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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윈스턴 처칠2. 클레오파트라3. 이츠코아틀4. 쩐흥다오5. 관우6. 알렉산더 대왕7. 알프레드 노벨8. 부디카9. 붉은 에이리크 (에이리크 힌 라우디)10. 조지 워싱턴11. 로버트 더 브루스12. 이순신13. 페리클레스14. 레드 클라우드 (마흐피야 루타)15. 레오니다스16. 미야모토 무사시

1. 윈스턴 처칠

윈스턴 레오너드 스펜서 처칠 경은 1895년 영국 육군의 한 연대에서 소위로 군인 경력을 시작했으며, 그 후 영국령 인도, 마흐디 전쟁, 2차 보어 전쟁에서 활약했습니다. 몇 년 동안 그 위치에서 복무하던 처칠은 군인에서 기자로 역할을 바꿨습니다. 그 후 그는 전쟁 포로가 되었지만, 탈출하여 살아서 영국으로 귀환했습니다.

의회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그는 수많은 노력과 독특한 선거 운동을 통해 1900년 25세라는 여린 나이에 정부에 입성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처칠은 커져 가는 나치 독일의 위협에 대항해 영국이 재무장해야 한다는 견해를 앞장서서 피력했습니다. 1939년 세계 대전이 발발할 당시 그는 해군 장관이었으며, 얼마 후 처음으로 수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1940년 선출되어 5년 간 영국을 섬겼고, 다른 영국 관료들이 평화를 주장할 때도 처칠은 계속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굳은 의지는 2차 세계 대전에서 추축군에게 승리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1945년 재임에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1951년에 재출마한 그는 성공적인 선거 운동을 통해 다시금 수상이 되었으며, 1955년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수상직에서 은퇴한 그는 1964년까지 의회의 일원으로서 계속해서 국가를 섬겼습니다.
Sir 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began his military career in 1895 as a Second Lieutenant in a regiment of the British Army, where he saw action in British India, the Anglo-Sudan War, and the Second Boer War. After several years of serving in this capacity, he changed his role in the military to a journalist. He was later captured as a prisoner of war, but escaped his captors and made it back to Britain alive.

He discovered a desire to work in Parliament, and through many efforts and a unique campaign, he was elected into the government in 1900 at the young age of 25, where he began building his career in politics. Churchill led the call for British rearmament in response to the growing threat of Nazi Germany. Upon the outbreak of World War in 1939 he served as First Lord of the Admiralty, a position he had previously held, becoming Prime Minister shortly after this for the first time. He was elected in 1940, where he served the United Kingdom for five years, and while other members of the British government encouraged him to negotiate peace, Churchill led the call to fight on.

His strength and resolve was pivotal in the Victory against Axis forces in World War II, but despite his success in war, he was not reelected as Prime Minister in 1945. He did however run again in 1951 and ran a successful campaign which brought him into power once again as Prime Minister, where he served until 1955. After retirement from Prime Minister, he continued to serve his country as a member of Parliament until 1964.

2.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의 군주가 되기 위한 노력은 효과적인 만큼이나 영리했습니다. 기원전 69년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어릴 적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그리스 문화를 배우며 현명하고 친근한 군주가 될 기반을 다졌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 문화를 교육받은 것에도 불구하고, 그녀 이전의 파라오와는 달리 그리스 관습을 따르지 않았으며 자신을 완전한 이집트인으로 인식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가 기원전 51년 세상을 떠나자,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10살짜리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이집트를 공동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동생을 공동 통치자로서 거부하고, 그녀가 이집트의 유일한 군주임을 선포했습니다.

수년 후 이 거절은 적대감으로 바뀌었고, 프톨레마이오스는 강력하고 헌신적인 동맹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두 남매는 각자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고, 그들은 이내 소규모 접전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들의 적대 행위를 멈추려 했습니다. 카이사르는 각 남매에게 개별적으로 접근하여 삼자 회담을 통해 타협점을 찾자고 요청했지만, 오직 클레오파트라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목적은 동생과의 화해가 아니라 새로운 동맹을 맺는 것이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는 연인 사이가 되었고, 이내 클레오파트라는 그 첫 만남으로부터 아이를 배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행각에 분노한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클레오파트라의 군대를 더 자주 공격하기 시작했고, 결국 패배하여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제자이자 로마 정치가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만난 후 이집트는 몰락했습니다. 둘은 깊은 사랑에 빠져 세 명의 아이를 나았습니다. 주로 옥타비우스로 잘 알려진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로마의 권력 승계 과정에서 안토니우스와 갈등을 빚었습니다. 이 갈등은 이내 전쟁으로 이어졌고,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달아나야 했습니다. 몇 년에 걸친 전쟁 끝에 이집트는 옥타비우스에게 점령되었고, 이집트 속주가 되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자결했고, 옥타비우스가 클레오파트라를 로마로 데려가겠다고 선언한 다음 며칠 후 그녀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Cleopatra's efforts to become ruler of Egypt were as intelligent as they were effective. Being born into royalty in 69 BC as Pharaoh Ptolemy XII's daughter, and being taught Greek arts at the Library of Alexandria as a youth laid the foundation for a knowledgeable and relatable ruler. Unlike the Pharaohs before her, she identified fully as Egyptian, instead of following many Greek customs despite her education of their arts. When her father passed away in 51 BC, Cleopatra and her 10 year old brother, Ptolemy XIII, were supposed to be co-rulers of Egypt. In reality, she rejected her brother as co-ruler, and it was declared she was the sole ruler of Egypt.

