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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0 00:36:36

네로 카이사르

네로 카이사르
Nero Caesar
파일:네로 카이사르.jpg
네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Nero Julius Caesar Germanicus)
생몰년도 서기 6년 ~ 31년
출생지 로마 제국 본국 이탈리아 로마(추정)
사망지 로마 제국 본국 이탈리아, 폰테인 군도 폰자
지위 로마 황족, 황태자, 임페라토르&프린켑스 상속자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버지 게르마니쿠스
티베리우스(양부, 후원)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
형제 드루수스 카이사르(동생)
티베리우스 카이사르(동생)[1]
가이우스 율리우스(동생)[2]
가이우스 카이사르(칼리굴라)(동생)
소 아그리피나, 율리아 드루실라, 율리아 리빌라
배우자 율리아 리비아 카이사리스

1. 개요2. 생애
2.1. 부모와 어린 시절2.2. 아버지와 고모부의 죽음2.3. 결혼과 후계자 데뷔2.4. 몰락과 사망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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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족, 황태자.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정식 상속자이자,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상속자 게르마니쿠스와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 대 아그리피나의 장남으로, 아우구스투스&리비아 드루실라의 직계 남자혈육이다.

정식 이름은 네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주화와 약칭 표기에 따른 로마 공식 표기로는 네로 카이사르.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친동생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딸 소 안토니아의 장손으로,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친혈육 대 율리아의 외손자, 3대 황제 칼리굴라의 첫째 형,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의 조카다. 여동생 소 아그리피나의 외아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후일 클라우디우스 1세의 딸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와 결혼하고 입양돼 제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5대 황제 네로다. 다만, 외조카 네로와는 성씨, 전체 이름이 다르다. 개인이름은 네로이나, 이 사람의 노멘(씨족 성씨)는 '율리우스'이며 코그노멘(지파성씨, 가족성씨)는 '카이사르'인 반면 5대 황제 네로가 입양 후 취해 얻은 노멘은 '클라우디우스', 코그노멘은 '카이사르'다.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의 직계 남녀황족들로 네로에게 살해된, 클라우디우스 1세의 자녀 브리타니쿠스,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는 이 사람의 사촌이 된다.

로마 역사상 최악의 간신이자 권신 세야누스와 공모한 고모 리빌라, 아내 율리아 리비아 등의 음모로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와 함께, 반역죄 누명을 뒤집어 쓴 뒤 서기 29년 '국가의 적'으로 선포되고 이탈리아 남부의 섬 폰자로 추방됐다가 서기 31년 자결했다.

사후 친동생 칼리굴라가 제위에 오른 뒤,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묻혔고, 정식으로 신원복구됐다.

2. 생애

2.1. 부모와 어린 시절

서기 6년, 게르마니쿠스와 대 아그리피나 사이에서 첫 아이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 손이 귀한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의 몇 안 되는 남자혈육인데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구성한 율리우스 가문(카이사르), 클라우디우스 가문(네로, 풀케르)을 비롯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피를 모두 이어 일찌감치 차차기 황제의 길을 걸었다.

조부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티베리우스의 친동생이며 리비아 드루실라 황후의 차남인 대 드루수스인데다, 서기 4년 2월 고모 리빌라의 첫남편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요절해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차기 황제로 낙점됐기 때문에, 2년 후 태어난 동생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함께 아우구스투스 직계혈육으로 각종 특권이 일찌감치 보장받았다.

본래는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 사람이지만, 부모 양쪽을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었다. 따라서 개인이름으로 클라우디우스 씨족 가문 중 한 지파인 본래 출신 가문의 코그노멘 '네로'를 물려받았다. 같은 이름을 개인이름으로 취한 조부 대 드루수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친아들이라는 소문도 정설처럼 돌았고,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서기 4년 6월에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정식입양돼 출신부터 카이사르 가문 사람 그 자체였다.

