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02 17:25:33
1. 개요2. 목차2.1. 더 인간적인 장소와 비인간적인 장소2.2. 따분함이라는 컬트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나2.3. 세계를 다시 인간화하는 법 3. 어록
[clearfix]2023년 출간된 토마스 헤더윅의 도서.
인간적인 장소와 비인간적인 장소를 탐구해보고, 모더니즘이 현재까지도 지배적인 양식이 된 배경을 살펴본다. 모저니즘 건축을 비판하며 건축 세계를 다시 인간화 할 방법을 제안한다. 헤더윅 스튜디오는 이를 위해 따분함 측정기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했으며 humanise.org라는 웹사이트를 개설하여 소통을 촉구한다.
- 인간적인 장소와 비인간적인 장소
- 인간적인 장소
- 100년의 재앙
- 따분함의 해부
- 따분함이라는 컬트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나
- 건축가란 무엇인가?
- 따분함의 신을 만나다
- (우연히) 컬트를 시작하는 법
- 왜 어딜 봐도 이윤 같을까?
- 세계를 다시 인간화하는 법
- 달리 생각하기
- 모두가 쉬쉬하는 문제
- 달리 움직이기
- (예상하기로) 자주 묻는 질문들
- 행인에게
2.1. 더 인간적인 장소와 비인간적인 장소
건축을 통해 도시에 돈이라는 것 자체보다 귀한 것을 선물할 수 있음에도 이기적인 건물은 이러한 가치를 배제한 채 오직 소유주의 이익만을 기준으로 삼는 효율성에만 매몰되어 인간적인 요소를 파괴한다고 주장한다. 매력적인 건축을 디자인하고자 한다면 반복성과 복잡성을 사용하여 적절한 균형을 이뤄내야 하는데, 안토니 가우디의 까사밀라가 지하주차장으로 연결되는 뒷문과 승강기 등 비인간적 요소들을 감추고 곡선 중심의 입면을 통해 빛과 그림자와 한 몸이 되는 다차원적 건물을 만들어냈다며 성공적인 건축물의 예시로 뽑는다. 무명의 건축가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지어낸 고딕지구에 대해서는 이러한 건축물이 특정 지주의 주머니를 불리기 위한 근시안적 관점에서 지어지는 게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평범한 사람들을 맞을 수 있도록 굳건한 의지를 갖고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개개인의 특별함을 믿으며 인간 본성의 근저를 탐구할 필요가 있다며 역설한다.
반대로 철과 유리를 주소재로 획일화된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은 2차원적이며 얄팍하여 일시적이고 공허한 감정을 전달하고 특색이라고는 없이 완전히 익명적이라서 지구 어느상에 가져다 둬도 무리가 없는 건축이라며 비판한다. 이는 효율성에만 매몰되어 인간이 아니라 돈과 자동차 등 비인간적 요소를 위해 지어졌기 때문에 채광 및 상업용 진열 공간을 극대화하는 목적을 가지며 세월에 흐름에 따라 소외되며 사회적 지속성이 짧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건축물은 20세기 초에 벌어진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인해, 바로 모더니즘이라는 급진적이고 새로운 발상이 학계와 전문가 집단을 휩쓸며 대거 양산되었고, 결과는 재앙이었다고 비판한다.
2.2. 따분함이라는 컬트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나
모더니즘이 100년 가까이 건축계를 지배하는 컬트가 된 배경을 탐구한다.
16세기까지 영국에서 건축 프로젝트는 건축가가 아닌 마스터빌더로 알려진 장인들이 설계하고 관리했다. 이후 르네상스로 인해 새로운 양식이 유행에 기반한 컬트가 되며 이들은 트렌드에 뒤쳐지게 되고 자신이 지은 외관에 대한 영향력을 잃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설계도를 작성하고 제작자의 시공을 감시하는 건축가라는 직업이 등장하면서 설계하는 사람과 제작하는 사람이 분리되고 창조성이 결여되기 시작한다. 19세기에는 여러 건축협회가 등장하며 건축가라는 직업이 특정 커리큘럼을 밟은 엘리트를 중심으로 배출되도록 법제화되었다.
