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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8-06-11 20:01:55

마이클 잭슨/2차 아동 성추행 혐의와 무죄

2003년 2월 3일에는 영국의 기자 마틴 배셔가 마이클을 240일 동행하며 찍은 'Living With Michael Jackson' 프로그램이 ITV 방송국을 통해 최초 방영되며 큰 파장을 몰고 왔다. 프로그램 속의 마이클이 지나치게 수줍어하며 유아같이 행동했고 일반 사람들의 상식과는 굉장히 동떨어진 말을 했기 때문이다. 마이클 측에서는 마틴이 악의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편집한 것이라며 즉각적으로 성명을 발표하고 FOX와 자체적으로 따로 프로그램을 제작해 반박 방영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틴에게 보여준 마이클의 모습은 이상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이클 측의 성명에 공감하지 못했다. 리사 마리 프레슬리는 이 프로그램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그 프로그램 속에 마이클은 내가 알던 마이클이 아니다. 실제 마이클은 그 프로그램에서 방영된 모습과는 무척 다르다. 아마도 그 프로그램이 찍힌 시기에 마이클은 약물에 심하게 중독된 것 같다. 그래서 인터뷰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준 것 같다. 또 마틴 배셔가 악의적으로 편집을 했을 것이다." 2월 6일에는 미국에서 방영됐고 그리고 이 날 1993년 아동 성추행 혐의에 대한 합의 문건이 유출되며 다시 마이클에 대한 혐의 여부가 미디어를 통해 불이 타올랐다.

제일 문제가 된 것은 프로그램 후반부 장면에 '개빈 아르비조'라는 소년과 함께 한 것으로 마이클과 개빈은 친밀했으며 마이클은 한 방에서 같이 잤다고 말했다.(한 방에서 같이 잤다는 것을 뒤에서 상세하게 다뤘다.) 기자가 왜 40살 가까이 남자가 소년과 자냐고 의문을 제기했고 "아이들과 자는 게 왜 이상한가? 그것을 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닌가"라며 항변했다. 맥컬리 컬킨의 아버지는 마이클의 침실에 대해 말하길 그곳은 언제나 개방적이고 열려있는 곳으로 누구든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소년들 뿐 아니라 다 큰 성인들도 잘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아동 성추행 혐의 재판을 몰고오는 원인이 됐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는 2009년 온스타일이 수입하여 마이클 잭슨의 잔인한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방영했는 데 개빈과의 만남은 나오지 않는다. 재판이라는 법적 문제가 있어서 삭제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튜브에 가면 개빈이 나오는 장면을 실컷 볼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을 본 일부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은 마이클과 개빈의 관계가 부적절 해 보인다며 산타 바버라의 어린이 보호당국과 LA의 아동복지국에 자체적으로 조사에 착수해야 한다고 서신을 보냈다. 결국 산타 바버라 보안관 부서와 아동복지국은 비밀리에 조사에 착수했다. 이들은 개빈과 그의 가족들과 접촉하여 마이클과 어떤 관계인지 물었다. 개빈은 결코 마이클과 성적인 행위 같은 건 없었다고 말했으며, 개빈의 어머니인 '재닛 아르비조'는 마이클은 우리들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이며 다정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며 눈물을 흘렸고, 개빈의 누나 '데블린'은 마이클은 우리에게 축복이나 마찬가지였다며 울었다. 개빈의 아버지인 '데이비드 아비조'는 마이클 덕분에 자신의 아이들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동복지국은 이 같은 조사 결과와 함께 모든 가능성을 검토한 후 성추행 혐의가 없음을 밝히면서 사건을 종결했다. LA의 경찰당국과 산타바버라 카운티 보안국 또한 마이클에게는 혐의가 없다며 사건을 공식적으로 종결했다. 그러나 훗날 이번 사건으로 마이클을 기소한 검사인 톰 스네던은 아동복지국과 경찰당국의 조사 결과를 엉터리라며 무시하고 은폐했다. 심지어 '톰 스네던'[1] 검사는 개빈 가족들과 인터뷰를 하지도 않았다. 또한 톰 스네던 검사는 마이클을 'Wacko Jacko'라고 공개적으로 발언했는 데 왁코 잭코는 마이클 잭슨을 경멸하는 단어의 비하 용어로 스네던은 사건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시종일간 미소를 보였다. 공격적인 조사 방식도 유명해서 Mad Dog(미친 개)라는 별명을 가졌다고 한다. 2003년 언론에서는 스네던이 마이클 잭슨에게 개인적인 악감정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추측했었다.

