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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 팔머

레이디 캐슬마인에서 넘어옴
<colbgcolor=#CBBCA0><colcolor=#000000> 클리블랜드 여공작
바바라 팔머
Barbara Palmer, Duchess of Cleveland
파일:Barbara_Villiers,_Duchess_of_Cleveland_(ca_1641-1709)_-_RCIN_404957_-_Royal_Collection.jpg
이름 바바라 팔머[1]
(Barbara Palmer)
출생 1640년 11월 27일
잉글랜드 왕국 런던 세인트 마가렛 교구
사망 1709년 10월 9일 (향년 68세)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런던 치스윅 월폴 하우스
배우자 제1대 캐슬마인 백작 로저 팔머
(1659년 결혼 / 1706년 사망)
자녀 앤, 찰스, 헨리, 샬럿, 조지, 바바라
아버지 제2대 그랜디슨 자작 윌리엄 빌리어스
어머니 메리 베이닝
종교 성공회가톨릭 (세례명:바르바라)
1. 개요2. 왕의 정부가 되기까지3. 방종한 여인4. 남성 편력5. 몰락6. 말년7. 자녀8.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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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국왕 찰스 2세의 정부이며 초대 클리블랜드 여공작이다. 결혼 전 이름인 바바라 빌리어스나, 로저 팔머와 결혼한 후 얻은 호칭인 레이디 캐슬마인[2]으로 잘 알려져 있다.

넬 그윈, 루이즈 드 케루알과 함께 찰스 2세의 삼대 정부 중 하나이며 가장 악명높은 정부이다.

2. 왕의 정부가 되기까지

왕당파의 일원이었던 그랜디슨 자작 윌리엄 빌리어스의 외동딸로 태어났다.[3] 바바라가 세살도 되지 않았을 때 윌리엄은 잉글랜드 내전에서 전사했다. 바바라의 어머니 메리 베이닝은 죽은 남편의 사촌인 앵글시 백작과 재혼했다.

시간이 흘러 바바라는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했다. 그녀는 석고같은 흰 피부와 풍성한 밤색 머리카락에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미인이었다. 바바라는 상속받을 재산이 거의 없었기에 그다지 매력적인 결혼 상대가 아니었음에도 그 미모로 남성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중에서 젊은 왕당파 외교관인 로저 팔머가 바바라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로저의 아버지는 로저에게 만약 바바라와 결혼한다면 넌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남자가 될 거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1658년에 로저의 아버지가 숨을 거두면서 그 다음해인 1659년 4월 14일에 로저 팔머는 바바라와 결혼했다.

결혼 후 팔머 부부는 망명 중인 왕족을 보조하기 위해 네덜란드로 떠났다. 네덜란드에서 바바라는 찰스 2세와 만나게 되었다. 1660년, 왕정 복고가 끝나고 바바라는 잉글랜드의 왕이 된 찰스 2세의 정부가 되었다. 잉글랜드로 돌아온 찰스 2세는 로저 팔머의 '충성심'을 높게 사서 그를 캐슬마인 백작과 리머릭 남작에 임명했다. 그러나 이 작위는 로저가 아닌 바바라에게 주는 찰스 2세의 선물로 여겨진다. 캐슬마인 백작부인이 된 바바라는 이후 레이디 캐슬마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1661년에 바바라는 첫 자식인 앤을 낳고 그 다음해에 찰스를 낳았다. 로저 팔머와 찰스 2세는 둘 다 이 아이들의 아버지가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앤과 찰스의 성은 처음에는 팔머였으나 이후 찰스 2세로부터 피츠로이라는 성을 받고 왕의 자식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4] 로저 팔머는 바바라와 국왕의 사이를 알고 아내와 별거에 들어갔다. 그러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로저는 바바라와 이혼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부부로 지냈다.

3. 방종한 여인

파일:NTIII_SUDH_653194-001.jpg
클리블랜드 여공작 바바라 팔머, 피터 렐리[5]

총애받는 정부인 바바라는 궁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1662년에 찰스 2세는 브라간사의 캐서린을 왕비로 맞이했다. 찰스 2세와 캐서린이 신혼 여행에 가 있을 때 바바라는 찰스 2세의 아들인 찰스를 낳았다. 이후 바바라는 왕비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왕비의 수석 시녀 자리를 요구했다. 캐서린 왕비는 물론이고 찰스 2세의 측근도 이에 반대했지만 바바라에게 빠져있었던 찰스 2세는 왕비를 압박해 바바라의 뜻대로 되도록 만들었다. 의기양양해진 바바라는 왕비를 무시하며 점점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

바바라는 항상 화려하고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하고 다녔다. 찰스 2세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고도 부를 더 쌓기 위해 승진을 바라는 궁인들과 관계를 가지고 뒷돈을 챙겼으며, 프랑스스페인의 관리들이 보내는 뇌물을 받았다. 게다가 도박에 취미를 두어 많은 빚을 지기도 했는데, 이 빚을 찰스 2세가 갚도록 했다. 또한 찰스 2세한테 자신의 자식들에게 높은 작위를 줄 것을 졸랐다. 그리고 아이들의 호화로운 생활과 결혼을 위해 많은 돈을 지불하게 했다. 영국의 작가 존 이블린은 이러한 레이디 캐슬마인을 두고 '나라의 저주'라고 비난했다.

