출의 슈퍼스타, 검도계의 마라도나 혹은 마이클 조던이라고 불리며 미야자키류의 독특한 검도를 만들어냈다.

2. 생애

(1학년부터 레귤러가 되어, 3학년때 인터하이현 예선으로 개인·단체 모두 우승해 인터하이 출장.국민 체육 대회등에도 출장)

(검도 경기자의 동상 수상은, 1960년(쇼와 35년) 제9회의 나카무라 타로 이래, 37년만의 2명째)

(올림픽 출장 선수 이외의 동상 수상은 사상최초)

3. 선수 경력

한번 우승하기도 어렵다는 전일본선수권 본선에 12년 연속(1990년~2001년) 진출하였다.[4] 우승 6회·준우승 2회(2연패 2회(1996년~2000년)의 5년간, 결승에 계속 진출했다.)의 위업을 완수했다. 또한 세계선수권 단체전 우승 4회, 개인전 우승 1회, 전국 경찰 검도 대회 우승 2회, 전국 경찰 검도 선수권 대회 우승 6회·준우승 1회·제3위 3회(안, 3 연패 1회·2 연패 1회), 국민 체육 대회(검도 경기) 단체 우승 1회·제3위 2회, 전일본 선발 검도7단 선수권 대회 우승 5회·준우승 3회 등, 전후의 검도 역사상 최고·최다의 전적을 남겼다. 때문에 헤이세이의 검호」· 「헤이세이의 초인」 ·「검도계의 철인」·「노력의 천재 검사」등으로 불린다.

많은 일류 검사들이 20대부터 시작해 전일본검도선수권대회에 평균적으로 10년 정도 도전한다. 그런 그들이 우승하는 건 한두번 있을까 말까한데, 미야자키는 12번 본선출장해서 6번우승을 거머쥔 그야말로 먼치킨.[5][6] 그가 은퇴한 2001년까지 남겼던 6회우승기록은 2016년, 현재까지도 깨어지지 않았다.[7]

미야자키가 첫 출장 첫 우승을 완수한 당시의 전일본검도선수권대회는 현재와 달리 단에 의한 출장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미야자키는 6단을 취득할 때까지 출장할 수 없었다. 첫번째로 우승한 해의 다음 해에도 우승해 「전일본검도선수권은 연패할 수 없다」라는 징크스를 최초로 깬 것으로도 유명하다. [8]

수많은 실적을 올려도 결코 자만하지 않고,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로 임하는 자세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전일본선수권 가나가와현 예선에는 2001년을 마지막으로 참가하지 않고, 선수와 코치를 겸임하고 있었다. 2003년 10월에 전국 경찰 검도 선수권 대회에서 3 회전 탈락을 마지막으로 현역 은퇴해 이후는 코치에 전념. 현재는 사범으로서도 수많은 지도 실적을 올리고 있다. 아우는 미야자키 후미히로(현재 카나가와현 경찰 경찰관)이다.[9] 라이벌은 이시다 토시야(현재 오사카부 경찰 경찰관·오사카부 경찰 특별방법과훈련 검도 사범).[10]

4. 특징

지금까지의 일본을 대표하던 선수와는 다른 자신만의 검도를 한다. 타고난 스피드와 파워, 유연성을 바탕으로 화려하면서도 노도와 같은 파상적인 공격으로 상대를 유린한다. 그의 검도는 한때 일본 검도계에서 차가운 질책의 대상이 되기도했다. 그것은 그의 검풍이 風格과 正道을 중시하던 일본검도와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때 그의 검도스타일에 대해서 변칙적이다 품위가 전혀없다 등의 말도 많았으나[11]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그의 '강함'과 다른 요소까지도 인정을 받는 분위기로 흘러 '미야자키류'의 검도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스타일상의 호불호가 심한 선수. 검도 시합의 실전적인 검도를 추구한다면 미야자키를 선호할것이고 품위와 자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검도가라면 미야자키는 선호할만 한 검도스타일이 아닌것.

