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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21:18:08

도릴라이움 전투

도릴라이온 전투에서 넘어옴
1. 개요2. 1097년의 전투
2.1. 개요2.2. 서전2.3. 개전2.4. 십자군 증원군의 등장2.5. 전투 후
3. 1147년의 전투
3.1. 개요

1. 개요

Battle of Dorylaeum(Dorylaion).

현대 터키의 에스키셰히르(Eskişehir) 인근에서 약 반백년의 시간을 두고 벌어졌던 두차례의 전투이다. 도릴레온은 중부 아나톨리아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는 주요한 두개의 길목 중 하나에 위치한 곳인데, 고원의 입구에 해당하는 입지에 탁트인 평야가 펼쳐진 곳이었다. 고원에 자리한 세력의 입장에서는 힘들게 오르막길을 타고온 적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하기 좋은 곳이었다.

또다른 하나의 길목은 현대 터키의 볼루(Bolu)를 지나는 길인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앙카라로 가기에 좋은 길목으로 당시에는 클라우디오폴리(Claudiopolis)였다. 성지로 향하던 두차례의 십자군은 행군이 수월하고 좀더 짧은 코스를 원했으므로 자연히 도릴레온으로 향했고, 때문에 전투가 일어났다.

2. 1097년의 전투

도릴라이움 전투
날짜
1097년 7월 1일
장소
아나톨리아 도릴레온 (현 에스키셰히르) 인근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십자군, 동로마 제국 룸 술탄국, 다니슈멘드
지휘관 타란토 공작 보에몽
하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1]
주교 르 퓌의 아데마르
툴루즈 백작 레몽
동로마 장군 타티키오스
킬리지 아르슬란
다니슈멘드 가지
병력 선발대 보에몽 20,000명
주력 30,000명
약 6,000~8,000명의 기마궁수
피해 규모 약 4,000명 약 3,000명
결과
십자군 승리.

2.1. 개요

제1차 십자군 원정 당시 벌어진 전투. 중동에 십자군의 공포를 퍼뜨린 서전에 가까운 전투였다.

2.2. 서전

6월 26일 니케아를 떠난 십자군은 주로 보급상의 문제로 두 갈래로 나뉘어 행군했다. 건조한 아나톨리아의 고원지대는 제국령 유럽이나 비티니아의 해안가에 비해 보급이 곤란했는데, 마침 여름인데다 보급을 바라기 힘든 적지이다보니 군을 나누는 것은 불가피했다. 선발대는 보에몽 1세, 노르망디의 로베르, 플랑드르의 로베르, 보에몽 1세의 조카 탕크레드, 동로마 장군 타티키오스가 이끌었으며 본대는 고드프루아, 그 동생 보두앵, 블루아 백작 에티엔, 베르망두아의 위그가 이끌었다. 6월 29일 킬리지 아르슬란 휘하의 튀르크 연합군은 도릴레온 인근에서 매복을 기도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지속적으로 십자군의 동태를 파악해야 했으므로 척후를 보냈는데, 척후병들이 십자군 선발대의 눈에 띄어 십자군들도 조만간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게 되었다. 어쨌든 보에몽은 3일간 연달아 행군한 끝에 6월 30일 황폐화한 도시인 도릴레온 인근의 초원에 진을 친다.

2.3. 개전

7월 1일 보에몽의 선발대는 완전한 기습을 당해 제대로 진형을 구축하기도 전에 튀르크 기마궁수들을 마주하게 된다. 기사들이 급히 승마하여 반격을 시도했으나 경무장한 튀르크 기병들의 기동력을 따라잡지 못해 실패로 돌아갔다.

진내로 진입한 튀르크 기병들이 비무장 순례자들과 갑옷을 갖추지 못한 보병들을 도륙하기 시작하자 보에몽은 즉각 기사들을 하마시켜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지시했고 기사들의 방어선 안쪽에 비무장 순례자들과 경무장 보병들을 위치시켜 보호했다. 튀르크 기마궁수들의 사격은 두텁게 갑옷을 두른[2] 기사들에게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으나 갑옷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말과 사람들을 살상하였으며 우수한 기동력으로 치고 빠지며 괴롭혔기 때문에 결국 십자군 선발대는 인근 강변으로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강변은 물을 조달하기 쉬웠으며, 지반이 물러 기병대가 활약하기 좋은 조건도 아니었다. 기사들도 작정하고 방어용 원진을 치고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시작했으며, 여기에 타티키오스펠타스트들도 방진에 합류에 투창을 던지며 응수했다.

