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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fael Antonio Caldera Rodríguez
라파엘 안토니오 칼데라 로드리게스
1916년 1월 24일 ~ 2009년 12월 24일
1. 개요
베네수엘라 대통령, 정치인, 변호사.푼토피호 체제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인물이면서 베네수엘라의 양당제의 기틀을 세우고 또한 무너뜨린 인물이다.
2. 생애
1930년대에 베네수엘라 중앙대학에 재직하면서 법학을 전공했고 가톨릭계 반공 학생운동에 참여하면서 당시 군사독재를 한 고메즈 정권에 대항했다. 졸업 뒤에 잠깐 동안 변호사로 일했고 민주화 달성 이후 정계에 입문해 중도우파 정당인 사회기독당(COPEI)[1]의 창당을 주도하면서 노동법을 제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1947년 첫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22.4%의 득표로 낙선했다. 이후에 군사독재 정부가 출범하면서 처음에는 환영했지만 곧 억압적인 통치를 펼치자 이에 대해 반감을 표시하고 이후 군사정권에 의한 탄압을 받으면서 한 동안 야인으로 지냈다가 1958년에 군부독재의 종식 이후에 자신의 집이 있는 도시인 푼토피호에서 협약을 체결해 양당제와 제도적인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공헌하였고, 이때 확립된 체제를 푼토피호 체제라고 한다. 푼토피호에서 협약을 체결한 뒤, 1958년 대통령 선거와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잇따라 출마했으나 계속 낙선하였다. 하지만 1968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여당의 표가 분산된 덕분에 29.1%를 얻는 데에 그친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했음에도 당선에 성공했다.1기 집권시에는 보수파 정치인이라는 핸디캡과 여소야대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협상을 통해 당시 베네수엘라의 골칫덩어리이던 대부분의 좌파 무장단체들을 합법단체로 돌아서게 하고[2] 특히 협상을 통해 좌파게릴라들을 대거 사면하면서 공산당의 무장투쟁도 중단시키고 합법정당으로 전환시키는 성과를 냈다. 다만 여전히 저항하는 일부 무장단체들을 무력 진압하였고 좌파 학생운동 역시 탄압하여서 베네수엘라 중앙대학교가 한동안 폐교되기도 했다. 한편으로 소련과 헝가리 등 제2세계 국가들과도 외교 관계를 맺고 연 평균 5%대의 경제성장률로 경제기반을 탄탄히 다지는 성과[3]를 보였으나 헌법상으로 연임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1973년 대통령 선거에는 출마하지 못했고, 정권 재창출 역시 실패했다.[4]
대통령 퇴임 이후 상원의원직에 재직해 있었다가 1983년 대선에 출마했으나 당시 여당이 사회기독당이었는지라 34.5%의 득표율을 얻는데 그쳐 낙선했다.[5] 1988년 대선에도 출마하려고 했지만 사회기독당 경선에서 낙마했고 결국 칼데라는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서 사회기독당의 대선 패배에 일조했다. 그 이후에도 차베스의 쿠데타 시도를 옹호하는 등, 사회기독당 주류와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어 결국 1993년에 자신이 창당한 사회기독당을 탈당하고 국민수렴당(CN)라는 신당을 창당하게 된다. 당시 베네수엘라는 석유값 하락과 외채 문제로 인한 장기간의 경기침체로 위기에 처해 있었고, 또한 그로 인해 신자유주의 정책 시행을 펼치면서 빈곤층이 크게 급증하였다. 또한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대통령의 비리가 밝혀지면서 정치권에 대한 불신도 깊어져 가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칼데라는 1기 집권 당시의 성과와 부정부패 척결, 反 신자유주의 정책을 내세워 좌파정당인 사회주의를 위한 운동당과 정책협력을 하고, 일부 좌파유권자들과 1기 집권시의 모습을 기억한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얻어 대통령 선거에서 30.4%의 득표율로 재선되는 데 성공하게 된다.[6]
재선 성공 확정 이후 라파엘 칼데라 소개영상(베네비시온)
2기 집권 초기에 우고 차베스를 석방해 주고, 일부 민영화된 기업들을 재국유화하는 제스처를 보였으나 곧바로 겁을 먹었거나 칼데라 행정부에게 겁을 주기 위해 투자자들이 자본을 대거 빼돌려서 주가가 폭락하자 공약과는 다르게 IMF 구제금융을 받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치는 우유부단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7] 또, 사회 전반적으로 부정부패도 심화되는 것은 물론, 신자유주의 정책의 부작용으로 빈곤율도 30%대에서 50%대에 근접하는 수준으로 상승하여 베네수엘라의 경제 상황은 오히려 막장으로 돌아가게 되었고[8] 결과적으로 완전히 말아먹게 되었다.[9] 그가 2기 집권 당시에 남긴 유일한 업적(?)으로는 1992년 쿠데타로 감옥에 복역하고 있던 우고 차베스를 중도 석방시켰다는 것 정도이다. 결국 이렇게 1기 집권 당시의 모습을 보고 그를 찍은 국민들을 실망시켰고 불명예스러운 2기 임기를 마친 뒤에 정계은퇴를 하고 나서 말년에 파킨슨병으로 병치레를 하다가 향년 93세로 세상을 떠났다.