그렇다면 1993년 혐의를 설명할 때 처럼 먼저 아르비조 가족들에 대한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개빈 아르비조는 신장과 비장에 영향을 끼치는 암에 걸린 소년으로 2000년 여름 병원에서는 신장과 비장 중 하나를 제거하며 화학 요법을 시작했다. 개빈은 코미디언들의 열렬 팬이었고 코미디언 Jamie Masada가 소유한 할리우드의 코미디 클럽인 Laugh Factory에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왔다. 개빈은 거기서 연예인도 포함된 가족들과 사귀었고 그 중 한명은 개빈이 투병 생활을 하고 있는 병원에 방문했었다. 딱한 개빈의 사정을 안 친구는 개빈이 특정 연예인을 만나고 싶다고 3명을 썼는데 그 3번 째가 마이클이었다. 그 요청을 받은 Masada는 자신들의 인맥을 통해 개빈의 요구를 마이클에게 알려줄 수 있었고 마이클은 병원에 20번 정도 방문했으며 개빈과 그 가족들이 네버랜드에 와도 된다고 말했다. 2000년 8월 가족 전체가 네버랜드를 방문했다. 그리고 첫 방문에서 개빈과 마이클은 한 방에서 잤다. 그렇다면 어떻게 잠을 잤는가? 그 방에는 개빈과 마이클만 있던 게 아니었다. 개빈의 동생 스타 아르비조, 그리고 마이클의 자녀들인 프린스와 패리스 또 성인 친구인 프랭크 카시오. 성인인 마이클과 카시오는 바닥에서 어린 아이들은 침대에서 잤었다. 그렇다면 개빈은 왜 마이클과 한 방에서 같이 잤는가? 그 아이들은 엄마가 괜찮다고 했다며 마이클의 침대에서 잠을 자고 싶다고 애원했다. 또한 그들의 어머니인 자넷 아르비조도 괜찮다고 발언했고 마이클은 이 일로 그녀가 아이들을 내게 밀고 있는 것 같다고 친구에게 우려를 표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틴 배셔는 마이클과 개빈이 같이 잠을 잤다는 사실을 전후 맥락 없이 마이클과 개빈이 침실에서 단 둘이서만 잤다는 식으로 묘사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 때문이었을까? 2005년 개빈은 재판에서 증언할 때 마틴 배셔의 다큐멘터리가 촬영된 2002년 9월까지 마이클은 그들 가족과 별로 접촉하지 않았었다고 말했다.(마틴 배셔는 마이클이 암에 걸린 소년들을 도와준다는 것을 촬영하고 싶었고 그래서 마이클이 개빈을 불러 촬영한 것 같다.) 그들은 네버랜드에 가기 위한 허락을 받았고 가족들은 7~10번 방문했는 데 마이클은 거의 없었고 있었을 때는 아르비조 가족들을 의도적으로 피했다는 것이다. 또 개빈의 화학 요법 치료가 4회정도 시행됐을 때 마이클은 전화 번호를 바꿨는데 이를 알리지 않아 개빈은 화를 냈고 산타 바버라 보안관에게 진술할 때는 마틴 배셔 사건이 있기 전까지 마이클을 보지 못했다고 불평했다. 더 구체적으로 마이클이 자신을,가족을 버린 것 같다고 마이클과 접촉을 잃지 않기 위해 아르비조 가족들은 편지와 카드를 보내기 시작한다. 2000년 10월 마이클은 아르비조 가족들에게 흰 색의 밴을 선물한다. (마이클은 자신들의 지인들에게 항상 값비싼 선물을 했었다.) 그리고 개빈을 위한 혈액 공급을 위해 네버랜드에 있는 모든 직원들이 혈액을 기부하도록 조치했었다. 2001년 여름 마이클이 선물한 밴이 고장나 마이클에게 돌려보내지고 그 이후 마이클은 아르비조 가족에게 그 어떤 선물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2001년 9월 24일 아르비조 가족들은 JC 페니 백화점에게서 합의금을 받았다. 무슨 일인가? 1998년 8월 개빈 가족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J.C 페니 백화점에서 절도 혐의로 구금된 적이 있다. 구금에서 풀려난 뒤 개빈의 어머니인 재닛은 백화점을 상대로 경찰에게 폭행을 당했다며 300만 달러의 민사소송을 걸었다. 백화점 측에서 고용한 정신과 의사는 재닛이 정신분열증과 망상증을 앓고 있다며 진단했다. 재닛을 직접 치료했던 다른 의사는 그녀는 불안장애우울증을 앓고 있지만 망상증은 없었다고 했다. 재닛은 2년 후 백화점을 상대로 구금 당시에 경찰들에게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며 또 다시 민사소송을 걸었다. 백화점 사건은 13만 달러의 합의금을 주고 종결된다. 이후 백화점 측을 변호했던 톰 그리핀 변호사는 개빈 가족이 마이클을 고소 한 것에 대해서 "재닛은 끔찍한 이야기를 지어내서 아무 생각 없이 주위에 지껄이는 경향이 있고 이번에는 아예 홈런을 치려는 작정인 것 같다며 이를 갈취사건 제2부"라고 의견을 표했다.

