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6-03 20:06:25

레지날드 브레이

파일:mid_ppa434369.jpg
성명 레지날드 브레이
Reginald Bray
출생 1440년
잉글랜드 왕국 우스터셔 세인트 존 베드워딘 교구
사망 1503년 8월 5일
잉글랜드 왕국 런던
아버지 리처드 브레이
어머니 조앤 트로튼
배우자 캐서린 허시
직위 랭커스터 공국과 팔라틴 백작령의 집사, 재무장관, 왕실 재산 관리인

1. 개요2. 생애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기사, 군인, 정치인. 장미 전쟁 시기 버킹엄 공작의 반란에 가담했고, 헨리 7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는 데 일조했다. 이후 헨리 7세와 헨리 7세의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의 재산 관리인이자 고문으로 활약했다.

2. 생애

1440년경 잉글랜드 왕국 우스터셔 세인트 존 베드워딘 교구에서 툴챙했다. 그는 베드퍼드셔에 토지를 소유한 기사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는 리처드 브레이 경이고 어머니는 조앤 트로튼이다. 그는 마거릿 보퍼트의 두 번째 남편인 헨리 스태퍼드 경의 수행원으로 목무했으며, 헨리 스태퍼드 경이 1471년 사망한 뒤 마거릿 보퍼트의 세번째 남편인 토머스 스탠리 경을 섬겼다. 토머스 스탠리는 그에게 연봉 600 마크를 지불했다. 1483년에 왕위에 오른 리처드 3세는 브레이에게 완전한 사면령을 내렸는데, 이는 그가 장미 전쟁 당시 랭커스터군에 가담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그가 내전에서얼마나 활약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483년 가을, 브레이는 버킹엄 공작의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버킹엄 공작 헨리 스태퍼드는 얼굴 마담일 뿐이고, 엘리 주교 존 모턴과 브레이가 반란을 주도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버킹엄 공작이 존 모턴과 협상하여 마거릿 보퍼트의 아들인 헨리 튜더를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시키고 헨리를 왕위에 오르게 하기로 했을 때, 존 모턴은 레지날드 브레이를 마거릿에게 보내는 사절로 레지날드 브레이를 추천했다. 브레이는 이 임무를 수행했고,뒤이어 자일스 도벤, 존 체니, 리처드 길포드 등 많은 귀족을 설득해 반란에 동참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버킹엄 공작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고, 그는 존 모턴 등과 함께 해외로 망명했다. 1485년 헨리 튜더가 잉글랜드로 상륙한 뒤 리처드 3세와 보스워스 전투를 치를 때 그의 편에서 참전했따. 헨리 7세가 리처드 3세를 꺾고 잉글랜드 왕국의 유일한 국왕이 된 뒤, 브레이는 1485년 9월 13일 랭커스터 공국의 집사로 선임되어 죽을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이 직책은 사법적, 재정적 측면에서 막대한 후원과 책임은 물론 명예와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그는 헨리 7세의 대관식에서 바스 기사로 선임된 7명 중 한 명이었으며, 오컴 성 보안관, 트렌트 강 남쪽 숲의 최고 재판관(제9대 피츠월터 남작 존 래드클리프와 공동으로 맡았다.), 그리고 추밀원 위원이 되었다.

1486년 2월 28일 로더럼 대주교 토머스를 대신하여 1486년 7월까지 재무부장을 맡았으며, 1492년 헨리 7세가 프랑스를 침공할 당시 전쟁 재무부장을 맡았다. 이후 프랑스와의 평화 협약이 성사되었을 때 프랑스 왕으로부터 연금을 받는 형태로 수익을 챙겼다. 1494년 옥스퍼드 대학교의 집사에 선임되었으며, 1495년 와이트 섬의 여러 영지에 대한 종신 수여를 받았다. 1497년 콘월에서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은 존 모턴과 레지날드 브레이 등이 자기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다고 성토하는 글을 배포했다. 이에 브레이는 진압에 착수해 블랙 히스 전투에서 반란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1501년 헨리 7세에 의해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브레이는 헨리 7세가 1498년에 잠시 방문한 에지 코트 의 자신의 집 과 베드퍼드셔의 이튼 브레이로 알려진 대저택을 건설했으며, 그레이튼 멜번 수도원의 거대한 '마니피캇' 창문에 이쓴 기증자 초상화에 자기의 초상화를 실을 정도로 건설 비용을 대폭 지원했다. 또한 케임브리지의 지저스 칼리지에 기부했으며, 배스 수도원의 건축 공사를 수행하는 올리버 킹 주교에게 재정 지원을 제공했으며, 1503년 1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있는 '헨리 7세 채플'의 기초석을 놓는 걸 도왔다.

1503년 8월 5일 런던에서 사망했고, 윈저의 세인트 조지 성당에 안장되었다. 브레이는 생전에 칼레 출신 기사 니콜라스 허시의 막내딸 캐서린 허시와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이후 그의 영지는 이복 형제 존 브레이의 장남인 에드먼드 브레이와 또다른 이복형제 존 브레이의 딸 마조리 브레이의 남편인 초대 샌디스 남작 윌리엄 샌디스에게 분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