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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21:14:23

마스터 이/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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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문 배경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order:2px dashed #226A70; background:#133c3f; letter-spacing: -0.5px; border-left:8px solid #226A70; border-right:8px solid #226A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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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롤 우주 마을의 모습.jpg
마스터 이의 고향, 우주 마을 }}}
아이오니아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바알 지방의 산에는 고즈넉한 아름다움 속에 숨겨진 정착지가 있다. '이'라는 소년은 이곳 우주 마을에서 자라며 훗날 비극으로 이어진 꿈을 쫓아 검술을 연마했다.

소년은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비단 로브를 입고 검을 들고 다니는, 서사시에나 나올 법한 영웅들을 동경했다. 소년의 부모는 검을 만드는 장인이었고 그는 대장간을 찾아오는 마을 전사들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소년은 아침마다 정원에서 어머니와 대련했고 저녁에는 촛불 밑에서 아버지에게 바쳐진 시를 낭독했다. 그가 우주류 마스터의 제자가 되자 부모님은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훈련을 받게 된 이는 타고난 재능과 수련을 통해 주변의 기대를 뛰어넘었고, 곧 마을 전체가 그를 "어린 마스터"라고 불렀다.

일개 수련생이었던 그는 아이오니아의 다른 지역이 궁금했다. 가장 높은 탑에 올라가 저 멀리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던 마을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가 검을 들고 산 아래로 내려가려 하자 그의 스승들이 막아섰다. 우주 마을을 세운 이들은 우주류가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꺼렸고, 그 성스러운 힘으로 피를 흘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세상과 격리된 우주 마을은 그 전통을 지킨 채 수 세기에 걸쳐 번성했던 것이다.

이가 먼 마을에서 거대한 연기 기둥이 치솟아 오르는 것을 본 그 날, 모든 것이 변했다. 해안에 상륙한 녹서스 부대가 마을을 차례로 정복하며 땅을 피로 물들였다. 우주 마을의 신성한 전통이 아닌 아이오니아인들을 택한 이는 최초의 땅을 지키기 위해 산에서 내려갔다. 이는 흐릿한 형체가 되어 최전선을 누비며 외부인들은 본 적이 없는 화려한 검술로 적을 패퇴시켰다.

이 일당백 검사의 소문은 산을 감도는 안개처럼 널리 퍼졌다. 그의 용맹함에 감명받은 동료 수련생들도 전장에 뛰어들었고, 이는 그들과 함께 큰 전투가 벌어진 나보리로 향했다.

우주류 검사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던 녹서스 지휘관들은 이들의 마을을 찾아내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었고, 강철로도 막을 수 없는 화학 무기가 하룻밤 만에 우주 마을은 물론 모든 주민과 공동체를 파괴했다.

마침내 전쟁이 끝나자 수련생 중 홀로 살아남은 이는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고향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고향 땅에 흐르던 마법의 힘은 더럽혀졌고 그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죽었다. 몸은 온전했지만 마음은 처참히 무너졌다. 그 전쟁이 마지막으로 남긴 상처였다. 우주류 계승자들이 모두 죽어버린 그때, 이는 자신이 마스터의 칭호를 계승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슬픔에 잠긴 마스터 이는 은둔 생활을 하며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잊기 위해 미친 듯이 수련에 몰두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선대 마스터들의 지혜를 서서히 잊어버렸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 우주류를 이어갈 수 있을지 의심하기 시작할 무렵, 뜻밖의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원숭이를 닮은 한 호기심 많은 바스타야가 마스터 이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마스터 이는 원숭이의 요구를 기꺼이 받아주었고 결투에서 손쉽게 승리했다. 하지만 원숭이는 포기하지 않고 날이면 날마다 찾아와 전보다 더 기발한 동작을 선보였고 마스터 이도 대응하는 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마스터 이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우주류의 정신을 다시 느꼈다.

몇 주 동안 격돌한 끝에 상처투성이가 된 원숭이는 무릎을 꿇고 자신은 쉬먼족의 '공'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마스터 이의 제자가 되고 싶다며 간청했고, 마스터 이 역시 무모하지만 불굴의 집념을 가진 그가 훌륭한 재목임을 알아보았다. 마스터 이는 공을 가르치며 삶의 목적을 되찾았다. 그는 공에게 우주류 검술을 전수하며 마법봉을 선물했고 우주류 제자에 걸맞은 칭호를 하사했다. 그렇게, 공은 오공이 되었다.

마스터 이는 우주류의 유산을 기리고 자신의 이름에 붙은 '마스터'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오공과 함께 최초의 땅을 돌아다닌다.}}}

2. 귀향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order:2px dashed #226A70; background:#133c3f; letter-spacing: -0.5px; border-left:8px solid #226A70; border-right:8px solid #226A70"
{{{#!wiki style="margin: 5px 0px"
파일:롤 마스터 이 단편소설 귀향.jpg}}}
산비탈을 타고 불어온 돌풍이 나뭇가지를 흔들자 말라버린 나뭇잎이 아래로 떨어졌다. 눈을 감은 채 합장을 하고 있는 이의 몸은 공중에 약간 떠 있었다. 그는 바알 어치가 지저귀는 아침 노래를 들으며 눈썹을 간지럽히는 시원한 바람을 느꼈다.

이가 작게 한숨을 쉬자 그의 몸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발이 땅에 닿자 그는 눈을 뜨고 미소를 지었다. 보기 드물게 맑게 갠 하늘이 보였다. 반가운 광경이었다.

이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다 떨어진 머리카락을 보았다. 대부분 검은색이었지만 고치실처럼 흰 머리카락도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는 궁금해했다.

그는 능직 천으로 만든 자루를 어깨에 멨다. 그리고 나무들을 뒤로한 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한때는 생명력이 넘실거렸을 나무들이지만, 지금은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이는 자신이 얼마나 올라왔는지 확인하려고 밑을 내려다봤다. 산 아래에는 부드럽고 연약한 땅이 펼쳐져 있었다. 그 땅은 보호받아 마땅한 보물이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계속 산을 올랐다. 길옆으로 시들어가는 백합이 보였다. 말라버린 꽃잎은 갈색빛을 띠고 있었다.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사람을 만날 줄이야."

이는 멈춰서 허리에 찬 고리 달린 검을 쥔 채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당신도 가축을 잃어버렸소? 멍청한 것들, 항상 이 부근에서 길을 잃는다오."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목소리의 주인은 근처에서 농사를 짓는 노파였다. 이는 검을 쥔 손을 풀었다. 천으로 기워 붙인 긴 옷을 입은 노파가 가까이 다가오자 이는 고개를 숙였다.

"인사는 수도승들한테나 하시구려." 노파가 말했다. "보아하니 농사꾼은 아니구먼. 그 칼로 잡초를 벨 것 같지는 않고,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소?"

"날씨가 좋아서 산책 중입니다." 이는 짐짓 순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련하러 온 게요? 녹서스 놈들이 또 쳐들어온답디까?" 노파가 웃으면서 물었다.

"해는 한 번만 지지 않는 법이지요."

옛 속담을 알아들은 노파는 코웃음을 쳤다. 남부 사람들은 대부분 이 속담을 알고 있었다. "놈들이 또 쳐들어오면 내게 알려주시오. 그날로 곧장 이 섬을 떠날 터이니. 하지만 그 전에 그 칼로 늙고 병든 노인을 좀 도와주지 않겠소?"

노파가 손짓하자 이는 노파를 따라갔다.

잠시 후 나무가 우거진 곳에 다다르자 두 사람은 걸음을 멈췄다. 바닥에는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새끼 타킨이 보였다. 타킨의 뒷다리에는 두꺼운 덩굴이 감겨 있었는데, 타킨이 몸부림칠수록 더 바싹 죄어들었다.

노파가 말했다. "라사라는 녀석이오. 아직 새끼인 데다 멍청하기까지 하지만, 이 저주받은 산에 처박혀 있는 것보단 밭에 있는 편이 나한테는 낫다오."

"이 산이 저주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는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그리고 손으로 타킨의 등을 쓰다듬었다. 털 아래로 근육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노파는 팔짱을 끼고 말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긴 했소. 영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지." 노파는 산꼭대기를 향해 고갯짓했다. "자연의 마법이 걸려 있지 않은 땅에는 자양분이 필요하다오. 어떨 때는 자양분을 흡수하려고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기도 하지. 저 산꼭대기에 있는 게 뭐가 됐건 간에, 난 그것을 불태워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오."

이는 덩굴을 바라봤다. 덩굴이 여기까지 내려와 있을 줄은 그도 몰랐다.

"한번 해 보겠습니다." 이는 작은 소리로 말하더니 신발에 달린 칼집에서 단검 두 개를 꺼냈다. 단검이 덩굴에 가까워질수록 덩굴은 점차 움츠러드는 듯했다.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이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혔다. 그는 눈을 감았다.

"에마이." 이가 고대어로 속삭였다. "파이르."

그때 타킨이 신이 난 듯 울며 뛰어올랐다. 바닥에는 잘린 덩굴이 헤진 가죽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타킨이 자유를 만끽하며 산길을 따라 뛰어 내려가자 노파가 황급히 그 뒤를 쫓았다. 노파는 양손으로 타킨을 잡아 꼭 끌어안았다.

"고맙구려!" 노파는 다시 발걸음을 옮긴 이를 미처 보지 못한 채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런데 '왜' 수련을 하는 게요? 전쟁은 이미 끝났잖소..."

이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저를 위한 수련이 아닙니다.'
한 시간 뒤, 이의 앞에 황량한 땅이 펼쳐졌다. 폐허가 된 마을은 예의 그 덩굴로 뒤덮여 있었다.

우주. 이곳은 내 고향이었다.

이는 묘지로 향했다. 집과 학교, 사당이 있던 자리에 쓰러진 기둥과 부서진 돌담이 보였다. 산산이 조각난 건물들은 한데 섞여 구분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의 공방도 무너진 채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이다. 이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지만, 비탄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는 묘지에 도착했다. 묘지의 무덤들은 완벽히 대칭을 이루고 있었고, 무덤 사이에는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이'가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우주가 당신을 기억합니다."

땅에는 칼들이 꽂혀 있었다. 이는 칼자루 하나하나에 손을 올렸다. 그에게 그 칼들은 전사와 스승, 제자를 추도하는 기념비였다. 이의 손은 하나의 칼자루도 빼먹지 않았다.

"당신의 이름이 기억되기를."

"쉬십시오. 땅에서 평온을 찾으십시오."

이의 목소리는 점차 힘을 잃어 갔다.

