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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4-22 21:11:25

륀 포트발

파일:륀 포트발 로고.svg
륀 포트발
Lyn Fotball
<colbgcolor=#fff><colcolor=#f00> 정식 명칭 Lyn 1896 Fotballklubb
별칭
창단 1896년 3월 3일 ([age(1896-03-03)]주년)
소속 리그 OBOS 리가엔 (OBOS-ligaen)
연고지 오슬로 (Oslo)
홈구장 비슬렛 스타디온 (15,400명 수용)
(Bislett stadion)
회장 토레 포르모 (Tore Formo)
감독 얀할보르 할보르센 (Jan Halvor Halvorsen)
UEFA 랭킹 -
공식 웹사이트 파일:륀 포트발 로고.svg
우승 기록
노르웨이 엘리트세리엔 (1부)
(5회)
1964, 1968
노르웨이컵
(8회)
1908, 1909, 1910, 1911, 1945, 1946, 1967, 1968
이적 기록
최고 이적료 영입 -
최고 이적료 방출 -
1. 개요2. 역사

1. 개요

노르웨이의 축구 구단. 1896년에 창단되어 노르웨이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 클럽 중 하나이다. 1902년 노르웨이 축구 협회의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엘리트세리엔 우승을 2회[1964년,] 차지했으며, 노르웨이컵은 8회 우승했다. 특히 UEFA 컵위너스컵에서는 8강까지 진출한 경험이 있다.

울레볼 스타디온의 건설을 주도한 클럽이기도 하며, 이 경기장은 1927년부터 노르웨이 축구 국가대표팀의 홈 경기장으로 사용되었고 1926년부터 2010년까지 륀의 홈 구장이었다. 전통적으로 륀은 오슬로의 상류층과 중산층을 대변하는 클럽으로 여겨졌으며, 동부 지역의 클럽인 볼레렝아 포트발이 노동자 계층과 연관된 것과 대조되었다. 2010년 파산 이후 구단이 재건되었으며, 2023년에는 승격을 통해 현재 OBOS 리가엔에서 경기하고 있다.

2. 역사

륀은 1896년 3월 3일 오슬로의 세인트한스하우엔에서 창단되었다. 1902년 노르웨이 축구 협회를 창립한 3개 클럽 중 하나였으며, 현재까지 존재하는 유일한 창립 클럽이다. 노르웨이 축구의 초창기인 1900년대 초반에 가장 강력한 클럽 중 하나였으며, 1908년부터 1911년까지 4년 연속 노르웨이컵을 차지했다.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차지한 노르웨이 축구 국가대표팀에는 륀 소속 선수 6명[2]이 포함되었으며, 유베가 주장을 맡았다. 외르겐 유베는 현재까지도 노르웨이 대표팀 최다 득점자로 남아있다.

륀은 1945년과 1946년에도 노르웨이컵을 차지했지만, 리그 우승은 1964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하랄 베르그와 올라 디브바-올센의 활약으로 1967년 노르웨이컵에서 다시 우승했고, 1968년에는 리그와 컵을 모두 차지하는 더블을 달성했다. 같은 해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에서는 노르웨이 클럽 최초로 8강에 진출해 FC 바르셀로나를 만났다. 노르웨이의 겨울 기후 조건 때문에 두 경기 모두 스페인에서 열렸는데, 륀은 첫 경기에서 2-3으로 패했고, 두 번째 경기에서는 남은 시간 15분을 남기고 2-0으로 앞섰지만 결국 2-2로 경기가 끝나며 탈락했다.

더블 이후 구단은 암흑기를 겪었다. 1969년에 강등되었고, 비록 1년 만에 승격하여 1970년 컵 결승에 진출했지만 1973년에 다시 강등되었다. 이후 30년 동안 륀은 1부와 3부 리그 사이에서 승강을 반복했으며, 1부 리그에서 3시즌 이상 연속으로 플레이한 적이 없었다. 이 기간 동안 팬층이 감소하여 구단은 '한 세대의 지지자를 잃었다'고 평가받는다. 1990년대 동안 구단은 1부와 2부 리그 사이를 오갔다. 1994년에는 노르웨이컵 결승에 진출했지만 몰데 FK에 2-3으로 패했다.