Years later, this rejection turned into hostility, as Ptolemy XIII maintained many powerful and devoted allies. The two siblings each had their own army, and they began skirmishing, leading to Julius Caesar attempting to put an end to their animosity. Caesar reached out to each sibling independently, requesting they both join him to set the differences aside. Only Cleopatra made an appearance, but her intention was to create a new ally, not mend a broken relationship with her brother. Cleopatra and Caesar become romantically involved, and she had their child shortly after this initial visit. Enraged by Clopatra's involvement, Ptolemy XIII began more attacks against her army, eventually leading to his defeat and death.

The fall of Egypt came after Cleopatra met Mark Antony, a Roman politician who was a mentee of Julius Caesar. The two fell deeply in love, and had three children. Caesar Augustus, commonly known as Octavius, had a dispute with Antony about the succession of Roman leadership after Julius' assassination. This dispute led to a war in which Cleopatra and Antony were forced to retreat to Egypt. After several years of conflict, Egypt fell to Octavius, and became a province of Egypt. Antony took his own life, and Cleopatra's final act was to do the same, several days later after Octavius announced he would bring her to Rome.

3. 이츠코아틀

이츠코아틀은 아즈텍 제국의 첫 군주이자 건국자로 가장 유명하지만, 그 전에는 그의 조카 치말포포카가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테노츠티틀란의 4대 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 전투로 인해 중앙 멕시코는 도시 국가 아스카포찰코의 막스틀라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가 1427년에 선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츠코아틀은 막스틀라를 물리치고 중앙 멕시코를 해방시키기 위해 텍스코코의 네사우알코요틀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였고, 틀라코판의 왕 토토키우아츨리와 새로운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 동맹은 아즈텍의 삼각동맹이라 일컬어졌고, 결국 아즈텍 제국이 탄생하는 길을 닦았습니다.

이츠코아틀은 더 융성한 국가로 성장할 기반을 닦기 위해 주변 지역을 상대로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러한 지역 중 처음 관심을 기울인 곳은 깨끗한 수원과 직접 연결되는 치남파스 구역들이었습니다. 그 지역을 점령한 덕분에 아즈텍 삼각동맹은 방대한 농업 연결망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콜후아칸과 코요아칸도 정복하면서 이츠코아틀은 멕시코 계곡의 남쪽 절반을 확보하였습니다. 세 지도자는 계속해서 멕시코 계곡 외부를 정복해 나갔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아즈텍 제국의 통치 및 종교적 계급 체계의 토대를 닦았습니다.
Although he is most famous for being the 1st ruler and founder of the Aztec Empire, Itzcoatl was previously elected to be the 4th King of Tenochtitlan after his nephew, Chimalpopoca, was killed in battle. This battle led to the occupation of Central Mexico by Maxtla of the city-state Azcapotzalco. Shortly after his election in 1427, Itzcoatl pursued an allegiance with Nezahualcoyotl of Texcoco to defeat Maxtla, and rid Central Mexico of the occupation. Together they succeeded and formed a new alliance with a new ally, Totoquilhuaztli, the king of Tlacopan. This alliance would be called The Aztec Triple Alliance, and paved the way for the eventual Aztec Empire.

Itzcoatl led several campaigns against nearby regions to secure a more prosperous nation. The first of these areas he took an interest in was the chinampas districts, which had direct connection to fresh water springs. Capturing this area allowed the Aztec Triple Alliance to create extensive agricultural networks. After winning two more battles, the conquest of Colhuacan and Coyoacan, Itzcoatl secured the southern half of the Valley of Mexico. The three rulers continued their conquest outside of the Valley of Mexico, and in their wake they established the foundation of the Aztec Empire's governmental and religious hierarchy.

