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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이슬람 공화국 제5대 대통령 모하마드 하타미 سید محمد خاتمی | Mohammad Khatami | |||
<colbgcolor=#303A3B><colcolor=#ffffff> 본명 | 세예드 모하마드 하타미 سید محمد خاتمی Sayyid Mohammad Khatami | ||
출생 | 1943년 10월 14일 ([age(1943-10-14)]세) | ||
이란 제국 야즈드주 아르다칸 | |||
재임기간 | 제5대 대통령 | ||
1997년 8월 3일 ~ 2005년 8월 3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303A3B><colcolor=#ffffff> 배우자 | <colcolor=#373a3c,#ddd>조레 사데기(1974년 결혼) | |
자녀 | 3명 | ||
학력 | 이스파한 대학교 테헤란 대학교 | ||
종교 | 이슬람교(시아파) | ||
소속 파벌 | [[개혁파| 개혁파 ]] | ||
소속 정당 | [[전투 성직자 협회| 전투 성직자 협회 ]][* [[전투적 성직자회|전투적 성직자회 ]]에서 분열된 개혁파 정당.]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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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سید محمد خاتمی(1943. 10. 14 ~ [age(1943-10-14)]세)
이란의 정치인이자 제5대 대통령(1997 ~ 2005).
2. 생애
아르다칸에서 성직자 루홀라 하타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스파한 대학교와 테헤란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1974년 조흐레 사데기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세 자녀를 두고 있다. 막내 에마드는 부친과 마찬가지로 정치인이다. 밑으로 16살 어린 동생 모함마드레자 하타미가 있는데, 형과 마찬가지로 정치인이며 전직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바로 밑의 동생 알리 하타미도 정치인이고, 형의 대통령 재임 2기 때 비서실장을 지냈다. 이런 배경을 보면, 하타미가 전형적인 엘리트 집안에서 자랐음을 보여준다.이스파한 대학교에서 서양 철학을 전공해 학사 학위를 받은 뒤 테헤란 대학교에서 교육과학 석사 과정을 밟는 중 쿰으로 가 이슬람 과학을 공부하러 떠났다. 쿰에서 7년간 공부한 끝에 이즈티하드 공부를 마쳤다. 그 후, 독일로 넘어가 함부르크 이슬람 센터의 의장으로 1978년부터 1980년까지 활동했다.
3. 대통령 재임
가문의 후광을 등에 업고 1980년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진출하였으며, 1982년부터 약 10년간 문화이슬람지도부 장관을 역임하는 등 개혁파 내에서 점차 체급을 키우며 잠재적인 대선주자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미 두 번의 임기를 수행해 3연임 제한 규정에 따라 출마할 수 없게 된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대통령의 뒤를 이어 개혁파 후보로 1997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 69.07%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상대 후보인 알리 악바르 나테그누리 국회의장을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대표적인 중도 개혁파 정치인으로 손꼽히며 여성·청년층의 지지를 받았다. 이슬람교 신앙에 따라 종교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이란에서 나름의 사회 개혁을 시도했는데, 표현의 자유를 증진하고 사회 자유화와 경제 자유화를 추진하는 등 이슬람 자유주의에 기반한 개혁 정책을 잇따라 내놓았다. 이란 사회에서 이러한 정책들은 상당히 파격적이고 진보적인 변화였다. 그 밖에 외교 정책 면에서도 유럽연합 등 서구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이슬람교 최고지도자이자 국가원수인 '라흐바르' 휘하의 정부 수반에 지나지 않는 이란에서, 일련의 개혁 정책 노선은 라흐바르를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보수파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았다. 게다가 그 라흐바르가 이슬람 교리를 강조하는 강경 보수 원칙파 알리 하메네이였기에, 개혁 행보는 보수 원칙파에게 더더욱 못마땅한 일탈로 치부되었다. 국회에서도 보수 원칙파로 분류되는 의원들이 하메네이의 암묵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개혁 정책과 법안에 사사건건 발목을 잡았다. 때문에 집권 4년 내내 이들에게 시달려야 했고, 일부는 재선 실패 가능성까지 점쳤다.
