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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1 18:56:13

난징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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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1927년 국민혁명 중에 발생한 유혈사태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1937년 발생한 일본군에 의해 발생한 난징에서의 학살에 대한 내용은 난징 대학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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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개요2. 배경3. 전개
3.1. 혁명군의 외국인 공격3.2. 국민혁명군과 열강의 교섭3.3. 배후 조사
4. 정말로 공산당의 짓인가?5. 결과6. 참고문헌7. 관련문서

1. 개요

1927년 3월 24일, 국민혁명군이 점령한 난징에서 벌어진 반외국인 유혈사태. 한커우 사건, 주장 사건과 더불어 국민혁명 시기의 대표적인 혁명외교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사건을 공산당의 획책으로 간주한 장제스를 비롯한 중국국민당 우파는 1차 국공합작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고 4.12 상하이 쿠데타을 발동한다.

2. 배경

1927년 3월 23일, 국민당의 1차 북벌이 한창이던 와중에 장제스는 난징 공략을 독전하기 위해 군함 초동에 탑승하여 난징 남쪽에서 60킬로미터 떨어진 채석기에 이르렀다. 청첸이 지휘하던 2군과 6군이 주축으로 이루어진 강우군이 이날 저녁 난징 남쪽문에 도달한 상황이었다. 난징을 수비하던 하북과 산동 출신 병력으로 구성된 북양군벌 소속의 직로군은 난징을 포기하고 약탈, 강간, 방화를 자행한 다음에 장강을 건너 북으로 도주했다. 24일 이른 아침 국민혁명군이 난징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난징 취보문[1]으로 입성하게 된다.

3. 전개

3.1. 혁명군의 외국인 공격

오전 7시경 약 30명의 혁명군이 일본 영사관에 찾아와 적병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에 영사관 직원은 일본인밖에 없다고 해 혁명군은 물러갔다. 그런데 30분이 지난 후 50명의 제복차림 정규군이 소총을 겨냥한 채 영사관의 사무소와 숙소에 난입했다. 당시 영사관에는 10여명의 병사가 있었으나 무장은 하지 않았기에 대응이 불가능했다. 이들은 영사관 경찰관에게 발포해 부상을 입힌 다음, 주재 무관을 총대로 구타했다. 이후 관사 식당에 실탄을 발포하고, 영사관을 3시간동안 약탈했다. 이때 병사들은 "일본 제국주의 타파, 중국과 소련은 한 가족, 일본인의 재산은 중국인에게서 뺏은 것이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여기에 수백 명의 민간인이 약탈에 가담해 마루 판자, 변기, 빈 병까지 모조리 약탈되었다.

한편 오전 9시 경에는 영국 영사관이 역시 제복을 입은 국민혁명군에게 포위되었다. 이들은 마침 밖으로 나온 영국 총영사 자일러스에게 총을 쏘아 중상을 입히고 난입해 관원을 살해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어 미국 영사관 역시 약탈되었다. 미국 영사 존 데이비스는 영사관을 방어하던 해병대 소대만으로는 공격을 막을 수 없다고 여겨 해병대에게 24명의 부녀자들을 호위하여 3킬로미터 떨어진 스탠더드 석유공사 건물로 피신하게 했다. 폭도들은 이들 일행을 가만두지 않고 공격하여 미 해병대와 교전을 벌였다.

또한 비슷한 시간대에 동시다발적으로 교회, 외국인이 운영하는 병원, 상점들도 약탈되었다. 외국인들이 살고 있는 아홉 채의 집이 불탔고 난징 대학 부총장 존 윌리엄스와 천주교 사제들을 비롯한 여러 외국인들이 살해되었으며 재산을 지키기 위한 외국인들과 혁명군 사이의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에 놀란 민간인들은 피난을 가 큰 소동이 벌여졌다. 이에 난징의 외국인들은 시내의 언덕으로 피신했고 오후 3시 반, 장강에 정박중인 미국, 영국의 포함이 폭도들의 접근을 막기위해 구릉지대 근처를 발포했다. 포격에 놀란 폭도들은 공격을 중지했고 외국인들은 이틈을 타서 해자를 건너 영국 군함에 구조를 요청하여 상하이로 떠났다. 2시간 후 발포는 중단되었고 국민혁명군이 사태수습에 나섰다. 이 사건으로 국민혁명군은 24명의 사망자와 7명의 중상자가 발생했고 민간인은 사망자가 17명, 중상자가 19명에 달했다. 외국인 사망자는 총 6명이었다. 또한 포격으로 소문구 농업학교를 비롯한 여러 시설과 민가들이 파괴되어 중국인 사상자도 속출했다. 중국 측에서는 사상자가 2천명을 상회한다고 주장했다.