이런 배경으로, 출신 가문 자체부터 정치, 사회, 법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증손자, 카이사르의 고손자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서기 4년 전, 즉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요절하기 전부터 아우구스투스의 남자 혈육 중 후계자 후보가 된데다, 조부 대 드루수스가 정식 입양돼 차기 황제로 낙점될 상황이었다가 게르마니아 전쟁 개선식 직전인 29살의 나이에 요절한 집안 배경도 두고 있어, 인기가 대단했다. 특히, 조부 이래 이탈리아, 갈리아, 저지 게르마니아, 고지 게르마니아 일대에서 쌓은 실적과 훌륭한 인품으로 얻은 명성은 그 혈통적, 사회적 위상이 군대, 민중들의 지지 아래 상당히 공고해지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는 후일 부친 게르마니쿠스가 죽고 '게르마니쿠스 신화'가 민간, 로마군 병영에 유행하면서 네로 카이사르가 죽은 뒤에도 그 영향력이 서기 3세기 중반까지 자발적 지지로 이어진 계기가 됐다.

정확한 고향은 미상이나, 남동생 드루수스 카이사르,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이그노투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칼리굴라)처럼 본국 이탈리아 출신인 것은 확실하다. 다만 태어난 도시가 형처럼 로마인지, 동생 칼리굴라처럼 안티움(오늘날의 이탈리아 안치오) 태생인지는 불명확하다.

7살이던 서기 13년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레누스 강(오늘날의 라인 강) 유역 로마군 사령관이 되자, 어머니, 형제자매와 함께 게르마니아, 갈리아 일대에서 성장했다. 이때 그는 과거 소년시절의 아버지, 고모 리빌라, 삼촌 클라우디우스 1세처럼 겨울에는 로마로 돌아왔다가, 봄부터 가을까지는 아버지가 거주한 로마군 기지에서 거주하며 성장했다.

그러다가 서기 14년 8월,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임페라토르, 프린켑스 지위 등을 단독 승계한 큰할아버지이자 법적 할아버지 티베리우스가 로마 제국의 2대 황제로 등극했다. 이 당시 아우구스투스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원로원 대표단에게 고인 추모에 대한 위로를 받고 잠시 로마로 귀환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군대 항명도 벌어지고 게르마니쿠스 추대 요구도 있어, 게르마니쿠스 아내 대 아그리피나와 자녀들은 안전상 이유로 갈리아 루그두눔으로 피신했다가, 잠시 로마에서 살았다. 그러나 상황이 수습되고 이 해에 게르마니쿠스가 레누스 강 일대 로마군 사령관에 재임명되면서 그와 어머니 아그리피나, 형제자매는 다시 독일 내 로마군 기지로 돌아와 성장했다.

2.2. 아버지와 고모부의 죽음

게르마니쿠스가 게르마니아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정식 개선식을 거행한 뒤, 티베리우스 명령에 따라 제국 동부인 아시아 전체를 담당하게 됐다. 이때 게르마니쿠스는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 일대 및 푸닉 일부 속주 재편을 담당하는 총책임자가 됐다. 그러나 2년 후인 서기 19년 10월 10일, 게르마니쿠스는 갑자기 병에 걸려 요절했다. 게르마니쿠스가 요절할 당시, 그가 시리아 총독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와 갈등을 빚었고, 네로의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 역시 피소의 아내와 앙숙이라서 피소 사건으로 불리는 일대 파장이 벌어졌다.

서기 19년 10월, 티베리우스 황제는 아우구스투스 생전 유언장과 차기 계승 구도 및 제왕교육 훈련 등을 토대로, 자신의 친아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소 드루수스)를 사실상 황태자로 원로원에 소개했다. 이때 소 드루수스는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칼리굴라 형제에겐 고모부이면서도, 법적으로는 작은아버지였다. 그래서 소 드루수스는 자신의 오촌조카이자 법상 조카인 게르마니쿠스 자녀 중 곧 성년식을 할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원로원에 데리고 간 뒤, 게르마니쿠스의 아이들의 보호자가 되었음을 알리고 원로원에게 이들을 따뜻하게 보호해달라고 요청했다.

아버지와 소 드루수스는 겉으로는 정적이자 경쟁자로 인식됐지만, 사촌 간의 우애는 친형제 이상으로 대단했고, 게르마니쿠스 못지 않게 소 드루수스 역시 인격적으로 매우 훌륭했다. 따라서 네로 카이사르는 이런 소 드루수스의 보호 아래, 성장할 수 있었다. 허나 서기 23년, 근위대장으로 서서히 야심을 드러내며 제위를 차지할 야망에 부푼 세야누스와 공모한 고모 리빌라에게 소 드루수스가 독살된다. 당시에는 과로 등으로 인한 급사로 알려졌지만, 이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킨다. 왜냐하면 3년 뒤인, 서기 26년 티베리우스 황제가 모든 것을 내려 놓았다는 듯 카프레아이 섬(오늘날의 이탈리아 카프리섬)에 마련한 별궁에 들어가 은둔통치를 했기 때문이다.