그런데 이러한 발목잡기가 여성과 청년을 중심으로 진보적이고 자유로우며 개방적인 사회를 추구하는 개혁파 지지층의 분노를 자극했고, 보수 원칙파는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 그 결과 재선에 도전한 2001년 대통령 선거에서 현역 프리미엄을 더해 무려 76.90%의 득표율을 기록, 4년 전보다 더 큰 격차를 벌리며 압승하면서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동정심을 받으며 압승한 정권이 으레 그렇듯이, 막상 재선에 성공한 뒤에는 각종 실책이 덮쳐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초기 나름 그럴싸한 성과를 보이는 듯 싶었던 경제도 생각 외로 크게 성공하지는 못 했고, 되레 화폐 가치가 추락하는 등 어두운 면을 드러냈다. 게다가 반미 국가인 이란의 특성상 미국과의 관계 개선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했지만, 2001년 소위 "네오콘"으로 대표되는 조지 W. 부시가 당선된 것도 모자라, 2003년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면서 진전을 보일 리가 없었다.[1] 당연히 하메네이와 보수파들의 발목 잡기는 계속되었지만, 하타미와 개혁파는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 했고, 되레 하메네이와 보수파 탓만 하는 등 일종의 책임전가를 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진짜 5년 넘게 한 게 뭐가 있냐?"며 비판을 받았다. 결국 2004년 총선에서 보수파가 원내 의석의 70% 가까이 점하면서 임기 말 제대로 레임덕이 걸리고 만다.
여기에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두고도 논란이 불거졌는데, 임기 종료를 코앞에 둔 2005년 4월 8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 모셰 카차브 이스라엘 대통령 옆에 선 것이 문제가 되었다. 카차브가 이란 출신이었고,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름 얘기를 나누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보였다. 하지만 카차브가 아무리 이란 출신이었어도, 이란의 관점에서 명백히 적국인 이스라엘의 국가원수와 얘기를 나눈 것이 이란 내에서 갑론을박의 대상이 되었고, 귀국하자마자 온갖 비난에 시달렸다. 이스라엘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이슬람 국가의 수장이 천주교의 수장인 교황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 자체만으로도 보수파들의 눈 밖에 제대로 나버린 것은 덤.
결국 임기 막판의 이러한 행보는 쏟아지는 비판 속에 지지율이 급락하는 한편 보수적이고 강경한 이슬람 원칙파의 부활을 불러왔다. 지지율 하락으로 정권 재창출에 빨간불이 켜진 개혁파는 이런 상황에서도 정신 못 차리고 오히려 분열해 제각각 독자 출마를 선언했으며, 그 결과 차기 대통령 선거에 등록한 후보 7명 중 무려 4명이 개혁파 인사인 유례 없는 국면이 탄생했다.[2] 그런데 이런 난맥상에도 현직 대통령으로서의 인기가 아예 바닥은 아니었는지 개혁파의 전직 대통령인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후보가 1차 투표에서 21.13%를 득표해 1위를 하는 이변을 연출, 그를 포함한 개혁파 후보 4인의 득표율 합계가 56.64%에 달하는 의외의 결과가 도출되었다. 이 덕에 개혁파는 정권 재창출 가능성을 점치며 내심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기대가 무색하게 2차 투표 결과 보수 원칙파의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가 무려 61.69%를 득표해 압승하는 또 하나의 이변이 일어나면서 개혁파의 재집권 예상은 한낱 아시발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1차 투표의 결과에 화색이 돈 개혁파 인사들이 단일화에 적극 임하지 않은 반면, 보수 원칙파와 그 지지자들이 "이러다 또 진다"는 위기감에 아흐마디네자드 후보에게로 몰표를 주는 전략적 선택을 한 것. 그렇게 이란 정권은 다시 강경 보수 원칙파에게로 넘어갔고,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후 임기 만료로 퇴임하였다.
