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6-05 20:26:37

리옹넬 드 부르농빌

성명 리옹넬 드 부르농빌
Lyonnel de Bournonville
생몰년도 1390년경 ~ 1429년 9월
출생지 프랑스 왕국 파드칼레 주 불로네
사망지 프랑스 왕국 일드프랑스 생놈라브레테슈
아버지 보두앵 드 부르농빌
형제 기욤 드 부르농빌
아내 잔 드 빌리에
자녀 장(사생아)
직위 생놈라브레테슈 영주, 기사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부르고뉴 공국의 군인. 백년전쟁 시기 부르고뉴파의 일원으로서 활약했다.

2. 생애

1390년경 프랑스 왕국 파드칼레의 불로네 출신인 부르농빌 가문의 일원으로 출생했다. 아버지는 보두앵 드 부르농빌이며, 어머니는 알려지지 않았다. 형제로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를 섬겼던 기욤 드 부르농빌이 있었다. 사촌으로 용맹공 장을 따라 아르마냑파와 대적했다가 1414년 5월 26일 수아송 공방전에서 체포된 뒤 처형된 앙게랑 드 부르농빌과 앙게랑의 형제로서 부르고뉴파의 일원으로서 활약하다가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한 알레움 드 부르농빌이 있었다. 이 세 사람은 할머니 마호트 드 파인즈를 통해 프랑스 무관장 로베르 드 파인즈의 조카였다.

1408년 사촌 앙게랑 드 부르농빌의 군대에 가담해 오테 전투에서 아르마냑파를 격파하는 데 일조했으며, 1409년 앙게랑과 함께 파리에 입성했다. 1415년 10월 25일 아쟁쿠르 전투에 다른 부르고뉴 영주들괗마게 참전했다가 다른 부르농빌 가족들이 대거 피살당할 때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1416년 동료였던 자코탱 드 그리니가 자신의 명예를 실추했다는 이유로 살해한 뒤 아르마냑파로 전향했지만, 1417년 용맹공 장과 화해하고 부르고뉴파에 귀환한 뒤 용맹공 장이 불로뉴 백국을 정복하는 데 일조했다.

1418년 장 빌리에 드 릴라당이 지휘하는 중대에 참여해 파리를 공략하는 데 일조했으며, 1419-1420년경 장 빌리에 드 릴라당의 여동생인 잔 드 빌리에와 결혼했다. 1419년 아르마냑파에게 사로잡혀 쿠시 성에 갇혔다가 부르고뉴인들이 이 성을 공략한 덕분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후 장 드 빌리에의 명령에 따라 잉글랜드군과 전쟁을 벌인 뒤 기조르 성채 수비대장이 되었고, 그곳에서 군대를 조직한 뒤 세리폰테인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제1대 팬호프 남작 존 콘월이 이끄는 잉그랜드군이 기조르를 포위하자, 그는 그들과 협상한 끝에 1419년 9월 11일 무장한 채 떠나는 걸 허용받는 대가로 기조르 성채를 넘겨줬다.

1420년 4월 장 빌리에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고, 생놈라브레테슈 영주가 되었다. 이후 트루아 조약이 성립되었고, 그는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의 휘하에 들어가서 도팽 샤를 지지자들에 맞서 브리, 샹파뉴, 바로아, 피카르디 일대에서 전쟁을 벌였다. 1423년 장 빌리에와 함께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에 합류했고, 1424년 콩피에뉴 공략을 이끌었다. 1426년 장 빌리에와 함께 에노의 자클린을 몰아붙인 끝에 저지대 국가를 정복했으며, 1429년까지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에서의 책무를 번갈아가며 수행했고, 슌호벤(Schoonhoven) 마을의 대장에 선임되었다.

1429년 베드퍼드 공작 존에 의해 크레유 시의 대장에 선임되었지만, 샤를 7세의 군대에 의해 축출되었다. 1429년 9월 10일 베드퍼드 공작에 의해 프레시쉬르와즈의 영주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 땅은 샤를 7세를 따르는 프랑스군이 통제하고 있어서 리옹넬이 이곳을 다스릴 수는 없었다. 이후 프랑스군이 탈취한 생놈라브레테슈를 되찾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지만, 1429년 9월 22일에서 30일 사이에 공성전 도중에 부상을 입고 곧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잔 드 빌리에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다. 다만 '노티네 드 부르농빌(Notinet de Bournonville)'로 알려진 사생아 장이 있었는데, 이 인물은 아버지와 함께 여러 전장에서 활동했고, 1460년 이후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