2.3. 결혼과 후계자 데뷔

네로 카이사르는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제국 동부로 파견될 무렵, 일찌감치 시리아 총독 크레티쿠스 실라누스의 딸과 약혼한 상태였다. 그러나 서기 20년, 법적 할아버지인 티베리우스는 이 약혼을 일방적으로 폐기해버리고 자신의 손녀, 즉 소 드루수스와 리빌라의 딸 율리아 리비아 카이사리스와 네로 카이사르를 결혼시켰다. 이는 법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후계자라는 타이틀이 있음에도,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소 드루수스의 정통성을 강화하고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카이사르 가문 지지세력 내 두 파벌의 완전한 결합을 위한 시도였다.

네로 카이사르와 율리아 리비아 카이사리스의 결혼은 정략혼이었는데, 대개의 로마 귀족들의 정략혼 실패처럼 여기에서 문제가 터지고 만다. 애당초 로마 귀족들의 정략혼은 가문 대 가문의 결합인데, 이는 같은 집안끼리의 근친혼에서도 적용됐다. 즉, 화합 목적이 뚜렷했는데 이 부분에서 문제의 골이 깊어지고 말았다.

두 사람의 어머니인 대 아그리피나리빌라는 친척이고, 어릴 적부터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밑에서 자라 친할 법 했지만 견원지간이었다. 네로 카이사르의 고모인 리빌라는 질투심이 대단하고, 어릴 적부터 오빠 게르마니쿠스와 새언니 대 아그리피나를 라이벌 이상으로 생각해 그들을 미워했다. 더욱이 그녀는 자신의 남편 소 드루수스가 오빠 부부와는 천생연분처럼 친하고, 장애가 있는 남동생 클라우디우스 1세에게 다정다감하고 오빠의 자녀들에게도 친아버지 같이 최선을 다하는 것을 혐오했다. 설상가상 게르마니쿠스가 건강하다가 요절한 뒤, 대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가 피소를 시켜 남편을 독살했다고 생각해 황궁 안팎에서 티베리우스와 매일 같이 대립 중이었다. 따라서 네로 카이사르 부부의 결혼생활은 최악이 됐는데, 율리아 리비아 역시 남편 네로 카이사르에게 냉담하게 대해 사태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이런 상황에서 네로 카이사르 형제를 물심양면으로 보호해주던 장인이자 고모부, 숙부인 소 드루수스가 서기 23년 급사하자, 세야누스 일당이 득세하고 제어장치가 사라진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는 자기 파벌들과 함께 네로 카이사르를 앞세워 반(反) 티베리우스 파벌을 확장시킨다.

그렇지만 티베리우스는 개의치 않고 손녀사위 네로 카이사르와 곧 성년식을 치를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새로운 공식후견인이 되더니, 형제를 적극 밀어준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네로 카이사르의 동생 드루수스 카이사르도 원로원에 데리고 가 자신의 공식적인 후계자로 데뷔시켰다. 이때 네로 카이사르는 황제와 원로원에게 정식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되고, 재무관 직의 특권과 법무관 예정 권한까지 받았다.(드루수스 카이사르 역시 형 네로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5년 먼저 공직을 경험할 특권 등을 똑같이 하사받았으며, 형과 함께 각종 특권들을 선사받았다.) 이런 티베리우스의 조치들은 지극히 당연한 결정이었고, 게르마니쿠스의 두 아들들은 후계자로 적합한 인물들이어서 원로원에게 찬사를 받았다. 다음해인, 서기 24년 티베리우스 황제는 자신의 친동생 대 드루수스의 손자이자 자신의 법적손자가 된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위해 이들의 건강을 소원하고 비는 제사를 지내면서 이들 형제를 홍보하면서 세야누스에게 특별 명령까지 내려 본인의 이름으로 이를 축원케 하고 최선을 다하라고 명령했다. 티베리우스는 짠돌이로 소문이 났지만, 24년 당시 네로 카이사르 형제를 위해 엄청난 거액을 쏟아부어 형제를 카이사르의 가문의 미래로 소개했고, 동전을 발행하면서 형제의 얼굴을 새겨 넣고 이들의 정통성까지 높여줬다. 다행히 이 홍보는 성공했다. 아우구스투스, 대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삼부자에 대한 향수가 강한 로마와 이탈리아 민중들은 티베리우스가 친아들을 잃었음에도, 양부와 죽은 동생, 조카를 위해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에게 제위를 물려준다고 여겨 환호했고, 원로원 역시 의심의 눈초리로 이를 보다가 티베리우스가 진심이라고 생각해 딴죽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티베리우스의 행보는 황제가 될 야심을 품고 있던 세야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전혀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세야누스는 겉으로만 최선을 다했을 뿐, 딴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와 불륜 관계인 리빌라는 자신의 아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가 티베리우스의 친손자임에도 제위경쟁에서 밀렸다고 생각해 분통을 터트렸고, 네로 카이사르 부부 사이에 끼어 들어 딸 율리아 리비아와 사위 네로 카이사르의 냉랭한 관계를 악화일로로 걷게 했다. 따라서 황궁 곳곳에는 티베리우스 사후 제위를 놓고 궁중음모가 넘실거리게 된다.