한국 한정으로 1990년대 그의 검도의 영향을 받아 수많은 아마추어 도장에 또다른 미야자키들이 양산되었다. 주로 3-40대 초중반의 검도인들 사이에서 나타난 일종의 허세. 하지만 수련자 개인의 허세로 끝난다면 좋겠지만 대부분 그의 검도가 기본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그만의 스타일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의 겉모습만 흉내내는 바람에 검도 스타일이 무척이나 "변칙 혹은 이기기만 하면 된다" 스러워진 것이 문제다. 미야자키 이후로도 기본기를 충실히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 검도가들을 어설프게 따라하는 풍토는 여전하다.

그러나 미야자키의 스타일을 쉬이 따라할 수도 없는 이유는 변칙적이긴 하지만 남들은 제대로 흉내도 못내는 그 자신 나름대로의 독특한 풋워크, 기본기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류 라는 평가를 받는 부분이 이런부분. 철저한 미야자키 본인의 센스에 의지한 경기운용 및 기술들이 많았기 때문이며 다른 검도선수및 아마추어 검도 일반인은 쉽게 따라하지도 못하는 수준이다. 그의 기본기가 부족하냐라고 하면 검도인들은 그의 기본기는 훌륭하다는게 중론. 다만 시합을 위해 그의 스타일이 그자신만의 변칙스타일로 발전해 왔다.

5. 평가

현대검도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본 검도 스타일은 자세와 품위를 엄격히 하며 검도시합이 죽도를 사용하는 시합이였다. 진짜 진검을 사용한다는 상정하에 혹은 생각을 가지고 검도시합을 펼쳐온경우가 많았다. 90년대초 이런 시합 스타일에 완전 반대되는 다시말하면 "이기면 장땡" 식의 스타일로 시합을 풀어나간 것이 미야자키인 것이다. 어찌보면 얍쌉한 스타일로 시합에 임했기 때문이다. 진검을 상정한 "검도" 검술이 아닌 죽도를 사용하는 시합 "죽도술"의 개념의 연장선으로 진검이라면 당연히 사용할수없는 방법으로 시합을 풀어나갔으며 당연하지만 미야자키가 사용한 와이퍼 같은 기술 (머리손목 허리를 동시에 막지만 역허리가 완전 오픈되는 자세)들은 서로 진검을 쓴다는 상황이면 시도도할수 없는 기술들이다. 어떻게 보면 검도를 스포츠적으로 해석한 사람이다.

결국 현대검도는 미야자키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시합죽도술로 더더욱 발전되어가고 있으며 실제로 스포츠화 되어 머리,손목,허리 점수내기 죽도게임에 가까워진것도 사실. 결과적으로는 이런 흐름의 선구자라 할수도 있겠다.

하지만 결국 그가 아직까지도 검도인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며 회자되고 있는 것은 그 누구도 그의 역대전적 비슷한 기록을 아직도 내지도 못하고 있음(그의 기록이 아직도 넘사벽) 과 동시에 그리고 압도적인 실력으로 모든 당대 최고의 검사들을 제압하여 그의 검도 스타일이 아직까지도 해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검도선수로써 그의 라이벌로 거론되는 사람들은 이시다 토시야, 에이가 나오키, 에이가 히데유기 정도 뿐이다. 에이가나오키는 미야자키가 약 37세 때 그리고 본인은 33세때 결승전에서 맞붙었으며 결국 미야자키의 시대가 이제는 끝났음을 전세계에알리듯이 우승하며 막긴하였으나 전성기때 미야자키는 크게 천적이랄 사람이 없었던 수준이다. 하지만 후에 계속해서 미야자키는 에이가 나오키와 대전하지만 에이가 나오키는 미야자키스타일을 완벽히 습득한듯 후에는 그의 유일한 천적에 가까운 모습으로 미야자키와의 전적에서 우위를 점한다.