하늘이 주황빛으로 변해갈 무렵까지 이는 추모를 이어갔다. 이제 남은 무덤은 세 개였다. 제일 앞에 있는 무덤에는 산 공기에 녹이 슨 망치가 놓여 있었다. 이는 자루에서 복숭아를 꺼내 무덤 옆에 두었다.

"도란 사부님, 오공이 보낸 선물입니다. 비록 저와 함께 올 수는 없었지만,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을 사부님께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오공은 마법봉이 마음에 드는 모양입니다. 사부님이 제게 주신 투구를 가지고 놀리는 것만큼이나요."

이는 마지막 남은 두 개의 무덤 쪽으로 갔다. 황금색 칼집 두 개가 무덤 옆에 꽂혀 있었다.

"'에마이', 오늘 날씨가 좋군요. '파이르', 이 온기를 마음껏 누리시길 바랍니다."

이는 단검 두 개를 뽑아 부모님의 묘 옆에 있는 칼집에 집어넣었다. 단검은 칼집에 딱 맞았다. 이는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두 분의 지혜가 저를 인도하기를."

이는 일어서서 자루에서 투구를 꺼냈다. 오후의 햇빛을 받은 일곱 개의 렌즈가 각기 다른 색으로 빛났다. 이는 투구를 가슴팍에 갖다 댔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백합이 가득 핀 정원을 떠올렸다.

사람들의 비명이 들리기 전, 독극물이 이 땅에 흐르던 마법을 더럽히기 전, 정원은 이곳에 있었다.

이는 투구를 썼다. 주변 풍경이 만화경처럼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이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채 마음을 비웠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몸이 점점 떠오르기 시작했지만, 이는 알아채지 못했다.

이는 눈을 뜨고 모든 것을 보았다. 죽음, 부패 그리고 생명의 옅은 흔적까지도.

이는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영혼들을 보았다. 영혼들은 가엾은 타킨처럼 덩굴에 발이 묶인 채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힘이 남아있던 영혼들은 이미 이 저주받은 땅을 벗어났다는 사실을 이는 알고 있었다. 지금 남아있는 영혼들은 이미 타락했거나, 곧 타락할 영혼들이었다.

고통에 찬 울음이 애절하게 울려 퍼졌다. 이 역시 오래전 고통에 겨워 울부짖던 때가 있었다. 그때 그는 눈물을 흘리면 죽은 동포들이 살아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는 눈을 깜빡여 물질 세계로 돌아왔다. 그는 어깨를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를 짐짓 모른 체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깜빡였다.

영혼들은 계속 울부짖고 있었다. 이는 고리가 달린 검을 꺼내 들었다.

이는 빠르게 돌진했다. 마치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게 변해가는 계절처럼 땅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의 몸과 칼집에 꽂힌 검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덩굴들이 하나씩 차례로 허물어졌다. 지붕에서 쏟아지는 덩굴도 있었고, 제자리에서 시들어버리는 덩굴도 있었다.

이는 다리를 포개고 앉아 정신을 집중했다. 영혼들이 기뻐하며 노래를 불렀다. 그에게 보내는 감사의 인사였다. 영혼들이 점차 희미해져 가자 땅이 그 기쁨을 이어받았다. 잡초가 무성하던 땅에서는 복숭아꽃이 피어났고 활기를 잃었던 대나무들은 마치 차려 자세를 취하듯이 곧게 뻗었다.

옅은 미소가 이의 얼굴을 스쳐 갔다. 그는 투구를 벗고 자루에 손을 넣어 길을 떠날 때 챙겨온 물건들을 뒤적거렸다. 과일과 견과, 숯, 부싯돌... 자신을 위한 물건들, 그리고 이 땅을 영원히 정화할 물건들이었다.

'아직 때가 아니다.'

이는 갈대로 만든 펜과 구겨진 두루마리를 꺼냈다. 두루마리에는 숫자가 가득했다.

60

54

41

이는 두루마리에 글씨를 썼다. 오늘은 숫자뿐 아니라 글자도 있었다.

'마지막 정화 이후 30일'

이는 노파가 원했던 대로 마을을 곧 불태워야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다.}}}

3. 검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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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5px 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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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의 이와 그의 스승 도란. }}}
이는 서둘러 자신을 향해 길을 오르는 도란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짝짓기 철의 꽃게 같군.' 무례한 생각이었지만 도란의 나이를 생각하면 일종의 칭찬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이는 양손을 둥글게 모아 쥐고는 백발이 성성한 대장장이를 향해 짧게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벌건 도란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헐떡이는 숨소리에 맞춰 손을 흔들어 답했다.

"왔다, 왔어! 조금 늦어서 미안하구나. 이 늙은이가 늦잠을 자 버렸지 뭐냐."

이는 중천에 걸린 해를 힐끗 바라보았다. 조금 늦었다기에는 이미 아침이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시간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이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읊었다. "아침 이슬이 맺히고 저녁 안개가 깔리듯 태양과 달, 별이 태어난다."

입가에 가죽 부대를 가져가던 도란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뭐라고?"

"'모든 권한'의 첫 구절입니다. 처음 들어 보십니까?" 이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 구절은 늦은 사람을 나무랄 때 자주 쓰이는 유명한 구절이었다. "벅시이가 쓴 시 중 꽤 유명한 것인데요."

도란은 혼란스러운 듯 찌푸린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누구?"

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마스터 벅시이는 아이오니아 역사상 가장 훌륭한 시인이었다. 이는 친척의 이름을 전부 외우기도 전 아버지에게 벅시이의 '산속 노을'을 암송하는 법을 배웠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는 목을 가다듬었다. "저희 사부님께서 오늘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 주셨습니다. 뭐든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도란이 작게 웃었다. "이게 '훈련'이라고 했다고? 그래서 이렇게 일찍 왔구먼."

'설마 진심은 아니겠지.' 이는 부모님의 공방에서 도란을 만난 적이 있었다. 파이르와 에마이는 도란을 깊이 존경했다. 우주류 장인들과 마스터들은 한때 외부인이었던 도란을 받아들였다. 도란의 무기 제작 실력이 가히 전설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의 부모님과 도란은 대장장이라는 것 외에 비슷한 점이 없었다. 도란은 단정하지 못하고 산만한 데다가 괴짜로 통했다. 또한 이의 부모님은 훌륭한 시인을 잘 알고 존경했지만 도란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이는 이 이상한 대장장이에게 과연 신성한 우주류를 배울 수 있을지 다시 한번 의심이 들었다.

이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언제 시작합니까?"

"이 늙은이에겐 남는 게 시간이지. 그나저나 자네는…"

도란은 가죽 부대를 챙기고 자신이 막 지나 온 길을 돌아보았다. 양치기들이 쓰는 좁고 구불구불한 길이 우주 마을로 이어졌다. 이는 길을 돌아보는 도란의 어깨에 있는 짐을 발견했다. 대나무를 엮은 후 타킨 가죽으로 감싼 바구니였다. 오랫동안 이동할 때 쓰이는 것이 분명했다.

"검술 훈련을 받은 지 겨우 여섯 달 만에 처음으로 조금 차질이 생겼을 뿐인데 왜 그렇게 조급해하느냐?"

이의 몸이 경직됐다. 작은 차질 정도가 아니었다. 우주류 훈련을 계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달린 문제였다. 이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칼집을 꽉 쥐었다가 놓았다. 동료 수련생들이 알려 준 방법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사부님, 전 우주류를 수련한 지 1년 됐습니다." " 이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 그래! 너도 벌써 열다섯이구나." 도란이 짐짓 놀란 표정으로 이의 팔뚝을 꼬집었다. "그래서 이렇게 몸이 좋았구먼. 해가 뜰 때마다 검술 연습을 하나 보지?"

이는 사부가 내린 과제를 게을리하는 법이 없었다. 검술 연습이든 명상이든 시 낭송이든 마찬가지였다. 사실 동료 수습생이나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수련생 대다수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다. 우주류의 모든 자세와 움직임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수행했고 흠잡을 데 없는 속도와 형식으로 명상에 빠졌으며 우주류 교본에 있는 시, 노래, 교리 대부분을 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막다른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매일 4,000번씩 검을 휘두릅니다."

도란이 휘파람을 불었다. "하루에 4,000번이라고? 대장장이라도 될 생각이냐?"

이는 팔짱을 꼈다. '나무줄기는 가지보다 견고하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반복은 우주류 기본 신조의 핵심이었다. 도란이 그것도 모르는 것일까?

도란은 이가 채 대답하기도 전 어깨에 멘 대나무 바구니를 이에게 안겨 주었다. "자, 그럼 여기 있다. 이런 건 힘센 젊은이가 들어야지."

도란은 어깨를 주무르며 이에게서 성큼성큼 멀어졌다. 잠시 멍하니 있던 이가 서둘러 뒤를 따랐다.

"사부님? 어디로 가십니까? 이 길은 남쪽으로 이어지는데요."

"안심해라. 나도 아직 북쪽과 남쪽은 구분할 수 있으니까."

"그럼 훈련은요?"

"정말 훈련이 그렇게 하고 싶느냐?" 도란이 뒷짐을 지고 느긋하게 걸어 나갔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이는 멈춰 섰다. 우주 마을 남쪽에는 사람이 다니지 않는 숲밖에 없었다. 도란이 멧돼지 사냥에 나서려는 게 아니라면 딱히 훈련이라는 것을 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란의 말을 따르기로 사부님과 약속한 이는 어깨에 대나무 바구니를 메고 도란의 뒤를 따랐다.
이는 이쪽으로 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런 길이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흙길에는 오랜 시간 방치되어 여기저기 깨진 디딤돌이 군데군데 파묻혀 있었다. 디딤돌 사이에 멋대로 자란 풀은 이의 정강이까지 자라 있기도 했다. 처음에 이는 이 길이 버려진 사원이나 정착지로 이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산이 많은 바알 섬의 촌락과 마을 밖 숲에는 고대 유적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고 전해졌다.

남쪽으로 걸어온 지 꽤 지났지만 도란의 말대로 훈련을 시작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짜증이 난 이는 대나무 바구니를 고쳐 멨다. "사부님, 이 바구니에는 뭐가 들었습니까? 무게가 상당한데요."

"검이다." 도란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전부 다."

이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우주류 검사들이 쓸 검만을 제작하는 도란은 검을 많이 만드는 편이 아니었다.

"전부 사부님께서 직접 만드셨습니까?"

"그중 세 개는 그렇지. 나머지는…" 도란이 적절한 말은 찾는 듯 말을 멈췄다. "동료들이 내게 맡긴 것이고."

"다른 대장장이들 말입니까? 왜 자기가 만든 검을 사부님께 맡기죠?"

이는 바구니를 보기 위해 무심코 어깨 너머를 돌아보다가 모양이 이상한 돌에 발이 걸렸다. 이는 휘청거리며 균형을 잡았다.