2002년 봄 아르비조 가족들은 며칠 동안 네버랜드에 있었는데 마이클의 친구였던 'Christ Tucker'와 함께 보냈다고 한다. 마이클은 그 곳에 없었다. 9월에는 앞에서 말한 마틴 배셔의 촬영을 위해 마이클도 있었고 2003년 2월에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마이클이 이미지의 타격을 입자 아르비조 가족들은 마이클을 지원하기 위해 마이애미에서 마이클 측과 기자회견을 하려고 했고 'Christ Tucker''도 참여했었다. 근데 기자회견은 취소됐고 2월 7일 마이클과 아르비족 가족들은 마이애미에서 비행기로 타고 네버랜드로 돌아왔으며 아르비조 가족은 3월 12일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리고 2003년 2월 7일부터 3월 12일까지가 아르비조 가족들이 아동 성추행 혐의를 만든 중요한 시기이다. 아르비조는 2003년 2월 7일부터 마이클이 개빈을 성추행 했다고 주장했었으며 이는 2003년 12월 18일 검찰의 초기 고발문에도 잘 나타난다. 그리고 2월 7일 비행기를 타고 LA로 돌아올 때 마이클이 잠자는 개빈의 머리를 핥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넷 아르비조는 그것을 목격했다고 주장한다. 앞에서 말했듯 2월 3일과 2월 6일은 프로그램 방송으로 마이클 측에서 난리가 났을 때였고 마이클은 Fox와 'Michael Jackson, Take Two: The Footage You Were Never Meant To See'라는 반박 프로그램 제작을 준비했을 때였다. 그리고 2월 20일 아르비조 가족들은 그 프로그램을 위해 촬영을 했고 그들은 마이클을 굉장히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며 마틴 배셔의 촬영 방식이 불쾌하다고 언급했었다. 그리고 같은 날 아동복지국도 방문하여 그들을 조사했으며 마이클과 그 어떠한 부적절한 관계도 없다고 말했다. 참고로 그때 촬영된 비디오는 지금도 유튜브에 업로드 돼 있으며 훗날 수사 중 Moslehi's의 집을 수색할 때 검찰에 의해 발견됐다.

여기서 굉장한 의문이 몇 가지가 있다. 아르비조 가족의 주장이라면 마이클은 2000년과 2003년 2월 6일까지 성추행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왜 프로그램 방송으로 마이클이 소아성애자라는 여론이 들끓었을 때인 2월 7일 갑자기 왜 그는 성추행을 시작했다는 것인가? 더군다나 아르비조 가족들과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회피했던 사람인데 그리고 아르비조는 2월 7일 핥은 것을 보고도 왜 네버랜드에서 마이클과 같이 지내며 방송 촬영이나 아동복지국과의 조사에서 웃고 떠들면서 마이클을 기쁘게 칭찬했는가 그리고 왜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는가? 결국 이야기를 바꿔야 했다. 2월 7일이 아닌 2월 20일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아르비조 가족들은 전체 이야기를 바꾼다.