바바라는 성질이 불같았으며 위세부리는 걸 좋아했다. 찰스 2세는 아름답고 재치있는 바바라에게 끌리면서 때론 다혈질인 성격과 오만한 태도에 고개를 돌리곤 했다. 이러한 성질머리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는데, 찰스 2세는 바바라가 낳은 아이들에게 모두 피츠로이의 성을 줬지만 마지막으로 낳은 아이는 자신의 아이로 인정하지 않았다. 열받은 바바라는 이 아이도 당신의 아이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이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찰스 2세는 마지못해 사과하고 아이에게 피츠로이 성을 부여해야 했다. 처음에 찰스는 아이의 친부가 헨리 저민일 거라며 버텨봤지만 늘 그렇듯 바바라의 성질머리에는 못 당했다.

1663년에 찰스 2세는 왕비의 시녀인 프랜시스 스튜어트라는 여성에게 정신이 팔렸다. 그러나 프랜시스는 절개를 지켜야 한다는 명목으로 왕을 거절했다. 바바라는 프랜시스만 찾는 찰스 2세에게 크게 화를 냈다. 냉랭한 분위기를 유지하던 중 바바라는 꾀를 냈다. 바바라는 찰스 2세에게 침실에 숨어 프랜시스를 놀래켜보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찰스 2세는 침실에서 리치몬드 공작과 함께 나체로 뒹굴고 있는 프랜시스를 목격했다. 그럼에도 찰스 2세는 이후 프랜시스에게 계속 구애했지만 프랜시스는 끝끝내 찰스 2세를 거부하고 리치몬드 공작 부인으로 평범하게 살았다.

4. 남성 편력

바바라는 왕의 다른 애첩들을 경계했지만 왕 못지 않게 자신도 남자 관계가 매우 난잡했다. 애인으로 왕실 곡예사, 도버 남작 헨리 저민, 말버러 공작 존 처칠[6] 등이 있는데, 심지어 찰스 2세가 다른 여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몬머스 공작 제임스 스콧도 바바라와 문란한 사이였다고 한다. 찰스 2세에게 다른 남성과 정사를 나누는 현장을 몇번 들켰지만 정부의 사생활에 관대했던 찰스 2세는 조용히 넘어갔다.

그녀의 애인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훗날 말버러 공작이 되는 10살 연하의 존 처칠이다. 존은 바바라의 스폰을 받으며 매년 5000파운드를 타냈다. 한번은 찰스 2세에게 바바라와의 정사를 들킨 존이 몸을 숨겼는데, 찰스 2세는 "짐은 너를 용서한다. 너도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일 테니"라고 말하고 차갑게 돌아섰다고 한다.

5. 몰락

난잡한 생활과 독한 성격에도 왕의 사랑을 받던 바바라는 나이가 들면서 점점 찰스 2세의 총애를 잃어갔다. 바바라는 왕의 곁에 10년 가까이 있었으며 그 사이 찰스 2세에게는 넬 그윈이나 루이즈 드 케루알 같은 쟁쟁한 정부들이 생겼다.

1670년에 찰스 2세는 바바라를 클리블랜드 여공작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헨리 8세 때 지어진 크고 화려한 궁전인 넌서치 궁전을 선물로 주었다.[7] 이를 본 사람들은 레이디 캐슬마인을 향한 국왕의 애정이 식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시점에서 찰스 2세는 바바라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작위는 바바라가 아닌 훗날 이를 물려받을 아들을 위한 것이며, 궁전은 일종의 이별 선물이라는 것이다.

1673년에 잉글랜드 의회는 비국교도가 공직을 가질 수 없도록 규정하는 법률인 심사법(Test Act)를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1663년 경에 가톨릭교도로 개종했던 바바라는 왕비의 수석 시녀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찰스 2세는 궁을 떠나는 바바라에게 누구와 놀든 간섭 않을 테니까 제발 앞으로 조용히 살라고 조언하면서 관계를 끝냈다.

