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23:02:04

만귀비



1. 개요2. 생애
2.1. 궁녀에서 후궁이 되다2.2. 총애를 믿고 저지른 악행2.3. 죽음
3. 여담4.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성화제가 가장 총애하기로 유명한 후궁. 본명은 만정아(萬貞兒)지만, 흔히 만귀비로 불린다.(1430~1487)

중국 역사상 가장 권력이 강했던 후궁중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시호는 공숙단신영정황귀비(恭肅端愼榮靖皇貴妃)이다.

2. 생애

2.1. 궁녀에서 후궁이 되다

만정아는 산동성 제성[1] 출신으로 죄를 지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4살 때 입궁하여 궁궐에서 자랐다고 한다.물론, 정확한 기록이 없어 확인이 필요하지만..[2] 이렇게 입궁한 만정아는 성화제의 조모 손태후의 시녀로 생활하다가, 동궁의 궁녀로 선발되어 태자 주견심(훗날의 성화제)을 모시게 되었다. 당시 주견심의 생모 주귀비가 생존해 있었지만 황궁의 엄격한 법도는 모자지간의 자유로운 만남과 감정 교류의 장애가 되었고, 이런 엄격한 법도와 어색한 모자 관계 때문에 주견심은 매일 동궁에서 시중을 드는 만정아에게 야릇한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이에 만정아도 태자의 적극적인 구애에 은밀히 화답했다

성화제는 자신보다 무려 19세 연상의 황귀비인 그녀를 총애했다.[3] 당대의 사회상을 생각하면 거의 모자 관계 수준의 나이 차이였고, 실제로 만정아는 성화제를 열 살 때부터 모신 유모 같은 여인이었다.[4]

만정아는 훗날 황위를 이을 태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신분 상승은 말할 것도 없고, 권력과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만정아는 몸이 뚱뚱하여 태자를 홀릴만한 미색을 갖춘 여자는 아니었지만, 눈치가 빠르고 태자의 비위를 맞추는데 탁월했다고 한다. 결국 이런 만정아의 계략과 태자의 구애가 통하면서 두 사람은 연인관계로 발전했다. 이윽고 마침내 만정아가 오랫동안 공을 들인 연인 주견심이 황위를 계승하여 성화제가 되었다. 일종의 모자 관계 같은 것이 자라면서 애정 관계로 변한 것이라 볼 수 있을 듯.

2.2. 총애를 믿고 저지른 악행

성화제가 만정아를 얼마나 각별히 총애했는지 신분도 낮고 궁녀 출신인 그녀를 황후로 만들려고 온갖 애를 썼을 정도였다. 하지만 신하들과 태후의 반대로 실패해 결국 오씨 성의 여인을 황후로 삼았다. 대신, 만정아는 후궁의 작위 중 가장 높고 존귀한 귀비로 책봉되었다. 이때부터 만귀비로 불리기 시작했다. 비록 만귀비는 정실 황후보다 아래인 후궁이었지만, 성화제의 총애가 대단했기에 자연스럽게 황궁 내 실세가 되었다. 만귀비의 권세가 어느 정도였냐면 황제의 아내이자, 내명부의 수장이자, 후궁의 엄연한 주인인 황후 앞에서도 대놓고 싸가지없이 굴었을 정도였다. 결국 이에 빡친 황후 오씨가 만귀비에게 군기 교육을 시도했지만 오히려 소식을 듣고 분노한 성화제에게 주저없이 폐위당하기까지 했다.[5] 이후 새로 들인 계후 왕씨는 선임의 사례로 배운 게 있었는지, 무려 황후임에도 불구하고 후궁인 만귀비에게 설설 기었다.

만귀비에게 잘 보여 팔자를 고친 대표적인 사람이 내각의 대학사 만안이다. 만귀비에게 총애를 받는 환관을 매수하여 그녀에게 뇌물 공세를 폈다. 본인의 성씨가 만귀비와 같은 만씨인지라 스스로 그녀의 조카뻘이 된다고 말하며 그녀에게 굽실거렸다.