4. 퇴임 이후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대통령이 되어 쓸쓸하게 퇴임하면서 정계를 완전히 떠나는 듯했지만,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가 후임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그동안 쌓아놓았던 개혁 정책 성과들을 줄줄이 폐기하며 이전으로 되돌리자 "퇴행"이라는 비판 여론과 함께 "이전 정권이 그래도 더 나았다"는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 덕에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의 후임자를 선출하는 2009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권 개혁파의 유력한 대선 후보로 급부상, 대선 출마설이 나돌기 시작했다.[3] 상황이 이렇게 되자 본인도 나름 욕심이 있었는지, 아흐마디네자드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꾸준히 내면서 사실상 차기 대권을 염두에 둔 행보를 시작했고 2009년 2월 8일 대선 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하지만 대선 국면에서 개혁파 후보들이 또 다시 난립하려 하자 표 분산으로 아흐마디네자드가 어부지리로 재선에 성공할 가능성을 우려했고, 결국 3월 16일 개혁파의 미르호세인 무사비 전 총리를 지지한다고 선언하며 대선 레이스에서 중도 하차하였다. 그러나 선거 결과 아흐마디네자드가 1차 투표에서 62.63%를 득표해 2차 투표 없이 압승해버리면서 개혁파의 패배를 다시 지켜봐야 했다.
4년 뒤 2013년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다시 야권 개혁파의 대선주자 후보군으로 거론되었으나 하산 로하니 지지를 선언하면서 불출마를 공식화했다. 이 선거에서 로하니가 당선되어 8년 만에 개혁파로 정권이 교체되며 나름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옆나라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이 정권을 장악하자 여성과 소수민족들이 배제된 이번 탈레반 내각에 대해 비판했다.
2022년 이란 시위에는 반정부 시위대의 요구를 귀기울여 들으라고 촉구했다.#
5.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80 | 이란 국회의원 선거 | 비례대표 | [[전투 성직자 협회| 전투 성직자 협회 ]] | 32,942 (82.1%) | 당선 (1번) | 초선 |
1992 | 이란 국회의원 선거 | 자격 박탈 | ||||
1997 | 이란 대통령 선거 | 이란 | 20,078,187 (69.07%) | 당선 (1위) | 초선 | |
2001 | 이란 대통령 선거 | 21,656,476 (76.90%) | 재선 |
[1] 사담 후세인 시기 이라크와 이란이 서로 으르렁댔지만, 정작 둘 다 반미 국가였던지라,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이란 내에서 "이러다가 미국이 우리까지 침공하는 건 아니겠지?" 하는 괜한 우려를 낳았다. 다행이도 그런 일은 없었지만.[2] 이란의 정치 제도 자체가 보수 원칙파에게 유리하게 짜여 있다보니 보수파들은 "어차피 당선될 것"이라는 생각에 대개 후보를 따로 내는 반면, 개혁파들은 불리한 제도상 "혹시나 어부지리로라도 낙선할 것"을 우려해 대개 단일 후보를 낸다. 물론 "대개"라고 했지, "꼭"이라고는 안 했으며, 가령 2017년에는 총 후보 4명 중 개혁파와 보수파가 각각 2명이었다. 그나마 이 때는 하산 로하니 당시 대통령(개혁파)이 현직 프리미엄도 있었고, 상대편이 인지도가 영인 군소후보였으니 망정이었지, 2005년의 경우는 유력 후보들이 여럿 도전했으니 비교가 불가능하다.[3] 이란 헌법상 대통령직은 3연임이 금지되어 있을 뿐, 한 번 건너뛴 뒤 그 다음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는 '징검다리'식 임기 수행은 가능하다. 물론 이란 역사상 이러한 '징검다리' 대통령은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