"어허! 조심!" 도란이 재빨리 이가 멘 바구니를 붙잡았다. "여긴 네게 줄 검도 있다. 이러다 검이 휘어지면 내 탓 말거라."

"제, 제 검요? 날이 선 검입니까?"

"당연하지. 난 무딘 검은 안 만들어."

피를 흘리지 않는 전투를 추구하는 우주류 철학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자에게만 날카로운 검을 휘두를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날카로운 검은 곧 검사의 자제력을 증명했다. 게다가 도란이 손수 제작한 검은 선배 수련생들도 10년 넘게 훈련해야 받을 수 있을 만큼 영광스러운 검이었다. 그러나 이는 훈련한 지 겨우 1년이 되었을 뿐이었다. 이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러나 기쁜 마음은 곧 사라졌다. 이는 시선을 떨구었다. 도란도 그 심경의 변화를 알아차린 듯했다. 침묵 속에 몇 걸음 더 걸음을 옮긴 후 도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희 사부에게 듣자 하니 네가 영혼 세계와 이어지는 데 애를 먹고 있다고 하더구나."

이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이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어지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게 되지 않았다면 우주류를 배우지도 못했겠지요." 이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런데 영혼 세계로부터 힘을 끌어올 수가 없습니다. 약간 끌어온다고 해도 무기를 힘으로 채울 정도는 아니에요."

"아직 때가 오지 않은 것뿐일지도 모르지. 영혼 세계의 힘을 불러내는 것…" 도란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게 '언제'인지는 단순히 운명의 변덕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도란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다. 영혼 세계에서 힘을 끌어오는 능력은 운명의 변덕에 따라 달라질 만한 게 아니었다. 이것은 이가 걱정하는 점이기도 했다. 타고난 재능이 부족해 실패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자신은 절대 성공할 수 없는 운명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건방지게 보이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오늘의 '훈련'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이가 마침내 대답했다.

질척한 길은 부서진 돌 위에 제멋대로 자란 뿌리와 가시덤불 때문에 갈수록 걷기 힘들었다. 이따금 다른 이들의 발자국이 보이던 아까와 달리 지금은 살아 있는 생명이 이곳을 지나갔다는 것을 알리는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빽빽한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여름 바람 소리만 휘파람처럼 들릴 뿐이었다.

"도란 사부님, 전에도 이쪽으로 와 보셨습니까?"

"그럼. 해마다 한 번씩은 오는 길이다. 너희 사부도 두세 번 정도 동행했지."

이는 깜짝 놀랐다. "후롱 사부님이요?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언젠가 들을 날이 올 게다." 도란이 이에게 손을 흔들더니 속도를 올렸다. 나이가 육십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빠른 발걸음이었다. 꽃게에 비교한 게 머쓱할 정도였다.

'전에 다른 검사들도 데려오셨군. 호위가 필요했나? 혹시 이게 그 훈련인가? 검술을 연습할 기회는 아닐까?' 그런 것이라면 대환영이었다.

"이 길에서 위험에 처했던 적은 없으십니까?"

"전혀." 도란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검을 잘 쥐고 있는 게 좋을 거야. 내 걸음과 네 걸음은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 내가 이 길을 수없이 지나다니면서 위험을 맞닥뜨린 적이 없다고 해도 너 또한 그렇다는 보장은 없지."

그때 신호라도 받은 것처럼 새가 우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그 자리에 멈춰 선 이는 무딘 검의 자루를 쥐고는 가슴께로 들어 올렸다. 칼날부리가 우는 소리 같았다. 칼날부리는 주로 깊숙한 숲속에서 발견되는 위험한 야생 조류였다.

이는 이를 악물고 숲을 쭉 훑었다.

도란은 눈을 굴리며 앞을 가리켰다. "저쪽에 있는 산이 보이느냐?"

정면에는 쭉 이어진 산봉우리가 지평선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게 높진 않았지만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은 산맥이었다.

칼날부리의 울음소리가 들린 이후 숲이 다시 고요해지자 이는 검을 내렸다. "산을 올라야 합니까?" 이가 애써 짜증을 숨기며 물었다.

"너는 바알 출신이지 않느냐." 도란이 손등으로 이의 가슴을 툭툭 쳤다. "언덕 좀 오른다고 겁먹진 않겠지?"

이는 위를 쳐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에 황금빛 태양이 눈부시게 걸려 있었다. 이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걷기 좋은 날이었다.

이는 어깨를 쫙 펴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수풀을 빙 둘러 개울을 건넌 두 사람은 마침내 산자락에 도착했다. 우주 영토를 한참 벗어나고도 남았을 지점이었다. 장로들이 정한 안전 경계선을 넘어선 것이다. 그러나 도란은 속도를 늦출 기미가 전혀 없었다.

첫 번째 경사에 다다른 둘은 돌계단을 올랐다. 예전에 자주 쓰인 것처럼 보이는 계단은 이제 죄다 깨져 잡초와 미끌미끌한 진흙으로 뒤덮여 있었다. 계단은 가파른 절벽 앞에서 뚝 끊겼다. 남자 키의 세 배 정도 되는 높이의 절벽이었다. 도란은 이가 입을 열기도 전 튀어나온 돌을 붙잡고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가볍게 위에 도착한 도란은 뒤로 돌아 뭐 하냐는 표정으로 이를 내려다보았다.

우주류를 수련하는 젊은이라면 바위 벽 정도는 쉽게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도 무거운 짐을 진 상태로 이런 절벽을 올라 본 적은 없었다. 그것은 보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겨우 절벽 위로 올라온 이는 한참 숨을 골라야 했다.

마침내 몸을 세워 옷에 묻은 흙을 털어 내던 이는 눈앞에 있는 석판을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석판에는 단 하나의 단어만 새겨져 있었다. 이는 심하게 닳은 아이오니아 글자를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다.

'안개폭포.'

"아직 시간이 있군." 석판 옆에 앉은 도란이 가죽 부대에 있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잠깐 쉬도록 하지."

도란은 특이한 자루, 혹은 숨겨 놓은 주머니 같은 곳에서 떡을 꺼내더니 우물거리며 먹기 시작했다. 몇 번 우물거린 도란은 번뜩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더니 여전히 석판을 살펴보고 있는 이에게 남은 떡을 들이밀었다. 이는 떡에 남은 잇자국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사부님, 아직 시간이 있다는 게 제 훈련 얘기였습니까?"

도란은 입을 가득 채운 떡을 씹으며 무릎을 탁 쳤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지. 그렇게 조급하면 될 것도 안 될 테니 여기서 잠시 쉬는 게 좋겠다."

도란이 두 번째 떡을 깨무는 모습을 본 이는 답답해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억눌렀다. 그리고 조바심을 숨기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석판 외에도 우거진 덩굴과 관목 밑에 고대 유적들이 숨겨져 있었다. 남은 것은 망가진 기둥과 벽뿐이었지만 그 웅장하고 강렬한 건축 양식은 우주의 탑과 전혀 달랐다.

도란은 유적을 가리켰다. "이 산에는 사원이 있었다. 우리가 태어나기 한참 전 타락한 신을 숭배하는 사원이었지. 그 신의 이름이나 신자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초라한 돌들은 전부 그 흔적이야."

"나이가 들면 꽃이 시든다. 샛별도 밤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가 읊었다. 그리고 석판을 가리켰다. "이곳에 안개폭포라는 이름을 붙인 게 그 사람들입니까?"

"석판에 이름을 새긴 것은 후대 사람들이었어. 이름은…" 도란이 절벽 반대편을 가리켰다. "저쪽을 보면 무슨 의미인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게다."

이는 조심스레 절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래 골짜기가 하얀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저 멀리에서는 푸른 하늘과 산이 맞닿은 게 보였다. 숨이 멎을 듯한 장관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골짜기 자체는 크지 않았다. 이는 물 대신 은빛 안개가 소용돌이치는 호수 같다고 생각했다. 절벽에서 이어지는 좁은 내리막길은 안개에 가려 끝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느냐? 우리가 가야 할 곳이 바로 저기다."

"저기요? 저 골짜기로 들어간다고요?"

"그래."

이는 텅 빈 황무지를 한참 걸어왔는데도 훈련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사부님, 대체 무슨 훈련을 하는 겁니까?" 이가 내뱉듯 말했다.

"이번 여정이 마냥 편하지는 않다는 것만 알고 있거라. 지금이라도 푹 쉬어 두는 게 좋을 거야."

이는 불만스러운 마음을 억눌렀다. 도란은 더 설명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도란 맞은편에 평평한 석판이 있는 것을 본 이는 옆에 대나무 바구니를 내려놓고 앉았다.

쉴 여유는 없었다. 적어도 이곳은 명상을 연습하기 완벽한 장소였다.

이는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했다. 낯선 환경 때문인지 평소보다 명상에 잠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서 이의 몸속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끝에 밝고 특이한 물체가 나타났다. 그 물체는 이의 마음 구석구석을 밝히는 불꽃 같았다.

'영혼.'

명상 중 영혼을 마주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는 다른 수련생보다 훨씬 자주 영혼을 마주했다. 나쁜 일은 아닐 터였다. 그것은 이가 영혼 세계와 더 가깝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 영혼 세계에서 힘을 끌어내는 일에도 소질이 있어야 했다.

'그래야만 해.'

이는 하얀 빛에 집중하며 다른 생각을 전부 몰아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이번 영혼은 평범한 영혼이 아니었다. 이는 영혼의 파동을 느끼기 위해 영혼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존재와 하나가 되어 눈 부신 빛 속으로 사라졌다.
강제로 눈을 뜬 이는 자신이 거대한 은목나무 밑에 앉아 있는 것을 깨달았다. 우주 마을 입구에 서 있는 바로 그 나무였다. 하지만 저 멀리 보이는 건물들은 이상하게 낯설어 보였다.

당황한 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을로 걸어 들어갔다. 아버지, 어머니, 동료 수련생부터 이웃의 검은 고양이 미묘와 촌장님의 개 누렁이까지, 익숙한 모습들이 보였다. 다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이를 무시하는 듯했다. '환영인가 보군.' 이는 큰길을 따라 내려가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때 뭔가 발견한 이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도란 사부님?"

도란은 이를 힐끗하더니 다시 작업에 몰두했다. 하지만 도란이 만들고 있는 것은 검이 아니었다. 용광로와 연장, 모루가 있던 자리에는 여린 묘목이 담긴 화분만 있었다. 도란이 기쁜 듯 활짝 웃으며 양팔을 머리 위로 천천히 들어 올리자 화분에 있던 묘목들이 그에 맞춰 물결치듯 뻗어 나갔다. 묘목은 엄청난 속도로 자라며 잎을 틔우더니 작은 향나무 형태를 이루었다. 도란은 약간 실망한 표정으로 나무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몇 번 더 팔을 들어 올렸다. 나무가 형태를 바꾸며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더니 곧 수양버들이 되었다.