4. 쩐흥다오

오늘날 베트남에 거주하는 민족에게 게릴라전은 역사를 통틀어 아주 강력한 전술로 사용되었습니다. 쩐흥다오는 게릴라전을 처음 사용한 지도자 중 한 명이었고, 이를 통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258년부터 1287년까지, 대월은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 칸으로부터 세 차례 침공을 받았습니다. 첫 침공 당시 30세의 장교 쩐흥다오는 침략자들을 물리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가 엄청난 활약을 했다는 것 외에 침공 당시의 정확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쿠빌라이 칸은 1285년 아들인 토곤과 함께 두 번째로 대월을 침공했습니다. 그들은 함께 국경에 배치된 대월의 병사들을 압도했으며, 자신 있게 수도인 탕롱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당시 대월의 태상황과 황제는 쩐흥다오를 장교에서 군의 총사령관으로 진급시켰으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몽골군을 저지하거나 늦추라고 지시했습니다. 그 명령을 따르기 위해 쩐흥다오는 게릴라전을 크게 활용했습니다. 칸의 병력은 진군하면서 많은 게릴라 공격을 받아 큰 사상자를 냈습니다. 쩐흥다오가 침공군을 괴롭히며 저지한 덕분에 대월의 태상황과 황제는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대월 병력은 계속해서 몽골군을 괴롭혔고, 결국 쩐흥다오의 영리한 전술 덕분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Guerilla Warfare has been an incredibly powerful tactic throughout history for the people who reside in present-day Vietnam. Tran Hung Dao was one of the first leaders to ever deploy the strategy, and he did so with paramount success. Between 1258 and 1287, there were three separate invasions of Dai Viet from Kublia Khan of the Mongol Empire. The first invasion, the 30 year old officer Tran Hung Dao assisted to great caliber the defeat of the invaders. Outside of his impeccable performance, little is known about his exact actions during the invasion.

Kublai Khan attempted a second invasion of Dai Viet in 1285 with one of his sons, Prince Toghan. Together, they decimated the Viet troops stationed at the border, and began marching confidently towards the Capital, Thang Long. The Emperors at the time promoted Tran Hung Dao from his role of Officer, to Commander-in-Chief of the Armies, with the directive to stop or slow down the Mongol Army by any means necessary. It was with this order that Tran Hung Dao deployed intense use of Guerrilla Warfare. While Khan's troops marched forward, they were met with heavy guerrilla forces, and suffered heavy losses. Due to Dao's whittling down and stalling of the invading Army, the Emperors of Dai Viet were able to escape unharmed. Viet forces were able to continue their harassment tactics, and eventually win the war because of Dao's intelligent use of strategy.

5. 관우

후한 왕조 말기, 군웅 유비는 아주 특출난 장군이 있었습니다. 관우는 유비에게 충성을 바쳤으며, 삼국 시대에 유비가 촉한을 세우는 데 지대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유비는 익주를 손에 넣으려 했으며, 214년 출정하면서 관우를 남겨두고 가기로 했습니다. 관우의 임무는 유비가 6년 간의 정복을 마칠 때까지 형주를 통치하며 방어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219년 유비는 한중 공방전에서 조조의 군대에 승리하였습니다. 관우의 충성심과 헌신에 대한 보상으로 유비는 그를 전장군으로 임명하였으며, 그에게 의장용 도끼를 하사했습니다.

관우는 전설적인 전사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는 대대로 1천 명에 맞먹는 전사이자 곰과 호랑이만큼 강력한 장군으로 칭송받았습니다. 관우의 일생과 업적은 그가 죽은 후까지 찬미되었으며, 300년이 지난 수 왕조에 이르러서는 신격화되었습니다. 관우의 행동과 도덕적인 성품은 수 세대에 걸쳐 이야기로 전해지면서 그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충성심과 정의감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The warlord Liu Bei, during China's late Eastern Han dynasty, had one military general that was particularly remarkable. Guan Yu was incredibly loyal to Liu Bei, and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the establishment of his state of Shu Han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Bei had his eyes set on establishing control over the Yi Province, and as he prepared for his departure in 214, he decided Guan Yu was to remain behind. Yu's role would be to govern and defend the Jing Province for the entirety of Bei's conquest, which ended up lasting over six years.

Finally, in 219, Liu Bei emerged victorious in the Hanzhong Campaign against the warlord Cao Cao and his army. As a reward and recognition of Guan Yu's loyalty and devotion, Liu Bei appointed him to the role of General of the Vanguard, and bestowed upon him a ceremonial axe.

Guan Yu's reputation as a warrior has become legendary. He has been praised throughout history as both a warrior who is a match for ten thousand men, and a general with the might of a bear and tiger. Guan Yu's life and achievements have been glorified to such an extent after his death, that he was deified during the Sui dynasty, over 300 years later. Through generations of storytelling, his deeds and moral qualities have been celebrated, marking Guan Yu as one of East Asia's most popular paradigms of loyalty and righteousness.

6. 알렉산더 대왕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3세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정복자 중 한 명인 그는 뛰어난 군사 전략가였으며, 운 좋게도 아버지 필리포스 2세로부터 당대에 가장 잘 훈련된 군대를 물려받았습니다. 알렉산더는 그 군대를 사용하여 그리스, 이집트, 페르시아를 정복했고, 심지어 인도까지 진출했습니다.

알렉산더는 정복 활동으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피정복자와 그들의 관습을 자신의 제국에 동화시킨 것으로도 잘 알려졌습니다. 이로써 새로운 신하들의 충성심을 유지한 것은 물론 제국의 안정도 보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제국 또한 붕괴했으며, 제국에서 떨어져 나온 계승자 왕국 중 일부는 수백 년 동안 존속했습니다.
One of the most successful conquerors in all of history, there are few who haven't heard of Alexander III of Macedon. He was a brilliant military strategist, who was fortunate enough to inherit the best trained army of the time from his father, Philip II. Alexander used this army to conquer Greece, Egypt, Persia, and he even made his way into India.

