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9:29:15

남만춘

파일:남만춘.jpg
성명 남만춘(南萬春)
러시아식 이름 파벨 니키포로비치
이명 南바베르, 남만총(南滿聰)
생몰 1888년 ~ 1938년 10월
출생지 러시아 아무르 주 블라고베셴스크
사망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공산주의자.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남만춘은 1888년경 러시아 아무르주 블라고베셴스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4년 중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제1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군에 참전했지만 1917년 부상을 입고 전역했다. 전역 후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백군에 맞서기 위해 한인들을 모아 공산 게릴라 부대를 조직하고 적군과 협력해 많은 전투에 가담했다.

남만춘은 1920년 1월 22일에 결성된 러시아 공산당 산하 이르쿠츠크 위원회 한인부 회장을 역임했고 고려특립중대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고려특립중대는 1920년 1월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결성된 합동민족연대에 참여했으며, 남만춘은 합동민족연대 참모장으로 활동했다. 또한 1920년 6월 말 러시아 지역 한인 사회주의 단체의 대표자 회의를 발기하고 전로한인공산당 중앙총회를 결성했다. 이때 남만춘은 중앙위원에 선출되었고 연락교통과장을 겸임했다.

이후 1921년 5월 이르쿠츠크에서 고려공산당 창립대회를 발의해 집행위원이 되었고, 그해 가을 베이징으로 파견되어 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했다. 1921년 7월, 남만춘은 고려공산당 중앙위원회 겸 코민테른 파견 대표자로 선출되어 코민테른 제3차 대회에 참석해 한국대표단을 대신해 '고려공산당의 보고' 연설을 했다. 그리고 이르쿠츠크에서 항일 신문 <경세종(警世鐘)>을 발간해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 노력했다.

1922년 6월, 남만춘은 치타에 본부를 둔 암살단을 조직했다. 그리고 1922년 10월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참석해 상해파 공산당과의 연합을 모색했으며, 같은 해 11월 독립당 측의 문창범, 이동녕 등과 연합하여 노농독립정부를 조직하려 시도했지만 무산되었다.

1923년 9월 25일, 관동 대지진으로 일본이 혼란에 휩싸였고 수많은 재일 동포들이 학살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남만춘은 지금이 독립을 꾀할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노농정청으로부터 무기를 지급받고 니콜리스크 등지의 한인을 소집해 무장 투쟁을 준비했다. 1924년 1월, 남만춘은 블라디보스토크와 그 부근에 거주하는 한인을 기반으로 고려공화국을 건국하자고 주장했지만 소련 당국이 거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1924년 4월, 남만춘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책임자회의에 출석해 고려공산당 창립대회 준비위원회 결성에 참여하고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6월에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5회 국제공산당 대회에 '재러시아 한인 자치제 실시안'이 제출되자 즉시 자치제를 실시할 준비에 착수했다. 또한 1925년 모스크바에서 <핍박받는 조선>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발간해 일제의 무력 지배를 통계 자료를 이용해 구체적으로 비판했다.

남만춘은 1926년 중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정의부와의 제휴를 도모했고, 1927년 8월 29일 국치일을 기해 서울에 파괴, 암살단을 파견하고자 폭탄 등을 준비했지만 실제로 실행하지 못했다. 그 후 1929년 소련이 고려공산당을 숙청할 때 출당 처분을 당했고, 1938년 5월 일제의 밀정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 체포된 뒤 그해 10월에 총살되었다. 1997년 러시아 정부는 그가 밀정이 아니었음을 인정하며 공식적으로 복권시켰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남만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