어리둥절해진 이는 마을을 돌아보았다. 그제야 모든 집이 무성하고 알록달록한 것을 넘어서 기괴해 보이기까지 하는 초목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많은 집이 단단한 바위에서 자란 것처럼 보였다. 어떤 집은 사람과 비슷한 형상으로 뒤틀려 있었다. 형태뿐 아니라 움직임마저 그랬다.

이가 정처 없이 거닐던 중 마을 중앙에서 나팔 소리가 들렸다. 거의 모든 마을 사람이 하던 일을 멈추고 마을 저편에 있는 산비탈 쪽으로 이동했다.

산을 타고 쏟아지는 폭포가 뒤에 있는 동굴을 가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도란이었다. 도란은 최대한 물에 젖지 않게 팔을 들어 폭포를 가르며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동작으로 재빨리 한 명씩 동굴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가 팔을 들어 올렸을 때는 폭포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건 환영일 뿐이야.' 이는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되뇌었다. '젖어도 상관없어.'

폭포를 통과한 이는 거대한 공간에 서 있었다. 수천 개의 초로 장식된 공간이었다. 이보다 먼저 들어온 마을 사람들은 동굴 중앙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하는 중이었다. 저쪽 구석에서는 이의 사부인 후롱이 마을에서 높이 존경받는 장로들과 함께 서 있었다.

바위 벽에는 이상한 굴곡과 선이 새겨져 있었다. 그 문양들은 후롱의 말과 몸짓에 맞춰 움직이는 듯했다. 꼭 살아 있는 서예 그림 같았다. 아니, 그림이 아니라 일종의 지도였다.

장로들은 결정을 내렸는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롱은 오른팔을 들어 올려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문이 확 열리듯 벽 전체가 천장까지 갈라지며 하늘이 드러났다. 눈부신 햇빛 줄기가 동굴을 가득 채웠다. 밖은 말 그대로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였다.

펄쩍 뛴 후롱은 밝은 파란색 바알 어치로 변해 날아갔다. 산 위로 솟아오른 후롱은 곧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그 뒤를 따라 새로 변한 다른 장로들과 마을 사람들도 시끄럽게 울며 허물어진 동굴을 떠났다. 이제 남은 것은 이와 도란뿐이었다.

도란과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후 떠날 준비를 하던 이는 도란이 익숙한 언어로 자신을 불러 세우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란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자네. 우주류의 길을 걷고 있나?"

이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말없이 도란을 응시했다.

"너 같은 우주류 계승자들을 만나 본 적이 있지." 도란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이는 도란의 눈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명이 전혀 깃들지 않은 듯 으스스한 빛으로 빛나는 붉은 홍채가 이를 꿰뚫었다. "영혼 세계에서 보잘것없는 힘을 짜내려고 엄청난 고통을 감내하더군. 그렇게 짜낸 힘을 무기에 쓰다니, 참 천박하기 그지없어. 이런 한심한 흉내로도 강자의 영역에 들어설 순 있겠지만."

"흉내라고요?" 이는 우주류를 깎아내리는 말은 난생처음 들었다. "누구를 흉내 낸다는 말입니까?"

도란은 이의 질문을 무시하는 대신 천천히 닫히는 동굴 벽을 가리켰다. "저들을 따라가라."

이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날라니. "전 날 수 없습니다."

"날 수 있다."

도란의 목소리는 뒤쪽에서 들려왔다. 이는 뒤를 돌아봤다. 도란이 손가락 끝을 마주 모은 채 동굴 입구 밖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아직 방법을 모를 뿐이지."

동굴 입구와 갈라진 틈이 쾅 닫히자 이는 완전히 갇히게 되었다. 나갈 길은 저 위에 뚫려 있는 구멍뿐이었다. 붉은 눈을 한 도란은 이가 다른 이들처럼 산에서 날아오르게 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코웃음을 친 이는 돌바닥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날아가라고?' 그럴 필요는 없었다. 환영은 꿈과 같아서 아무리 이상하다고 하더라도 깨면 그만이었다.

이는 숨을 헉 들이쉬며 눈을 떴다. 자신은 다시 안개폭포 근처 석판에 앉아 있었다. 바로 맞은편에는 도란이 앉아 있었다. 도란은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이가 갑작스레 깨어난 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이는 귓불을 꼬집었다. 환영에서 돌아올 때마다 진짜 현실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번 환영은 너무 생생하고 현실 같아 귓불을 꼬집어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사부님?"

"음?" 도란이 이를 돌아봤다. "뭐냐?"

이는 도란의 흑갈색 눈을 응시했다. "제가 명상을 한 지 얼마나 됐습니까?"

"꽤 한참 앉아 있었지. 왜 그러느냐?"

이는 입술을 문질렀다. 자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일을 얘기할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제 슬슬 움직일까요?"
도란이 경고했던 것처럼 안개 속으로 내려가는 길은 아주 위험했다. 돌계단에 푸른 이끼가 자라 있어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짝 긴장해야 했다. 검으로 가득한 바구니의 무게 때문에 이동이 더더욱 힘들었지만 이는 불평하지 않았다. 도란을 흡족하게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비밀 장소를 아는 사람은 도란뿐이 아닌 듯했다. 안개 가까이 접근하자 길가에 비교적 얼마 전 세워 둔 듯한 나무판자가 보였다. 판자에는 경고 문구가 휘갈겨져 있었다. 볼품없는 글씨와 틀린 철자를 보니 교육을 받지 못한 사냥꾼이 쓴 것 같았다.

나무판자를 지나자 공기가 차가워졌다. 이는 그것이 자신의 착각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뜨거운 여름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냉랭한 바람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게다가 이상한 짙은 안개가 이와 도란을 감싸자 시야까지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는 안개 속에서 뭔가 튀어나올까 경계하며 칼자루를 꽉 쥐고 도란의 뒤를 바싹 따라붙었다.

"평범한 안개가 아닙니다. 여기 영혼들이 있어요. 기다렸다가 영혼들이 사라지면 돌아오죠." 이가 중얼거렸다.

"영혼들은 떠나지 않아." 도란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이오니아에 사람이 살기도 전부터 이곳에 살았으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여기 오래 있진 않을 테니." 도란은 앞쪽을 가리켰다. "자, 네가 나보다 눈이 좋으니 검 좀 찾아보거라."

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검을 찾으라고요? 여기에서요?"

"정확히 말하면 플레시디엄 양손 검을 찾아야 해. 보면 어떤 검인지 알 게다. 지난번에 왔을 때 그 검을 표지로 남겨 뒀거든."

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게 짙은 안개에 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플레시디엄 양손 검은 고사하고 두 발자국 옆에 있는 사람도 안 보일 지경이었다. 이는 막막한 마음에 양쪽 바닥을 살피는 척했다.

그렇게 몇 걸음 더 걷자 이의 배가 요동쳤다. 이는 갑자기 몸이 점점 가벼워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대나무 바구니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도란 사부님." 이가 불안한 듯 말했다.

하지만 도란은 속도를 줄이거나 뒤를 돌아보긴커녕 오히려 걸음을 재촉했다. 위기감을 느낀 이는 서둘러 따라잡으려고 했지만 도란은 더 멀리 앞서 나갔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도란은 하얀 안개 속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이는 같은 안개가 자신을 집어삼키는 것을 지켜봤다. 안개가 어찌나 짙은지 자신의 다리도 안 보일 지경이었다. 이는 몸과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 현실감 없는 안개 속으로 떠올랐다.

아니었다. 이는 단순히 떠오르는 게 아니라 솟구치고 있었다. 안개는 구름이 되고 차가운 공기는 바람으로 변했다.

또다시 환영에 들어온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영혼들이 이를 데려가기 전 어떤 주의도 주지 않았다.

방향 감각을 잃은 이는 균형을 잡으려고 팔을 뻗었다. 하지만 팔 대신 아름다운 옥빛 날개 한 쌍이 펼쳐졌다.

'새가 됐잖아!'

하늘로 솟아오르자 긴 해안선이 나타났다. 짙푸른 파도가 해안에 부딪치자 짠 바닷바람이 확 풍겨 왔다. 고향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바닷가 끝에서 어렴풋이 짙은 회색 구조물이 보였다. 아이오니아에서 볼 수 있는 건물이 아니었다.

'저건… 기념물 같은 건가?' 정밀한 건축 양식이 아니었다면 산으로 착각할 법한 구조물이었다. 가까이 날아가자 거대한 탑 세 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탑들은 모두 한 토대로 이어져 있었다.

'이런 걸 필멸자가 만들었을 리 없어.'

이런 건 난생처음이었다. 거대한 돌 수천 개를 쌓아 올린 탑이었다. 사각형으로 완벽하게 다듬어진 돌들의 높이는 하나하나가 다 자란 검사의 키만 했다.

그때 밝은 색상을 지닌 새 떼가 구름 속에서 튀어나와 요새 쪽으로 활공했다. 이는 자신도 모르게 빠른 속도로 날아가 새 떼와 합류했다.

이는 세 탑 사이를 빠르게 비행하는 새빨간 새를 따라갔다. 새는 이를 뒤로하고 구조물의 토대로 강하하며 몸을 굴려 착지했다. 다시 일어선 새는 인간의 형태로 변해 있었다. 붉은 눈을 한 도란이었다. 도란은 여전히 위에서 빙빙 돌고 있는 이를 올려다보며 내려오라고 손짓했다.

이는 도란의 어깨에 착지한 후 가볍게 땅으로 떨어졌다. 다시 일어섰을 때는 어느새 인간의 몸으로 돌아와 있었다.

"날 수 있는 모양이군."

흥분한 이는 숨을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 "도란 사부님—"

그러나 도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이자의 모습을 빌렸을 뿐이야."

그리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이는 눈을 깜빡였다. 왜 이 영혼은 하필 도란의 모습을 취했을까?

이는 허리를 펴고 거대한 탑을 바라보았다. "여긴 어디입니까?"

"너희가 바알이라고 부르는 곳이지." 도란의 모습을 한 영혼은 뱀 같은 해안선을 가리켰다. 창과 검으로 무장한 전사들이 바닷가를 순찰하고 있었다. 무기와 갑옷의 형태가 이국적이었다. "저들은 '다른 해안'이라 부르고, 우리는 집이라고 부른다."

"저들이 누구입니까? '우리'는 누구고요?"