아무리 대학사보다 귀비의 품계가 더 높다지만 명색이 조정 중신에 해당하는 대학사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한낱 후궁에게 아부하는 광경이 낯뜨거웠지만, 만귀비로서는 조정에 자기 심복을 심어 국사에 관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만안이 만귀비의 친척이라고 주장했지만 사실 두 사람은 성씨만 같을 뿐 친척이 아니었다. 만귀비는 산동성 제성, 만안은 사천성 미주 출신이다. 지금도 산둥성과 쓰촨성은 서로 왕래하기에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곳이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저 만귀비와의 교류를 위한 내세울만한 핑계였을 뿐이다. 만안은 만귀비 일가와 보다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만귀비의 남동생 만통과 친교를 쌓았다. 당시 만통은 금의위지휘로서 황궁의 보위를 책임지고 있는 실권자였다. 만통의 아내 왕씨에게는 어려서 남의 손에 자란 배다른 여동생이 있었다. 만안은 그녀에게 눈독을 들였고 능수능란한 수완을 부려 그녀를 첩으로 맞이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비로소 만귀비 일가의 확실한 구성원이 되었다. 사람들은 만안을 만세각로라고 부르며 비야냥거렸다. 황제의 면전에서 툭하면 만세를 부르는 내각 대학사란 뜻이다.

만귀비는 자신이 낳은 아들이 요절하자[6] 그 슬픔을 후궁들과 궁녀들에게 온갖 패악질을 부리는 것으로 해소했다. 성화제의 다른 후궁이 임신하면 기어이 낙태시키고야 말았다. 가까스로 태어난 첫 번째 황태자 주우극은 모친 현비 백씨와 함께 독살당했다. 이 때문에 성화제는 말년까지도 후사가 없었고, 환관이 숨겨서 기른 주우탱이 나타나 겨우 후사를 이을 수 있었다.[7][8] 한편 후사에 고민하던 성화제는 주우탱의 존재를 알고 서둘러 황태자로 책봉했지만 만귀비가 주우탱이 태아 시절부터 낙태시키려는 걸 알고도 묵인했다. 그걸 믿고 만귀비는 무려 황태자가 된 주우탱마저 죽이려고 들었으나 태후가 맡아 기르는 바람에 실패했다.

2.3. 죽음

황제마저 자기 손아귀에 넣고 조정의 대사를 마음대로 주무른 만귀비는 태자 폐위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크게 낙담했으며, 무엇보다 그녀도 환갑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기력이 급격하게 쇠잔해져 더 이상 태자를 해치기가 힘들어졌다. 그리고 성화 23년 울화병에 시달리다가 그 길로 58세에 사망했다. 성화제는 이를 슬퍼한 나머지 "만귀비가 저승으로 떠났으니 내가 살아 뭐하겠소" 라는 무책임한 발언을 남기며 시름시름 앓다 결국 같은 해에 죽고야 말았다.[9]

만귀비를 향한 성화제의 사랑이 매우 깊었다는 건 그녀가 회임한 다른 후궁을 향한 낙태 시도를 일삼고 첫 번째 황태자 주우극과 그의 모친 현비 백씨까지 독살한 걸로도 모자라, 이후 겨우 본 후사였던 주우탱과 그의 모친 궁녀 기씨까지 독살하려고 시도했음에도 결코 만귀비를 폐위시키거나 처벌시키지 않고 눈감아줬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이유에서든지 군주의 후사를 위협하는 시도를 했다가 끔살당한 이들이 수두룩하다는 걸 생각해보면 성화제가 만귀비를 그냥 봐준 수준이 아니라 모든 걸 용서한 것이다. 이 정도 행각이면 만귀비는 다음 황제인 주우탱에게 삼족이 멸문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주우탱은 자신은 물론 자신의 친모마저 만귀비에게 여러 번 해코지를 당한 전적이 있다. 그러나 대인배인 주우탱은 아버지 성화제를 생각해 만귀비에 관한 일을 불문에 처했고, 자신은 아버지와 달리 후궁을 두지 않고 황후에게만 충실하며 내명부에 별다른 분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3. 여담

지금이야 19살 차이의 연하남이 고백한다면 영화 같은 내용이라고 생각하지만, 당시로서는 모자간의 나이 차이에 유모 같은 여인을 부인으로 삼는다고 하니 패륜이라고 욕한 사람도 있었다.

황제의 남다른 총애를 받은 후궁인 그녀를 두고 디안 드 푸아티에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서로의 삶도 악행도 아예 다르다.

4. 대중매체에서

2001년 드라마 개대환희에 조연으로 등장한다.

2011년 영화 용문비갑에서 만귀비[10]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황제의 총애를 받아 권세를 휘두르며, 서창의 수장 우화전을 부려 황제의 성은을 입은 여자들을 모조리 죽이는 등 패악질을 부린다. 그간의 업보인지 영화 종반에 독살 당한다.

