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나이라흐의 증언(Nayirah testimony)은 1990년 10월 10일 쿠웨이트의 소녀인 나이라흐 알 사바라[1]가 미국 의회 인권위원회에서 한 위증 사건을 지칭한다.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을 하는 명분으로 악용된 사건이다.2. 의회 증언과 영향력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고 난 뒤 미국은 사담 후세인 정부에게 쿠웨이트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 당시 미국 내에서는 전쟁 참전 여론 보다는 반전여론이 강했다. 1990년 11월 중간선거에서 부시 행정부가 패배하면서 기세가 오른 민주당은 부시 행정부의 참전 움직임에 청문회에서 과연 군사적 행동이 옳은가에 대해 추궁하였다. 이때 청문회에 참석하여 미군 투입을 반대한다는 의견을 밝힌 사람 중에는 케네디 정부의 국방부 장관이자 베트남 전쟁 참가 결정의 주역 로버트 맥나마라도 있었다. 이러한 반전 여론을 뒤집은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나이라흐 알 사바라였던 것이다.그녀는 1990년 10월 10일 미국 의회 인권위원회에 나와 다음과 같은 증언을 했다.
위원장님과 위원 여러분, 제 이름은 나이라이고 저는 방금 쿠웨이트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8월 2일에 쿠웨이트에서 평화로운 여름 휴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제 언니가 7월 29일에 아이를 낳았고 저희는 언니와 함께 쿠웨이트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저의 10학년 급우들이 저와 같은 여름방학을 보내지 않았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때로 저는 제가 어른이 되기를, 빨리 자라기를 바라기도 했습니다. 쿠웨이트의 어린이들과 제 나라에 일어난 일들은 제 삶을 영원히 바꿔놓았고, 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쿠웨이트인의 삶을 바꿔놓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는 어린이가 아닙니다.
제 언니는 태어난 지 5일 된 제 조카를 데리고 위험을 피하고자 사막을 건넜습니다. 쿠웨이트에는 아기가 마실 우유가 없습니다. 두 사람이 탄 차는 사막에서 모래에 빠졌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도와주러 온 사람들 덕분에 겨우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쿠웨이트에 남았고 제 나라를 위해 무언가 하고 싶었습니다. 침공 2주 뒤에 저는 역시 도움이 되고자 한 12명의 다른 여성들과 함께 알이다르 병원에 봉사자로 자원했습니다. 제가 자원봉사자 중에서 가장 어렸습니다. 다른 여성들은 스무 살에서 서른 살 사이였습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저는 이라크 군인들이 총을 들고 병원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인큐베이터에서 아기들을 꺼내고, 인큐베이터를 가져가면서 아이들이 차가운 바닥에서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충격적이었습니다. 저는 조산아로 태어났다면 그날 같이 죽었을 수도 있는 제 조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병원을 떠난 뒤에, 친구들과 저는 이라크의 침공을 규탄하는 전단지를 배포하고 다녔지만 이라크인들이 우리를 보면 죽일 수도 있다는 경고를 듣고 그만두었습니다.
이라크인들은 쿠웨이트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했습니다. 슈퍼에서 음식을, 약국에서 약품을, 공장에서 의료품을 빼앗았고, 사람들의 집을 뒤집어엎고는 이웃들과 친구들을 고문했습니다.
저는 이라크인들에게 고문당하고 풀려난 제 친구를 보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는 스물두 살이지만 노인처럼 보였습니다. 이라크인들은 그가 거의 익사할 때까지 그의 머리를 수영장에 밀어넣었습니다. 그들은 그의 손톱을 뽑아냈고 민감하고 사적인 부위에 전기충격을 주었습니다. 살아남은 것이 행운입니다.