이는 영혼을 돌아봤지만 영혼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바닥에는 붉은색과 하얀색 깃털 몇 개만이 남아 있었다.

'황당하군.'

이는 지난번처럼 환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정신을 집중하기도 전에 멀리서 커다랗고 규칙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큰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와 사람이 소리치는 소리였다. 호기심이 동한 이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거대한 탑 옆을 지나치자 그 크기가 더욱더 현실감 없게 다가왔다. 탑 하나에 우주 마을 사람 모두가 들어가 살고도 남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크고 흉측한 집을 지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이는 건장한 남자와 부딪힐 뻔했다. 반짝이는 금속 투구를 쓰고 맨가슴을 드러낸 남자는 이상하게 생긴 도끼창을 들고 있었다.

이전 환영에서 나온 마을 사람들처럼 이번 사람들도 이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국에서 온 남자는 잠시 멈추더니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강인한 기운을 내뿜으며 인근을 순찰하는 다른 전사 몇 명도 이를 그냥 스쳐 지나갔다.

흙으로 만든 성벽에 가까이 다가가자 시끄러운 소리는 귀청이 터질 듯 커졌다. 군악대의 북소리에 맞춰 간간이 함성이 들려왔다.

마른침을 삼키며 성벽을 기어오른 이는 목을 쭉 빼고 그 너머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수천 명의 병사가 커다란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우주 마을 사람을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많아 보였다. 군 깃발처럼 각 잡힌 열을 선 병사들은 온갖 장비로 무장한 상태였다. 쇠못 박은 강철 판금 갑옷을 입은 자도 있었고, 두꺼운 동물 가죽을 두른 자도 있었다. 천으로 된 로브만 걸친 자도 보였다. 모습은 제각각이었지만 모두 하나의 목적 아래 단결한 병사들은 북소리에 맞추어 가슴을 치며 함성을 내질렀다.

"우주류 수련자여, 대답해 봐라."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이를 불렀다. "무엇이 보이지?"

이는 칼집을 움켜쥐고 뒤를 돌아봤다. 붉은 눈의 영혼은 성벽 밑에 서 있었다. 영혼은 이가 있는 곳으로 올라와 성벽 위에 가볍게 두 손을 올렸다.

"첫인상이 어떤가."

이는 질문을 되받아쳤다. "저들은 누구입니까? 제게 이런 것을 보여 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혼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첫 단어." 영혼은 답을 재촉했다. "처음 떠오른 단어를 말해 봐라."

"처음 떠오른 단어는…" 이는 다시 엄청난 수의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대답했다. "힘입니다."

"힘이라. 왜 그렇게 생각했지?"

"왜냐고요?" 이는 머리를 긁적였다. "모든 전사가 호랑이의 맹위와 곰의 힘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저들은 날카로운 검을 휘두르고 빛나는 갑옷을 입었습니다. 저들의 함성은 바다 건너까지—"

"네 눈에는 그런 것이 보이나 보군. 아이야, 그게 바로 네가 여기 온 이유다." 고개를 끄덕이는 영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영혼은 이의 뒤쪽을 가리켰다. "넌 잘못된 방향을 보고 있어. 열심히 훈련할수록 넌 네 목표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이는 뒤쪽을 보기 위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뭔가 채 보기도 전에 영혼이 이를 밀쳐 성벽에서 떨어뜨렸다. 이는 빠른 속도로 추락했다. 땅은 아까와 달리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한참 아래에 있었다. 이는 환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땅이 빠르게 가까워지자 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뜬 이는 짙은 안개에 휩싸인 채 대나무 바구니를 메고 앉아 있었다. 안개폭포로 돌아온 듯했지만 혹시 몰라 귓불을 꼬집었다. 확실히 환영에서 빠져나왔는지 확인해야 했다. 마침내 확인을 마친 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왜 날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거지?" 이가 손가락으로 콧등을 짚으며 끙 소리를 냈다. "그나저나 대체 무슨 소리야?"

이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이 뭔가 끌어안은 도란이 절뚝거리며 안개 속에서 나타났다. 도란은 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무슨 일 있었느냐? 왜 그러고 앉아 있어?" 도란은 뱀처럼 구불구불한 칼날이 눈에 띄는 특이한 모양의 검을 들고 있었다. 도란이 찾는다던 플레시디엄 양손 검인 모양이었다.

"도란 사부님. 저희 사부님과 오셨을 때 뭔가 이상한 일 없었습니까?"

"이 안개 속에서?" 도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던 이는 대나무 바구니를 메며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저었다. "혹시 위험하지는 않을까 걱정돼서요. 여기 도착한 이후 안개가 더 짙어졌어요."

"아, 걱정할 필요 없다." 도란이 양손 검을 바닥에 꽂아 넣으며 답했다. "안개는 곧 걷힐 거야. 다시 안개가 깔리기 전에 떠나면 안전할 게다."

"안개가 걷힌다고요? 왜죠?"

"1년에 한 번씩 해가 질 무렵 안개가 걷히거든. 그게 바로 오늘, 지금 이 순간이야."

바로 그때 이는 냉기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개가 놀라운 속도로 옅어졌다.

"이게 대체—"

도란은 조용히 하라는 듯 입에 손가락을 댔다.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에 해가 걸리자 골짜기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 이는 양손으로 입을 막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안개가 왜 걷히냐고?" 도란은 양손 검의 자루에 손을 얹었다. "이곳 영혼들이 아주 오래전 있었던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이가 열다섯 해를 살아오면서 목격했던 가장 치열한 전투는 사냥꾼과 멧돼지의 싸움이었다. 사냥꾼은 손가락 하나를 잃었고 멧돼지는 목숨을 잃었다. 이가 아는 한 아이오니아는 항상 조화를 대표하는 순수하고 평화로운 땅이었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서는 잔혹한 기운이 스며 나왔다. 이가 아는 아이오니아와 정반대되는 모습이었다.

땅에는 무수히 많은 검이 꽂혀 있었다. 열 걸음 떨어진 곳부터 시작해 저 멀리 보이는 산기슭까지 무기가 골짜기 전체를 광활한 바다처럼 뒤덮고 있었다. 중앙에는 커다란 대검 열 개가 꽂혀 있었다. 사실 커다랗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거대했기 때문이다. 검 끝이 땅에 묻힌 상태라 전체가 어느 정도일지는 가늠도 되지 않았다. 자루 높이만 다 자란 검사의 키만 했다. 칼날의 보이는 부분은 그 일고여덟 배는 되어 보였다. 우주 마을의 위대한 탑과 맞먹는 크기였다.

"아주 오래전 전투가 일어났던 곳이다." 도란은 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참전한 자들이 이곳에 무기를 두고 갔어. 영혼들은 시간이 흘러도 부식되지 않도록 모든 무기를 지켜 왔지. 영겁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곳은 신성한 땅이 되었다. 다시는 폭력과 피가 난무한 전쟁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자들 역시 계속해서 이곳으로 와 자신의 검을 놓고 갔지."

이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런 곳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습니다."

"그 일은 아주아주 오래전 일어났으니까. 이 중에는 네 시조보다 오래된 무기도 있어. 요즘은 이 전통을 기억하는 자가 거의 없지. 기억하는 자들은 대부분 영혼을 어지럽히고 싶어 하지 않고."

"그럼 사부님은 여기 왜 오십니까?"

"한때 안개폭포의 영혼들이 무기가 전투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축복해 준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곳을 찾고 나서야 사실은 그 반대라는 것을 알았지. 오래전 일어난 전투는 이곳의 균형을 갈가리 찢어 놓았어. 그래서 이 골짜기의 영혼들은 폭력을 증오한단다. 영혼들이 무기를 축복하는 것은 맞지만, 그 날로 피를 내는 순간 축복의 힘은 사라지게 되어 있어. 검을 만드는 장인 대부분은 이 사실을 안 후 발걸음을 끊었다. 그 축복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 왜인지 알겠느냐?"

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님은 우주류 검사가 쓸 검만 만드시니까요. 저희는 살생을 피하고요."

"그래. 내가 우주에 남은 것도 그 때문이다. 난 평생 세계 최고의 검을 만들고 싶었어. 하지만 전투용 검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지. 나와 같은 눈으로 무기를 보는 자는 우주류 검사뿐이었다." 도란은 이가 멘 대나무 바구니를 가리켰다. "아, 그건 이제 내려놔도 된다."

이는 기꺼이 어깨에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그 검들은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오늘 여기 심어야 한다. 네게 줄 검도 마찬가지야. 다 끝나면 지난번 두고 간 검들을 회수해야 해."

두 사람은 더 깊숙한 골짜기로 들어갔다. 전장 중심부로 다가갈수록 온갖 종류의 무기가 땅에 꽂혀 있었다. 모양은 평범한데 이가 휘두르기에는 너무 크거나 작은 검이 있는 반면 크기는 적당한데 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태를 한 검도 있었다. 이는 대체 누가 이런 검을 썼을지 생각하며 경탄을 금치 못했다.

"봐라! 바로 여기다. 내 정원이지!"

도란은 훌륭한 날밑이 달린 외날 검을 가리키고 있었다. 인간이 휘두르기 적당한 크기의 검은 어제 만든 듯 다른 검보다 훨씬 새것 같아 보였다.

검을 자세히 살펴보던 이는 더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칼자루에 가느다란 붉은 실로 종이 부적이 매달려 있었다. 사실 땅에 꽂혀 있는 검 중 종이 부적이 달린 검은 꽤 많았다. 부적은 보통 염원을 담거나 축복을 내리는 데 사용됐다. 이는 부적이 무기에 달려 있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도란은 땅에 꽂힌 외날 검을 조심스레 뽑더니 부적을 떼어 내 살며시 땅바닥에 두었다. 그리고 검날을 꼼꼼히 살핀 후 땅에 꽂혀 있는 다른 검 쪽으로 가서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꼭 작물을 수확하는 농부 같았다.

'모내기라도 하는 것 같군.' 도란을 유심히 바라보던 이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부적이 달린 장검 자루를 움켜잡았다.

"그건 건들지 마라!" 도란이 소리쳤다. "다른 장인이 두고 간 검이야. 여기 꽤 오래 있었지. 그냥 두거라."

이는 검에서 손을 떼었다. 그 과정에서 칼자루에 부적을 매달아 둔 붉은 실이 풀리고 말았다. 이는 부적을 주워 그 위에 쓰여 있는 아이오니아 글자를 읽었다. 간단한 시였다.

봄날의 천둥

여름날의 폭우

가을날의 동풍

겨울날의 눈발

이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게 뭡니까?"

도란은 바구니를 열며 올려다보았다. "그 검을 만든 장인이 쓴 시다. 어떤 것 같으냐?"

