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 반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5C337, #F5C337 20%, #F5C337 80%, #F5C337); color:#white;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보리치 | 쿨린 | 스테판 쿨리니치 | 마테이 니노슬라프 | 프리예즈다 1세 |
프리예즈다 2세 | 스테판 1세 코트로마니치 | 믈라덴 1세 수비치 | 믈라덴 2세 수비치 | 스테판 2세 코트로마니치 | |
트브르트코 1세 | 부크 코트로마니치 | 트브르트코 1세 | }}}}}}}}} |
<colbgcolor=#F5C337><colcolor=#6D7585> 보스니아 제4대 반 {{{#fff {{{+1 마테이 니노슬라프}}} }}} {{{#fff Matej Ninoslav}}} | |
출생 | 미상 |
사망 | 1250년 (향년 불명) |
재위 | 보스니아 반 |
1232년 ~ 1250년 |
[clearfix]
1. 개요
기록상에 등장하는 보스니아 반샤그 제4대 반(Ban).2. 행적
반이 되기 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1232년 보스니아의 보고밀파 신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스테판 쿨리니치를 쫓아낸 뒤 보스니아의 새 반이 되었다. 이로 인해 보스니아에 대한 교황청의 반감이 강화되었다. 1234년,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2세는 보스니아 반샤그의 지배권을 슬라보니아와 크로아티아 공작을 역임 중이던 칼만에게 넘기기로 했다. 여기에 스테판 쿨리니치의 아들인 우소라 공 시비슬라프는 보스니아를 스스로 차지하기 위해 보스니아 변경지역을 침략했다. 1234년 10월 17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보스니아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했고, 1235년 8월 9일 칼만을 보스니아의 합법적인 반으로 인정했다.마테이는 임박한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1232년과 1235년 사이에 라구사 공화국에 칙령을 내려 쿨린이 지난날 라구사에 수여한 특권을 보장했다. 또한 1240년 3월 22일 라구사에 칙령을 재발행해,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블라디슬라프가 라구사를 침공할 경우 자신이 라구사의 독립을 보장할 것이며, 라구사 역시 자신을 도와야 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반포했다. 이 칙령은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우로시 1세의 재위 기간인 1249년 3월에 재발행되었다.
보스니아 십자군은 1235년부터 작전을 개시했다. 보스니아 전역을 지배하던 보고밀파 신도들은 마테이의 지휘하에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칼만이 이끄는 십자군이 계속 몰아붙인 끝에 1238년경에 보스니아 동부를 휩쓸었다. 마테이는 통행이 거의 불가능한 산악 지형과 원시림이 펼쳐진 보스니아 서부로 피신했고, 칼만은 그해 4월 26일 교황에게 보고밀파를 파괴해 보스니아가 정화되었다고 보고했다. 그 후 십자군은 칼만의 지휘하에 보스니아 서부를 매번 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지만, 보고밀파 신도들의 유격전에 휘말려 큰 피해를 입었다. 마테이는 1240년 십자군을 피해 일전에 우군으로 삼았던 라구사로 피신한 뒤 그곳에서 상황을 살폈다.
1241년, 몽골 제국군이 헝가리를 침공했다. 칼만은 이에 맞서 항전했지만 모히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후 헝가리는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파괴되었고, 마테이는 그 틈에 보스니아 대부분을 탈환한 뒤 가톨릭 신자들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이후 트로기르와 스플리트 사이의 전쟁이 벌어지자, 헝가리 국왕 벨러 4세에게 반기를 든 스플리트 편을 들었고, 그들로부터 새로운 군주로 추대되었다. 1244년, 벨러 4세에게 충성을 바치는 슬라보니아 반 데니스 투르제가 지휘하는 군대가 스플리트를 공략했고, 또다른 헝가리군이 벨러 4세의 지휘하에 보스니아의 글라스코 시로 진군했다. 하지만 보스니아인들의 저항이 격렬해 공략할 가망이 없자, 1244년 7월 21일 글라스코에서 마테이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마테이는 헝가리의 통치를 명목상으로만 인정하고 자신의 소유물을 슬라보니아에 둘 수 있었다. 다만 가톨릭 교회의 조직과 인프라를 인정하고 유지해야 했으며, 가톨릭 신자들의 권리를 보장하기로 했다.
1247년, 벨러 4세와 헝가리 대주교는 새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게 보고밀파의 위세가 여전히 강성한 보스니아에 대한 새로운 십자군을 개시하라고 주장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마테이는 인노첸시오 4세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은 항상 확고한 가톨릭 신자로 남을 것이며, 이단자는 절대로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는 그 직후 보스니아를 방문한 교황 특사에 의해 확인되었다. 교황은 1248년에 가톨릭 대주교에게 편지를 써서 니노슬라프가 고귀한 사람이고 가톨릭 신앙에 충성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며, 십자군을 일으키지 않을 테니 보고밀파 신자들이 가톨릭으로 회심하도록 잘 설득하라고 권고했다. 1250년에 자연사했고, 사촌인 프리예즈다 1세가 헝가리 국왕 벨러 4세의 지원에 힘입어 보스니아의 새 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