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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01:07:55

단노우라 전투

단노우라 해전에서 넘어옴
단노우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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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단노우라 전투.jpg
기간
1185년 3월 24일[1]
(겐랴쿠(元暦) 2년/주에이(寿永) 4년)[2]
장소
일본 나가토국 아카마가세키 단노우라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3])
원인
헤이케 잔존 병력에 대한 겐지군의 소탕 작전
교전세력
파일:미나모토씨 가몬.svg 겐지 파일:타이라씨 가몬.svg 헤이케
지휘관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미나모토노 노리요리
타이라노 무네모리
타이라노 토모모리
안토쿠 덴노
병력
불명 불명
결과
미나모토가의 승리
영향
헤이케의 몰락과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
안토쿠 덴노의 자결로 인한 삼종신기 유실
피해규모
불명
1. 개요2. 전투 초반3. 헤이케의 멸망4. 결말5.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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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이안 시대 말기에 일어난 겐페이 전쟁의 마지막 전투. 영화를 자랑하던 헤이케[4]가 멸망에 이른 지쇼-주에이의 난(治承・寿永の乱)의 최후의 전투였다.

2. 전투 초반

헤이케의 해상 거점은 야시마 이외에도 나가토[5]의 히코시마가 있었는데, 헤이케는 요시츠네의 기동전에 연전연패를 당하고 요시츠네의 승리로 움직임과 보급이 자유로워진 노리요리의 대군이 진출하면서 히코시마에 갇혀버렸다.

게다가 요시츠네는 이번 결전이 헤이케의 세력을 물리적으로 괴멸시키는 마지막 일전이 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세토 내해의 토착세력인 쿠마노 수군, 코노 수군 등을 끌어들여 840여 척에 달하는 대규모 선단을 편성해, 이번만은 소규모 전력을 이용한 기만전술이나 기습이 아니라 대규모 결전을 준비했다. 전투 준비단계에서 요시츠네의 부장으로 종군했던 카지와라 카게토키는 무사에게 큰 명예가 되는 선봉을 맡겨 달라 청원했는데, 요시츠네는 자기가 선봉을 하겠다면서 거절했다.

그러자 카게토키는 자기 공로를 뺏으려고 그런다 생각했는지 총대장이 선봉을 서는 경우가 어딨냐. 저건 무사 감도 못 된다라며 폭언을 내뱉었고, 양측의 가신들이 거의 유혈사태 직전까지 치닫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한다. 둘의 사이는 이미 빼도 박도 못 할 철천지 원수가 되었고, 이것이 나중에 요시츠네가 비운의 죽음을 맞는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양군은 1185년 3월 24일 정오 간몬해협에서 격돌했고, 초전에는 해상 세력인지라 바다를 잘 알고 조류의 흐름을 이용한 헤이케군이 겐지 군에게 우세를 점하며 쭉 밀어냈다.

3. 헤이케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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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물결이 바뀌고, 요시츠네가 당시는 비전투원으로 취급되어 살상행위의 대상이 아니었던 노잡이/키잡이를 조준사격하라고 명령하여[6] 전세가 뒤집혔다.

요시츠네는 헤이케의 맹장이[7][8] 육박전을 걸어 오자 배 사이를 펄쩍 뛰어서 순식간에 8척의 배를 뛰어 건너서 도주하는 묘기를 선보였는데, 이게 그 유명한 팔척뛰기(八艘飛び) 고사다. 헤이케의 주장이던 타이라노 토모모리는 육박전을 벌이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볼 것은 다 보았다" 라는 말을 남기고, 갑옷을 두 벌 껴입고 닻을 짊어진 채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고, 사령관이던 타이라노 무네모리는 시녀, 헤이케 일족의 여자들, 삼종의 신기를 껴안은 안토쿠 덴노와 함께 바다로 뛰어들지만 죽기 무서워졌는지 허우적거리다가 살아나 구조됐다가 이후 처형된다. 극도의 무능함으로 헤이케의 패인이 된 무네모리에 우호적인 서술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 사서에는 대부분 죽으려고 뛰어들었는데 뛰어들어 보니 죽기 무서워져서 헤엄쳐 살아났다든지, 비만으로 인해 잠수해 죽으려고 해도 자꾸 물에 떠올라서, 그러다 잡혔다고 써 있다.