Alexander was famous for not just conquering, but also integrating those he conquered and their customs into his empire. This kept his new subjects loyal, as well as providing stability. While his empire collapsed with his death, some of its successor states lasted for hundreds of years.

7. 알프레드 노벨

알프레드 베른하르드 노벨은 청소년 때 화학과 언어에 소질을 보였습니다. 그는 24세의 나이에 여섯 개의 언어를 숙달하고 자신의 발명품인 가스 계량기로 첫 특허를 신청했습니다. 1850년 노벨은 파리로 가서 3년 전 니트로글리세린을 발명한 아스카니오 소브레로를 만났습니다. 당시 니트로글리세린은 무척 불안정했지만, 노벨은 그 물질을 제어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했습니다. 1867년, 니트로글리세린이 발명되고 20년 후, 알프레드 노벨은 새로운 폭발물의 특허를 신청했습니다. 흑색 화약보다 1천 배는 더 강력했죠. 다이너마이트로 불리게 된 이 발명품은 니트로글리세린보다 다루기 안전하고 안정적이었으며, 터널, 운하, 길 등 다양한 건축 프로젝트에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1888년, 알프레드의 형 루드비그가 세상을 떠나자 여러 신문사에서 착각하고 알프레드의 부고를 실었습니다. 이 신문은 알프레드를 '죽음의 상인'이자 '인간을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죽일 방법을 찾아 부자가 된 사람'라고 일컬었습니다. 세상이 그의 발명품을 바라보는 시선에 환멸을 느낀 노벨은 재산의 대부분을 인류 발전을 위해 남기기로 했고, 그렇게 노벨상이 탄생하였습니다.

알프레드 노벨은 1895년 11월 27일 파리에서 마지막 유서와 성명서에 서명했습니다. 그는 자기 재산의 상당량을 다섯 부분으로 나눠 물리학, 화학, 의학, 문학, 평화 부문 상을 만드는 데 사용하고, '매년 전해에 인류를 위해 가장 공헌한 사람들'에게 상을 수여하도록 했습니다. 노벨은 이듬해인 1896년 12월 10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As an adolescent, Alfred Bernhard Nobel demonstrated an aptitude for chemistry and language. His skills developed further as he mastered six languages and filed his first patent for his invention of the gas meter by the age of 24. In 1850 he traveled to Paris and met Ascanio Sobrero, who invented nitroglycerin three years prior. At the time, nitroglycerin was highly unstable, but Nobel was determined to control the substance. In 1867, 20 years after the discovery of nitroglycerin, Alfred Nobel patented a new explosive, one thousand times more powerful than black powder. This invention, called Dynamite, was safer to handle and more stable than nitroglycerin, and became the main tool used for building tunnels, canals, roads and many other construction projects.

In 1888, Alfred's brother Ludvig died, and several newspapers published obituaries of Alfred due to miscommunication. These newspapers referred to Alfred as 'The merchant of death' and a man 'who became rich by finding ways to kill more people faster than ever'. Disgusted by the way the world would view his discoveries, he decided that he would leave the majority of his wealth to the betterment of humankind, and thus established the Nobel Prizes.

Alfred Nobel signed his last will and testament in Paris on November 27, 1895. He specified that the bulk of his fortune should be divided into five parts and to be used for prizes in physics, chemistry, physiology or medicine, literature and peace to 'those who, during the preceding year, shall have conferred the greatest benefit to humankind.' Nobel died a year later, on December 10th, 1896.

8. 부디카

부디카는 오늘날 노포크라 불리는 곳에 위치한 이케니라는 국가의 여왕이자 프라스타구스 왕의 반려였습니다. 그들의 치하에서 이케니는 로마 제국과 동맹으로서 주권을 유지했지만, 프라스타구스가 서기 40~60년 경에 세상을 떠나자 로마의 황제 네로는 이케니를 독립 국가로 남겨달라는 그의 부탁을 무시했습니다. 황제는 프라스타구스의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끔찍한 대우를 했으며, 이케니는 통째로 합병되고 말았습니다.

이케니 사람들은 이에 크게 분노했습니다. 부디카와 그녀의 백성들은 새로 동맹이 된 트리노반테스족과 함께 로마에 대항하기 위해 120,000명에 달하는 군대를 꾸렸습니다. 그들은 진군하여 빠르게 로마 식민지를 탈환했고, 네로 황제 동상의 목을 잘랐습니다. 식민지에서 동맹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직후 로마가 다시 영토를 탈환하려 했지만, 로마 병사들은 부디카의 용맹한 군대 앞에 빠르게 무릎 꿇었습니다. 식민지는 불타 잿더미가 되었고, 부디카는 병사들을 두 곳의 다른 정착지로 이동시키며 복수를 이어나갔습니다.

