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가운데의 인물.
莫那魯道(막나로도, Mona Rudao)
1880.5.21 ~ 1930.11.28
1. 개요
대만일치시기 대만 원주민 민족 중 하나인 세디크(Seediq)족의 우서(霧社) 지역 수장이자 독립운동가. 대만 최대의 항일 봉기 중 하나인 우서 사건을 주도하였다.이름인 모나 루다오의 '루다오'는 아버지 이름을 이어받은 것(부칭)으로 '아버지가 루다오인 모나' 정도의 의미가 된다.
2. 생애
세디크족은 대만일치시기 시작부터 대만 원주민 중에서도 항일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민족으로 일본 통치가 시작된 1895년부터 1910년에 이르기까지 일본 통치에 무력 저항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1910년에 일본에 항복하였다. 모나 루다오는 이 시기에 아버지로부터 수장 자리를 이어받았다.일본은 대만 원주민 수장들을 일본 본국으로 초청했고, 강력한 군대와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어 일본의 통치에 복종하도록 하는 수법을 자주 썼다. 1911년에 모나 루다오도 그렇게 초청되어 일본을 견학했다. 하지만 그는 일본에 반감을 품고 항일 봉기를 기획하다가 현지 당국에 들켜 그만두는 일을 반복했다. 한편 당시 대만 원주민 주거 지역의 경우 정식 행정관청이 들어서지 않는 대신 일본의 경찰이 파견되어 원주민 사회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세디크족의 경우 경찰과 원주민 사이의 갈등이 잦았다.
1930년 모나 루다오는 자신의 장남인 타도 모나의 결혼식을 열고 있었는데 마침 순찰을 돌고있었던 일본 경관 요시무라 카츠미(吉村勝美)에게 신랑이자 모나 루다오의 장남 타도 모나가 포도주를 따른 잔을 받길 권유했으나 요시무라는 야만인이 금수의 피로 더럽혀진 손으로 따르는 잔을 받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런데도 타도 모나가 계속 잔을 받길 권하자 참다못한 요시무라는 곤봉으로 그를 때렸고, 이내 싸움이 일어나 요시무라는 부상당했다. 그 다음 날 모나 루다오는 사과하기 위해 그에게 포도주를 바치려 하였으나 이것 또한 거절당했다.
이 사건으로 우서의 세디크족 사회가 동요했고, 모나 루다오는 구상만 했던 항일 봉기를 실현하기로 하였다. 1930년 10월 27일 우서 초등학교에는 육상 경기로 일본인들이 모여 있었는데, 모나 루다오가 보복을 위해 300여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이곳을 습격해서 134명의 일본인과 2명의 대만인을 살해했다. 이에 일본 측은 2,000명의 병력을 우서로 보내고 심지어 독가스가 주입된 산탄을 살포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 측에 붙은 일부 세디크 족에게 반란을 일으킨 나머지 세디크족에 대한 머리사냥을 허용하기도 하였다. 모나 루다오와 세디크 족도 11월 4일부터 1,200명의 전사를 조직해서 저항했으나 진압 끝에 세디크 족 중 644명이 죽었다.
모나 루다오 본인은 11월 28일에 일본군에게 붙잡히기 전에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의 시체는 1933년에야 발견되었고, 다이호쿠제국대학 고고학과에 경고성 의미로 전시되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3. 여담
2011년 우서 사건을 다룬 대만 영화인 세디크 발레(Seediq Bale)[1]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오우삼이 제작한 홍콩자본 합작의 영화로 러닝타임이 276분에 달한다.[1] 국내 개봉명은 워리어스 레인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