또 마이클이 협박을 했고 납치를 해서 우리는 네버랜드에 억류됐고 아르비조 가족은 마이클을 무서워했고 그래서 촬영에서 거짓말을 했다고, 그러나 개빈은 2005년 재판의 증언에서 반박 비디오를 촬영했을 때 마이클이 여전히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며 네버랜드를 좋아했고 거기 있던 모든 시간이 행복했었다고 증언하는 모순되는 발언을 했다. 그런데 재판에서 나온 또 다른 흥미로운 정보가 있다. 이 기간 동안 마이클과 아르비조는 거의 같은 시간,같은 장소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2월 25일~3월 2일까지는 아르비조는 네버랜드가 아닌 Calabasas에 있는 호텔에 머물렀으며 3월 초 마이클은 Kenneth Morgan이라는 익명을 쓰며 다른 호텔에 적어도 3월 7~8일까지 머물렀다는 것인데 3월 6일에는 네버랜드에 아르비조가 있었다. 또한 전화 기록을 바탕으로 하면 2월 20일 마이클은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의 턴 베리 아일 리조트에 있었으며 Azja Pryor도 마이클이 2월 20일 네버랜드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또한 협박과 납치와는 동떨어져 있는 행동을 했다. 2월 21일 자녀들이 네버랜드로 돌아가는 동안 자넷 아르비조는 민사 사건 변호사 William Dickerman을 만났고 2월 25일 다시 만났다. 이 방문 중 어느 한번도 자넷은 변호사에게 네버랜드에서 납치되었다는 발언은 물론 성추행에 대한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자넷은 Dickerman을 만난 이유를 프로그램에서 자녀의 초상과 사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만났다고 한다. 2월 25일~3월 2일까지 아르비조 가족은 몇 차례 쇼핑도 했으며 2~3월 동안 개빈과 스타의 치아 문제로 치과 의사를 만나기도 했다. 또한 2월 25일 개빈은 아까 마이클과의 만남을 주선한 Masada를 만나기도 했다. 3월 11일에는 자넷은 폭력 때문에 헤어진 남편 데이브 아르비조와의 아동 양육권 문제로 법원에 출두했고 변호사인 Michael Manning도 동행했다. 아르비조 가족들은 법원,변호사,의사,친구 및 상점 직원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말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는데 그들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납치된 사람들이 그리 자유롭게 넘나들며 심지어 변호사까지 만날 수 있다는 말일까? 또한 3월 1일 아르비조는 브라질로 휴가를 떠날 계획을 잡았다. Azja Pryor도 재판에서 증언하길 자넷 아르비조는 카니발을 보고 싶다며 브라질로 갈 것이라고 우리 같이 가자고 언급했다고 한다. 당시 검사 톰 스네던은 이 증언을 막기 위해 이의제기를 했으나 판사는 허락하지 않았다. 또 납치 시기에 자넷은 한화 700만원의 무단식사를 하고 마이클 측에 대신 내달라고 요구했었다.

2003년 3월 24일 자넷 아르비조는 William Dickerman를 민사 사건 변호사로 정식으로 고용했으며 Dickerman은 마이클의 변호사 Mark Geragos와 가구, 옷, 서류 등 여러 물품의 반환 문제로 서신을 보냈었다. 아르비조는 여기에서 아동 성추행 혐의나 납치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Dickerman은 자넷에게 변호사로 래리 펠드만을 추천한다. 1993년 아동 성추행 혐의 때 챈들러의 민사소송을 대표한 변호사였다. Dickerman은 자신이 래리에게 많은 것들을 배웠고 그가 캘리포니아 최고의 변호사 중 한 명이기에 마이클 잭슨과 관련한 문제라면 잘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아르비조에게 추천한 것이다.

