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리 홈즈 Larry Holmes | |
출생 | 1949년 11월 3일 ([age(1949-11-03)]세) |
미국 조지아주 커스버트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권투 전적 | 75전 69승(44KO) 6패(1KO) |
신장/리치 | 190cm / 206cm |
체급 | 헤비급 |
스탠스 | 오서독스 |
링네임 | Easton Assassin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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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 권투 선수.2. 전적
- 주요 승: 올리버 라이트, 빌리 조이너, 어니 셰이버스(2), 켄 노턴, 알프레도 에반겔리스타, 오시 오카시오, 마이크 위버(2), 레오니 존스, 스캇 르두, 무하마드 알리, 트레버 버빅, 레온 스핑크스, 리날도 스나입스, 게리 쿠니, 랜달 콥, 팀 위더스푼, 마비스 프레이저, 제임스 스미스(2), 데이비드 베이, 칼 윌리엄스, 레이 머서, 호세 리발타, 제시 퍼거슨, 에드 도널드슨, 모리스 해리스, 에릭 에쉬
3. 커리어
1949년 11월 3일, 조지아주 커스버트에서 태어나 1956년 가족들과 함께 펜실베이니아주 이스턴으로 이사를 갔다. 어린 시절 가난해 7학년 때 학교를 중퇴한 후에 시급 1달러를 받으며 세차장에서 알바를 했고, 이외에도 트럭기사, 채석장 노동자로 일하며 돈을 벌었다.18세에 복싱에 입문한 이후로 홈즈는 1972년부터 1975년까지 무하마드 알리의 스파링 파트너였다. 홈즈에 따르면, 그는 알리와 스파링을 하기 시작했을 때 "약 11번의 아마추어 경기"를 가졌다고 한다. 홈즈의 첫 트레이너인 어니 버틀러는 그를 펜실베이니아주 디어 레이크에 있는 알리의 훈련 캠프로 데려갔는데, 그곳은 홈즈의 고향인 펜실베이니아주 이스턴에서 북서쪽으로 약 50마일 떨어진 장소였다.
아마추어 전적 19승 3패를 기록하며 1973년 프로로 전향한 홈즈는 70년대 극강의 하드펀처인 어니 셰이버스를 판정으로 물리친 뒤, 1978년 6월 9일 켄 노턴과의 WBC 헤비급 챔피언십에서 15라운드 스플릿 판정승을 거두며 챔피언에 등극했다.
1983년 12월 11일, 5년 동안 16차 방어까지 성공했던 WBC 타이틀을 반납하였다. 이유는 홈즈가 WBC 랭킹 1위 도전자였던 그렉 페이지와의 대결에서 프로모터 돈 킹이 제시한 255만 달러보다 더 많은 대전료를 요구하며 방어전을 계속 거부했기 때문. 하지만 새로 설립된 국제복싱연맹(IBF)의 회장 밥 리는 12월 10일에 홈즈에게 연락하여 IBF가 그를 챔피언으로 인정할 것이라고 전했다.
1985년 9월 21일, IBF 타이틀 4차 방어전에서 마이클 스핑크스를 상대로 15라운드 만장일치 판정패를 당하며 48승 무패의 전적에 처음으로 1패를 쌓았다. 스핑크스와의 재경기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15라운드 스플릿 판정패를 당한 후 은퇴를 선언했다.
약 2년간의 공백기를 뒤로 하고, 1988년 링으로 복귀한 홈즈는 헤비급 타이틀을 얻기 위해 마이크 타이슨에게 도전했다가 4라운드 만에 TKO패를 당했다. 그후로도 1992년 에반더 홀리필드, 1995년 올리버 맥콜을 상대로 타이틀 도전에 나섰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2002년 7월 27일, 홈즈는 52세의 나이에 에릭 에쉬와의 경기에서 10라운드 만장일치 판정승을 거둔 이후로 현역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은퇴 후 2008년 기업을 세웠고 2014년 매각했다. 2008년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4. 파이팅 스타일
홈즈는 오랜 세월 무하마드 알리의 스파링 파트너로 지내면서 그의 기술들을 흡수할 수 있었다. 양손의 가드를 내린 채 서클링을 하며 아웃복싱을 하거나, 가드가 비어 있는 헤드를 향해 상대방이 펀치를 날리면 스웨이를 통해 회피하던 것은 알리와 판박이었다.물론 둘의 스타일에 차이점도 있었다. 상대방의 바깥쪽(반시계 방향)으로 서클링을 할 때, 알리는 평평한 스탠스에서 사이드 스텝을 뛰던 것과 달리 홈즈는 앞발을 바깥쪽으로 피벗하는 크로스 스텝을 뛰면서 스탠스를 좁게 유지하였다. 덕분에 홈즈는 더 안전하게 잽으로 거리싸움을 할 수 있었고, 엄청난 파워를 자랑하는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셋업하는 것 또한 가능했다.