3.2. 국민혁명군과 열강의 교섭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장제스는 경악하여 국민혁명군 참의 임석민을 일본영사관에 파견하여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중국 군함 이통으로부터의 보고에 따르면, 난징의 영국과 미국의 군함이 남군을 향해 발포했다. 원인은 분명하지 않지만, 우리나라는 영미 양국에 대해 조금도 적의를 갖고 있지 않다. 본인은 스스로 난징에 가서 모든 책임을 지고 해결할 생각이다."

하지만 그동안 반제국주의, 혁명외교를 표방하던 국민당을 경계하던 조계지의 열강들은 이 사건이 국민혁명군이 조직적,계획적으로 나선 사건으로 보고 강경한 입장으로 나섰다. 이미 기존에 장강 연안의 여러 조계지들이 북벌군과 유민들의 공격으로 함락되어 피해를 본 바가 있고 이에 대해서는 양보를 하고 있던 열강이었지만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포격을 중지한 영국군은 모터보트를 탄 군사들을 상륙시켜 지금껏 포격 중지를 요청하던 세계 홍만자회 강녕 분회장 등을 함선으로 데려갔다. 강녕 분회장은 영국군과 2시간 동안 협상하여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을 받아 국민혁명군에게 전달했다 .

이에 25일 장제스가 직접 군함을 타고 난징으로 달려와 강우군 총사령관 청첸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중국 군대 또는 폭도의 어느 족에 의한 짓이든, 외국인의 생명, 재산에 손해를 끼친 자는 모두 철저하게 조사하라. 책임을 지고 외국이 납득할 수 있도록 해결하라."

또한 허잉친, 루디핑, 하요조, 청첸을 난징 치안유지 책임자로 임명하고 외국인의 생명, 재산에 손실을 끼치는 행위를 엄히 다스리라고 명령함으로 사건의 확대를 막았다. 이날 영미 측은 요구조건을 문서화하여 다시 청취의 지휘부로 보내왔다. 국민혁명군은 이것이 정식 외교루트를 거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항의하면서도 이 요구를 수용할 것을 밝히며 다음과 같이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따라 외국 거류민들은 국민혁명군의 보호를 받으며 영미의 포함으로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3월 26일 장제스는 상하이로 떠났는데 이때 외국 신문들은 영국 총영사 사망설, 거류민 사상자 수백명 설 등을 보도하면서 여론은 국민혁명군에게 나쁜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에 열강은 북벌군을 경계하여 상하이에 병력을 증강하기 시작했다. 이에 장제스는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상하이 주재 각국 신문사, 통신사 기자를 총사령부에 불러 담화를 발표했다.
"이번의 난징 사건에 관해서는 외국 신문과 통신사가 과장된 선전을 했기 때문에 많은 오해를 낳았다. 나는 이미 사건을 책임을 지고 조사하고, 거류민이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취하도록 지시했다. 조사 결과 국민혁명군의 소행이라고 밝혀지면, 마땅히 적절한 조치를 취할 방침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미국과 영국의 군함이 사전 경고도 없이 발포한 일에 대해서는, 난징의 외국 관계당국에 항의했고, 손해비장을 요구하는 바이다. (...) 여러분은 중국의 상황에 관해서는 잘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하지만, 만일 각국이 아직도 19세기적인 정책을 취하고, 군함이나 군대의 무력을 행사하여 중국에 대응한다면, 조계 및 거류민의 생명, 재산에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중국은 이미 19세기의 중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혁명군이 가는 곳에 각 우방 제국이 파병할 필요는 없다. 우리 국민혁명군이 외국인 거류민의 생명, 재산에 대해 완전히 보호의 책임을 진다. 불평등조약의 취소 및 조계의 회수에 즈음하여 무력이나 폭동에 의지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중앙정부가 외교상의 정당한 절차를 밟음으로써 실행할 것이다. 여러분은 각국 걸뮤니에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전해주기 바란다. 국민혁명군의 혁명목적은 오직 국제적 지위의 평등을 확보하는 데 있을 뿐이다."

이어 장제스는 우한의 천유런에게 전보를 보내 상하이로 와서 외교적 처리를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3.3. 배후 조사

이후 우한 정부는 외교부 비서 위각 등을 파견하여 사건의 배후를 조사하게 했다. 위각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상부에 보고했다.
우리 군이 입성할 무렵에 적군의 대부분은 이미 퇴거한 뒤였으나 적의 잔병은 아직도 완전히 제압되어 있지 않았고, 성내의 질서도 일시적으로 미회복 상태였다. 난징의 반혁명분자는 기회를 틈타 지방의 유민과 패잔병을 선동하고, 사전에 우리 군의 포로로부터 탈취한 제복을 입혀 혁명군으로 변장시켜 소동을 일으켰다.