그의 기술은 완벽한 기본기, 정통검도의 체계적 기술을 완벽하게 소화한 후 완성시킨 것이다. 그의 검도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많은 일본의 검도인들도 미야자키의 7단 승단시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승단시험장에서의 미야자키의 칼은 정통검도의 교본처럼 바르고 風格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후에 결국 그는 8단 심사를 단번에 통과하는 쾌거를 이룬다.[12]

2011 전일본선수권부터 전년도 대회우승자는 바로 예선을 거치지 않고 본선진출이라는 특혜가 없어짐에 따라 미야자키의 전적은 더더욱 넘사벽이 될 전망이다.[13]

6. 전적 및 영상

약력

전일본검도선수권대회 제38, 39, 41, 44, 46, 47회 우승 (6회) 역대 최다 우승.

일본경찰검도대회 개인전 우승(3회)

전적

전일본검도선수권대회(개인전)
1990년 제38회 우승[14]
1991년 제39회 우승[15]
1992년 제40회 3회전 패
1993년 제41회 우승[16]
1994년 제42회 준준결승 패
1995년 제43회 3회전 패
1996년 제44회 우승[17]
1997년 제45회 준우승[18]
1998년 제46회 우승[19]
1999년 제47회 우승[20]
2000년 제48회 준우승[21]
2001년 제49회 2회전 패

세계선수권(개인전)
1991년 제8회 준준결승 패(캐나다)
1997년 [[https://youtu.be/4yN3vKje5fg|제10회 우승(일본)[[[22]

전국경찰선수권대회(개인전)
1985년 2위
1990년 3위
1991년 우승
1992년 3위
1995년 우승
1996년 우승
1997년 우승
1999년 우승
2000년 우승
2001년 3위

(1985년 - 2003년까지 19년간 연속 출장.전국 경찰 검도 선수권 대회와 전일본 검도 선수권 대회를 같은 나이에 재패한 선수는, 나카무라 타로(카나가와현경)〈'55〉·나카무라 타케시(경시청)〈'70〉·미야자키 마사히로(카나가와현경)〈'91·'96·'99〉·우치무라 료이치(경시청)[23]〈'06〉·다카나베 스스무(카나가와현경)〈'10〉마셔)
국민 체육 대회(단체전·검도 경기)

(1987년-2005년까지 19년 간 연속 출장)
전일본 선발 검도7단 선수권 대회: 우승 5회·준우승 3회

(2006년까지의 전적.전일본 선발 검도7단 선수권 대회는 2007년 이후로 중지되었다.)

7. 수상 기록

세계선수권
금메달 1988 서울 단체전
금메달 1991 토론토 단체전
금메달 1994 파리 단체전
금메달 1997 교토 단체전
금메달 1997 교토 개인전