2011년 드라마 후궁에 조연으로 등장한다.

2015년 드라마 의관소전에 조연으로 등장한다.

2015년 드라마 도하유인에 조연으로 등장한다.

2020년 드라마 성화14년에 조연으로 등장한다.

2023년 드라마 정호우견니는 현대극이지만 역사다큐를 제작하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는데 극중 역사다큐에서 리샤오란이 만귀비를 맡았다.

2023년 영화 과산방에 조연으로 등장한다.
[1] 지금의 산둥성 웨이팡 시 산하 주청 시.[2] 확인이 필요하다. 명사 후비전에는 성화제의 또 다른 승은 후궁인 효혜황후 소씨의 경우 '집안이 가난하여 궁녀로 보내졌다'라고 입궁 경위가 적시된 반면, 만귀비의 경우에는 그러한 입궁 경위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3] 출생 연도가 한국어 위키백과와 영어 위키백과에는 1428년으로, 중국어 위키백과와 바이두백과에는 1430년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1428년생이라면 성화제보다 19세 연상이고 1430년생이라면 17세 연상이 된다. 명사 후비전에는 '헌종이 16세에 즉위하였고 만귀비는 이미 35세'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성화제의 즉위 당시 나이는 만나이로 셌을 경우 16세가 되기 때문에 두 사람의 나이를 모두 만나이로 기록한 것이라면 1428년생이 맞다. 만약 만귀비의 나이를 세는 나이로 기록했다면 1430년이 되기는 하는데, 같은 기록에서 동시대의 인물을 나이 세는 방법을 다르게 적용해서 나이를 기록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려우므로 명사 후비전의 기록을 그대로 신뢰한다면 만귀비는 1428년생이 맞다.[4] 성화제의 모후인 효숙황후 주씨는 1430년생, 만귀비는 1428년생이므로 실제로 만귀비는 성화제의 어머니보다 나이가 2살 많다. 주우원의 모후인 효혜황후 소씨도 성화제보다 12살 연상이라는 정보가 있는 것을 보면,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연상의 여인이 취향이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단, 소씨가 1435년생이라는 정보는 한국어 위키백과에만 기재되어 있고 바이두백과에는 소씨의 출생 연도를 모른다고 쓰여 있으므로 검증이 필요하다.[5] 그것도 황후가 된 지 한 달 만에 쫓겨났다.[6] 참고로 이때 만귀비의 나이는 48세였기에 아이를 더 갖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이 시점부터 만귀비를 통해 후사를 얻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었으므로, 당시로서는 성화제가 만귀비를 제지하고 황후든 다른 후궁이든 아들을 낳게 했어야 했다. 그러나 성화제는 여러 궁녀들을 취하긴 했어도, 하룻밤 상대로만 취한 다음 바로 내팽겨치고, 만귀비가 그런 궁녀들을 낙태까지 시키는 걸 알고도 챙기기는 커녕 모른 척 묵인하고, 주우탱이 나타날 때까지 후사에 전전긍긍하기만 할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다.[7] 홍치제의 어머니 기씨는 소수민족 수령의 딸로 아버지가 토벌당하면서 죄인으로 끌려와 서적을 관리하는 곳에서 일했다. 그러다 성화제의 눈에 띄어 하룻밤 상대가 됐었는데, 이때 홍치제를 임신한 것. 그녀에게도 낙태약을 내리는 궁녀가 찾아갔으나 낙태약 내리는 궁녀가 동정심을 발휘했는지 약을 덜 줘서 다행히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고.[8] 참고로 홍치제가 나타난 이후로는 만귀비도 포기한 건지 몰라도 성화제는 다른 후궁들에게서도 여러 아들을 뒀다. 만귀비가 낳은 요절한 장남과 독살당한 주우극을 포함하여 14명의 아들을 두었고 그 중에서 11명이 성인으로 성장했으며, 딸은 6명이 태어나 그 중에서 4명이 성인으로 성장했다. 실제로 성화제는 명 황제 중 홍무제에 이어 2번째로 많은 아들을 두었다. 어쨌든 홍치제가 태어나서부터야 겨우 후사 걱정을 한시름 놓은 건 사실이다.[9] 이때 만귀비에게 숙부인 경태제가 만들었다가 아버지인 정통제가 없앤 황귀비 작위를 추서하고 공숙단순영전(恭肅端順榮靖)의 시호를 내렸다.[10] 장신위(张馨予)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