1999년 노르웨이 투자자 아틀레 브리네스타트가 파산 위기에 처한 클럽을 인수했다. 2000년에는 기록적인 점수 차로 2부 리그를 우승하며 1부 리그로 승격했고, 다음 시즌에도 1부 리그 자리를 유지했다. 2002 시즌에는 초반에 선두를 달리며 시즌 중반까지 큰 격차를 벌였지만, 후반기 폼 저하와 새 감독 흐르보예 브라오비치의 논란이 있는 임명으로 인해 3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코치의 지속적인 해고와 채용으로 인한 혼란은 다음 해까지 이어졌다. 륀은 시즌 대부분을 최하위권에서 고전했지만 5번째 코치였던 테이투르 토르다르손이 사임한 후 주장 토미 베른트센이 코치 역할을 맡아 강등을 면했다. 2004년은 6위 리그 마감과 노르웨이컵 결승 진출[3]로, 회복의 한 해였다.

2005년은 구단에게 경기장 안팎에서 다사다난한 해였다. 클럽의 유스 프로그램이 성과를 내기 시작했고, 전 국가대표 선수 헤닝 베르그가 새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리그 3위를 차지했다. 륀은 1968년 이후 처음으로 울레볼에서 로센보르그 BK를 물리쳤고, 원정 경기에서도 이 성과를 반복했다.

4월에는 클럽의 재능 있는 나이지리아 미드필더 존 오비 미켈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 계약했으며, 륀의 매니징 디렉터 모건 안데르센에 따르면 이는 당시 노르웨이 축구 사상 가장 비싼 이적이었다. 그러나 이 이적은 이후 치열한 분쟁의 원인이 되었고, 미켈은 대신 첼시 FC에 합류했다. 이 이적은 첼시에 1600만 파운드의 비용이 들었으며, 이 중 1200만 파운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400만 파운드는 륀에게 지급되었다. 2007년, 클럽은 나이지리아 국가대표 치네두 오바시를 TSG 1899 호펜하임에 약 500만 유로에 판매했다.

2008년 10월 10일, 첼시는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륀 오슬로와 전 디렉터 모건 안데르센을 상대로 법적 절차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전체 160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회수하기 위한 시도였으며, 첼시는 원래 이적 계약이 사기적 허위 진술에 근거했다고 주장했다. 2009 시즌은 팀이 티펠리겐에서 강등되었고 마지막 순간에 청산을 면하는 등 다시 한번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를 보였다. 2010 시즌에는 2부 리그에서 셰이드 포트발과 함께 비슬렛 스타디온에서 경기를 치렀다. 2010년 4월 이다르 볼비크의 회사 루도가 클럽의 최신 스폰서로 소개되어 재정 위기에서 클럽을 구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고, 2010년 6월 30일 클럽은 파산을 선언했다.

파산 이후, 륀의 팬들은 2010년 시즌 남은 기간 동안 6부 리그에서 생존한 클럽의 팀 주변에 모였다. 홈 경기를 프로그너 스타디온으로 옮겨 대규모 관중이 홈 경기를 관람했다. 2010년 말, 륀 클럽은 파산한 1부 리그 클럽의 예비 팀과 관련된 모든 부채를 상환했다. 그 후 축구 협회는 륀에게 예전에 예비 팀이 보유했던 라이센스를 수여하여 클럽이 4부 리그에서 2011 시즌을 플레이할 수 있게 했다. 핀 브레도 올센이 이끄는 륀은 무패 시즌을 기록하며 3부 리그로 승격했다. 2012년 9월 30일, 륀은 프로그너 스타디온에서 2,113명의 관중 앞에서 로메달렌을 9-0으로 물리치며 2부 리그로의 승격을 확정했다. 여섯 시즌간의 3부 리그 생활 끝에 륀은 2022년 2부 리그로 승격했으며, 다음 시즌인 2023년에는 2010년 이후 처음으로 1부 리그로 승격했다.
[1964년,] 1968년[2] 아르네 브루스타, 외이빈 홀름센, 프레드릭 혼, 마그나르 이삭센, 외르겐 유베, 프리티요프 울레베르그[3] SK 브란에게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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