이전의 실패로 분노한 로마 총독은 병력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끌어모았으며, 기록에 따르면 수적으로 크게 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을 제압했습니다. 부디카는 로마인들에게 잡히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그녀의 최후는 수수께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일부 역사가는 그녀가 로마군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독으로 자살했다고 믿으며, 다른 이들은 그녀가 병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영국 역사에 큰 영향을 남겼으며, '화덕의 수호자' 또는 '잘못을 복수하는 자'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Boudica was the Queen to a country called Iceni, now referred to as modern day Norfolk, alongside her husband, King Prasutagus. They ruled Iceni as an independent ally of Rome, however, when Prasutagus died between 40-60 AD, the Roman Emperor Nero ignored the late king's requests to remain independent. The Emperor treated the remaining family members utterly horribly, and the entire land was annexed.

To say the people of Iceni were upset would be an understatement. Boudica and her people, alongside newfound allies of Trinovantes, created an army nearly 120,000 strong to fight off the Romans. They marched and quickly retook a Roman colony, as well as decapitating a bronze statue of Emperor Nero. Shortly after the overwhelming victory at the colony, Rome attempted to seize the land again, but the troops fell quickly at the feet of Boudica's furious army. The colony was burned to the ground, and Boudica moved her troops to two more settlements, and continued exacting her and her peoples' revenge.

Enraged by previous failures, a Roman administrator regrouped his forces one last time, and though according to history his men were greatly outnumbered, he crushed the rebel forces. Boudica was never captured by the Romans, and because of that, her death is a bit of a mystery. Some historians believe she poisoned herself to avoid capture by the Romans, while others believe she simply passed from sickness. She is largely impactful in British history and has been called 'The Guardian of the Hearth' and 'The Avenger of Wrongs'.

9. 붉은 에이리크 (에이리크 힌 라우디)

에이리크 토르발드손이 어렸을 적, 아버지가 살인으로 추방되면서 그의 가족은 노르웨이를 떠나야 했습니다. 에이리크는 아이슬란드에서 자라났고, 그곳에서 농장을 짓고 자기만의 가족을 꾸렸습니다. 그는 이웃 농장과 갈등을 겪다 아버지와 똑같이 살인을 저질러 아이슬란드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에이리크는 추방된 동안 탐험을 하다 그린란드를 발견했습니다. 그가 그린란드를 처음 발견한 것도 아니고 그곳에 정착하려던 이는 그 전에도 있었지만, 그곳에 영구적으로 정착하려던 유럽인은 그가 최초였습니다. 그는 아이슬란드에서 정착민을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그린란드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이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수백 년 후 소빙하기가 찾아오면서 정착지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When he was a small boy, Erik Thorvaldsson's family had to leave Norway after his father was banished for manslaughter. Erik grew up in Iceland, where he built a farm and started his own family. Like his father, Erik was also exiled for manslaughter, but this time from Iceland, after a dispute with a neighboring farm.

It was during his exile that Erik went exploring and found Greenland. While not the first to discover Greenland, or the first to try to settle it, Erik was the first European to permanently settle it. He purposefully chose the name in order to entice settlers from Iceland, and it worked. Unfortunately a small ice age a few hundred years later spelled the end of the settlement.

10. 조지 워싱턴

조지 워싱턴은 청년 당시 측량사가 된다는 꿈을 좇고 있었지만, 1752년 20살이 되면서 세상을 떠난 친척들로부터 버논 산 영지를 물려받았습니다. 워싱턴은 이복형제 로렌스를 따라 군인이 되었으며, 민병대 담당 구역을 감독하는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754년 7년 전쟁이 시작하면서 워싱턴은 중령으로 승급되었고, 그의 군대는 10달 동안 20번이 넘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300마일 길이의 전선을 지켜냈습니다.

미국 독립 전쟁이 1775년 4월 19일에 시작했습니다. 2달 후 대륙군이 창설되었고, 조지 워싱턴이 의회의 만장일치로 총사령관 자리에 임명되었습니다. 워싱턴은 다음 8년 동안 총사령관으로 복무하며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에 이바지하였습니다. 1788년 12월부터 1789년 1월까지 첫 미국 대통령 선거가 열렸으며, 조지 워싱턴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승리하면서 1789년 4월 30일 취임하였습니다.

2차례의 임기를 마친 8년 후, 워싱턴은 3번째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임기 중 세상을 떠나면 대통령 직위가 평생 임기라는 인상을 남길 수 있었기 때문이죠. 고별 연설이 미국 국민들에게 공개되었으며, 워싱턴은 1797년 퇴임했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1799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그가 40년 간 운영한 버논 산 영지의 워싱턴 가문 묘지에 묻혔습니다.
George Washington pursued his passion for surveying as a young man until he was 20 years old in 1752, when he inherited the Mount Vernon estate from deceased relatives. Following his half-brother Lawrence, Washington pursued a military career, and was appointed the position of Commander tasked with overseeing a militia district. In 1754, Washington was promoted to Lieutenant Colonel at the start of the Seven Years' War, and his army successfully defended 300 miles of frontier from more than twenty enemy attacks in ten months.