이라크 병사가 마을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면, 그들은 주변의 모든 집을 불태우고 잿더미와 돌무더기만 남을 때까지 소방관들이 오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저와 가족들이 쿠웨이트를 빠져나오는 길에 이라크인들은 부시 대통령을 비웃고 저희를 언어적, 신체적으로 학대했습니다. 우리가 떠난 것은 쿠웨이트에서의 삶을 더는 견딜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나라와 정부를 상징하는 모든 것을 숨기거나 불태우거나 파괴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저는 쿠웨이트가 우리의 어머니이고 국왕이 우리의 아버지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이라크인들이 우리에게 총을 쏘기 시작할 때까지 지붕 위에서 외쳤고, 또다시 외칠 것입니다. 저는 제가 열다섯 살이라는 것, 사담 후세인이 파괴하기 전의 쿠웨이트를 기억할 수 있을 만큼 나이들었지만 그것을 재건할 수 있을 만큼 젊다는 것이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이처럼 나이라흐는 공청회에서 당시 진행 중이었던 이라크와 쿠웨이트 간의 전쟁에서 이라크군이 벌인 만행을 고발했다. 소녀는 이라크군이 민간 병원에 난입해 인큐 베이터에서 자고 있는 아기들을 바닥에 던져 죽였다고 전하면서 눈물까지 흘렸다. 소녀의 생생한 증언으로 미국에서는 이라크 전쟁 참전에 대한 여론이 들끓었고, 해당 증언은 티비로 중계가 되어 미국 전역을 뒤흔들었다. ABC nightline과 NBC Nightly News에서 중계한 해당 방송은 무려 3,500만에서 5,300만 사이의 미국인들이 시청했을 정도다. 이 증언을 공화당 주전파들은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는데, 다수의 미국 상원의원과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걸프 전쟁에서 쿠웨이트를 지원해야 한다는 근거로 이 증언을 여러 번 인용됐다. 그 당시 부시 대통령은 5주 동안 이 이야기를 6차례나 거론했다고 한다. 저의 10학년 급우들이 저와 같은 여름방학을 보내지 않았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때로 저는 제가 어른이 되기를, 빨리 자라기를 바라기도 했습니다. 쿠웨이트의 어린이들과 제 나라에 일어난 일들은 제 삶을 영원히 바꿔놓았고, 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쿠웨이트인의 삶을 바꿔놓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는 어린이가 아닙니다.
제 언니는 태어난 지 5일 된 제 조카를 데리고 위험을 피하고자 사막을 건넜습니다. 쿠웨이트에는 아기가 마실 우유가 없습니다. 두 사람이 탄 차는 사막에서 모래에 빠졌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도와주러 온 사람들 덕분에 겨우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쿠웨이트에 남았고 제 나라를 위해 무언가 하고 싶었습니다. 침공 2주 뒤에 저는 역시 도움이 되고자 한 12명의 다른 여성들과 함께 알이다르 병원에 봉사자로 자원했습니다. 제가 자원봉사자 중에서 가장 어렸습니다. 다른 여성들은 스무 살에서 서른 살 사이였습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저는 이라크 군인들이 총을 들고 병원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인큐베이터에서 아기들을 꺼내고, 인큐베이터를 가져가면서 아이들이 차가운 바닥에서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충격적이었습니다. 저는 조산아로 태어났다면 그날 같이 죽었을 수도 있는 제 조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병원을 떠난 뒤에, 친구들과 저는 이라크의 침공을 규탄하는 전단지를 배포하고 다녔지만 이라크인들이 우리를 보면 죽일 수도 있다는 경고를 듣고 그만두었습니다.
이라크인들은 쿠웨이트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했습니다. 슈퍼에서 음식을, 약국에서 약품을, 공장에서 의료품을 빼앗았고, 사람들의 집을 뒤집어엎고는 이웃들과 친구들을 고문했습니다.
저는 이라크인들에게 고문당하고 풀려난 제 친구를 보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는 스물두 살이지만 노인처럼 보였습니다. 이라크인들은 그가 거의 익사할 때까지 그의 머리를 수영장에 밀어넣었습니다. 그들은 그의 손톱을 뽑아냈고 민감하고 사적인 부위에 전기충격을 주었습니다. 살아남은 것이 행운입니다.
