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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8 22:18:51

아이신기오로 먼터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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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신기오로 먼터무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ᠮᡝᠨᡨᡝᠮᡠ
파일:애신각라 먼터무.jpg
묘호 조조(肇祖)
시호 원황제(原皇帝)
아이신기오로 먼터무
(愛新覺羅 孟特穆, 애신각라 맹특목)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ᠮᡝᠨᡨᡝᠮᡠ
부친 동휘호
모후 야오거(也吾巨)
황후 원황후(原皇后)
생몰 1370년 ~ 1433년
재위 1405년 ~ 1433년[1]

1. 개요2. 생애3. 이성계와의 관계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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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건주 여진 오도리족의 추장.

오도리 만호부의 만호이자 초대 건주좌위지휘사로 누르하치의 6대조. 묘호는 조조(肇祖), 시호는 원황제(原皇帝). 한문 기록으로는 '먼터무'를 음차한 표기인 '맹특목(孟特穆)' 혹은 거기에 '도독(都督)'을 의미하는 '두두(Dudu)'를 합친 두두 먼터무의 음차인 도독맹특목(都督孟特穆)이나 두두의 1음절 음차로 중국에서 받은 성씨인 '동(童)'에 '먼터무'의 몽골식 이름인 '몽케테무르'('영원한 철')를 합친 호칭을 한자로 음차한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 등으로도 나타난다.[2]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아버지 이름이 동휘호(童揮護)[3]이고, 아들 이름은 아고(阿古)이며, 어허리(於虛里) · 어사가(於沙哥) 그리고 범찰(凡察)이라는 이름의 이복동생이 있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범찰의 생모는 첨이(僉伊) 관직의 보가(甫哥)라는 인물의 딸 야오거(也吾巨)인데, 처음에 휘후에게 시집가서 먼터무를 낳았고 휘후가 죽은 뒤에 휘후의 이복 동생인 용소(容紹) 관직의 포기(包奇)에게 시집가서 어허리 · 어사가 · 범찰 등을 낳았다고 나온다.[4]

2. 생애

시조였던 아이신기오로 부쿠리용숀의 첫 정착지는 삼성 하얼빈 동북쪽 쑹화 강 언덕이었다. 부쿠리용숀은 백두산 북쪽 오돌리으로 옮겨 살았고 국호를 만주라 하였다.[5] 원나라가 설치한 만호부 중 오돌리 만호부 만호직은 누르하치의 선조가 세습하였다.

먼터무는 몽골 제부족의 잦은 침략을 피해 훌리가이 만호부의 만호인 구룬 아하추와 함께 남하하였다. 아하추는 혼하 상류의 풍주에 거주하였고 먼터무는 더 남하하여 회령 지방에 거주 하였다. 먼터무는 백두산 북쪽인 허투알라에 거주했는데 세력을 크게 회복한 후 아구(阿古), 충샨(充善) 등의 자식을 얻었으며 남하해 와무허 지역에 거주했다. 당시 회령은 조선 영토에 편입되기 전이어서 여진족부락들이 있었던 무주공산 지역이었다.

용비어천가》는 이 시절 먼터무가 퉁두란과 함께 이성계의 부하 노릇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성계의 부하였던 여진 부족장들 중 먼터무가 필두로 올라와 있고, 퉁두란은 다섯 번째로 올라와 있다. 이성계 때 경성등처만호 직사에 임명되었고 토산물을 바치거나 물건을 하사받았으며 태종 때인 1404년에는 상호군에 임명되었다. 1405년명나라에서 회유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그대로 조선을 섬기기로 했다. 1411년에 풍주로 가서 훌리가이부와 합류하고 1412년에 명나라에 귀부했으며, 건주좌위지휘사에 임명되고 동(童)씨 성을 하사받았다.

이때문에 태종이 여진과의 무역을 중지하고 모린위를 공격하자 먼터무는 경원을 약탈했으며 결국 조선과의 전투 끝에 화의를 요청해 전쟁을 멈췄다. 1411년에 조선의 공격을 우려해 개원로 봉주로 옮기다가 1423년에 여진족 내부 갈등이 일어나자 조선에 요청해 회령으로 돌아왔으며 1431년에 아들을 보내 볼모로 삼으라 했지만 먼터무가 명의 관직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세종이 거절했다.