차베스를 석방시켰지만, 우고 차베스는 그를 비방하고 중상모략하는 발언으로 추도문을 대신했다. 뭐. 아무리 차베스를 사면시켜줬다지만 오래 가지 않아 석유공사 민영화를 시행하는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친 것도 있고[10] 퇴임 이후에 야당 원로로써 차베스를 여러 번 까기도 했으니 사이가 좋은 것이 이상하기는 하다. 한편으로 반 차베스파에게 까이는 정치인이기도 한데, 이유인 즉슨 차베스를 석방시켜서 차베스가 1998년 대통령 선거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차베스의 독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11] 혹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계속 시행하는 바람에[12][13]차베스가 선거에 집권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담으로 진기록을 소유하고 있는데 바로 베네수엘라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두 차례에 걸쳐 최저 득표율로 당선되었다는 것과 최다 출마기록(6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14] 이러한 경력과 생몰년을 보면 알겠지만 군사독재정권기에서 푼토피호 체제, 차베스 집권기까지 모두 겪어본 베네수엘라 현대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15]
결론적으로 얘기한다면 라파엘 칼데라는 분명 보수파 정치인이었음에도 놀라울 정도의 유연성과 친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덕택에 베네수엘라에 제도적인 민주주의가 정착하는데 공헌시켰고, 1기 집권 당시에는 이러한 친화력과 유연성이 강점으로 작용하여 여소야대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베네수엘라 내에 잠재되어 있던 내전 위기를 슬기롭게 해결하고 제2세계 국가들과도 외교관계를 맺어 베네수엘라에 안정을 가져왔고, 덕택에 베네수엘라는 1970년대 당시 독재정권이나 내전으로 신음하던 중남미에서 멕시코와 함께 가장 잘나가는 나라가 되었고, 국민들 역시 풍요로웠지만, 2기 집권 당시에는 이점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여 당시의 경제난을 해결할 비전을 제대로 실현시키기는커녕 기존정책을 그대로 시행하는 등 우유부단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에 대한 평판을 떨어뜨리면서 결국 친 차베스파와 반 차베스파 모두에게 까이게 된 정치인이라 할 수 있겠다. 2기 집권 당시의 모습만 한정해서 본다면,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그리스 前 총리와 비슷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3. 관련 문서
[1] 의외로 우고 차베스의 아버지인 로드게리스 차베스가 20년 동안 사회기독당 당원으로 있었고 거물급 인사까지는 되지 않았지만 덕을 본 것은 사실이라서 바레나스 주 교육이사직을 맡을 정도는 되었다고 한다. 다만 처음부터 사회기독당 당원으로 있던 겨은 아니었고, 1968년부터 1978년까지 민주행동당의 당원으로 있었다. 여하튼 그 덕택에 우고 차베스가 젊었을 때에는 상당한 정치관의 차이를 보여 주었다고 한다.[2] 참고로 이웃나라인 콜롬비아에서는 당시 양당 간의 갈등 때문에 영토(파나마)까지 상실할 정도로 내전이 빈발했고 1950년대 말에 들어서 자유당과 보수당 간의 협약을 체결했지만 원외 정당은 완전히 배제된데다가 그 이후에도 잡음이 끊이지 않으면서 결국 다시 내전이 발하고 말았고 그 여파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3] 다만 석유나 천연가스를 제외한 산업 육성에는 소흘했는지라 비난받는 경우도 있다. 칼데라 입장에서는 예상하지는 못한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4] 후에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가 말년의 경기 침체로 인해 인기를 잃는 듯하자 사회기독당이 재집권에 성공했고, 집권 초기까지만 해도 석유값이 매년 사상최고치를 경신하면서 그런대로 잘 나가는 듯 보였지만 1981년부터 석유값이 정점이 달하면서 석유값이 더 이상 올라가지 않는 데 비해 중공업화가 지지부진하게 이루어지면서 내야할 이자가 급속히 늘어나고 말았고 결국 1983년 검은 금요일 파동이 터지고 나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5] 왜 이렇게 되었느냐면 1982년에 베네수엘라 금융위기가 터졌기 때문에 애초부터 당선 가능성이 없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선거는 칼데라가 출마한 대통령 선거가운데 득표율은 가장 높았다.