2.4. 몰락과 사망

서기 25년, 세야누스가 일단 황제가 될 혈통과 명분을 얻기 위해 죽은 소 드루수스의 미망이자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피를 잇고 있는 리빌라와 재혼할 뜻을 밝한다. 그러자 티베리우스 황제는 이 요청을 단호히 거부하며 "너가 리빌라와의 재혼한다는 것은 씨알도 안 먹힐, 분수에 맞지 않을 일"이라고 통보한다. 이는 세야누스에게 부하 노릇에 집중하면서 황궁 일에 개입할 생각을 꿈꾸지 말라는 경고였다. 허나 세야누스는 야심가였고, 리빌라 역시 세야누스와의 재혼으로 프라이토리아니를 장악해 게르마니쿠스 자녀들을 없앨 생각을 하고 있어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세야누스는 방법을 바꿔 티베리우스 외의 아우구스투스 남성 황족들의 씨를 완전히 말리는 방식으로 자신이 황제에 오르겠다고 결심하고, 티베리우스가 자신에게 준 권한을 이용해 고발과 날조, 협박 등을 통해 걸림돌이 되는 정적들을 제거하기로 한다. 리빌라 역시 아들을 제위에 올리기 위해 이 음모에 적극 가담했다.

이런 가운데, 서기 29년 두 후계자 중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황실의 먼 친척으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딸(혹은 조카뻘 친척)인 아이밀리아 레피다와 결혼한다. 이 결혼을 통해, 두 형제 중 티베리우스 뒤를 이을 차기황제에 더 가까운 쪽은 네로 카이사르로 완전히 기울어진다. 왜냐하면 그는 소 드루수스의 딸 율리아 리비아와 결혼해, 티베리우스 황제의 손자이며 양자이면서도, 손녀사위였고 그 뒤에는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의 적극적인 후원도 있어 두 파벌 모두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네로 카이사르보다 능력으로 훨씬 뛰어난 이는 분명 드루수스 카이사르였다. 그는 형보다 2년 늦게 원로원 의원이 되고 정식 특권이 발동돼 공직을 시작하는 가운데, 복점관과 원로원 활동을 하면서 재능 넘치고 훌륭한 인품을 보여 지지를 얻고 있었다. 그래서 친형제는 사이가 좋음에도, 종국적으로 하나 뿐인 황제 자리를 놓고 경쟁하게 됐는데, 이런 틈바구니를 노린 세야누스가 친아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제위에 앉힐 생각과 대 아그리피나,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라이벌 의식으로 가득찬 고모 리빌라와 합세해, 후발주자인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은근히 밀어준다.