The American Revolutionary War began on April 19th, 1775. The Continental Army was created two months later, and George Washington was unanimously elected to be the commander-in-chief by congress. For the next eight years, Washington's service as the commander-in-chief would help Americans seize independence from British rule. The first American presidential election was held from December 1788 to January 1789. George Washington won the presidency with overwhelming support, and was inaugurated on April 30th, 1789.

After eight years, or two full terms in office, Washington decided against running for a third term as the U.S. President. He did not want to die during a term in office, which could create the impression that the position of President would be a lifelong appointment. A farewell address was published to the American people and Washington retired from office in 1797. George Washington died on December 14th, 1799 at the age of 67. He was buried in the Washington family vault on the Mount Vernon estate he ran for over 40 years.

11. 로버트 더 브루스

로버트 1세는 1274년 스코틀랜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1292년 스코틀랜드의 차기 국왕 자리를 놓고 다툼이 벌어졌을 때, 로버트와 그의 아버지는 존 발리올을 지지한 에드워드 1세의 결정에 반대했습니다. 4년 후 로버트와 그의 아버지는 에드워드의 스코틀랜드 침공을 지지했으며, 발리올을 몰아내는 걸 도왔습니다. 다음 10년 간 스코틀랜드의 왕위는 비어있었으며, 대신 로버트가 속한 수호자들의 의회가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1306년, 로버트 더 브루스는 그의 숙적인 또 다른 수호자이자 발리올의 조카 존 코민과 싸웠습니다. 그들의 경쟁 관계는 로버트 더 브루스가 덤프리스의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의 제단에서 존 코민을 찔러 죽이면서 끝을 맺었습니다.

존 코민을 잔혹하게 살해한 후 로버트는 교황에 의해 파문당했으며, 에드워드는 그를 무법자로 규정했습니다. 그의 악명에도 불구하고 로버트는 왕좌를 차지했으며, 1306년 스코트인의 왕이 되었습니다. 1년 후 로버트는 에드워드 왕에 의해 폐위되었으며, 그의 형제 3명은 처형되고 아내와 딸들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후 수년 간 로버트는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매우 성공적인 게릴라전을 펼쳤습니다. 스코틀랜드 병력은 게릴라 전략을 통해 상대를 약화시켰고, 야전에서 수가 더 많은 잉글랜드 군대를 물리쳤으며, 특히 1314년 배넉번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1324년, 교황은 스코틀랜드를 독립 국가로 인정하는 것과 동시에 로버트를 왕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싸움은 1327년 에드워드 2세가 폐위되고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와 평화 협정을 맺었습니다. 로버트 1세는 1329년 6월 7일 세상을 떠났으며, 멜로즈 수도원에 안장되었습니다.
Robert I was born into an aristocratic Scottish family in 1274. In 1292, during a succession dispute over the new King of Scotland, Robert and his father refused to support King Edward I's decision of John Balliol. 4 years later Robert and his father would support King Edward's invasion of Scotland and aided in the dethroning of King Balliol. For the following 10 years Scotland would not be ruled by a monarch, but rather a council of guardians where Robert would serve. In 1306, Robert the Bruce fought with his greatest enemy, John Comyn, a fellow guardian of Scotland and the nephew of the past King Balliol. The rivalry would end after Robert the Bruce stabbed John Comyn to death on the altar at the church of the Greyfriars at Dumfries.

After the brutal killing of John Comyn, Robert was excommunicated by the pope and deemed an outlaw by King Edward. Despite his infamy, Robert the Bruce claimed the throne and was crowned King of the Scots in 1306. A year later, Robert was deposed by King Edward, who also executed three of his brothers and imprisoned his wife and daughters.

In the following years, Robert the Bruce waged a highly successful guerrilla war against the English. The Scottish forces successfully utilized guerilla tactics to weaken their opponent, and were also able to defeat the larger English armies in the open battlefield, most notably the Battle of Bannockburn in 1314. In 1324, the pope both recognized Scotland as an independent country, and Robert the Bruce as King. The fighting between the English and Scottish continued until 1327 when King Edward II was deposed and his son would take his crown, who then made peace with Scotland. Robert the Bruce died on June 7th, 1329 and was buried in Melrose Abbey.

12. 이순신

임진왜란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둔 것으로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순신은 승산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도 일본군을 물리쳤습니다. 그는 한 번도 해전을 지휘해본 적 없었지만, 얼마 안 있어 일분군이 매우 두려워하는 상대가 되었습니다. 그는 카리스마와 존중심을 통해 부하들의 충성심을 다졌으며, 심지어 죽어가는 부하의 마지막 소원을 직접 들어주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순신은 거북선을 개량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조선군은 해전에서 주로 화포와 총을 사용했지만, 일본군은 근접 전투에 매우 뛰어났습니다. 거북선의 닫힌 구조와 가시는 일본군이 승선하지 못하게 막았으며, 섬 주위의 좁은 공간에서 화포와 함께 좋은 전적을 거두었습니다.
Celebrated as a national hero in Korea for his victories in the Imjin War, Yi Sun-sin managed to best Japan on the seas while facing nearly impossible odds. He went from never having commanded a naval battle to someone that the Japanese feared in a very short time. He instilled intense loyalty in his men through a combination of charisma, shows of respect, and even going so far as personally fulfilling their dying wishes.