20세기 초에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유럽 전체가 초토화되고 인류의 한 세대가 충격과 환멸에 빠지며 기존의 오래된 질서로부터 탈피해야된다는 생각이 커졌다. 이에 의심에 기반한 합리적 사고라는 명목 하에 완전히 새로운 재현수단을 발명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무의식에 대한 이론이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더 큰 초토화가 일어나는 와중, 베이비붐으로 인해 값싸고 짓기 간편한 주택의 수요를 충족해주기에 안성맞춤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시대적 컬트로 거듭난다. 이러한 건축물은 관객에게 더 이상 느낌적 쾌가 아닌 두뇌적인 생각을 강요했으며 파괴와 충격제공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관객의 감정은 배제되고 생각만 남게 되었다. 이들은 과도한 서술과 장식, 화려한 문체 등 모든 형태의 장식적 요소를 구시대적인 가치에 기반하여 진실을 탐구하는 과정을 방해하는 표면적인 것으로 여기며 경멸한다. 진실은 아름답지 않기에 비트루비우스가 제시한 세 가지 필수 요건 중 하나인 아름다움은 사라진다.
헤더윅은 가장 대표적인 모더니스트였던 르 코르뷔지에에 대해 본인 스스로를 예술가이자 세계사적 인물로 여겼다고 언급하며 따분함의 신으로 칭한다. 르 코르뷔지에는 전후 전형적인 가정집을 결핵으로 가득 찬 넓은 마차에 비유했으며 중세의 구불구불한 옛거리는 너무 붐벼 건강 저하를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자동차를 중심으로 미래를 그리며 건축에서는 기능이 가장 중요하며 이 기능은 도로, 운하, 철도 등을 효율적인 직선으로 만드는 것이었으며 이것이 곧 관습을 깨는 진실이라고 믿었다.
이렇듯 전후 돈과 효율성을 명목으로 전문가 집단을 중심으로 퍼진 모더니즘이라는 컬트는 현실과 동떨어진 지식을 의뢰인과 대중,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며 100년이 넘도록 주류로 이어지고 있다.
2.3. 세계를 다시 인간화하는 법
순응성이 아닌 창의성을 늘릴 것을 피력하며 모더니즘이라는 식상한 컬트로 기반의 비인간적 건축으로 이뤄진 세계를 다시 인간화하는 법을 제안한다.
우선 지나쳐 가기는 끝 없이 이어지는 총체적 경험이기이 건물은 곁을 지나치는 행인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가까워질수록 스스로를 펼쳐, 더 많은 것을 드러내야 한다. 인간스러운 건물은 건물을 한 눈에 온전히 볼 수 있는 40m 이상의 도시간격, 세부적 용도가 보이는 20m 이상의 거리간격, 행인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큰 2m 내외의 문가간격까지 세 간격에서 두루 흥미로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ABC 원칙을 제안한다.
- A(Accept) : 사용자가 어떻게 느끼는지가 건물의 핵심임을 인정하라. 형태(외부)는 기능(내부)적 작동 결과가 아니다. 건물 기능의 근원은 자기를 경험하는 모두에게 물어넣는 감정이다. 대중이 무지하고 멍청하다는 사고를 버리고 입주자와 행인 입장에서의 기분을 생각해라. 건축가 본인이 살고 싶을 정도의 건물을 설계하라.
- B(Buildings) : 천 년은 거뜬하리라는 희망과 기대로 설계하라. 단순히 기술적인 설계 뿐만 아니라 대중의 사랑을 받아 철거 압력을 이겨내는 사회적 수명 또한 중요하다.
- C(Concentrate) : 건물의 흥미로운 특질을 문가 2m 안에 집중하라. 행인의 시선을 끌고 부자연스러운 거대함을 보완해야한다.