애당초 대 아그리피나와 리빌라가 견원지간이고, 세야누스라는 야심가가 개입하니 상황은 급박해진다. 티베리우스는 이 시기에 은둔정치를 시작한 터라, 로마에 없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머릿속에는 친손자 티베리우스 게멜루스가 후임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따라서 세야누스, 리빌라가 자신들의 제거순위 1위인 대 아그리피나를 없애겠다고 움직였을 때, 네로 카이사르는 어머니 아그리피나와 묶여 몰락할 수밖에 없게 된다. 세야누스 일당은 게르마니쿠스의 두 아들을 정적으로 만든 뒤, 티베리우스를 설득해 대 아그리피나와 네로 카이사르를 반역죄로 기소한다. 이미 몇년 전부터 세야누스 일당이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지지하는 파벌을 만들고 아그리피나와 네로 카이사르를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갈라친 이후 대 아그리피나, 네로 카이사르를 반역죄 혐의를 이유로 총공격을 퍼붓는 상황이 계속됐기에, 티베리우스 역시 세야누스와 리빌라가 꿈꾼 의중을 제대로 파악못하고(혹은 알면서도) 네로 카이사르가 대 아그리피나와 묶여 반역죄로 기소되자 막아주지 않는다. 세야누스와 티베리우스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네로 카이사르의 몰락은 의외로, 능력이 뛰어난 드루수스 카이사르라는 카드를 쥐고 있는 티베리우스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선택일 수 있다는 의견도 있고, 티베리우스가 특유의 정적 제거 방법 그대로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미래를 위해 먼저 네로 카이사르를 친 다음 드루수스 카이사르까지 제거해버린 고도의 술수일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3]

다행히 원로원은 황족인 아그리피나, 네로 카이사르 모자에 대한 처벌 문제를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해, 결정은 티베리우스에게 넘어간다. 그러자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아그리피나 모자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고, 아그리피나와 네로 카이사르의 운명은 그대로 결정됐다.

아그리피나는 아직까지도 남편 게르마니쿠스를 독살한 피소 부부의 배후가 티베리우스라 의심해 반티베리우스 파벌까지 만들어 사사건건 대립한데다 그 정도가 심했기 때문에 티베리우스 입장에선 눈엣가시였다. 그녀는 시어머니 소 안토니아와 살아생전 소 드루수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티베리우스가 자신의 장남 네로 카이사르에게 임페라토르 직위를 내리지 않을 거라고 매일 같이 주장했다. 또 황제의 아들 드루수스가 악습에 빠졌다고 주장하거나, 소 안토니아가 티베리우스를 옹호하는 것에 말대꾸를 하면서 가까스로 참고 있는 티베리우스의 인내심을 한계직전까지 몰아붙였다. 여기에 더해 아그리피나는 아우구스투스의 손녀라는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고, 남편이 요절한 이후부터는 과거와 달리 우울하고 쉽게 화를 잘 내던 터라 그녀를 미워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거기다 세야누스의 정부가 된 리빌라, 남편 네로 카이사르와 사이가 최악인 율리아 리비아까지 합세해 쪼아대니, 아그리피나와 네로 카이사르는 반역죄를 공모하거나 실행할 생각이 없었음에도 몰락하고 만다.

어찌되었든 세야누스의 음모대로 아그리피나 모자는 포파이우스 사비누스와 엮여 '위험하고 거대한 음모'라는 이름 아래 고발됐고, 네로 카이사르 모자는 국가의 적이 된 뒤 서로 다른 섬으로 추방됐다.

어머니와 함께 억울하게 반역죄로 엮여 폰티아로 추방되고 2년이 지난 뒤, 네로 카이사르는 세야누스가 몰락하기 직전 유배지에서 풀려날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31년 10월, 일찌감치 스스로 곡기를 끊어서 자살했다.[4]

3. 여담



[1] 풀네임은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유년기때 병으로 요절.[2] 영아기 때 요절. 이름이 정확하지 않고, 남자아이의 이름을 지어줄 8일 전후로 요절해, 보통 이그노투스 카이사르로 불린다.[3] 이 주장 중 두번째가 맞다면, 티베리우스 사후 티베리우스 후손들이 대 드루수스 후손과 원로원에게 어린 아이까지 죄다 몰살당한 이유가 설명이 된다고 한다. 칼리굴라가 제위에 오른 뒤 양자로 삼은 사촌동생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제거해버리고, 클라우디우스가 율리아 리비아 카이사리스 일가를, 네로 즉위 후 원로원 내 게르마니쿠스 지지세력들이 티베리우스의 마지막 후손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와 그 자녀들을 죄다 반역죄로 몰살시킨 것을 보면 단순한 정적 제거와는 그 방향이 다르고, 원로원에서도 딴죽을 걸지 않고 쌍수를 들며 환영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주장에 대한 반론도 많아 이 주장이 맞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평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4] 그런데 수에토니우스는 자신의 책을 통해서 유배된 폰티아로 사형집행인이 가자 네로 카이사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