안토쿠 덴노는 외할머니인 니이노아마[9]와 함께 바다에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니이노아마는 이제 어디로 가냐는 안토쿠 덴노의 질문에 "아미타불의 정토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파도 속에도 도읍이 있나이다."라는 비감 어린 유언을 남기고는 세상에 하직인사를 한 뒤 덴노를 끌어안고 바다 속으로 투신했다고 전해진다. 안토쿠 덴노의 모후인 도쿠코도 뒤따라 뛰어내렸는데 구조되어 전후 비구니가 되었다.[10]

이로써 헤이케는 완전히 멸망했다.[11] 이후에도 헤이케 게[12][13] 등 헤이케 잔당에 관련한 각종 전설이나 헤이케의 후손을 자칭하는 여러 호족[14]이 각지에 나타나지만 헤이케의 정권은 다신 나타나지 못했으며, 겐지가 막부의 통치권을 쥐게 되었다.

4. 결말

단노우라 전투를 끝으로 이세 헤이시(헤이케)의 25년에 걸친 권세도 사라져 버렸다. 승리를 거둔 세이와 겐지의 분파 카와치(河內) 겐지의 동량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근거지인 가마쿠라막부(幕府)를 열고 일본에 새로운 형태의 무가 정권을 확립했다.[15]

여담으로 이때 삼종신기가 분실되었으며 특히 쿠사나기의 검이 어린 안토쿠 덴노와 함께 바닷속으로 사라졌고 끝내 찾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다. 간혹 이 일화를 알고 현존하는 삼종신기는 가짜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 현대 일본 황실의 공식적인 주장에 따르면 단노우라 전투에서 분실된 삼종의 신기는 곡옥을 제외하고 전부 모조품이며, 모조품이 없는 곡옥을 제외하면 원본은 신궁에 보관 중이고 황가에서는 모조품을 쓴다고 한다. 참고로 요시츠네는 3종의 신기 중 야사카니의 곡옥(원본)과 야타의 거울(모조품)을 확보하였다.