2003년 5월 펠드만과 자넷은 만나고 6월 펠드만은 심리학자 박사 스탠리 카츠(카츠는 펠드만에 의해 1993년 조단 챈들러를 만났었다.)에 개빈을 보낸다. 카츠는 논쟁의 여지가 많은 McMartin 사건에 관여했으며 Children 's Institute International (CII)에서 전문 교육 담당 이사를 지냈었다. McMartin 사건에서 CII의 인터뷰 기술이 강압적이고 조작인 것이어서 아동이 성적 학대에 대한 거짓 진술을 할 것으로 비판을 받아온 것으로 카츠는 그 재판에 참여했다. 여기서 명심할 것은 개빈은 2005년 재판에서 자신이 성추행을 당했다고 말한 첫번 째 사람이 카츠 박사라며 펠드만은 물론 그의 어머니에게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6월 13일 래리 펠드만은 산타 바버라 보안관의 사무실에 개빈의 주장을 보고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많은 모순이 있다. 2003년 11월 17일 검찰 수사부의 진술서에서 자넷 아르비조는 2003년 9월까지 경찰이 성추행 사실을 알릴 때까지 개빈의 혐의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개빈이 아동 학대 전문가인 심리학자에 보내졌고 며칠 후 변호사는 보안관의 사무실에 보고했으며 자넷은 2003년 2월 7일 마이클이 개빈의 머리를 핥고 있다고 주장했는 데 9월까지 자넷이 그 혐의에 대해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CNN의 유명 MC 래리 킹은 사적 자리에서 래리 펠드만을 만난 적이 있는 데 펠드만이 단지 그들은 돈을 원하며 자넷을 'Whacko(미친 사람이라는 뜻)'라고 느꼈다며 그들을 믿지 않았다고 말했다며 마이클의 재판에서 이렇게 증언했었는데 펠드만은 재판에서 킹의 발언을 거부했다.

1993년 혐의를 다룰 때 챈들러가 민사소송을 먼저 걸었고 그 영향으로 성폭력 사건은 형사 수사에 앞서 민사 재판이 먼저 시작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특히, 아동 성범죄와 같은 악질적인 범죄의 경우 형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동일한 사실의 민사 소송에 걸린다면 결론은 뻔하다. 마이클이 이 사건에서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아르비조는 민사에서 그 유죄 판결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마이클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아르비조가 그것을 근거로 민사소송을 제기한다면 남은 유일한 쟁점은 부자였던 마이클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받느냐 하는 것이다.

2003년 11월 18일 개빈 아르비조의 주장에 근거한 마이클 잭슨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됐다. 당시 마이클은 라스베가스에 있었는데 체포 소식을 듣고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300만 달러의 보석을 내고 석방됐다. 같은 날에는 마이클이 부재한 가운데 70명의 보안관들이 네버랜드 목장의 집에 수색 영장을 신청했다. 당시 검찰은 "사춘기 소년인 개빈에게 끊임없이 전화하고 부적절하게 만지며 키스하고 핥고 껴안았고 납치했으며 브라질에서 거주하게 만들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앞에서 봤듯 마이클은 아르비조 가족을 피하려고 했었고 마이클에게 끊임없이 접촉을 시도한 것은 아르비조 가족이었으며 성범죄 혐의는 교차검증을 통해 이것을 확증해 줄 증인은 없으며 증언도 모순됐다. 또한 마이클은 아르비조 가족을 브라질에 억류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고 자넷 아르비조 스스로가 브라질로 카니발을 보기 위해 여행을 하려 했음이 드러났다.

2004년 4월 3일 대배심은 검찰 측의 이야기를 듣고 마이클 잭슨을 기소하며 4월 21일 검찰은 구체적 혐의를 특정지었다.

2005년 2월 28일부터 6월 3일까지 재판이 열렸다. 앞에서도 말했듯 마이클의 모든 것은 수색 대상이었고 네버랜드를 다 수색했지만 마이클의 범죄 혐의를 입증할 증거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4월 13일 재판에서 자넷 아르비조는 마이클이 열기구로 자신과 아이들을 납치하려 했다고 주장하는 등 수많은 증언들을 했다. 그런데 주장들이 너무나도 황당해서 당시 공판을 직접 본 기자들의 대다수는 잭슨이 무죄라고 생각했다고, 또한 앞에 썼듯 고소인들의 증언은 많이 모순됐기에 배심원들을 설득하기에는 부족이었으며 한 가지 더 이야기 할 것은 아르비조 가족들은 마이클이 자신들에게 성인용 포르노 잡지를 보여줬다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성인용 포르노 잡지에서 발견된 마이클과 아르비조의 지문은 동일한 페이지가 아닌 떨어져 있는 다른 페이지에 있었으며 아르비조는 네버랜드에 마이클이 없을 때도 그의 침실에 무단으로 들락나락 거렸었다. 재판에서 드러난 것을 보면 아르비조는 치과 의사의 사무실에서도 Vernee Watson Johnson의 집에서도 마음대로 들락나락 거리며 물건을 만졌었고 아르비조는 성인 포르노에 순진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는 데 네버랜드의 직원 Julio Avila는 개빈의 동생 스타 아르비조가 포르노 잡지를 가지고 이리저리 움직이기에 그것을 어디에서 가져왔느냐고 물었더니 집에서 가져왔다고 말했다고 증언했으며 Maria Gomez는 스타 아르비조의 배낭에서 포르노 잡지가 있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 즉, 개빈과 그의 동생이 마이클의 방을 뒤지다 그가 소유하고 있던 포르노 잡지를 만졌을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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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 판결을 받고 법정을 빠져 나오는 마이클. 그는 재판에서 이겼지만 모든 것을 잃었다. [2]