하지만 홈즈의 최대 장점은 바로 잽이었는데, 홈즈의 잽은 무려 알리조차 능가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니 말 다했다. 홈즈는 잽이 상당히 정교하였고, 다양한 각도에서 들어왔으며, 앞서 말한 것처럼 거리조절에도 상당히 능했다. 게다가 수없이 많은 페인팅 동작까지 섞어주어 홈즈의 상대들은 그가 진짜 제대로 된 한방을 날릴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심지어 홈즈는 조지 포먼처럼 롱가드 디펜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복슬링 기술마저 장착하고 있었다.
5. 여담
- 1978년부터 1983년까지 WBC 헤비급 타이틀을, 1983년부터 1985년까지 IBF 헤비급 타이틀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며 7년간 헤비급 챔피언으로 군림했다. 이는 조 루이스(1937-1949), 블라디미르 클리츠코(2006-2015)에 이어 3번째로 긴 기록이다.
- 총 19명의 선수들을 상대로 세계 헤비급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는데, 이는 조 루이스(21명)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수치이다.
- 세계 헤비급 타이틀 방어를 19회 연속 성공했는데, 이는 조 루이스의 25차 방어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기록이다.
- 8회 연속 타이틀 방어전에서 KO승을 거두며 조 루이스의 7회 기록을 깨고, 토미 번스의 8회 기록과 동률을 이루었다. 당시 홈즈의 KO 연승을 막은 상대는 트레버 버빅이었다.
- 홈즈는 버빅과 길거리 싸움을 한 적도 있으며, 훗날 인터뷰에서 버빅이 조카에게 살해당한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신께서는 추악한 자를 좋아하지 않으신다."라며 그 남자(버빅)에 관해서는 잊어버리고 싶다고 대답했다.#
- 1982년 3월 27일,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의 시저스 팰리스에서 조디 발라드와 2라운드, 플로이드 커밍스와 4라운드 시범 경기를 가졌다. 이 경기는 6월 11일 게리 쿠니를 상대로 방어전을 치르기 위한 훈련의 일부였으며, 홈즈는 쿠니를 13라운드에 제압하며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
- 홈즈와 쿠니의 대결은 프로모터 돈 킹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두 인종 간의 대립으로 포장되며 많은 주목을 받았다. 양 선수 모두에게 각각 대전료 1천만 달러가 똑같이 주어진 것에 대하여 홈즈는 쿠니가 백인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전했고,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와 타임지는 경기 프리뷰의 표지에 홈즈의 사진이 아닌 쿠니의 사진을 실었다. 이외에도 경기 직전 선수 소개에서도 챔피언을 마지막에 소개한다는 전통을 무시한 채 도전자였던 쿠니를 마지막에 소개하는 등 백인인 쿠니를 편애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쿠니측 사람들이 입은 셔츠에는 "Not the White Man, but the Right Man."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 홈즈는 알리 외에도 조 프레이저의 스파링 파트너로 지내기도 했으며, 프레이저와 스파링을 하다가 갈비뼈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 그리고 1983년 11월 25일에 프레이저의 아들인 마비스 프레이저를 1라운드 2분 57초 만에 TKO로 제압했다.#
- 1985년 마이클 스핑크스에게 패배하기 전까지 홈즈의 전적은 48전 무패. 이때 스핑크스와의 경기에서 홈즈가 이겼다면 그는 49전 무패 전적의 록키 마르시아노의 기록과 동률을 이루었을 것이다. 패배 후, 홈즈는 포스트 파이트 인터뷰에서 "저는 35세에 젊은이와 싸우고 있고, 록키는 25세에 노인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기술적으로 말하자면, 록키는 제 작스트랩을 짊어질 수 없었습니다."라는 실언을 하여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나중에 해당 발언을 한 것에 대해 사과했다.
- 1999년 1월 23일 휴스턴 애스트로돔에서 조지 포먼과 맞붙을 예정이었다. 포먼은 1,000만 달러를, 홈즈는 400만 달러를 받을 예정이었다. 두 선수는 계약에 서명한 후, 대전료의 10%를 환불 불가 보증금으로 받았다. 포먼은 프로모터인 로저 레빗이 1,000만 달러의 대전료 중 나머지 900만 달러를 지불해야 하는 마감일을 맞추지 못해 1월 1일에 시합에서 물러났다. 주요 후원자 중 한 명이 물러나면서 시합은 위기에 빠졌다. 조지의 남동생인 로이 포먼은 "지난주에 돈을 받았어야 했는데 받지 못했다"며 조지가 일주일의 시간을 더 주었는데도 여전히 돈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였다.
- 2009년 ESPN SportsNation과의 온라인 채팅 중 1978년부터 1985년까지 가장 힘들었던 경기가 켄 노턴과의 경기였다고 밝혔다.
- 동생인 마크 홈즈도 1980년부터 87년까지 미들급에서 활동한 복싱선수였으며, 프로 경기 39전 중 38승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