멋있는 고전 건축은 양식과 상관 없이 각 문화권의 정체성을 담아주는 강렬한 장소성 때문에 인간적인 것이기 때문에 옛 고전을 그대로 배낄 필요는 없다고 조언한다. 장소성이 건축을 낳는 게 아니라 건축이 장소성을, 새로운 정체성을 낳는 것이다.
헤더윅은 산업이 규격화되는 과정에서 건축 재료는 기존과 달리 매끈하고 단층적 표면으로 되어 있고 색상이 한정적이기에 복잡성을 나타나기 힘들어, 과거 대비 인간적인 건축물을 만들어내기 힘들어진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따라서 복잡성을 띄는 새로운 재료를 산업 규격에 표준화시켜 양산하고 무언가 흥미로운 시도를 해보며 극복하라고 조언한다.
또한 또 다른 컬트를 막기 위해 건축을 정규 과정을 밟은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좁은 문턱으로의 자격증화 및 법제화를 시키는 대신 다양한 배경을 가진 예술가들이 협업하여 예술로 위장된 관습을 깨부수고 주입식 교육이 아닌 상호지도교육을 하며 다양한 학문적 체험 및 교류, 다양한 재료 개발 및 장인 양성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시 계획의 경우에도 공고 위주의 좁은 문턱으로만 기획하지 않고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토론게시판 개설, 시뮬레이션 게임 지원, 지역별 건축센터 도입, 건축 기여 구성원의 실명화, 비평의 다양화 등을 통해 대중을 핵심 고객이자 미래의 의뢰자 및 설계자로 양성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가 좋아하는 건 딱 알맞게 조합된 반복과 복잡성이다.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다. 서로를 보완하도록. 이것은 분명 자연 환경 속 인간의 진화와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이미지는 거의 모든 이에게 잔잔한 흥분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두 히은 반대로 작용할지언정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둘의 미적 긴장이 균형을 이루는 그때, 뭇사람들을 깜작 놀랠 정도로 아름다운 작품이 가능해진다. |
까사 밀라의 사진을 보고 나라는 청년이 사랑에 빠진 대상은 그저 건물 한 채가 아니라 건물이 가진 잠재력이다. 브라이튼에서 그 사건이 있기 전 내게 지어진 세계는 언제나 부동 상태였다. 옛 건물은 매번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데 반해 새 건물은 신기할 정도로 무료하고 단조로웠다. 건물은 그저 보이는 그대로, 그게 전부였다. 그러나 까사 밀라는 부동의 현실 가운데 어떤 균열을 열어젖혔고, 그 균열 속에서 나는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보았다. |
누구든, 어디에서 왔든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는 것은 인간 본성을 이루는 근저다. 우리는 스스로의 특별함을 믿어야 한다. |
따분한 장소는 우리를 반사회적으로 만든다. 따분한 장소는 비인간적이다. |
중세 성당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따금 비슷한 생각이 든다. 그 정도로 복잡한 건물을 어떻게 만들었을지 지금의 우리로서는 가늠도 어렵다. 현대의 건물 제작자는 어쩌면 그렇게 패기도 없고 상상력도 모자라게 되었을까? 더 이상 잘하지 못할까 봐 은근히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젊은 적에는 건축가란 건물을 설계하고 만드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 정의는 틀렸다. 건축가는 제작자가 아니었다. 건축가의 직무는 건물 설계도 작성과 제작자에 의한 시공 감독, 그러니까 제작자는 이제 건축자의 지시를 따르는 역할로 격하된 것이다. |
감정은 배제되고 생각만이 남았다. 모더니즘 열풍 탓에 예술가의 초점이 마음에서 머리로 옮겨갔다. 모더니즘 운동은 혁명처럼 예술계를 휩쓸었다. 그리고 마침내 건축계에 도달했을 때, 건축의 근간이 흔들렸다. |
모더니즘 건축가는 따분한 건물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
세계를 질식시키고 있는 따뿐함의 왕국에서 창조성이 아닌 순응성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일 리 없다. |
미니멀리즘은 작은 규모에서라면 놀라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iPhone은 미니멀리즘 기술 디자인의 현대적 걸작으로, 그 단순함 덕분에 누구이게나 잘 어울린다. 하지만 건물은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사물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큰 사물이다. 이러한 거대한 규모에서 단순함과 섬세함, 깔끔함은 배타적이고 반복적이며 비인간적인 것이 된다. 최소주의를 뜻하는 미니멀리즘은 최악주의, 미저러블리즘이 된다. |