결국 2005년 6월 13일 마이클 잭슨은 무죄 판결을 받는다. 당시 배심원은 백인 7명 히스패닉 4명 아시아인 1명으로 흑인은 없었다.

마이클은 무죄를 받았지만, 일반 대중들은 마이클의 무죄 판결을 신뢰하지 않았고 마이클은 가장 바보스러운 미국인 1위에 뽑히는 등 엄청나게 까였다. 또한 마이클이 돈이 많다는 이유 하나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말하며 이 사건을 O. J. 심슨 사건에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는 데 O.J심슨의 경우는 재판에서 배심원 중 흑인이 9명이고 백인이 2명에다 이 재판이 흑백 인종 대결로 옮겨갔으나 마이클의 배심원은 백인이 다수에 당시 여론조사에서도 흑인의 50%는 마이클을 유죄라고 생각할 만큼 인종 불문 (백인은 75%가 유죄 13%가 무죄라고 응답)하고 유죄라는 여론이 형성돼서 흑백 인종 대결도 없었다. 또한 마이클의 변호사 Thomas Mesereau도 재판을 담당할 때 인종카드는 없다고 공개적으로 말했었다. 또한 O.J심슨은 증거나 정황들이 유죄를 가리키고 있던 반면 마이클 재판의 경우 증거는 아무 것도 없었으며 모든 정황,증언들은 교차검증의 대상이었고 고소인들은 신뢰성이 없었다. 즉, 모든 것들이 무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체 재판 과정에 대한 내용은 관심이 없으며 안티팬들은 재판 과정에서 검찰의 이야기만을 가지고 와 마이클을 유죄로 만드는 짓을 아직도 인터넷에서 하고 있다. 이 재판에서 언론도 문제가 컸는 데 미국의 언론들은 자극적인 이야기만 보도를 했고 많은 사람들이 유죄라고 생각했기에 변호단에 있던 한국인 변호사는 그런 편견에 맞서 싸우는것이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마이클 잭슨이 죽고 나서 2009년 마이클의 성추행 혐의에 대한 FBI 파일이 공개됐는데 FBI는 마이클에게 혐의점을 찾을 수 없었고 아동복지국 조사 결과에서도 마이클이 개빈 아르비조와 가족들에게 성추행을 했다는 증언을 얻지 못해서 검찰에게 불기소 처분을 할 것을 권유했지만 검찰은 FBI와 아동복지국의 의견을 무시했다. 또한 FBI는 검찰이 네버랜드와 마이클 잭슨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수사에서도 성추행에 대한 단서를 찾지 못하자, 루머로 마이클 잭슨을 괴롭혔던 타블로이드들의 보도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하나의 가정을 가지고 이들 보도에 대한 수사까지 진행 했고 실제로 타블로이드 언론들의 보도는 개연성과 증거가 없었다는 것도 밝혀냈다.

마이클과의 재판 이후 자넷 아르비조는 2007년 공문서 위조를 통해 최저생계비용을 부당으로 취득한 사실이 드러나 기소당하여 벌금과 사회봉사명령을 받았다.
[1] 아주 나쁜 새x이다. 하지 않아도 될 알몸 검사를 실시하고, 시종일관 마이클에게 인종차별적인 언행을 하였다. 후에 마이클 잭슨은 히스토리 앨범의 'D.S'라는 노래로 톰 스네던을 비판한다.그런데 그 비판 내용도 "그는 냉혈한이야"가 전부다.[2] 참고로 그의 뒤를 부축해주는 노년의 흑인남성은 마이클의 아버지 조지프 잭슨이며 오른쪽의 여성은 누나 라토야 잭슨 그 뒤에 절뚝거리는 노년여성은 그의 어머니 캐서린 잭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