이는 시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글씨와 시는 확실히 평균 이상이었다. 그래도 시보다는 건배할 때 외치는 말에 가까워 보였다. "나쁘지 않네요. 그런데 왜 여기 시를 남겼죠?"

"영혼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방법이지." 무릎을 꿇으며 물을 한 모금 크게 들이켠 도란은 가방에 손을 뻗어 먹이 말라붙은 붓을 꺼내더니 혀에 갖다 댔다. "우주의 영혼이 시를 이해할 수 있다면 이곳의 영혼도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도란이 자신의 앞에 놓인 빈 부적 세 개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내게 검을 가져가 달라고 부탁한 장인들은 자기 검에 달 부적을 미리 준비해 둬서 내 검에 붙일 시만 쓰면 된다."

"사부님이 직접 시를 쓰신다고요? 사부님도 시를 아신다는 말입니까?" 이는 뭔가 적기 시작한 도란의 옆으로 다가왔다. "벅시이를 모른다고 하신 건 거짓말이었군요."

도란이 이를 보며 음흉하게 씩 웃었다. 도란의 붓놀림은 거침이 없었다. 과감한 움직임이 종이를 휩쓸자 순식간에 긴 시가 형태를 갖추었다.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이가 허리를 굽혀 큰 소리로 시를 읽었다. "전쟁 없는 오늘, 포도주 한 모금으로 송화단을 씻어 내리네. 이렇게 맛있는—" 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도란! 사부님! 대체 뭘 쓰시는 겁니까?"

도란이 뿌듯한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마음에 드느냐?"

"이건 시도 아니잖습니까!" 이는 격한 동작으로 시를 가리켰다. "운율도 없고 압운도 안 맞고 내용도 이어지지 않습니다. 하다못해 기본적인 형식도 갖추지 못했어요!"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감정'이다." 도란이 손가락으로 가슴을 찌르며 씩 웃었다. "시의 주제는 마음이야. 운율이나 압운은 시를 꾸미는 장식 요소에 불과해."

이는 멍하니 도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방금 쓰신 시에 감정이나 주제가 어디 있습니까?"

"이건 내 전쟁 경험이다." 도란은 부적을 빤히 응시했다. "너도 내 나이가 돼서 피비린내 나는 살생을 목격하면 송화단에 포도주를 마시는 게 어떻게 시가 될 수 있는지 이해하겠지."

이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부적이 달린 다른 무기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다른 장인들도 이런 의문스러운 시를 썼을까?

이는 또 다른 검에 다가가 부적에 적힌 시를 읽어 보았다. "지치지 않는 공포와 악마, 끝이 없는 악과 악인…"

이 시는 전투용이 아닌 의례용 검에 붙어 있었다. 시를 보아하니 재판관이나 떠돌이 검객이 쓸 검인 것 같았다.

여전히 시를 쓰느라 정신없는 도란이 이를 힐끗 보았다. "아, 그건 라카의 검이다. 라카는 플레시디엄에서 꽤 유명한 장인이야. 라카의 검은 상당히 비싸지."

이는 나보리의 플레시디엄을 가 본 적이 없었지만 상인들이 그곳을 성소라고 부르는 것은 들었다. 우주보다 조금 더 큰 곳인 듯했다.

이는 또 다른 의례용 검 쪽으로 다가갔다. 이번 검은 지팡이로 쓰이는 검이었다. 티크 목재로 만든 손잡이에서 벌레 퇴치 효과가 있는 시원한 박하 향기가 솔솔 올라왔다.

눈먼 믿음은 정신을 해치고

눈먼 충심은 목숨을 해친다

도살자의 칼이 땅을 내리치면

모두 해를 입고 자신은 파괴된다

이가 시를 반 정도 읽었을 때쯤 도란이 끼어들었다. "그건 모리아의 검이다. 모리아는 항상 돈 없는 의뢰인을 위해 최상급 재료를 아끼지 않지. 의뢰인이 주로 사제나 수도승 같은 자들이거든. 그래서 무기를 만들수록 가난해지기만 해. 아직 나한테 진 빚도 갚지 못했지!"

도란이 붓으로 이의 근처를 가리켰다. "아, 그렇지! 저 검도 한번 봐라! 참 잘 만든 검이야!"

이는 몸을 돌려 도란이 말한 검을 찾았다. 날이 들쭉날쭉한 대검이었다. 자루에는 작은 파란색 부적이 달려 있었다.

부적에 적힌 것은 낯선 언어였다. 이는 마지막에 아이오니아어로 휘갈겨진 '리어'라는 단어만 겨우 읽을 수 있었다.

"리어는 그야말로 천재야. 남쪽 군도에 사는데, 자운에도 다녀온 적이 있지."

"자운이 어디입니까?"

"나중에 찾아봐라."

부적을 하나씩 읽어 나가던 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개폭포에서 저런 시 같지도 않은 시를 쓴 사람은 도란뿐인 듯했다.

이는 도란을 돌아봤다. "도란 사부님, 다른 장인들이 쓴 것은 그나마 시 같긴 하네요. 아무렇게나 쓴 사람은 사부님밖에 없습니다."

도란이 붓을 멈췄다. "아무렇게나?"

"감정도 중요하지만 시는 결국 형식으로 결정됩니다." 이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말했다. "시를 쓰려면 전통을 따라야 해요. 이건 영혼들에게 기본 예의를 지키고 경의를 표하는 길입니다."

"재미있구나." 도란이 미소 지었다. "너희 사부도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지. 우주류 수장도 아니었던 시절에 말이야."

"저희는 우주류 검사니까요." 이가 가슴을 쫙 폈다. "옛 방식을 지키는 것은 저희 의무입니다. 사부님의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얘기하는 것도 제 의무죠." 이는 도란을 돌아봤다. "아니요, 진짜 문제는 사부님의 시가 아닙니다. 저희가 여기 온 것 자체가 문제예요. 사부님은 더 좋은 검을 만들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이곳 영혼들을 들쑤시고 있습니다."

"우주류 검사라…" 도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넌 우주류를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

이의 짜증이 마침내 폭발했다. 이는 꽉 쥔 오른손을 등 뒤로 숨긴 후 억눌린 분노 때문에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훈련을 시작한 지 겨우 1년 되어 우주류를 거의 알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부님은 뭘 아시죠? 존경받는 장인이시지만 검술 훈련은 하루도 해 본 적이 없지 않으십니까? 저더러 이해를 얼마나 했는지 물어볼 자격이 되십니까?"

도란은 의연했다. "허, 재미있구나. 내가 왜 검술을 이해해야 하느냐? 오늘 훈련해야 하는 사람은 네 녀석이거늘."

이는 잘못 들었나 싶어 반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훈련이라고요? 오늘 산을 오르고, 쉬고, 검을 찾는 것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대체 그놈의 훈련은 언제 시작합니까?!"

도란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붓을 땅에 내려놓았다. "너희 사부가 가장 중요한 지식은 말로 가르칠 수 없다고 했다. 직관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니까. 너희 사부는 몇 년 전 바로 이곳에서 자신이 추구하던 답을 찾았지."

이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도란은 우주류의 일곱 가지 기본 신조 중 하나를 말하고 있었다. '성장이 멈춘 꽃은 비를 맞아야 활짝 피어난다.' 이는 도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난 우주류 검사가 어떤 훈련을 받는지 전혀 모른다. 네게 우주류를 얼마나 이해했는지 물은 것도 그 때문이야." 도란이 잠시 말을 멈췄다. "아니면 배운 게 전혀 없느냐?"

이는 창피한 마음에 시선을 돌렸다. "죄송합니다, 도란 사부님. 후롱 사부님께서 직관에 어떻게 이르렀는지 말씀하시던가요?"

"따로 묻진 않았다만 그때 어떤 시를 남기고 가더구나." 도란이 이의 뒤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대검을 가리켰다. "그 시는 저 검에 있다."

이는 머뭇거리며 대검 쪽으로 다가갔다. 흠과 균열로 뒤덮인 거대한 검은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된 상태였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크기 때문에 굳이 예리한 날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다.

시가 보이지 않자 이는 검을 더 잘 살펴보기 위해 옆으로 몇 걸음 이동했다. 그때 검이 희미하게 빛나는 게 보였다. 검은 일종의 유리 같은 소재로 만든 것 같았다. 호기심이 일은 이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반사되어 눈부시게 일렁이는 빛을 가볍게 만졌다.

이는 눈을 깜빡였다.
거대한 크기의 검이 땅에서 뽑히자 천둥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골짜기를 뒤흔들었다.

이는 넋을 잃고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각각 크기가 작은 산만 한 거인 열 명이 이의 앞에 서 있었다. 황금빛 갑옷과 이상한 투구로 무장한 거인들의 얼굴에서는 눈 대신 이글거리는 구 두 개가 불길한 빛을 내며 타오르고 있었다. 거인들의 거대한 검에서는 석양빛이 반사됐다.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거인들은 그 복장 때문에 하늘에서 강림한 신 같아 보였다.

저 멀리 보이는 구릉에서는 또 다른 거인 오십 명이 느릿느릿 다가오는 중이었다. 거대한 무기를 든 거인들은 자리에서 멈추더니 지시를 기다리듯 가만히 서 있었다.

뒤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돌린 이는 무수한 얼굴을 마주했다.

처음에는 익숙한 얼굴 같아 보였다. 우주 마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좀 더 흐릿하고 희미했다. 곧 사람들은 빗속 수채화처럼 녹기 시작했다.

그때 사람들의 모습이 점점 뚜렷해졌다. 이는 이들이 자신이 만나 본 어떤 사람들과도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등이 깃털로 뒤덮여 있거나, 손가락이 세 개밖에 없거나, 피부가 초록색이었다. 큰 키에 건장한 체격도 눈에 띄었다. 유연해 보이는 몸에는 화려한 색상의 옷이 걸쳐져 있었다. 윤이 나는 비늘을 두른 자도 보였다.

그대로 얼어붙은 이가 나직이 말했다. "저게… 저게 뭐지?"

어느새 도란의 모습을 한 영혼이 이의 옆에 나타나 붉은 눈으로 응시하며 차갑게 대답했다. "너희는 저들을, 우리를 바스타야샤이레이라고 불렀다."

이런 길고 장황한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는 영혼을 유심히 살펴봤다. 옷 때문에 두 발로 서 있는 학처럼 보였다.

영혼은 바스타야샤이레이를 가리켰다. "우리는 이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의 시선이 거인 군단 쪽으로 향했다. "어떻게 저런 괴물들을 이길 수 있죠?"

영혼은 대답하지 않았다.