5. 미디어



[1] 양력은 4월 25일[2] 각각 고토바 덴노와 안토쿠 덴노의 연호.[3] 시모노세키 미모스소가와 공원에 가면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의 팔척뛰기의 순간과 다이라노 토모모리의 최후를 표현한 동상이 있다. 인근에 칸몬 터널 입구와 히노야마 로프웨이 단노우라역이 있으니 시모노세키를 여행하는 관광객이라면 들러볼 만하다.[4] 平家(평가), 이세(伊勢) 헤이시 출신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淸盛)의 일족[5] 후일 조슈, 현재의 야마구치현[6] 이 부분은 학자에 따라선 약간 창작이 섞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 겐지 군이 당시로서는 비인도적인 행위를 한 것은 맞는데, 요시츠네가 그것을 직접 명령한 부분이나 그것으로 전세를 뒤엎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여담으로, 이 부분은 역시 요시츠네가 악당으로 묘사된 불새에서는 훌륭한 민간인 학살 행위로 묘사된다.[7]헤이케모노가타리》에는 다이라노 노리츠네(平敎經)로 나오는데, 단노우라 전투에서 패색이 짙어진 가운데 활을 쏘아 겐지 측 무사들을 쓰러뜨리며 화살이 떨어진 뒤에는 양손에 칼을 들고 싸우다 "패배가 확실해진 판인데 부질없는 살생은 그만두지 그러냐." 하는 사촌형제 다이라노 토모모리의 말에, 어차피 죽을 바에는 적의 사령관인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와 함께 죽을 생각으로 배와 배를 오가면서 요시츠네를 찾아다녔다. 마침내 요시츠네를 발견하고 그와 전투를 벌이려는 찰나에 요시츠네는 배 8척 정도의 거리를 뛰어 도망쳐버렸고, 노리츠네는 갑옷도 투구도 벗어던진 채로 "누구든지 와서 나를 잡아봐라. 가마쿠라로 가서 요리토모에게 한마디 해줘야겠다." 하며 겐지군을 도발, 자신에게 뛰어든 (성인 남자 30명과 맞먹는 힘이 있다는) 무사 세 명 가운데 한 명을 발로 차서 바다에 처넣고 남은 두 명은 하나씩 옆구리에 끼고 "네놈들은 이제 나와 함께 황천으로 가자꾸나."라며 바다에 뛰어드는 것으로 최후를 맞이했다.[8] 다만 군담소설과는 달리 가마쿠라 막부의 정사인 《아즈마카가미》에는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하여, 단노우라 전투에서 요시츠네와 싸웠다는 이야기와는 대치된다. 이미 당대 구교들의 일기에서도 "수도 제일의 무사"로 소문이 자자하던 노리츠네만큼은 이치노타니에서 죽지 않고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단노우라 전투에서 전사한 헤이케 측 무장의 명단을 보고할 때에도 노리츠네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2005년에 방영된 NHK 대하드라마 '요시츠네'는 이 점을 감안한 것인지 요시츠네를 쫓아다니며 그가 배 8척을 뛰어다니게 한 헤이케 측 무사를 다이라노 토모모리로 변경했다. 그래서 항목 상단의 요시츠네의 동상에서 요시츠네를 노리는 헤이케 측 장수로 토모모리가 조각되어 있다.[9] 도키코로 무네모리의 어머니이자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두 번째 정실이다. 키요모리 생전에 출가해서 여승이 되었는데 쥬니이(종2품) 상당의 관위가 있었기 때문에 니이노아마라고 불린다.[10] 도쿠코가 출가하여 보낸 세월은 헤이케모노가타리의 결말 부분에 다룬다. 그녀는 1191년 혹은 1215년 죽었다고 하는데 어느 쪽이 옳은지는 모른다.[11] 단노우라 근처에는 헤이케의 패잔병들이 해변에 밀려와 마지막으로 물을 마시고 죽었다는 우물이나, 닻을 짊어진 토모모리, 팔척뛰기를 선보이는 요시츠네 등의 동상이 남아있다.[12] 이런 일화는 미국천문학자칼 세이건의 저서인 코스모스에서도 언급되는 내용이다. 어부들이 무사 얼굴을 닮은 등딱지를 한 게는 다시 놓아주면서 점점 더 등딱지 무늬가 무사 얼굴처럼 변해갔다는 가설로 인위선택을 설명하기도 했는데, 현재 생물학계는 헤이케 게는 인위선택과 무관한 것으로 보고, 칼 세이건의 가설을 부정하고 있다.[13] 다만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칼 세이건이 이 책을 쓰던 시기는 1970년대 말이다. 그의 전공인 천문학 내용조차 세월 앞에서 새로운 발견을 하거나 가설이 뒤바뀌며 현재는 책의 내용과 완벽히 맞아떨어지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일례로 세이건은 그의 서적에서 우리 은하안드로메다 은하와 비슷한 모양이라고 언급하지만 우리 은하가 안드로메다 은하와 달리 막대 나선 은하임이 밝혀진 것은 서적 집필 수십년 뒤인 2005년이다.) 칼 세이건은 오히려 책에서 이러한 과학적 사실들은 후손들이 얼마든지 새로운 내용을 발견하거나 가설이 바뀌며 폐기된 가설이 될 수 있다며 그것이 바로 과학의 매력인 것으로 언급한다.[14] 타이라노 시게모리의 아들 중 한 명인 스케모리의 후손을 자칭한 오다 노부나가 등.[15] 현재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헤이케가 교토에 수립한 로쿠하라 정권도 무가 정권으로 보고 있다. 헤이케와 차이점이 있다면 헤이케는 중앙에 무가 정권을 세웠으나 겐지는 자신들이 근거지인 지방에 무가 정권을 세웠다는 점인데 겐페이 전쟁의 결말은 지방정부를 대표한 겐지가 중앙정부를 대표한 헤이케를 타도해서 기존의 무가 정권에서 막부라는 새로운 형태의 무가 정권으로 새롭게 탄생했다는 사실이다.[16] 이 장면 자체는 막화 이전에도 예지로 조금씩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