[6] 이 선거에서 민주행동당과 사회기독당 대선 후보가 얻은 득표가 총 득표수의 과반을 채 넘기지 못하였기에(아래 동영상 참조) 푼토피호 체제 붕괴의 서막을 알리는 선거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에선 여전히 민주행동당과 사회기독당이 원내 1, 2당자리를 차지했기에(민주행동당은 하원 55석, 상원 16석, 사회기독당은 하원 53석, 상원 14석, 참고로 총의석은 하원 203석, 상원 50석) 푼토피호 체제가 완전히 붕괴된 시점은 보통 1998년으로 보고있다.[7] 사실 차베스가 목소리 땅땅치고 강경하게 나갈 수 있던 데에는 2000년대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의 고유가 시대의 서막을 알린 1999년 유가인상 단행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측면이 컸고, 그 이후에도 감산안을 줄기차게 주장하면서 석유값을 대대적으로 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한 점이 커서 재정에 여유가 있던 측면이 크다. 그에 반해 칼데라 시대에는 저유가로 고통받고 있던 시기였음에도 기껏 석유값 올리겠다고 감산해도 누군가가 그 이득을 건져먹을 것이라는 생각에 너 나 할 것 없이 석유생산을 올려먹었고 자연히 유가가 낮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즉, 단합이 잘 되지 못하였다.) 사실 공약을 이행하려고 해도 이행할 돈이 없어서 큰 실망감을 줄 수밖에 없던 것이다.[8] 물론 당시 베네수엘라는 석유생산량을 크게 늘리는 방식으로 경제난을 벗아나려고 했지만 이 과정에서 원유공급량이 크게 올랐고 더구나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치킨게임이 벌어져 석유값이 오히려 추락해버리는 바람에 베네수엘라의 경제난만 가중시키는 결과만 낳았다. 더군다나 석유생산에서 얻는 수익 상당수가 로열티로 나갔던지라 정부수입은 별로 늘지도 못했다.[9] 흥미로운 점은 칼데라의 정적이자 재선에 성공하기 전에 대통령직을 역임한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대통령도 1기 집권 당시에는 괜찮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2기 집권 당시에 완전히 말아먹어 1기 집권 당시의 명성을 안드로메다로 보냈다는 점에서 칼데라와 공통점이 있다는 것. 그래도 페레스와는 다르게 칼데라는 적어도 개인적으로 뇌물을 받아 처먹거나 국가예산을 횡령한다든가 하는 비리는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부정부패 혐의로 탄핵당하는 수모는 겪지 않았지만 말이다.[10] 다만 차베스도 임기 초기엔 국유화 정책을 병행하면서도 라파엘 칼데라 행정부 당시의 재무장관을 재임시키는 등 거시경제 정책운영면에선 다소 보수적인 모습을 보이긴 했다.[11] 다만 차베스가 당선된 것은 당시 미스 베네수엘라 출신으로 대선에 출마한 이레네 사에즈가 판단을 잘못한 영향이 크기 때문에 단순히 차베스만 출마하지 않는다고 해서 차베스계 인물이 당선되지 않는다는 것은 다소 넌센스하다. 어차피 차베스가 여러모로 카리스마와 연설능력으로 지지세를 확 늘린 것은 분명하나, 어차피 차베스가 출마를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대체할 인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12] 후자는 무언가 핀트가 어긋나는 것 같기는 하지만(특히 민주행동당이나 사회기독당, 국민수렴당도 야권 민주연합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 우고 차베스 1기 집권 시에 여당이던 사회주의를 위한 운동도 민주연합에 소속된 것을 보면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고 사실 베네수엘라의 정당연합인 베네수엘라 연합사회당이나 야당연합체인 민주연합도 포괄정당이다보니 그런 면도 있는 것이다.[13] 베네수엘라의 여당인 연합사회당은 비폭력적 레닌주의를 주장하는 세력에서부터 제3의 길을 주장하는 세력까지 성향이 다양한 포괄정당이고, 민주연합도 소속정당들을 보면 신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우파(프로젝트 베네수엘라)에서부터 1960년대 베네수엘라 반군단체인 혁명적 좌파운동에서 유래된 정당인 적색깃발당(이쪽은 아예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강령으로 내걸고 있고, 차베스를 우파라며 까대는 정파이다.)까지 참여하고 있는 포괄정당이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간에 차베스가 아니었으면 도저히 같은 배에 탈 수 있었을 것이라고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을 조합이다.[14] 야권 지지층에게 독재자로 욕 먹는 차베스도 대통령 출마 기록으로 따진다면 4회 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2회만 당선된 데다가 각각 1/3에도 못 미치는 득표율로 당선된 칼데라보다 넷 다 과반수로 당선된 차베스가 경력상에서 우월하기는 하지만 말이다.[15] 물론 이는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도 마찬가지이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