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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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ud Lubbers
뤼돌퓌스 프란시스퀴스 마리 뤼버르스
Rudolphus Franciscus Marie Lubbers, 1939.5.7 ~ 2018.2.14(향년 7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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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덜란드의 정치인, 외교관.2. 생애
로테르담에서 태어나고 대학까지 나온 인물로, 34세 때인 1973년 경제장관으로 입각해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정계에서 빠르게 성장해 1982년 총리에 취임하는데, 이때 나이 43세로 현재까지 네덜란드 역사상 최연소 총리로 남아있다.취임 당시 네덜란드는 고질적인 경제 문제(일병 네덜란드병)에 직면해 있었는데, 이때 뤼버르스는 위기에 직면하던 네덜란드의 경제를 회생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가 취한 조치는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민영화를 취하는 등 전형적인 신보수주의 경제정책이었는데, 같은 시기 영국 총리이던 마거릿 대처와 비교되는 경향이 있었다. 덕분에 그의 인기는 높았고, 1986년과 1989년 총선에서 연이어 승리하면서 장기 집권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총 집권기간은 11년 291일로, 마르크 뤼터가 집권하기 이전에는 가장 오랜기간 임기를 수행한 총리로 남아있었다.
1994년 수상직 사임 의사를 밝혔고, 이어 진행된 총선에서 그가 속한 기독민주애원당은 노동당에 밀려 패한다.[1] 그후에는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하고 학계에서 주로 활동하다가, 2000년 유엔 고등 난민 판무관으로 임명되었다. 난민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면서 제2의 인생은 호락호락할 듯 싶었으나, 몇 년 후 미투에 휘말리면서 중대한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본인은 결백을 주장했으나, 결국 여론의 뭇매를 못 이기고 사임하게 된다.
이렇게 두 인생 다 좋지 않은 끝마무리를 남긴 채 여생을 보내다가 2018년 향년 78세로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