바스타야샤이레이라는 이상한 존재들을 이끄는 듯 보이는 장로 열 명이 무리 속에서 나타났다. 그중 하나가 앞으로 나와 두 손을 포개더니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땅을 쾅 내리치자 땅이 거인들 쪽으로 갈라지며 온 골짜기가 흔들렸다. 깊은 골이 두 군대를 갈라놓았다.

동시에 다른 아홉 명의 장로가 마법을 사용했다. 장로들이 가부좌를 틀거나 춤을 추기 시작하자 휘몰아치는 강풍과 무시무시한 먹구름이 전장을 엄습했다. 하늘에서 번개가 번쩍이자 천둥이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났다. 갈라진 틈 바로 앞에 선 또 다른 장로는 거대한 덩굴을 만들어 냈다. 땅에서 튀어나온 어마어마한 덩굴은 이리저리 뒤얽혀 높이가 사람 키의 여섯 배 정도 되는 벽을 형성했다.

자연의 힘을 저렇게 다루는 것은 신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모든 게 환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경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뭐가 보이지? 이것이 힘이라고 생각하나?" 영혼이 물었다.

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것이 힘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튼튼한 갑옷과 강력한 무기로 무장하지 않았다. 피에 굶주려 불타오르는 군대처럼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니다. 넌 어디에서 힘을 보았지?"

"당신들은 바람을 다스리고, 폭풍을 부르고, 땅을 갈랐습니다. 그게 힘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영혼은 거인들을 가리켰다. "어떻게 저런 괴물들을 이길 수 있냐고 물었지. 그 질문은 틀렸다. 넌 저 거인들이 바로 이 땅을 창조한 신성한 힘과 어떻게 맞설 것인지를 물었어야 해."

거인들은 바스타야샤이레이의 엄청난 마법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거인들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환희에 차 포효하자 선봉에 선 열 명의 거인이 거대한 검을 들어 올리며 돌진했다. 어마어마한 크기 때문에 마치 바스타야샤이레이를 향해 산맥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바스타야샤이레이는 움찔하지 않았다. 장로들이 진격하자 무리가 그 뒤를 따랐다. 어떤 자들이 몸을 낮추더니 앞으로 튀어 나가며 벌코달크, 비늘 덮인 도미, 늑대 같은 짐승으로 변해 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다른 자들은 조류의 형상으로 변해 날아가더니 화살처럼 공중으로 치솟았다. 순식간에 바스타야샤이레이는 사냥감을 추적하는 거대한 무리가 되었다.

거인들은 의외로 민첩했다. 갈라진 틈을 뛰어넘더니 그 너머에 있는 덩굴 벽을 가볍게 뜯어낸 후 짐승 떼를 향해 뛰어들었다.

거인들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어마어마한 힘이 가해졌다. 선두에 있던 조류 전사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다른 전사들은 그에 굴하지 않고 날개를 퍼덕이며 마법으로 검처럼 날카로운 바람을 날렸다. 바람은 거인의 갑옷 틈으로 얕고 붉은 선을 새겼다. 보통 사람이라면 두 동강이 났을 일격이었지만 거인들은 속도조차 늦추지 않았다.

바스타야샤이레이의 지상군도 만만치 않게 용맹했다. 비늘 덮인 도미들이 거인을 쓰러뜨리기 위해 육중한 몸을 날려 공격하는 동안 벌코달크들은 뿔과 날카로운 이빨로 적을 공격했다.

땅에서 거대한 나무들이 뽑혀 말뚝처럼 뾰족하게 깎였다. 나뭇가지는 채찍처럼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천둥이 우르릉거리자 신의 분노 같은 어마어마한 번개가 지면에 떨어져 커다란 구멍을 남겼다. 그러나 세상에 종말이 온 듯한 광경에도 거인들은 멈추지 않았다. 덩굴이 발을 붙잡고 짐승들이 몸 위로 기어오르며 쓰러져 목숨을 잃는 거인도 있었지만, 거인 군단은 계속해서 싸우고 포효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거인들은 자신감에 찬 듯 속도를 더욱 높이며 무수한 시체를 밟고 나아가 짐승 군단의 전열을 흐트러뜨렸다.

공기 중에 잔인함의 냄새가 퍼졌다. 코를 찌르는 듯한 게 꼭 진짜 같았다.

바로 그 순간 한 거인이 이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거인은 이글거리는 눈을 빛내며 곧장 이에게 다가왔다. 정신이 아득해진 이는 방어 자세를 취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거인이 이를 향해 돌진하자 영혼이 이의 칼집에 손을 얹었다.

"바람과 비. 천둥과 번개. 산사태. 심지어 몸까지. 모든 것은 형태에 불과하다. 본질을 찾을 수만 있다면 모든 형태는 지척에 있는 것과 같지. 이것은 검을 힘으로 채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영혼이 말하자 거인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바스타야샤이레이의 공격 역시 그랬다. 심지어 번개조차 느릿느릿 움직였다. 마치 이 주변의 모든 것이 정지되는 것 같았다.

그때 깨달음이 이의 머리를 스쳤다. "그 말씀은—"

"우주류." 영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류는 영혼 세계에서 힘을 끌어내지. 바스타야샤이레이가 형태를 바꾸고 자연을 다루는 방법도 그와 같다. 힘을 얼마나 쓰는지가 다를 뿐이야. 우주류를 창시한 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뛰어난 마법사였던 모양이구나."

"말도 안 됩니다!" 이가 소리쳤다. "저희는 마법사가 아니라 검사예요."

"형태! 마법사든 사제든 수도승이든 불리는 이름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전부 겉으로 취하는 형태에 불과하니까." 영혼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우주의 핵심은 마법이야. 우주류의 핵심은 이 마법을 쓰는 자들이지. 지금까지 네가 익힌 자세, 시, 명상은 전부 이 마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반박하고 싶었다. 정확한 형태는 우주류의 본질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때 이는 불현듯 이것이 논쟁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영혼은 이에게 우주류를 가르치는 중이었다. 사부님이 말했던 훈련은 바로 이것을 얘기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그 마법은 어떻게 써야 합니까? 제 검술과 명상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영혼 세계에서 힘을 끌어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 검술과 명상이 문제의 원인이다."

이의 칼자루를 쥔 영혼은 검의 대가 같은 모습으로 여러 자세를 취하며 무딘 검을 뽑았다. 이는 영혼이 몇 가지 동작을 보여 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영혼은 검을 뚝 부러뜨려 땅에 던졌다.

"마법을 끌어내는 것은 검이 아니라 바로 너다. 넌 검술과 명상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쓸모없는 형태에만 온 신경을 쏟고 있어. 네게 모든 우주류 검사가 지녀야 할 직관이 부족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해가 안 됩니다."

"검과 적은 잊어라. 스승의 가르침도 전부 잊어. 영혼 세계에 닿는 그 순간에도 네가 명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라. 네 움직임이 매번 맞았는지 틀렸는지 생각하는 것도 집어치워."

갑자기 전장에 다시 혼란이 찾아들었다. 거인이 검을 들어 올리며 다시 이에게 달려오는 속도를 높였다. 이에게 몸을 지킬 것이라곤 나무 칼집 하나뿐이었다.

"이제 네 차례다." 영혼이 한 걸음 물러섰다. "스스로에게 물어봐라. 자신보다 힘이 압도적으로 강한 적을 쓰러뜨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는 얕은 숨을 쉬며 칼집을 검처럼 뽑아 자세를 잡았다.

거인이 발을 디딜 때마다 땅이 흔들렸다. '이건 환영일 뿐이야.' 이는 머릿속으로 되뇌었지만 호흡은 안정되지 않았다.

이는 주위에 영혼 세계의 마법이 마치 거대한 강처럼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검으로 끌어내려고 했을 때는 도저히 느낄 수 없었던 힘이었다.

그러나 검은 형태에 불과했다. 칼집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마찬가지다.

자신보다 힘이 압도적으로 강한 적을 쓰러뜨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강이 되어야만 해.

거인이 엄청난 힘으로 검을 휘둘렀다.

이는 거의 본능적으로 칼집을 들어 올려 공격을 막았다. 칼집과 검이 부딪치자 그 충격에 온몸이 울렸다. 그러나 이는 계속해서 서 있었다. 일격을 견딘 게 다가 아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부실해 보이는 나무 칼집으로 거인의 거대한 무기에 흠집까지 내는 데 성공했다.

자신감이 붙은 이가 자세를 바꿔 칼집을 사선으로 휘두르자 검에 금이 갔다. 거인은 머뭇거리더니 무기를 거두어 살펴보았다. 손상된 날을 본 거인은 분노와 경악에 차 고함을 질렀다. 거인의 이글거리는 눈이 투구 밑에서 흐릿해졌다.

이도 방금 일어난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는 칼집 측면을 검지로 살살 쓸어 보았다. 흠이나 금조차 생기지 않은 칼집은 마치 예리한 날이라도 지닌 것처럼 이의 손가락 끝을 베었다.

"느껴지나?" 영혼이 앞으로 다가와 이의 손을 쥐고 상처가 난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널 따르는 이 힘이 느껴지냐는 말이다."

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느낌을 기억해라. 그리고 네 발밑이 아닌 대상을 겨냥하도록 해." 영혼은 거인을 가리켰다. "검이 아닌 네 몸과 마음으로 공격해라."

영혼은 계속 말이라는 형태를 빌려 말하고 있었지만 이는 이제 이해했다.

영혼이 뒤로 물러서자 다시 거인이 공격해 왔다. 이번에 거인은 무릎을 꿇고 낫으로 작물을 수확하듯 검으로 지면 가까이를 쓸었다.

이는 완전히 집중했다. 숨을 죽이고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머리 위로 두 팔을 들어 올려 칼집으로 상체를 보호했다. 훈련할 때는 목적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자세였지만, 장막이 걷히듯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거인의 검이 닿으려는 순간 이는 무기를 든 자세 그대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해일과 같은 기세로 달려 나가 몸을 던지며 검을 휘둘러 거인의 공격을 맞받아쳤다.

이가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무기를 갈무리했을 즈음에는 이미 반으로 잘린 거인의 검날이 끈 떨어진 연처럼 땅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가속도 때문에 몸이 붕 뜬 거인은 땅으로 처박혔다. 거인이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 순간 번개 한 줄기가 거인의 등을 강타했다. 그리고 수십 명의 바스타야샤이레이가 벌 떼처럼 거인을 덮쳤다. 거인의 눈은 분노와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는 놀라서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산도 가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입니다!"

영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류에 통달한 검사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갑옷은 없다. 힘을 충분히 끌어낼 수만 있다면 산, 숲, 심지어 온 세상을 가르는 것도 가능하지."