Yi is also noted for his improvement upon the design of the Korean turtle ship. While the Koreans preferred using cannons and guns in naval warfare, the Japanese were highly skilled at hand-to-hand combat. The turtle ship's enclosed design (and spikes) prevented boarding from the Japanese, and also worked well in the tight spaces around islands in conjunction with their cannons.

13. 페리클레스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아테네와 민주주의의 번영을 이끌었습니다. 극단적인 포퓰리스트인 그는 정치적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테네를 쥐락펴락했습니다. 아테네가 그리스의 수많은 도시 국가들보다 앞서나간 것은 그의 리더십 덕분이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두 가지 업적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바로 아크로폴리스를 건설한 것과 페르시아 및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아테네를 이끈 것이죠. 아크로폴리스 건설은 아테네의 인부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동시에 도시의 미관을 개선하고 도시를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특히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함대에게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펠레폰네소스 전쟁은 그리 잘 흘러가지 않았으며, 스파르타가 그리스 대부분을 영향권 아래에 놓고 아테네의 힘은 크게 줄어드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An Athenian politician and general who led Athens and its democracy to new heights. Extremely populist, he rode his political success to uncontested control over Athens until his death. It was thanks to his leadership that Athens took the lead over many other city-states in Greece.

Pericles is remembered for two things: construction of the Acropolis, and leading Athens in wars against Persia and Sparta. The construction of the Acropolis gave jobs to the workers in Athens while also improving the beauty of the city and helping to protect it from attacks. The wars against Persia were largely successful, especially the great victory over the Persian fleet at the Battle of Salamis. The Peloponnesian War did not go so well however, and led to Sparta gaining control over most of Greece and greatly diminished Athenian power.

14. 레드 클라우드 (마흐피야 루타)

붉은 구름은 수족의 언어인 라코타어로는 마흐피야 루타라고 불리며, 오글랄라 라코타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붉은 구름은 어릴 적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숙부이자 오글랄라 수족의 지도자인 스모크의 손에 자랐습니다. 붉은 구름은 청년 시절부터 포니족 및 크로우족 등 오글랄라족의 적과의 전투에서 용기와 투지를 선보이며 강력한 전사로서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붉은 구름이 미합중국 육군의 가장 강력한 적 중 한 명이 된 것은 1868년이었습니다. 1866년, 오늘날 붉은 구름의 전쟁이라 알려진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와이오밍 및 몬타나 준주에서 황금이 발견되면서 미국 정부는 라코타족, 북부 샤이엔족, 북부 아라파호족으로부터 땅을 빼앗고 싶어했습니다. 전쟁은 주로 민간인과 병사들을 지치게 해서 정복을 포기하게 만들기 위한 소규모 습격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전쟁에서 가장 악명 높은 전투는 페터먼 전투로, 붉은 구름과 성난 말 등 유명한 지도자들이 이끄는 2천 명의 원주민 전사들이 미군 병사를 기습하여 81명을 사살했습니다. 그 충격적인 패배와 2년에 걸친 수많은 습격으로 인해 미국 정부는 북미 원주민들에게 그들이 싸워 지키던 땅의 법적 권리를 부여하는 라라미 요새 조약에 서명해야 했습니다.

붉은 구룸의 전쟁은 유일하게 미국 육군이 패배한 미국과 북미 원주민 간 전쟁입니다. 1870년, 붉은 구름은 북미 원주민의 권리를 위한 로비 활동을 하려 수도로 갔으며, 그의 매력과 외교 실력으로 군중을 놀라게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붉은 구름은 전장에서 싸우는 걸 그만뒀으며, 대신 외교를 통해 자기 민족의 처우 향상에 힘썼습니다. 붉은 구름은 1909년 12월 10일 사우스다코타주의 파인 리지 보호구역에서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Red Cloud, or Mahpiya Luta in Lakota, the native tongue of the Sioux tribe, was an influential leader of the Oglala Lakota. Red Cloud lost his father at an early age and was raised by his mother's uncle, Smoke, a leader of the Oglala Sioux. As a young man, Red Cloud distinguished himself as a powerful warrior by demonstrating great courage and grit during engagements against the enemies of the Oglala, including the Pawnee and Crow tribes.

It wasn't until 1868 that Red Cloud became one of the United States Army's most capable foes. In 1866, a war that we now know as Red Cloud's war had begun. The United States wanted to seize land from the Lakota, Northern Cheyenne and Northern Arapaho tribes after discovering gold in the Wyoming and Montana territories. The war was mainly comprised of small raids on U.S. forts with the main goal of wearing down civilians and soldiers so they would abandon their mission of conquering the lands. The most notorious action of the war was the Fetterman Fight, where 2,000 Native warriors, led by famous leaders such as Red Cloud and Crazy Horse, ambushed and killed 81 U.S. soldiers. The staggering defeat of the ambush, as well as the numerous raids over two years caused the U.S. to sign the Treaty of Fort Laramie, which gave the Native Americans legal control of the land they had been fighting for.