8. 인물

9. 기타


[1] 한국 경찰의 경정, 총경에 해당한다.[2] 2023년 5월 6일, 만 60세의 나이로 범사가 되었다.[3] 그의 지도 하에 쇼다이 켄지, 다카나베 스스무 등이 전일본검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며 지도력도 인정받는다.[4] 본선에 진출하는 것도 어렵다. 많은 일본선수들은 본선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꿈이라고 할 정도이다. 검도선수권대회가 열리는 곳은 유명한 스포츠행사 등이 열리는 일본의 무도관이니 아무래도 상징적 의미도 크다.[5] 10년가까이 자기 혼자 타이틀을 독점했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다. 더군다나 준우승 횟수까지 포함한다면..[6] 미야자키 이전에 3회 우승을 달성한 치바 마사시, 그리고 헤이세이 시대에 3회 우승을 달성한 니시카와 키요노리 같은 명검사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우승횟수의 2배에 연패를 2번한 미야자키의 업적은 전무하고 앞으로도 깨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7] 미야자키가 유일하게 타이틀을 못 가진 대회가 중창기 대회(총리대신배)이다. 이 대회에서는 미야자키의 라이벌로 거론되었던 에이가 형제(히데유키, 나오키)가 나란히 타이틀을 가져갔다.[8] 그도 그럴것이 연패를 하는것이 어려울 만큼 본선은 수준이 다들 높다. 더군다나 마사히로는 이 연패를 현역시절에 2번이나 달성하였다. 그리고 후에 그의 제자인 다카나베 스스무가 연패를 경험한 두번째 선수가 된다.[9] 아우 역시 일본에서 정상급의 劍士이며, 전일본선수권 결승에서 형인 마사히로와 2번 맞붙어 두번째 만에 형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제10회 세계검도선수권대회 개인전 결승에서도 형과 맞붙었으나 연장전에서 형에게 패배하여 준우승을 차지하였다.[10] 일본에서 가장 호쾌한 검도를 하는 劍士 중 한 명으로 전일본검도선수권대회 2회 우승자이다. 제10회 세계검도선수권대회에서 일본대표팀 주장이었고, 개인전 3위를 기록하였다. 제16회 세계검도선수권대회에서 남자대표팀 감독을 역임하였다.[11] 대표적으로 미야자키가 즐겨 쓴 '와이퍼'란 방어 기술로, 이는 아직도 시합에서 논란이 있다.[12] 46세 나이에 최연소 8단이라는 기록까지 세웠다.[13] 미야자키가 연패를 연달아 할 때는 이 특권의 어드밴티지를 어느 정도 받긴 받았다. 공교롭게도 그의 제자인 다카나베 스스무가 우승을 차지한 후에 이 어드밴티지가 없어졌는데, 다카나베는 본선에 진출하여 스승과 같이 연패를 이룩한다.[14] 시라카와 마사히로에 결승에서 승리.[15] 홋카이도의 에이가 히데유키에 결승에서 승리.[16] 동생인 후미히로에 결승에서 승리하였다.[17] 도쿄의 하라다 사토루에 결승에서 승리.[18] 동생인 후미히로에게 패배하였다. 재밌는 것은 이 대회의 4강에 미야자키 형제(마사히로, 후미히로)와 에이가 형제(히데유키, 나오키)가 올랐는데, 첫 경기에서는 동생들의 대결이었고 두번째 경기는 형들의 대결이었는데, 모두 미야자키 형제의 승리[19] 결승에서 오사카의 에토 요시히사에게 승리하였다. 에토는 47회 대회에서도 결승에 올랐으나 2번 연속으로 미야자키에 패해 준우승하였다.[20] 미야자키의 우승 경력에서 오점으로 남는 대회. 준준결승전에서 일본의 또 다른 명검사 에이가 나오키와 경기하였다. 미야자키의 머리에 에이가는 받아 허리로 대응하였는데, 심판 3인은 지체없이 미야자키의 머리 득점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비디오 판독으로는 미야자키의 머리는 에이가의 머리에 닿지 않았고, 따라서 명백한 에이가의 득점이었다. 하지만 후에 에이가는 자신의 다큐에서 미야자키의 공세에 자신이 밀렸고, 미야자키는 자신을 던지는 劍'道'를 한 것임에 반해 자신은 칠 타이밍을 계산한 劍'術'을 펼쳤다며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였다.[21] 결승에서 에이가 나오키에 패한다. 전년도 오심 논란의 주인공들이 결승에서 맞붙은 경기로 비상한 관심을 모았고, 결국은 에이가가 손목 득점으로 승리. 이 경기에서 에이가는 미야자키의 시대를 끝낸 검사로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22] 준결승에서 한국의 박상섭, 결승에서 동생인 후미히로를 꺾었다.[23] 80년생 검사. 2014년 8월 현재 전일본검도선수권 우승 3회, 준우승 3회. 현역선수로서는 미야자키의 기록에 가장 근접해 있는 선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