이는 너무 흥분해서 주먹을 꽉 쥐고 덩실덩실 춤까지 출 뻔했다. 이 모습을 본 영혼은 재빨리 헛기침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환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라."

"음, 그럼요." 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영혼이 저런 말을 하니 이상했다.

"인간이 영혼 세계에서 끌어낼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영혼이 씩 웃었다. "현실에서 이런 상대를 만난다면 그땐 도망치는 게 좋을 것이다. 거인의 발톱조차 베어 내지 못할 테니까."

"물론입니다." 이는 뒤통수를 문질렀다. "알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바알은 평화로운 곳이었다. 저런 적을 베어야 할 일은 없을 것이다.

"우주류 수련자는 많이 봤지만 넌 그중에서도 아주 뛰어나구나. 쓸데없는 노력으로 네 삶을 낭비하지 말아라." 영혼은 이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려 이의 실력을 가늠했다. "원한다면 다른 것도 가르쳐 주마."

이는 눈을 빛냈다. "좋습니다!"

"넌 바알 출신이니—"
이는 어느새 안개폭포로 돌아와 땅에 박힌 거대한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은 물에 흠뻑 젖은 상태였다. 방금 도란이 가죽 부대에 담긴 물을 이의 얼굴에 뿌린 것이다.

"몇 번 흔들었는데 반응이 없길래 어쩔 수 없었다." 도란이 이에게 가죽 부대를 넘기며 웃었다. "자, 마셔라. 정신이 좀 들 게다."

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사부님! 조금만 더 기다리실 수는 없었습니까?!"

"음? 거인을 쓰러뜨리기 일보 직전이었느냐?"

"그게 아니라…" 이가 얼어붙었다. "잠깐만요! 사, 사부님도 환영을 보셨습니까? 거인과의 전투도 다 보셨고요?"

"너희 사부가 한 얘기를 들었을 뿐이다. 여기에서 그런 환영을 보는 것은 우주류 검사뿐인 것 같구나." 도란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신이 나 보이는데, 뭔가 알아낸 모양이지?"

이는 칼집을 내려다보더니 무딘 검을 뽑았다. 그리고 거대한 검 앞에 서서 눈을 감고 사제가 기도하듯 경건히 심호흡했다. 잠시 후 이가 검을 들어 올려 휘두르자 검을 타고 마법이 흘렀다. 강력한 힘에 거인의 검이 반으로 갈라졌다. 이제 땅에는 잘린 검날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도란이 숨을 헉 쉬었다. "허!"

"어떻습니까?" 이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웃음이 스멀스멀 번졌다.

"대체 누구와 얘기했느냐?" 도란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가 도란의 모습을 한 영혼이었다고 말하려는 찰나 갑자기 영감이 머리를 스쳤다. "도란 사부님! 붓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도란은 돌아서서 먹이 묻은 붓을 가져와 이에게 건네주었다. "왜? 너희 사부처럼 네 기분을 시로 남길 생각이냐?"

붓을 건네받은 이는 다시 땅에 남아 있는 거인의 검 쪽으로 다가갔다. 시작하기 전 손바닥으로 검을 쓸자 언뜻 먹의 흔적 같은 것이 보였다. 이곳에 붓으로 글을 남기면 비바람 때문에 형체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가 쓰는 시는 다른 방문자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저희 사부님은 기분을 시로 남기신 게 아닙니다." 이는 첫 번째 단어를 쓰며 말했다. "감사의 인사를 시로 남기신 것이죠."

이가 시를 마무리했을 때쯤 도란은 대나무 바구니에 검을 전부 챙겨 어깨에 지려는 참이었다. 이는 짐을 들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다. 하지만 도란은 이를 막았다.

"내가 드마. 오늘 네 훈련은 끝나지 않았느냐."

고개를 끄덕인 이는 도란이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남겨 둔 검들을 바라보았다.

"사부님, 어느 게 제 검입니까?"

"네 검은 없다. 네게 주려고 만든 검은 하급 수련생이 대신 받게 될 거야."

"예?" 이는 믿을 수 없었다. "하급 수련생이요? 누구 말입니까?"

도란은 콧방귀를 뀌더니 돌아서 이를 두고 가 버렸다.

이는 도란의 뒤를 쫓았다. "어째서입니까, 사부님?"

도란은 곤혹스러운 듯 한숨을 쉬더니 자신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네게는 쓸모없으니까."}}}

4. 구 설정

아래의 설정들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는 폐기된 설정들이다.

===# 구 배경 1 #===
아이오니아 출신이며 고대 검술 우주류의 전승자라는 것 외에 마스터 이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우주류는 자신과 적에 대한 절대적인 영적 깨달음에서 출발하는 무술로, 마스터 이의 일족은 이를 보존해 후세에 남기는 것을 대대로 사명으로 삼고 있었다. 녹서스의 군대가 아이오니아를 침공했을 때, 마스터 이는 전장으로 떠나 아이오니아의 전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으며 비열한 녹서스군을 상대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누구도 마스터 이의 검을 당해낼 수 없었다는 소식은 그의 고향 사람들에게 큰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아이오니아는 황폐해져 갔고 이윽고 운명의 날, 일찍이 본 적 없었던 참혹한 공포가 마스터 이가 자리를 비운 그의 고향 마을을 덮쳤다. 녹서스군이 화학 무기로 이 마을을 공격한 것이었다. 이 만행의 목적은 신지드라는 젊은 화학자가 만들어낸 최신형 화학 무기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마스터 이가 고향 마을에 돌아왔을 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폐허만이 남겨져 있었다. 이날의 참상은 아이오니아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있으며, 아이오니아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이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꺼린다.

녹서스의 침략군이 물러간 후, 마스터 이는 바깥 세상을 외면하고 칩거에 들어갔다. 그리고 수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돌안 그는 밤낮없이 검술 연마에만 몰두했으며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그를 위로해 주려던 아이오니아 동포들조차 만나려 하지 않았다. 마스터 이는 당장이라도 녹서스로 쳐들어가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지만, 후손들에게 우주류 검술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 때문에 인내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는 초조함을 억누르며 분노를 연장 삼아 우주류의 기술을 갈고 닦았고, 언젠가 다가올 복수의 날을 위해 더 강력하고 치명적인 기술을 만들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리그 오브 레전드가 창설되고 녹서스도 리그에 참가한다는 소식이 전해오자 드디어 마스터 이는 떨쳐 일아났다. 이제 경지에 오른 우주류 검술과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친족들의 원수를 갚고 녹서스의 횡포에 마침표를 찍는 날까지 그는 싸울 것이다.

마스터 이와 하나가 되어 살아 숨쉬는 우주류 검술이 적들의 심장을 꿰뚫을 것입니다. - 별의 아이 소라카

===# 구 배경 2 #===
마스터 이는 고대 검술 우주류를 수련하며 심신을 갈고 닦아, 마침내 마음으로 동작을 생각하기만 해도 현실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경지에 이른 무예가다. 그는 이 신비로운 고대 무술의 일인자로 언제나 신속하게 결단을 내린 다음 우아하면서도 날렵하게 검을 사용해 적들을 섬멸한다. 우주류의 마지막 전승자인 마스터 이는 이제 절멸해 버린 동족들을 대신해 이 찬란한 유산을 계승할 제자를 찾아 모든 것을 바치고 있다.

마스터 이는 이 고대 검술의 전승자들 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실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나 마스터 이가 이 우주류를 완벽하게 통달하기 바로 직전, 녹서스의 대군이 아이오니아를 침략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는 무력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가만히 두고 볼 수 만은 없었기에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이내 마스터 이는 화려하고 치명적인 검술을 선보이며 아이오니아의 전장을 휩쓸었고 녹서스 대군의 사기를 꺾어버리는 것은 물론 녹서스 최고사령부를 당황하게 하였다. 낙승을 예상했던 녹서스군은 우주류 계승자들이 자신들의 침략 전쟁에 커다란 걸림돌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우주류의 본산에 끔찍한 화학 무기를 살포하기에 이른다. 감히 대적할 길이 없던 우주류 계승자들은 이 단 한 번의 폭격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고, 독극물을 뒤집어쓰고도 살아남은 이들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 그렇게 마스터 이의 고향은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마스터 이가 전장에서 돌아왔을 때, 그를 반기는 것이라고는 기괴한 유적처럼 변해버린 고향 마을의 처참한 잔해뿐이었다. 그는 후미진 자신의 마을에까지 녹서스의 손길이 뻗칠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 못 했던 것이다. 그의 가슴엔 이제 이글거리는 복수심만이 살아남아 불타올랐고, 사랑하는 고향을 이토록 무참하게 난도질한 무뢰한들을 결단코 응징하리라 결심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주류 검술의 완성이 필요했다. 우주류 계승자의 마지막 생존자이자 이 침략전쟁의 마지막 희생자였던 마스터 이는 그 길로 오랜 칩거 생활에 들어가 오직 수련과 명상에만 몰두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훨씬 막강한 검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우주류의 본질에 다가가기는 더욱 어려워질 뿐이었다.

좌절감이 극에 달했을 무렵, 어느 날 마스터 이의 앞으로 유달리 고귀한 자태를 지닌 원숭이 한 마리가 난데없이 툭 튀어나왔다. 게다가 마치 사람처럼 당당하게 두 발로 서서는 마스터 이의 동작 하나하나를 유심히 지켜보더니 그대로 따라 해내는 것이 아닌가! 그는 원숭이를 쫓아보려고도 했으나 이 민첩한 동물은 그때마다 요리조리 피해가며 마스터 이의 동작을 흉내 냈고, 또 그것이 몹시 즐거운 기색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장난기 넘치는 원숭이와 대련할수록 내면의 분노가 점차 사그라지는 것이 느껴졌고, 이윽고 이 원숭이를 향한 가벼운 증오심마저 떨치고 나자 문득 그것의 꼬리를 붙잡을 수가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마스터 이는 복수의 수단으로 우주류 검술을 수련하는 한 영원히 그것을 완성할 수 없다는 진리를 불현듯 깨달았다.

마스터 이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해준 원숭이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시했다. 그리고 이 원숭이를 놓아주며 적들의 피를 보고야 말겠다는 불순한 욕망도 함께 내려놓았다. 그런데 이 원숭이가 마스터 이에게 되돌아와 무릎을 꿇더니 정중하게 예를 갖추는 것이었다. 게다가 마스터 이의 무예를 전수받고 싶다며 사람의 말로 대답하는 게 아닌가. 마스터 이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지만, 그토록 찾아 헤매던 우주류를 전수할 제자를 만났다는 사실에 비로소 감격하기 시작했다. 마스터 이는 이제 이 새로운 세대에 동족의 가르침을 전하며 영원히 그들을 기리겠노라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