Red Cloud's War was the only War between the U.S. and Native Americans in which the U.S. Army was defeated. In 1870, Red Cloud traveled to the capital to lobby for Native American rights, where he impressed crowds with his charisma and diplomatic skills. After the war, Red Cloud did not continue to fight on the battlefield, but instead fought for the betterment of his people with diplomacy. Red Cloud died December 10th,1909 at the age of 88 on the Pine Ridge Reservation, South Dakota.

15. 레오니다스

레오니다스 1세는 아나자드리아스 2세의 아들로, 수 세대에 걸쳐 스파르타를 지배한 아기아다이 왕가의 일원으로 태어났습니다. 아기아다이 왕조는 전설적인 반신 헤라클레스와 카드모스의 후예라고 주장했으며, 덕분에 고대 그리스 최고의 전사가 될 힘과 의지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레오니다스도 예외느 아니었으며, 그가 전투에서 보인 기량은 필적할 데가 없었습니다.

그리스 연합은 2차 페르시아 전쟁 당시 직접 레오니다스를 장군으로 선택했으며, 레오니다스는 페르시아 침공군으로부터 산길을 지키기 위해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결사 항전을 펼쳤습니다. 그리스군은 중장보병 장비와 밀집 대형 덕분에 페르시아 침공군의 전면 공격에 꿈쩍도 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전술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충격적인 배신으로 인해 페르시아군이 약점을 알아내고 이를 활용하려 하자 대부분의 병사들은 뒤로 물러났습니다. 전장에 남은 소규모 병력은 레오니다스와 그의 스파르타 병사들이 전부 쓰러질 때까지 싸웠으며, 그때는 이미 그리스의 다른 도시 국가에서 온 병력 대부분이 항복한 이후였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레오니다스는 300명의 스파르타인의 지도자로서 신화적 존재가 되었으며, 이 사건은 역사에 남아 길이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Leonidas I was the son of King Anazadrias II, and born into the Agiad dynasty which ruled Sparta for generations. This dynasty claimed to have descended from the mythological demigods Heracles and Cadmus, which gave them the strength and resolve to be the best warriors Ancient Greece had ever seen. Leonidas is no exception to this dynasty, as his prowess in battle was near unrivaled.

Greek coalitions personally selected Leonidas to serve as General during the Second Persian War, where he led the allied Greek forces to a last stand at the Battle of Thermopylae while attempting to defend the pass from the invading Persian army. His army included men from several different city-states of Greece. The Greeks' heavy equipment and dense formations rendered them nearly impervious to frontal assault from the Persian invaders. Despite their tactical superiority, most troops were sent back after a disheartening betrayal which revealed a weak point in their battlefield the Persians intended to exploit. The relatively small remaining army fought until neither Leondias nor any of his spartans were left standing; at which point the majority of the other Greek city-state's troops surrendered. After the battle, Leonidas entered myth as the leader of the 300 Spartans, an event which has been immortalized and written about throughout history.

16. 미야모토 무사시

일본의 검성으로 손꼽히는 미야모토 무사시는 다양한 수양법에 통달했습니다. 그는 서로 전혀 다른 주제 세 가지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바로 불교, 철학, 검술 말이죠.

무사시는 이천일류라는 자기만의 독특한 검술 유파를 창시했습니다. 그 검술은 우치가타나와 와키자시 등 대도와 소도를 동시에 사용했습니다. 그는 이 검술을 종종 실전에서 시험했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61번의 결투를 벌였으며 숨을 거둘 때까지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독특한 검술을 창시했을 뿐만 아니라, 노년에는 오륜서라는 책을 집필했습니다. 이 책은 그의 이천일류 검술을 매우 자세히 가르치며, 그와 관련된 다른 검술과 무술도 다룹니다. 무사시는 자신의 검술을 가장 우선시했으며, 사람들의 구애를 전부 무시하면서 수련과 불교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Considered a Kensei, a sword saint of Japan, Miyamoto Musashi was truly a master of many disciplines. He devoted his entire life to three disparate subjects: Buddhism, philosophy, and swordsmanship.

Musashi founded his one unique style of Kenjutsu swordsmanship, called Niten Inci-ryu. The technique involved the swordsman using both a large sword, and a companion sword at the same time, such as a katana with a wakizashi. He put this style to the test quite frequently. During his lifetime, he engaged in 61 duels and died without losing a single duel.

He not only created the unique style of swordsmanship, but in his later years he also authored The Book of Five Rings. This text taught his Niten Ichi-ryu in great detail, and also covered other Kenjutsu and martial arts that pertained to it. Musashi held his swordsmanship above all things, ignoring any and all romantic advances, choosing instead to focus on his training and studies in buddh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