1433년 2월에 명 조정으로부터 우도독에 임명되었다가 양무타우를 수령으로 한 칠성 야인의 난이 일어나면서 알목하가 침략당하자 살해당했다.

3. 이성계와의 관계

조선왕조실록용비어천가에서 이성계의 휘하 여진 26부족들 족장들 중 하나로 이름이 언급되고 병력동원 운운하는 것을 볼 때 이지란과 마찬가지로 이성계 휘하 여진족 부족장들 중에 하나로 보인다. 먼터무에 대한 기록도 후손인 누르하치가 남긴 기록보다 이쪽의 기록이 더 상세해서 아버지, 아들, 동생 이름도 여기서 나온다.

이성계는 동북면의 함경도 출신이었지만 그의 영향권은 압록강 인근의 만주와 연해주까지 닿았다고 한다. 북만주에서 지내던 여진 부족장은 이성계와 함께 있던 시절에는 압록강 인근까지 내려왔기 때문에 일단 압록강~두만강 인근 만주와 연해주 일대는 그의 영향권이었다. 기록을 보면 그는 스스로 젊을 때 이성계 어르신을 섬겼다 말했으며 이성계가 고려에서 활동하던 시절 여진 부족들을 동원해 전쟁할 당시 종군하거나 파병했다고 한다.

이성계를 따랐던 이유는 젊은 시절 그와 그의 가족들의 생계가 어려웠을 당시 이성계가 생필품과 거주지를 주면서 살림살이를 도왔기 때문이라고 하며 그 때문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이후 조상의 제사 때문에 동북면에 들르면 찾아와서 만났는데 이건 다른 이성계 휘하의 여진족 추장들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먼터무도 한양에 들른 적이 있다.

이성계를 따르던 족장들은 이성계 사후 태종, 세종 대부터 조선과 마찰을 빚었는데 이성계 말년 여진족들이 이성계 어르신 있던 시절에는 좋았다고 한탄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진족 또한 유목부족으로서 혈통주의가 무척 강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성계가 이들에게 많은 지원을 해 준 '큰 손'이라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성계의 아들인 태종 시절부터 극도로 사이가 험악해졌고 손자인 세종은 최윤덕을 시켜 먼터무를 암살하려는 시도까지 했다고 한다. 이성계가 조선 건국 이후 그들을 관리하기는 했고 조선 초기 혼란 때문에 이전처럼 살뜰히 챙겨주기가 어려워져서 이지란을 보내가면서 위로했다고 한다. 그래도 이성계가 이방과에게 양위하고 함흥에 있던 시절에는 직접 감독해서 좀 나았던 모양이지만 이성계 사후는 완전히 틀어졌다.

먼터무뿐만 아니라 이성계의 부하였던 여진 추장 아합출의 손자 이만주는 세종 시기~세조 시기까지 조선의 골칫덩어리로 나오는 등 조선 초중기 힘 있던 여진 부족장 중 이성계와 연이 안 닿는 사람이 없었다.

단종 2년(1454년), 여진족[6]들이 토산물을 바치러 왔다가 같이 사냥에 나섰는데 이 광경을 보며 이들은 "우리들은 태상왕(太上王)께서 다시 나오신 줄 알고 내알(來謁)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때가 이성계가 죽은지 5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시점이었다.[7]

4. 여담


[1] 건주 여진 추장 재위 기간[2] 용비어천가에는 중세 한국어로 '갸온멍거터물(夾溫猛哥帖木兒:협온맹가첩목아)'이라고 표기되어 있다.[3] 휘후(揮厚)라고도 쓴다. 동은 성씨이다.[4] 이 기록은 청의 사서에서도 나오지 않는데 왜 조선의 기록에 나오는지는 하단에 후술한다.[5] 조상의 원수의 자손 40여 명을 계략을 써서 오타리 서쪽에서 1500여 리 정도 떨어진 소소하 훌란하다 산 아래의 허투알라로 유인해 절반은 죽이고 절반은 생포해 원수를 갚았으며 생포한 자는 몸값을 받고 풀어주었다.[6] 실록에는 동속로첩목아(童速魯帖木兒)와 낭발아한(浪孛兒罕)·이귀야(李貴也) 등으로 기록되었다.[7] 단종실록 단종 2년 12월 17일 1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