이라크 병사가 마을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면, 그들은 주변의 모든 집을 불태우고 잿더미와 돌무더기만 남을 때까지 소방관들이 오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저와 가족들이 쿠웨이트를 빠져나오는 길에 이라크인들은 부시 대통령을 비웃고 저희를 언어적, 신체적으로 학대했습니다. 우리가 떠난 것은 쿠웨이트에서의 삶을 더는 견딜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나라와 정부를 상징하는 모든 것을 숨기거나 불태우거나 파괴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저는 쿠웨이트가 우리의 어머니이고 국왕이 우리의 아버지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이라크인들이 우리에게 총을 쏘기 시작할 때까지 지붕 위에서 외쳤고, 또다시 외칠 것입니다. 저는 제가 열다섯 살이라는 것, 사담 후세인이 파괴하기 전의 쿠웨이트를 기억할 수 있을 만큼 나이들었지만 그것을 재건할 수 있을 만큼 젊다는 것이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또한, 이 증언 이후 당시 병원에서 근무를 했다던 의사 역시도 유엔안보리에서 소녀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했으며, 당시 국제사면위원회도 312명의 아기를 이라크군이 죽였다고 발표를 했다.
나이라흐의 증언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것은 미국이 걸프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됐다. 분명한 것은 이와 같은 증언의 영향을 받아 국제사회 역시 이라크군의 잔악함에 치를 떨게 되며 사담 후세인을 히틀러와 같은 인물로 각인시켰다. 미국 상원은 52 대 47로 이라크 침공을 승인했고, 유엔도 1990년 11월 29일 이라크에 대한 무력사용을 허가하기에 이른다.
3. 실상
걸프전쟁이 미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난 이후 충격적인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것은 미국의 시사잡지 ‘하퍼스 매거진’ 존 맥아더 기자의 집요한 취재에 의해서였다. 존 맥아더 기자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당시 그녀는 미국 거주 중이었다. 그 병원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한 적도 없다"고 폭로했다. 더욱이 그녀는 쿠웨이트 왕족이자 주미 쿠웨이트 대사의 딸이었고, 한 홍보회사가 그녀에게 위증을 교사했다고도 했다. 쿠웨이트 정부가 홍보사를 이용해 반(反)이라크 캠페인을 벌였고, 미국은 이를 명분으로 전쟁 개입을 정당화했다는 결론이다.즉. 이 사건은 쿠웨이트 정부가 미국 홍보회사인 힐앤놀턴이 소녀에게 거짓 증언을 하도록 가르쳤고, 이런 사기극을 미국 언론과 정부에 전달하여 아무런 검증없이 액면 그대로 믿게 만들었던 것이다. 거기다 이 거짓을 꾸민 쿠웨이트 국왕은 거짓말을 조작한 대가로 홍보회사로부터 1,150만 달러를 받았다. 이후 ABC 방송의 존 마틴 기자 또한 엄청난 사실을 보도했다. 이라크의 군대가 쿠웨이트의 병원에서 인큐베이터를 훔쳐 아이들을 죽게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ABC 방송은 나이라흐가 증언한 이라크군에 의해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산부인과 현장을 찾아과 확인했다. 그 결과 나이라흐의 증언이 전혀 사실이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 또한 조사를 통해, 당시 병원에는 나이라흐의 증언과 달리 25~30개의 인큐베이터에 있던 그 어떤 아기들도 꺼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또한 크롤 보고서를 통해 나이라흐가 그 현장에 있지도 않았다는 것이 다 드러났다.
해당 위증 사건은 2003년 조지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전쟁 당시 반전 여론 측에서 여러차례 인용된 바 있다.
[1] 아랍어로는 "나이라툴 사바"(Nayirah al-Ṣabaḥ: نيرة الصباح), 반면 영어로 읽을 때는 어미의 h가 묶음으로 읽혀서 나이라로 읽히곤 한다.