6. 말년

1676년에 자식들과 프랑스 파리에서 살다가 1680년에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1685년에 죽음을 목전에 둔 찰스 2세는 바바라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찰스 2세의 죽음 이후 바바라는 평판이 안 좋기로 유명한 카르델 굿맨이라는 배우와 사귀다가 1686년에 그의 아이를 낳았다.[8] 그러나 굿맨은 바바라의 자녀들을 독살하려다가 들켜 재판을 받았고 바바라는 그와 헤어졌다.

1705년에 남편 로저 팔머가 사망하고 10살 연하의 로버트 필딩이라는 남성과 재혼했다. 그런데 사실 그는 바바라의 돈을 노리고 접근한 유부남이였다. 두 사람의 결혼은 중혼을 이유로 무효화되었다.

1709년 10월, 다리 부종으로 고통받던 바바라는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7. 자녀

파일:NPG_NPG_6725-001.jpg
바바라 팔머와 장남 찰스 피츠로이, 피터 렐리 作[9]

찰스 2세와의 사이에서 6명의 아이를 낳았다. 학자들은 그 중 5명을 찰스 2세의 아이로 보고 있다.

첫 아이인 앤 피츠로이는 데이커 남작 토마스 레널드와 결혼했다. 앤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호화로운 결혼식을 올리고 서섹스 백작부인이 되었다. 앤은 결혼하고 2년 뒤에 한 여성과 염문설에 휩싸였는데, 그 대상은 다름아닌 아버지 찰스 2세의 정부 오르탕스 만치니였다.

장남 찰스 피츠로이는 아버지로부터 사우샘프턴 공작위를 받고 어머니의 클리블랜드 공작위를 물려받았다. 사우샘프턴과 클리블랜드 공작위는 찰스의 아들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작위가 끊겼다.

차남 헨리 피츠로이는 그래프턴 공작, 유스턴 백작, 입스위치 자작, 서드버리 남작에 임명되었다. 현 제12대 그래프턴 공작인 헨리 피츠로이가 그의 이름이 같은 직계 후손이다.

어머니 바바라의 외모를 가장 닮은 아이로 알려진 차녀 샬럿 피츠로이는 정치가의 아들인 에드워드 리와 결혼했다. 샬럿의 남편 또한 찰스 2세로부터 리치필드 백작위를 받았다.[10]

삼남 조지 피츠로이는 노섬벌랜드 공작, 폰테프랙트 남작, 팔마우스 자작으로 임명되었으며 군인으로 활약하였다. 두번 결혼을 했지만 적법한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사후 공작위가 단절되었다.

막내 바바라 피츠로이는 화려한 인생을 산 언니오빠들과 대조되는 길을 걸었는데, 피츠로이라는 성을 받긴 했지만 찰스 2세가 끝끝내 자기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챙겨주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존 처칠의 딸로 추정되는 바바라는 귀족의 정부로 살다가 수녀원에 들어가 여생을 수녀로 살았다.

8. 여담



[1] 결혼 전 이름은 바바라 빌리어스[2] 레이디는 후작부터 기사까지의 작위를 가진 남성의 아내에게 붙는 경칭이다. 로저 팔머가 캐슬마인 백작이었으므로, 바바라에게 붙은 레이디 캐슬마인이란 호칭은 캐슬마인 백작부인이란 뜻이다.[3] 바바라의 할아버지 에드워드 빌리어스는 제임스 1세의 총신이자 간신으로 유명한 초대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의 이복형이었다.[4] 피츠로이(FitzRoy)는 '왕의 자식'이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왕의 서자에게 붙는 성이였다.[5] 피터 렐리 경(Sir Peter Lely)은 네덜란드 출신의 왕정복고 시기 유명한 궁정화가였다.[6] 윈스턴 처칠의 조상이다.[7] 넌서치 궁전은 도박빚을 갚지 못한 바바라가 1683년에 허물어 건축 자재를 매각했다.[8] 이 아이는 유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죽은 것으로 보인다.[9] 여담으로 이 그림은 단순히 바바라 팔머와 아들을 같이 그린 초상화가 아니라 성모자상, 즉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아기를 안고 감상자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구도도 전형적인 성모자상의 구도이고, 무엇보다 당시엔 같은 무게의 금보다 더 비싼 것으로 유명했던 울트라마린을 아낌없이 사용하여 치마를 채색한 것이 그 증거이다.# 바바라 팔머는 난잡한 사생활로 유명했고, 그림에서 안고 있는 장남 찰스 역시 찰스 2세의 사생아였다. 그러나 그림에선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낳고 이후로도 평생 동정을 지킨 성모 마리아와 하느님의 아들인 아기 예수로 묘사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부분이다.[10] 해당 작위는 1776년 4대만에 단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