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상계의 간판선수. 축구에 안정환, 배드민턴에 이용대가 있었다면 육상에는 기선겸이 있다. 육상은 비인기 종목이었으나, 그 위에 선겸의 얼굴을 붙여 놓자 안 팔리던 경기 표가 팔리고, 전례 없던 광고계의 러브콜을 받았다.
좋은 유전자를 받은 얼굴, 태생적인 고귀함, 심혈을 기울여 빚은 듯한 프로포션, 여유로운 몸가짐. 거기에 진실된 눈빛과 여유는 흉내 낸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렇듯 타고나야 하는 모든 걸 가졌다 보니, 무언가를 열망해본 적도 없다.
그는 그의 오래된 가짜였다. 남의 손에 대필 맡긴 자서전을 읽으면 이런 기분일까. 이름 석 자가 묻힌 채 국회의원과 탑배우의 아들로, 골프 여제의 남동생으로. 가족이란 타이틀을 떼어놓고 남는 게 기선겸의 전부인 적은 없었다.
그곳에 파묻혀 있던 선겸을 꺼내준 손의 주인을 만나기 전까진…
상당히 독특한 캐릭터이다. 옳은 목적이라도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폭력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거나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등장인물은 없었다. 오히려 정의를 위해 폭력을 쓰는 것을 미화했다. 본작의 서단아의 발언에서도 이를 볼 수 있다. 하지만 기선겸은 오히려 폭력을 쓰는 것 자체가 나쁜 행위라는 인식이 명확하며, 설령 옳은 일을 위해 쓴 것이라도 원칙에 어긋나고 옳지 못한 수단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즉 옳은 목적이라도 정당한 수단이 아니라면 옳지 않다고 인식하고 있다.
---- 미주가 보호종료아동임을 들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미안’이었다. 내가 가족이 없는 걸 왜 그들이 미안해할까. 섣부른 동정심에 대한 사과라면 받아줄 용의가 있다. 날 동정할 권리는 나한테밖에 없거든. 그러니 없을수록 있어 보이게, 작을수록 몸집을 부풀려서 살았다.
중학교 때 처음 갔던 극장에서, 미주는 안전한 기분을 느꼈다. 극장에 불이 꺼지는 순간, 나 혼자만 깜깜한 게 아니란 걸 느꼈다. 안도감에 눈물이 터져 엉엉 울었다. 잊지 못할 그 날 미주는 말과 말을 이어주는 자막을 최초로 의식했다. 그렇게 영화에서 세상을 배웠고 고마웠던 자막이 거슬리는 레벨까지 오르자 번역가가 됐다. 이야기 속 언어는 차라리 해석하기 쉬웠다. 실제 사람들 사이에서 나누는 말보다 훨씬 더.
그런데 120분짜리 영화 대사보다 운명처럼 부딪친 이 남자의 한 마디가 너무 어렵다. 뜻 모를 말들을 해석하고 싶게 한다. 선겸이 알려주는 말 중엔 슬픈 말이 없기를 바라게 된다.
---- 서명그룹의 유일한 적통이지만, 연년생으로 태어난 후처의 아들 때문에 후계 서열에서 밀렸다. 그 날로 단아의 사전에서 인류애가 사라졌다. 피가 반씩 섞인 형제들과 지내다 보니 니 거 내 거 확실히 분류했으나, 늘 내 거가 많아야 직성이 풀렸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단아는 욕심이 끝도 없지만, 실수는 일절 하지 않는다. 완벽하기 위해 태어났고, 태어난 이상 완벽해야 했다. 사실 욕심이 많은 것도 아니다. 니들만 안 태어났으면 다 내 거였을 것들이니까 그저 되찾으려는 것 뿐. 내가 못하는 건, 안 했을 때밖에 없어.
그런데 그림과 나타난 이 학생, 마음대로 안 된다. 건방지게 뭘 자꾸 달라고 하는데, 자꾸 주게 된다. 그것도 시간을 내서... 없는 시간을 내게 하고, 죄 지은 거 없이 미안하니 자꾸 거슬린다.
---- 어릴 때부터 천재라는 말이 듣기 싫었다. 겸손해서가 아니라, 저주처럼 들려서였다. 역사적으로나 뭐로 보나 걸출한 천재들은 대부분의 삶을 정신병으로 보내거나 정신병원에서 보내잖아. 당연히 영화는 천재가 아니었다. 대학에서 영화는 평범한 수준이었다. 평범함은 적당함이었고, 적당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일찍이부터 알고 있었다. 주제파악을 빠르게 마친 덕에 부담 없이 미술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순간에 웃는 괴팍한 한 여자가 단박에 영화의 숨은 그림을 찾아내더니, 마음에 든단다. 그건 즉 영화의 욕망이 마음에 든다는 얘기였다. 마음이 흔들렸고 이영화의 욕망은 그날부터 서단아가 됐다.
하지만 누가 있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모를 높고 비싼 빌딩 꼭대기에 혼자 남아 아래를 내려다보는 서단아는 꼭 높은 탑에 갇혀 내려오지 못하는 라푼젤 같았다. 저 높은 데서 보는 이영화는 얼굴을 알아보기는커녕 점보다도 작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보다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 더 가까이. 너무 가까워져, 시야가 다 가려지더라도.
---- 미주의 선배이자 현 동거인. 천성이 태평하고 쿨한 사람. 통번역대 수석입학에 통번역 대학원까지 마친, 소위 엘리트 코스를 밟았으나 영화도 재밌는데 영화제는 더 재밌어서 출세길 다 제쳐두고 외화번역 쪽으로 빠졌다. 지금은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를 수입하는 작은 영화사 <오월>의 대표이다.
---- 세계 랭킹 1위 골프 여제. 해외 원정으로 가족과 보낸 시간은 평생에 1년도 안된다. 커다란 집에 혼자 있을 선겸 생각에 애틋했다. 불쌍한 내동생. 이젠 1등도 지겨워 은퇴나 하고 좀 쉬워볼까 했더니, 사랑하는 동생 놈이 거나하게 사고를 쳤다. 누나된 도리로서 방패 몇 년만 더 해준다고 죽는 것도 아니니 조금만 더, 1등으로 있어줘야겠다.
---- 보이그룹 <아토즈> 멤버인 아이돌 선천적으로 심장이 안 좋아 인큐베이터에서 시작해 유년기를 전부 병원에서 보냈다. 평생을 LA에서 보내고 한국에 돌아왔으나 그를 맞아준 건 철저한 무관심이었다. 적어도 단아는 태웅을 싫어해줬다. 그 관심 때문에, 계속 단아가 싫어하는 짓을 하는 중이다.
박규덕(박상원): 국가대표 육상부 소속 선수. 뒤처지는 실력 탓에 선겸을 시기해 선겸 대신 체고 후배 우식을 폭행하며 화풀이하는 쓰레기. 이후 우식을 병원에 입원시킬 정도로 폭행하고 선겸에게 죽빵을 처맞는데, 적반하장으로 우식이 맞은 것에 선겸도 책임이 있다고 대들다가 다시 한번 먼지나게 두들겨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