지속되는 화살비에 의해 피해가 누적되면서 기사들도 지쳐갈 무렵 고드프루아가 50명의 기사들을 이끌고 튀르크군의 전열을 돌파하여 합류했으며 이후로도 소규모 지원군이 튀르크군을 돌파하여 합류하거나 휩쓸려 전멸하거나 했다. 십자군이 말을 잃으면 잃을수록 튀르크 기마궁수들은 더더욱 공격적으로 태세를 바꾸었으나 상기했듯 두터운 갑옷을 껴입은 기사들에게 오로지 화살만 퍼부어서는 큰 타격을 주기 어려웠다. 그렇게 7시간동안이나 대치상태는 지속되었다.

2.4. 십자군 증원군의 등장

7시간이나 화살을 맞아가며 십자군이 버티며 강변으로 완전히 몰린 상황에서 툴루즈 백작 레몽[3]의 기사들이 도착해 튀르크군의 측면을 강타했다. 튀르크군의 전열이 흔들린 사이 강변에 몰렸던 십자군 부대도 신속하게 대열을 정비했다.

보에몽, 탕크레드, 노르망디의 로베르, 블루아의 에티엔이 좌익을 구성했고 툴루즈의 레몽, 플랑드르의 로베르가 중군을, 고드프루아, 베르망두아의 위그가 우익을 구성하였다. 십자군이 공세로 전환하여 몰아붙이기 시작하자 튀르크군은 흔들렸으나 그로 인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후 들어 교황의 특사인 주교 아데마르의 기사들이 튀르크군의 후방을 덮쳐 군영을 불살랐다. 자신들의 진영이 불길에 휩싸인 것을 발견한 튀르크군은 경악하였으며 이내 십자군 기사들의 맹공에 큰 타격을 입고 패주하였다.

2.5. 전투 후

아나톨리아에서 십자군을 저지할 튀르크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덕분에 십자군은 보급 문제를 제외하면 비교적 수월하게 아나톨리아를 통과할 수 있었으며, 이코니온, 케사리아 등의 주요 도시들도 탈환할 수 있었다. 게다가 기습으로 수세에 몰려있다가 아군의 기적적인 도움으로 승리했기 때문에 순례의 성격도 일부 띄고있던 십자군의 사기를 돋우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여기에 튀르크 군의 군영을 약탈하여 얻은 막대한 전리품도 한몫했음은 물론이다.

여기서 얻은 막대한 양의 전리품은 안티오크 공성전 기간동안 모조리 소모되고 만다.

그러나 비록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하더라도 투르크인들은 십자군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들의 놀라운 말타기 기술, 멋진 활쏘기 솜씨, 군사적 능력 등은 서방인들의 찬탄을 이끌어냈다. 몇몇 십자군들은 아래의 말처럼 투르크인들이 기독교 신자가 아닌 것을 한탄할 정도였다.
"(투르크인들은) 자신들이 프랑크인과 한 뿌리에서 나온 종족이라고 하면서 프랑크인과 투르크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기사로 태어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이어서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이 그리스도와 기독교권에 대한 믿음이 강력했더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들보다 더 강하고 용감하고 기술이 좋은 병사들을 찾아보기 어렵다."[4]

3. 1147년의 전투

도릴라이움 전투
날짜
1097년 10월
장소
아나톨리아 도릴레온 인근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신성 로마 제국 룸 술탄국
지휘관 콘라트 3세 메수드 1세
병력 약 20,000 여명 ?
피해 규모 ? ?
결과
룸군 승리

3.1. 개요

제2차 십자군 원정 당시 벌어진 전투. 1차 전투의 결과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십자군이 룸 셀주크 군에게 괴멸되었으며, 이로써 독일 십자군은 사실상 소멸되게 된다.


[1] 정복왕 윌리엄의 장남[2] 물론 플레이트 아머가 아닌 체인메일이지만 우습게 보이는 체인메일도 두세 겹 껴입으면 화살로 타격을 주기는 어려웠다.[3] 직접 참전했는지는 확실치 않다.[4] 출처: 동방의 부름/ 피터 프랭코판 저/ 이종인 역/ 책과함께/ 2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