모더니즘이라는 컬트는 우리를 영원히 20세기에 매어두려 한다. 모더니즘은 미학의 시체다. 지금을 뜻하는 단어를 내세우면서 그때를 말하는 건물을 만들어 낸다. |
돈벌이가 무엇에 가치를 부여하는 주요한 방법이 될 때, 돈벌이는 우리에 있어 세성을 바라보는 렌즈이자 세상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21세기 우리는 건물의 성공 여부를 어떻게 판단할까? 건물을 짓는 데 들어간 크기로? 건물주가 벌어들이는 임대료의 크기로? 아니면 건물을 팔고 남은 차익의 크기로? |
따분한 건물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개발 및 건설 산업 자체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이 건축 자산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무용 건물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두뇌 능력을 원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떤 건물이 창조적 능력을 가장 잘 이끌어낼 수 있을까? 바로 거기에 가치를 두어야 하는 것이다. 건물이 병원이라면 치료받는 환자에, 교도소라면 사회로 재범의 우려 없이 사뢰로 무사히 복귀할 수감자의 수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 무엇이 효과적인가를 물어야 한다. |
슬프게도 대부분의 현대식 건물에서 인간 중심적 디자인을 보고 싶다면 그 내부로 들어가야만 한다. |
건물은 곁을 지나치는 행인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대수롭지 않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대 그 어떤 건축가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는 원칙이다. |
사용자가 어떻게 느끼는지가 건물 기능의 핵심임을 인정하라. |
천 년은 거뜬하리라는 희망과 기대로 건물을 설계하라. |
건물의 흥미로운 특질을 문가 2미터 안에 집중하라. |
건물이 자기를 경험하는 모두에게 불어넣는 감정, 그것이 건물 기능의 근본적인 부분이다. 디자이너는 두 부류의 잠재적 건물 사용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입주자뿐 아니라 지나가는 행인이 어떻게 느낄지도 상상해 봐야 한다는 뜻이다. |
천 년을 내다본 건물은 개량할 수 있는 건물이다. 천 년을 내다본 건물은 사람들이 대부분 그게 허물어지는 걸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건물이다. |
사람들이 오래된 건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고유한 장소성 때문이다. 인간은 늘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건축물을 바라본다. |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인간적인 건축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뭘까? 바로 적절한 시각적 복잡성이다. |
빠듯한 예산은 불가항력이다. 그렇다 한들 그 핑계로 또다시 따분한 건물이나 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혹자는 우리 일이 스튜디오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재미있는 발상이나 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발상이 뭐든 간에 의뢰인은 즉각 승인하고 달라는 만큼 돈을 주리라고, 그럴리가.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 다시 수정하는 과정을 무한 반복하면서 주어진 예산 내에서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집중하여 기발한 안을 내는 게 우리가 하는 디자인이라는 일이다. |
19세기, 그러니까 건축이 전문직으로 자리 잡고 보호받기 시작하던 시기에 역사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건축가라는 역할은 지나치게 전문화되었고, 진정한 예술의 영역에서 점점 멀어졌다. 나는 건축가가 자기를 예술가로 보는 게 문제라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아닌 게 아니라 건축가는 실제로 세계에서 가장 큰 예술품을 만드는 이라고 믿는 쪽이다. 진짜 문제는 그들의 작업 태반을 전혀 예술이라 부를 수 없다는 점이다. 예술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면서 사실은 관습적 사고에 갇혀 있는 것이다. 한편 비건축가가 뜻깊은 건물을 지을 기회는 저항에 가로막혀 있다. 현실로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