국민당 우파는 '반혁명분자'의 배후를 소련 고문 미하일 보로딘으로 보았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는 당시 코민테른은 7차 회의를 통해 국민대중에 의한 외국인 배척을 선동, 유럽 제국과 국민혁명군의 충돌을 조장한다는 내용을 결의하고 국민당과 열강의 다툼을 모의하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1926년 11월의 난창 점령에서 관련 서류들이 노획되면서 밝혀진 바가 있다. 또한 6군 정치부 주임 임조함과 2군 정치부 주임 이부춘(李富春) 등의 공산주의자들은 총사령관 청첸을 포섭하여 그가 공산당에 협조한다면 강소 정무위원회 주석으로 임명해주겠다고 제안하여 청첸을 포섭한 바가 있는데 그의 휘하의 2군과 6군이 난징에 입성했으니 약탈과 폭동은 공산당이 사주한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이 밝혀지면서 베이징의 장쭤린은 4월 6일 소련대사관을 수색하여 그곳에 은거하고 있던 리다자오 등 공산당원과 소련 외교관 60여명을 체포하고 비밀서류를 압수했다. 소련의 대중 스파이 공작을 벌였다는 증거를 확보한 장쭤린은 4.12 상하이 쿠데타에 고무되어 4월 28일 리다자오 등 20여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한편 영국에서도 네빌 체임벌린 외상이 5월 9일 하원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난징사건은 사실 코민테른의 지휘하에 조직되고 발동되었다. 그 목적은 열강을 부추겨 장제스를 곤란에 빠뜨리게 하는 데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 사건 때문에 중국인민은 공산당원과 소련의 고문을 신용하지 않게 되었다. 영국 정부로서도 난징사건의 취급에 대해 방침을 바꿀 여지가 있다."

5월 12일 영국 당국은 런던의 소련 통상대표부를 수색하여 문서를 압수하고 대소련 단교를 결의했다. 국민당의 2차 북벌로 베이징이 함락된 후, 장제스는 영국과의 교섭 끝에 해당 사건을 공산당의 폭동으로 규정하고 영국 측에 사과를 표시하며 배상을 약속했다.

4. 정말로 공산당의 짓인가?

장개석비록, 이건일 교수의 모택동 VS 장개석을 비롯하여 민국사관을 채택하여 중화민국의 입장을 옹호하는 책들의 경우에는 공산당의 조직적인 음모가 배후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고 이것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오해이든 간에 공산당의 공격적인 확장과 우파 핍박에 원래 국민당의 주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반혁명, 반동파로 몰려서 숙청의 위기에 놓여 있어 분개하던 우파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까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외의 연구들에서 공산당이 배후에 있음을 확정하는 경우는 잘 보이지 않는다. 장제스와 왕징웨이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배경한 교수는 조직적인 공격이 아니라 북벌 와중에 발생한 유민들의 소행으로 보았으며 이시카와 요시히로의 경우, 난징에서 벌어진 유혈사태에 조직적인 계획이나 명령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다른 연구들도 대개 우발적인 유혈사태이나 그저 배후에 대중의 반서방, 반제감정이 작용했다는 것 정도를 언급할 뿐이다.

반면, 공산당의 결백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사실 배후가 공산당이 아니라 북양군벌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5. 결과

이러한 사태에 가뜩이나 좌파와 공산당의 공세에 수세에 밀려있던 국민당 우파들은 더욱 큰 위기감을 느끼고 공산당원들을 색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장제스 역시 소위 청당을 주장하게 되었다. 물론 좌파와 공산당이 장악한 우한 정부는 부유한 강소성을 점령하고 열강과 협상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장제스를 견제하기 위해 정치적, 군사적 공세를 멈추지 않았고 급기야 4월 1일 장제스를 총사령관직에서 면직시키기에 이른다. 결국 장제스는 우한 정부와 완전히 연을 끊기로 결정, 4.12 상하이 쿠데타를 감행하게 된다. 우한과 장제스의 알력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해당 문서 참조.

6. 참고문헌

7. 관련문서

7.1. 국민혁명


[1] 난징의 정남문 이고 서울로 치면 숭례문 같은 포지션, 후에 중화민국의 수도가 된 뒤 중화문中華門 으로 개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